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자아실현을 위해 직업을 갖는다고 거창하게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생계를 위해서다. 먹고살기 위해 지긋지긋한 직장에 나가고 적게나마 저축을 한다. 꿈꾸는 미래는커녕 당장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많은 게 요즘 현실이다. 그러니 사직서를 가슴에 품었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상대가 누구든 말이다.

 

 취업이 어려운 시대에 직장에 대한 고민과 불만은 복 겨운 소리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힘든 건 힘들다고 말하고 부당하다는 건 부당하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어쩌다 우리는 이런 사회에 살게 된 것일까. 쓰무라 기쿠코의 라임포토스의 배를 읽다 보니 잊었다고 생각했던 상사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나쁜 말을 하게 된다. 반면 마음이 맞는 동료가 있었기에 힘들었지만 즐겁게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 지루할 만큼 반복된 일상에서 휴가나 여행은 보상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공장일이 끝나면 친구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주말에는 컴퓨터 강의를 하고 밤에는 데이터 입력을 하며 돈을 모으는 스물아홉의 나가세는 그저 살아간다. 그저 물만 주면 잘 자라는 라임포토스를 키우는 게 유일한 나가세의 취미라 할 수 있다. 일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 대신 도구처럼 사용되는 자신의 모습에 우울하기만 하다.

 

 ‘‘시간을 돈에 파는 듯한 기분’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 몸이 굳었다. 일하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계약직으로 고용한 회사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역겨웠다. 시간을 팔아 번 돈으로 음식물과 전기, 가스와 같은 에너지를 고만고만하게 사들여 겨우겨우 살아가는 자신의 불안한 삶이.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이.’ 「라임포토스의 배」, 14~15쪽

 

 그러다 휴게실에서 세계일주 광고 포스터를 통해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일 년 치 월급과 맞먹는 163만엔.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50년 된 낡은 집도 수리해야 한다. 우선은 실현 가능한 지 모르지만 목표를 세운다. 나가세는 점점 더 돈을 아낀다. 전업주부로 살고 있는 친구가 함께 놀러 가자는 제안에 어쩔 수 없이 나가지만 머릿속으로 돈 계산에 바쁘다. 설상가상으로 다른 친구가 남편과 별거를 하면서 아이와 나가세의 집으로 들어오고 생활은 더 쪼들리게 된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도 받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어머니와 친구 모녀가 가깝게 지내는 모습에 서운한 마음도 든다.

 

 ‘돈 때문에, 돈을 쓰지 않으려고, 무익한 시간을 만들지 않으려고 열심을 일을 한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조금 떨어진 곳에 사는 친구 집에 갈 여유조차 없다. 세계일주 비용은 순조롭게 쌓여갔지만 나가세는 왠지 모르게 허무함을 느꼈다.’ 「라임포토스의 배」, 81~82쪽

 

 「라임포토스의 배」는 나가세와 친구를 통해 스물아홉의 삶을 보여준다. 여행이라는 목표를 세운 나가세, 직장을 그만두고 카페를 차린 친구,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친구, 남편과 이혼을 결정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친구. ​저마다의 고민을 갖고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네 그것과 닮아 무척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힘든 시간이지만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고 그 안에서 소소한 일상의 감사를 누리는 삶.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직장생활을 다룬 「라임포토스의 배」에 비해 「12월의 창가」는 직장 내의 따돌림의 이야기다. 출판 인쇄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주인공은 폭언을 일삼는 직장 상사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낸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계속 일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다 결국 사표를 낸다.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소설이라 그런지 지위를 이용한 직장 내 여성 따돌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직장인의 비애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황당한 실수를 저질러도 일은 계속해야만 하니까요. 머나먼 하늘 밑에서 바보 취급을 당하면서도 회사원은 일을 해야죠.”’ 「12월의 창가」, 130쪽

 

 두 편의 소설을 통해 일과 일하는 여성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일, 연애, 결혼, 육아로 확장된다. 직장 여성이라면, 위킹맘이라면 더욱 크게 와 닿을 것이다. 여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으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을 잔잔하게 그렸기에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와 닮은 듯 다른 감성, 이 작가의 다른 소설을 더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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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바람이 있었고 오늘은 약간의 바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관성 있게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변함없이 매미소리는 우렁차다. 내일이 없다는 걸 다 안다는 소리인가. 오늘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데. 변화, 변신, 변장이란 단어를 생각한다. 순간마다 변화하는 모든 것들. 바람의 크기, 햇볕의 세기, 숨소리, 그리고 내 마음. 마음의 변화는 얼마나 충동적인가, 얼마나 간사한가. 냉장고 속 복숭아와 자두는 어제는 그것이 아니다. 복숭아는 미세하게 숙성된 맛을 보여준다. 뜨거웠던 김치찌개는 냉장고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다. 폭염이 이어지는 날들, 밤마다 뒤척인다. 올림픽에 열중하지 못하면서도 경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잠들지 못하기에. 바로 잠드는 날은 언제 올 것인가.

 

 8월 11일이라는 날짜에 화들짝 놀라고 만다. 오늘은 누군가의 생일이고 작은 언니가 말라위에서 돌아오기로 예정된 날이다. 계획대로라면 밤늦게, 혹은 내일 새벽에 도착할 것이다. 하루를 지배하는 건 무엇일까. 무엇이 나를 지배하고 때로 나를 농락할까. 나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예전의 그것과 다르게 변화한다.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래도 고유한 무언가는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여러 권의 책을 늘어놓고 읽는 흉내를 낸다. 무언가 몰입할 수 있다면 더위도 잠시 잊을 수 있기를 바라지만 생각뿐이다.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선뜻 답할 수 없는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바다의 뚜껑』은 충동구매였다. 처음부터 읽는 것도 아니다. 아무 곳이나 펼쳤다. 그랬더니 이런 문장이 나를 붙잡았다. 세상에나, 내 머릿속에 들어온 거 아니야? 이 소설에 대한 사랑은 오래 지속될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누가 없애 버리려 하거나, 일부러 획일화하려 해도, 아무리 억압해도 절대 없어지지 않는, 그런 힘을.’

 

 ‘거푸 돌아오는 계절을 영원히 볼 수는 없다. 적어도 버드나무보다는 먼저,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리라.’

 

 장석주의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는 그의 산문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시로 만난 장석주가 아닌 산문을 읽고 싶었다. 많은 책 가운데 이 책을 선택한 건 제목이 주는 울림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오정희의 『새』를 다시 읽고 싶었다. 천진하다고 할 수 없는 우미의 눈빛과 마주하고 싶었다. 내일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없이 살아가는 삶에도 변화는 존재한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대감이 아닌 두려움으로 마주하는 시간들은 무겁고 어둡다. 작고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세포를 키우는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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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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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닷없이 찾아온 통증으로 잠을 설치는 밤들이 있다. 익숙한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통증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외마디 외침을 쏟아냈다. 무작정 그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잠들려고 몸을 둥글게 말아 뒤척이다 결국엔 불을 켜고 앉았다. 눈이 부셨다. 다스릴 수 없는 몸의 시간을 어찌할 수 없어 잠깐 울었다. 그런 밤에 마주한 게 침묵이었다. 읽다 만 한강의 소설을 잡았을 때 확인할 수 없는 내 얼굴에도 새 같은 무엇인가가 있었을까, 잠깐 생각했다.

 

 ‘기척 없이 그녀는 그의 말에 귀 기울인다. 그의 얼굴 속에 새 같은 무엇인가가 살아 있다는 것을, 그 따스한 감각이 그녀에게 즉각적인 고통을 일깨운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 (147쪽)

 

 두 번째 읽는 한강의 소설 『희랍어 시간』은 아주 천천히 내게로 왔다. 처음 읽었을 때 보이지 않았던 침묵의 결이 느껴졌다. 그래서 아팠다. 들릴 듯 말듯한 가냘픈 음성이 있었다. 그래서 더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여자는 이혼을 했고 아이를 빼앗겼고 엄마가 죽었다. 모든 것을 잃은 여자는 어느 시절 말을 잃었던 것처럼 다시 말을 잃었다. 여자는 언어를 되찾기 위해 어떤 구원을 찾기 위해 희랍어를 배운다. 원하지 않았던 침묵이었기에 세상의 모든 것과 단절한 듯한 삶이지만 침묵의 세계는 고요하지 않았다. 크고 굵은 소리들이 그녀를 둘러싼다. 오직 아이의 음성만이 그녀에게 웃음을 주고 평화를 안겨준다.

 

 남자는 시력을 잃어가는 중이다. 곧 그의 삶에는 빛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열다섯 살 독일로 떠났다가 십칠 년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처럼 시력을 잃다가 사라질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다. 남자의 삶에서 선명한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학원에서 희랍어를 가르치기 위해 문장을 쓰고 외운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자를 만났다. 여자와 남자, 보편적인 삶이 아니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이 놓여지만 그들에게는 지극히 보편의 삶이다.

 

 깨지지 않는 침묵이 흐르는 확장되지 않는 빛의 공간에서 여자와 남자는 대화를 나눈다. 여자의 기척을 느끼며 그저 자신의 지난 삶을 이야기하는 남자. 그것은 결코 고통의 사랑이 아니었다. 잔인한 기억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사랑, 위대한 사랑, 고귀한 사랑이었다. 손끝으로 울리지 않는 소리를 적어 답하는 여자. 몸으로 익힌 자신의 공간에서 여자의 숨소리를 온몸으로 채집하려 한다. 마치 소리가 처음으로 잉태되던 태고의 순간으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결핍과 결핍이 만나면 결핍은 커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나가 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는 입맞춘다. 축축한 귀밑머리에, 눈썹에. 먼 곳에서 들리는 희미한 대답처럼, 그녀의 차가운 손끝이 그의 눈썹을 스쳤다 사라진다. 그의 차디찬 귓바퀴에, 눈가에서 입가로 이어지는 흉터에 닿았다 사라진다. 소리없이,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184쪽)

 

  단순하게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이야기라 말할 수 없다. 사랑, 혹은 구원을 말하는 소설이라 말할 수도 없다. 여자가 말을 잃었고 남자가 빛을 잃어서가 아니다. 거기, 당신이 있기에 나는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침묵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소멸과 상실로 이어지는 삶 속에서 누군가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의 떨림이라고 해야 할까. 스치듯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 당신의 기척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고통과 통증의 크기를 잴 수 없고 그 끝에 무엇이 올지 모른 채 살고 있는 나에게도.

 

 ‘끈질기게, 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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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6-08-1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지 마세요...

2016-08-11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6-08-11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마음 아파요.

자목련 2016-08-11 18:03   좋아요 0 | URL
한강의 소설은 대체로 많이 아픈데 <희랍어 시간>은 더욱 애잔했어요.
더위가 사그라들지 않네요. 그래도 곧 가을이 온다고 생각하니 시원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해요^^
 
자살의 전설
데이비드 밴 지음, 조영학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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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는 내내 지루했던 책이 오래 기억에 남는 경우가 있다. 이상한 일이다. 특별한 사건 없이 반복적인 일상에 대한 나열이 나중에 소중한 기록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말이다. 날씨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과 제한된 공간에서 아버지와 함께 보내는 날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꾸 생각날 줄 몰랐다. 데이비드 밴의 소설 『자살의 전설』이 그랬다. 아버지의 자살과 그에 대한 책임과 죄의식으로 생의 절반을 자전적 소설이라 제목처럼 암울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아버지와 보낸 시절이 짧았기에 그리움은 기억에 의존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자살을 경험으로 체득한 아이의 삶이 올바르고 밝게 자랄 수는 없었다. 어두움이 빛을 가려 빛의 존재를 잊게 만든 경우다. 분명 거기 빛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섯 개 단편과 한 편이 중편소설에서 데이비드 밴은 아버지를 말한다. 아버지의 삶과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들려준다. 두 번 이혼을 한 남자, 가족과 자식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은 삶. 삶의 궤적이 모두 충동적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자유로운 삶. 그러나 아들을 결코 방치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와 헤어졌지만 호시탐탐 여자를 갈망하고 제멋대로 모든 걸 결정하고 금세 후회했지만 아닌 척하는 사람이 아버지였다.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그는 몰랐다. 그래서 아들에게 사과할 줄 몰랐고 이해를 구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의 싸움에 불안하지 않을 아이가 있을까. 「어류학」의 로이도 그랬다. 그 자리를 피해 몰래 옆집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어항에서 유영하는 물고기에 빠져든다. 이혼 후 배를 장만한 아버지는 알래스카 바다에서 고기잡이로 성공을 꿈꾸지만 실패하고 결국 자살한다. 걷잡을 수 없는 결핍과 함께 성장하는 로이를 통해 데이비드 밴을 본다. 아버지와 재혼한 새엄마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소설 「로다」는  새로운 관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기대는 곧 실망으로 이어진다. 로다의 부모는 서로를 증오한다. 로다는 마치 로이의 미래처럼 보인다. 불안과 분노가 전염된다고 할까.

 

 아버지와 로이의 감정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듯한 「수콴 섬」은 수콴 섬의 오두막에서 벌어지는 일상이다. 대책은커녕 계획도 없이 오두막을 산 아버지는 로이에게 함께 살자고 권한다. 로다와 이혼한 아버지를 향한 연민이었을까, 수콴 섬으로 향했지만 로이의 일상은 우울의 연속이다. 밤마다 울며, 벼랑에서 자살할 듯 불안하게 서 있는 아버지. 아버지가 건넨 총으로 로이는 자살하고 만다. 로이의 자살을 이해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데이비드 밴이 의도적으로 아버지가 아닌 로이의 자살을 선택한 것만 같다. 죽은 아들을 발견한 아버지는 자신을 대신해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며 오열하지만 전처와 딸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전전긍긍할 뿐. 도무지 알 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에게 삶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다. 아들의 시체를 묻지도 못하고 육지와 닿을 방법을 고심하다 불을 내 구조된다. 가족과 세상은 아들의 자살을 믿을 수 없다. 아들을 죽인 범인으로 지목되지만 보석금으로 나오고 멕시코로 향하다 밀항을 도와준 선원에게 죽임을 당한다.

 

 아들은 아버지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계획한다고 했던가. 로이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물음표로만 남았다. 거대한 의문과 부재로 남은 아버지. 그럼 어머니는 어땠을까? 아버지와 헤어진 어머니의 일상을 그렸다고 할 수 있는「선인의 전설」도 회색일 뿐이다. 다른 남자를 만나지만 지속적인 관계로 이어지지 않는다. 누구도 로이를 보살피려 하지 않았다. 아이로 살아야 할 시기를 로이는 잃어버렸다.로이의 불안이 증폭되는 이유다. 스스로 위로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을 견뎌야만 했다. 어쩌면 새로운 삶은 하나의 장면으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로이(데이비드 밴)에서 아버지의 자살이라는 운명은 숙명이 되었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그는 글을 써야만 했다. 어떻게든 그것을 이해하든 그것에서 벗어나야 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자살 후 아버지의 불륜 상대를 만나는 과정을 그린 「케치칸」과 아버지에 대한 증오나 분노가 아닌 그리움을 표현하고자 했던 상상의 이야기 「높고 푸르게」 는 더욱 아리게 다가온다.

 

 ‘기억이란 실제보다 아주아주 풍요롭다. 과거로의 회상은 기억 자체로부터 기억 하나를 덜어낼 뿐이다. 기억이 삶 또는 자아를 세우는 기반인 한, 귀향은 삶과 자아를 제거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케치칸」, 278쪽)

 

 경험과 추억으로 채워진 과거는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그러나 지울 수 없는 과거는 삶을 갉아먹는다. 『자살의 전설』이 되고만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소설이라 부르지만 소설이라 할 수 없다. 감당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아버지와 자신을 향한 데이비드 밴의 처절한 외침을 들을 수 있다. 그것을 그리움, 혹은 애도라 말할 자신이 내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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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둘만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중에도 사랑을 의심하는 경우가 있다. 연인의 사랑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내 곁에 있는 사랑이 나를 버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이 줄어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은 밥도 아니고 사랑은 돈도 아니라서 먹을 수도 없고 좋은 물건을 사는데 사용할 수도 없다. 사랑은 한 사람을 사랑하는 순간, 사랑받는다는 느낌만으로 존재한다. 그 사랑이 때로 누군가를 살게 하고 누군가를 죽게 만든다. 그렇다면 폴에게는 사랑은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었을까. 아니면 고칠 수 없고 버릴 수 없는 습관이었을까.

 

 이혼 경력이 있고 이별의 경험이 있지만 반복되는 상실을 감당하기에 서른아홉 살의 실내장식가 폴은 지쳐있었을지도 모른다. 연인 로제에 대해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혼자라는 외로움을 이겨낼 수 없을까 두려워서다. 폴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에 완벽한 책임감을 강요당하는 걸 원하지 않았던 로제는 폴과 이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곳에 폴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사랑이라는 게 날씨처럼 예측할 수 없다는 걸 폴과 로제는 모르는 척했다. 스물다섯 시몽이 폴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걸 알았지만 폴과 로제는 그들의 관계가 여전히 맑음이라고 착각했다. 시몽에게 폴은 새로운 날의 시작이었고 그녀를 사랑하는 일만이 중요했다. 시몽은 폴의 외로움을 건드렸다. 폴은 부정할 수 없었다. 로제의 이기적인 사랑을 말이다. 점점 커지는 로제와의 간극 사이에 시몽이 우뚝 솟았다. 폴에게 시몽의 말과 행동은 어리숙하며 불완전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 향하는 마음을 거부할 수 없었고 시몽의 뻔한 질문에 결국 무너지고 만다. 아니, 폴은 사랑이 아닌 자기의 현재 모습을 보게 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57쪽)

 

 시몽의 눈에 비친 폴의 삶은 불행하고 쓸쓸해보였다. 그런 폴에게 충분히 아름다웠고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했고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걸 일깨워주고 싶었다. 시몽은 서른아홉이라는 나이가 갖는 삶의 무게를 몰랐다. 아니 알 수 없었다. 폴과의 사랑만으로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 자신했으니까. 그런 시몽의 젊음과 사랑에 폴은 빠져들었고 로제가 아닌 시몽을 선택할 수 있다고 다짐했다.

 

 오래된 연인과 켜켜이 쌓인 시간의 힘이었을까. 젊은 남자의 육체를 탐한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았던 탓일까. 폴에게 사랑은 습관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시몽의 열정적인 감정을 원하면서도 로제를 받아들인다. 도저히 버려지지 않는 로제를 향한 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녀는 한 번 더 그를 품에 안고 그의 슬픔을 받쳐 주었다. 이제까지 그의 행복을 받쳐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은 결코 느낄 수 없을 듯한 아름다운 고통, 아름다운 슬픔, 그토록 격렬한 슬픔을 느끼는 그가 부러웠다.’ (150쪽) 

 

 세 사람의 사랑이 모두를 만족시키고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강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예상 밖의 선택이다. 본인 외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게 사랑이다. 폴에게 기다림만을 안겨준 로제의 구속 아닌 구속을 견딜 수 없다는 듯 당연히 시몽과의 멋진 사랑으로 끝나야 하지 않았을까. 사강은 사랑과 연애가 아닌 폴의 내면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는 사랑을 통해 여자의 심리를 잘 보여준다.

 

 결국 폴은 세 개의 점이 만드는 삼각형을 벗어나 점과 점이 이어진 선을 원했던 것일까. 그 선이 아름다운 글과 그림을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혼자 선을 그어나가야 한다는 걸 스물네 살의 사강은 알고 있었나 보다.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일이 사랑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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