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나는 텔레비전 홈쇼핑 애용자였다. 도깨비 방망이를 비롯해 빨강법랑냄비 세트 정도는 애교에 속한다. 러닝머신과 정수기, 비데까지 홈쇼핑 시청중 충동적으로 구입했다. 다행인 건 남편과 이런 점에서 죽이 잘 맞는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남편이 하도 불러서 가보면 "저거 어때?"하고 쇼핑호스트가 한창 소개하고 있는 화면 속의 생뚱맞은 물건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 당시 구입한 빨간통 도도 화장품 분은 아직까지 쓰고 있는데 4년이 넘었는데 써도 괜찮은지 모르겠다. 향기도 다 날아가고 발라도 화사하지 않지만 아까워서 그냥 쓰고 있다. 어디 화장품뿐이겠는가! 안동고등어, 쥐포, 진곰탕, 갈비 세트......홈쇼핑에서 파는 반찬 종류도 에지간한 건 다 사먹어보았다. 홈쇼핑으로 산 마지막 물건이 뭐냐고? 화면으로 봤을 때 두툼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던 쥐포가 종잇장처럼 얇다는사실이 판명나면서 나는 텔레비전 홈쇼핑 이용을 중단했다.
한번 결정을 내리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성격 탓에 몇 년째 텔레비전 홈쇼핑으로 물건을 구입한 적이 없다. 그런데 홈쇼핑에서 좋아하던 남자의 근황을 확인한 적이 있었으니 생각난 김에 소개하려고 한다.
그는 xx수산의 대표로 가자미를 소개하러 나왔다. 알다시피 고등어나 이면수라면 몰라도 가자미는 홈쇼핑으로 만나기 어려운 고품격(?) 생선이다. '반건조 가자미'라는 말에 나는 대뜸 리모컨으로 볼륨을 높였다. 그런데 쇼핑호스트 옆의 남자, 낯이 많이 익은 것이 아닌가! 다소 허무하고 불량한 눈빛의 외모, 노래를 부르면 여학생들을 단번에 사로잡던 비음 섞인 음성. 그 옛날 고등부의 김xx 바로 그였다. 다소 비대해진 중년의 얼굴과 몸에도 그때의 자취는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의 몹시 피로해 보이는 기색이 마음에 걸렸다. 상품판매에 혈안이 되어 오도방정을 떨고 있는 쇼핑호스트 옆에서 그는 마지못한 듯 묻는 말에 한 마디씩 대꾸하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나는 그 가자미 세트를 당장 주문했다. 꾸덕꾸덕 반쯤 말린 가자미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구워 먹어도 맛있었고 무를 깔고 양념간장에 지져 먹어도 맛있었다. 오래 전 한때 내 마음을 잠시 설레게 했던 남학생이 팔러 나온 것이니 마지막 한 마리까지 참 알뜰하게도 반찬으로 해서 먹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가끔 대형마트에서 가자미를 발견하면 그의 얼굴을 떠올리곤 했다. '아무리 경기가 어렵다지만 수산회사는 괜찮겠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찮게 그의 소식을 들었다. 그의 수산회사는 경영이 어려워져 많은 빚만 남기고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족과도 잠시 헤어져 지낸다니 그의 처지가 가슴이 아팠다. 나는 철없이 우리가 늙은 것만 서러워했다.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로 모습이 변한 것, 생선장수가 된 것......그런 것만 애닯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토록 많은 물건을 홈쇼핑을 통해 막 사들였던 그때 우리 부부도 경제적으로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던 때였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텔레비전 화면으로 그의 피로가 읽힌 건......우리는 피차 어찌 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