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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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문호 '이탈로 칼비노'의 <<우리의 선조들>>3부작에 속한 <<나무위의 남작>>은 경쾌하고 즐거운 상상력이 발휘된 글이다. 반면 가벼워 보이는 글 가운데 인간과 사회의 갈등을 생각하며 지적하는 작가의 글 속에서 이탈리아 문학의 거장인 '이탈로 칼비노'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다. 나무위라는 한정된 공간 가운데서 세상을 바라보며 영향을 미치는 '남작 코지모'의 모습을 통해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무위의 남작>>의 추천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나무 위'그곳에 코지모가 있었다.
열두 살에 불과한 코지모가 '나무 위'로 도망간것은 식사시간에 벌어진 권위적인 아버지의 달팽이 요리 때문이다. 먹느냐 마느냐를 놓고 티격태격 하던 코지모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하여 평소 자주 올라가던 즐거웠던 '나무 위'로 올라가 버린다. 한정 된 그리고 불안한 '나무 위'라는 공간은 불편하고 좁아보이는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으나 그곳은 주인공 '코지모'에게 있어선 안식처이자 도피처이며 기반이었다.  사고의 틀을 넓히면 전혀 다른 것을 볼 수가 있다. 만일 사고의 틀에 갇힌다면 우리 또한 코지모의 아버지처럼 조만간 금방 나무에서 내려올 수 밖에 없을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만큼 제한되고 불편한 공간이라는 인식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생각을 편협하게 만든다. 반면 코지모는 나무위에서 모든것을 이루어 낸다. 자연을 느끼고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코지모의 반항은 가족들로 대변되는 이들의 혐오에 있다. 새로운 관점을 얻기 위한 코지모의 행위에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부분을 일부 포기하였지만 '조망'과 새로운 생각을 얻게된다.
'코지모'는 나무 위에서 공부한다. 그리고 세상과 소통한다. 사람들을 선동하기도 하며 사랑도 나눈다. 그의 독특하고 고집스러운 일생의 삶은 '나무 위'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한정된 공간이라는 수식은 그의 삶에서 해방된 공간으로 바뀌어 진다. 코지모의 삶은 그가 죽고 나서 새겨진 비석 가운데 요약되어진다. 그는 나무 위에서 살았고 땅을 사랑했으며 하늘로 올라갔다.
자유분방함 가운데서 살아간 그의 삶은 오늘날 지식인들 혹은 선구자들이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해야할 일들을 보여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계몽주의' 18세기를 노래하다.
17세기와 18세기의 유럽과 신세계를 휩쓴 사회 진보적, 지적 사상운동의 흐름을 계몽주의라고 말한다. 이성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보편적 원리와 법칙을 찾아내도록 도와줄 수 있는 기준이 된 계몽주의는 코지모가 좋아한 '이성'이 높이 자리매김하며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전통과 관습 그리고 보수적 사고체계와의 안녕을 고하는 흐름을 보여주던 계몽주의는 가치와 이성을 중시하는 사고관으로서 코지모가 세상을 바라보며 사고하는 가운데서 등장하는 사회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나무위의 남작>>에 등장하는 코지모는 작가 '이탈로 칼비노'가 말하는 인물 가운데서 이상적인 형태의 인물로 보인다. 그는 낡은 것과 부당한것에 굴하지 아니하며 스스로의 판단과 노력이라는 '이성'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야기 한다. 비록 '나무 위'라는 공간 가운데에 자신의 몸을 두지만 '이성'은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며 시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닿아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연구하며 공부하는 가운데서 지식의 장을 열어가는 가운데서 '진리'에 가까운 '이성' 획득을 이루고 그 '이성'을 가지고 세상에 영향을 미친 코지모의 삶은 작가 자신의 모습이자 현대인들 그리고 앞장서야 할 이들에 대한 이상적인 형태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유쾌한 상상력과 즐거움을 가지고 우리는 작가의 꿈을 볼수 있었다. 이 꿈이 현실 가운데 어떻게 적용될지는 모르나 하나의 방법과 나아갈길을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책의 가치는 더욱 드높아 진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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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쪼가리 자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1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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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의 단순한 묘사에서 발전하여 인생의 내면적 진리를 발견하려는 신사실주의로 시작한 '이탈로 칼비노'의 글은 '우리의 선조들'을 통하여 우화적이며 동화적 인 가운데서 현실을 바라보고 문제점을 지적하며 이야기 한다. <<반쪼가리 자작>>은 '이탈로 칼비노'의 글의 변화의 기로에서 쓰여진 3부작 시리즈중 하나이다. 이탈로 칼비노는 <<반쪼가리 자작>>속 주인공의 시선으로 무겁고 어려운 주제를 가볍게 그렇지만 결코 해답은 쉽게 내놓지 않는 글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조망한다.
<<반쪼가리 자작>>의 추천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전쟁'이 낳은 '반쪽'
작품속 등장인물의 핵심은 역시 '메다르도 자작'이다. 전쟁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던 그가 종교전쟁
에 참가했다는 점부터 불안하더니 적의 포병 중대 앞에서 아니다 다를까 대포로부터 직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몸이 두 동강 난다. 현실에서라면 즉사 그 자체이겠지만 '이탈로 칼비노'에게 자작의 포격 사건은 또 다른 이야기 전개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의사들은 죽어가는 자작을 살려내고 무려 반쪽이라는 형태로 살려낸뒤 모두 기뻐한다. 순진하고 어린아이 같던 자작은 피와 살육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인간의 이기 가운데서 '반쪽'이라는 형태로 살아난다.
둘째, '선'과 '악'
되살아난 자작이 돌아왔을때 사람들은 고통에 신음한다. 그는 사악함이라는 명칭이 딱 어울리는 인물이 되어 돌아왔다. 고향 마을에서 자작은 방화, 살인, 사형을 통해 사람들에게 공포를 선사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상황이 될 무렵 '이탈로 칼비노'는 악한 '메드르도 자작'의 나머지 반쪽을 등장 시킨다. '악'과 반대되는 '선'한 '메드르도 자작'의 등장은 이분법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선'과 '악'의 형태 가운데서 어느 한쪽도 택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살아가며 괴로워한다. '메다르도 자작'의 '선''악'의 반쪽의 대면은 우리 자신의 내면의 충돌이며 마주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속 캐릭터들과 집단들 또한 이러한 이분법적인 인간의 모습을 비교하여 보여주며 이들 모두는 불안정한 모습으로 동화같은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만일 누군가가 당신은 착한 사람입니까 나쁜 사람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누가 정의의 편이고 누가 악당일까? 선악의 기준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한다면 이 질문들은 대답할 수 없는 내용임을 우리는 알 것이다. 반쪼가리 자작이 결투 후 온전한 모습이 되어 다시 하나가 되어 사람들을 잘 이끌어 나간다는 동화의 해피엔딩을 바라보며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로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고 이 모습이야 말로 완전함으로 거듭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듯 싶다. <<반쪼가리 자작>> 속 등장인물들은 환상 가운데 등장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들이 당하는 고통과 모순적 삶은 우리 인간들의 '인간적인' 부분일 것이다. 분열되어버린 자아를 하나로 맞추려고 노력하며 한쪽만을 택하려는 우리들의 모습을 재미있게 그리고 위트있게 풍자해낸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의 글에서 현대인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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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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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심리를 소재로 한 '페터 한트케'의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분명 흥미있는 글
이라고 생각한다. 문학과 언어를 동일선상에 놓고 생각하는 작가의 사고 구조대로 주인공 '요제프
블로흐'의 심상을 언어로 바꿔서 전개되는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독자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 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책이 표현하는 바는 알겠으나 내용은 소동스럽다. 이러한
일련의 소동과 사건들 그리고 대화는 책의 표지만큼이나 독특한 불안과 공포에 기인하고 이를 표현한 작가의 솜씨라는 점을 알게 된다면 우리 모두 수긍할 수 밖에 없지 않을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의 추천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첫째, '패널티 킥'과 '골키퍼'
주인공 '블로흐'는 전직 축구선수이다. 포지션은 다름아닌 최후의 보루라고도 불리우는 골키퍼이다. 누구보다도 담대하며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준다고 평가받는 '골키퍼'는 수비수들과 함께하며 게임을 책임지며 승리를 지켜나가는 존재이다. 수비 커뮤니케이션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는 '골키퍼'가 경기 중 유일하게 홀로 떨어질때가 존재한다. 그 순간은 바로 '페널티킥'의 순간이다.
모두와 함께하는 혹은 다른이들과 함께하는 위치에서 '페널티킥'의 순간 '골키퍼'는 골대 가운데 홀로 모든 것을 책임지는 위치에서 싸워야 한다. '누구의 도움'도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소외된 상태 이 상태의 '골키퍼'는 불안, 흥분, 공포, 절망을 느끼게 된다. 독일인들은 축구를 사랑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축구란 공동체의 힘을 느끼며 폭발 시킬수 있는 소통의 창구이다. 그러한 소통의 창구 안에서도 소외되는 순간이 나타나니 참으로 아이러니칼 하다. '골키퍼'의 불안이 정점에 이르는 휘슬을 부는 순간 골키퍼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반응을 한다. 그 반응의 선택이 올바를 수도 틀릴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골키퍼의 선택은 '불안'이라는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인공 '블로흐'의 불안 또한 '골키퍼'의 불안과도 같다. 그는 휘슬이 울리는것과 같이 자신을 쳐다보는 현장감독의 눈빛을 보고 '지례짐작하여 원래의 포지션으로부터 벗어난다. 벗어남을 시작으로 우리는 작품 내내 그의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그 감정은 바로 '불안'이라는 감정이다.
둘째, '불안'이라는 '감정'
주인공 '블로흐'의 대표적인 감정은 '불안'이다. 주인공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 그리고 주변의 상황은 '불안'을 더욱 고조시키며 그릇된 관계를 만들어 낸다. '지례짐작'을 통해 일을 그만둔 주인공의 모습에서 '불안'에 놓여졌던 사람들의 행동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의 불안은 직장을 그만둔 시점이 아닌 그 이전에 이미 그를 지배하고 있었던듯 싶다. 그 고점에서 그가 '일'을 그만둔것이리라. '일'과 '질서'그리고 '소통'과 '단절'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것이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속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는 '불안'한 감정처럼 돌발적이며 침착하지 못하다. 이는 글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언어의 생명력에 주인공의 감정을 넣은 작가의 솜씨이자 작품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질서'속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일'을 하면서도 '불안'이라는 감정 속에서 돌발적 상황을 맞이하는것에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간다. 골을 먹고 허탈해 하는 것처럼 작품 속 주인공을 보며 허탈해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불안'에 눌리워진 또 다른 우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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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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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소련연방 체제가운데서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나 추방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체제의 이면 속에 가려진 어두운면을 실제의 경험에서 담담하게 기술한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경험 가운데서 쓰여졌다는 말처럼 사실감이 넘치며 '삶'과 '죽음', '약자'와 '강자', '이념'과 '사상'의 비교와 대립등이 생동감있게 나타난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작가자신이기도 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수용소 수감일 중 하루를 이야기 한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기에 그 하루가 가지는 특별함은 특별한 날보다 더 생동감있게 다가오며 수용소의 하루 가운데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인간의 권리' 그리고 '악행에 대한 고발'의 소재이기도 하다.
화려하고 웅장하며 강한 권력일 수록 그 뒷면에는 소외받고 학대받는 고통과 고난 속 인간들이 존재한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고발하는 수용소의 하루 또한 한때 세계를 양분한 이념과 사상의 주체인 이들에 대하여 '고발'하고 있다. 비록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자신은 이 작품으로 인하여 정치적 논란에 휩싸여 국외망명을 하게 되었지만 작품 속 '고발'과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작품성만으로도 노벨 문학상에 올라갈 수 있는 문학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읽는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애' 가운데서 등장하는 '삶'
'이반 데니소비치'가 겪는 수용소의 하루를 읽으면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정치적인 색을 떠나 '인간애적' 부분이다. 강제노동수용소라는 곳은 정치적인 이유로 배제된 이들이 모여든 곳이다. 그곳에는 다양한 이유로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하지만 이 책이 문학작품으로서 고발의 의미만을 강조할 경우 작품은 체제비판과 이념대립의 도구로 사용될 우려가 있다. 작품속 중요한 또 다른 부분은 '고발'외에도 가혹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약자들의 삶이다. 이들 약자들의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슈호프'의 등장은 분명 정치적 고발 요소보다는 '약자'에 대한 '동정'과 '사랑'을 불러 일으키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둘째, '화려함' 속에 숨겨진 이면에 대한 '고발'
유토피아, 모두가 잘 사는 세상, 평등사회 실천, 행복 추구권 등 오늘날 사회를 살아가며 자주 듣는 구호들이다. 모든 이들이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과거 수십 수백 년전에도 이미 등장한 이야기이다. 종교가 시작되기 이전 부터 이러한 달콤한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그리고 계급이 실현된 시점부터 이미 이러한 달콤한 용어들은 다수를 지배하는 이들의 효과적인 선전 수단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효과적이며 달콤한 유혹으로부터 헤어나오질 못하며 자신과 가족 이웃의 행복에 도취되어 왜곡된 현실을 받아들이며 부당한 것에 눈을 감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 이면에는 우리가 차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한숨 그리고 슬픔이 자리하고 있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다수의 행복과 권력에 위배된다는 즉 체제에 반한다는 미명아래 가해지는 제재를 통하여 이뤄진다. 수용소의 하루에 등장하는 이들 또한 이러한 '인간 사회'의 또다른 이면이며 또 다른 사회를 묘사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 우리가 알면서도 외면한 그곳을 고발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외면하고 눈감고 있는 이들에 대한 그리고 알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경종이다. 비록 작품이 지칭하는 체제속 국가는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지만 우리의 주변에는 또 다른 수용소들이 형태와 모양만 달리하여 사람들을
배제하고 있을 것이다. 작품 속 키워드로 '고발'을 지칭하는 것은 '고발'을 통하여 현실을 세상에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파급력과 역할에 감명 받았기에 글을 써본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수용소의 하루는 사실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하루이다. 그 핍박과 고난 그리고 다양한 인물들의 대립과 갈등은 고단한 노동처럼 힘들고 지친 하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나타난 글귀처럼 거의 행복한 하루라고 말할 수 있는 하루였다. 수용소의 하루하루는 항상 반복되며 큰 사건 사고 없이 반복되는 삶이다.
이 삶 속에서 작은 것에 만족하며 희망을 가진 '슈호프'가 풀려난 것은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분명 '삶'은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며 '보다 좋은 삶'이란 희망을 가지고 감사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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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풍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
장 지오노 지음, 박인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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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 출신인 '장 지오노'는 활동시절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였다. 그는 어릴적 그리스의 고전 문학 작품을 접하였으며 작품의 기본을 이루는 토대를 얻어낸다. '장 지오노'의 작품은 전기와 후기로 나뉘게 되는데 자연 친화적인 삶을 기반으로 한 전기와 양차대전 이후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비열한 인간들에 대한 현실적 작품들이다. <<폴란드의 풍차>>는 '장 지오노'의 후기 작품에 해당하며 작품 속에서는 '운명'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작품 속 코스트 가문의 비극적 모습을 묘사한다. 그리스의 비극 작품의 특징인 '운명'과 인간의 거침없는 도전과 항거하는 '영웅'의 모습 그리고 '운명' 가운데서 아무런 색채 조차도 가지지 못한 인물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폴란드의 풍차>>는 분명 그리스 문학과는 다른 또다른 '운명에 맞서는 인간>>을 주제로한 생명력 넘치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폴란드의 풍차>>를 즐겨볼 수 있는 두가지 키워드를 꼽으라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운명'이라는 이름의 절대적인 힘
화자가 전하는 '폴란드의 풍차'의 영지 주인인 코스트 가계의 주인공들의 죽음은 우리가 보기에
어이없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공감이 가는 죽음들이다. 분명 그들의 죽음은 낚싯바늘에 찔려죽거나, 사고사, 열차사고사, 버찌씨가 목에 걸려 죽음, 급사, 자살, 행발불명 등 온갖 방법이 등장한다.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지만 '죽음'이란 예고없이 누구에게나 어떠한 형태로든지 방문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거해서 본다면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 아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화자가 말하는 코스트 가의 5대에 걸쳐 일어나는 이러한 죽음들 가운데서 '운명'이라는 요소를 살펴 보는 것이다. '운명'은 때로는 잔인하며 광적이며 불가항력적인 폭력성으로 인간을 휩쓸어 버린다. 코스트 가문
을 휩쓴 '죽음'가운데서 우리는 운명의 한 단면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둘째, '영웅'적인 이들의 등장
고대 그리스에서 등장하는 영웅들의 특징은 바로 운명에 맞선다는 것이다. 그들은 신이 주관하는
시련과 고난의 시험 가운데서 그것을 헤쳐나갈 것을 주문 받기도 하지만 비극적 최후가 기다리더라도 운명에 맞서 싸우며 인간의 힘을 보여준다. 코스트 가문을 휩쓰는 죽음 가운데서 우리는 영웅들을 찾아볼 수 있다. 힘이 세고 강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코스트 가문에는 저주와 죽음이 흐른다는 편견을 비웃고 그 운명에 맞서 싸워 나가는 이들이다.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조제프이다. 그는 코스트 가문의 비극적 인물인 쥴리와 결혼한 인물이며 영지를 살려내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의 역할은 코스트 가문을 지켜내며 운명을 물러나게 만들며 운명의 저주받은 영지가 아닌 낙원으로 변모시키는 힘을 보여준다.

<<폴란드의 풍차>>는 코스트 가문에 불어 닥친 운명과 가문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이다. <<폴란드의 풍차>>속에는 다양한 이들이 등장하며 가문의 인물들을 제외하고 화자는 다른 이들에게 익명을 붙이고 있다. '운명'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방관자적인 입장에 놓인 이들에게 이름조차도 붙여지지 않은 것 또한 작가의 또다른 메시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폴란드의 풍차>>를 보며 비극적인 죽음과 몰락을 보며 나름대로 카타르 시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운명'이 가진 힘으로 가계가 몰락 하는 가운데서 나타나는 폭력성에 취할 수 있다면 반대로 '운명'을 비키게 하는 인간의 힘 또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죽음' 가운데 '인간'이 서있다. '운명'은 분명 무시무시한 혹은 인도자의 힘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등장하는 주인공은 바로 '인간'이다. '삶'의 흔들림 가운데서 우리는 '비극'이 가진 힘에 눌리지 않으며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가는 '장 지오노'의 <<폴란드의 풍차>>는 그리스가 아닌 프랑스 문학 작품을 대표하는 승화된 문학 작품의 새로운 지평이라고도 평할 수 있을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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