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오물오물 사료를 먹는 모습을

찍은 동영상을 가족 카톡 방에 올렸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하는 짓이다 보니 오늘은 조금 기교를 가미했다. 

소파 뒤편의 화분들과 아파트 단지가 내려다보이는 창밖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슬쩍 훑은 것.

뿌연 유리창으로 걸러진 12월 1일의 볕이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잘 먹네!'

흐뭇한 남편의 답글에,

'현란한 카메라워크는 어떻고?'

물었다.

'그렇게 현란한지는 잘...'

얼버무린 답.

'한낮의 어둠과 여명을 예술적으로 표현했더니만...'

가만 생각해 보니 '한낮의 어둠'은 <한낮의 우울>과 <보이는 어둠> 

두 책의 제목이 내 머릿속에서 합성된 것이었다.


몇 달 전 홍상수 감독의 신작 <도망친 여자>를 오랜만에 극장에서 보았다.

김민희가 찾아가 하룻밤 자고 오는 선배의 방 책꽂이에 <한낮의 우울>이 있었다.

(영화든 다큐든 인터뷰 장면이든, 남의 책꽂이를 미친듯이 훔쳐보는 버릇은 

지금도 여전하다.)


책정리를 시작한 지 벌써 몇 개월이 지났는데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 건

닦은 책들을 펼쳐보고 밑줄을 찾아 읽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

즐겁고도 피곤한 노동이다!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과 윌리엄 스타이런의 <보이는 어둠>은

최근 나란히 정리를 마쳤다.


<보이는 어둠>에서 요즘 하루 두세 편씩 읽고 있는 이탈리아 시인 

케자레 파베세에 대한 밑줄을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이렇게 적어놓았다.

- 말은 더이상 필요없어. 행동이 있을 뿐. 나는 두 번 다시 쓰지 않으리.'


젊은 날의 최승자 시인이 벽에 붙여놓고 보았던 사진이 

마야코프스키와 로르카.

그들을 호명한 후 그녀는 한 산문에서 내가 모르는 시인 파베세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파베제를 생각한다. 산다는 이 일, 산다는 이 수수께끼로 

물불 안 가리고 괴로워했던 그를.'

(최승자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중에서.)


이탈리아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라는 파베세는 1935년 20대 중반에

반파시스트 활동 가담 죄로 유배생활을 하며 글을 쓰기 시작, 

8년 뒤 이 시집을 냈다.

나는 공장과 건축 공사장과 술취한 정비공과 과부와 세상에 실망한 노인 들이 나오는

삶의 허무와 피로가 짙게 드리운 그의 시들이 좋아서 

하루에 몇 편씩 아껴가며 읽고 있다


언젠가 노인은 풀밭에 앉아 아들을 

기다렸고, 닭 모가지를 제대로 비틀지 못한

아들의 뺨을 후려갈겼다.

(...) 노인은 설명했다.

닭 모가지는 손가락 사이에서 엄지손톱으로

소리 없이 조르는 것이라고.

(...) 들판에 있는 것들은 모두

필요한 사람의 것이라고 노인은 말했다.


(시 '세월은 흐르고', 시집 <피곤한 노동>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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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2 2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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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3 09: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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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20-12-03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안녕하세요? ^^ 저는 여기서 말씀하신 책들은 다 처음 들어보고, 아서 쾨슬러가 쓴 “한낮의 어둠”은 알아요. 알라딘 오는 이유가 로드무비님 글 보러 오던 때가 있었는데요. 오랜만이시라 너무 반가워 살짝 인사 드리고 갑니다. 제가 무척 감사 드리는 마음을 오래 동안 갖고 있습니다. ^^

로드무비 2020-12-03 09:56   좋아요 0 | URL
에로이카님
안녕하세요?
반가워 눈물이 핑 돕니다.
어린딸 외면하고 알라딘 서재활동에 기염을 토하던 옛날이 그립네요.
우리가 좀 속깊은 얘기도 나누고 그랬지요?

마지막에 소개한 시의 저 노인은 아들과 함께 남의 집 논에 숨어서
호박과 농작물을 훔친 자루를 짊어지고 나오는 중입니다.

저는 저런 장면을 좋아합니다.
너무 반가워 주절주절.^^

2020-12-03 2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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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4 14: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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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7 08: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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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8 2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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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8 21: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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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7 20: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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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9 00: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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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9 12: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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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9 13: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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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4 0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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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난한 서가에는 

김종삼 시집 <북치는 소년>이 세 권이다

한 권에는 형님의 사인이

한 권에는 동생의 사인이 있다


다들 문학청년이었는데

어쩌다 죄 많은 내가 시인이 되었다


 - 이홍섭 시 '북치는 소년'(시집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중에서)



책정리 중이다.(물티슈로 먼지를 닦아내고 선풍기에 말려 새로 꽂는 정도.)

두 달이 지났는데 절반도 못했다.

반가운 책을 발견하면 휘리릭 펼쳐보는데 대부분 밑줄이 있다.

다시 한번 살펴보고 싶은 책은 내 가난한 서가로 직행하지 않고

침대 옆 가까운 책꽂이로 향한다.

 

흥에 겨운 책이나 구절을 만나면 

알라딘의 이 수첩('가까운 책꽂이')에 간단히 메모할 생각이다.

(<북치는 소년>은 1969년에 처음 나왔다. 내가 가진 건 1979년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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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5 01: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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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5 08: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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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5 22: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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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6 00: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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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6 11: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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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6 2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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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7 09: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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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새벽에 눈을 뜨면 <신영복 평전>과 만화 <중쇄를 찍자>를 교대로 읽고 있다.
뭔가 골치가 아프면 만화부터 먼저, 컨디션이 좋아도 당연히 만화부터 먼저 손이 간다.
정말 좋은 건 아껴야 하는 법이니까!

책 속의 체계적이고 상세한 역사의 흐름도 기가 막히지만 
평전에 나오는 작은 에피소드들이 너무 좋다.
중학교 1학년 때 신년식이 끝나고 담임 선생이 반의 모든 학생에게 
각오를 한마디씩 하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요령이 붙어"숙제 잘하겠습니다" "심부름 잘하겠습니다" 등 
몇 개의 각오로 압축되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거침없는 리듬을 끊은 친구가 나타났다.
"저는 각오할 게 없는데요?"
각오를 댈 것을 다그치는 선생님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가면 그만인 것, 
굳이 1월 1일이라고 무엇을 각오하라는 것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신영복은 그때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신나게 리듬을 타고 '숙제' 아니면 '심부름'을 댔던 나로서는 
뼈아픈 후회로 남았습니다.[담론]

<중쇄를 찍자>는 5권째인데 책과 관련한 기가 막힌 구절이 나온다.
책에는 경의를 표할 것! 남의 인생을 바꿀지도 모르는 물건이니까.(182쪽)

'책은 남의 인생을 바꿀지도 모르는 물건'이라는 표현에 공감한다.
그 말을 한 책방 주인 카와는 중년여성인데, 어릴 때부터 활자중독에
아이돌보다 불상을 좋아하고 꽃무늬보다 카무플라주와 줄무늬를 좋아하고... 
친구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 
카와는 늘 혼란스런 중에 책을 읽다가 책을 통해 인생에 안착했다. 

엊그제 알라딘의 신간소식에서 제목과 저자만 보고 바로 주문한 책이 한 권 있다.
박홍규의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
띠지에 실린 저자의 얼굴을 보니 더욱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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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4 00: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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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거실 벽 달력에서 2월을 조심스레 누르고 뜯어내는데 

이상한 단어가 시야에 잠깐 잡히다가 휙 사라진다.

'개뿔'

놀라서 뜯긴 2월을 자세히 살펴보니

'기쁨'이다.


2018년은  안드레이 루블료프나 렘브란트 등의 성화를 담은 

달력이 너무 좋아서 매월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입이 벌어지더니

올해 달력은 나무나 풍경 등의 사진에 2월은 기쁨, 

3월은 싹틔움 등의 소제목을 달아놓았다.

달력을 얻으러 어느 교회의 신년예배에 

한 시간을 달려 가는 보람이 있다.


의무감으로 읽는 책도 더러 있었는데

이젠 꼭 읽고 싶은 책만 읽기로 했다. 

그리하여 오늘 주문한 책 세 권!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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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2 12: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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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0 19: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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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리는 많아도, 뿌리는 하나

거짓으로 보낸 젊은 시절 동안

햇빛 아래서 잎과 꽃들을 흔들어댔지

이제 나는 진실을 향해 시들어가네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파커 J. 파머의 책(<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을 읽다가 인용된 예이츠의 시를 만났다.

예이츠의 시집과 모든 저서를 검색하니 품절이나 절판된 것들이 많다.

어렵사리 한 권을 헌책으로 구했고 최근에 발간된 두꺼운 자서전은 

보관함에 담겼다.


'사회적 관심사를 가지고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에 합류하는 길을 찾았다'(98쪽)고 

파커 J. 파머는 쓰고 있는데 1969년 토머스 머튼의 자서전 <칠층산>을 

헌책방에서 구입해 읽고서였다.

어느 친구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추천했는데 그 책이 꽂혀 있어야 할 

책꽂이에 공교롭게도 <칠층산>이 있었던 것이다.


토머스 머튼은 그 한 해 전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수도사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다.

1948년 <칠층산>이 출간되었을 때 겟세마네 수도원은 머튼과 함께 수도생활을 하려는 

젊은이들로 넘쳐났다고 한다.

파커 J. 파머는 21년이나 늦게 도착한 바람에 그 대열에 합류하지 못하고

50년 넘게 지금도 토머스 머튼의 모든 저작을 찾아 읽는 중이란다.

"여러분, 영적인 삶을 살기 전에, 삶을 살아야have a life 합니다"는 머튼의 말이

그의 가슴에 내리꽂힌 것이다.

두 사람은 시를 좋아한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시를 썼다는 공통점도 있다.


<칠층산>을 나는 올해 봄에 읽었다.

토머스 머튼이 일곱 살일 때 어느 교회 오르간 연주자로 취직한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예배실 스테인드글라스 속 '닻' 문양에 마음을 빼앗겨 온세상을 떠돌아다니고 싶었다는 것과,

1930년 15세 즈음에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만나 영혼이 흔들리고 

23세에 컬럼비아대학 서점에서 그의 시집을 외상으로 사서 2년 후에 갚았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머튼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논문을 쓰면서 시인이 생애 말년에 마음으로 받아들인 

가톨릭을 자신의 종교로 결정하고 이윽고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겟세마네 수도원에서 평생을 기도와 명상과 집필에 몰두하다가

병으로 입원했을 때 한 간호사에게 마음을 빼앗겨 세상으로 나올까 고민도 했다는데!

(그런 점에 더욱 이끌린다.)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에는 '애착의 아이러니'라는 저자의 친구 

샤론 샐즈버그의 글을 통해 달라이 라마의 일화가 각주로 가볍게 소개되어 있다.

트라피스트회에서 만든 치즈를 받고 "과일 케이크'를 받았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고 

달라이 라마가 한마디 한 모양인데...

(2015년 그녀가 겟세마네 수도원을 방문했을 당시 전해 들은 이야기인 듯.)

파커 J. 파머는 그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덧붙인다.

"버번에 재운 트라피스트 과일 케이크 몇 조각이 삶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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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2 17: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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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2 23: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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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9 22: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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