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 대해 잘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그건 지독한 착각이며 오만이다.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한계를 느낀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이의 생일에 선물을 고르다 나는 주저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혼란에 빠졌다. 결국 문자를 했고 나는 의문이 아닌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미나토 나가에의 『리버스』는 그런 소설이었다.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란 충격적인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후카세’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좋은 학벌을 지녔지만 작은 회사에 다닌다. 사무용품을 배달하고 수리한다. 고등학교까지 절친은 없었고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맛있는 커피가 아니라면 직장 동료나 세미나 친구들이 후카세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 커피는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였고 위로였다. 그런 후카세가 살인자라니. 그는 가면을 쓴 잔혹한 사이코패스란 말인가?

 

 남자친구가 살인자라는 편지를 받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찰에 신고하거나 본인에게 직접 물어봐야 할 것이다. ‘미호코’는 후자를 택한다. 후카세는 3년 전 세미나 동기들과 놀러 갔던 일과 그 과정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나눈 친구가 사고로 죽은 일을 들려준다. 운이 나빴던 사고였지 살인은 아니었다. 미호코와는 단골 커피가게에서 만난 연인으로 발전했다. 후카세에게는 처음 사귄 여자친구였다. 그러나 미호코에게 날아온 편지로 인해 둘의 관계는 깨지고 만다.

 

 3년 전 여행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심한 후카세에게는 네 명이 세미나 동기가 있었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항상 당당한 ‘무라이’, 교사가 될 거라는 확신에 찬 ‘아사미’, 모임의 리더라 할 수 있는 만능 운동꾼 ‘다니하라’, 무슨 일이든 배려하는 넓은 마음을 지닌 ‘히로사와’. 후카세는 히로사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를 진정한 친구로 여겼다. 모두가 즐겁게 떠난 여행에서 히로사와는 죽었고 나머지 네 명은 그날의 음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숨기는 사실이 있다는 게 곧 죄가 있다는 증거야.’ (124쪽)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된 아사미를 일적으로 만날 뿐 무라이와 아사미와는 연락을 끊고 지낸다. 그런데 나머지 세 명에게도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아사미는 자동차에 전단지로, 무라이는 아버지의 선거 사무실로, 다니하라는 선로 위에서 죽을 뻔했다. 누가 그런 일을 벌였을까, 히로사와의 부모님이 배후에 있는 건 아닐까. 후카세는 자신이 조사하겠다며 히로사와의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자신이 몰랐던 히로시와의 여러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안다고 믿었지만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좋아하는 음식과 먹지 못하는 음식조차 말이다. 그리고 밝혀지는 놀라운 진실.

 

   ‘기다란 선 위에 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184쪽)

 

 소설은 살인과 복수에 초점을 맞추는 듯 보였지만 관계와 내면에 대한 이야기다. 후카세가 히로시와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묘한 감동을 불러온다. 고향에서 보내온 꿀을 커피에 타서 먹었던 시간을 추억하고 진실된 우정을 나눈 히로시와를 그리워하는 후카세. 커피를 마시며 읽으면 더 좋을 소설이다. 마지막 반전의 한 문장마저 독하고 진한 커피의 맛으로 다가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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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까지 내렸던 비가 그쳤다. 이번에는 일기예보가 맞지 않기를 바랐지만 바람은 빗나갔다. 아직 짧은 소매의 옷을 입고 있다. 자꾸 팔뚝을 쓸어내린다. 겉옷을 입어야겠다. 꼭꼭 닫았던 창문을 여니 맑고 투명한 건 아니지만 세수를 한 아이의 얼굴처럼 하늘은 싱그럽다. 이웃 님의 글에서 본 빨간 홍옥이 생각나는 아침이다. 그 붉은빛이 고와서 오래도록 곁에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우리 집 냉장고에는 홍옥이 없다. 사과도 없다. 시들어진 포도는 갈아서 체어 걸러 마셨다. 그곳에 포도가 있었다는 걸 잊지 않았지만 이제 포도를 먹는 계절이 아닌 것이다. 언제부터 포도는 여름 과일이 되었을까?

 

 10월의 마지막 밤까지 23일이 남았다. 뜬금없는 말이다. 벌써 10월의 여덟 번째 날이라는 게 놀랍다. 10월은 좀 조급해지는 것 같다. 올해의 시간이 세 달 정도만 남았다는 건 깜빡이는 신호등을 빠르게 건너야 하는 순간처럼 불안하다. 다음 신호등에 건너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서글픔 같은 것이랄까.

 

 아침이 되었다고 느끼는 시각도 점점 늦어지는 대신 밤이 되었다는 신호는 빨리 온다. 깊고 고요한 밤의 결을 매만지는 계절이 된 것이다. 그래서 가을에는 시집이 더욱 끌린다. 시를 읽기 좋은 밤이라고 해야 할까. 전화기에 대고 연인에게 짧은 시를 들려줘도 좋은 밤. 허수경의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가을을 닮았다. 조금은 외롭고 쓸쓸한 가을을 위로하는 시집처럼 다가온다.

 

 별들에게는 빛이 발이었나 봅니다 / 대야는 별빛으로 가득합니다 / 퉁퉁 부은 발에 시퍼렇게 청태가 끼어 / 빛이 되는 건 천체의 일이겠지요 // 별빛의 퉁퉁 부은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 아직도 걷고 있는 이 세계의 많은 발들을 생각합니다 / 바다를 걷다 걷다가 결국 돌아오지 못한 발들에게는 // 차마 안부를 묻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사무칩니다 / 바닷속의 발들을 기다리는 해안의 발들이 / 퉁퉁 부어 있는 가을 저녁입니다 (「발이 부은 가을 저녁, 일부)

 

 한 권의 시집을 온전히 읽는 가을이라면 그 무엇도 부족하지 않은 가을일 것이다. 그리고 한 권의 소설까지. 읽기도 전에 나는 이 소설에 반해버렸다. 컨트 하루프의 소설 『밤에 우리 영혼은』, 아름다운 우정과 소통을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노년의 삶은 어떤 빛일까. 붉은 홍옥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들어진 포도 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버려지지 않는 포도. 누군가 나와 같은 마음으로 이 소설을 읽는다면 알 수 없는 우정을 선물 받는 기분일 것이다. 그 누군가를 나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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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6-10-09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에 우리 영혼은』, 저도 기대하는 소설이에요.

자목련 2016-10-10 11:10   좋아요 0 | URL
에이바 님과 함께 읽는 소설이군요, ㅎ
 
고요한 밤의 눈 - 제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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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때때로 위장의 삶을 산다. 소소한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고 계획적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선택하기도 한다. 후자는 범죄에 가담했을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한다. 범죄가 아닌 경우 다양한 삶을 살아보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배우라면 그런 삶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은 존재한다. 우리는 그를 스파이라 부른다. 고급 정보를 빼내기 위해 신분을 위장하며 살아가는 삶은 긴장의 연속일 것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삶은 행복할까? 

 

 대학 입학 이후 15년의 기억을 잃은 어느 스파이의 이야기라 할 수 있는 박주영의 『고요한 밤의 눈』은 절체절명의 위기와 긴박함보다는 삶에 대한 철학적 관조처럼 다가온다. 스파이를 키우고 주도하는 조직이 등장해 누군가를 조사하고 감시하지만 구체적인 사건 정황은 드러나지 않는다. 때문에 스파이는 우리 주변의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는 착각을 불러온다.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고 사회적 지위를 갖춘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혼자지만 아주 미세한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중간의 점이 사라져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선이 어떤 의지로 다시 연결되기 시작했다.’ (65쪽)

 

 소설은 정신과 의사인 일란성 쌍둥이 언니의 실종으로 단서를 찾는 D와 15년 동안의 기억을 잃은 채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남자 X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X는 유일한 방문자인 Y를 만나 자신이 몰랐던 이야기를 듣고 D에게 상담을 받는다. 놀랍게도 Y는 스파이였고 X도 스파이였다. 자신의 정체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X는 Y에게 의지하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서로가 서로를 탐색하며 거짓 아닌 거짓으로 대한다. Y는 상사 B의 지시로 소설가 Z를 감시하지만 그 이유가 묻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다.

 

 소설에서 보여준 스파이의 존재는 세상이 원만하게 돌아가도록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권력과 자본의 통제를 벗어나는 삶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것이 옳지 않다는 걸 안 누군가는 떠났고 누군가는 사라졌다. 이쯤에서 우리는 D의 언니도 스파이라 짐작할 수 있다. 자발적 실종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소설에서는 그것이 문학이라고 말한다. 소설가 B를 감시한 이유다.

 

 ‘혁명은 사람들의 기억과 핏속, 심장에 있다. 모든 사람의 피를 세탁할 수도 모든 사람의 기억을 지울 수도 모든 사람의 심장을 바꿀 수도 없다. 피는 흐르고 기억은 숨고 심장은 뛴다. 어디선가 여전히.’ (188쪽)

 

 기억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된 소설은 예상했던 추리 스릴러가 아니라 사회적 소설이다. 때문에 누군가는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 안에서 우리의 현실을 발견한다. 진실이 거짓으로 바꾸는 여론, 나도 모르게 내 모든 정보를 누군가가 수집하고, ​정의와 양심을 묵인하는 사회 말이다. 독특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소설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커지는 불안과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삶은 진짜인지 제대로 살고 있는지 답답해진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불안하고 무엇 때문에 불편하지 묻게 만든다. 각자가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작은 점이 되어야 한다고. 점이 모여 선이 된다는 걸 잊었냐고.

 

 ‘포기하지 않는다. 망각에 맞서기 위해 기억한다. 누군가는 쓰고 누군가는 읽는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다시 쓰고 또 누군가는 다시 읽는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계속되고 있다.’ (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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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계절이 사라졌다. 여름이 지난 자리에는 가을이 당당하게 서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정리하고 여름에 사용했던 물건을 정리하는 것처럼 삶의 일부도 정리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풍성함으로 가득한 가을을 느끼면서 여름을 정리한다. 너무 많은 것들로 채워진 삶을 본다. 욕심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가의 물건도 없고 넓은 집에 살지 않고 좋은 차를 타지 않지 않는다. 현재 특별하게 갖고 싶은 물건도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집안을 둘러보면 빈 공간이 없다. 적지 않게 쌓여 있는 책들, 베란다를 가득 채운 살림살이, 주방에 그릇이 가득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버리지 못하고 서랍장에 넣어두는 옷도 많다. 왜 버리지 못하는가? 반대로 왜 버리고 비워야 하는가? 그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물건뿐이 아니다, 관계에 대해서도 그렇다.

 

 왜 단순하게 살아야 하는가? 그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물질에 몸과 마음이 매이지 않아야만, 비로소 인생과 그 본질적 가치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24쪽)

 

 장석주는 단호하게 말한다. 단순한 삶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채우지 않고 비워둔 공간에서 생기를 찾고 빛나는 삶이다. 자신의 인생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는 삶, 그것이야말로 삶을 사랑하는 삶이라고 말이다. 알려진 대로 그는 시골에 산다. 산책을 즐기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산다. 자연에 기대어 사는 그의 글에는 안온한 삶이 있다. 그의 삶이 정답은 아니지만 단순함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정갈하게 정돈된 삶이 주는 평화를 보여준다. 내 주변을 둘러본다. 내게 속한 것들, 그것이 진정 삶의 본질을 위한 것들인가.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빠르게 변화한다. 그 속도에 맞춰 살아야 할 의무가 없는데도 몸부림을 치며 쫓는다. 소읍에 살고 있는 나는 여전히 도시를 갈망한다. 그곳에서 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씩 이곳과 다른 곳을 꿈꾸었다. ​부질없는 욕망을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장석주의 글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눈과 귀로 느끼는 일상의 기쁨을 다시 찾는다.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이 되려는 게 아니라 나의 내면과 마주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한가롭게 걸어본 적이 있는가. 가만히 나무와 꽃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헤아릴 여유가 있었던가. 시골에 살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런 삶과 가깝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욕심으로 마음을 채운 삶에는 여유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걷기는 하늘과 태양과 바람을 가슴으로 품는 일이고, 빛으로 가득 찬 누리 속에서 자유와 고요함 속에서 몸을 끌고 나아가는 활동이다. 전진의 리듬에 존재를 내맡기는 이 무보상적 행위를 통해 얻는 것은 전적으로 무해한 기쁨이다. 날마다 하루의 일부를 쪼개 걷기에 나서는 것은 그것이 내면의 기쁨으로 채우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174쪽)

 

 어쩌면 장석주가 예찬하는 걷기는 여유가 들어갈 틈을 만들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책하기 좋은 계절인 가을이라는 이유만으로 걷기의 이유는 충분하다. 오롯이 가을의 특권인 투명한 하늘과 더운 여름을 견디고 단단한 열매를 맺는 거룩한 자연의 일부와 만날 수 있는 건 기쁜 일이니까. 그런 여유가 쌓이고 쌓이면 자신만의 철학으로 자리할 것이다. 그러니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산책과 리듬은 그 단어만으로도 경쾌한 멜로디가 되는 듯하다.

 

 ‘산책을 한다는 것이 갑작스럽고 단순한 휴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치 걸음을 멈추는 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산책은 오히려 리듬이 달라지게 만든다. 즉, 억압받던 팔다리와 영혼의 능력을 해방시킨다. 산책을 한다는 것, 그것은 우선 억압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나의 여정과 나의 리듬, 나의 표상을 선택할 수 있다.’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236쪽)

 

 이 산문집에는 단순한 삶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좋아하는 꽃들이 피고 지는 것들 보고 집으로 날아드는 수많은 새들과 인사를 나누며 단출한 밥상의 맛을 아는 시골살이와 함께 시인으로 살아가는 삶, 자연을 통해 얻는 즐거움과 사유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정갈한 문장으로 쓰인 시인의 소박한 삶에는 충만이 넘친다. 작지만 작지 않은 삶, 단순함이 주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삶을 소망한다. 최소한의 것들로 살 수는 없지만 최대한을 욕심내지 않는다면 평온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

 

 ‘먹고 사는 것과 상관없더라도 가끔은 들길을 걷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자. 한밤중 곁에서 걷는 친구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밤하늘에 가득 뜬 별들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시집도 읽고, 음악회도 가고, 연극도 보며 살자. (204쪽)

 

 물질에 매몰되는 하루에서 벗어나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보고 높아지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 삶은 결코 어렵지 않다. 타인의 삶과 비교하는 습관을 버리고 상념으로 채워진 마음을 조금만 비워도 충분히 단순해질 것이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고, 중요한 건 복잡하지 않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단순함으로 시작하는 경쾌하고 가벼운 삶이 가까이 있다. 말미를 주지 않고 떠나는 가을을 즐기는 일, 책과 함께하는 산책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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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7 15: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07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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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처음 만나는 건 모두 외부다. 그게 무엇이든 말이다. 내부를 보려면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고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내부의 내부까지 알 수 있는 시간은 꽤 오래 걸린다. 그러니까 첫눈에 반하는 건 거짓일 수도 있다. 나빴던 첫 느낌이 반전의 결과로 이어지기도 하니까. 새로 이사 온 동네가 점점 좋아지거나 불편했던 신발에 길들여지고 낡고 오래된 집을 떠나기 싫은 것도 내부의 내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에서 그런 사랑을 보았다. 그것은 뜨겁게 타올라 식어버리는 게 아니라 천천히 끓어올라 오래도록 온기를 남기는 온돌 같은 사랑이었다.

 

 소설은 화자인‘나’가 1982년 무라이 선생님과 보낸 일 년 남짓 시간에 대한 애틋한 기억이다. 노년의 건축가가 여름마다 사무소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일하는 여름 별장은 소설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스물세 살 건축학도 ‘나’는 1982년 존경하는 건축가 ‘무라이 건축 설계사무소’에 신입 사원이 되었고 여름 별장은 처음이다. 칠십 중반의 무라이 슌스케를 비롯한 오랜 시간 함께 사무소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1950년대에 지어진 여름 별장은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무라이의 건축 철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여름 별장에서 직원들은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경합을 준비한다. 도쿄 사무실을 떠나 도서관 설계에만 집중을 한다. 검색하게 만든다. 막내인 ‘나’는 식사 준비를 돕고 선생님이 지시하신 도서관 내 스태킹 체어 업무를 맡았다.

 

 설계도면과 건축 모형만을 떠올리면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 같지만 소설은 다르다. 여름 별장에서 생활하는 직원들의 모습과 하루하루 달라지는 그곳의 풍경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아름답다. 특히 무라이 선생님의 조카 마리코와 ‘나’ 사이의 감정 변화가 흥미롭다. 건축에 대한 저마다의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점도 색다른 즐거움이지만 건축을 이용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특별하게 다가온다. 건축물 자체의 실질적인 아름다움과 편리한 사용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건축에 대한 대단한 고집과 열정에 감탄하고 만다. ‘나’ 가 스승이 만든 교회에 대한 설명을 듣는 부분에서는 귀를 기울이면 그 작은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건축가가 만든 것에는 크고 윤기 있는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듯한 느낌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선생님의 건축은 들리지 않아도 상관없어, 라고 할 정도의 소리랄까. 작은 소리를 감싸는 작은 것이라고 할까.” (81쪽)

 

 소설 곳곳에서 무라이 슌스케가 추구하는 건축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며 소설에 등장하는 건축물을 검색하게 만든다. 모든 건축은 사람과 함께 공존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는 집, 사람이 머무는 공간에 대한 건축가의 세심한 계획은 건축물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도 스며들어야 한다는 철학을 ‘나’는 스승에게 배운다. 사람의 손이 닿는 곳의 느낌도 놓치지 않고 건축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깨닫게 한다. 건축가의 역할과 존재에 대해 말이다. 그것은 비단 건축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기에 독자에게도 큰 울림을 전한다.

 

 “간단하고 간결하다는 것은 사람을 가리지 않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 설명하지 않아도 어떻게 사용하는지 저절로 알 수 있으니까 말이야. 건축에서 사소한 장치를 생각할 때도 사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그 장치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이상적인 거야. 취급 설명서 따위 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우위라고.” (114쪽)

 

 젊은 건축가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냈지만 절대 지루하지 않다. 그것은 간결하면서도 탄탄한 문장으로 건축에 대한 철학과 여름 별장이라는 공간을 아름답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마치 1년 동안 여름 별장에 그들의 곁에서 지낸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여름 별장의 외부가 아닌 내부까지 사랑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건축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거나 공부하는 이들은 내부의 내부까지 만났을지도 모른다.

 

 ‘여름 별장을 철수한 9월 중순에는 울창한 숲이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 같았는데, 지금은 노랑, 빨강, 초록으로 나뉘어, 한 그루 한 그루의 형태와 크기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이미 거의 모든 잎을 떨어뜨리고 겨울에 대비한 나무도 있었다. 숲속은 멀리까지 전망이 트이고, 색채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줄기랑 가지는 상량식을 올린 가옥의 뼈대 같았다.’ (327쪽)

 

 모든 건축물은 사라진다. 무너지고 부서진 곳을 고치고 수리해도 결국엔 사라지고 만다. 외부는 그러할지라도 내부 깊숙이 닿았던 손길과 온기, 그리고 추억은 영원할 것이다. 여름 별장에 남은 그 해의 여름처럼 오래도록 깊이 각인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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