흉내쟁이 꼬마 발레리나
이치카와 사토미 그림, 페트리샤 리 고흐 글, 김경미 옮김 / 현암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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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자아이라면 발레를 배우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우리집 작은 아이도 다섯 살 때부터 발레를 배우게 해달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바라는대로 다 해주긴 어렵기 때문에 적당히 넘겨서 이젠 다른 것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 그런 아이에게 이 그림책은 잊고 있었던 생각을 떠오르게 해주면서 간접적으로 욕구를 충족시켜주었다.

이 그림책은 '꼬마 발레리나 타냐' 시리즈인데 '예술가를 꿈꾸는 아이를 위한'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일러스트레이션은 <아프리카에도 곰이 있을까요>를 그린 아치카와 사토미가 담당했다. 표지에 있는 커다란 타조의 깃털이 살아있는 것 같다. 수채물감의 색감이 전체적으로 맑고 선명하며 하얀 여백을 많이 두고 가는 선으로 네모 테두리를 한 그림 속 광경이 아이들 마음처럼 깨끗하다. 그리고 발레의 동작을 표현하는 그림이 많아서 인물의 동작이 살아있는 것 같다.

낯선 발레전문용어가 좀 나오지만 그것에 촛점을 둘 필요 없이 동작을 따라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타냐는 매력 만점의 아이다. 뭔가에 몰두하면 종일 그걸 생각하며 움직이는 아이다. 발레교실에 가서도 한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몸을 움직인다. 하지만 멋진 동작이 잘 되진 않고 어느 날 새로 들어온 에밀리의 유연한 동작을 보고 은근히 부러워한다. 제일 잘 하는 아이와 제일 안 되는 아이 사이에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둘은 각자 자기 할 일만 한다.

동물원 옆을 걷고 있을 때부터 이 두사람 사이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에밀리는 발레라는 배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곧이곧대로의 예술을 하지만, 타냐는 그 방식이 좀 다르다. 자기 식으로 익히는 법을 안다.  타냐에게는, 주떼가 아니라 타조춤, 에퀼리브르가 아니라 홍학춤(희령인 이 춤이 가장 인상적인가 보다)이다.

어느새 에밀리도 이 놀이에 빠져든다. 에밀리가 펭귄춤을 추면 이번에 타냐가 표범춤을, 에밀리가 영양춤을, 둘이서 함께 기린춤을 춘다. 표범춤과 영양춤을 추는 장면은 책장이 꽉 차게 가로로 그려져있다. 멋진 그림이다. 활처럼 굽은 선을 그리며 동작이 이어지는데 타냐의 춤은 날렵하고 경쾌하면서 웃음을 자아낸다. 반면 에밀리의 춤은 우아하고 기품있다. 둘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 썩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타냐는 에밀리에게 도움을 받고 에밀리도 타냐에게 즐거움을 얻는다. 둘이서 펼치는 빠드되(2인조 무용)는 성공이다. 타냐의 손발동작이 어딘지 우스워서 재미있다.

아이들이 뭐든 되고 싶어할 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하는 아이가 아니더라도 이 그림책을 같이 보면서 뭐든 되려면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친구와 같이 도와가며 뭐든 하면 우정까지 얻을 수 있다. 아이에게 '네가 잘 못했던 것을 도와주어 잘 할 수 있게 해 준 사람은 누굴까?' 하고 물어보면 여러가지 대답이 나올 것 같다. 희령인 '엄마'라고 대답하면서 '말을 잘 하게 해주었단다'. 아이야, "넌 누구를 도와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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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5-01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책에 요즘 관심이 가네요...이 책은 딸이면 함 읽혀 보려구요..ㅎㅎㅎ
아들임 좋을텐데...압력이 엄청나서...ㅎㅎㅎ

프레이야 2004-05-01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아들 땜에 은근한 부담 가지시나봐요. 첫아이라 더 그렇지요?
최근에 나온 연구발표에 의하면 공룡의 멸망 이유가 암수 성비의 불균형이었다는 설이 있대요.
여기까진 아니어도 요즘 학급구성원도 남자아이들이 좀더 많죠.
강릉댁님, 딸, 아들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뜻대로 되는 게 아니랍니다.^^ 건강한 아이!!
 
숨쉬는 항아리 - 솔거나라 전통문화 그림책 6 전통문화 그림책 솔거나라 2
정병락 글, 박완숙 그림 / 보림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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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의 전통문화그림책 시리즈 '솔거나라'는 여러 권 보았고, 여러 번 보았지만, 오늘 밤 자기 전 희령이가 책꽂이에서 뽑아들고 온 책이 의외로 <숨쉬는 항아리>였다. <무지개 물고기>를 며칠 째 보더니 오늘은 우리그림책으로 마음이 갔던 모양이다. 자연스럽게 나는 희령이의 선택에 찬사(?)를 보내며 오랜만에 이 그림책을 보았다.

표지에는 장독대에 키순서대로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는 항아리들의 재미난 표정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그런데 여태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여 참 신기했다. 제일 뒷줄에 있는 커다란 항아리에 버선 한 짝이 거꾸로 붙어있는 것이다. 뒷장으로 가서도 두 번 더 그 그림이 나온다. 버선을 장독대 항아리에 거꾸로 붙여놓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지 궁금하다. 아니면 무슨 무늬나 그림자일까?

누렇고 붉으스레한 흙을 우리에게 이로운 점이 많은 친근한 친구처럼 소개하는 글로 항아리가 숨을 쉬는 비결을 들려준다. 군데군데 들춰보기 식의 낱장이 숨어있어 아이들이 좋아하는 커튼놀이를 하는 것 같다. 흙으로 정성껏 빚고 손가락으로 쓰윽쓰윽 무늬까지 그려넣고 나면 뜨거운 가마 속에 들어앉아있는 항아리들을 찾아볼 수 있다. 모양도 크기도 그 용도에 따라 가지가지이지만 그 느낌이나 색깔은 다르지 않다. 책의 제일 뒷장에 가면 흙으로 빚은 그릇들을 옹기라 하며 옹기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는 것을 잘 알아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숨쉬는 항아리>의 주인공은 혼자 숨어 졸던 '작은 항아리'이다. 되똥되똥 귀엽고 순해 보이는 항아리는 집구경을 하다가 알록달록 색깔도 모양도 예쁜 다른 그릇들에게 핀잔을 듣고 슬퍼진다. 하지만 작은항아리가 자신감을 얻게 되는 곳은 다름아닌, 장독대의 옹기가족에게서이다. 옹기가족이라는 내맘대로의 상상을 하고보니, 그 버선이 그려져있던 큰 항아리는 엄마항아리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너무한 비약일까.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뭐라 대답할지, 내가 읽어주는 걸 듣다가 잠이 들어버린 아이에게 내일 물어봐야겠다.

김칫독, 젓동이, 고추장단지... 모두 하는 일은 조금씩 다르지만 중요한 건 모두 몸으로 숨을 쉬어야한다는 것이다. 절대 잊지마, 라며 작은항아리를 격려해 준다. 짭잘한 소금과 메주를 담고 숯과 붉은고추를 띄워 된장을 만드는 게 작은항아리가 할 일이다. 까맣고 못생긴 작은항아리는 이 일을 멋지게 해내고 흐뭇한 웃음을 입가에 가득 머금고 눈을 지긋이 감고 있는 얼굴표정으로 그려진다. 성큼 커버린 아이의 얼굴같이 대견하다.

이야기를 내세워 들려주지만, 우리 것에 대한 정보와 지식에 촛점을 맞추려면 초등 저학년(3학년까지도 괜찮을 듯)까지 유용하게 볼 수 있겠다. 뒷장에 나오는 '엄마랑아빠랑' 꼭지에서 다른 읽을 거리랑 연계하여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을 확장시켜줄 수 있다. 옹기가 만들어지는 과정, 옹기가 통기성이 좋은 이유, 환경친화적인 옹기, 옹기의 종류와 다양한 용도, 옹기를 찾아볼 수 있는 풍속화, 같은 것으로 정보를 모아보면 우리 것에 깃든 지혜와 순박함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겨우내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장독대에 옹기종기 키순서대로 앉아 인내의 시간을 보냈을 항아리들이 봄햇살에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니, 겨울에 갔던 영랑생가의 별볼일 없었던 장독대가 떠오른다. 외할머니가 된장을 한 숟가락씩 떠오곤 하셨던 그 항아리도 그립다. 외할머니까 보글보글 끓여주시던 구수한 된장찌개가 더 그리운건지. 그러고보니 흙이랑 옹기랑 된장이랑 색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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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26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학년 2학기 교과과정과 연계해서 봐도 좋을 거 같네요. 솔거나라 시리즈는 괜찮다 싶었지만 한 권 한 권 꼼꼼히 보진 않았는데 역시 봐야 겠단 생각이 듭니다. 상쾌한 하루!

2004-04-03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날아가기 2004-05-09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애들은 솔거나라 시리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ㅜㅜ 떡 좋아하는 작은 애가 떡잔치를 줄기차게 보는 정도이지요. 책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좀 더 자라면 좋아할지...

프레이야 2004-05-09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거나라 시리즈는 사실 지식 그림책에 가까우니까 그런 면이 있을거에요. 님의 아이들이 몇살인지요? 천천히 흥미를 가지도록 유도하는게 좋겠지요.

방긋 2005-03-27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늦은 답변인 것 같은데... 버선 거꾸로 붙여 놓은 거요!
장맛이 변하지 말라고 버선을 거꾸로 붙이는 거랍니다. ^^
버선은 늘 발에 신던 거잖아요. 그런데 거꾸로 있는 모습을 보곤, 장맛을 변하게 하는 나쁜 귀신들이 놀라서 도망간다고 믿었대요. 전주박물관에 있는 장독대에도 한지에 그린 버선이 거꾸로 붙어있답니다.
 
똑딱- 똑딱! Wonderwise (그린북 원더와이즈) 1
제임스 덴버 글 그림, 이연수 옮김 / 그린북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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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를 하나 내어 보면서 아이와 이 책을 시작하면 어떨까.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것이에요. 우리와 항상 같이 살아가고 아주 옛날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영원히 있을 거에요.

아이는 아주 곤혹스러워하면서도 뭔가 대답을 끌어내려고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린다. 어쩌면 어렵기만 한 '시간'이라는 개념을 <똑딱-똑딱>은 손에 잡힐듯이, 아이의 경험과 정서를 적절히 이용하여 느끼게 한다.

시계바늘 위에 각각 올라 서서 시간의 여행을 떠나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를 따라, 심장에 손을 얹고 콩딱콩딱 뛰는 심장박동소리를 듣는 것으로 이 여행은 시작된다. 심장이 한번 뛸 때마다 1초정도의 시간이 지나지만, 심장은 누구에게나 늘 같은 간격으로 뛰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계'라는 물건의 필요성으로 유도한다. 시계는 아이들이 주변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시간'이 아닐까.

재채기를 하는 데 걸리는 시간 1초에서 시작하여 15초면 파리가 날개를 500번 퍼덕일 수 있다는 것까지 재미있는 사례들을 보여주며 흥미를 끈다.  가장 작은 시간 단위인 '초'가 60번 모여 1분,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잴 때는 '시간'이라는 말을 쓴다고 하면서도 그 추상적인 개념을 모두 아이들이 일상에서 하는 행위들과 좀더 관심을 확장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1시간이 24번 모여 하루가 되는데, 하루에 우리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 이 '하루'들은 달력에 일곱개의 요일로 나타나며 날마다 다른 일을 한다. 똑같아 보이는 일을 할 때조차도 우리는 다른 일을 한다. 여기서 1주일, 한 달, 12달이 모여 일 년... 이 사이에도 우리의 심장은 콩딱콩딱, 시계는 똑딱똑딱...

1년이란 시간을 커다란 주머니에 담아놓은 것들은 1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모여이루어지는 것인지를 역으로 보여준다. '초'라는 미세한 알갱이에서 시작하여 '달'이라는 12개의 비치볼까지, 추상적인 것을 손으로 잡고 놀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1년이라는 아주 커다란 공을 네모 상자에 넣어 100개가 되게 쌓으면 '세기'라 한다.  1년을 4계절로 나눠 보여주는 그림에서, 시간은 쉼없이 흘러가지만 이렇게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는, 생명과 자연의 순환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나눠봄은 어떨까.

아이들은 자신의 아주 어릴 적 사진보기를 즐거워한다. 기저귀를 하고 젖병을 물고 있는 모습의 아기를 인형을 데리고 놀고 그림을 그리고 스스로 책도 보는 현재의 모습에 비춰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는 걸 느낌으로 알기도 한다. 흔히 어른들이 하는 말, '애들이 저렇게 컸으니, 우리가 어떻게 안 늙겠나.'

시간은 과거이기도 하고 현재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과거도 미래도 좁은 의미에서 나아가 꽤 연장된 의미에서의 과거와 미래를 이야기하기에는 7세 정도에서는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6-7세의 눈높이에서 지나간 것과 일어날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면 시간의 세 얼굴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똑딱똑딱>은 모두 13권의 WONDERWISE 시리즈 중 첫번째 과학그림책이다. 그럼에도 시간을 물리적으로만 접근하지 않고 '아직까지 생기지 않은 시간'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을 불어넣어주는 것으로 유도하여 끝내는 점이 마음에 든다. 상상력 부재의 과학은 삭막함과 함께 그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스티븐 호킹이나 아인슈타인의 꿈을 가지는 미래의 아이들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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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기 2004-05-09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좋다는 원더와이즈 시리즈가 우리 애들한테는 안 먹히네요. 과학에 별 흥미없는 아이에게 어떻게 해야할지..... 작은 실험을 하면 좋을 듯한데 적절한 안내서는 없을까요?
 
플로라의 멋진 집 - 행복한 그림책 읽기 8
데비 글리오리 글 그림, 양희진 옮김 / 계림닷컴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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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봄, 하면 떠오는 걸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제일 먼저 꺼내는 게 꽃이다. 다음은 씨앗이다. 다른 계절이라고 꽃이 피지 않는 것도 아닌데 아이들은 샛노란 개나리와 진분홍 진달래를 마치 정답처럼 꺼내놓는다. 씨앗을 생각하는 아이는 좀더 생각이 깊은 아이인 경우다. 

<플로라의 멋진 집>의 원제는 'FLORA'S FLOWERS'이다. 이걸 몇번 혀를 굴리며 발음해보면 데구르르 구르는 공처첨 가볍고 환한 느낌이 든다. 우리말 제목은 깜찍한 플로라가 키워낸 꽃의 진짜 모습에 촛점을 맞추어 옮겨 달았다. 아직은 추상적인 개념이 확실치 않을 6-7세 아이들을 배려하여 괜찮은 옮김이라고 생각된다.

겉표지를 보면 사계절이 모두 보인다. 봄, 여름의 꽃과 단풍잎, 플로라가 목에 두른 목도리, 그리고 시원한 하늘 아래 풀밭에 빨간 화분이 있고 그 안에 세모꼴의 한 귀퉁이가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다. 토끼로 보이는 플로라는 머리에 물방울무늬 리본의 머리띠를 하고 손등에 무당벌레 한 마리를 올려놓고 씩 웃으며 보고 있다. 해바라기의 이파리들이 춤을 추고 있는데, 이건 뒤에도 나오지만, 이 그림책에서 가장 동적인 느낌을 준다.

"봄이에요", "플로라네 식구는 아주 바쁘답니다." 로 시작하는 <플로라의 멋진 집>은 꽃잔치에 온 것 같이 마음을 화사하게 한다. 각자 자신의 맡은 일을 하며 씨앗을 심고 가꾸고 거두어 먹으며 작은 것으로 충만해 하고 여유롭게 사는, 느긋한 목가의 향기가 난다. 하얀색 여백을 넓게 두고 온기있는 색감으로 단순한 선을 살려 그린 그림이 한 몫을 더 한다. 

플로라의 언니들은 커다란 아마릴리스의 알뿌리 한 개와 분홍색 튤립의 알뿌리 스무 개를 심는다. 오빠들은 상추씨와 해바라기 씨를 뿌리고 무순씨는 물수건 위에 뿌린다. 귀염둥이 플로라는 아빠가 건네주는 작은 화분에 조그만 벽돌을 심으며 포부도 당당하게, 선포한다.

"나는 집을 기를 거야." 

그리곤 벽돌이 잘 자라고 있냐고 가끔씩 묻는 언니 오빠에게 벽돌이 아니라 집이라고 열번이고 말한다. 튤립과 아마릴리스는 무럭무럭 자라 온 책장 가득히 꽃잔치가 열렸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생소한 서양꽃이지만 충분히 예쁘다고 느낄 수 있게 풍성한 느낌을 준다. 분홍을 주조로 꽃잎을 살리고 꽃술도 자세히 그려놓았다.

하지만 플로라가 기를 거라는 집은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다. 겨울이 오고 밖에 내놓은 화분에도 눈이 담긴다. 그 뒤에는 아까부터 화분을 점찍어두고 있는 작은새 한마리가 보인다. 나뭇가지를 물어다가 갖다놓고 있다. 봄이 다시 오고, 플로라의 화분에서는 집이 피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집이다. 그 속에 하얗고 둥근 알도 두 개 보인다. 플로라의 집은 소중한 목숨을 두 개씩이나 품고 있다. 꽃이 그러한 것처럼.

씨앗이라는 작은 것 속에 들어있는 커다란 꿈을 아이와 이야기 해 보면 어떨까. 아이의 눈높이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다소 황당한 것까지 들어주어도 좋겠다.  생각이 좀 깊은 아이라면,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니?, 라는 물음으로  이야기를 꺼내, 그럼 지금 어떤 씨앗을 심을까?,로 유도해보는 것도 좋겠다. 친구들과 잘 지내는 씨앗, 아름다운 생각 씨앗, 예쁜 말 하는 씨앗, 책 잘 읽는 씨앗, 잘 참는 씨앗, 음식 골고루 잘 먹는 씨앗......

벽돌이라는 씨앗을 심어 플로라가 키워낸 멋진 집처럼 다소 엉뚱한 발상에서 진지한 생각까지 할 수 있게 유도하면 마냥 어리다고만 생각하기 쉬운 아이들의 생각의 키가 의외로 작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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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는 친구가 필요해 - 꿈꾸는 나무 10
멕 루터포드 그림, 존 스팀슨 글, 김현진 옮김 / 삼성출판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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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제 일곱 살이 된 작은 딸아이에게 요즘 고민이 생겼다. 아니,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고민이기도 하다.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의 반 친구 8명 중 6명이 남자아이이고 나머지는 여자아이인데, 유독 또래의 여자친구랑 노는 걸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하는 우리 딸은 유치원에서의 생활이 그리 즐겁지 않은 것 같다. 남자아이들과 한마디로 코드가 맞지 않은 것 같다. 하나 있는 여자친구도 성격이 좀 다른 것 같다.

희령이의 성격이 리더십이 아주 강하고 자기 식으로 친구들을 끌어가려고 하는 성향이 많아, 다른 친구들이 그렇게 잘 따라주지 않으면 속상해하는 형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아도 이사 온 이후 아직 친한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있는데 반나절을 보내고 오는 유치원에서도 서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랑 실컷 놀고 오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조금 변화를 줘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오스카는 친구가 필요해>를 어제 잠자기 전 함께 읽었다. 딸에게 지금 아주 적절한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새로 이사 온 저 너머의 친구 올리랑 코드가 맞지 않아 화를 내는 곰, 오스카는 딸아이를 꼭 닮았다. 그렇게 화를 내고 있는 오스카에게 어느날 엄마 곰이 뭔가 이야기를 한다. 오스카는 엄마 곰의 말을 듣지 않는 척했다. 하지만 잠들기 전에 엄마 곰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맑고 귀여운 눈망울을 굴리며 생각에 빠진 오스카의 입가에 머금은 미소가 뭔가 대단한 결심을 한 것 같다.

다음날 오스카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오늘 뭘 하면서 놀고 싶니?' 친구 올리에게 오스카는 이렇게 먼저 물어본다. 그리곤 참을성 있게 대답을 기다린다. 큰 호수 근처의 집에서 전에 살았던 올리는 처음부터 수영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오스카와 함께 물장구를 치며 떠들고 논 올리는 이제야, 오스카가 전에 무조건 하자고 했던 놀이들을 다시 해 보고 싶어한다. 오스카가 권하는 놀이에 겁이 났던 올리는 해 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오스카는 자기가 좋아하는 놀이 중 숨바꼭질만은 참고 기다리기로 한다. 올리가 하고 싶어할 때까지 말이다. 이제, 멋진 친구 올리를 둔 오스카는 산에서 가장 행복한 곰이다.

이 그림책은 정감있고 살아있는 곰의 표정을 보는 재미가 있다. 그 표정은 마치 아이들이 짓는 표정처럼 시시각각 숨기지 못하고 변한다. 좋으면 입꼬리가 초승달처럼 올라가며 눈이 생글거리고, 화가 나면 눈꼬리가 올라가며 찌뿌리고 심술을 부린다. 휘청거리는 나뭇가지 위에서 어정쩡한 포즈를 하고 겁먹은 표정으로 미간을 모으고 있는 올리와, 두 다리로 떡하니 버티고 서서 양손까지 머리 위로 들고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있는 오스카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아기 곰의 털이 색깔은 다르지만 보송보송 한 게 만지면 보드라운 느낌이 전해올 것 같다.

아이는 친한 친구가 된 두 마리의 아기 곰을 보며, <토끼의 결혼식>에 나오는 검은 토끼와 흰 토끼를 들먹인다. 색깔이 다른 건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아는 아이를 꼭 안아 주었다. 아이도 이제 자기 방식으로만 친구를 대해서는 좋은 친구를 만나기 어려울 거라는 걸 알아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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