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사의 두건 캐드펠 수사 시리즈 3
엘리스 피터스 지음, 현준만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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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졌던 욕망은 한순간에 튀어나온다. 숨겨온 게 아니라 게 같은 자리에서 자라왔기 때문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이때다 싶은 타이밍에 움직인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 세 번째 『수도사의 두건』 속 슈루즈베리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원의 로버트 부수도원장도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내전 당시 스티븐 왕의 편에 서지 않았던 헤리버트 수도원장의 권한이 정지되고 회의 참석차 런던으로 떠났으니 모든 권한은 로버트 부수도원장에게 있었다. 때마침 일어난 살인 사건 수사도 말이다.


사건은 이랬다. 자신의 장원을 수도원에 양도하고 남은 생을 수도원에서 보내기 위해 며칠 전 수도원으로 이사한 영주 거베이스 보넬의 죽음이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보넬이 보낸 문서를 헤리버트 수도원장이 승인하지 않고 떠났다는 것. 사건의 범인을 찾는 것도 중요했지만 보넬의 죽음으로 장원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느냐도 관련자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캐드펠 수사에게 중요한 건 보넬이 독살당했다는 것인데 자신이 기른 약초가 살인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약초의 이름은 ‘수도사의 두건’으로 우리에게 투구꽃으로 익숙하다. 보넬이 먹은 음식은 로버트 부수도원장이 그에게 보낸 것으로 같은 음식을 먹은 부수도원장은 괜찮으니 범인은 보넬의 가족이나 하녀, 하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당시 부엌에는 하녀 알디스와 하인 앨프릭과 메이리그가 있었다.


메이리그는 보넬이 하녀 사이에 낳은 자식이었으나 상속과는 무관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보넬의 의붓아들 에드윈으로 장원을 수도원에 양도한 것에 앙심을 품어 살해했다는 정황이다. 평소에도 보넬과 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다. 집을 떠나 매형의 가게에서 목수 일을 배우고 있었다. 누가 봐도 충분한 가설이었다. 더구나 도망치듯 달아났으니까.


보넬이 식사를 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에드윈이 음식에 독을 넣을 시간은 없었다. 그리고 캐드펠의 진료소에서 약초를 훔쳐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 약초의 효능을 아는 사람 말이다. 캐드펠의 작은 오두막에 있던 약초는 캐드펠과 진료소를 담당하는 수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진료소를 방문한 누군가가 범인일 가능성이 컸다. 억울한 범인을 만드는 일은 없어야 했다. 하지만 로버트 부수도원장는 에드윈을 잡아 사건을 종결하고 싶었다.


『수도사의 두건』에서 흥미로운 건 보넬의 아내 리힐디스와 캐드펠의 관계였다. 그렇다. 리힐디스와 캐드펠은 과거 연인이었다. 이 사실을 들은 로버트 부수도원장은 캐드펠에게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지시한다. 이제 사건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이가 있으니 바로 『시체 한 구가 더 있다』에서 캐드펠과 대등한 관계에 있던 휴 베어링이다. 사리분별이 가능한 그는 사건을 맡은 행정장관을 대신한 책임자였다. 행정장관은 왕의 회의를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오. 힘이 든다고, 진실에 눈을 감은 채 편안한 것에만 안주해서는 안 되지 않겠소?” (238쪽)


캐드펠은 사건 수사에 관여할 수 없지만 아픈 수사를 돌보는 일은 가능했다. 수도원 밖으로 나가 정보를 구하기에 충분했다. 누가 진료소에서 약초의 효능을 알고 몰래 훔쳤을까. 보넬의 죽음으로 장원을 소유할 가능성이 생겼을까. 보넬의 장원의 지리적 위치가 중요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 간 접경지대의 가족 관계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통혼도 많았다. 리힐디스의 아들 에드윈은 보넬이 어떻게 죽은 지도 모르는 어린 소년이었고 약초가 담긴 약병에 대해서도 몰랐다. 범인이라면 약병을 버렸을 것이고 약초를 따르며 흔적을 남겼을 게 분명하다. 몸소 체득한 지식과 지혜와 연류를 더한 캐드펠의 수사는 이번에도 완벽했다.


엘리스 피터스는 12세기 중세 모습을 치밀하고 상세하게 그려낸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안타까운 마음을 배제하지 않았다. 인간이 어떤 짓까지 벌이는지,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추락하는지 말이다. 『수도사의 두건』은 촘촘하게 잘 짜인 역사추리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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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4-08-16 1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봐도 뭔가 좀 어렵네요. 역시 역사소설은 장벽이 느껴져요 ㅠㅠ
시리즈라길래 봤더니 중세시대 영국배경의 탐정물? 뭔가 새롭네요.
자목련 님도 시리즈 정주행 중이신가요 ㅎㅎㅎ

자목련 2024-08-18 07:17   좋아요 2 | URL
제가 정리를 잘 못했서 ㅋㅋㅋ
완간 30주년 기념판이라 이미 팬이 많은 시리즈라고 합니다.

달자 2024-08-16 2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 추리 소설이라.. 뭔가 색다른 조합인데요? 추리소설이 너무 어려우면 좀 힘들던데 이 책에 별 다섯개를 주셨네요 …!! 리뷰를 읽어도 좀 어려운 책 같은데.. 으으 호기심 그득그득

자목련 2024-08-18 07:18   좋아요 1 | URL
제 리뷰는 엉망이지만 소설은 무척 재미있어요. BBC에서 드라마 <캐드펠>의 원작, 드라마로 봐도 좋을 것 같아요!!
 
시체 한 구가 더 있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 2
엘리스 피터스 지음, 김훈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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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 피터스는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을 통해 성녀 ‘이니프리드’의 유골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고발한다. 이어 캐드펠 수사 시리즈 두 번째 『시체 한 구가 더 있다』는 제목을 통해 살인이 일어났음을 알려준다. 시체 한 구가 복선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이야기일까. 기대를 안고 캐드펠 수사를 만나보자.


1138년 잉글랜드는 왕위를 놓고 모드 황후와 스티븐 왕 사이의 내전으로 전운이 가득하다. 슈루즈베리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원의 캐드펠 수사는 오늘도 세상과 상관없이 수도원의 정원에서 자신만의 텃밭을 가꾼다. 수도원 밖은 전쟁터 그 자체다. 수도원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지만 캐드월은 자신이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한다. 그런 캐드월에게 한 수사가 부모를 잃어 갈 곳 없는 어린 소년 고드릭을 부탁한다. 캐드월은 고드릭에게 잔심부름을 시키며 고드릭을 찬찬히 살핀다. 『시체 한 구가 더 있다』에서 고드릭이 중요한 인물이라는 게 느껴진다. 캐드웰 시리즈 두 번째에 나의 추리력이 상승한다고 할까. 음, 미리 말하자면 그건 아니었다.


캐드펠 수사는 슈루즈베리 성을 함락한 스티븐 왕의 명령으로 시체를 수습하고 매장하는 임무를 맡는다. 스티븐 왕이 승리했다는 건 모드 황후를 지지하던 이들의 패했다는 것. 누군가는 이 기회에 모드 황후를 배신하고 스티븐 왕에게 신임을 얻기로 하는데 ‘휴 베링어’도 그중 하나다. 그는 모드 황후를 지지하던 귀족의 딸 고디스의 약혼자로 왕에게 고디스의 찾아내 그녀의 아버지의 행방을 왕에게 보고할 계획이 있다.


시신을 수습하던 캐드펠은 시체의 숫자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자에 따르며 수습할 시신은 ‘아흔넷’이라고 했는데 분명 하나가 더 있는 ‘아흔다섯’이었다. 누군가 살인을 저지른 후 시신의 무리에 몰래 갖다 놓은 것이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고 설사 발견되었다 해도 의심할 이가 없을 거라 자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캐드펠 수사는 아니었다. 사건의 실체를 밝혀야만 했다. 다른 수사가 그 임무를 맡았다면 아무 일 없이 넘어가겠지만 살인자는 운이 나빴다. 캐드펠 수사에게 대충은 없으니까.


교묘하고 잔인한 계획을 세운 살인자는 누구일까. 자신이 승리했다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을 자, 누구인가. 우선 죽은 자의 신원을 알아야 했다. 캐드펠은 그가 모드 황후의 편에 선 행정 장관의 향사 ‘니컬러스’였다는 걸 알아냈다. 프랑스로 보물을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고 그에게는 다른 일행도 있었다는 사실까지. 다행스럽게 캐드펠은 그 과정에 죽은 자의 다른 일행 토럴드가 다쳐서 숨어 있는 걸 발견한다. 고드릭와 함께 그를 치료하면서 살인 사건 전말에 대해 알게 된다. 그렇다면 스티븐 왕의 명령을 받은 이가 저지른 살인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시신을 처리한 방법을 보면 그건 아니다. 또 하나 의문점은 보물의 행방이다. 캐드펠은 범인이 노린 건 보물이라고 확신한다.


소설 초반에 등장한 소년 고드릭으로 돌아가 보자. 이쯤 되면 그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는 휴 베어링이 찾아 나선 그의 약혼녀 고디스였다. 수도원에 숨어있지만 눈치 빠른 휴 베어링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캐드펠은 고디스를 수도원에서 안전하게 내보내기 위해 치밀한 계획은 세운다. 캐드펠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휴 베어링과의 대치 상황과 대결 구도는 이 소설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휴 베어링이 캐드펠의 생각을 읽고 그의 계획을 망치는 건 아닐까 읽는 내내 마음 졸였다. 살짝 과장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할까. 생대를 제압하는 눈빛 대결,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포커페이스.


“모든 의문에는 반드시 답이 있기 마련이지.” 캐드펠은 경구 같은 말을 내뱉었다. “충분히 기다리기만 하면 말이오.” (131쪽)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곳이 어디든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성스러운 신의 공간인 수도원도 마찬가지. 저마다의 욕망을 감춘 채 수도원을 오가는 사람들의 내면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과 수도원으로 모여든 인간 군상의 욕망을 보여주는 『시체 한 구가 더 있다』는 첫 번째 이야기인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보다 치밀한 구성으로 훨씬 더 매력적이다.


캐드펄의 인간적인 모습과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범인의 정체는 물론이고 고디스와 토럴드의 달달하고 풋풋한 로맨스까지 한층 재미있다. 다음 이야기 『수도사의 두건』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날까. 벌써부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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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8-13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시리즈 저 구판으로 꽤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어디다 처분했는지 기억이 안나네요. 당시 참 인기였고 유명했는데 저는 몇 권 읽다 말았죠.
이렇게 개정판이 나오니 또 다시 모으고 싶고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자목련 2024-08-14 09:45   좋아요 1 | URL
이미 읽으시고 소장도 하고 계셨군요. 캐드펠 수사의 인간적인 매력과 뛰어난 통찰력에 반하고 있습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 달달북다 1
김화진 지음 / 북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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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해지는 순간 재미와 감동은 줄어든다. 그게 일이든 사랑이든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랑에는 권태기가 오고 주기별로 사표를 써야지 싶은 마음이 찾아온다. 누군가 다음 단계로 결혼을 택하거나 다른 사랑을 찾고 누군가 이직을 하거나 퇴사를 결심한다. 김화진의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 속 모림도 그런 일상을 살아간다.


딱히 올라가야 할 목표 같은 것 없이 직장 생활을 하는 모림에게 팀장은 의욕을 갖고 적극적으로 일하라고 말한다. 결혼을 결정한 친구 성아는 모림에게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라고 조언하다. 모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직장에서 맡은 업무를 하면서 승진이가 고가에 대한 기대가 아닌 양심적으로 실수하지 않으려 노력하다.


그런 모림에게 변화가 생긴다. 출근길에 우연히 들른 떡집 남자를 만나면서부터다. 공원에서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남자가 떡집 아들이라는 건 몰랐다. 저녁 공원 산책을 하면서 만났다. ‘약밥이’라는 개의 주인인 ‘찬영’은 손님으로 온 모림을 기억하고 있었다. 모림보다 어린 남자, 부모님의 떡집에서 일하면서 머리를 꾸미고 힙합을 좋아하는 사람. 그러니까 MZ 세대로 보면 맞을까. 아침 출근길에 떡집에서 퇴근 후 저녁엔 공원원에서 만나면서 둘은 점점 가까워진다. 성아의 조언을 생각하면 찬영과 만남은 끝내야 하는데 모림은 찬영에게 이끌린다.


떡집이 등장하기 때문일까. 소설에는 ‘약밥이’란 이름처럼 떡과 그에 대한 비유가 많이 등장하는데 충분히 작가의 의도라는 걸 알 수 있다. 그 의도가 나쁘지 않지만 기발하거나 신선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작가가 이 짧은 단편을 공들여 쓴 것 같다. 모림의 3개월간 한 권이 책만 읽는 습관이나 모림이 읽고 있는 책 속 주인공의 이름을 찬영에게 모림이 붙여준 설정이 흥미롭고 재밌다.


나는 큰 얼음에서 쪼개져 떠내려가는, 그러는 동안 계속해서 조금씩 작아지는 얼음조각에 탄 무리에서 가장 아둔한 펭귄 같다. (…) 다른 얼음조각에 닿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두 얼음을 꼭 붙여, 녹였다가 얼개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조랭이떡 같은 모양으로부터 넓어진 얼음 위에서 누군가와 함께 흘러가면 좋으련만. (54쪽)


찬영과 모림의 관계와 직장인으로 모림의 일상과 고민을 현실적으로 잘 그려냈다. 섣불리 사랑이라 확신할 수 없지만 피할 수 없는 감정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그려낸다. 반복된 일상과 미지근하게 지속되는 감정을 가진 현대인의 모습은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다.


저는 제 인생이...... 좀 재밌었으면 좋겠어요. 다 제치고, 냅다 그런 말을 해버렸다. 그 순간 나는 나의 욕망을 깨달은 것도 같았는데,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간 문장은 이런 것이었다. 한참 늦더라도 내 마음대로 걸음대로 이 시대를 가로지를 것. 그것이 나의 목표다. (60쪽)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단편이다. 가볍게 산책하듯 읽기에 좋다. 재미없는 소설이나 어려운 책에 지쳤다면, 독서 권태기가 온 독자라면 다시 책과 이어줄 계기가 될지 않을까. 약밥이 같은 귀여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요즘 남자를 떠올리면 더 재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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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캐드펠 수사 시리즈 1
엘리스 피터스 지음, 최인석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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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엔 추리소설이 제격이다. 하지만 낯선 지명과 많은 인물의 등장 앞에 살짝 주춤할 때가 있다. 바로 역사 추리소설이 그러하다. 배경지식이 없다면 자꾸 앞으로 돌아가 하나씩 이름을 외우거나 메모를 해야 할 판이다. 그래서 친절한 저자(출판사)는 독자를 배려한다. 소설 속 등장인물의 관계나 지도를 첨부한다. 덕분에 완간 30주년 기념 캐드펠 수사 시리즈를 읽는 초보 독자인 나는 어렵지 않게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는 캐드펠 수사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다. BBC 드라마 <캐드펠>의 원작이라고 하니 소설과 드라마를 함께 즐겨도 좋겠다.


이제 12세기 영국 슈루즈베리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원의 캐드펠 수사를 만나보자. 그렇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이다.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젊은 시절 배를 타고 세계를 누볐고 십자군 전쟁에도 참가했으나 현재는 수도원에서 조용하게 정원을 가꾸고 약물 식물을 재배하는 생활에 만족한다. 그에게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수도원의 명성을 위해 웨일스 귀더린이라는 시골 마을에 잠든 성녀 ‘이니프리드’의 유골을 가져오는 일이다. 캐드펠이 웨일스어에 능통해 통역을 위해 선발된 것이다. 그리하여 로버트 부수도원장과 콜룸바누스 수와 존 수사와 함께 귀더린으로 향한다.


캐드펠 수사 일행을 맞이한 건 극심한 반대였다. 당연하지 않은가. 귀더린의 성녀를 왜 슈루즈베리로 옮겨야 한단 말인가. 귀더린 주민들은 영주 리샤르트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다. 성녀의 유골을 두고 리샤르트와 로버트 부수도원장의 갈등은 커지고 캐드펠은 통역을 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다. 사실 이때까지는 추리소설이라더니 뭐야 싶었다. 누군가 성녀의 유골을 훔치는 것일까 예상했다. 이런 내 마음을 엘리스 피터스가 알아차린 것일까.


살인이 일어났다. 리샤르트가 죽임을 당했다. 로버트 부수도원장과 약속을 위해 집을 나선 그가 살해당했다. 놀랍게도 외동딸 쇼네드의 연인인 이방인 엥겔라드의 화살이 꽂혀있었다. 이방인인 엥겔라드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이는 없었고 화살이라는 명확한 증거물은 그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이쯤에서 추리에 약한 나도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누군가 누명을 씌운 것. 나는 쇼네드를 짝사랑한 페레디르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엥겔라드는 도망쳤고 귀더린 주민은 혼란에 빠졌다.


쇼네드는 성녀의 유골을 옮기는 걸 반대한 아버지를 죽일 사람으로 로버드 부수도원장을 확신했고 캐드펠에게 도움을 청한다. 우리의 주인공 캐드펠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캐드펠은 리샤르트의 시체를 꼼꼼하게 살폈다. 화살이 살해도구가 아니었다. 위장이었다. 초동수사가 제일 중요하다는 걸 보여준다고 할까. 쇼네드는 캐드펠을 믿었다. 캐드벨 수사만이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고 연인 엥겔라드의 누명을 벗겨줄 수 있다고.


“죽은 자는 자신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온몸으로 증언하기 마련이네. 자네 부친은 이미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앞으로도 더 많은 것, 아마도 모든 것을 알려주실 거야.” (197쪽)


엘리스 피터스는 리샤르트를 죽인 범인을 찾는 과정에 독자가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용의자 리스트에 오린 인물의 살해 동기와 알리바이를 하나씩 지워가는 것. 마침내 뜻밖의 용의자만 남았다. 이번에도 나는 틀렸다. 페레디르가 주범은 아니어도 적어도 공범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는 그냥 사랑에 빠진 질투심 가득한 젊은이였다.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이 맞았다. 사건을 해결하고 범인을 찾는 과정도 재밌고 내가 몰랐던 12세기 영국의 생활상도 볼 수 있어 좋았다. 시대를 떠나 인간의 탐욕적인 명예욕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놀랍지도 않다. 성녀의 유골이 어디에 있든 신앙심이 제일 중요한 게 아닐까. 공적을 쌓으려는 몸부림이 안타깝고 그것으로 인해 가려지고 묻혔을 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공적인 심판이란 깊이 있는 탐색을 하기보다 표면에 떠오른 사실들을 수확하고 그에 따라 합당한 결론을 도출해 내는 식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여기저기서 종종 돌출되는 의구심들은 신속한 질서 회복과 평안 유지를 위해 국가가 치러야 하는 대가인 셈이다. (209쪽)


BBC 드라마의 원작이라는 걸 알아서 그랬을까. 책을 일으면서 내내 캐드펠을 연기할 배우를 생각하고 있었다. 최근 즐겁게 시청하고 있는 드라마 때문인지 자꾸 신하균이 떠올랐다. 수사로 분한 깐깐한 표정의 모습 말이다. 캐드펠 수사의 다음 활약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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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8-16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시리즈가 핫한가 봐요!! 리뷰가 많이 올라오네요. 급 읽고 싶어졌는데 급 구매할까 말까 윽 고민됩니다..

자목련 2024-08-27 10:19   좋아요 0 | URL
댓글이 늦었어요. 이 시리즈 재밌어요. 급 구매는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을~~
 
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0
이장욱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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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겹이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읽으면서 겹이 벗겨지는 순간과 마주하면 짜릿함을 느낀다. 작가가 만든 겹을 독자가 걷아내는 일, 벗겨내는 일을 재독이나 삼독에서 가능할 것이다. 물론 내 입장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겹을 내버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랜만에 읽은 이장욱의 소설 『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 은 내게 그런 소설이었다. 그러니까 겹이 있다는 걸 느꼈지만 나는 그 겹을 걷어내지 않았다. 아니 걷어낼 수 없었다.

대체로 인간은 복잡하지만 삶은 의외로 단순하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와 연결되고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시스템 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온다.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자의로 누군가는 타의로. 이장욱의 소설 속 인물도 그렇다. 소설을 이끄는 화자 ‘연’과 ‘천’은 연인의 죽음과 부재로 남겨진 사람이다.

연은 남편 ‘모수’와 함께 ‘해변 여관’을 운영한다. 말이 운영이지 조만간 철거가 예정된 곳이다. 바다가 있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없는 곳의 허름한 여관을 찾는 이가 없다. 모수가 병으로 죽고 연은 의미 없는 하루를 보낸다. 모수와 보낸 시간을 떠올리며 혼잣말을 하고 모수의 짐을 정리한다. 연극배우인 천은 연인인 ‘한나’가 떠나자 방황하다 해변 여관에 투숙한다. 연과 천은 종종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지만 대화를 나누지는 않는다.

‘연’과 ‘천’이 번갈아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니까 모수와 연, 한나와 천의 만남과 헤어짐이다. 모수는 도청 공무원이었고 기록하는 자였고 방송국에 제보했고 파면당했다. 연은 이혼 후 모수를 만났고 인연을 맺었다. 천은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한나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지만 한나가 죽음을 앞둔 자신의 옛 연인에게 돌아가면서 헤어졌다. 해안선이 침식되는 섬, 그곳의 해변 여관처럼 연과 천은 폐허의 삶을 살아간다. 연은 사라질 여관을 떠나지 않고 천은 그곳에 머문다.


모수는 일기를 쓰는 사람이고 말이 없었고 정확하게 설명을 하지 않았다. 사실만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연은 생각이 말로 흘러나오는 사람이었고 모수의 말과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모수가 떠나고 그가 남긴 노트는 정리하지 못한다. 모수의 유령이 볼 수도 있으니까. 그것이 연이 모수를 기억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다. 돌아오지 않을 한나를 그리워하는 천도 다르지 않았다. 국지전이 일어나고 지구는 뜨거워지고 무서운 태풍이 오는 세상이지만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국가는 개인의 상실이나 상처 따위는 관심이 없고 바다는 밀려왔다 쓸려가고 세상은 점점 더 나쁘게 돌아가니까. 모수가 일기를 쓰는 일은 그런 세상을 견디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똑같은 하루는 없잖아요. 매일이 다르잖아요. 일기를 쓰면 그런 게 느껴지는데.” (87쪽)

매일 같은 날씨는 없으니까. 똑같은 하루처럼 보이지만 똑같은 하루를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간다는 건 분명 매일은 다른 삶이니까. 한나는 천이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천이 배역의 삶이 아닌 천 스스로의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했다. 그런 의미에서 천이 한나를 따라 사막으로 취재 여행에서 한나가 한 말 “다음 구름에서 쉬어 가요. 구름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곳에서.” (126쪽) 은 소설을 관통한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다음 구름에서 쉬어 가요.”

연의 중얼거림을 따라서 천이 중얼거렸다. 언젠가 자신이 해본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그 말을 한 것이 한나였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연의 중얼거림이 듣기에 좋았고 듣기에 좋은 것은 따라 하기에 좋을 따름이었다. 천이 제 말을 따라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연이 그를 바라보았다. 천도 연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 수평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평선 너머의 망망대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은 몽상가도 아니고 생물학자도 아니고 옛사랑을 추억하는 사람도 아니고 단지 살아가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은 천도 마찬가지였다. (154쪽)

해변 여관 옥상에서 연이 담배를 피우며 중얼거리는 말도 그것이다. 쏟아질 듯한 이 여름의 열기를 살아내는 나에게도 필요하다. 단지 살아가는 사람, 어떤 세상이 와도 단지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 그것이 남겨진 자로 살아가는 모두를 위로한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여전히 슬픔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에게, 남겨진 자의 곁에 머물려 떠도는 모수의 유령 같은 이들에게도.


나는 이장욱의 아름다운 겹을 벗겨내지도 걷어내지도 못했다. 봄에 읽고 여름에 다시 읽었지만 이해할 수 없어서 좋았다. 알 수 없는 세계라서, 그 세계에 감탄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오히려 그 뜨겁고 황홀한 겹에 갇히는 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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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08-06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해할 수 없어서 좋았다‘ 는 자목련님의 구절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좋은 리뷰 올려 주셔서 감사 합니다.

자목련 2024-08-08 07:13   좋아요 0 | URL
마힐 님 감사합니다. 건강하고 시원한 하루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4-08-09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제목이 주는 느낌이 좋네요.
제목만 읽어도 어쩐지 재미있을 것 같은 책입니다.
나중에 책소개를 조금 더 읽어보고 싶어요.
자목련님, 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어요.
시원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자목련 2024-08-10 10:59   좋아요 1 | URL
네, 제목이 좋지요!
입추 지나고 아주 쬐끔 달라진 것 같지만 여전히 더워요.
서니데이 님도 시원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