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틀넥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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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를 증명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갖가지 서류가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건 타인의 인정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 말이다. 가깝게는 가족, 멀게는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다. 그들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나임을 존재를 증명해줄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둘러싼 환경이 변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는 그런 삶 말이다. 인기 미스터리 작가로 잘 알려진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설 <보틀넥> 속 주인공 료가 처한 상황이다.

 

 료는 2년 전 죽은 여자친구 노조미를 추모를 위해 절벽을 찾았다. 노조미가 생각하다 그만 절벽에서 떨어진다. 의식을 차린 료는 절벽이 아닌 집 근처 공원이라는 사실에 놀란다. 집으로 돌아가 벨을 누르니 낯선 여자가 맞이한다. 놀랍게도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죽은 누나 사키였다. 집 안에 놓인 사물의 위치와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비교하며 사키와 료는 서로를 인정한다.

 

 “두 개의 가능 세계가 교차했다는 헛소리를 가설로 삼는다면, 단순히 합류한 게 아니라 네가 내 세계로 왔다는 게 확실한 것 같지?” (46쪽)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료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사키뿐이다. 사키는 료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깨어난 공원을 찾으며 뭔가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그런데 료가 공원에서 만난 건 살아 있는 노조미였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노조미는 죽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노조미는 료를 알아보지 못한다. 혼란스러운 료는 사키에게 노조미에 대해 묻는다. 사키는 자신을 잘 따르는 밝고 명랑한 후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자신의 세계에서 노조미는 죽은 걸까?

 

 료가 존재하는 세계와 사키가 존재하는 세계는 너무 달랐다. 자주 가던 단골 분식집, 옷가게, 도로의 나무까지 전혀 다른 모습이다. 부모님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고 따뜻하고 환한 기운이 가득했다. 료가 어둡고 부정적이었다면 사키는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료는 점점 자신이 아닌 사키가 태어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사키와 같은 공간에서 살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료는 사키를 통해 이제껏 느끼지 못한 가족의 사랑을 경험한다.

 

 ‘사키를 꽉 붙들고 있으려니 기분이 무척 복잡했다. 할 수만 있다면 거리를 두고 싶은 상대방에서 어쩔 수 없이 딱 달라붙어 있다. 그럴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어느새 호의에 기대고 있다. ……게다가 그러면서도 별로 열등감이 들지 않는다. 그렇구나. 꼭 가족 같다.’ (261쪽)

 

 노조미의 죽음을 밝히는 추리적 요소와 시공간 이동이라는 판타지를 접합한 색다른 즐거움을 주는 소설이다. 더불어 자신의 존재 의미와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소설이라 볼 수 있다.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하는 ‘만약에’란 설정은 이 소설에서만큼은 결코 진부하지 않다. 오히려 특별하다. 내게는 료가 자신의 세계로 회귀했는지의 여부를 떠나 깨고 싶지 않은 꿈처럼 신비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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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왜 읽는 걸까? 그렇게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그냥 읽는다. 아름다운 시어에 반해서, 내가 보지 못하는 사물의 풍경과 내면을 만날 수 있기에 읽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저절로 터득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읽어야 하는 도전 과제는 아닐까. 가끔씩 생각나는 시가 있다. 그렇다고 외울 수 있는 건 아니다. 학창시절, 그러니까 어린 왕자와 여우가 서로를 길들이는 모습에 반했던 나름 순수했던 시절을 제외하면 시를 외우려는 의지는 사라졌다. 그냥 읽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든다.

 

 그래도 당신과 함께 읽고 싶은 시집은 많다. 미안하게도, 추천할 수 있는 명확한 설명을 덧붙일 능력이 내게는 없다. 그저, 이런 시를 함께 읽고 싶은 바람을 전할 뿐이다. 좋아하는 시인은 점점 늘어나고, 읽고 싶은 시집도 많고, 곁에 두고 싶은 시집도 많다. 이 가을, 향이 좋은 차 한 잔, 혹은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시를 한 잔 마셔도 좋을 것이다. 이런 시는 어떨까? 안현미의 시집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에 수록된「돌멩이가 외로워질 때까지」의 전문이다.

 

 

 서둘러 밥을 먹고 낙산으로 산책 가는

 점심시간

 산동에 담벼락에 누군가 그려놓은 낙타가

 베란다 그늘 아래 서 있다

 그늘 아래서 꿈꾸고 있다

 시원한 꿈이겠다

 

 내가 탐하는 그늘은 고비사막에 있다

 내 더듬이는 한번 더듬은 것들을 지문처럼 새긴다

 

 돌멩이가 외로워질 때까지

 돌멩이가 외로워질 때까지

 

 나는 그게 시라고 생각한다

 

 서둘러 산책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점심시간

 

 내가 먹은 밥은 그곳에 있다

 나는 그게 시라고 쓰고 싶다

 

 

 이토록 평범한 일상에서 시는 태어난다. 그곳에 두고 온 밥을 시라 말하는 시인 덕분에 시가 친근하게 다가온다. 눈에 닿는 풍경, 그 안에서 어떤 아늑함과 어떤 시간을 발견하는 시인의 눈을 닮고 싶다. 대단한 소재가 아닌 예사로운 일들로 나열된 하루도 시가 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하루를 채우는 조각들이 시가 된다면 아무도 말하지 못하는 상처와 고통은 이런 시로 태어나는 게 아닐까. 「눈물의 입구」을 통해 잠시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린다. 이 시를 먼저 읽은 당신이라면 반짝이는 눈물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았더라도 모른 척 그냥 지나쳐 주면 좋겠다.

 

 

 여자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혼자입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혼자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바람은 불어오고

 또다른 국면에서는 미늘에 걸린 물고기들이

 죽음을 향해 튀어오르고 있습니다

 

 당신은 수동 카메라도 여자의 이름을 함께 들여다본 사람

 불가능을 사랑했던 시간과 풍랑이 잦았던 마음

 잠시 핑, 눈물이 반짝입니다

 

 수면 위로 튀어오르는 물고기의 비늘도 반짝입니다

 모든 오해는 이해의 다른 비늘입니다

 아픈 이마에선 눈물의 비린내가 납니다

 생각해보면 천국이 직장이라면 그곳이 천국이겠습니까?

 또다른 국면에서는 사랑도 직장처럼 변해갑니다

 

 사, 라, 합, 니,

 이응이 빠진 건 눈물을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첫사랑을 빌려 읽기도 합니다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안현미 / 창비 / 2014년 5월

 

 

 

 그리고 이런 시를 읽는다. 윤희상의 시집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속 「비밀」같은 시.

 

 

 그늘을 따라서

 우연히 숲으로 갔습니다

 숲에서 보았습니다

 나무와 어둠이 합쳐지는 것을

 나무는 없습니다

 더 있다가, 나와 어둠이 합쳐졌습니다

 나는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하는 말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어둠이 하는 말입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

 혹시, 밤하늘의 작은 별들이 보았는지

 그렇지만, 걱정하지 않습니다

 밤하늘의 작은 별과 어둠이 합쳐지는 것을

 나는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밀입니다

 

 

 아름다워서, 자꾸만 읽게 된다. 그리하여 밤이 간직한 어둠 속에서 작은 빛으로 발하는 별빛만이 알고 있을 비밀을 공유하게 된다. 이런 시를 읽을 수 있어, 참 좋다. 당신과 함께 읽고 싶다. 이런 시도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다. 『오래 남는 말』이란 제목처럼 오래 남아 기억되면 좋겠다.

 

 

 지금 번지고 스미는 것은 고즈넉함이다

 

 화실 바닥에 손수건이 떨어졌다 소리나지 않게

 숨을 쉰다 나는 커졌다가 다시 작아지는

 평평한 허파를 보고 있다 언뜻 보면 잎이 큰

 칠엽수 나뭇잎 같기도 하고 하다 약간 들썩이며 흔들린다

 당연히, 손으로 주우려고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것은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 자국이다

 

 낮은 의자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친구의 애인이 나에게 말했다

 

 혹시, 알아요?

 수채화는 젊은 사람들이 그리기 어렵다는 것을

 

 왜요?

 

 수채화는 물감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젊은 사람들이 그것을 기다리지 못해요

 물감이 다 마르기 전에 다시 손이 가거든요

 버릇처럼,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윤희상 / 문학동네 / 2014 년 6월

 

 

 

 

 감당할 수 없는 젊음을 무기로 믿고, 어디서든 푸른 유리 조각처럼 빛나는, 튀어나온 못처럼 상대를 경계하던 시절엔 몰랐을 것들을 알려주는 시. 시는 왜 읽는 걸까. 어쩌면 겸손을 배우기 위해, 어쩌면 상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읽는지도 모르겠다. 시를 읽는 동안 폭발할 듯 커지는 분노나 화가 사라지기 때문은 아닐까. 시를 읽는 동안 짧은 시어에 담긴 무언가를 찾고 싶어 집중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신의 찻 잔에 시를 따르는 손, 내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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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세기
캐런 톰슨 워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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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하루는 24시간, 일 년은 365일이다. 이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보편의 진리다. 누구도 하루가 25시간, 26시간으로 늘어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재앙이라 믿을 것이다. 규칙은 사라지고 불안과 혼돈의 시간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어른과 다르게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캐런 톰슨 워커의 <기적의 세기> 속 열한 살 줄리아처럼 말이다.

 

 아무런 예고 없이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느려진다. 조금씩 천천히 하루가 길어질 뿐이다. 그러나 방송과 언론은 이 현상을 ‘슬로잉’이라 부르며 무서운 미래를 예측한다. 캘리포니아 해안 근처에 사는 줄리아의 집도 마찬가지다. 배우를 했던 감성적인 엄마는 쉽게 동요한다. 산부인과 의사인 아빠의 출근도 막으려 한다. 아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로 엄마의 불안을 무시한다. 줄리아도 평소와 같이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간다. 선생님은 술렁거리는 아이들을 달랜다. 어른들은 식료품을 구매하거나 어디론가 떠난다.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든 줄리아의 관심은 오직 세스뿐이다. 같은 선생님께 피아노 레슨을 듣는 아픈 엄마가 있는 아이, 세스. 어른들은 슬로잉에 대해 요란하게 공포를 드러내지만 줄리아는 주변을 관찰할 뿐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죽은 새를 발견하거나 무심한 듯 아이들 속에서 세스를 찾는다.

 

 ‘시간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우리의 하루는 삼십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루가 이십사 시간이었다는 사실이 아주 낯설게 여겨지기 시작했고, 하루를 호두 껍데기처럼 매끈하게 두 번의 열두 시간으로 딱 잘라 나누는 건 불가능하게 생각되었다. 그토록 단순하게 나눈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의아스러웠다.’(104~105쪽)

 

 슬로잉이 계속되자 정부는 새로운 정책을 시행한다. 클락 타임제,  그러니까 시간에 맞춰 생활을 하는 것이다. 해가 뜨지 않아도 아침 9시가 되면 등교를 하고 출근을 한다. 이에 반하여 태양이 뜨고 지는 것에 따라 생활하는 리얼 타임 생활자도 존재한다. 중력의 변화로 백야는 늘어났고 새들은 날지 못하고 고래는 떼로 죽어간다. 어쩌면 아빠가 엄마가 아닌 피아노 선생님에게 마음을 준 것도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모두에게 예측할 수 없는 삶이 주어졌지만 누군가는 슬로잉에 빠르게 적응하고 누군가는 슬로잉 증후군을 앓는다.

 

 ‘그 해 봄은 시간이 굉장히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스의 머리는 눈을 찌를 정도로 길게 자랐다. 나는 앞머리를 길렀다. 세스는 내 앞머리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는 다리털도 밀고, 브래지어도 착용했다. 이번에는 가슴에 딱 맞는 것을 구입했다. 어느 캄캄한 오후, 세스는 내게 스케이트보드 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가로등이 켜진 거리에서 세스가 내 옆에 바깥 붙어 뛰면서 한 손을 내 등에 얹었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기억난다. 보도의 갈라진 틈에 스케이트보드 바퀴가 빠져 넘어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나는 흐뭇했다.’(315~316쪽)

 

 작가는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재앙을 열한 살 소녀의 시선으로 아주 담담하게 그려낸다. 몸과 마음이 자라는 사춘기의 심리적 변화를 솔직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더 아름답고 눈부신 소설이다. 어떤 재난도 오직 한 번 뿐인 첫사랑이 주는 기적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슬로잉으로 인해 무너지는 어른들의 삶이 아니라 제목처럼 기적의 세기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지지 않는 해와 뜨거운 열기에 대해 어떤 걱정도 없이 세스와 함께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즐긴다. 특별한 성장소설로 기억되는 이유다.

 

‘미래에 대한 예측은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갔다. 하지만 세스와 나는 끄떡없었다. 몸속에 활기가 가득했다. 죽음은 이따금 삶의 증거가 되기도 했다. 쇠약해진다는 건 때로 살아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렸고, 늘 배가 고팠다. 그렇기 때문에 점점 더 튼튼하고 강해졌다. 활기가 넘쳐 몸이 터질 지경이었다.’(332~3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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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이라서 그런지 자꾸 시집이 눈에 들어온다. 도서정가제가 실시되기 전에 갖고 싶고 읽고 싶은 시집을 구매하겠다고 생각했다. 낮에 친한 블로그 이웃과 통화를 하면서도 시집에 대해 언급했다. 최근에 구매한 시집들의 제목과 몇 권의 시집에 대해 콕 찝어 말했다. 그러니까 민음사 시집이었다. 문정희의 <응>, 성동혁의 <6>이다. 한데, 우리의 대화를 지니가 들었는지 이런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시 읽기 좋은 계절, 민음사 시집 알라딘 단독 40% 할인을 진행합니다.’  가을, 시와 사랑에 빠지다

 

 소장하고 있는 민음사의 시집 중에서 좋아하는 시집은 허 연의 <나쁜 소년이 서 있다>, 김행숙의 <타인의 의미>, 김지녀의 <시소의 감정>, 손미의 <양파 공동체> 정도다. 그리고 궁금했던 황인찬의  <구관조 씻기기>, 이장욱의 <내 잠 속의 모래산>,  천수호의 <아주 붉은 현기증>은 이 기회에 곁에 두어도 좋을 듯하다. 부담스럽지 않은 착한 가격이니 자꾸 장바구니가 무거워진다.

 

 

 

 

 

 

 

 

 

 

 

 

 

 

 

 

 

 

 

 

 믿음사에 이어 문학과지성사도 가을 내 책장을 위한 마지막 선물을 기획한다. 조만간 창비와 문학동네도?

 

 

 

 

 

 

 

 

 

 

 

 

 그리고, 이 가을에 반복해서 읽고 있는 건 이런 시.

 

 

 살 무르고 눈물 모르던 때

 눈 감도고 당신 얼굴을 외운 적 있었지만

 한번 묶은 정이야 매듭 없을 줄 알았지만

 시든 꽃밭에 나비가 풀려나가는 것을 보니

 내 정이 식는 길이 저리할 줄 알아요

 

 그래도 마음 당신 생각을 못 이기면

 내 혼은 지읒 시옷 홑겹으로 날아가서

 한밤중 당신 홀로 잠 깰 적에

 꿈결 듯 눈 비비면 기척도 없이

 베갯머리에 살비듬 하얗게 묻어나면

 내가 다녀간 줄로 알아요, 그리 알아요

 -「눈 감으면 흰빛」전문

 

 

 비가 올 거라고 했고

 우산을 가지고 나오겠다고 했다

 

 당신은 우산을 착착 접은 뒤

 사거리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가

 횡단보도를 건널 것이다

 

 비가 올 것 같다는 말은

 어쩐지 희미해

 

 눈을 감으면

 4층에서 1층까지

 

차례로 전등에 불이 들어온다

 

 티스푼으로 뜬 것처럼

 빗물이 파낸

 작은 홈들이 길게 이어진다

 

 반지를 빼서 주머니에 넣는다

 약지에

 흰 띠가 남아 있다

 -「연애」전문

 

 

 눈썹 하나 뽑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손금 들여다보네

 

 손바닥 오므렸다

 손바닥 펼치면

 숱 많은 꽃길이 갈라지고

 비단꽃문 열리고

 

 그 길은 길고 가늘어서

 너는 거기 서 있었네

 

 세상의 이불 덮고

 두잎이 포개는 소리

 꽃물 번지네

 

 너는 오래도록 서러웠고

 내 귀는 닫혀 있었네

 

 꽃길 열리고

 꽃문 닫히고

 비단이불 위에 너의 속눈썹

 꽃술 떨어지네

 당신이 저무네 

 -자귀나무 꽃살문 전문

 

 

 

 

 

 

싱고, 라고 불렀다 신미나 / 창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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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날이었던 지난 9일, 오후 8시를 오전 8시로 알고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검색했다. 온라인 서점에도 노벨문학상을 검색하기도 했다. 아무리 찾아도 수상자는 없었다. 나의 손은 그렇게 엉뚱한 일을 하고 있었다. 연관 기사를 검색하고 읽고, 모두 손으로부터 시작된 일이다. 읽고 싶은 도서나 관심 가는 도서에 대한 리뷰를 읽고 공감을 누르는 일도 손이 하는 일이다. 책을 구매하는 일, 훔치고 싶은 문장을 옮겨 적는 일, 손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나는 손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오른발을 주무르고 매만지는 일도 손이 하는 일인데, 그저 발만 안아주고 말았다. 눈이 보고 놀라는 일에 대한 표현도 눈이 보고 좌절하는 일들 끝에도 손이 있었다.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손을 고마움을 문득 생각한 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문장도, 소설도 결국엔 손에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세계문학이 아닌 책으로 읽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는 이제 더이상 파트릭 모니다노만의 문장이 아니다. 책은 읽은 저마다의 독자에게 새로운 문장이 되었다. 그는 어떤 생각으로 그 문장을 썼을까. 그가 문장을 써 내려가는 동안 손은 얼마나 봤을까. 이런 맹랑한 생각을 한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명확하게 잡을 수 없는 기억과 존재, 정체성에 대한 주제를 놓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내 짐작일 뿐이다. 나는 아직 그의 다른 소설을 접하지 못했고 친절한 출판사가 제공한 글을 통해서 말이다.

 

 

 문학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 잠깐 생각한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 시를 읽고 마음을 다스리는 이유는 어쩌면 소설로나마 타인의 내부를 경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은 아닐까. 그것은 반대로 내가 전하지 못하는 은밀한 내부를 누군가 알아주기 바라는 그런 마음인지도 모른다.

 

 

 

 노벨문학상의 가치는 어떤 걸까. 내가 알지 못하는 나라의 작가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문장, 태어나는 인물, 다시 살아나는 역사의 부조리, 모두가 알아야 하는 감춰지고 숨겨진 잘못들이 그들의 손에 의해 다시 복원된다. 개인 혹은 나라를 다시 주목하게 만드는 힘, 그들의 손은 위대하다. 그래서 『16인의 반란자들』이란 책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문학의 힘을 믿는 사람들, 문학의 기능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어떤 체제와 사상에 반하여 추방되고 생명까지 위협받는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것이, 글을 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요.”  주제 사라마구의 말이다.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라니, 그건 도대체 어떤 사명이었을까. 그들 중 누군가는 사라졌고 누군가는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

 

 

 이제 새로운 반란자를 만나고 싶다. 나의 보잘 것 없는 손이 그들의 고단한 손을 감싸는 일은 그들의 문학을 읽는 것이리라. 그러니 이런 책을 먼저 읽어야 한다.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눈먼 자들의 국가』를 펼친다. 제대로 읽을 자신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4월 16일, 나는 뉴스를 보면서도 걱정하지 않았다. 안산(安山)에 아는 이가 없었고 전원구조, 란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꽃같은 아이들이 꽃처럼 지고 있었다. 황정은의 손이 쓴 글처럼 어떻게 지내십니까, 누군가에게 묻는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내 경우 4월 16일 이후로 말이 부러지고 있습니다. 말을 하든 문장을 쓰든 마침내 당도하기가 어렵고 특히 술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문장을 맺어본 것이 오래되었다. 그런 참에 질문을 해보라는 청탁을 받았다. 물을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쓰겠다고 대답했다. 질문이든 뭐든 말하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사라져버렸고 이대로는 내내 아무것도 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력감을 어떻게든 견디고 내가 좋아하는 소설, 문장을 쓰는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기가 있었다. (황정은 - 「가까스로, 인간」 중에서)

 

 

 다음 주면 사건이 발생한지 6개월이 된다. 내가 사는 이곳의 아이들은 다시 수학여행을 떠난다. 그저 말간 얼굴로 조금은 들뜬 마음을 드러내며 손을 흔들며 떠날 것이다. 봄, 여름, 가을이라는 계절이 지나고 있다. 깊은 바다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언제쯤 알 수 있을까. 나의 손은 당신의 손과 달라서 부끄럽게도 이제 세월호를 검색하지 않는다. 당신의 손이 만든 문장을 읽으며 다시 나의 손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한다. 그저 닿을 수 없는 온화한 마음을 보낼 수 있는 작은 댓글을 달고 공감 버튼을 누르는 보통의 손, 위대하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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