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힘들고 고단할 때 하늘에서 돌이 비처럼 쏟아지는 것 같다.
오직 내게만......'(영화 <레이닝 스톤>에서, 켄 로치))


켄 로치 감독은 영화 <자유로운 세계>의 개봉을 앞두고 한 영화잡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 세상에) 희망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짧게는 낙관적이라고 보기 힘들겠지만 길게 보면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논현동 고시원 묻지마 방화살인사건 소식을 들었다.
경제적인 사정이든 개인적인 문제이든 뭐든 갈 데까지 간, 더이상 버틸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불특정다수를 향해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자꾸 늘어간다는 것이다.
고시원 사건의 희생자들은 대부분이 중국에서 온 여성 이주노동자들이었다.
<자유로운 세계>에서 한달치 임금을 떼이고 별로 미안한 기색도 없는 인력알선업체의
고용주 앤지에게, 양 같이 순하던 이주노동자들은 분노를 폭발시킨다.
그러고 보면 현실과 영화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앤지는 30대의 싱글맘으로 말썽꾸러기 아들을 부모님께 맡기고 있다.
인력알선업체의 계약직 사원이었는데 직장내 성희롱 사건에 엮이며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호구지책으로 친구 로즈와 함께 차린 것이 인력알선업체.
그런데 이주노동자들을 일터와 연결시켜 주는 이 일도 쉽지 않다.
여권이 없는 상태로 불법체류중인 이주노동자들에게서는
알선 수수료를 더 받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카메라는 이주노동자들의 시선과 입장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계약직 사원에서 고용주로 변신한 앤지의 뒤를 따라다닌다.
그런데 악덕고용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제 코가 석자라지만,
앤지는 자신보다 더 딱한 처지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착취하고 등쳐먹는다.
이른바 '먹고살려고 보니 어쩔 수 없다'는 논리다.
층층의 먹이사슬 구조.
앤지를 통해 값싼 노동력을 제공받은 거래처 사람은 부도가 나자
앤지에게 지급해야 할 노동자들의 임금을 떼먹고 나자빠진다.
피해자가 자기도 모르게 가해자로 변한다.
나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이 무섭다.

그의 전작들 중 <빵과 장미>나 <레이닝 스톤>만 해도 
희망이라든가 삶의 의욕을 느낄 수 있었다. 
청소인부들의 노조 결성과 노동쟁의 과정(<빵과 장미>)이나,
성찬식에 입을 딸의 드레스를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실직가장의
이야기(<레이닝 스톤)가 뭐 그리 신통할 리가 없는데,
이상하게 화면 밖으로 유머와 여유가 배어나왔다.
그런데 <자유로운 세계>를 보고 오는 길은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나 영국이나 가릴 것 없이
이주노동자들이 이렇게 많아진 것도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여파가 아닌가.
우리의 어깨 위에는 언제부턴지 세상 시름이 천근 같은 무게로 얹혀졌다.

켄 로치의 영화는 살얼음판 같은 세상을 보여준다.
얼음장은 너무 얇고 여기저기 금이 가 있다. 
조마조마해서 외면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뜰 수는 없으니,
70대의 노감독이 저렇게 긴 막대기를 들고 지켜보고 있는데 어쩌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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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김 2008-10-31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사랑합니다. 누님~~
내가 원하는 자유로운 세계는
어여 한국으로 돌아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노는 것인데~~
그럴 수 있을거야~~ 라고 꿈꾸며 지낸답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걷는다마는
환율은 계속오르고 있어
이곳 교민들은 정처없는 이 발길이로세~~
같은 심정이네요......

잘지내시죠~~~~ 책장수와 동동이 역시~~~

저도 열심히 버티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요새는 버티는 것이 잘 사는 거라네요.

지아장커와 장률의 영화는 이전에도 이야기하셔서
찾아봤는데 잘 없더라고요~~
이곳 저곳 다시 한 번 찾아보께요.

다른 것도 있으면 언제든 콜하세요.

건강조심하시고요~~^-^

로드무비 2008-11-01 08:29   좋아요 0 | URL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겄소. 성실하기까지 한 나를.=3=3=3
이제 또 바쁠 때지?
건강 조심하고, 올 겨울 울 동네 사께집서 한잔할 수 있을라나?^^

Mephistopheles 2008-10-31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캔 로치 감독은..정통파 복서에서 기교파 복서로 전향(?)했다고 보여질 수 밖에 없는 요즘 그의 영화들입니다.^^

로드무비 2008-11-01 08:33   좋아요 0 | URL
메피스토펠레스 님, 연속으로 치는 스트레이트 훅이 장난이 아니던뎁쇼.ㅎㅎ
켄 로치 감독은 늙어도 변질되거나 망가지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보여줍니다.

2008-11-01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02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흰머리김 2008-11-0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네~~ 알았어용~~^-^ 10월의 마지막 밤을 반주와 함께 님과 함께 보내셨는지~~

지아장커가 감독한 영화를 묶어 놓은 것이 있어 구입해 놨어요. 단 자막이 없다는거~~

장률의 경계라는 DVD가 자막이 있는 것이 있어 샀는데..

고이고이 모셔서 다른 것 요청하면 같이 사서 한국갈 때 드리께요.

사께집을 그리면서~~

2008-11-01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02 0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02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셀 공드리, 레오 꺄락스, 봉준호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도쿄>를 조조로 보고 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씨네21을 읽었다.
제2회 가족영화제(10.22~28) 상영 프로그램 중
<빈병들Empties>이라는 체코 영화와 <이글 대 샤크Eagle vs Shark>라는
뉴질랜드 영화가 눈에 띈다.

"아무리 진지한 척해도, 인간이란 미숙하고 희극적 동물일 뿐"이라는
<이글 대 샤크>의 타이카 코언 감독의 전언에
갑자기 어젯밤 일이 생각났다.

늦은 저녁을 먹으며 텔레비전 프로야구 경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남동생.

"주하야, 삼촌이 고등학교 때 야구선수로 맹활약했거든."
"진짜?"
"응, 그런데 마구를 던지다 어깨를 다치는 바람에
야구선수의 꿈을 접어야 했지."

지난번에는 입을 쩍 벌리고 임플란트 이를 보여주며
사람이 아니고 자신은 인조인간이라고 뻥을 치더니...
듣고 있던 남편이 한마디한다.

"'마구'가 아니고 공을 마구마구 던지다 그랬겠지."

책장수 님의 재치에 나도 가만 있을 수 없다.

"님 좀 짱인 듯!!"

그렇게도 한 번 사용해 보고 싶었던 인터넷 댓글이 내 입으로 튀어 나오고,
모처럼 그가 엄청나게 웃었다. 덩달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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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2008-10-24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요즘도 영화 많이 보시나 봐요. 전 언젠가부터 극장 가는 게 귀찮아졌지 뭐여요. 참, 오랜만이에요. 무탈...하시죠?

로드무비 2008-10-24 22:48   좋아요 0 | URL
아아, 반갑습니다.^^

twoshot 2008-10-24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도 그말 한번 써먹어 보고 싶었는데 쓸 타이밍을 못찾고 있습니다-_-;;

로드무비 2008-10-24 22:42   좋아요 0 | URL
twoshot 님, 혹시 다음 타자는 '뭥미?' 아닙니까?=3=3=3

Mephistopheles 2008-10-24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봤을 땐 로드무비님 부부는 울트라 캡숑 킹왕짱 입니다.

로드무비 2008-10-24 22:36   좋아요 0 | URL
메피스토 님, 오늘 죽어도(아니, 취소!) 여한이 없습네다.^^

바람돌이 2008-10-24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남동생분이 울트라 짱입니다. ^^

로드무비 2008-10-25 11:16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 님, 님의 댓글 보여줘야겠습니다.^^

2008-10-25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5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8 00: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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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30 14: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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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읽을 때는 잠시 정신이 들기도 하는데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또 알아차리게 된다.
조금 전 나의 희미한 깨달음은 '먼지 낀 눈에 보이는 허공꽃' 같은 것이라고.

지난 봄, 지리산의 한 암자 책꽂이에서 책을  훔쳐왔다.
남회근 선생의 알기 쉬운 <불교수행법 강의>.
'훔쳤다'고 표현했지만 밥을 먹고 나서 일행과 차를 마실 때
스님에게 말씀 드렸다.
눈독 들이고 있는 책이 몇 권 있는데 그 중 한 권 가져가도 되냐고.
스님은 알아서 하라고 반승낙(?)을 하셨고 나는 얼씨구나 하고 다음날 아침
그 두툼한 책을 가방 깊숙이 넣어 왔던 것.

몇 년 전 그 암자에 처음 갔을 때 사랑방 책꽂이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박종철 출판사에서 나온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 두툼한 선집 중에서 달랑 한 권(제1권)만 주문했다.
읽어본 적도 없고 보나마나 앞으로도 읽지 않을 책을 전집으로 주문해 꽂아두는 건
허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딱 한 권은 품에 지니고 싶었으니, 그건 무슨 심리일까?

얼마 전 <엄마가 뿔났다>를 보는데 1년 휴가를 얻어낸 김혜자가 혼자 사는 방
책꽂이가 눈에 띄었다.
몇 권 기우뚱 나이브한 제목의 책들 사이에 <막스 레닌주의와 언론>이 눈에 들어왔다.
김혜자의 방 책꽂이에 꽂힌 책도 작가 김수현이 직접 골랐을까?
아니면 김혜자가?
아니면 순전히 어쩌다가?

그런데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지리산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어 훔쳐온 그 책을 어느 친구에게 선물받았다.
나는 뻔뻔하게도 '이럴 줄 알았으면 딴 책을 가져올걸!'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 주말 친하게 지내는 가족들과 어울려 2박 3일로 지리산에 다녀왔는데
남회근 선생의 그 책을 도로 가져가 스님 몰래 얌전히 책꽂이에 꽂아두고 왔다.

생각해 보니 나에게는 '도벽'이  좀 있는 것 같다.
어릴 때 지구본 저금통, 그리고 백수 시절 엄마 아버지의 주머니를 뒤진 것부터 시작해서......

어제 아침 모 방송 프로그램에는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 한복려 선생의
인터뷰 장면이 잠시 나왔는데, 그의 작업실 벽에는 누군가 붓으로 멋지게 쓴
자가
액자에 걸려 있었다.
형형한 눈빛이 나를 지켜보는 듯 살아 꿈틀거리는 필체였다.

누군가의 방 벽에 걸린 액자 속의 글이나 책꽂이에 꽂힌 책들에
시선을  빼앗기곤 한다.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라고만 편하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다.

얼마 전 신문기사인지 인터넷 포털 기사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런 글이 눈에 띄었다.

- 김장훈 득도.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봤더니 '득도'가 아니고 '독도'였다.
착시현상이 요즘 부쩍 심해져서 형이상학적으로  처리,
눈에 먼지가 낀 것이라 믿고 싶지만 그것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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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7 18: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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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7 2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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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15: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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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21: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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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 2008-10-08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리산 칠불암(언젠지부터 칠불사로 승격?) 아래 茶 만드시는 내외분의 민박집...
장식이라고는 한구석 놓인 다듬잇돌과 천정에 그네마냥 내린 대(竹)옷걸이
1문, 2창, 1벽 구조의 나트막하여 다락같은 느낌의 단촐한 그 방...
친구야, 우리 뿔 나지 않아도 훌쩍 길 떠나 한 번 자묵자..
맘이, 생각만으로도 헛헛해지는 거이.....맘에도 먼지꽃이 피여....

로드무비 2008-10-08 21:08   좋아요 0 | URL
먹자판 여행에 떼를 지어 다니다 보니 근처 실상사니 보국사니 하는 절들도
한 번 들어가 보지 못했다. 말이 지리산 여행이지 산행은 잠깐이요,
참숯가마 찜질방이 필수인 코스라니!
그때가 언제지?
아우라지, 철길이 지나는 길이었던가?
그때처럼 저녁 무렵 낯선 길 위에서 만나도 좋겠다.^^


흰머리김 2008-10-12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친하게 지내는 가족이 누구인지 난 알고 있다. ㅎㅎ
쌀쌀한 날씨에 잘 지내고 계시지요.
지리산은 단풍이 들었나.......
마감을 끝내고 멋진 하루를 보내볼까 하는데 뭐~~
딱히 없네요. 이곳 상해는.
가고 싶다. 지리산..... 먹자판 여행은 뭐랄까
나이듬을 보이는 것 같은 슬픔이..
예전 힘차게 뛰고 놀던 시절을 생각하시어
다음에는 산행을 주로하는 여행을 다녀오시기를..
젊음이여 다시 내게오라~~~~

로드무비 2008-10-12 18:00   좋아요 0 | URL
마감이 월말인 줄 알았더니 무려 열흘 뒤라니...ㅎㅎ
먹자판여행도 좋아.
먹고 마시고 낄낄거리고.
그런 날도 소중해.(뭔들 안 소중하겄어.)

산행은 아무래도 세 시간 이상은 무리.
말벌대소동이라고 할까.
갑자기 나타나 따라다니는 말벌 때문에 예정된 코스를 다 가지 못했는데
난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나.^^
(이르지 마시오.)

그건 그렇고 아직 새파란 이가 젊음 타령이라니!떽!!

2008-10-16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리산에 다녀왔구나! 난 주말에 동은이 다솜학교에서 북한산에 갔었어. 엄청 용기를 내서 밧줄를 잡고 암벽도 타고... 300m 정도의 낮은 봉우리를 올랐지!
평소 운동을 안했는데도 빨빨거리고 다녀서인지 이번엔 휴우증도 없네.
등산 전문가인 다니엘쌤과 젬마쌤을 만나서 좋은 이야기도 듣고...



로드무비 2008-10-21 14:27   좋아요 0 | URL
엄마학교라는 게 생겼다는데 나도 거기 가볼까?
요즘 컨디션이 좋다니 다행이다.
참치회 먹으러 안 와?
전화할게.^^

2008-10-20 1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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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0 15: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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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0 15: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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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1 14: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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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1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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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1 12: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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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1 14: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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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01: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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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09: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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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09: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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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1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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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15: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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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3 1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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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5 1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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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 아침은 울타리콩이 쌀알보다 많은 밥을 푹 끓여
죽도 아니고 누룽지도 아닌 묘한 형태로 먹었다.
2년 전인가는 잘 말린 시래기에 갑자기 필이 꽂혔는데 올해는 콩이다.
봄부터 여름까지 주로 서리태를 사서 물도 끓여 마시고 밥에 듬뿍 넣어 먹기도 했는데
검정콩을 삶아 갈아 우유와 섞어 마시는 건 딱 한 번 해보고 말았다.
고소하고 맛은 괜찮았는데 믹서기를 꺼내는 그 한 번의 과정이 몹시 귀찮았기 때문이다.

엊그제 아파트 단지 내에 장이 서서 가봤더니 잡곡을 파는 코너에 
 '울타리콩'이라는 팻말을 꽂은 통이 눈에 띄었다.

"앗, 울타리콩이다!"

나는 오래 전 헤어진 친구를 우연히 만난 듯 반가워 달려들었다.
울타리콩은 한달 전인가 얼마 전 나의 수첩 귀퉁이에 꼭 읽고 싶은, 
한 권의 책제목과 함께 메모되었다.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자서전 <마법의 등>.
무슨 책인가를 읽다가 지금은 절판된 베리만 감독의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급히 적어 넣은 것 같은데, 울타리콩이 왜 그 옆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좋아하는 감독의 자서전 옆에 적혀 있다는 이유 때문에
울타리콩은 단순한 콩이 아닌, 뭔가 신비하고 다정하고 매력적인 존재로
내 안에서 격상되었다.

강낭콩과 비슷하게 생긴 울타리콩은 선명한 자주빛으로
눌러보니 손톱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야물었다.
콩이니까 다 비슷하겠지 생각하고 검정콩처럼 10분쯤 미리 삶아
불려놓은 쌀과 함께 솥에 안쳤다.
그런데 따글따글 익지 않은 콩이 입 안에서 따로 논다.
쌀 반 콩 반으로 밥을 지어 아이들 밥을 따로 펐더니 어른들이 먹는 밥은
쌀알보다 콩이 더 많다.
할 수 없이 콩만 따로 긁어 솥 한 귀퉁이에 모아놓았다.

어제 아침 물을 부어 누룽지를 끓인다고 끓였는데 뚜껑을 열자
어마어마하게 몸을 불린 울타리콩의 크기에 깜짝 놀랐다.
밥으로 치면 한 공기 반 남짓이었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단팥죽 맛이 살짝 나는 게 아닌가.
절반을 덜어 배불리 먹고, 절반은 밀폐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놨다가
오늘 아침 물을 조금 붓고 다시 끓였다.
조금도 남기지 않고 다 긁어먹고 났더니 아주 흡족했다.
(별것 아님, 라면의 유혹을 이겼다는 것.)

그나저나 왜 울타리콩이 <마법의 등>과 함께 적혔을까?
설겆이를 하는데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어 조금 전 수첩을 뒤져보았다.
그 페이지의  몇 장 앞에는 가을에 한 번 가봐야지 하고 적어놓은 삼청동의 식당과
가게 이름들이 있었다.
튀김집 '바삭'과 함께, 유명한 죽집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
그 집은 특히 단팥죽으로 명성이 자자한데 '곱게 갈은 팥앙금에 울타리콩을 삶아 넣은
것이 특징이다'라는 메모가 덧붙여져 있었다.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부인 이름이 리브 '울'만이다.
베리만의 필모그래피에는 배우 리브 울만의 이름이 항상 따라다닌다.
그의 책 제목을 적어넣으며 나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고 
그 무렵 어떤 잡지에서 읽은 삼청동의 죽집과 '울타리콩'이 생각났던 것이다.
(이래서 요즘 우리 가족이 나를 사오정이라 부르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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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2 15: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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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2 2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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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3 01: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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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3 12: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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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6 13: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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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조조 4천 원에 영화를 보려고 아침부터 너무 서둘러서 그랬는지,
매표소 앞에서 잠시 영화 제목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떤 하루> 한 장이요." 했더니 담당 여직원은  "'멋진 하루' 말씀이시죠?" 하면서
표를  내민다.
<여자 정혜>의 이윤기 감독이 연출했으며 전도연 하정우가 헤어진 연인으로,
1년 전에 빌려간 돈을 당장 내놓으라며 여자가 남자를 하루종일 따라다닌다는
정도로만 이 영화를 알고 있었으니,  영화 제목을 바꿔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병운(하정우)이 죽치고 있는 스크린 경마장에 불쑥 찾아온 희수(전도연)가
처음으로 내뱉는 말이 "돈 갚아!"이다.
몰골을 보아하니 삼만오천 원도 없을 것 같은 병운에게 삼백오십만 원이 있을 리 없다.
영화 포스터의 '이렇게 만나고 싶지 않았다'라는 헤드카피가 절묘하다.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며 이별을 통보했는데 그 결혼도 깨지고 직장은 구하기 어렵고
쪽팔리는 일이지만 빌려주고 못 받은 돈 350만을 받으러 온 참이다.
채권자와 채무자가 되어 1년 만에 만나는 연인 관계처럼 어색한 게 또 있을까.

독 잔뜩 오른 얼굴로 나타나 오늘중으로 빌린 돈을 모두 받아내고 말겠다니
병운은 그녀를 대동하고 돈을 꾸러 나선다.
그날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강남에서 강북, 서울의 이 구석 저 구석,
돈을 구하러 떠도는 구차한 로드무비인 셈이다.

<여자, 정혜>에서 변두리 우편취급소에 근무하며 혼자 사는 미혼여성의 삶을
가타부타 아무 말 없이  흑백 다큐멘터리처럼 펼쳐 보였던 이윤기 감독은
정혜와는 또 다르게 제법 앙칼지고 야무진 희수를 새 영화에 등장시켰지만
두 여성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화장을 거의 안한 듯한 투명한 얼굴의 정혜(김지수 분)가 식물성이라면,
스모키 화장으로 제법 세상에 대해 적의를 나타내는 것 같지만
뾰족한 수가 없는 건 희수(전도연)도 마찬가지이다.
반죽이 좋달까 요령이 뛰어나달까 거의 처세술의 달인으로 보이는 병운이지만
그도 맹탕.





살아가는 일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다.
술판에도 못 끼고 늙다리 오토바이족 틈에 끼어앉아 기주봉이 권하는 담배를 피우는 희수.



그것은 몇 푼의 돈을 빌리기 위해 만나는 병운의 지인들도 다르지 않다.
사촌형을 만났더니 마침 옥상에서 오토바이 동호회원들의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허름한 옥상의 계단 밑에는 하릴없이 하늘바라기를 하고 있는
중년의 오토바이족이 있다.
가죽점퍼를 입고 선글래스를 멋지게 쓰고 폼을 잡고 앉아서도 막막한 그 표정들이라니......

그런데 신기한 건 연상의 여성 사업가, 어쩌다 알고 지내는 호스티스, 대학 시절 승마부 후배,
스키 강사로 잠시 일할 때 만난 제자,  이혼 뒤 싱글맘이 된 초등학교 여자 동창까지
갑자기 찾아와 손을 벌리는 병운을 귀찮아 하거나 따돌리는 기색이 없다는 것.
그들은 병운의 손에 백만 원부터 십만 원까지 다문 얼마라도 쥐어서 보내거나 하다못해
술이라도 한잔 먹여 보낸다.
어떻게 보면 돈을 빌려주는 입장의 그들보다 , 또 병운을 사정없이 족치는 희수보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병운이  유리한 위치를 점한 것처럼 보이는데.

옥신각신하던 그들이 밥 한끼 먹으러 찾아간 단골집 제주식당은 문을 닫았고
종로의 단성사는 며칠 전 부도를 맞았다.
그 낡은 식당에서 이모님이 해주는 생선찌개백반을 먹고 싶었는데
징거버거를 베물어야 하고, 나는 아직도 멀티플렉스 극장이 거북하기 짝이 없다.

지리멸렬한 남녀의 삶을 보여주는 이 영화, 희수와 병운 역에
<여자, 정혜>의 김지수와 황정민을 떠올려보았다.
사실성은 좀더 획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속은 더 메슥메슥했겠지만.

아무리 영화 속이라지만 돈을 좇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다니는 일은 피곤하고 피곤했다.
'이제 도합 이백십만 원 받았으니 남은 돈이 얼마...' 
어쩌자고 나는 병운의 남은 빚을 어두운 객석에서 함께 세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극장문을 나서는 사람들의 입가에는 대부분 왜 희미한 웃음이 맴돌았던 걸까?























계단 이 장면 괜찮지? 파일로는 사진을 분간할 수 없어 뒤늦게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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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8-09-30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 있습니다' 이 말 때문에 사진만 보고 죽 내려버렸어요. ^-^;;
모두들 이야기 하시니, 안 그래도 끌렸던 이 영화 , 보러가야겠어요.

로드무비 2008-09-30 16:51   좋아요 0 | URL
치니 님,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나면 왠지 보러 가기 싫어지지 않나요?ㅎㅎ
엄청나게 끌리진 않았는데 보러 갔고, 꽤 재밌었습니다.
'누들'이나 '캐러멜'보다 좋았습니다요.^^


2008-09-30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1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8-09-30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이 영화 보고 왔어요. 모두 다 좋았는데 러닝타임이 좀 길었던 것 같아요. 10분만 잘랐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했어요^^;;;;

로드무비 2008-10-01 00:50   좋아요 0 | URL
마노아 님, 전 길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아닌게 아니라 허리가 좀 아프더구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