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의 품격 - 조선의 문장가에게 배우는 치밀하고 섬세하게 일상을 쓰는 법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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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는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대단한 글쓰기를 하는 줄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것인지 써야 할 것들에 대한 부담이 늘어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좋은 문장을 만나면 반갑고 부럽다. 나의 기록을 생각한다. 사소하고 소소한 것들을 기록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한때는 좋은 글을 쓰고 싶었던 욕망이 있었다. 블로그 검색을 통해 찾아보니 어떤 날은 답답한 마음이 고스란히 글에 있었고 어떤 날은 커다란 분노가 거기 있었다. 서로 다른 감정이 글에서 자라고 있다니 놀라웠다. 글이란 참으로 신기한 것이라서 말보다 강한 힘을 지니기도 한다. SNS에 올라오는 글도 그렇다. 어쩌면 그렇게 글을 잘 쓰는지 모르겠다. 짧고 간결한 문장에 자신만의 색을 담은 글은 정말 대단한다. 글은 공기와 같아서 함께 나누고 공유할 수 있다.

 

 좋은 글을 만나는 즐거움은 쓰는 즐거움 이상으로 크다. 그러니 안대회의 『문장의 품격』에서 만난 조선시대 문장가 7인의 문장을 읽는 건 더운 여름의 소나기처럼 반갑다. 잘 알려진 허균,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정약용과 조금은 생소한 이용휴, 이옥의 글은 저마다 고유한 개성을 보여준다. 좋은 문장을 친절한 안대회의 해설로 만날 수 있다. 17~19세기 조선시대의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온 7인 7색의 즐거움이라고 할까. 그렇다고 그들의 글이 모두 정치, 문학, 경제를 논하는 건 아니다. 그저 평범한 하루하루를 그린 풍경이며 누군가를 향한 애도의 글이며 우정을 전하는 편지글이며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와 같다. 그들에게 글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었고 자신과 시대를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신기하게도 시대를 바라보는 문장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국가의 일은 날이 갈수록 그릇되어가고, 선비의 행실은 날이 갈수록 허위에 젖어들며, 친구들끼리 등을 돌리고 저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배신 행위는 길이 갈라져 분리됨보다 휠씬 심하다.’ (19쪽, 허균) 허균의 문장은 지금 현재 우리 사회를 꿰뚫는 듯하다. 자신의 생각을 올바르게 정리하고 쓸 수 있는 힘, 그것이야말로 문장의 품격이다.

 

 박지원의 산문은 무척 편안하고 아름다웠다. 큰누님을 잃고 쓴 제문에는 그리움이 가득했고 짧은 편지를 소개한 척독집(尺牘集)은 유쾌한 위트가 넘쳤다. 그러나 계속해서 읽고 싶은 문장은 마음을 고요히 가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글이었다. 문 밖의 소리에 대한 비유로 정말 매력적이다. 그런가 하면 책만 보는 바보로 익숙한 이덕무는 책만 읽는 자신의 모습을 쓴 글이 많았다. 반복되는 일상을 다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책과 글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우직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짧은 글로 자신의 전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가. 생활문장의 진수라 하겠다.

 

 ‘깊은 솔숲에 바람이 이는 소리가 났는데 이는 듣는 이가 흥분했을 때이고, (…)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는 소리가 났는데 이는 듣는 이가 놀랐을 때이고, (…) 거문고가 웅숭깊게 어울려 연주하는 소리가 났는데 이는 듣는 이가 슬플 때이고,(…)’ (112쪽, 박지원)

 

 ‘내가 사는 집은 저잣거리 바로 옆이다. 해가 뜨면 마을 사람들이 장을 열어 시끌벅적하다, 해가 들어가면 마을의 개들이 떼를 지어 짖어댄다. 그러나 나만은 책을 읽으며 편안한다.’ (146쪽, 이덕무)

 

 박제가의 문장에는 자신감이 넘쳤고 이옥의 글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야기로 쓰고 싶은 욕망이 느껴졌으며 정약용의 친근하고 편안한 글에서 귀양살이의 고단함은 찾을 수 없었다. ‘바람을 맞으며 밥을 먹고, 물 위에서 잠을 자며, 파도 위의 오리처럼 둥실둥실 떠다닌다. 때때로 짧은 노래 작은 시를 지어, 기구하고도 뇌락(牢落)한 심경을 스스로 펼쳐낸다. 이것이 내가 바라는 삶이다.’ (282쪽, 정약용)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자신의 삶을 치밀하고 담백하게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재능을 떠나서 삶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새로운 변화를 꿈꾸던 7인의 문장은 그런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내면의 목소리를 투명하게 발산할 수 있는 문장을 갖고 싶다. 우선은 쓰는 즐거움을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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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나이 - 완성된 삶을 위하여
로마노 과르디니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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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괜찮게 사는 것과 괜찮게 죽는 것에 대해 생각이 많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지만 제대로 살고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다. 그러나 살면 살수록 삶은 어렵고 나이에 맞게 산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쉬운 예로 옷을 하나 구매할 때도 나이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 옷을 입어도 괜찮을까, 이런 신발을 신어도 괜찮을까. 어른답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람답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가 맞겠다.

 

 지나온 나를 마주하는 순간은 두렵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인데도 과거의 잘못이나 어리석은 행동이 여전히 부끄럽기 때문이다.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때는 모든 게 빨리 지나 과거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많았다. 후회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 복잡한 생각이 우울로 넘어갈 위기에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로마노 과르디니의 『삶과 나이』를 만났다. ‘삶과 나이’라는 제목을 자꾸만 삶과 나로 읽는다. 책은 인생의 시기별로 나타나는 특징과 가치를 말한다. 태아, 유년기, 청년기, 성년기, 노년기로 구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들려준다. 유년기에 대한 이런 글을 통해 우리는 존재 그 순간부터 독립된 자아를 꿈꾸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의존했던 부모에게서 벗어나 진정한 나와 마주하기를 바랐던 시간은 본능과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입장이 바뀌어 부모가 되면 여전히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소유의 개념으로 보니 갈등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성장 과정의 목표는 타인과 구별되는 고유한 자아를 정립하고, 자유와 책임을 지는 인격으로 서는 것, 그리하여 세계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세계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아가 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 열립니다. 로서 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3쪽)

 

 ‘청년은 사실이란 것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그러한 것. 원칙에서 도출되지 않는 것, 그래서 원칙으로 제압하고 제거할 수도 없는 것. 원칙에 어긋나는데도 버젓이 존재하는 것, 그러기에 고려 대상에 포함시켜야 하고, 오랜 노력을 기울여야만 장악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사실의 세계인 것입니다. 젊은이는 이제 무엇이라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이 무엇인지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끈기, 참을 줄 아는 힘입니다.’ (70~71쪽)

 

 청년에게 도전과 끈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단연 도전이 압도적일 것이다. 청년의 시간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은 도전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수많은 시행착오의 끝에서 도전과 함께 반드시 필요한 게 끈기가 아닐까 확인하는 게 아닐까 싶다. 지나온 시절이 아닌 다가온 나이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철학자의 조언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어느 시절의 나를 글로 만나니 엉망으로 살았구나 싶어 지난 나에게 미안하다.

 

 어쩌면 인간은 누구나 같은 시기를 거쳐 성장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기마다 필수적으로 경험하는 감정과 관계를 어떻게 대처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삶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부모와의 친밀감이 중요한 유년기, 존재에 대한 가치를 확립하고 나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려는 청년기, 자신이 한계를 경험하고 권태에 빠지는 성년기와 죽음에 대한 공포로 무기력한 노년기를 통해 하나의 생과 만난다. 부모, 형제, 친척, 그리고 친구의 부재가 늘어난다. 100세 인생이라고 하지만 누구에게나 남은 생이 똑같을 수 없기에 이런 글로 마음이 기운다.

 

 ‘하루가 끝났다, 일주일이 끝났다, 한 계절이 끝났다, 한 해가 끝났다. 또한 다음과 같은 의식도 더욱 뚜렷해집니다. 지금 하는 일을 어제도 했었다, 오늘 겪는 일은 일주일 전에도 겪었던 일이다. 이 모든 것이 그 사이에 흐르는 시간을 움푹 쪼그라들게 만듭니다. 삶은 점점 더 빠르게 미끄러져갑니다.’ (96~97쪽)

 

 ‘죽음은 의사가 위독하다는 진단을 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됩니다. 기력이 떨어지고, 삶의 반경이 좁아지고, 타인의 의존 정도가 커지는 것과 같은 쇠락의 과정이 삶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순간부터 이미 죽음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령의 시기에 어떤 가치형상이 있다면, 그것의 핵심은 죽음을 향해 올바르게 나아가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25쪽)

 

 같은 세대, 혹은 다른 세대와 점점 이해보다는 오해가 쌓인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단절된 관계는 회복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고 나서야 후회한다. 나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와 더불어 타인의 그것을 이해하고 가까이 다가가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어느 시기에 속했든 자신의 삶을 점검하는 시간이 필요한 이라면 『삶과 나이』란 멘토와 만나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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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의 열매
한강 지음 / 창비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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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를 살고 오늘을 사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누군가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저 살아갈 것이다. 누군가는 정해놓은 목표를 바라보고 살아갈 것이다.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주어진 숙명이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픔과 상처가 나의 몫이라는 게 때로 가혹하고 부당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도 견뎌야 한다고 말해주는 이가 있다면 조금씩 괜찮아지기도 할 것이다. 결코 밝지 않은 한강의 소설엔 그럼 힘이 있다. 이상하게도 맨살로 맞이하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점차 사그라드는 기분이랄까. 한강의 소설 속 인물은 모두 평범하다 못해 조용한 사람들이다. 환하게 웃음을 짓거나 크게 소리 내어 웃지 않는다. 행복해서는 안 된다고 학습을 받은 사람들처럼. 

 

 『여수의 사랑』이 그러했고 『내 여자의 열매』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이 바라는 건 커다란 행복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존재 증명이며, 타인과의 소통일 뿐이다. 아프다고 말했을 때 아프구나, 힘들지? 하고 물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함께 고통을 나누자는 게 아니라 아픔을 인정받고 싶을 뿐이다.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남편에게, 연인에게. 화자의 나이에 상관없이 말이다. 인정받지 못한 삶은 상처로 자신과 상대에게 상처로 이어진다. 상처받은 삶은 모든 관계를 부정하고 고립을 원하기도 한다.

 

 사랑했기에 소유해도 된다고 믿고 자신과 거리를 두는 여자를 향한 분노를 쏟아내는「어느 날 그는」의 남자와 완벽한 삶을 완성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선택하는 「아기 부처」의 남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내는 모두 그들만 상처받았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할퀴고 간 자리에 남은 흔적을 뒤늦게 발견하고 만다. 그리고 그들이 혹독한 겨울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폭설과 비바람을 견디며 자라는 숲의 솔잎이 항상 초록빛을 띄고 있다는 걸 마주하는 아내가 봄이 온다는 사실에 작게 안도하는 것처럼 우리네 삶도 같을 것이다. 생명력 질긴 식물처럼 살고 싶은 욕망 말이다.

 

 ‘겨울에는 견뎠고 봄에는 기쁘다.’ (「아기 부처」, 125쪽)

 

 누군가는 이미 그 겨울을 지나왔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지금 그 겨울을 살아내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에게는 그 겨울이 존재하지 않을 거라 믿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다는 사실이 있어 다행이다.

 

 이 소설집을 말할 때 연작소설 『채식주의자』의 씨앗이라 할 수 있는 「내 여자의 열매」와 『흰』을 떠올리게 만드는「아홉 개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온몸에 푸른 멍이 번지기 시작하여 점점 초록의 식물로 변해가는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은 있는 그대로의 아내를 존중하고 사랑한다. 무엇이 아내를 변하게 만들었는지 아내가 꿈꾸는 삶이 무엇인지 화를 내고 질책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의 남편과 가족처럼 영혜를 탓하고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계절이 바뀌면서 열매를 맺고 사라져가는 아내가 다시 봄이 되면 꽃을 피우기를 소망한다.

 

 ‘봄이 오면, 아내가 다시 돋아날까. 아내의 꽃이 붉게 피어날까. 나는 그것을 잘 알 수 없었다.’ (「내 여자의 열매」, 242쪽)

 

 하나인 듯 하나가 아닌 듯한 「아홉 개의 이야기」는 소설집 전체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다가온다. 순진하고 순수한 첫사랑의 떨림, 나직이 나를 부르는 봄바람 같은 목소리라고 하면 좋을까. 그것은 한강의 목소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저기 봄이 오고 있다고, 봄에 함께 기뻐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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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7-21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자목련님은 희망적으로 읽으셨네요 . 저는 남편의 이기로 읽었는데 ..나는 꼼짝 앉고 있을거니까.. 당신이
다 알아서 해 ..하는 무심함 ... 새싹이 날까..알수없었다.
하는부분...나길 바라는 맘이 아니어서 ...이 남자 끝까지
이기적이야..그랬어요 .^^;

아무튼 여지가 많아 좋아요 . 이런 저런 생각거리가 많아서~^^

자목련 2016-07-25 10:29   좋아요 1 | URL
식물이 되기를 원한 아내의 바람이 이뤄지기를 바랐어요. 그랬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다시 읽으니 새롭게 보여요, 이래서 재독을 하고 삼독을 해야 하는 건가 봐요, ㅎ

[그장소] 2016-07-25 12:08   좋아요 0 | URL
다시 읽어도 재미있는건 재미있어서 좋은것 같아요 . ^^

자목련 2016-07-26 17:49   좋아요 0 | URL
기억하는 문장이 맞는지 확인할 수도 있고, 좋아하는 작가라면 작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은 착각도 할 수 있구요, ㅎ

[그장소] 2016-07-26 17:50   좋아요 0 | URL
그 착각도 즐겁게 즐기면서요~^^
 

 필립 로스의 소설은 묘한 끌림이 있다. 같은 주제를 다양한 시선에서 다룬다고 해야 할까. 그의 소설에는 죽음, 분노, 욕망, 본능이 있다. 분명 다른 작가의 글에서도 만날 수 있는 주제다. 그러나 필립 로스의 소설에는 그만의 힘이 느껴진다. 아무렇지 않게 대놓고 욕망을 드러내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정말 자연스럽다. ​때로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순진한 목소리를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전락』에 이어 『죽어가는 짐승』을 통해 그는 늙음과 죽음에 대해 접근한다. 떨어져서는 안 될 한 몸처럼 붙어 다니는 늙음과 죽음. 스스로 늙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가까이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거부할 수 없다.

 

 소설은 대중에게 잘 알려진 비평가 케페시가 『포트노이의 불평』과 마찬가지로 특정인에게 자신의 8년 전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한다. 그는 1992년 예순둘의 나이에 대학에서 자신의 강의를 듣던 여학생 콘수엘라의 건강한 육체에 반하고 만다. 이혼을 한 그는 여러 차례 여학생과 사귀었기에 어떻게 콘수엘라에게 접근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비평 수업이 끝나고 자신의 집에서 파티를 열고 학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계기로 스물넷 콘수엘라와 가까운 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나 사회적인 관습을 무시하고 자신의 지적능력과 권위를 이용해 부적절한 관계를 즐겨왔던 그에게 콘수엘라는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콘수엘라의 매력에 빠진 케페시의 삶엔 그녀만 존재한다. 심지어 그는 콘수엘라의 남자 친구를 질투하기에 이른다. 케페시의 늙은 육체에서 뿜어나오는 욕망은 콘수엘라의 젊고 탄력적인 육체의 정열에 굴복당한 것이다. 그렇다. 노 교수와 젊은 여제자의 사랑이 아니라 일방적인 케페시의 사랑인 것이다.

 

 이쯤 되면 누군가는 박범신의 『은교』를 떠올리거나,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 결말을 맺었을까, 궁금할 것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 역시 그러했으니까. 그러나 필립 로스가 소설에서 말하는 건 사랑이 아니다. 죽음이다. 죽어가는 짐승에 관한 것이다. 8년이 지난 지금 케페시를 찾아온 콘수엘라가 그러했다.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뭔가 부족했다. 콘수엘라를 가장 빛나게 했던 가슴에 문제가 생겼다. 죽음과 가까운 삶을 사는 건 케페시가 아닌 젊은 콘수엘라였다. 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한 콘수엘라는 절대 모자를 벗지 않았고 자신의 상징이었던 아름다운 가슴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온 것이다. 케페시 앞에는 쿠바를 사랑하는 부모를 둔 당당했던 콘수엘라 대신 두려움과 공포로 하루하루를 견디는 콘수엘라가 있었다. 어느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을 나누고 싶었던 것일까. 그토록 아름다웠던 아이가 죽어가고 있다니, 케페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신의 절망과 슬픔을 콘수엘라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케페시.

 

 아, 그냥 쾌락의 몸짓과 파격적인 연애 이야기였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부도덕한 삶을 즐기는 케페시를 질타하고 끝냈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죽는다는 건 공평할 수 있지만 죽음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어디서든 다가오는 죽음. 누군가에게는 달려오고 누군가에게는 천천히 걸어온다. 우리 생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걸 안다. 그것이 목표가 아닌데도 그렇게 가고 있다. 생을 지속할수록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난다. 무엇이든 쉽게 말할 수 있던 시절이 존재했다는 게 놀랍기도 하다. 노년의 삶을 짐작했던 시절, 모두가 늙고 죽는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시절은 행운이었다. 다시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모르는 채 살아가는 모두에게.

 

 ‘죽어가는 것과 죽음은 구별해야 해. 아무런 중단 없이 계속 죽어가기만 하는 게 아니야. 건강하고 몸이 좋다고 느끼면 보이지 않게 죽어가고 있는 거야. 확실한 종말이 반드시 대담하게 선언되는 건 아니야.’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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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6-07-18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로스가 노교수와 여제자의 사랑을 통해서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그만의 그 깊이있는 시선이 너무 놀라웠어요. 자목련님의 리뷰를 읽으니 내일은 이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목련 2016-07-20 10:19   좋아요 0 | URL
정말 필립 로스는 대단한 작가 같아요. 그의 소설을 읽을수록 그에게 빠져들어요. 아직 읽지 않은 소설이 많으니 다행일까 싶어요.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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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에서 기억은 아주 중요한 주제다. 그의 소설에서 기억은 모든 감정의 집합체로 나타난다.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찾는 여정,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 조각난 기억을 맞춰 삶을 이어가고 싶은 간절함이 가득하다. 잊었다고 믿었던 기억이 불쑥 떠오르는 순간의 감정을 색으로 표현하자면 무슨 빛일까? 인디언 핑크처럼 아련한 색일까. 그게 어떤 색이든 선명한 색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기억을 탐미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는 기억이란 그 자체가 존재의 증명이라는 걸 말하는 듯하다. 노년에 접어든 소설가 장 다라간에게 젊은 시절의 기억은 별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운 빛과 동시에 우울하고 암울한 기억이기도 하다. 그것은 유년의 어느 시절에서 기인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그것을 점차 잊고 지냈다. 모두가 그러하듯이.

 

 잃어버린 수첩이 장 다라간에게 돌아오듯 그 시절의 기억이 돌아온다. 수첩을 돌려받는 자리에게 장 다라간은 한 남자의 이름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그의 소설 속에도 등장한 인물. 과연 그는 누구일까. 장 다라간과 마찬가지로 독자는 그가 궁금하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은 기억을 더듬는 여정으로 이어진다. 잃어버린 수첩, 낯선 남자, 기억에서 지워진 이름, 어렴풋이 떠오르는 하나의 사건.

 

‘예전에는 새로운 만남이 급작스럽고 거침없기 일쑤여서 사람과 사람이 어린 시절 타던 유원지 범퍼카처럼 길에서 서로 맞부딪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든 게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잃어버린 수첩, 전화 속 목소리, 카페에서의 만남…… 그래, 모든 게 꿈결처럼 가벼웠다.’ (64~65쪽)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설정은 이미 익숙하다. 기억 저편에 자신을 다정하게 돌보는 여자와 그 곁에 한 남자, 낯선 거리, 그리고 선명하게 떠오른 하나의 장면. 그랬다. 꿈처럼 흐릿했던 기억은 점차 선명하게 그 존재를 드러낸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애써 모든 사실을 설명하지 않는다. 낯선 장소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주소를 적은 쪽지에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란 세심한 마음까지 전했던 여자의 실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왜 부모님과 헤어져 그 여자와 살았는지, 왜 자신을 버렸는지. 그저 천천히 기억을 따라 장소를 거닐고 그곳을 묘사할 뿐이다. 누구나 그런 기억 하나쯤 간직하고 있다는 걸 말하는 듯. 그러니 사건은 해결되지 않아도 괜찮다. 기억은 아픈 상처를 증명하기도 하고 그리움의 다른 말이며 현재를 만든 조각이라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때로 잊으려 애쓰고 새로운 기억으로 덮는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다 우리는 어느 순간 찾아오는 기억이라는 감정과 마주할 것이다. 흐릿해지다 점점 선명해지는 기억과 말이다. 그때는 소설 속 장 다라간처럼 한 발 떨어져 가만히 바라봐야겠지.

 

 ‘우리는 불편하거나 너무 고통스러운 인생 소사들을 결국에는 잊는다. 깊은 물 위에 눈을 감고 누워 물을 가만가만 실리기만 하면 된다.’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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