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고 있다. 당연하다. 젊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해도 선뜻 그것을 선택할 수 있을까. 일정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기는 하다. 주름이 깊어지는 얼굴과 짙어지는 기미를 가만히 바라본다. 김중혁의 『바디무빙』때문이다. 김중혁의 산문은 유쾌하고 즐겁다. 그의 산문을 전부 다 읽은 건 아니지만 읽을 때마다 산뜻한 느낌을 받는다. 글에서 그가 글을 쓰는 동안 아주 행복한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상상하게 된다. 마감을 맞추느라 힘겹게 썼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몸을 키워드로 쓴 글이라 해서 나는 약간의 의학적 정보나 인체에 대한 기초 상식과 유머러스한 글을 기대했던 것 같다. 우리 몸에 대한 이야기는 맞다, 그러나 결국은 시간과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수영장에서 마주한 인간의 몸처럼 다양한 기억의 몸에 대한 이야기. 영화, 드라마, 책에서 만나는 몸이라는 언어가 들려주는 속삭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생을 지탱하기 위해 애쓰는 저마다의 몸과의 만남은 애틋하다. 영화 <그래비티>속 샌드라 불럭은 사고로 딸을 잃고 살아간다. 김중혁은 그녀의 종아리와 허벅지를 통해 상실과 견딤을 말한다. 멈출 수 없는 삶이기에, 쉬지 않고 걷고 또 뛰어야 했을 몸. 몸을 써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난다. 잡념을 버리기 위해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내기 위해 끊임없이 손을 움직이던 우리네 어머니를 생각한다.

 

 드라마 <유나의 거리>에서 춤에 대한 언급은 경이로울 정도다. 콜라텍에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 춤을 배우고 이전에 몰랐던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두가 행복하다. ‘춤이란 그런 것이다. 춤이란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것이다.’ (125쪽) 나는 그 드라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몸과 몸이 만나는 경이로움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인간은 결국 시간 속에서 소멸해가는, 스스로를 상실해가는 존재들이다. 우리의 몸은 소멸의 징후를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전광판인 셈이다. 나이가 들면 뼈는 삐걱거리고, 어디선가 시간의 살덩이가 날아와서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한다. 시간이 갈수록 몸을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41쪽)

 

 김중혁의 언어로 들려주는 몸에 대한 이야기. 그냥 스쳐보았던 영화 속 장면이 기억나지 않는 책의 한 구절이 다시 몸으로 들어온다. 그만의 글과 그림으로 만나는 재치 있는 ‘몸의 일기’도 정말 재미있다. 그의 정의가 아닌 내 맘대로 신체 각 부위를 정의해도 재미있을 것이다.

 

 ‘우리의 몸은 인식보다 강력하며, 기억한다고 해서 아는 게 아닐 수 있으며, 안다고 해서 영원히 기억할 수 없으며, 우리가 대체 어떤 존재들인지 영원히 모르고 죽을 확률이 클 것이다.’ (127쪽)

 

 몸이 전하는 말을 제대로 듣는 순간, 우리는 늙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기도 한다. 몸을 원하는 대로 다스릴 수 있다는 착각의 삶에서 벗어나게 된다. 어른들의 말씀처럼 비가 오면 몸이 먼저 소리를 내는 나이가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한 번도 몸을 사랑한다고 말한 적 없는 나는 아프기 시작하면서 몸을 아끼고 극진하게 보살핀다.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몸이라는 존재를 통해 삶을 보는 것이다. 몸과의 소통에 대해 생각한다. 김경주의 아름다운 언어로 만나는『밀어』를 펼친다. 예전과 다르게 이런 문장에 눈길이 머문다.

 

 무릎이라는 단어를 처음 발음했을 때를 기억할 수 없을지 몰라도 무릎이라는 단어를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발음하는 사람의 편에서 단어의 연골들에 무심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사람 하나 찾아오지 않는 저녁에 찾아오는 무릎의 멍을 문득,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불러보고 싶어지는 순간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무릎이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해서야 사람들은 무릎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54쪽, 무릎)

 

 늑골은 등의 풍습을 만들어낸다. 늑골이 어떻게 잠들어 있는지에 따라 등은 지평선이 사라지기도 하고 능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늑골이 입안의 무언가를 뱉어낼 때 그 사람의 악몽이 시작되는 것처럼, 늑골은 육체 속으로 들어와 있으면서도 육체와 함께 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늑골의 가계이다. 마치 우리 자신의 손이 거의 닿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한 육체라는 듯, 타인만의 귀를 대고 그곳의 누군가의, 늑골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등에 닿을 수 있는 우리의 육체는 없다. 손을 닿을 듯 닿지 못한다. (360~361쪽, 등)

 

 생을 지탱하기 위한 필수조건처럼 여겨지는 몸, 한 번도 어루만져 준 적이 없는 몸의 어느 부위를 생각한다. 내가 볼 수 없는 뒷모습을 사랑해야 하는 것처럼, 등이 그리워진다. 등을 기댈 수 있는 누군가의 등, 등을 긁어줄 수 있는 손. 아, 이제 다양해진 기능의 효자손을 장만해야 할까.

 

 몸에 대한 아름다운 문장을 읽는다. 한때는 몸에 새기고 싶었던 문장이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지. 그때 나는 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 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 어려우면 움츠러들고 당당할 때면 활짝 넓어지는 게 어깨지. 당신을 만나기 전, 목덜미와 어깨 사이가 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 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 생각하곤 했어. 이 손이 햇빛이었으면. 나직한 오월의 바람소리였으면. 처음으로 당신과 나란히 포도(鋪道)를 걸을 때였디. 길이 갑자기 좁아져서 우리 상반신이 바싹 가까워졌지. 기억나? 당신의 마른 어깨와 내 마른 어깨가 부딪힌 순간, 외로운 흰 뼈들이 달그랑, 먼 풍경(風磬)소리를 낸 순간.’ (「어깨뼈」, 전문)

 

 몸은 말한다. 어쩌면 몸을 아끼고 사랑하는 게 궁극적인 생의 목적일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이가 타인의 몸도 사랑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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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6-06-24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중혁은 역시 산문이 더 나은 듯해요.

자목련 2016-06-24 15:20   좋아요 1 | URL
이상하게도 산문으로 끌려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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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글이 왜 좋은지 알 것다. 담담한 목소리와 거침없는 목소리의 적절한 조화. 중국에 대한 설명서로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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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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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의 방식과 목적은 다양하다. 궁극적으로는 잊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함이다. 소중한 것을 간직하기 위한 기록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누군가는 사진으로, 누군가는 그림으로, 누군가는 글로 기록한다. 남겨진 기록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고 확인하며 상상한다. 그것은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솔직한 삶의 기록일 때 가능하다. 때로 개인의 기록이 역사의 기록이 되기도 하는데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나는 그렇게 분류한다. 소설가 위화가 아니라 격동하는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를 지켜본 개인 위화가 들려주는 중국 이야기 정도라고 하면 맞을까. 어린 소년부터 청년을 지나 치과의사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가식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중국.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나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무엇이 현재의 중국을 만들었는지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인민, 영수(領水),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山寨), 홀유(忽悠), 10 개의 키워드를 통해 위화가 살아온 시대를 들려준다. 도저히 경험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과거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즐거움과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위화를 통해 중국의 정치를 마주하면서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는 점(서로가 서로를 고발하고 비판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다니), 현재로는 상상할 수 없는 체제(국가에서 직업을 지정해주었다는 사실)로 사람들을 통제했다는 점에 소름이 돋으면서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다. 중국의 역사와 발전이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어느 순간 과연 이 글이 중국에 대한 이야기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민주화 운동 텐안문 사건를 소재로 한 「인민」은 자연스레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떠올린다.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의 열정, 그들이 바랐던 자유, 수많은 인민의 희생과 거대한 역사의 기둥으로 존재하는 인민의 모습을 말이다. 「영수」는 예상했듯 마오쩌둥에 대한 기억이다. 그를 추억하면서 마오쩌둥 이후 중국 정치를 향한 열망은 다시 그 시대를 언급하게 된다니 뭔가 아이러니하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속담이 생각난다. 책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기에 독자로써 「독서」와「글쓰기」에 대한 부분은 특히 집중해서 읽게 되었다. 친구들과 한 권의 소설을 필사하며 함께 읽었다는 부분은 과연 그게 가능한가 싶다가도 그 열정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로 결론을 맺었다. 글쓰기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대자보 쓰기부터 작가가 되기까지 수많은 원고를 투고한 이야기. 그 시작이 좋을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는 소망이 아니라 치과의사(단순 발치사)에서 벗어나 좀 더 편안한 직장생활로 이어지기를 바랐다는 단순한 이유라서 살짝 아쉽기도 했다. 그러나 위화의 글쓰기 철학은 진솔한 여운으로 남는다.

 

 글쓰기는 경험과 같다. 혼자서 뭔가 경험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직접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글쓰기」, 137쪽)

 

 글쓰기가 사람들에게 두 갈래의 인생의 길을 갈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도 있다. 하나는 현실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허구의 길이다. 이 두 가지 길은 건강과 질병의 관계와 같아서 하나가 강대해지면 다른 하나가 필연적으로 쇠약해진다. 내 현실에서의 삶의 길이 갈수록 평범해지는 것은 허구에서의 내 삶이 갈수록 풍부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글쓰기」, 147쪽)

 

 위화의 말대로 자신의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면 타인의 인생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써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말은 최고의 진리가 아닐까 싶다. 「루쉰」과「혁명」은 앞서 들려준 「인민」과「영수」에서 확장된 듯한 글이다. 그러니 반드시 차례대로 읽지 않다도 괜찮다. 마음에 끌리는 단어를 먼저 읽어도 끊어지지 않고 맥은 이어진다. 나머지 「차이」,「풀뿌리」,「산채」,「홀유」는 현재의 중국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중국 경제의 고속성장은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바꾸어버렸다. 우리는 멀리뛰기 경기라도 하듯 물질이 극단적으로 결핍된 시대에서 낭비가 넘치는 시대로, 정치 지상의 시대에서 금전 제일의 시대로, 본능이 억압된 시대에서 욕망이 넘쳐나는 시대로 건너뛰었다. 이 30년이란 세월이 몸을 한 번 웅크렸다가 도약하는 시간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차이」, 194쪽)

 

 우리는 현실과 역사의 거대한 차이 속에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커다란 꿈의 차이 속에서 살고 있다. (「차이」, 216쪽)

 

 놀랍도록 빠른 성장의 이면, 갈수록 커지는 빈부 격차, 진짜와 똑같이 모방을 하는 능력으로 가짜가 주류가 된 세상,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중국 사회의 고발, 그 안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똑바로 보고 오늘을 살아야 한다고 위화는 말한다. 분명한 건 이 책은 위화 한 사람, 개인의 목소리로 전하는 기록이다. 하지만 그것은 곧 사회의 거울이자 자화상이 된다. 그가 쓴 것은 삶이기 때문이다. 위화 개인의 삶이자 현재를 살아가는 중국의 삶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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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문장 - 책 속의 한 문장이 여자의 삶을 일으켜 세운다
한귀은 지음 / 홍익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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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책과 하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소설이라면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의 일부가 내가 지나온 삶과 닮았다고 느껴질 때 소설이 아닌 다른 책의 경우는 반복해서 읽게 만드는 문장을 지녔을 때가 그러하다. 공감을 부르는 문장과 내용이라고 이해하면 좋겠다. 따져보지 않았지만 그런 경우 저자는 대체로 여자다. 독자층을 여자로 겨냥하고 쓴 글도 있지만 다른 글에서도 묘한 끌림이 있다. 한귀은이라는 작가도 그러하다. 작가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그녀의 글에는 부드러운 강함이 있다.

 

 『여자의 문장』은 제목이 암시하듯 문장이 주는 울림을 만날 수 있다. 여자에게 더 많은 답을 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문장은 한귀은이 읽고 선택한 문장에서 그녀의 문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나 같은 독자는 한귀은의 문장에서 힘과 위안을 받는다. 인문학을 가르치는 교수, 한 아들의 엄마,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여자 한귀은의 삶을 공감하는 것이다. 분명 타인의 삶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이야기는 문장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다 알고 있는 소설의 줄거리, 영화 속 주인공의 대사, 일정 부분 겹지는 감정을 나누는 시간을 통해 여전히 성장을 원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한귀은은 자신의 경험을 조금씩 내보이고 지인의 이야기를 통해 지난 삶을 어떻게 이겨왔는지 들려준다. 현재가 아닌 과거, 성숙한 사람이 아닌 불완전한 자아, 강요만 했던 아이와의 관계, 분노하지 않았기에 힘들었던 시절, 편안해진 일상까지. 행복한 삶을 원하지만 타인을 의식한 삶은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어떤 감정을 지나기 위해, 나를 견디기 위해 달렸다는 부분을 읽노라면 그녀와 함께 달리는 내가 보이기도 한다. 달리기의 다른 이름으로 채워졌던 시간들 말이다. 스스로에게 고통을 부여해야만 잊을 수 있었던 시간들.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안아주고 싶은 모습이다.

 

 ‘달리기나 걷기는 삶의 메타포이며, 내가 이겨야 할 것은 과거의 나 자신이다. 뛰기나 걷기는 온전히 자기 몸에 집중하게 해준다. 눈에 풍경이 들어오더라도 그 풍경은 자기 내면이 투과된 풍경이다. 바람 또한 내 몸과 부딪혀서 나의 체온이 된다. 내 몸에서 맺힌 땀은 쾌적한 공기와 만나 나의 체취가 된다.’ (66쪽)

 

 ‘모두들 자신만의 역사, 상흔을 안고 살아간다. 인생에 완전한 실패란 것은 없다. 단지 피득백을 받을 수 있는 경험이 있을 뿐이다. 실패에 내재한 의미를 찾으면 그것을 훌륭한 피드백이 된다. 자신의 아픈 역사와 상흔이 어느 시점에 결정화되는 것이다.’ (85쪽)

 

 그러나 한귀은의 말처럼 그렇게 달렸기에 피드백을 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진심을 전할 수 있다. 지금까지 자신의 몫이라 여기는 삶을 살아내려 혼자 고통을 짊어지고 이겨냈다면 이제는 조금은 비우고 조금은 내려놓음으로 채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아픔이 있는 이가 아픔을 볼 수 있고 상처가 있는 이가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고 실패한 이가 실패의 원인을 분석할 수 있으니까. 지나간 사랑, 서툰 이별에 대해서도 정리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된다. 그리하여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이를테면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젊음에 대한 열망, 늙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한귀은이 제시한 계획은 이렇다.

 

 ‘우리도 한때는 더 아름다웠다. 젊음의 아름다움을 가진 적이 있었다는 거다. 나이 들어 아름다운 사람은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간직해서가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잘 떠나보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른 아름다움을 계발해야 한다.’ (170쪽)

 

 아름다움과의 이별과 다른 아름다움의 계발이라. 그것은 육체적인 의미만을 뜻하는 게 아닐 것이다. 아름다운 삶에 대한 의미는 저마다 다를 터. 현재 자신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간직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을 계발한다는 건 성장하는 게 아닐까. 늦은 나이에 새롭게 도전하는 아름다움, 관계에 있어 주도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환대하기, 나를 더 사랑하고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 것. 나를 위한 시간을 갖는 건 더욱 중요하다. 그러므로 한귀은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만 한다.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나만의 여유를 찾기 위해, 나와 대화하기 위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것은 여전히 유요하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자기만의 삶, 충만한 자아를 갖기 위해서 필요하다. ‘방’이 아니라면 ‘틈’이라도 가져야 한다. 온전히 자신에게 올인할 수 있는 틈,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성장할 수 있는 틈. 그 틈이 개성이 되고 자유와 자존감이 되고 품위가 된다.’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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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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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고향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이동이 아닌 고정된 삶이었다. 주어진 환경을 벗어난 적이 없다. 성격 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다. 여하튼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그것을 인식하지 않았다. 아니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게 정확하다. 내게 아버지는 아버지로만 존재했다. 소년이나 남자가 아닌 아버지로만. 알랭 레몽의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을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버지의 집이자 내가 태어난 곳으로 나의 마음을 데리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집은 이미 사라졌다. 부모도 떠나버렸다.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삶의 한 과정이다. 그러나 사랑할 대상이 사라졌다는 건 인정하기 어렵다. 사랑에 대해 인색했다면 더욱 그렇다. 가족은, 그런 존재다. 서로를 사랑하면서 사랑에 대해 인색하다. 형제보다 부모에게 특히. 그들의 생 일부가 불꽃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열다섯 살, 아버지와의 이별을 슬픔보다 낯선 느낌일 것이다. 전쟁을 겪고, 아주 작고 작은 집에서 10남매를 낳고 키우며 삶을 지탱해 온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와의 다툼이 속상해서 미워하는 마음이 커져만 간다. 아버지가 없다는 삶이 가져올 상실의 슬픔을 예측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언제 어디서든 아버지가 있어 든든했고 영원히 곁에 머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말하지 못했다. 서툴게라도 말해야 했는데 말이다. 소설 속 주인공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자녀들이 그렇다.

 

 ‘칼을 산 것은 우리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에게,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이었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물어물 서투르게 속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족 속에서, 부모님들 사이에서 난파한 사랑, 죽은 사랑에 대해서는 서로 간에 절대로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삼 형제처럼. 그리하여 각기 저 혼자서 침묵을 지켰던, 침묵 속에서 괴로워했던 삼 형제, 멀어져가는, 자신들 스스로도 물리치고 있는 그 아버지에 대해서 감히 말하지 못했던 삼 형제처럼.’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87쪽)

 

 ‘삶은, 진짜 삶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이다. 그런 삶이 아닌 다른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아버지 없이 혼자 사는 것 말이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120쪽)

 

 무뚝뚝한 아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아버지의 삶, 그를 향한 사랑은 뒤늦게 찾아왔다. 원망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알랭 레몽의 자전적 이야기라서 더욱 슬픔이 크게 밀려온다. 사라지지 않는다.

 

 유년 시절의 기억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를 통해 부모, 형제, 고향에 대한 애틋한 애정을 만났다면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는 알랭 레몽의 청년기,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신부가 되기 위해 캐나다와 로마에서 공부를 했던 그가 다른 삶을 살게 된 과정, 아름다운 방황, 운명적인 사랑을 들려준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있다. 그가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나는 아버지를 놓쳐버렸다. 나는 아버지를 그들처럼 알고 지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을 거야. 그렇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모든 사람들 속에서 마음이 아주 편안해진다.’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301쪽)

 

 상상할 수 없었던 소년이며 청년이었던 아버지를 만나는 일은 생경하다. 우리의 지난날이 그러했듯이 아버지의 삶도 그러했는 걸 뒤늦게 마주한다. 삶이 진행될수록 작별의 날들이 다가온다. 우리 삶은 작별과 동시에 전진한다. 어쩔 수 없다. 뒤늦은 이해, 뒤늦은 평안. 아름답고 찬연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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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06-16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포리즘 같은 제목도 와닿지만, 어릴 적 느꼈던 아버지의 존재감을 되짚어볼 수 있는 스토리라니 소설을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자목련 2016-06-16 16:27   좋아요 0 | URL
소설 속 아버지를 통해 저마다의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을 선물하는 소설이 아닐까 싶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6-06-16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너무나 마음 닿는 리뷰! 고맙습니다. 몸은 많이 회복되셨나요? 알랭 레몽의 두 작품 모두 읽어봐야겠어요.

자목련 2016-06-16 16:26   좋아요 0 | URL
마음에 닿았다니, 참 좋습니다!!
몸은 많이 회복되었어요. 고맙습니다^^

blanca 2016-06-16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울 것 같아요. 장바구니에 담아요.

자목련 2016-06-16 16:25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그리움이라고 할까요. blanca 님의 글은 더 아름답지요. 기다려져요, 어떻게 담아내실까.

에이바 2016-06-17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좋죠. 리뷰도 좋아요, 자목련님. 서재가 산뜻해졌어요. 애비 코니쉬! 저도 브라이트 스타 좋아해요..

자목련 2016-06-20 17:19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좋은 소설이었어요. 에이바 님의 리뷰 때문에 이 책이 더욱 궁금해졌으니까요. 저는 영화를 보지는 못했어요. 기회에 되면 꼭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