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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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출신인 '치누아 아체베'는 아버지가 목사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문학과 사학을 전공하였다. '치누아 아체베'는 아프리카의 탈 식민지화를 말하며 민족의식과 문화 차이에 대하여 글을 남겼으며 아프리카 인들에게 의식의 방향을 올바르게 잡아주기 위해서 노력한 작가이다.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집필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영국 제국주의가 들어오는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하여 쓰여졌으며 당시의 상황과 등장인물들을 통하여 아프리카의 도덕과 문화를 바로 세워나가기 위하여 쓰여졌다. 젊은 나이에 작성한 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잘 짜여진 한편의 영웅 서사시와 같은 느낌을 주는 글이다. 주인공 '오콩코'는 전형적인 아프리카의 영웅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호전적 영웅의 표상이기도 한 '오콩코'는 전사라는 표현이 어울릴정도로 강인한 체력과 정신 그리고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반면 '오콩코'는 여성적인 것을 부정하며 아버지와 대립하기도 하며 다혈질적이고 적극적인 성향으로 말미암아 실수도 저지르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인간의 장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되 누구보다도 뛰어난 전사로 묘사되는 '오콩코'의 이야기는 아프리카의 힘의 원천을 보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아프리카의 문화에 대한 묘사와 부족민들의 생활상 등은 책의 전반부에 상당히 자세히 그리고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독자는 아프리카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를 보고 그리고 그들의 삶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바라봄을 통하여 우리는 아프리카의 미개성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문화의 가치에 대한 판단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통해서 보류된다. 한편 '오콩코'의 마을로 들어온 '백인교회'로 인한 혼란과 백인들로 넘어가는 힘의 추는 독자들이 생각하는 식민주의 시대를 보여준다. '오콩고'는 아프리카 민족의 고유의 문화와 백인의 문화 충돌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며 그는 아프리카의 문화의 대표이자 의지로서 백인들과 대립한다. 문화와 문화의 충돌가운데서 벌어지는 상황의 변화와 갈등 구조는 과거 식민주의의 침탈로 고난을 받아왔던 여러 국가들의 이야기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탈식민주의를 표방하며 아프리카 민족의 문화와 내면을 보여주는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문화와 문화의 충돌' 가운데서 벌어지는 혼란과 가치관의 몰락과 변화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이제는 아프리카의 고전으로서 인류학 보고서이자 아프리카의 문화 보고서인 이 작품이 수많은 독자들에게 알려준 것은 단순히 민족주의의 작품이 아닌 세계에 알리는 '문화충돌'의 보고서이자 '아프리카의 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그리고 아프리카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오콩코'의 비극적 삶의 최후와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보고는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넘치는 에너지에 대한 절제와 균형으로 잘 조절하여 독자들에게 펼쳐내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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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잡아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0
솔 벨로우 지음, 양현미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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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대계 이민자의 아들로 미국 시카고에서 자라난 '솔 벨로'(본명 솔로몬 벨로스)의 <<오늘을 잡아
라>>는 1956년에 쓰여진 글이다. 주인공 '토미 윌헬름'이 겪는 하루동안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든
작품에서 우리는 파국으로 향하여 가는 '토미 윌헬름'의 삶을 볼 수 있다. <<오늘을 잡아라>>는
주인공의 다양한 회상과 독백, 그리고 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주인공의 내면을 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이 소설의 독특한 특성은 주인공의 독백과 종종 서술되어 있는 시점의
변화이다. 작품의 특징인 두부분을 고려해서 읽는다면 작품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을 잡아라>>의 주인공 '토미 윌헬름'은 나약한 심성과 낮은 정체성과 자존감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오늘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소외받은 사람들 그중에서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고립되는 이들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주인공은 정서적, 재정적 지원을 얻기 위해 그의 가족과
가정, 직장으로부터 지원을 얻는데 실패하며 애정을 갈구하는 '잉여인간'과도 같은 존재이다. 무리
혹은 집단으로 들어가려는 그의 노력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주인공을 더욱 절망 가운데로 몰고 간다. 이러한 절망과 실의 가운데서 내밀어진 파멸로의 유혹자의 손길은 그의 믿음에 상처를 주고 더욱 큰 실패와 좌절을 안겨준다고 말할 수 있다. '실패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 주인공의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현재를 타파하기 위한 도움을 갈구하며 내밀어진 손길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나약한 모습에서 독자는 연민과 슬픔을 발견한다. 물질문명의 사회에서 우리는 돈, 학력, 그리고 가치 가운데서 고민하며 신음하며 살아간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외면한채 또 다른 빛을 찾기 위해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방황하는 주인공과 다를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을 잡아야 한다'는 유혹자의 한마디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울부짖음이다. 그 소리는
미혹의 소리이기도 하며 우리 자신의 영혼의 단발마이다. 하지만 믿었던 확신이 무너질때 우리는 늪에
허우적 대며 그 누구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에 '고독'가운데로 내몰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삶에조차도 '희망'은 존재한다. 무너져버리는 삶일 지라도 그 앞에는 또 다른 삶이 존재
하며 오늘이 아닌 내일은 또다시 내 앞에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다.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는 오늘
내 삶의 전부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비록 '지금 이 순간'이라는 제약된 상황에 우리를 내몰고
가둬서는 안된다고 작가는 이야기 한다. 작품 속 주인공을 통해서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오늘을
잡아라>>는 절망 속에 빠진 이들에게 던지는 작가의 '희망'이라는 단어를 찾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죽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종말이자 새로운 '삶'으로의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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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1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조민현 옮김 / 민음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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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출신의 '미겔 데 우나무노'는 초기 실존주의자이자이자 14개 언어에 능통한 석학이다.
<<안개>>는 기존의 스페인 소설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새로운 신 소설로서 만들어진 작품이며 작품 속 등장인물들과 작가는 허구이면서도 실제를 혼돈으로 내모는 관계를 보여준다. 철학적이며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려는 그의 <<안개>>는 가공의 인물이 서문을 쓰고, 주인공이 기르던 개가 에필로그를 장식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작가 자신과 소설 속 등장인물의 대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강렬함을 안겨준다.

<<안개>>는 제목 그대로 허구와 실제 가운데 등장하는 애매모호한 기운이 휩쓰는 작품이다. 몽환적인 비현실적인 공간과 리얼리즘으로 점철된 공간 가운데 소설 속 주인공 '아우구스토'는 창조주인 '미겔'과 꿈과 현실 가운데 만나고 이야기 한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그들의 창조주에 대하여 반항할 수 없다. 주인공의 삶은 창조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며 그 결말에 대하여 고민하고 고뇌하나 결국 창조주의 의지대로 마무리된다. 그러한 기존의 작품에 반하는 <<안개>>속 주인공은 창조주인 '미겔'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주장하며 심지어는 명령한다. 작가는 고뇌하며 작품 속 주인공의 의지에 맞춰 글을 쓴다. '아우구스토 페레스'의 죽음과 에필로그에 대하여 작가와 주인공이 기르던 개가 말하는 그의 삶에 대하여 우리는 철학적이며 대단히 실험적인 작품을 만났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부터 끝까지 그저 평범하게 전개되는 평이한 작품들과는 다른 관점과 사고를 제시하는 <<안개>>의 특징은 도전적이며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사고가 멈춰지고 모든 틀에 막혀있을때 그 사고의 틀을 깨고 나아가는 새로운 방향이 제시하는 그 끝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주로서 새로움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담습하는 가운데서 죽은 작품만을 만들어 내는 기성세대에 대한 도전은 <<안개>>라는 작품을 통해서 절정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소설의 구조를 무너뜨리고 전복시켰다는 평가를 듣는 <<안개>>를 읽어본다면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실험정신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낼 것이다.
스페인 문단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실험적인 정신을 전수한 <<안개>>를 통해 새로운 문학 장르로의 한발 나아감을 통하여 보다 넓은 세계로 지평을 넓혀갈 수 있다는 점은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살과 뼈를 가지고 살아있는 인간' 그러한 인간이 살아 숨쉬는 작품 그리고 주인공은 이미 그러한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안개>>속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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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4
베르나르마리 콜테스 지음, 임수현 옮김 / 민음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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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극작가로 데뷔한 '베르나르마리 콜테스'는 프랑스 출신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그는 41세라는 짧은 생을 보냈지만 그의 작품은 그의 생에보다 더욱 긴 시간을 보내며 사랑받고 있다. 전 세계에 30개 언어로 번역되고 47개국에서 공연된 프랑스 현대 연극을 만들어낸 '베느나르마리 콜테스'는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와 <<슾에 이르기 직전의 밤>>을 통해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감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 '욕망'이라는 감정을 내포한 '현대의 모습'을 설명하며 작가는 '실존주의적 탐구'를 통한 무대 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는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이 함께 수록되어져 있다. 연극과는 다른 결말 내용전개 방식을 보여주고 있지만 작가의 순수한 의도 '실존주의적 인간 탐구'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텍스트 또한 새롭고 흥미로운 내용전개가 묘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작품의 저작 시대대로 따라가자면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은 내면과의 대화를 통한 독백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긴 독백이 하나의 문장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불안전하고 불연속적이며 숨가쁘게 내용이 전개됨을 느낄 수 있다. '내면 속'존재에 대한 형상화와 그에 대한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 우리는 불안과 초조 그리고 비판과 적의를 발견한다. 주인공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으며 방황하며 자신만의 공간을 찾기 위해 갈망한다. 그곳을 찾기 위해 방황하던 주인공은 그곳을 찾기전 '내면 속'나를 찾아낸다. 하나의 장 문장이 가진 힘 그 안에서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못한 이방인으로서의 주인공을 발견하고 주인공의 생명과 호소를 바라볼 수 있다. 이러한 장문이 무대에 올려져서 공연되었을때 가지게 될 힘 그 힘을 정말 보고 싶게 만들어 내는 텍스트를 통해 작품의 힘을 우리는 느낄 수 있을듯 싶다.

두번째 작품이자 첫번째로 수록되어져 있는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는 연극과는 다른 엔딩을 보여준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두인물 딜러와 손님은 끊임없이 상대를 경계하며 자신의 영역 속(욕망)으로 상대를 끌어 들인다. 타인의 영역으로 끌려들어가길 원치 않는 두 인물의 대립은 갈등과 긴장 그리고 파국이라는 극단적 형태로 이어지게 된다. 자신의 것은 감추고 유혹하는 두 인물의 대립이 매우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며 한치의 양보도 없는 가운데서 파국으로 치닫는 관계의 붕괴를 통해 우리는 '고독'과 '불안' 그리고 인간의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가능성으로의 초대와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보여준 인간의 실존주의적 탐구는 작가의 짧은 생애를 보여주듯 강렬하고 통렬한 비판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 독자는 이 두 작품을 통해서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파국을 만들어 내는 '욕망'을 발견한다. 이러한 '욕망'이라는 소재를 작품에 살리고 무대위로 끌어 올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준 작가의 역량에 대하여 진심으로 존경을 보내며 두 작품외에도 많은 작품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하며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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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3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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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나뉘어진 소련 출신의 작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는 공산주의 체제의 초기와 중기시절을 보낸 인물이다. 그는 공산주의 체제 안에서 성장하며 체제가 가르키는 방향의 끝에 무엇이 있는가를 질문하며 그 이상향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을 지켜보며 그들을 묘사한다. '유토피아'로 알려진 그곳은 모든이들의 이상향이지만 그 뜻이 의미하는대로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체제와 계급이 존재하며 자본주의의 또 다른 형태의 새로운 지배체제가 자리 잡는 가운데 민중이 원하는 '유토피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공산주의가 산업혁명 가운데 생겨난 병폐와 기존의 지배계급에 절망의 흐름을 끝내고 개인이 아닌 집단을 강조하며 외치는 선동은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부름이었다. 공산주의의 대표 지도자였던 '스탈린'은 민중들을 선동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것을 이야기 한다.
작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는 격변하는 공산주의의 혁명의 한복판에서 살아가며 시대의 관찰자이자 체험자로서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느낀바를 <<구덩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과연 '유토피아'란 존재하는가? 그리고 '집단'이 가진 본질은 무엇인가? 두 가지의 질문을 생각하며 공산주의의 모순과 체제에 대한 비판 그리고 집단주의에 경종을 울린 이 작품이 서유럽과 미국에서 먼저 출판된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작가의 의지는 비록 살아 생전 꽃을 피우지 못하였지만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사회를 고발하며 역사의 거울이 되어 오늘날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다시 돌아봄을 알려주는 <<구덩이>>를 통해서 오늘 우리의 삶과 사회의 특징을 한번쯤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구덩이>>에 등장하는 구덩이란 '토공사' 즉 구조물을 시공함에 있어서 기초나 지하실을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지반면까지의 공간을 굴착, 완료한 뒤에 지반면까지 다시 메우는 작업을 가리키는
공사의 용어이다. 즉 '토공사'는 어떠한 구조물을 시공하기전에 기초적으로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유토피아'로 제시되는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로 대변되는 구조물을 완성하기 위해 작품 속
인물들은 끝나지 않는 공기를 완성하기 위해 '불합리'하고 '모순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개개인의 힘은 미약하기에 '집단화'를 만들어 낸다. 만들어진 '집단'은 개개인이 수많은 시간을 노력해야할 일들을 순식간에 해치운다. 하지만 이 '집단' 속 '개인'들은 '집단'을 위해 '개인'의 속성과 권리를 포기하며 '집단'가운데서 등장하는 또 다른 개인들의 지배자들에 의해 '착취'당하고 '핍박'받는다. 한때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을 이끌어낸 운동들도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운데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토목공사들도 '집단'을 위한 또 다른 '구덩이'를 파고 있는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구덩이>>는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집단 속 개인'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사람들은 절대적 권력 혹은 악과 선으로서 이야기 되는 것이 아닌 상호간의 교류 속에서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장은 직설적이며, 대화가 많으며, 사회체제에 대한 불만과 불안을 보여준다. 비극을 향해서 나아가는 가운데서도 <<구덩이>>는 유령기차가 되어 전진한다. 사람이 중심되어 '유토피아'로 전진하고 있더라면 <<구덩이>>의 후반부는 그 누구도 주인공이 아닌 상태로 그저 쪼개어진 '집단'이 되어 '집단 아닌 집단'으로서 비극적 최후를 향해 전진한다. 이러한 작품의 특징은 체제에 대한 고발의 역할과 알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 그리고 인간들의 내면과 삶을 어루만지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

<<구덩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소탈한 모습과 이기적인 모습 그리고 체제의 모습은 이념과 이상을 넘어 오늘날 현실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모습과도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모두를 하나로 묶어서 움직이는 '집단화'가 지향하는 것은 '유토피아'이다. 그러나 그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으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야 말로 '유토피아'의 주인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그곳이 바로 '유토피아'임을 우리는 언제쯤 깨달을 수 있을까?  

<<구덩이>>를 통해 인간을 전체의 일부로 전락 시키는 '집단화'를 보며 어리석은 사회에 대한 풍자를 마음껏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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