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고 견디는 생을 위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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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자신을 지키며 성장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특히 어디서든 뛰어나올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세상에서는 말이다. 외부의 공격뿐 아니라 내부의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기르려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선택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을 결정한 건 영혜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을까. 영혜는 남편과 가족들에게 충분히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해받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영혜에게 고통과 슬픔, 그리고 절망은 어떻게 설명해도 다른 무엇으로 전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만이 그것을 견디고 화해할 수 있다고 믿은 듯하다. 그러니 남편, 형부, 언니의 눈에 비친 영혜는 심하게 뒤틀린 조형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처음 한강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를 만났을 때 나 역시 그러했다. 영혜의 내면의 상처와 고통을 보려 하지 않았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영혜에 대해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예전보다 영혜를 조금은 인정할 수 있다. 영혜가 아니므로 나는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꿈을 꿨다는 단순한 이유로 하루아침에 채식을 선언한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으로 들려주는「채식주의자」는 영혜의 선택이 평범한 삶을 파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소설에서 매우 평범한 여자로 등장하는 영혜의 변화는 남편을 비롯한 가족에게 단순하게 이상한 행동이었다. 그냥 평범한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랐다고 해야 할까. 그것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은 채 영혜를 윽박지르는 것을 시작으로 강제로 고기를 먹이려 한다. 영혜가 자해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폭력이 아니라 믿는 강요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내 감정과 생각을 타인에게 똑같이 적용시키려는 것, 그것은 얼마나 무서운 폭력인가.
그렇다면 그런 영혜를 통해 예술적 욕망을 채우려 한 「몽고반점」속 그(형부)의 행동은 폭력이 아니었을까. 아내를 통해 어른이 된 처제 영혜의 몸에 아직도 푸른 몽고반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그는 어떤 욕망에 사로잡혔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진 욕망이었다. 이혼 후 혼자 살아가는 영혜는 식물처럼 살고 있었다. 빛과 바람만으로도 충분한 삶. 그것을 예술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은 점차 동물적 욕구로 실현되고 만다. 본능적 욕망이 그를 지배한 것이다. 아내가 그 모든 것을 알지 못했더라면 그는 더 구체적으로 폭력을 가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예정된 수순대로 이혼 후 영혜의 보호자가 되어 동생이 입원한 정신병원으로 찾아가는 언니가 들려주는 자매의 이야기「나무 불꽃」은 처연하다. 세상의 모든 나무는 형제 같다며 섭식을 거부하는 영혜에게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유 없이 때리는 아버지에게 맞설 수 없었던 어린 시절부터 동생을 보호하려 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와 그녀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심정이다. 어떤 형태와 모양으로든 시간을 흐르고 지속되는 삶 속에서 그녀는 나무가 되고 싶은 영혜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해 인정받지 못한 채 그것을 고집하며 지속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이는 얼마나 될까. 반대로 누군가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 대신 질타하지도 않고 지켜볼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이는 얼마나 될까. 어른과 부모라는 이유로 잘 가르치고 키운다는 목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언어와 사고 주입으로 폭력을 가하는 어른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르는 채 휘두른 폭력은 또 얼마나 많을까. 흐르는 시간만큼 쌓인 폭력이 누군가에게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서늘해진다.
나는 문득 말해주고 싶다. ‘……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 (191쪽) 작고 가냘픈 목소리로 물었을 영혜에게 더 이상 삶을 살아내고 버티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생존 자체가 처절함의 연속이었을 영혜의 생을 쉬게 해주고만 싶다. 가만히 영혜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잎사귀가 자랄 몸을 닦아주고 뿌리가 내릴 손을 잡아주고 싶다. 그리고 단단히 뿌리를 내려 바람과 물과 햇빛을 먹는 나무가 된 그녀 곁에 오래 서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