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도를 사랑한다 - 경주 걸어본다 2
강석경 지음, 김성호 그림 / 난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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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점 높아지는 가을 하늘은 투명한 도자기를 떠올린다. 가마 속 뜨거운 열기를 견디고 나온 맑은 도기 찻잔에 차를 마시면 가을을 마시는 느낌이 날 것 같다. 강석경의 『이 고도古都를 사랑한다』는 그런 차 맛이 난다. 커피향이 아닌 은은한 차향(茶香)을 닮았다.

 

 신라 천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지켜온 경주를 걷는다. 석굴암,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포석정, 안압지 밖에 모르는 내가 남산, 감포, 월성, 황룡사지, 교동을 알지도 못하는 지명을 따라 읊으며 걷는다. 경주는 그저 관광지에 불과했다. 그러니 강석경의 산책로는 신이한 경로였다.

 

 강석경이 들려주는 손금처럼 이어진 경주의 골목, 아름다운 곡선미를 뽐내는 고분들, 폐허가 되었지만 여전히 장엄한 신라의 일부로 남은 궁궐터가 전부다. 골목 담 위에 떨어진 감을 먹거나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갈아입는 능의 풀과 꽃들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오늘도 대릉원 담을 끼고 걸어오다 담 위로 솟은 능선을 보며 미소 지었다. 능에는 풀이 돋기 시작했고 초록 풀을 비집고 노란 들꽃이 깔려 있었다. 바람이 부니 까까머리에 돋아난 풀들이 파르르 물결쳤다. 어던 사심도 구속감도 없으며 순수 자체인 생명들이 우주의 자유를 합창하는 듯했다.’(42쪽)

 

 눈 닿는 곳마다 고분이 보이는 경주,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보물이 있을 것 같은 곳이다. 발길 닿은 곳마다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도시. 그러므로 경주는 거대한 박물관이다. 이를 아는 강석경은 경주가 품은 태곳적 이야기를 듣고자 노력한다. 걷기를 통해, 삶을 돌아보고 생의 근원을 갈망한다. 그러다 경주를 만든 사람들, 경주를 지킨 사람들, 경주를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 창작과 예술을 이야기한다. 그러니 이 책은 작가 강석경의 내밀한 일기이자 떨리는 고백이기도 하다.

 

 ‘내가 그릇을 좋아하는 이유는 비어 있기 때문이다. 차라도 담겨야 제구실을 하겠지만 나는 바라보는 것이 더 좋다. 무엇이든 담을 용의를 지니고 겸손하게 비어 있는 모양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99쪽)

 

 ‘도를 닦는다는 생각 없이 똑같이 반복하다보면 자기 반영이 먼저 된다. 창작 이전에 자기 실상을 볼 수가 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번뇌. 바느질중에 번뇌에 휘둘리기도 하지만 번뇌를 놓고 쉬고 몰입하다가 군더더기가 떨어져나간다. 일 분, 십 분, 백 분 장시간 인욕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단순하기 때문에 닦여진다. 그러니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근본 이치를 터득해야 한다.’(163쪽)

 

 그는 마치 경주를 손금처럼 품은 듯 걷고 또 걷는다. 향토사학자인 고 윤경열 선생 인터뷰를 계기로 경주에 홀려 경주에 정착한 이방인이 아닌 생활자의 산책이라 더욱 생생한 경주를 만날 수 있다. 같은 이유로 이방인인 독자는 조금 낯설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든 생활자가 아닌 방문객은 모두가 여행자가 아니던가. 그러니 경주 지도 한 장을 꺼내들고 하루 종일 천천히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길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강석경의 이 책을 통해 새로운 경주를 꿈꾸고 경주로 달려갈 채비를 끝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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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렸어요, 당신!!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알리는 알라딘 문자는 정말 반갑다. 기다렸던 김이설 작가의 소설이다. 어제 김혜나의 『그랑 주떼』로 만난 은행나무 노벨라 시리즈 세 번째다. 노벨라 시리즈는 한 손에 잡히는 얇은 분량이다. 그렇다고 가벼운 시리즈는 아닌 것 같다. 김혜나의 소설의 경우 금세 읽히지만 여운이 무겁다. 어쨌거나 김이설의 『선화』는 표지 이미지와 제목이 잘 어울린다. 김이설 작가의 책이 나올 때마다 느끼지만 표지가 매력적이다. 차갑고 서늘한 느낌, 기대가 크다.

 

 김이설의 소설과 함께 궁금한 책 몇 권을 담는다. 함민복의 시집과 다른 산문집은 있는데 눈물은 왜 짠가는 없다. 제149회 나오키상 수상작 『호텔 로열, 황선미의 동화 어느 날 구두에게 생긴 일도 궁금하다. 동화는 아이들만을 위한 책이라는 생각은 사라진지 오래다.  반값 판매 중인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원년의 풋볼』, 아직 읽지 못한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그 후』는 해설이 각각 김연수와 김경주라 끌린다.

 

 

 

 

 

 

 

 

 

 

 

 

 

 

 

 

 

 

 

 

 장서의 괴로움을 읽고 당분간 책을 구매하지 않기로 한 다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이 책은 꼭 사야 한다는 마법이 풀리지 않아서 문제다.

 

 

 *결국 몇 권의 책을 주문했다. 우울해서 주문했다. 이러다 내일은 컵을 주문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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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 주떼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2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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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까. 비밀이니 너만 알아야 된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어디서 들은 이야기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그렇다. 김혜나의 소설 <그랑 주떼>는 말하지 못했던 비밀 아닌 비밀에 관한 것이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절대 말해서는 안 되는 상처를 꺼내 이제야 소독약을 바르는 그런 이야기다.

 

 주인공 예정은 동네 무용원의 발레 강사다. 전문적인 발레 수업이 아니라 자세 교정이나 체중 감량을 위해 수강한 수강생을 가르친다. 열다섯 늦은 나이에 예정이 발레를 시작한 건 친구 미국에서 온 전학생 리나 때문이다. 약간의 사시 때문에 왕따를 당하던 예정에게 리나가 친구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리나가 다니는 무용원에서 리나를 기다리다 발레 선생님에게 큰 발과 높은 발등 칭찬을 듣는다.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던 칭찬, 그것이 발레와의 첫 만남이었다. 하지만 예정은 발레를 하기에 좋은 신체 조건에 비해 춤을 추지 못했다. 연습을 하고 동작을 익혀도 춤은 늘지 않았다. 결국 발레리나가 아닌 발레 강사일 뿐이다.

 

 원장 대신 수업을 진행하고 학원을 청소한다. 얼핏 원하던 꿈을 이루지 못한 청춘의 절망에 대해 들려주는 듯하다. 그러나 유치원 아이들이 도착하면서 예정은 흔들린다. 작고 여린 아이들의 몸짓과 마주하면서 과거의 자신을 떠올린다. 여덟 살에 성폭행을 당하고 고모네 오빠까지 몸을 더듬었던 잔혹한 기억과 대면한다. 두려움과 공포에 울부짖는 예정에게 어른들은 윽박지르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다짐만 받을 뿐이다. 그런 예정에게 발레와 리나는 가장 큰 위로였다.

 

 ‘리나의 이야기가 내 안에 가득 차오를수록 나는 점점 가벼워지고, 나는 점점 사라져 갔다. 내 몸이 사라지고, 내 이야기가 사라지고, 내 삶이 사라지는 듯했다. 무겁기만 하던 나의 이야기가, 바닥으로 가라앉기만 했다. 나의 몸이, 공기와 같이, 산소와 같이, 무한히 가볍고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모두 다 사라져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 (63~64쪽)

 

 하지만 리나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마음은 상처받을까 겁을 내고 손을 놓고 만다. 점점 커지는 가시를 숨긴 채 어른이 된 예정은 이제야 그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저 자신도 환한 아이였고 그 빛을 감추는 법을 알지 못한 연약한 아이였다는 걸 말이다.

 

‘아이들의 생김새는 모두 달랐다. 몸이나 얼굴뿐만 아니라, 머리, 어깨, 가슴, 겨드랑이, 배꼽, 허벅지, 종아리, 발가락…… 심지어 피부 색깔까지도 모두가 다 달랐다. 그러나 그 어던 아이도 밉거나 이상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다, 저마다의 빛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 빛을 감추거나 숨기는 법을 결코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 아이들 모두가 다 저마다의 빛으로 홀연히 빛났다. 아주 어렸던 그때의 나에게도, 이토록이나 아름다운 빛이 존재하고 있었을까? 흘러나오고 있었을까?’ (124~125쪽)

 

 무거운 소재인 성폭력과 왕따를 다뤘지만 상처와 슬픔을 무척 아름답고 섬세하게 다룬 소설이다. 가만히 다가와 슬픔을 매만지는 손길이 느껴진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비밀 상자를 매어놓은 끈을 풀어도 괜찮다고 위로한다. 상처가 다 아물 때까지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나만의 상처를 보여주고 이야기를 들려주게 만든다. 그리하여 높게 그랑 주떼를 뛰며 공중으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랑 주떼 - 공중으로 날아올라 두 다리를 일자로 벌리는 발레 동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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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친필 사인이 담긴 책을 선물 받았다. 자목련이라는 닉네임과 내 이름, 그리고 깊고 푸른 바다를 보냅니다란 문장이 있었다. 작가와의 만남, 낭독의 시간, 강연회는 언제나 먼 곳의 일이다. 참여하지 못하는 공간, 후기로 만나는 걸로 족한다. 한데 이렇게 그곳에서 나를 떠올린 고마운 마음 덕분에 나는 바다를, 섬을,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책 어딘가엔 거문도의 깊고 푸른 바다가 있다.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거문도의 바다 말이다. 아는 이는 알겠지만 나는 지척에 바다를 두었다. 그러나 이 바다와 그 바다는 다르다. 분명 다른 냄새를 품고 있을 것이다.

 

 

 

 

 

 

 

 가을 바다는 어떤 빛이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계절마다 같은 듯 다른 옷을 입은 바다. 다시 또 바다를 그리워할 시간이 된 것이다.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는 맥주를 곁에 두고 읽어야 할 것만 같다. 안주는 오징어로도 충분하다. 이미 바다라는 맛난 안주가 있으니까.

 

 한창훈 작가는, 바다를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바다와 가장 멋진 하모니를 이루는 작가이기도 하다. 아니, 그는 바다를 흠모하는 하나의 배인지도 모른다. 파도와 연애하는 항구인지도 모른다. 읽은 책은 <홍합>과 <나는 여기가 좋다>가 전부다. 책장 속 <그 남자의 연애사>는 읽지 않았다.

 

 ‘배는 항구에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여수시에서 지금도 또 만들고 있는 모형 거북선은 바다를 모른다. 배의 목적은 항해이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노동자가 휴식 뒤에 다시 일을 하러 나가듯, 해나 달이 다시 떠오르듯 배는 파도치는 바다로 나가는 게 존재의 이유이다. 만들어진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아서 좋은 것은 무기분이다. 검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검집 속에 들어 있을 때니까.’ (88쪽)

 

 가을에 시를 읽는 것도 좋지만 산문을 읽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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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여자는 위험하다 - 그리고 강하다
슈테판 볼만 지음, 김세나 옮김 / 이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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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언제나 내 생각에 충실히 따를 뿐이다. 나는 절대로 사람들이 원하는 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루 안드레아스살로메, 164쪽)

 

 생각과 다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 건 정말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과 의지를 혼자만 간직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이유로 실천하는 삶을 존경하는지도 모른다. 슈테판 볼만의 <생각하는 여자는 위험하다>에 소개된 여성들의 삶도 그렇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다. 수많은 질타, 압박과 고통을 견디면서 말이다.

 

 과거, 많은 여자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살았다. 가까운 예로, 엄마나 할머니 세대는 남아 선호 사상으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러니 여자는 여자답게, 남자는 남자답게 란 말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 전반의 주요 결정자는 남자가 많기에 <생각하는 여자는 위험하다>라는 반어적인 제목의 책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슈테판 볼만이 주목한 위험한 여자는 표지를 장식한 아웅 산 수 치를 시작으로 잘 알려진 마거릿 대처, 수전 손택, 레이철 카슨, 시몬 두 보부아르, 그리고 내게는 조금 낯선 앙겔라 메르켈, 루 안드레아스살로메, 에미 뇌터 등 모두 22명이다. 얼핏 여성 해방운동에 국한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인류를 의해 희생한, 불평등하고 부당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저항한 삶을 살아온 이들이다. 언제나 그렇듯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세상에 알렸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다거나 명예를 얻은 건 아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웅 산 수 치는 15년 간 가택연금을 당했고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 본연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던 안나 폴릿콥스카야의 삶은 의문의 죽음으로 끝났다. 앙겔라 메르켈은 정치적으로 성공했지만 동독 출신 이혼녀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고 위대한 물리학자 리제 마리트너는 여자라는 이유로 연구소 정문을 이용하지 못했다.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더욱더 정진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 시작한 것에서 나도 온전히 싹을 틔운다. 『작은 것들의 신』을 시작할 때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 나는 한 번도 내가 처한 상황을 괴로워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적이 없다. 내 비밀은,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아룬다티 로이,73쪽)

 

 22명 모두 열정적으로 소모하는 삶을 살았고 살고 있다. 여전히 주변인으로 아웃사이더로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과 응원을 건넨다. 더불어 우리 시대는 위험한 생각이 부족하다. 평화를 위한 위험한 생각, 개혁을 위한 위험한 발언, 공존을 위한 위험한 시도 말이다. 우리 스스로 위험한 생각을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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