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로서의 삶에 관한 책 <비열한 거리>를 읽고 있다. 예전에 재밌게 읽었는데 어제 책꽂이 상단의 그 책이 뜬금없이 내 눈에 띄었다. 생각해 보면 아주 뜬금없는 일은 아니다. 어느 님이 영화 <율리시저의 시선>에 대한 짧은 글을 며칠 전 페이퍼로 올리셨고 나는 그 영화가 개봉될 당시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그 영화 포스터(하비 케이틀의 흑백 얼굴사진...아무런 장식없는)가 생각나 '저는 하비 케이틀을 참 좋아합니다'하고 밑도끝도 없는 한마디를 남겼고...그러니까 <비열한 거리>는 내가 하비 케이틀이라는 배우를 처음으로 발견한 영화인 것이다.
어제 인간극장에 나온 재미교포 비올리스트 영재 오닐의 얼굴을 보며 "너무 좋다, 저 얼굴!" 하고 손뼉을 쳤는데 나는 예전부터 잘생긴 미남보다는 쓸쓸함이 드리운, 여차하면 알코올로 막 나갈 것 같은 그런 얼굴들에 이끌렸다. 남편과 나는 그런 얼굴을 '인생을 아는 얼굴'이라고 진작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들은 제목만 봐도 반갑다. <바바라 허시의 공황시대> <비열한 거리> <앨리스는 여기 살지 않는다> <택시 드라이버> <뉴욕뉴욕> <성난 황소> <코미디의 왕> <좋은 친구들> <순수의 시대>. (제목들을 옮겨적자니 갑자기 '리빙 넥스트 도어 투 앨리스'라는 올드팝이 듣고 싶다.)
<비열한 거리>는 내 자신과 친구들을 스크린 안에 집어넣어 리틀 이탤리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았던가를 보여주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건 일종의 인류학 내지는 사회학 논문이다. 찰리는 타인들을 도와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용하고 있다. 그러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타인뿐 아니라 자신도 해치는 것이다. 그가 자니와 길거리의 문을 놓고 싸울 떄 타인을 생각해서 그런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자존심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거리든 집이든 혹은 사무실에서건 간에 어떻게 사는가, 그리고 어떻게 타인들을 대하는가 하는 고민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책에는 주디 갈란드라는 전설적인 여배우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가 나온다. 마틴 스콜세지의 스승이랄 수 있는 존 카사베츠는 마틴 스콜세지에게 사람 다루는 법, 특히 여배우 다루는 법을 코치해 주었다는데......
그는 내게 어떤 영화(A Child is Waiting)를 만들 때 주디 갈란드가 얼마나 제멋대로였는지를 말해 주었다. 그는 마침내 참다못해 그녀에게 화를 터뜨렸다. 그러자 그녀는 "이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 주세요, 당신만 남고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의상실로 데리고 가더니 울기 시작했다. 왜 우느냐고 묻자 그녀는 촬영에 들어간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아무도 자신에게 꽃을 보내주지 않아 속상하다고 대답했다. 그때서야 그녀가 얼마나 약한 여자인가를 알았다고.
그러고 보니 나도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대학 신입생으로 처음 참석한 축제. 우리 과에선 여름 해변의 천막 나이트클럽 같은 조악한 임시 무도장을 한 강의실을 빌려 꾸몄다. 여학생 넷 중 그나마 좀 예쁘장하고 상냥한 편인 둘은 카운터와 서빙을 돌아가며 맡았고, 음식 장만은 현모양처형의 한 아이가, 선머슴 같은 나는 설겆이 담당이었다. 쭈그리고 앉아 설겆이만 하는 것도 분통이 터지는데 내겐 아무도 블루스 신청을 안하는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바쁜 중에도 무대로 끌려나가 한 바퀴씩 돌고 왔는데 말이다. 기가 막혀서!
그날 그 임시 나이트클럽의 맨 마지막 블루스 곡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였다. 설겆이를 하면서 얼마나 찔끔거렸던지......실내가 어두컴컴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러브 미 텐더는 또 그래서 내가 잊을 수 없는 곡이다. 그날의 수모가 얼마나 모욕적이었던지 나는 누군가 손내밀어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먼저 손을 내밀기로 했다. 그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