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남편과 영화('귀여워')를 본 곳은 동대문의 한 쇼핑몰 10층의 복합상영관이었다. 영화의 배경은 철거 직전의 청계천 서민아파트. 철거깡패인 정재영이 웃통을 벗고 빤쓰 바람으로 병째 소주를 마시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되었다. 모두 거처를 마련해 떠나고 금방이라도 유령이 나올 것 같은 을씨년스런 그 아파트 빈방에는 노숙자들이 집단혼숙을 하고 있었고 크면 양아치가 될 것이 확실해 보이는 소년들이 불장난을 하며 막 돌아다니고 있었다.

장충동에서 족발을 사가지고 다시 동대문으로 와 청계천을 빠져나오는데 조금 전 영화 속에서 본 그 을씨년스런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청계천 고가는 기둥만 몇 개 남기고 자취가 없었다. 그 휑한 풍경 속에 생업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초라한 일터가 보였다. 폐업비디오 가게들, 헌책방들, 아무도 거들떠볼 것 같지 않은 우중충한 옷가지들을 걸어놓은 옷가게, 하루에 커피 열 잔이나 팔릴까 싶은 다방, 그릇가게, 국수집, 곱창집......

서울시의 호언장담대로 몇 년후 이곳이 복개되어 예전처럼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새들이 지저귈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생계의 방편을 잃어버린, 거처할 곳을 찾지 못한 저 수많은 사람들은 어찌할 것인가.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1천 원짜리 국수를 파는 동네 황학동. 나는 그 국수를 사먹어 본 적은 없지만 대한민국에 천 원짜리 국수를 파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다. 그리고 황학동엔 실제 그 천원짜리 국수 한 그릇으로 하루를 연명하는 수첩장수가 살고 있었다.

그는 삼일아파트의 어엿한 주민으로 아파트 부근 골목에 수첩 몇 권을 펼쳐놓고 하루에 두 권도 좋고 세 권도 좋고 되는 대로 팔아 점심때 국수 한 그릇을 사먹었다. 어떻게 아느냐고? 텔레비전 한 시사프로에 그가 소개된 적이 있다. 특이한 것은 그가 말을 한마디도 않는다는 것. 나는 그에게 매료되어 직접 그를 찾아가 수첩을 몇 권 산 적이 있다. 실제로 그는 말을 한마디도 안했다. 수첩 몇 권이 한번에 팔려 조금 기뻐하는 기색은 보였지만......

어제 아침 한겨레신문에는 보증금 1천만 원이 없어 삼일아파트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그곳에 천막을 치고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는 집만 해도 30가구가 된다니 그 수첩장수 아저씨의 행방이 문득 궁금해졌다. 1천 원짜리 국수가게가 아직 남아 있어 하루 단 한 끼 그의 식사가 해결되고 있는지......

몇 년 전 나는 한 인터넷신문에 '나는 맨얼굴의 청계천이 좋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아주 오랜만에 청계천을 보고 오니 이렇게 되도 않은 글이라도 끄적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몇 자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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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2-09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먹는 한 끼니의 밥이 목구멍에 넘어갈 때 이러한 명제를 생각하면 가슴이 울컥합니다. 세상의 로또를 제가 다 휩쓸고 싶어집니다...

물만두 2004-12-09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선인장 2004-12-09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서울에 와 처음으로 살게 된 곳이 바로 삼일 아파트였어요. 그리고 3년 동안 황학동에서 서너 군데를 전전했지요. 그래서 저는 곱창도, 순대도, 닭발도 잘 먹는 신기한 여자아이로 자라났고, 중고품을 파는 친구들 집들을 뛰어다니며 노는 극성 맞은 아니가 되었어요. 삼일 아파트 창문으로 바라보는 청계고가가 얼마나 무섭던지,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해요.

청계고가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오랫만에 황학동에 간 적이 있어요. 살던 집들 대부분은 없어졌지만, 골목 안 제일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이 어엿한 3층 건물이 되어 있더군요. 괜히 주인집을 찾아들어가, 혹시 그 때 그 주인 아줌마가 아닌가 묻고 싶었더랬어요. 그 아줌마 아들이 가수 인순이씨의 운전기사였는데 말이지요...

비루하고 가난한 청계천 8가, 그리고 황학동, 청계고가의 날선 차들. 그 곳이 저에겐 늘 서울이에요.

날개 2004-12-09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계천을 안 가본지가 한참되었습니다.. 갈 기회는 있었지만 그 휑할 풍경이 보고 싶지 않아 피하는지도 모르겠네요..

추천 날립니다~

깍두기 2004-12-09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첩장수를 테레비에서 보고 직접 찾아가는 행동이야말로 로드무비님다운 행동....^^

로드무비 2004-12-09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꼭 로또 1등으로 당첨되시길......^^

선인장님, 님의 댓글 한 개의 페이퍼로 저는 읽었습니다.

추천은 어디다 하죠?^^

그 골목을 뛰어다니는 꼬마선인장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봤습니다.

예쁘네요.^^

날개님, 전 청계천이 좋아요. 그래서 지금의 모습 보니 마음이 아픕디다.

깍두기님, 그렇게 생각하세요?^^


2004-12-09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얀마녀 2004-12-09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끄적이지 않고는 견딜수 없다는 그 마음, 어째 제 마음도 짠해지네요...

kleinsusun 2004-12-10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은 삶을 참 적극적으로 사는 것 같아요.

TV에서 본 수첩장사를 직접 찾아가는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정말 삶에 대한 사랑, 열정, 호기심으로 가득 찬 것 같아요. 아름다운 로드무비님!

비발~* 2004-12-10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대체 어디가신걸까... ;;

조선인 2004-12-10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황학동에 나갈 기회를 만들어야겠네요.

2004-12-10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水巖 2004-12-11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벤트 끝내신뒤 뵐 수 가 없군요. 이벤트가 힘이들어 몸살이라도 나신걸가요?

담이 오셨다더니 아직도 몸 쓰기가 불편한 걸가요? 어디서 무슨 기사를 본것 같은데.

로드무비 2004-12-11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암님, 이벤트 재밌게 했는데 몸살은요.

담은 깨끗이 지나갔어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수선님, 하얀마녀님, 조선인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속삭여주신 님, 접수했습니다.^^
 

한때 나는 텔레비전 홈쇼핑 애용자였다. 도깨비 방망이를 비롯해 빨강법랑냄비 세트 정도는 애교에 속한다. 러닝머신과 정수기, 비데까지 홈쇼핑 시청중 충동적으로 구입했다. 다행인 건 남편과 이런 점에서 죽이 잘 맞는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남편이 하도 불러서 가보면 "저거 어때?"하고 쇼핑호스트가 한창 소개하고 있는 화면 속의 생뚱맞은 물건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 당시 구입한 빨간통 도도 화장품 분은 아직까지 쓰고 있는데 4년이 넘었는데 써도 괜찮은지 모르겠다. 향기도 다 날아가고 발라도 화사하지 않지만 아까워서 그냥 쓰고 있다. 어디 화장품뿐이겠는가! 안동고등어, 쥐포, 진곰탕, 갈비 세트......홈쇼핑에서 파는 반찬 종류도 에지간한 건 다 사먹어보았다. 홈쇼핑으로 산 마지막 물건이 뭐냐고?  화면으로 봤을 때 두툼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던 쥐포가 종잇장처럼 얇다는사실이  판명나면서 나는 텔레비전 홈쇼핑 이용을 중단했다.


한번 결정을 내리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성격 탓에 몇 년째 텔레비전 홈쇼핑으로 물건을 구입한 적이 없다. 그런데 홈쇼핑에서 좋아하던 남자의 근황을 확인한 적이 있었으니 생각난 김에 소개하려고 한다.


그는 xx수산의 대표로 가자미를 소개하러 나왔다. 알다시피 고등어나 이면수라면 몰라도 가자미는 홈쇼핑으로 만나기 어려운 고품격(?) 생선이다. '반건조 가자미'라는 말에 나는 대뜸 리모컨으로 볼륨을 높였다. 그런데 쇼핑호스트 옆의 남자, 낯이 많이 익은 것이 아닌가! 다소 허무하고 불량한 눈빛의 외모, 노래를 부르면  여학생들을 단번에 사로잡던 비음 섞인 음성. 그 옛날 고등부의 김xx 바로 그였다. 다소 비대해진 중년의 얼굴과 몸에도 그때의 자취는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의 몹시 피로해 보이는 기색이 마음에 걸렸다. 상품판매에 혈안이 되어 오도방정을 떨고 있는 쇼핑호스트 옆에서 그는 마지못한 듯 묻는 말에 한 마디씩 대꾸하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나는 그 가자미 세트를 당장 주문했다. 꾸덕꾸덕 반쯤 말린 가자미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구워 먹어도 맛있었고 무를 깔고 양념간장에 지져 먹어도 맛있었다. 오래 전 한때 내 마음을 잠시 설레게 했던 남학생이 팔러 나온 것이니 마지막 한 마리까지 참 알뜰하게도 반찬으로 해서 먹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가끔 대형마트에서 가자미를 발견하면 그의 얼굴을 떠올리곤 했다. '아무리 경기가 어렵다지만 수산회사는 괜찮겠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찮게 그의 소식을 들었다. 그의 수산회사는 경영이 어려워져 많은 빚만 남기고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족과도 잠시 헤어져 지낸다니 그의 처지가 가슴이 아팠다. 나는 철없이 우리가 늙은 것만 서러워했다.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로 모습이 변한 것, 생선장수가 된 것......그런 것만 애닯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토록 많은 물건을 홈쇼핑을 통해 막 사들였던 그때 우리 부부도 경제적으로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던 때였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텔레비전 화면으로 그의 피로가 읽힌 건......우리는 피차 어찌 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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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12-01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이것두 드라마네요.....님이 홈쇼핑 중독자라는 것두 왠지 상상이 안되지만서두....^^;;

물만두 2004-12-01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한번도 안 봤으니 할말이 없네요^^

2004-12-01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12-01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중독자까지는 아니었어요.

저 위에 열거한 것이 다니까!^^

물만두님, 님도 한번 보시구랴.

안 사고 배길 수 없을걸요?^^

....님, 재밌긴요. 쓰라리죠.

urblue 2004-12-01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쇼핑 중독이라는 건 진짜 불가사의인 듯 합니다.

예전에 홈쇼핑 방송에 몇 번 출연한 적 있었는데, 그때 혹시 저 아는 사람이 봤을까, 하는 생각은 안해봤네요.

음, 누군가 그걸 보고 저를 기억했을까요?

아닐 것 같네요. ^^;

날개 2004-12-01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사신 것중 뭐가 가장 맛있으셨을지가 젤 궁금합니다..-.-;;

근데, 쥐포는 얇은게 맛있지 않나요~ =3=3=3

로드무비 2004-12-01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쇼핑중독까지는 아니라니까 그러시넹. 마..마..맞나요?^^;;

아무튼. 님은 뭐 팔러 나오셨는데요?

화장품? 핸드백?

너무 재밌어요. 어지간히 용모가 단정하신가보다.ㅋㅋ

날개님, 쥐포는 모름지기 두툼해야 고소하고 맛있죠.

음 모가 제일 맛있었냐 하면...... 가자미요.^^

sooninara 2004-12-01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홈쇼핑에선 고등어밖에 안사먹어봐서..

가자미가 먹고 싶어집니다..^^

딸기 2004-12-01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홈쇼핑 (중독은 아니지만) 꽤나 좋아했어요. 지금은 형편상 못보고 있지만, 서울 살때 홈쇼핑 틀어놓으면 사고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도깨비방망이 너무나도 사고싶었는데, 꾹꾹 참고 있다가 결국 어느분한테 얻었어요. 얻은 그날로 손 베어서, 그 뒤로 안녕~이었지만요. 슬로쿠커하고 믹스앤픽스도 정말 사고싶었는데... 동치미가 덤으로 딸려오는 사골곰탕하고 양념갈비 사먹어봤는데 꽤 괜찮았었어요.

nugool 2004-12-01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가자미를 만나게 되면 사봐야겠습니다. 몇년전에 게장을 한번 사먹어 봤는데.. 좀 별로였어요.

하얀마녀 2004-12-01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 엄니도 홈쇼핑으로 도깨비 방망이 샀더라구요. 다행인건 그게 효용이 있는 모양입니다. ^^

플레져 2004-12-01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랜만에 쥐포 140마리 샀어요, 어제 왔는데...너무 맛있어요!!! ㅎㅎ 로드무비님의 닉넴과 어울리는 일들이 참 많네요. 저는 오랜만에 만난 고딩 동창이 집값 싼 자기네 동네로 이사오라고 했던 거 기억나요. 큭.

숨은아이 2004-12-01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믹스앤픽스랑 손잡이 기다란 청소도구(유리창이든 바닥이든 슥슥 잘 닦인다는)는 저도 사고 싶더군요! 그런데 결정적으로 전화기 드는 게 귀찮아서 말이지요. ^^ / 그건 그렇고, 로드무비님이 가자미를 사주었는데도 회사가 문을 닫았단 말씀이죠! 가슴이 아프다...

잉크냄새 2004-12-01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제가 홈쇼핑에서 구매한 기억은 금연초랑 디카. 두가지군요.

oldhand 2004-12-02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저는 요새 스팀 대걸레에 혹 하고 있습니다만... 직접 주문해 본적은 없네요.

조선인 2004-12-02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겁이 많아서 아예 홈쇼핑 채널을 보지 않습니다. 충동적으로 지를까봐요.ㅋㅋㅋ

2004-12-02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12-02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12-03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분이 댓글 남기셨군요.

결국 홈쇼핑 최고 인기상품은 도깨비방망이였던 것입니다.

한 분 한 분의 쇼핑 기록 참 흥미진진합니다.

고등어나 삼치 아주 싸고 맛있는 이너넷 가게 알고 있으니

필요한 분은 귓속말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2004-12-03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12-03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12-03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우맘 2004-12-03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만 분량이 늘어나면 단편 소설로도 손색이 없을 듯.....^^

니르바나 2004-12-03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한 홈쇼핑은 '이문열삼국지'에 '반지의 제왕'이 공짜라 해서 구입한 것이 유일합니다. 최근에 보도된 방송에 의하면 홈쇼핑회사에서 중소기업인들에게 행하는 횡포가 도에 지나치단 생각이 들더구만요. 서로 윈윈하는 관계가 참 아쉽웠습니다.

딸기 2004-12-06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깨비방망이는, 홈쇼핑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히더군요. 실은 그보다 앞서, '전신' 격이라 할 수 있는 꼬마믹서라는 것이 있었어요. 이거 성능이 아주 끝내줬거든요(딸기 너 지금 머하는거냐 -_-) 아무튼... 그래서 도깨비방망이도 훌륭한 상품이고, 꼬마믹서도 훌륭한 상품...이라는 얘기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다들 홈쇼핑에 매진하신 경력들이 있으시군요!
 

모창 가수 너훈아와 한 골목에 살았던 적이 있다. 내 남동생과  대학에 다니는 사촌 둘과 넷이 자취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작은 연립 이층을 전세내어 대장(?) 노릇을 하며 살던 그 시절이 내 인생에서 제일 홀가분한 시절이었다. 너훈아는 길모퉁이 연립의 반지하에 살았는데 무대의상을 세탁소에 맡기러 가는 그와 여러 번 마주치기도 했고 아무래도 반지하이다 보니 얼기설기한 들창 사이로 농짝이니 싱크대니 집안살림 같은 것도 보였다.  집앞에 세워진 남편의 고물차를 정성껏 물로 씻는 그의 아내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어느 대기업 문화재단의 직원이었다. 월급 명세서를 보면 비서실 소속. 말이 좋아 문화재단이지 그 기업 총수의 어머니가 뭘 좀 해보겠다고 아들을 졸라 사무실을 하나 연 것에 지나지 않았다. 직원들도 전부 그 어머니와 친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한 명씩 갹출(?) 한 사람들. 나는 출판사 직원으로 한 원로문인 댁을 드나들다가 술을 매너있게 잘 마신다는 그 이유 한 가지로 사랑을 흠뻑 받았다. 어느 날 잘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틀어박혔는데 그 원로문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음날 어디로 가보라고. 단 한 벌 있는 치마를 떨쳐입고 갔더니 세상에나, 처음 보는 귀부인이 나이 서른이 다 된 내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귀엽게 생겼네." 뭔가 좀 이상한 분위기다 했지만 취직을 하지 않으면 보따리를 싸서 당장 집에 내려가야 하는 분위기였으므로 그냥 거기 다니기로 했다.



직장생활은 널널했다. 딱히 할 일이 정해진 것도 아니어서 어느 달인가는 서고의 <공간> 잡지를 창간호부터 모두 꺼내어 정리하는 것이 나의 일인 적도 있었다. 미술, 무용, 음악, 건축에 대한 기사로 넘쳐나는 잡지였으므로 몇호에 무슨 중요한 기사가 실렸는지 체크하는 정도의 그 일은 내게 식은죽먹기였다. 어떤 날은 어머니에게 드릴 그달의 용돈 봉투를 직접 가지고 온 기업 총수의 얼굴을 보기도 했다. 사모님의 비서인 언니에게 물으니 한달 용돈이 2천만 원이라고 했다.



너훈아와 한 골목에 살면서 나훈아에 대한 묘한 애정도 생겨났다. 이건 무슨 심리일까? 어쩌면 당시 재밌게 읽은 가수 윤복희의 책이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훈아와 라이벌이었던 남진의 한때 아내였던 여인. 그녀의 자서전에 헤어진 전남편은 비열하고 치사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훈아의 아내였던 김지미의 입에서는 전남편 나훈아를 비난하는 듯한 발언은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마찬가지 이유로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소설가 송기원을 나는 내동댕이쳤다. 나훈아 때문이었다. 인도에서 체험한 고행이 어쩌고 하는 그의 장편소설을 기대에 차서 읽어나가는데 느닷없이 가수 나훈아가 천박해서 봐줄 수가 없다느니 오로지 그에 대한 비난으로 점철된 한 페이지 분량의 대목을 만났던 것이다. 그건 나훈아가 아니고 내가 좀 싫어하는 연예인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을 심하게 모욕하는 사람을 봐줄 수가 없었다. 인도에 가서 고행을 백날 하면 뭐하냐구! 그 이후로 나는 송기원 씨의 글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아무래도 그 골목에 살 때 제일 좋았던 건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러 가서 나의 이웃인 너훈아를 화면으로 만났을 때이다. 아아, 나는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를 그 영화에 등장시킨 임순례 감독의 선택은 탁월했다. 유명한 사람과 한 골목에 사는 기쁨이라니!



너훈아와 한 골목에 살던 시절 재밌는 이야기는 끝이 없는데 이것도 카테고리 하나로 잡아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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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11-27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주변에는 재미남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군요.. 인복인가 봅니다..^^*

조선인 2004-11-27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미디언 이주일씨의 옆블록에 산 적과 조용필씨 아파트랑 같은 이름을 가진 아파트에 살아본 적은 있는데, 이야기 풀 자신은 없네요. ㅎㅎㅎ

nugool 2004-11-27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잡아주세요! 잡아주세요!! "그 시절 그 골목.." ^^ 정말 어찌나 맛깔스럽게 글을 잘 쓰시는지!! 그나저나.. 소설가 송기원님에 대한 이야기는 저도 공감되는데요? 나훈아가 천박해서 봐줄수가 없다니.. 헉.. 로드무비님 말씀대로 다른 사람에 대한 모욕도 봐줄 수가 없는데.. 저는 나훈아라서 더욱 봐줄 수가 없어요.. 나훈아 노래가 얼마나 좋은데요!!!

진/우맘 2004-11-27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테고리요, 아예 예전에 인연이 닿은 유명인사 얘기만 한 곳에 모아주세요~ 장정일하고 전화통화 한 얘기나,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가난한 (그렇지만 가난하지 않은) 시인 얘기 같은거요!!!!

내가없는 이 안 2004-11-27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주세요! 저도 나훈아 너훈아 다 좋아하거든요. ^^

2004-11-27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훈아 노래는 아니지만 전 현철의 사랑의 이름표 좋아해요..어느 날 버스에서 들었는데 그렇게 가슴에 와 닿더라구요..재밌게 읽었어요^^

플레져 2004-11-27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릴 때, 송대관 아저씨가 리싸이틀 끝나고 우리 동네 들렀는데요, (한참 인기 있을때였다는군요..) 동네에서 놀고 있던 제게 뭐라고 한 줄 아세요? "니네 집에 밥 없니? 밥 좀 주라~!!!! " 누룽지 박박 긁어서 드렸던 적이 있어요. ㅎㅎ 로드무비님... 맛있게 잘 읽었어요. 님의 글만 읽으면 배고파요. 넘 맛나게 후루룩 먹어버렸나봐요. 흐흐...

니르바나 2004-11-27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미모가 출중하신가 봅니다.

어른들은 예쁜 모습을 그리 표현을 잘 하시잖아요.

나훈아의 그늘로 밥먹고 사시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면

나훈아씨는 참 좋은 가수시네요.

마치 나훈아씨의 노래처럼 구성진 로드무비님의 글을 읽는 제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그시절 그노래' 기대할께요.

깍두기 2004-11-2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이 만나신 유명인사 모두에게 싸인을 받아놓았더라면 지금 박물관을 차렸어도 됐을텐데.....아쉽다, 쩝.

그건 그렇고....귀엽게 생기셨단 말이지요?^^

로드무비 2004-11-27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왜 좀 못생긴 사람 보고 할 말 없으면 '귀엽다'고 하잖아요.

그런 차원인 줄 아뢰오.

그리고 제가 고작 남의 싸인 가지고 박물관 차리겠어요? 흥=3

니르바나님, 미모에 대한 답변은 안해도 되죠?

구성진 글이라는 표현 정말 구성집니다.

앞으로도 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요.(저 칭찬에 무지 약한 인간입니다.^^;;)

플레져님, 옛날엔 송대관이 이유없이 싫더니 요즘은 모습도 노래도

구수하니 좋더라고요? 어린 플레져가 송대관에게 누룽지를 갖다줬다니

너무 신기합니다.^^

참나님, 현철은 인간성 좋기로 소문났어요.

자기 집 앞 빗자루 들고 치다가 동네분이랑 쿵짝 맞으면

연쇄점 평상에서 술판도 곧잘 벌인데요.

그리고 저도 그 노래 신나더라고요.^^

이안님, 나훈아도 너훈아도 다 좋아하신다니 반갑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나훈아만 좋아하거든요.

진우맘님, 카테고리 문제 고민 좀 해볼게요.

그런데 유명인사들과의 그 신통찮은 일화 갖고

독립시킨다는 것이 좀 얍삽하게 보이지 않을까요?^^;;;

너굴님, 제 글이 좀 구수하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송기원 씨는 나훈아에 대한 글 잘못 썼다가 로드무비나 너굴 등 여러 좋은 독자

잃어버리게 된 사실을 알까요?^^

조선인님, 부촌에 사셨나 봅니다.

이주일 씨 옆 블록이라니 몇 번 마주치기도 하셨겠네요?

날개님, 인복은요.

외로워죽겠습니다.^^;;;


2004-11-27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11-28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릴케 현상 2004-11-28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3--->요건 무슨 뜻인가요? 저는 현철을 좋아합니다. 그냥 어머니가 현철 팬이라서

로드무비 2004-11-28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정말 =3 뜻을 몰라서 물으신 건지?

도망갈 만한 발언을 하고 콧김을 내뿜으며 내빼는 표시인 줄로 아뢰오.

그리고 저도 현철 좋아해요. 사람만......^^

릴케 현상 2004-11-28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와아~ 정말 그러네요. 매직아이 같아

로드무비 2004-11-29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사실인데요? 호호.

딸기 2004-12-06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나훈아를 모욕하는 작가라니! (근데 송기원이 누구죠?)

그런데요

-윤복희가 남진 부인이었군요

-김지미가 나훈아 부인이었군요

새로운 사실들...(저한테만 새로운 거겠죠?)

로드무비 2004-12-07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연예계에 대해 궁금한 것 있으면 제게 물으세요.(으쓱으쓱)^^
 

약 한 달 전에 사둔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 <두더지>를 이제서야 꺼내들었다. 별 대수로울 것 없는 이 대사가 문득 가슴을 친다.

--어른은 힘든 거야. 얌전히 살아가도 여러 가지 일이 생겨.

열흘 전쯤 새벽 두 시에 나는 갑자기 불안하고 답답해서 집을 뛰쳐나가 동네의 한 맥주집에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고  그 다음날 휴일, 남편은 무슨 모임 사람들과 어울려 족구를 하다가 누군가의 헛발길질에 앞니를 심하게 다쳤다. 여러 날째 나는 죽을 끓여대고 있고 며칠 후에는 치과에 뭉텅이돈을 갖다바쳐야 한다.

울적한 얼굴로 컴퓨터 앞에  앉아  하하호호 ^^ 이모티콘을 남발하며 댓글을 쓰고......어른은 이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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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1-08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들죠 흑흑

반딧불,, 2004-11-08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이어서 힘들까요??

사람이어서 힘들까요?

물만두 2004-11-08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어서에 한표요^^

로드무비 2004-11-08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명한산책님, 흑흑.

반딧불님, 저는 사는 게 부담스러워요. 어릴 때부터......
물만두님, 투표를 꼭 해야 하나요?
그럼 저는 어른에 한 표. 흑흑.

날개 2004-11-08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은 힘든겁니다.. ㅜ.ㅠ 이렇게 댓글을 달아대는 누군가도 잡다한 어떤 일들에 머리를 싸매고 있는지도...

chika 2004-11-08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은 어른이어서 힘들고 애들은 애들이어서 힘들고...

전 그닥 힘들지 않아서 힘들다...고 하면 돌맞을까요? ㅡ.ㅡ

힘내세요-!

하얀마녀 2004-11-08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덧 어른이 돼있더군요. 몸만 어른이 된건 아닌지. ㅜㅜ

내가없는 이 안 2004-11-08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부분이 너무 마음에 와닿아서요... 위로해드리고 싶어서요... <울적한 얼굴로 컴퓨터 앞에 앉아 하하호호 ^^ 이모티콘을 남발하며 댓글을 쓰고...>

로드무비 2004-11-08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이 남기신 글을 읽으니 상대적이고도 절대적인...뭐 그런 제목이 떠오르네요.

어떤 이가 봤을 땐 내가 형편없는 엄살꾼으로 보일 수 있을 거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상처와 문제를 끌어안고 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말을 주절거리는 것조차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한마디씩 위로해주셔서 고맙습니다요.

치카님, 하얀마녀님, 내가 없는 이안님......


잉크냄새 2004-11-08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터팬처럼 살수는 없잖아요. 다들 멋지구리한 어른들이십니다.^^

숨은아이 2004-11-08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얌전히 살아가도 여러 가지 일이 생겨... 얌전히 살아가도.. 하지만 인생은 뜻밖에 선물도 주니까요. 그렇죠...?

진/우맘 2004-11-09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는 더 힘들지 않아요? 기를 쓰고 애를 써도 여러 가지 일이 생기잖아요.^^

로드무비 2004-11-09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숨은아이님, 진우맘님.

그래도 어른이 더 불쌍한 것 같아요.

아이들에겐 미래라도 있다지만 하릴없이 늙어가는 어른은

속으로 삭일 뿐 도리가 없잖아요.
 

지난 토요일 사촌동생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부산의 부모님이 상경하셨다.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과 얘기 나누는 것이 즐거우셨는지 식이 끝나고도 이틀을 그분들 집을 방문하며 어울리시다 월요일 오전 열한 시, 우리 집을 기습방문하셨다. 세 분을 모시고......

아침에 아이들 어린이집 버스에 태워 보내고 세수도 하지 않고 밥을 먹고 커피를 한잔 타가지고 알라딘과 접속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이었다. 일단 반갑게 맞아들인 후 "아니 왜 전화도 안해주시고?" 했더니 온다고 미리 전화하면 시장보고 뭐 준비하느라 거추장스러울 것 같아서 그냥 왔단다.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속이 깊은(?) 분이다.

청소를 며칠째 하지 않은 집 안은 엉망이고 눈곱도 떼지 않은 내 모습은 가관이었다. 콧등에 물만 묻히는 고양이 세수를 마치고 나는 점심준비에 돌입했다. 마침 생고등어 사둔 것이 한 봉다리 있어 무 깔고 그것을 얼큰하게 지지기로 했다. 그리고 된장국과 버섯야채전으로 어찌어찌 점심상이 마련되었다. 그냥 자장면이나 시켜먹고 말자고 하셨지만 알라딘 서재 '허름한 밥상'의 주인으로서 어떻게 그런 치욕적인 제의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내 생각에 친척처럼 무서운 존재는 없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나를 지켜보았다는 그 사실 한 가지로 남의 인생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마음대로 들었다 놓는다. 나는 그분들이 나에 대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국을 끓이고 파를 다듬었다. 결론은, 로드무비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좋았으며 깔끔하게 해놓고 살지는 못하지만 음식 솜씨가 좋아 남편에게 그럭저럭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스럽지 못하고 상냥하지 못함에도......

아무튼 고등어 지진 것을 주메뉴로 한 점심을 맛있게 드시고 한 케이블 방송국 스포츠 담당 기자인 사촌이 차를 가지고 모시러 와서 그분들은 가셨다. 급히 오느라 과자봉다리도 하나 못 사왔다며 내 경대 위에 지폐 두 장을 놓고 가셨다. 내 고등어 조림 맛이 감격적이었는지 사촌은 자발적으로 김민기 CD 6개 전집을 택배로 보내겠다고 약속하고 갔다.

부모님은 이틀을 동생집과 우리집을 왔다갔다하며 지내시다가 오늘 아침 내려가셨다. 동생 부부가 일찍 출근하는 관계로 우리집에 와서 아침을 들고 가시라고 신신당부했으나 끝까지 그냥 가시겠다고 하더니 그래서 엄마 손에 몇푼 쥐어드리고 어젯밤 작별인사까지 마쳤던 것인데 아뿔싸, 아침에 아이를 맡기러 온 동생 부부 뒤에 부모님이 서계셨다. 한잠 자고 일어나 아주 오랜만에 새벽에 서재 마실을 다녔던 나는 책을 좀 읽고 여섯 시경에 잠이 드는 바람에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고......화들짝 놀란 내가 들어오시라고 아침 금방 차리겠다고 붙들었지만 부모님은 그냥 얼굴만 잠시 보려고 들렀다며 뿌리치고 휑하니 가셨다.

아버지는 내일모레 일흔다섯이신데 아직도 서울 오실 때 직접 차를 몰고 오신다. 우리 엄마 칠순도 두세 달 앞으로 다가왔다. 아침에 떠지지 않는 눈으로 흘낏 본 두 분의 쪼글쪼글한 모습. 며느리도 딸도 먼길 떠나시는 두 분께 아침을 차려드리지 않았다. 아까는 몰랐는데 한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이 글을 쓰는 지금 그 사실이 못내 가슴이 아프네?! 지금쯤  대구 부근을 지나셨을라나......

 

(오랜만에 서울에 오신 부모님에게조차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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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27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식솜씨가 좋으시구나

urblue 2004-10-27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짠하네요, 저도.
엄마한테 이번주에 내려간다고 했는데, 못갈 것 같습니다.
지금 한창 단풍철이라 차 많이 밀리니까 담에 오라고 엄마가 그러셨지만, 막상 딸래미가 안간다고 하면 서운해하지 않을까 쪼금 걱정됩니다. 에휴...

tarsta 2004-10-27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잘 지내셨을테니 괜찮으실거에요.
근데 로드님 서재에 자꾸 오다보니까.. 로드님네 놀러가고 싶어요. *.*

sooninara 2004-10-27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님 맘이란 원래 그런거 아니시겠습니까..
로드무비님이 고등어 반찬 해주신걸로 충분히 행복하셨을겁니다..

로드무비 2004-10-27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그토록 자랑을 했건만 이제야 그걸 아셨단 말씀이세요?^^
블루님, 단풍구경 겸해서 내려가시지 그러세요.
데이트 약속이라도 있다면 몰라도......^^
타스타님, 감기 걸렸다더니 이제 좀 괜찮아지셨어요?
언제 우리 집에 한번 놀러오시라요.^^
수니나라님, 어제 님 이벤트 때문에 자다가 깼단 말이야요.
늦어서 참석도 못했지만......
부모님도 그러려니 하시겠죠, 뭐.^^

미완성 2004-10-27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하려고 맘을 먹다보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더 안되는 거같애요.
로드무비님의 마음 부모님이 다 헤아리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연륜이 있으시니까요 헤.
잠은 좀 주무셨는지. (실은 저도 아침에 자서 오후에 깼어요;;)

진/우맘 2004-10-27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흠...... 쪼금 가슴이 먹먹해져서....뭐라 갖다 붙일 말이 생각나질 않아요.

로드무비 2004-10-27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멍든사과님, 연륜은 인격과 상관이 없나봐요.
저 두 시간쯤 자고 일어났어요. 학교 안 가셨나봐요?
오랜만에 뵈니 너무너무 반가워요.^^
진우맘님,
아침밥 그거 별 힘든 것도 아닌데 동네 분식집에서 김밥 몇 줄 사서 드렸다나봐요.
자식들은 참 불경한 존재입니다. 부모에게...

oldhand 2004-10-27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해 한해 부모님 나이 들어 가시는게 참 마음이 아픕니다.
늘 옆에서 부대끼고 같이 살던 시절의 부모님과 장성해서 떨어져 사는 지금의 부모님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것 같아요...

balmas 2004-10-27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처음에는 저는 코믹 에피소드인 줄 알았잖아요 ...^^

물만두 2004-10-27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남는 것은 후회뿐이지요...

깍두기 2004-10-27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격 좋고 음식 솜씨 좋으면 남편에게 사랑받지 뭘 더 바란단 말입니까, 그 친척분들은....

숨은아이 2004-10-27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순간에는, 그게 최선이었을 거예요.

로드무비 2004-10-27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핸드님, 저는 아직까지도 부모님께 짜증을 많이 냅니다.
그게 잘 안 고쳐져요.^^;;
발마스님, 코믹 에피소드로 쓴 건데요?^^
물만두님, 밥도 안 차려드리고 그걸 페이퍼 소재로 써먹다니 제 자신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깍두기님, 역시 뭘 좀 아셔. 히히
제가 보리밭 선머슴아로 친척들 간에 알려졌거든요.
숨은아이님, 최선은요.
문제는 아직도 제가 최선을 다해 살 생각이 없다는 겁니다.

프레이야 2004-10-27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부모님이니까 다 이해해주실거에요. 그래서 더 가슴 갈라지죠.

2004-10-28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10-28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제목 좋죠?(이 교만함!)
배혜경님, 내 부모니까 더 잘해드려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니......
속삭이신 님...^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