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도둑
조명숙 지음 / 산지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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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남는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다. 남겨진 이들의 삶에는 죽은 자가 있다. 어떤 이에게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머물고 어떤 이에게는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오늘과 내일을 지배해버린 느닷없는 죽음, 상실을 채우려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나와 상관없는 게 아니다. 그러니 저마다의 생은 슬프고 아프다. 왜 남겨져야만 하는지 따지고 물을 존재조차 없이 혼자 살아내야 하는 게 남겨진 자의 가혹한 운명일까. 조명숙의 소설을 읽다 보면 남겨진 자로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남겨진 자다. 누군가에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버림받았든, 연습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했든 말이다. 잔혹한 생은 상실의 아픔을 달랠 겨를도 없이 살아야 한다고 다그친다. 버려진 자신을 키워준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이치로와 한나절」속 화자는 함께 가출을 감행할 정도로 친했지만 자살한 친구 창수의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낸다. 창수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고 주어진 생의 한계를 드러내는 할아버지를 위해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 갑자기 나타난 이국인 청년 이치로는 창수의 환영 같다. 놀랍게도 소설 속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삶은 현실 속 어디에나 존재한다.

 

 조명숙은 보통의 그것을 소설에 아주 잘 녹여낸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삶, 노동으로 채워진 고단한 일상, 상처 입은 이들의 내면을 담담하면서도 적확하게 말이다. 그리하여 소설을 통해 현재를 조명하는 것이다. 이제는 가시와 다르지 않은 고유명사가 된 2014년 세월호 사건 10년 후의 유가족의 일상을 그린 「점심의 종류」는 사건을 잊은 수동적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0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은 슬픔을 걷어갈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누군가는 그만 잊고 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지급된 보상금이면 충분하다 수군거렸다. 그러나 딸을 잃은 영애에게 삶은 2014년 4월 16일의 반복이었다. 그 어떤 것에도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없었지만 딸을 기억하기 위해 살아내야만 했다.

 

 ‘냄새, 소리, 움직임…. 한때 이 공간을 채우고 있던 냄새와 소리와 움직임을. 아무 냄새도 나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점심의 종류」, 56쪽)

 

 그러니 결코 당신의 아픔을 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불확실한 죽음에 대한 애도를 끝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위로와 조언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말을 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당신을 위한 게 아니라 지켜보는 나를 위한 것이다. 「나비의 저녁」 속 서정이 친구 오윤이 선택한 사랑에 대해 축복할 수 없었던 것도 그랬다. 현실이 아닌 꿈과 이상을 좇아 사는 오윤의 남편으로 인해 자신이 구축한 안정이 흔들리는 게 싫었다. 그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무시할 수 없었던 차에 멀리 이사를 간 오윤이 내심 반가웠다. 종이공장의 기계에 빨려 들어가 남편이 기이하게 죽고 구례의 시골로 떠난 오윤이 종이를 만든다는 연락을 했을 때 서정의 마음은 선뜻 그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종일 초지망(抄紙網)으로 한 장 한 장 종이를 뜨면서 내 마음 켜켜이 놓인 그 사람을 생각했지. 마음의 켜에서뿐만 아니라 몸의 켜에서도 아직 생생하게 그 사람이 느껴져.’ (「나비의 저녁」, 150쪽)

 

 조명숙의 소설에는 평탄한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곧고 길게 이어진 길이 아니라 일부러 구불구불한 길만 골라서 걷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게 삶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하기에 평생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조금씩 도둑」, 생명을 잉태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혼을 선택하며 의미 없는 삶을 지속하는 「사월」, 막내딸의 암 소식을 인정할 수 없어 달리는 아버지「러닝 맨」에 이어 작가 지망생의 시선으로 주변을 관찰하는 「하하네이션」에서 독보적으로 전달된다. 고아원에서 자란 작가 지망생 유는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 규칙적인 생활과 체력을 관리하고 아르바이트를 세 개나 한다. 등단 후를 대비해 옷매무새도 철저하게 신경 쓰고 오피스텔의 규약도 잘 지킨다. 그러나 유는 타인의 절망과 슬픔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고 인간의 깊은 심연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진심을 가지고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것 모르고 있었다.

 

 ‘사물과 사람과 시간의 갈피 속에서 독특한 느낌을 찾아낸다는 게 쉽지 않지만, 그만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작가가 될 수 있겠어?’ (「하하네이션」, 204쪽)

 

 남겨진 자로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삶은 소설보다 더 치열하고 더 기막히다. 그래서 완전한 행복체를 꿈꾸기보다 몸과 마음에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를 바란다. 비탄, 좌절, 죽음으로 비워진 자리를 채우기 위해 살아내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 과정을 소설로 쓰고 누군가는 소설을 읽는다. 조금 더 가까이 당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조금 더 깊이 당신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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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5-12-31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읽노라니 눈물이 핑~~~도네요
늘 조곤조곤 님의 글은 슬며시 깊게 다가옵니다^^

새해 인사 미리 드리러 왔다가 많은 생각을 품고 갑니다
모쪼록 오늘이 지나면 내일부터는 복만 받으시옵소서!!
건강하시길 바라며 올해보다는 좀더 나은 내년이 되시길 바랍니다^^

2016-01-15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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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리에 대해 상상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그려낸 소설. 전쟁을 배경으로 한 보통의 그것과 다른 감동을 전해주는 유려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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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위를 심하게 타지는 않지만 감기에 걸리는 걸 극도로 싫어하기에 체크무늬 남방 위에 그레이 색 니트 원피스 위에 남색 꽈배기 무늬가 들어간 카디건 위에 모자 달린 빨강 패딩조끼를 입고 미용실에 다녀왔다. 아침에는 그저 빗소리가 유쾌한 정도였는데 밖에 나가보니 바람소리를 더해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원장님의 가위 소리를 들었다. 정말 귀를 기울이니 예전에 몰랐던 가위질이 경쾌한 리듬을 탄다는 걸 알았다. 신기했고 신선했다. 멍하니 거울을 통해 잘려 내동댕이쳐진 머리카락을 보는 게 전부였는데 가위질의 리듬을 듣다니. 제법 길었던 머리카락을 싹둑 자르고 나니 다시 도토리가 되었다. 짧은 단발로 해달라고 하면서 아주 짧아도 괜찮다고 했더니 결과는 도토리였다. 나쁘지 않다. 무거웠던 기운 대신 왈츠라도 출 수 있는 경쾌한 머리카락 사이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흰 머리카락만 보이는 것만 빼면 말이다. 오랜만에 머리카락 손질이라 그 사이 수고비가 올랐다는 것도 몰랐다.

 

 그토록 기다렸던 비를 마주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이 모든 반응은 미용실에서 들은 것들이다. ‘왜 이리 많은 비가 내리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비가 와야 한다, 비 오기 전 김장을 해서 다행이다, 마트에 가야 하는데 비가 와서 귀찮다.’  비 오는 걸 좋아하는 나는 감기에 걸려도 좋은 날들이라면 비 속에 서 있고 싶었다. 안다, 이제 그런 용기를 낼 수 없는 나이라는 걸. 어쨌거나 비 오는 수요일의 오전은 경쾌한 가위질의 리듬으로 남는다.

 

 비, 수요일, 왈츠와 어울리는 책은 어떤 책일까. 내 멋대로 고르자면 오늘의 책으로 꼭 읽고 싶은 김엄지의 『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 김소형의 『ㅅㅜㅍ』, 제목 때문에 끌리는 『은밀하게 나를 사랑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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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12-02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을 등쪽으로 뻗어 잡으면 잡힐만큼 머리카락이 자라서 미용실 한번 다녀와야하는데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자목련님 글 읽으니 냉큼 다녀오고 싶어지네요 ㅎ 저도 이 참에 짧게 잘라볼까도 생각해보게 되구요 ㅋ 미용실가면 가위소리에 귀기울여봐야겠어요^~^

자목련 2015-12-03 19:08   좋아요 0 | URL
긴 머리카락을 자르고 가볍게 퍼머를 해도 좋을 것 같아요. 해피북 님이 들으실 가위소리는 어떨까요? 신나는 리듬이면 좋겠어요, ㅎ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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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우리와 닮은 스토너. 담담하면서도 치열했을 그의 인생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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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이 아닌 모든 것
이장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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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냇물이 바다를 향해 흐르고 있다고 믿으며 흘러가듯 우리의 생도 끝을 모르는 어딘가를 향해 나간다. 누군가는 빠르게 속도를 내고 누군가는 천천히 늦은 걸음으로 살아간다. 그 안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는다. 그들에게서 소설 같은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소설이 아닐까 싶은 장면을 목격하기도 한다. 이장욱의 소설이 그랬다.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구나 싶다가도 어딘가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어떤 소설 속 인물은 너무도 기묘할 정도로 놀랍고 어떤 인물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해서 놀랐다.

 

 이장욱이 그린 인물들은 다른 듯했지만 같았다. 소설 속 인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겹쳐졌고 하나의 단편이 끝나고 다른 단편에서 다시 태어나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여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일본인 답지 않은 일본인 하루오와의 만남을 그린 「절반 이상의 하루오」와 언제나 그곳에 있었지만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다가 죽은 후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는 「우리 모두의 정귀보」는 하루오가 정귀보처럼 여겨겼다. 강렬한 인상을 준 것도 아닌데 순간순간 떠올리게 되는 인물 말이다. 어쩌면 하루오와 정귀보는 우리와 가장 친숙한 누군가와 닮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내 삶의 모든 페이지에서 여전히 그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페이지를 넘기면 그 자리에서 숫자가 차례차례 바뀌듯이 말예요. 물론 어느 페이지는 찢어진 채 버려져 있겠지요……’ (「우리 모두의 정귀보」, 154쪽)

 

 그들이 우리가 스치고 지난 사람 중 하나였다면 물에 대한 이미지를 시작으로 평범했던 욕실이 어느 순간 무서운 공포로 돌변하는 경험을 들려주는 「어느 날 욕실에서」속 인물과 집주인인 작가가 여행 중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낯선 집에서 방이 움직이는 환상을 보는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의  주인공은 살면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 같았다. 두 단편의 인물들은 우리가 모르는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랄까.

 

 일주일에 세 번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파출부로 일하는 집주인의 물건으로 성향을 짐작하며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와 안다고 믿었던 사람과 삶이 언제라도 우리를 배신할 수 있는 걸 한 남자의 죽음을 통해 확인하는 「칠레의 세계」는 산다는 게 무엇인가 누군가에게 묻고 싶어지는 소설이다.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미래를 계획하는 어처구니없는 인생이라니. 곳곳에 웅덩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피할 수 없이 건너야 닿을 수 있는 게 우리의 삶이라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세계를 견딜 수 있는 건 하루오나 정귀보 같은 인물이 우리 곁에 존재해서다.

 

 ‘마약성 진통제와 오케이캐시백의 아름다운 조화 속에 인생이 있는지도 모르니까. 죽어가면서도 습관처럼 오케이캐시백 포인트를 적립하는 게 빌어먹을 인생이라는 것이니까.’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 47쪽)

 

 ‘우연이라는 향기로운 공기로 가득한 세계가 곧 낙원 아니겠나? 그런데 어쩌겠는가. 그 낙원의 공기 안에, 치명적인 의지의 고리, 무서운 인과의 사슬이 숨겨져 있다면 말일세. 이불 속의 바늘처럼. 향기로운 포도주 속의 독극물처럼.’ (「칠레의 세계」, 191~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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