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정지아 외 지음, 이제창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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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다 보면 잊었던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 소설 속 인물의 상황이 지난 어느 날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게 소설이나 현실이나 비슷하니까. 지나고 보면 사소한 문제가 당시에는 큰 문제였고 별거 아니라고 여겨 마음에 두지 않았던 일들이 제일 중요했다는 걸 알게 된다. 뭘 원하지는 몰라서 헤매고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할 줄 몰라 힘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던 시간.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그 시간을 『방황하는 소설』에서 마주한다. 정지아, 박상영, 정소현, 김금희, 김지연, 박민정, 최은영의 단편을 통해 방황을 생각한다.


정지아의 「존재의 증명」은 제목 그대로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정체성에 대한 방황, 가장 근원적인 방황이라고 하면 맞을까. 어느 날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존재의 증명」 속 ‘그’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카페의 청년 말로는 단골이라며 그가 좋아하는 커피까지 알려준다. 이상한 건 ‘그’는 이름과 주소 이런 건 생각나지 않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커피는 정확히 생각난다. 커피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 좋아하는 것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다. 그러니까 확고한 취향을 지닌 사람이라는 거다. 결국 파출소에 가서 지문을 조회하지만 실패하고 주변 CCTV를 통해 그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을 찾는다. 놀랍게도 그의 취향대로 꾸며진 집이었다.


기억은 사라져도 취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그게 그였다. (「존재의 증명」, 37쪽)


문득 나를 증명하는 건 무엇일까 생각한다. 나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꿈꾸는 게 무엇인지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방황의 시간이며 아름다운 방황일 것이다. 물론 소설처럼 기억은 사라지고 취향만 남으면 큰일이겠지만 말이다.


좋아하고 잘 하는 걸 단번에 찾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아니라서 선배의 조언에 무조건 따르기도 하고 주변 환경에 이끌려 결정하고 후회한다. 그 과정을 혹독하게 보낸 이라면, 아니 자신도 모르게 그 과정을 지나고 있다면 박상영의 「요즘 애들」속 ‘남준’과 ‘은채’가 남 같지 않을 것이다. 과거 잡지사 인턴으로 일했던 남준과 은채에게 주어진 업무는 커피를 내리는 일, 고무나무에 물 주기, 정해진 시간에 트위터 업로드를 해야 하는 일이었다. 고작 4살 많은 선배는 정확한 업무를 알려주지 않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다. 결국 남준은 회사를 나온다.


선배 있잖아요, 저는 칭찬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인간 취급을 받고 싶었어요. 실력도 없는 주제에 이름이나 알리고 싶어 하는 요즘 애들이 아니라, 방사능을 맞고 조증에 걸린 애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삶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요. ( 「요즘 애들」, 79쪽)


이 자리까지 오면서 나도 모르게 누구에게도 공감받을 수 없을 종류의 눈물이 차오르는 날도 있었다. 나는 내 눈물의 방향을 정할 수 없어 가끔은 화가 났고 대게는 고독했다. ( 「요즘 애들」, 88쪽)


그 시절 남준이 선배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지금 '요즘 애들'로 불리는 사회 초년생의 마음일 것이다. 누구나 그런 시절을 지나왔으면서 정작 배려하고 포옹하지 못한다. 이해는커녕 서로 오해만 쌓인다. 급속도로 변하는 시대, 요즘 애들이란 말이 참 무색하게 느껴진다.


살다 보면 방황은 여러 번 내 앞에서 길을 막는다. 한 번이면 충분한 방황은 없다. 후련하게 떨쳐 버리고 어떤 흔들림도 없다고 다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끊임없는 혼란, 후회, 미련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러니 방황을 테마로 한 『방황하는 소설』 은 청소년을 위한 소설로 추천하지만 여전히 성장하는 어른에게도 좋다.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려운 세대 갈등, 타인의 마음은커녕 내 마음조차 알지 못하는 순간, 상실의 슬픔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니까. 그래서 최은영의 「파종」은 조용하면서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외삼촌의 죽음 후 조금씩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딸 '소리'와 그런 소리를 지켜보는 화자가 천천히 괜찮아지는 과정은 그와 닮은 우리를 가만히 위로한다.


소리는 언제부터인가 더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엄마인 자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소리의 그 모른 척이, 침묵이 좋았다. 자꾸만 과거를 되돌아보고 싶지 않았고,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현재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 「파종」, 232쪽)


누군가 후회와 미련의 시간을 잘라 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있기에 조금 덜 방황하고 조금 덜 후회하는 건 아닐까. 방황했기에 조금 더 단단해졌을지 모른다. 나를 찾아가고 알아가는 시간, 그 모든 시간이 소중한다는 걸 알게 된다. 인생의 방황은 여기서 끝이라고 자신할 수 없는 게 우리의 삶이다. 삶은 방황의 연속이며 우리는 그렇게 성장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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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1-11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사능 맞고 조증에 걸린 애. 이런 표현 좋습니다. 책 표지도 마음에 드네요 ^^

자목련 2024-01-12 14:17   좋아요 1 | URL
박상영 작가의 단편을 좋아하실 것 같네요^^
언급을 못했지만 박민정의 단편도 참 좋았습니다.
 
영원히 행복하게, 그러나 - 어떤 공주 이야기
연여름 외 지음 / 고블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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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왕관만 눈에 들어왔다. 왕관 뒤편으로 여성의 얼굴이 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형체가 사라지는 그런 이미지라고 하면 맞을까.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왕비나 공주를 떠올리면 자동으로 왕관과 멋진 드레스가 따라온다. 왜 이런 이미지가 각인되었을까? 어린 시절 왜 그런 공주를 꿈꿨을까? 아름다운 판타지라고 해도 돌이켜보면 창피하다. 어려운 환경에서 구해줄 왕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공주의 이야기. 전설이나 동화 속 주인공은 내 스스로 행복을 찾아 나서는 게 아니라 의존적 성향을 보인다. 언제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 정말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을까? 여기 새로운 공주가 있다. 한국 여성 작가 6명의 단편으로 구성된 『영원히 행복하게, 그러나』는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시대에 맞게 자신만의 옷을 입은 공주를 보여준다.


연여름이 선택한 공주는 엄지 공주로 「스왈로우 탐정 사무소 사건 보고서」는 작은 동물의 세계로 인도한다. 배경은 먼 미래 시대로 각종 소행성이 등장한다. 그 시대에는 인간뿐 아니라 다양한 유전자를 지닌 이들이 존재한다. 화자인 ‘나’는 새의 유전자를 지닌 탐정으로 실종된 클론 ‘마야’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마야를 찾아 나선 곳에서 나는 무자비한 학대의 현장을 마주한다. 그 모습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실상과 다름없었다. 불법체류라는 약점을 이용해 이익을 취하고 협박한다. 마야(엄지 공주)를 비롯한 작은 동물과 미래의 변종 인류의 시선에서 본 세상은 불합리 그 자체였다. 작고 귀여운 엄지 공주를 떠올리다 동화 속 엄지 공주가 바랐던 행복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배명은 작가의 「측백나무성의 라푼젤」은 라푼젤을 한국의 가부장제와 동성애 혐오로 풀어낸다. 출장을 온 동해는 대학시절 은사인 교수의 집에서 신세를 진다. 교수의 집으로 가던 중 ‘동해’는 한 여자를 만나 부탁을 받는다. 교수의 딸이 있는지 확인해달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교수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무시한다. 진실은 이랬다. 교수인 아버지가 딸의 동성애를 반대하며 딸을 가두는 모습은 탑에 갇힌 라푼젤이다. 그 여자 때문에 자신의 딸이 변했다고 주장한다. 누군가 사랑하는 일, 남들과 다른 사랑을 선택하는 삶에 대한 존중하고 이해하는 사회, 가능할까. 소설 속 동해의 모습에서 희망을 찾고 싶다.


동해는 이를 악물고 돌담을 붙들었다. 집 뒤쪽 측백나무에는 축대가 있어 가시철조망을 하지 않는 듯했다. 다행인가, 아닌가. 겨우 위로 올라선 동해는 밭은 숨을 내쉬며 집 가까이로 다가섰다. 숨을 크게 들이키며 위를 보는 순간, 2층 창에서 한 여자가 나타났다. 너무나 깡마르고 창백한 얼굴엔 표정조차 없었다. (「측백나무성의 라푼젤」, 86쪽)


문녹주의 「백설의 기고」은 백설공주의 이야기로 나는 계모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소설은 내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엄마와 딸의 관계를 비틀었다고 할까. 거기다 혼혈로 살아가는 이들이 겪는 정체성과 이민자의 삶에 대해 다룬다. ‘백선희’는 인기 작가다. 엄마는 미혼모, 혼혈이지만 이름에서 짐작하듯 하얀 피부를 지녔다. 그런 백선희도 미혼모가 되었고 혼혈을 낳았다. 자신과는 다른 까만 피부의 딸에게 ‘흑설’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자신과 딸에 대한 에세이를 쓴다. 백설공주는 계모가 건넨 독이 든 사과를 먹었지만 「백설의 기고」에선 친모인 백선희는 흑설에게 사과파이를 만들어 준다. 흑설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장 기발하면서도 놀라운 결말이었다.


호박마차, 유리구두의 신데렐라를 외계 존재로 재해석한 모래의 「변신」과 김치 회사를 배경으로 알라딘의 요술 램프를 전설의 김칫독으로 변형시킨 류조이의 「고들빼기 공주와 전설의 김칫독」 은 유쾌하며 통쾌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공주는 찾을 수 없다. 오랜 시간 동화나 전설을 통해 여성차별과 수동적 태도를 당연하게 여겼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이 나도 멋진 왕자가 구원해 줄 삶을 기대했으니까.


이제 모두 안다. 세상 어디에도 나를 구원해 줄 왕자는 없다는 걸. 삶이란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는 걸. 세상이 변하듯 이야기도 변하고 재창조되는 게 당연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으로 변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읽는 시선도 변화한다. 안여름의 말처럼 의심과 반항의 태도가 필요하다. 모든 이야기의 결말이 행복이 아닐 수 있으며 행복의 정의는 저마다 다르다는 것, 그러니 이런 소설집은 반갑다.


오래된 공주 이야기가 더 이상 새롭게 다가오지 않는 나이가 되었을 때, 비로소 공주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의심과 반항도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안여름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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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4-01-10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왕자

잠자냥 2024-01-10 14:5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4-01-11 09:33   좋아요 1 | URL
음, 저 왕자 된 건가요? ㅋㅋ

은오 2024-01-11 14:58   좋아요 0 | URL
아 저거 화살표 아니고 부등호여써요!! ㅋㅋㅋㅋ 왕자 따위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자목련님이 좋은 제 마음을 표현해봤습니다.

자목련 2024-01-12 14:18   좋아요 1 | URL
앗, 부등호였나요?
뒤늦은 감동으로 따뜻한 오후입니다!

잠자냥 2024-01-10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설에게 사과파이를 만들어 준 거 때문에 궁금한데... ㅠㅠ 이 책 전체는 읽기 싫고... ㅠㅠ
비밀 글로 좀 알려주세요. 궁금해요ㅠㅠ

2024-01-11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4-01-11 09:4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감사합니다!
어쩐지 그럴 거 같았어요.
 
외로움의 습격 - 모두, 홀로 남겨질 것이다
김만권 지음 / 혜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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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예능 프로에 출연한 연예인이 인공지능 챗봇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인공지능이 아닌 고유한 인격을 지닌 인간 같았기 때문이다. 순간 무섭기도 했다. 어떤 미래에는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과 대화하며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물론 인공지능 챗봇을 사용한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일이다. 하나의 기술이 모두에게 제공되는 건 아니니까.


철학자 김만권의 『외로움의 습격』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예능의 한 장면이 떠오른 건 무슨 이유일까. 편리함으로 위장하고 가려진 사회의 모습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만연한 외로움이라는 감정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치는 책이라고 해야 할까. 저자가 강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내용은 철학적 사유가 아닌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이다. 사회 전반에 드리워진 외로움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한 고민이다.


단순히 외로움만 생각하자면 고립, 단절, 소외로 연결되는 노년층이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일 거라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계가 말하는 건 달랐다. 20대가 느끼는 외로움과 좌절이 자살을 선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충격을 안겨줬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외로움에 점령당했을까. 디지털의 시대, 초연결망의 세기를 살고 있기에 그렇다. 아마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스마트폰에 중독된 일상을 살고 있을 테니까. 터치 한 번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세상. 불가능은 없어 보인다. 굳이 인간과 관계를 맺지 않아도 인공지능이 다 알아서 해주는 편리함.


저자가 이 책에서 주목하는 건 그것이다. 디지털, 데이터, 인공지능의 시대에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플랫폼 노동자로 적락한 사람들. 빅데이터의 수많은 데이터를 모으고 정리하는 인력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빅데이터로 만들어진 정보가 어떻게 차별을 만들고 생성하는지. 그저 내가 원하는 정보를 검색 한 번으로 알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할 뿐.


외로움의 시대에서 인공지능은 가장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연예인의 사례처럼, 정보와 조언을 구하는 사이. 그러나 책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인간과 관계에 대해 배우지 못하고 타인에 대해 이해나 배려를 모르는 채 인공지능(기계)와 관계를 맺을 때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쉽게 폐기할 수 있다.


인간을 대신한 AI 면접은 공정할까? 여러 책에서 읽었지만 인공지능이 수집한 수많은 데이터의 근원이 우리의 정보이며, 생성형 인공지능이 학습하는 대상이 인간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지난 시대 인간이 답습해 온 편견과 차별, 혐오가 그대로 축적된 데이터로 활용된다는 것. 그러니까 좋은 인간관계의 데이터가 있어야 좋은 인공지능이 된다는 것이다.


현재 인공지능이 사용하고 있는 딥러닝이라는 학습법은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할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한마디로 인공지능은 인간을 닮을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 우리가 서로를 보호하고 아낀다면, 그런 우리의 모습이 빅데이터에 담겨 인공지능이 만들어 내는 결과물에도 영향을 미칠 거예요. (196쪽)


저자가 외로움과 능력주의에 대한 접점을 설명할 때 특히 외로움의 심각성이 와닿았다. 지난 코로나 시대를 돌아보면 비대면 시대에 사회적 약자의 삶은 말 그대로 곤궁 그 자체였다. 비대면 학교 수업에 필요한 전자기기(인터넷, 스마트폰)이 없는 이들에게 디지털의 시대는 하나의 벽이었다. 얼핏 공정으로 인지하기 쉬운 능력주의에 숨겨진 이면도 마찬가지다. 모두에게 주어진 평등한 기회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정보를 수집할 능력, 고시나 시험만 집중할 수 있는 비용만 생각해도 그렇다. 거대 플랫폼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빅데이터와 기술을 사용하는 이들은 상위계층이며 그들은 그것을 대를 이어 상속하고 싶어 한다. 계층은 사라지지 않고 격차는 심해진다.


어떻게 하면 외로움의 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빅데이터를 어떻게 사용할지,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간의 존엄과 고유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해답은 인간에게 있다고 말한다. 아빠가 된 그가 솔직한 마음을 토로하듯 써 내려간 글에는 안타까움과 간절함이 가득하다.


아빠인 나는 묻는다. “왜 우리는 자식들에게 타인을 먼저 배려하라고 선뜻 말해주지 못할까?” 이유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이 세상이 ‘각자도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가운데도 각자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의 모순을 순순히 받아들인 채 살아가고 있다. 아빠가 된 나는 이런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다. 내 아이에게 이런 ‘외로운’ 세계를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 내 아이가 외롭지 않으려면 내 아이와 어깨를 맞대도 살아갈 다른 이들도 외롭지 않아야 한다. (346~347쪽)


두서없이 정리하고 말았지만 좋은 책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심각한 외로움과 직면한 문제를 쉽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책이다. 저자는 외로움을 설명하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갖고 디지털과 데이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마트폰이 신체의 일부가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인 우리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외로움의 습격』을 만나 인공지능이 아닌 진짜 친구를 만들고 그들과 함께 공존하는 미래를 꿈꿀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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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4-01-03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2024년 갑진년이 되었습니다.
올해도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 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목련 2024-01-04 12:30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오후 따뜻하게 보내세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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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세계는 발을 들이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직감한다. 사랑이라는 세계가 그러하다. 입구만 있을 뿐 출구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 사랑은 그렇게 우리는 그 닫힌 세계에 살게 만든다. 사랑이 끝났다고 해도 그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을 기억하는 한, 감각을 잊지 않는 한 존재한다. 어쩌면 지독히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건 저마다 간직한 그 세계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으면서 하루키가 그 세계를 철옹성처럼 지키려 노력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상 같기도 한 이 소설을 읽으면 각자의 세계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애틋하고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을, 팍팍하고 고단한 현실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을, 불가능한 일이라도 아예 잊고 있었던 작은 마음 같은 것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원하고 바랐던 삶을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이 열여섯, 열일곱의 십 대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을 감정이 피어오르던 시절,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진 소녀에 대한 기억을 소년이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주고받았던 편지, 서로를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눴던 장소, 모든 건 그대로인데 소녀만 사라졌으니까. 소년은 멈춰있을 수밖에 없다. 그 소녀가 들려준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는 잊을 수 없다. 대학에 가고 직장에 다니고 다른 연인을 만나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는 동안에도 어른이 된 소년이 살아가는 세계는 그 소녀와 그 도시가 지배적이다.


“그냥 원하면 돼. 하지만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 그 사이 많은 것을 버려야 할지도 몰라. 너에게 소중한 것들. 그래도 포기하지 마.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도시가 사라질 일은 없으니까.” (15쪽)


그래서 소녀를 잊을 수 없었던 그가 그 도시를 발견하고 그곳의 도서관에서 꿈을 읽는 사람이 된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그림자를 버리고 두 눈에 상처를 내면서 소년이 바랐던 건 소녀를 다시 만나는 일이었으니까. 자신을 알지 못하는 소녀가 그를 위해 차를 끓이고 하루 일과가 끝나면 소녀를 바래다주며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은 살아가는 일은 소설 밖 독자에게는 불가해 보이지만 소설 속 그에게는 설렘과 행복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을 위해 버려야 했던 그림자를 향한 마음은 복잡하다. 그래서였을까? 도시 밖으로 함께 가자고 말하는 그림자를 혼자 돌려보내고 남은 그 앞에 펼쳐진 세계는 이전의 삶이었다. 다시 소녀가 사라진 세계였다. 그의 간절함이 부족했던 것일까. 독자인 나는 혼란스럽다. 왜 하루키는 그를 도시 밖으로 되돌려 놓은 것일까? 그토록 원했던 도시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여서 그랬던 것일까?


궁금증은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작은 시골의 도서관장으로 일하게 되면서 이전 도서관장 고야쓰 씨, 매일 학교 대신 도서관에 와서 책을 읽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과의 만남으로 풀린다. 그들은 그림자를 아는, 그 도시를 믿고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분명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과감하게 원하는 것을 향해 나가는 사람들. 누구의 이해도 원하지 않고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소설은 두 개의 세계를 오가며 묻는다. 우리는 어디에 살고 있는지, 무엇으로 존재하는지 말이다. 도시에 있는 그림자인지, 도시 밖에 있는 이가 그림자인지. 그러나 사실상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 자신이 믿는 대로 자신의 세계를 살면 그만이다. 완전한 것 따위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겠지만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잃어버리지 않고 놓치지 않고 살아가면 된다. 그게 어렵다는 걸 알기에 하루키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의 말을 통해 위로를 전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요. 이 도시에는 현재뿐입니다. 축적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덮어쓰이고 갱신됩니다. 그게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계입니다”. (738쪽)


오랜만에 읽은 하루키의 소설은 여전히 그의 매력을 충분히 발산한다.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그가 추구하는 이미지를 꿈꾸게 만들고 독자를 이끈다.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인 문지기가 지키는 도시, 그 안의 도서관, 최소한의 것들로 이루어진 삶. 소설에서 빠져나와 머릿속에 도시를 그려본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분리되는 그림자, 바늘 없는 시계탑과 그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인 소설 속 도시는 아니더라도 내가 사는 세계에서도 중요한 건 현재뿐이라는 사실이다.


발을 내딛고 살아가는 세계에서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과 순간순간 나타나는 벽을 뚫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을 때 나의 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랑과 긍정으로 구축된 세계는 그지없이 아름답고 단단하게 존재하여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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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3-12-28 1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랑 깔맞춤 컵 귀여워요^^

자목련 2023-12-29 09:46   좋아요 1 | URL
의도적인 깔맞춤입니다 ㅋㅋ

희선 2023-12-31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에 사는 게 자신인가... 어쩌면 소설에만 두 세계가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 못한 길을 아쉬워 하기도 하잖아요 그런 걸 자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거의 자신이 가기로 한 길 갈 것 같기도 합니다 자꾸 아쉬우면 다른 길로 가 보는 것도... 이건 그렇게 쉽지 않을 것 같네요

자목련 님 2023년 마지막 날 잘 보내세요


희선

자목련 2024-01-02 11:24   좋아요 1 | URL
네, 말씀처럼 우리는 모두 두 개의 세계를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어요.
항상 소중한 마음을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희선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즐거운 시간 이어가세요^^

루피닷 2024-01-01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목련 2024-01-02 11:23   좋아요 1 | URL
루피닷 님, 감사합니다.
건강하고 활기찬 한 주 시작하세요!!
 
간밤의 꿈 이야기
안주영 지음 / 기린과숲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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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의식의 연장이라고 했던가. 걱정과 고민이 가득한 날, 어찌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을 때 꾸는 꿈에는 그 일의 당사자가 나온다. 아니, 그런 일이 있을 때에만 꿈을 꾸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꿈 없을 잠을 원한다. 새벽녘 깨어 잠들지 못했거나 일어나야지 하다 잠깐 잠이 들었을 때 종종 꿈을 꾼다. 어김없이 내 마음의 불안과 걱정이 꿈에서 표출된다. 이를테면 특정 인물이 등장하거나 특정 장소가 나오는 것이다. 꿈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지만 그런 꿈은 꾸고 싶지 않다. 도대체 꿈이란 무엇일까. 여기 매일 밤 꿈을 꾸고 기록하는 이가 있다. 잠에서 깨고 나면 사라진 꿈을 어떻게 기록할까. 그만큼 그에게 꿈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안주영의 『간밤의 꿈 이야기』에서 만난 그의 꿈은 이상하고 신비롭다. 흔히 말하는 복권을 사야 할 꿈, 키가 크느라 꾸는 꿈, 말 그대로 개꿈인 그런 꿈이 아니라 짧은 소설이나 영화 같고 거대한 시 같다. 읽으면서 정녕 이게 꿈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어떤 꿈은 끝나는 게 아쉬워서 끝이 아니라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까지 든다. 그가 들려주는 간밤의 꿈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그의 불안과 두려움을 엿본다. 꿈에 등장하는 인물이 그의 관계를 추측한다. 꿈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되어 소중한 이의 죽음을 느끼고 애도하며 아파한다. 저자의 상황을 모르고 현실이 아닌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나와 동생은 아직 키가 작고 어린데, 아빠는 어느새 머리가 세서 계속 누워만 있다. 우리 가족과 친척, 그리고 아빠의 지인들은 모두 아빠를 내려다본다. 아빠가 눈을 뜨지 않자 엄마가 아빠를 흔든다. 엄마, 아빠가 함께 찍었던 사진 여러 장이 떨어진다. 고모가 아빠를 흔든다. 아빠의 한쪽 귀가 떨어진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빠의 친구가 아빠를 흔든다. (「아빠의 선물」 중에서)


가족이 등장하는 꿈을 읽으며 내 꿈에도 엄마와 아빠가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을 엄마와 아빠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든다. 동시에 그토록 바라는 게 아니었나 싶은 마음이 들면서 꿈이라는 게 참 묘하구나 싶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꿈이 아닌 꿈이 나를 알고 찾아오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저자의 꿈이 마냥 몽환적 이미지라는 건 아니다. 절규, 공포, 혼란, 혼돈으로 이끄는 꿈도 많다.


지독한 두통을 뽑아내어 버렸더니 다른 이들이 두통이 달라붙어 괴롭히는 「두통」, 첫 수업에 늦었는데 바로 수업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자랑만 늘어놓고 정신을 차리니 강의실은 텅 비어있는 「첫 수업」, 어린 시절 먹지 않고 버린 약들을 어른이 되어 다 먹어야 한다는 「약국」, 1가정 1반려동물이라는 정책으로 집으로 커다란 상자가 배달되지만 누구도 열어볼 용기를 내지 못하는 「반려동물」, 기묘하지 않은가. 일상의 고통과 걱정이 고스란히 꿈으로 이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진을 찍은 것처럼 세세하게 담아내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할밖에.


검은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왔다. 우리가 탄 배는 크게 흔들렸다. 나는 배의 나무 기둥을 꼭 붙잡았다. 우지끈. 반대편 나무 기둥이 부러졌다. 이미 축축해져 버린 나무 기둥들은 점점 검게 물들었다. 그렇게 나무들은 썩어갔다. (「검은 파도 속에서」 중에서)


꿈이 이끄는 세계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든다. 만질 수 있다면 꿈을 만지고 싶게 한다. 허상과도 같은 꿈을 지척에서 바라보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꿈 이야기를 읽으며 그의 꿈이 검고 어두운 빛이 아닌 환한 빛으로 물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내면의 심리 상태를 고스란히 묘사한 문장이 조금 유연하고 안온하기를. 나의 꿈을 향한 바람이기도 하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아도 산뜻하고 맑은 기운은 안겨주는 그런 꿈을 꾸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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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12-26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께서는 정말 다양한 작가의 소설을 읽으시는군요.
꿈하니까, 지금 읽고 있는 무지 재미없는 소설이 떠오릅니다^^

자목련 2023-12-27 11:10   좋아요 1 | URL
꿈을 기록한 저자가 놀라웠어요.
페넬로페 님이 읽는 재미없는 소설이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