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와의 티타임 - 정소연 소설집
정소연 지음 / 래빗홀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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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는 세계를 생각한다. 이 세계가 전부라고 여겼지만 어느 순간 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의문이 생겼다. 그 세계에 대해 더 알고자 애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유일무이하다고 확신하지 않는다. SF 소설 영향을 받았냐 묻는다면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 인간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소통하는 존재를 상상한다.


정소연의 『앨리스와의 티타임』 은 그런 세계로의 초대다. 그러니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공간, 이웃에 외계인이 살 수도 있는 세상, 현실과 상상을 오가는 경계, 다른 세계를 향한 열린 마음과 인정. 그 모든 것을 흥미로움과 놀라움 그 자체였다. 정소연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라 찾아보니 『앨리스와의 티타임』에는 2015년에 발간된 『옆집의 영희 씨』의 복간이자 그 이후 작품을 수록한 책이다. 14편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표제작 「앨리스와의 티타임」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전부가 아닌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 세계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나와 평행선 상에 존재하는 다른 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모른다. 화자 앨리스는 그런 세계를 방문하는 일을 한다. 그러니 이런 첫 문장은 이상하지도 낯설지도 않다.


나는 일흔네 번째 세계에서 앨리스 셸던 부인을 만났다. (「앨리스와의 티타임」, 11쪽)


어느 세계든 다를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늘 그랬다는 생각이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나는 앤디 워홀이 없는 세계를 보았다. 피카소가 무명으로 일생을 마치는 세계를 보았다. 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웠다. (「앨리스와의 티타임」, 18~19쪽)


화자가 만난 앨리스는 화자의 세계에서 잘 알려진 소설가였다. 놀랍게도 그녀 역시 다른 세계를 여행하던 사람이었다. 아, 소름 돋는 장면이지 않는가. 우리가 모르는 세계에는 얼마나 많은 앨리스가 존재한단 말인가. 소설의 설정이라 해도 나는 이 장면에서 이 단편에서 조금 울컥하고 먹먹해졌다. 다른 세계를 여행하던 일흔네 번째 세계에서 만난 앨리스도 다른 세계 여행자였다. 그녀는 다른 세계로 가서 알츠하이머 치료법을 찾아 돌아왔다. 사랑하는 남편을 위한 일이었다. 화자가 아는 앨리스는 자살을 한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나와 같지만 나와 다른 사람, 나와 같지만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 누구라도 이 단편을 읽는다면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나를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런 나를 마주하는 장면도 말이다.


놀랍고 흥미로운 상상은 「옆집의 영희 씨」에서도 마찬가지다. 외계인과 함께 사는 시대가 배경이다. 언젠가 그런 미래가 오지 않을까. 화자 ‘수정’은 화가자이자 미술 전담 교사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심의 오피스텔을 구할 수 없다. 하지만 옆집에 외계인이 산다는 이유로 싼값에 이사했다. 소설에서 외계인은 정부의 감시를 받는 존재이자 기이하고 징그러운 모습이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외계인을 피하지만 수정은 상관없었다. 자신을 이영희로 소개한 외계인은 수정의 집에 와서 수정의 그림을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말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지만 그저 평범한 이웃이라고 할까. 그리고 흔적도 없이 떠났다. 옆집의 영희 씨는 나름 지구에 적응하려고 노렸고 했을지도 모른다. 신문에서는 외계인을 ‘지구의 일상을 경험하러 온 그들’이라 칭한다.


애틋하면서 따뜻하고 현실적인 SF 소설이라고 할까. 그러나 잘못 들어온 세계에서 삭제당할 수도 있다는 설정의 「비거스렁이」는 SF를 빌려 청소년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느낌이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없는 존재가 된 지영은 이름을 물으면 36번 홍지영이라고 답한다. 익숙한 일상인데 갑자기 담임 정연이 귀찮을 정도로 자신을 찾는다. 원하지 않는 호출, 상담이 불편하고 정연의 속셈이 궁금하고 화가 난다.


비슷한 삶이 존재하지 않듯이 비슷한 세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겉으론 어떻게 보든 실제로 지영에게 딱 맞는 세계는 하나뿐이었다. 지영에게 상황을 설명해서 해결될 문제라면 훨씬 편하겠지만, 다른 세계나 시공간 불일치나 하는 말을 믿어주기를 바라기도 어려울뿐더러, 자기 세계를 스스로 찾아가기란 불가능했다. 틈을 직접 들여다보고 그 세계에 어울리는 조각들을 맞춰나가는 것은 균형자만이 갖는 재능이자 업이었다. (「비거스렁이」, 58~59쪽)


그랬다. 담임 정연은 균형자였다. 잘못된 세계로 들어온 지영이 맞는 세계를 찾도록 도와주는 역할. 현실에서 정연 같은 역할을 할 이는 누구일까. 지영이 들어온 잘못된 세계에서 꺼내 그동안 힘들었을 지영을 위로하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줄 이는 존재하는가.


정소연의 소설은 이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SF다. 처음부터 존재했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열리는 계단을 발견하고 그 통로를 통해 나아가겠다는 희망과 의지를 보여주는 「계단」, 인터넷 검열 사회(지금 우리 모습은 아닌가)에서 식물처럼 물과 햇볕으로 자라는 공유기를 발명하고 유포했다 교도소에 수감된 언니의 의지를 보여주는 「개화」는 선의로 이어지는 행동과 연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정소연의 소설은 김초엽의 소설로 연결된다. 정소연의 소설 『옆집의 영희 씨』의 을 향한 독자들의 뜨거운 복간 요청과 애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나처럼 김초엽을 먼저 만난 독자는 이제야 정소연을 만난 게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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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과 음악 말들의 흐름 10
이제니 지음 / 시간의흐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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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삶이란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거라는 걸 배운다. 누군가 나를 붙잡고 그게 삶이라고 가르쳐 준 기억은 없다. 거대한 죽음 앞에, 개인의 존엄을 파괴하는 폭력 앞에서 저절로 배운다. 이토록 잔인한 가르침이라니. 차곡차곡 쌓아놓은 삶은 한순간 무너져버리고 처음으로 되돌려놓는다. 돌림노래처럼, 이어 부르기처럼 계속 돌고 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하는 생과 사의 순간, 준비한다고 반가울 리 없는 그 순간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말이 통하지 않는, 나를 아는 다정한 얼굴이 없는 곳에서 사고를 당한 시인의 경험으로 시작하는 글은 내가 기대했던 산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몰고 왔다. 그러나 이 글을 썼다는 건 시인이 회복되었다는 뜻이라는 사실이 나를 안도하고 위로했다. 시베리아에서 당한 사고로 그곳의 병실에서 지내면서 마주한 고려인 여인의 목에 새겨진 꽃(체첵)이라는 낱말. 자신의 이름이 꽃이라고 알려준 그녀. 자세히 볼 수 없어 휴대폰으로 찍은 화면으로 볼 수 있었던 모국어의 말. 어쩌면 모두 잊어버리고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순간, 시인 앞에 나타난 모국어는 슬프고 아름다운 말이었다. 그 감동은 내게도 그러했다.


결국 쓴다는 것은 자신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단어 속에서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슬픔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기가 가진 지극히 단순한 낱말 속에서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또 다른 소리와 의미를 다시 새롭게 겹쳐 새겨 넣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일상 속의 아주 사소한 구멍. 아주 작은 틈새로. 추락하듯이 나아가면서. 비틀거리면서. 머뭇거리면서. 망설이면서. 주저하면서. 잘못 말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19쪽)


시인의 산문집은 이처럼 그녀가 직접 겪은 사고로 시작해 그것을 기록하며 고통과 상실을 글로 쓰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미용 가위, 쌍둥이 자매, 낚시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한 플레이리스트. 고통을 글로 쓴다는 건 가능한 것일까. 글로 쓰일 수 있다는 건 고통의 구덩이에서 조금은 올라오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극한의 고통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잠시라도 고통과 분리될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전부다. 그건 슬픔도 마찬가지다.


고를 수 있는 낱말이 있는 게 아니다. 설명하고 싶지만 설명할 수 없다. 상실의 횟수는 늘어나고 감당해야 할 슬픔은 차고 넘친다. 시인이 쓰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슬픔과 고통에 관한 것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순수하고 명징한 슬픔, 함부로 쉽게 쓸 수 없고 내뱉을 수 없는 고독과 쓸쓸함이라고 할까. 정확하지 않다. 정의할 수 없다. 그래서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시인의 산문이니 그래야 마땅하지 않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써 내려갔을 문장, 혹은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표현은 문장 속으로 독자를 이끈다. 그 장면 속으로 기필코 들어간다. 나는 상상한다. 얇고 가는 빛, 정수리를 지나 심연으로 파고드는 빛. 만질 수 없고 잡을 수 없지만 무엇보다 강렬하다는 걸 느낀다.


여기 어떤 빛이 있다. 어떤 어둠이 있다. 어두운 방안. 이제 막 밝아올 새벽빛을 암시하고 있는. 혹은 언젠가의 새벽의 어둠을 품고 있는. 어둡고 밝은 빛이. 얇게 휘날리는 여름 드레스의 질감 사이로 엷게 스며드는 푸르스름한 기운처럼. 어떤 빛이 곧장 내게로 다가와 오래전 사랑했던 사람의 기억을 가슴 아프게 감각하게 한다. 이미 지나갔지만 다시 돌아오고 있는 빛. 그 빛이 내게로 온다. (84쪽)


그러니 이 산문집은 산문이 아니다. 시를 향해 가는 과정이고 쓰기의 출발선이다. 그것은 고통과 슬픔을 껴안은 이들에게 전하는 안부이다. 각자의 상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고유한 슬픔, 문신처럼 새겨진 고통의 순간을 아는 시인의 곡진한 위로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혼자 와서 혼자 가는 것. 그 곁에 동반자가 있고 없고와는 무관하게. 기쁨 혹은 슬픔과도 무관하게. 혼자로 오롯이 서서 살아가다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그 과정에서 영혼의 수준을 조금이나마 높일 수 있다면 더욱 좋을 테고. (90~91쪽)


글쓰기는 개인의 고독과 병증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글쓰기는 한 개인 내부의 가장 허약한 지점에서 떠오른다. 백지 위로. 불쑥. 하나의 신음처럼. 어떤 고통들, 어떤 결핍들, 어떤 충격들, 그 글쓰기가 나아가는 지점은 개인의 더 큰 고독과 병증,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는, 아직 자신에게조차 밝혀지지 않은 심연의 저 밑바닥이다. (145쪽)


아니다. 잘 모르겠다. 시인의 말처럼 눈물처럼 쏟아지는 어떤 음악이다. 쓴다는 게 무엇인지, 쓰기의 궁극적인 목표를 찾아 헤매는 시인의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할 수 없다. 내가 옮겨둔 시인의 시를 찾아본다. 시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반했던 시. 이런 시도 있구나, 시인이 이끄는 세계는 뭔가 생격했지만 특별하다고 느꼈던 순간을 더듬어본다. 아득하고 아득했던 시절의 나를, 지금까지 시집을 사게 만든 그 시작의 일부에 그녀의 시집도 있다는걸.


더 자세히 쓰고 싶지만 쓸 수 없다. 더 많은 말로 『새벽과 음악』로 쓰고 싶지만 군더더기만 더할 뿐이라는 걸 안다. 정제된 말로 쓰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나는 알 수 없고 감탄할 뿐이다. 나는 쓸 수 없고 읽을 뿐이다. 나는 알고 싶고 더 읽고 싶다. 나는 알고 싶고 그래도 쓰고 싶다. 그것이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쓸 수 있다는 게 반갑고 기쁘다. 이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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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10-14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좋아요!‘ 를 한번 만 누를 수 있다는게 너무 아쉽네요. 좋아요x100! 자목련님의 ‘알고 싶고 읽고 싶고 쓰고 싶은데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기쁘며 그게 전부‘ 라는 표현이 너무 와 닿습니다. 좋은 글 감사 합니다. _()_

자목련 2024-10-16 10:58   좋아요 1 | URL
과분한 말씀 감사합니다. 마힐 님 덕분에 환한 기분의 수요일이 열립니다!!
 
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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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궁금하다. 돌아가신 엄마는 아버지와 결혼해서 행복했을까. 행복이 뭔지도 몰랐을 엄마에게 기쁨은 무엇이었을지 말이다. 아이를 다섯이나 낳고 살았지만 기억 속 어디에도 엄마에게 다정함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나의 아버지. 그러나 막내딸인 내게는 다정했던 아버지. 엄마가 돌아가시고 고모가 들려준 말은 내가 모르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아이를 업고 집을 나갔지만 곧 돌아왔다는 엄마. 등에 업힌 아이는 누구였을까. 나는 아니었을 것이다.


가끔 궁금하다. 큰언니는 왜 결혼을 하지 않았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 후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엄마가 결혼은 천천히 해도 된다며 반대를 했다고 하는데 진짜일까. 나는 왜 한 번도 언니에게 남자친구에 대해 묻지 않았을까. 엄마가 돌아가시고 큰언니의 든든한 돌봄을 받았지만 큰언니의 외로움이나 상처는 알지 못했다. 오히려 내게 했던 아픈 말들을 곱씹기만 했다. 엄마와 큰언니에게 가족은 어떤 존재이며 의미였을까.


클레어 키건의 단편집 『푸른 들판을 걷다』를 읽으면서 아이를 업고 집 앞에서 서성였을 젊은 엄마의 슬픈 얼굴이 떠올랐다. 정작 나는 알지 못할 슬픔으로 가득 찼을 얼굴. 속상한 마음을 터놓을 이가 없었을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엄마는 어디로 가고 싶었을까. 정해진 곳이 있었다면 엄마는 떠날 수 있었을까. 그곳이 어디든 그냥 떠나도 괜찮다고 나는 말해주고 싶다. 손을 내밀어 젊은 엄마를 데리고 나오고 싶다.


그러니 나는 아무렇지 않게 폭력과 학대를 지속하는 아버지를 방관하는 어머니를 떠나는 「작별 선물」 속 ‘당신’을 응원하다. 낯선 뉴욕의 삶이 어떨지 알 수 없지만 이곳을 떠나 그곳으로 향한다는 것만으로 당신은 괜찮아지고 있으니까. 혼자서 모든 농사를 감당할 오빠에게 고맙고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당신은 더 빨리 떠났어야 했다. 따뜻한 울타리가 아닌 족쇄였던 부모로부터 말이다.


클레어 키건은 구체적인 묘사로 불편함을 전하는 대신 작은 몸짓과 시선이 닿는 공간과 배경으로 마음의 상처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더 상처는 더 크고 묵직하게 다가온다. 처음엔 상황을 바꾸려 시도하고 노력했을 마음이 어떻게 무너져 무기력으로 변하는지 말이다. 젊은 엄마를 다시 생각한다. 엄마가 바랐던 삶은 무엇이었을까. 서른 살의 나이 때문에 결혼 이야기를 꺼낼 남자가 없을 것 같아 디건의 제안을 받아들인 「삼림 관리인의 딸」 속 마사에게 다시 젊은 엄마를 본다. 마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자신의 방식으로 마사를 사랑한 디건.


가끔 헛간에 서서 씨앗을 쪼는 닭들을 바라보며 행복감을 느끼다가도 이내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삼림 관리인의 딸」, 87쪽」


무엇을 기대했을까? 그녀는 감정이 점점 크고 깊어져서 사랑이 될 줄 알았다. 지금 마사는 친밀함을, 오해를 뛰어넘는 대화를 간절히 원했다. 일을 찾아볼까도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조금 있으면 아이가 태어날 참이었다. (「삼림 관리인의 딸」, 89~90쪽)


주변 시선이 중요하고 땅과 집을 지킨 후 찾아올 미래의 삶이 중요했던 디건, 지금의 행복이 중요했던 마사. 마사를 배려하지 않는 디건의 말과 행동은 폭력인 줄 몰랐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 역시 폭력이다. 화해의 타이밍은 지나갔다. 마사는 집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디건은 그 계획을 모르지만 마사가 떠날까 두렵다. 문득 궁금하다. 젊은 아버지는 엄마의 마음을 알고 있었을까. 디건처럼 두렵기는커녕 관심조차 없었지 않을까.


클레어 키건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는 아일랜드의 삶은 권위를 내세우는 남성 중심의 사회를 꿰뚫는 동시에 고요하고 정확하게 비판한다. 그 삶이 우리의 그것과 닮아서 아프고 쓰라리고 고통스럽다. 상처로 얼룩진 시간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작별 선물」의 ‘당신’, 과거를 잊고 원하던 아이와 함께 떠나는 「퀴큰 나무 숲의 밤」의 ‘마거릿’의 선택은 멋지고 눈부시다.


그러나 나를 오래 붙잡는 건 「물가 가까이」였다. 소설 속 아들은 새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생일을 원하지 않는 리조트에서 보내야 한다. 새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는 엄마가 싫지만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아들은 바다를 보며 할머니를 생각한다. 할아버지와 결혼했을 때 바다가 보고 싶다고 말한 할머니는 정작 바다에 도착했을 때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고 가 버린 할아버지를 떠나지 못했다. 나중에 왜 그랬냐고 물었을 때 할머니는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몰라서” (160쪽) 그랬다고 대답한다.


엄마도 그랬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등에 업은 아이 때문에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엄마가 가고 싶은 곳으로 원하는 대로 어디든 한 걸음 나가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의 젊고 어린 엄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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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9-24 1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단편집이군요~! 키건 첫번째 읽었던 책이 그냥 그랬어서 안읽고 있는데 이 단편집은 좋을거 같아요~!!

자목련 2024-09-25 11:53   좋아요 2 | URL
키건의 초기 단편이라고 해요. 새파랑 님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독서괭 2024-09-24 19: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휴 소설보다 자목련님 어머니 이야기에 마음이 저릿저릿하네요 ..

그레이스 2024-09-24 20:59   좋아요 1 | URL
저두요

자목련 2024-09-25 11:54   좋아요 2 | URL
엄마랑 많은 이야기를 했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너무 일찍 하늘나라로 가셔서...

구단씨 2024-09-24 2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 많은 엄마가, 자신의 바람을 버리고 자식 때문에 다시 돌아왔을까요...
저에게도 비슷한 기억이 있어요.
사는 게 힘들어서 엄마가 집을 나갔는데, 부모님 잘 아시는 분이 엄마를 설득해서 집으로 돌아오셨죠.
제가 많이 어릴 때라, 엄마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꼭 그 일 때문은 아니지만, 저는 지금 엄마에게 빚진 마음으로 사는 것 같기도 해요.
그때 엄마의 선택을 버릴 수밖에 없던 이유 중의 하나인 자식으로, 오랫동안 엄마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 채로 살아온 가족으로.

이 책 속 단편 세 편 정도 읽었어요. 시간이 없어서 나머지 부분 미뤄두었는데,
작가의 전작을 떠올려 보면 이 작품도 완독해야만 할 듯하네요.

자목련 2024-09-25 11:55   좋아요 1 | URL
내가 모르는 엄마의 모습이 얼마나 많을까 싶어요. 내가 안다고 생각한 엄마는 아주 아주 적겠지요.

나머지도 즐겁게 읽으시길 바라요. 가을 건강하시고요!
 
해방자들
고은지 지음, 장한라 옮김 / 엘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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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에 살고 있다면 그들은 밖에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안에서 밖으로 갔을 뿐 안을 잊지 않았으니 안과 밖에 살고 있다는 것일까. 밖에서 안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밖에서 사는 게 아닐까. 한국계 미국인 작가 고은지의 장편소설 『해방자들』 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 속 주인공처럼 말 그대로 한국이 싫어서 떠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찾은 선택지가 그곳이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1980년 대전의 요한으로 시작한다. 군계엄령과 시위의 시대 요한은 죽음을 당한다. 그가 공산주의자라고 했다. 요한의 딸 인숙은 성호와 결혼한다. 이제 인숙에게는 성호뿐이었다. 그러나 성호는 이민을 결심하고 인숙을 어머니 후란과 함께 남겨두고 혼자 떠난다. 성호가 떠나고 아이를 갖은 걸 알게 된 인숙은 시어머니와 함께 생활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숙과 성호의 이민 정착기나 성공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이민자의 고단한 삶을 이어주는 가족애나 동포애 같은 걸 말이다.


그러나 소설은 다른 방향으로 나를 이끌었다. 인숙의 아들 헨리가 태어나고 가족이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면서 이야기는 분명해졌다. 미국 캘리포니아로 공간만 바꿔엇을 뿐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 성호를 향한 시어머니 후란의 애정, 아내와 시어머니 사이에서 우유부단한 성호, 그들을 피해 일터로 나간 인숙. 그리고 혼자 자라는 아이 헨리. 인숙은 일터에 헨리를 데리고 다녔다. 그런 헨리가 의지하는 건 인숙이 일터에서 만난 로버트, 그도 한국인이다.


인숙에게 이념의 희생자인 아버지가 있다면 로버트에겐 일제 식민지 시대와 제주 4·3을 겪을 어머니가 있다. 인숙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로버트인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로버트는 사람들을 모으고 글을 쓰고 통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북에서 온 제니는 로버트를 돕는다. 성호는 그가 못마땅하다. 배경은 미국이지만 한국 현대사를 짚어가며 국가는 무엇인가 묻는 듯하다.


88올림픽과 삼풍 백화점의 붕괴, 북한을 지원하는 남한의 정책, 그리고 세월호 참사까지. 안이 아닌 밖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객관적이고 명확하다. 제니와 헨리 사이에 태어난 아들 하루가 어째서 아무도 사람들을 구해주지 않느냐는 질문, 그것이 진실이다. 안에 있기에 날카롭게 파고들지 못하는 부분을 작가가 밖에서 분명하게 묻는다고 할까. 허국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우리가 듣지 못한 답을 향한 질문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한국에 와서 강연을 하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로버트는 끝내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가 잊어버리고 싶었던, 아니 기억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잊어버리려고 애쓴다는 건 기억하기 위해 애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161쪽)


“우리의 이 작은 나라에서도, 또 넓은 세계 속 우리의 입지에도 진전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한국을 떠났을 때야 비로소 자유롭게 한국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233쪽)


아름다운 문장으로 쓰인 소설이지만 한 편으로는 역사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 같았다.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다. 가족소설의 형태를 지녔지만 공동체 의식이나 그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단단하게 묶어줄 대상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 인숙과 성호가 화해하고 제니와 헨리, 그리고 하루가 한 방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애틋하고 따뜻했다. 아픔과 상처, 뒤늦게 찾아온 작고 소소한 행복이 그들 가족을 떠나지 않기를 바랐다.


제니가 처음 찾아왔을 떄처럼 편안하게 머물렀다. 아이들이 도착하고 얼마 안 되어 나는 성호더러 새 엔진을 단 제니의 승합자를 차고에다 세워두라고 했다.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처음 10년 동안, 매일 아침 나는 하루를 바닷가로 데리고 가서 제니가 쉴 수 있게 해주었다. 제니가 아래층으로 내려올 때면 부엌 조리대에서 커피를 타주었다. (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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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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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 않은 척 거짓말을 한다. 괜찮다고 말한다. 하지만 괜찮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한 번 더 물어봐 주기를, 정말 괜찮으냐고. 어느 날은 비밀을 말하고 싶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을 쏟아내고 싶다. 어떤 마음은 거짓말이 되고 어떤 말은 침묵이 된다. 김애란의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 속 고등학교 2학년인 소리, 지우, 채운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한다. 진실을 털어놓고 싶은 채운,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진 소리, 죽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숨기는 지우.


세 아이의 곁에는 엄마가 없다. 소리와 지우의 엄마는 돌아가셨고 채운의 엄마는 아빠를 찌르고 감옥에 있다. 채운의 아빠는 죽지 않았고 채운은 전학을 오고 이모집에서 지낸다. 전학을 온 학교에서 채운은 자기소개를 하면서 한 아이를 보고 놀란다. 사고가 있던 그 밤, 그곳에 있던 아이였다. 지우였다. 지우도 채운을 알아봤다. 엄마가 일하던 갈빗집에 부모님과 함께 온 행복해 보였던 아이. 채운의 가정은 지우가 꿈꾸던 모습이었다. 아빠와 이혼한 엄마는 지우를 키우며 힘들게 살았다. 그리고 사고로 죽었다. 하지만 지우는 의심이 된다. 엄마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까 봐. 지우는 엄마의 애인 선호 아저씨와 살지만 떠날 계획을 세운다. 반려 도마뱀 용식이와 살 공간을 마련하면 떠날 것이다.


채운의 집은 지운이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다. 아빠는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었고 폭군이었다. 사고가 나던 날도 그랬다. 그 사고로 아빠기 죽기를 바랐다. 아빠가 살아나서 진실을 말할까 두려웠다. 채운을 위로하는 건 반려견 뭉치였다. 덩치가 큰 뭉치만이 채운의 가족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뭉치의 발을 잡은 소리가 뭉치와 많이 놀아주라고 말한다. 소리의 말을 들은 얼마 후 뭉치는 죽었고 채운은 소리에게 아빠를 한 번 만나달라고 부탁을 한다. 요양원에 있는 아빠가 정말 좋아지고 있는지 채운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리는 친구들에게 이상한 애란 말을 듣는다. 그림을 그리는 소리는 기이한 경험을 한 후 타인과 손을 잡기를 피한다. 자연히 친구들과 멀어진다. 그러니 지우가 연락을 해서 놀랐다. 당분간 용식이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소리가 말하고 싶은 비밀은 손을 잡으면 죽음이 보인다는 것이다. 죽음을 볼 수 있다니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아픈 엄마의 손을 잡고 바라기도 했던 마음이라고 소리는 말하고 싶다.


소설의 제목인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담임 선생님이 만든 자기소개 게임이다. 5가지 문장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일, 그중 하나는 반드시 거짓말이어야 한다. 채운, 지우, 소리가 하고 싶었던 진짜 거짓말은 무엇일까. 아니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을 무엇일까. 아직 돌봄이 필요하다고, 엄마의 부재를 견딜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잘 모르겠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를 원했던 건 아닐까. 만화 카페에 자신의 이야기를 단편 만화로 그리는 지우처럼. 공교롭게 채운과 소리는 그 카페에서 만화를 보고 지우라는 걸 알게 된다.


채운, 소리, 지우는 처음에는 모르는 사이였지만 채운과 소리, 소리와 지우, 지우와 채운이 서로를 의식하고 연결된다. 세 아이는 서로에게 거짓을 말하는 동시에 진실을 말한다. 용식이를 맡기고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는 지우는 소리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소리는 채운의 아버지의 손을 잡았지만 건강해질 거라고 말한다. 채운은 그날 밤 지우가 목격한 게 무엇인지 묻지 못한다.


때로는 가벼운 농담이나 거짓말을 건네는 사이도 필요하다. 지우는 선호 아저씨가 그랬으면 싶다. 그러면 아저씨에게 거짓말에 담긴 진심을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 아이 모두 감당하기 힘든 삶을 살아간다. 채운, 지우, 소리도 어찌할 수 없는 삶이라는 걸 안다. 세 아이는 너무 빨리 삶의 거짓과 진실을 알아버렸다.


그래서 더 안쓰럽고 아프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어른이 되면 다른 삶이 펼쳐진다고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저마다 다른 상처를 만나고 오랜 시간 통증에 시달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진실을 말해줄 수도 없다. 자기소개처럼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라며 삶에 대해 단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삶이라는 변수투성이를, 멋진 이야기를 쓸 수 있다고 무조건 희망을 건넬 수는 없다. 어쩌면 소설 속 세 아이는 나보다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은 이야기와 다를 테지. 언제고 성큼 다가와 우리의 빰을 때릴 준비가 돼 있을 테지. 종이는 찢어지고 연필을 빼앗기는 일도 허다하겠지. 누군가 집을 떠나 변해서 돌아오는 이야기. 지우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알았다. 하지만 그 결말을 잘 믿지는 않았다. 누군가 빛나는 재능으로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 재능이 구원이 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에 몰입되고 주인공을 응원하면서도 그게 자신의 이야기로 여기지는 않았다.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떠나기, 변하기, 돌아오기, 그리고 그 사이 벌어지는 여러 성장들. (232쪽)


그럼에도 김애란은 소설을 통해 삶이라는 거짓투성이 속에도 진실이 반짝이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닐까.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라는 게임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질문을 던질 이가 있다는 걸 말이다. 유연하고 명랑한 그런 게임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며 성장하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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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9-13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애란 좋아하는 사람 많던데 자목련님 이책 그저 그런가 봅니다. 저도 오래 전 한 작품 읽고 별로여서 관심없었는데 이 책은 표지가 끌리더군요. ㅎ

자목련 2024-09-16 11:27   좋아요 3 | URL
이번 소설은 뭔가 부족하고 아쉬운 느낌이 많았어요. 표지 좋아요!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독서괭 2024-09-13 19: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자목련님~ 제가 이런 리뷰를 쓰고 싶었다고요 ㅜㅜ

자목련 2024-09-16 11:29   좋아요 2 | URL
아주 나쁜 건 아니지만 뭐가 빠진 것 같은 소설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그랬어요.
독서괭 님, 평온한 명절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