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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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여자는 없었다. 분명히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기억에서 사라져, 얼굴과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았다. 전방을 누비며 함께 싸우고 수많은 병사들을 구해냈지만,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건 모욕의 말뿐이었다. 승리와 패배, 잔혹한 아픔으로 점철된 전쟁의 역사는 단지 남자들의 것이었다. ‘전쟁’과 ‘여성’이라는 단어를 연상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대개 아이 손을 잡고 피난을 가는 여자들의 모습이나, 끔찍한 고통과 피해를 입거나 죽음 앞에 선 모습들뿐이었다. 이전엔 왜 이상하다 생각지 않았을까. 왜 군복을 입고 싸우던 여군들이나,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적에 대항했던 여자들의 모습을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을까. 물론 그 ‘수’와 ‘비율’에 있어서 남자에 비해 지극히 일부라는 이유를 들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의문은 따로 있다. 왜 우리가 여자 병사들을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그들은 언급되지도 않으며, 역사 속에서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것일까.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참가했던 여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논픽션이다. 작가 스스로 ‘소설 - 코러스’라고 부르는 장르, ‘목소리 소설’이라 불리는 형식을 택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터뷰가 이어지고 텍스트는 풍부한 목소리로 다가온다. 작가가 말하기를,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고 어떠한 의도도 없이 감정으로 인해 변해왔을 ‘그때’의 진짜 진실을 읽어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고 한다. 작가의 노력 덕분에 인터뷰이의 목소리에 함께 딸려오는 떨림과 어조까지 읽힌다. 울음을 머금고, 때로는 추억을 회상하듯 미소를 짓고, 울컥 올라오는 분노를 참지 못한다. 그들은 그렇게 수십 년을 견뎌왔고, 비로소 이 책을 통해 이름과 전쟁에 참여했던 청춘의 얼굴을 남겼다.

 

“내겐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많은 반면, 집사람에겐 전쟁에 대한 감정이 더 많아요.
하지만 언제나 감정이 사실보다 분명하고 강력한 법이지.”

 

백만 명이 넘었던 소녀 병사, 그리고 책에서 목소리를 전하는 200명의 소녀였던 병사들이 전해주는 전쟁 이야기는 지금껏 들어왔던 것들과 확연히 다르다. 적의 전투기를 격추시키고, 총탄을 뚫고 기어가 육중한 몸의 부상병을 수없이 많이 구해내고,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던 그날의 경험을 담담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또다른,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한다. 전장에서 터진 첫 생리의 기억, 포로를 연민했던 기억, 바닥에 깔린 시체를 바라보던 기억, 적의 포로가 되어버린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던 기억, 어떤 여자가 임신한 몸으로 팔에 지뢰를 안고 달려가던 기억……. 너무도 적나라하게 재현된 전쟁의 민낯으로 이 책이 여러 번 검열을 당했다고 하니, 승리와 공훈을 우선적으로 전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은 꽤나 불쾌한 기록이었으리라. 그리고 이러한 검열은, 전쟁이 끝난 후 여자들이 당해야만 했던 냉대와 무관심, 모욕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용서하는게 쉬웠을거라 생각해? 당연히 그들의 눈물을 보고 싶었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기까지 나는 수십년이 걸렸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다. 아군과 적군, 남자들이 뒤엉켜 홀린 듯이 서로를 죽이던 날. 포로가 된 독일 소년에게 빵을 건네주던 날. 생식기가 훼손된 독일 여자들을 발견했던 날. 적에 대한 혐오로 불타오르는 마음과, 생명을 가치있게 여기는 마음이 충돌했던 그날. 여자들은 그렇게 두 개의 본성과 싸우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담담히 넘어가야 하는 전장 속에서 그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전쟁은 사람을 이리도 비참하게 만든다.

 

얼마 전 우연히 한국전쟁 여성 의용군과 관련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전쟁이 일어났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군 입대를 자원한 여자들이 가히 삼천 명에 육박했고, 우여곡절 끝에 500명의 여성 의용군이 탄생했다는 사실이었다. 큼지막한 군복을 접어 입고 남자들과 함께 가혹한 훈련을 받고 전장을 누비던 여성들. 여군이라는 개념 자체가 어색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그들은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으며,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결혼과 취업을 위해 오히려 여군 경력을 숨겨야 했다. 그들의 역사는 어디에 있는가. 여성 의용군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우리가 듣지 못한 ‘목소리’들은 또 어디에 있는가. 그 목소리를 들을 날이 올까.

 

 

 


바로 그곳, 따스한 사람의 목소리, 과거가 생생히 반추되는 그 목소리 속에 원초적인 삶의 기쁨이 감춰져 있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의 비극이 담겨 있다. 삶의 혼돈과 욕망이. 삶의 유일함과 불가해함이. 목소리 속에 이 모든 것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진짜 원본들이. 나는 우리의 감정들로 사원을 세운다…… 우리의 염원과 환멸로. 동경들로. 존재했지만 언제 슬그머니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것들로.

그들의 울음과 비명을 극화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울음과 비명이 아닌, 극화 자체가 더 중요해질 테니까. 삶 대신 문학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릴 테니까. 이 일이 워낙 그렇다. 그렇게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 이른 나이에 전쟁터로 갔어. 아직 어린애나 다름없었는데. 얼마나 어렸으면 전쟁중에 키가 다 자랐을까.

역사는 앞으로도 수백 년은 더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라며 고민하겠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디에서 왔을까? 상상을 한번 해봐. 임신한 여자가 지뢰를 안고 가는 장면을.

전쟁영화를 봐도 사실이 아니고 책을 읽어도 사실이 아닌 거야. 그러니까, 그게 달라…… 뭔가가 달라. 그렇다고 전쟁을 직접 겪은 내가 이야기하면 정확하냐. 그것도 아니거든. 전쟁은 그렇게 끔찍하지도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았어. 때론 전쟁터에서 맞는 아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 전투가 있는 날 아침이면 …… 주위를 보며 생각했지. ‘어쩌면 아침을 맞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지 몰라. 아, 세상은 이렇게도 아름다운데…… 공기도 …… 햇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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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관한 르포
하재영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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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울 여의도 근처에서 육견협회의 생존권 시위가 있었다. 나는 이 소식을 언제나처럼 뉴스 기사로 접했다. 사진에서는 시위에 동원된 여섯 마리의 개들이 제 몸보다 작은 철창에 끼어있는듯 어정쩡한 자세로 쭈그려 앉아 있었다. 비가 한참이나 내리던 날이었다. 사방이 뚫린 철창 속에서 개들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고함과 난동을 부리는 현장 속에서 비까지 맞으며 고통을 받고 있었다. 개들을 구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동물보호단체 사람들도 곁에 있었지만, 약하디 약한 동물보호법에 쓰인 한 줄 (긴급 격리 조치) 조차 실행하지 않는 처참한 현실 앞에서 개들을 다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개들은 아마 더욱 끔찍한 곳으로 갈 것이다. 소란스러운 거리와 수많은 군중들에게 둘러싸인 환경보다 더욱 끔찍하고,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곳으로.

“집단 수용소 사진들이 보여주는 것은 연합군이 진군해 들어갔던 바로 그 순간뿐이다. 어떤 장소에 대해 전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곳이 삶의 공간이었던 사람뿐이다.”(82쪽)

종종 SNS를 통해 유기견과 식용견, 번식견의 삶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본다. 자꾸 찾아보니 추천 데이터로 뜨는지 더 자주 보게 된다. 내 개가 부드러운 흙과 잔디를 밟고 하수구 철망에 발이 끼지 않으려고 길을 돌아가거나 점프를 할 때, 평생을 철망 위에서 온 힘을 다하여 버텨야 하는 개들이 있다. 내 개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깨끗한 패드에 배변을 할 때, 평생 물 한 모금 없이 음식물 쓰레기를 먹고 그 자리에서 배변을 해결해야만 하는 개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사진과 영상과 이야기들로, 단편적으로 접한 것들 너머엔 순간 너머의 ‘삶’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 있지 않은 누구도 그 삶을 완벽히 알 수 없다. 이 책에서는 종종 이와 관련한 홀로코스트를 연상시키는 문장들이 등장하는데, 인간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 또한 그러하지만 철창에 구겨져 이용을 당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동물의 삶 또한 다를 것이 없어 보이기에 전혀 연관 없는 것이라 보이지 않는다. 책의 제목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나치 관련 소설과 유사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대한민국에 사는 개들의 현실을 신랄하게 꼬집은 르포 형식의 책이다. 개 산업 구조 위에 놓여 다양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개를 살리려는 사람들의 생생한 인터뷰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파악한다. 사람에게 이용당하기 위해 태어나 사람에게 버림받는 개들의 끝은 참혹하다. 강간과 불법 수술이 만연한 번식장, 새끼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경매장, 고통에 힘겨워하는 동물을 보조금 때문에 방치하는 보호소, 피의 냄새가 진동하는 도살장…… 매일 수많은 개들이 죽고 수많은 개들이 상상도 못할 속도로 생산된다. 작가는 바로 이 시스템 자체가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저 동물들을 인간의 영역으로 데려온 이들이 다름 아닌 우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 우리의 시스템 안에서 동물들이 어떤 일을 겪는지 이야기하는 일, 그들에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질문하는 일이 오로지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289쪽)

이런 이야기를 하면 늘 득달같이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다. “닭은 불쌍하지 않아? 소는?” 그럼 “당신은 채식만 해야겠네”라고 힐난하는 말들. 작가는 이 세계의 모순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고 싸워 얻은 결론을 침착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거대한 공장 사육으로 수많은 동물들이 고통받는 현실 속에서 굳이 종 하나를 추가해야 하는가, 이것이 생명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일까. 그리고 작가 스스로에게도 던졌을 질문을 던진다. 이 막막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데는 어떤 자격도 필요치 않으며, 완벽하게 실천할 수 없다고 해서 단 하나의 도움과 실천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작가는 재차 강조한다. 우리는 유리 상자 속 예쁜 강아지 너머 처참한 삶을 살아가는 개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쉽게 사지 말아야 하고,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우리의 삶은 온갖 동물의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덧붙이고 싶은 말>

+ 보호소 안의 안락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편안한 안락사가 아니다. 자연사 또한 말그대로의 자연사가 아니다.

+ 개시장은 오로지 현금장사다. 그리고 간이과세자다. 연간 6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간이과세자라는 건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그들의 생존권은 허구다. 쓰레기를 먹이면서 온갖 끔찍한 방법으로 도살하며 월 수천만원의 돈을 버는 그들은 생존권을 논할 자격이 없다.

+ 개고기의 항생제 잔류치는 최고도, 세균과 바이러스가 득실댄다고 한다. 우리는 개고기의 위해요소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음식물 쓰레기를 먹고, 더러운 환경에 자라고 도살되며 같은 동족의 내장이나 고기까지 먹은 개들의 고기가 어떤 위해요소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전세계의 개 식용 인구가 소수이니 만큼 데이터도 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굳이 먹고 싶은가?


● 52쪽,
동물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생활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일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삶의 방식을 재고하기보단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의 모순을 찾아 위선자라고 비난하고 싶어한다. 동물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평범했던 일상이 딜레마로 전환되는 일이다. 나를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외부의 적인 아닌 스스로의 모순과 싸우는 일이다.

● 79쪽,
그 모견은 이미 삶을 포기한 상태였어요. 내가 자기를 들어올리든 물속에 집어넣든 아무 반응도 없었어요. 온몸이 축 처진 채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게 있기만 했어요. 숨만 붙어 있을 뿐 어떤 움직임도, 최소한의 반응도 없었어요. 시체를 만지는 기분이었어요. 더이상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게 너무나도 명확하게 느껴졌어요. 아, 개도, 동물도 극한 상황에서는 차라리 죽고 싶어하는구나. 사람이면 벌써 자살했을 거예요.

● 118쪽,
제가 번식장에서 봤던 어떤 어미는 새끼를 지키려다 못해 도로 뱃속에 집어넣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어요. 그런 모견들이 허다해요.

● 149쪽,
동물에 대한 연민을 낮잡아보는 사람들이 많잖아. 우리가 구하는 게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는 이유로, 응원은 고사하고 비난을 받을때도 있잖아. 나도 인터넷에서 그런 댓글 많이 봐. 개새끼들 도와줄 여력 있으면 사람이나 도와주라고. 불쌍한 사람도 많은데 개새끼가 대수냐고.
하지만 사람이든 동물이든 누군가를 위해 자기 인생을 걸어본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 여기 돕지 말고 저기 도와라, 얘를 구하지 말고 쟤를 구해라, 그런 소리는 누구도 구해본 적 없고 누구도 살려본 적 없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

● 226쪽,
누군가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고 전제한 뒤 이 세상에는 ‘더 고통 받는 동물’과 ‘덜 고통받는 동물’이 있다고, 그러므로 모든 동물을 ‘더 고통받는 동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평등은 아무 가치도 없다. 그것은 모든 동물을 고통의 수레바퀴에 밀어넣으려는 궤변일 뿐이다.

● 247쪽,
사람들은 인육이 아닌 이상, 먹는 것 가지고 뭐라 하면 불쾌해합니다. 저도 압니다. 음식은 복잡한 문제입니다. 문화, 습관, 그것을 함께 먹었던 사람들과의 기억, 그밖에도 많은 것이 들러붙어 있지요. 하지만 꼭 그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 모든 동물은 먹어도 된다, 사람만 안 먹으면 된다, 이런 생각도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게 인간 말고는 다 잡아 죽이자는 말과 뭐가 다릅니까? 그게 다른 종을 대하는 우리의 도덕입니까? 인간은, 우리는, 그래도 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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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말도 듣기 좋게 - 만나면 기분 좋아지는 사람의 말하기 비밀
히데시마 후미카 지음, 오성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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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 예쁜 말을 골라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닌데도, 긴장감이 넘치는 상황에도 미소와 인사, 칭찬을 건넨다. 일부러 멋진 말을 꾸며서 하지 않는다. 조심스러운 마음과 반가운 마음을 전하는 진심 어린 말에서는 억지를 찾아볼 수 없다. 말은 유독 신중함이 필요하다. 단 한마디의 말에도 어떤 누군가는 기분이 쉽게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고, 과하게 말하자면 인생의 나쁜 기억 중 한 조각이 되어 굳세게 뿌리를 내려있을 수 있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어색함을 지울 수 없는 내 앞에서 친근하게 첫인사를 건네는 누군가의 표정과 말투를.

 

무조건 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쓸 필요는 없지만, 때때로 상대방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같은 말도 듣기 좋게’ 할 수 있는 센스가 필요할 때가 있다. 긍정과 부정, 충고와 거절, 생각보다 꽤 많은 상황에서 쓰이는 대화법을 전해주는 이 책의 저자는 20년간 라디오 DJ와 나레이터로 일해온 사람이다. 한마디로, 사람을 상대로 끊임없는 대화를 하며 살아왔다는 이야기다. 이제는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농담도 여유 있게 주고받는 저자도 남들과의 대화가 어렵고 막막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유학시절 친구의 칭찬 한마디가 ‘즐거운 대화를 만드는 마법의 문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물론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었지만 자신만의 노하우를 하나씩 쌓아나갔다.

 

그가 전해주는 대화법은 유창한 달변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들어주고 배려할 수 있는 긍정 에너지를 듬뿍 담고 있는 조언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대화부터, 일상적인 대화, 긴장을 푸는 법 등 ‘대화법’이란 주제에서 연상할 수 있는 상황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것들은 책의 내용으로 예상했던 것이니 당연하게 넘어가지만, 그 밖에도 꽤 유용한 팁들이 있다. 부제로 설명을 대신해 이야기해본다면, ‘근거 없는 비난을 튕겨내는 마음 코팅’, ‘아슬아슬한 대화에서 위트 있게 빠져나오는 법’, ‘진심 어린 사과야말로 최고의 대화법’ 등 답답한 대화 상황에서 능수능란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들이 눈에 띈다. 긍정적인 상황에서 누구나 어떻게든 길을 만들 수 있지만, 부정적인 상황에서 ‘나만의 길’을 만드는 지혜는 꽤 도움이 된다.

 

이 책 한 권을 통해 실생활에서의 대화법을 모두 고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물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의 기분과 성향은 피치 못하게 ‘말’에 새겨지곤 한다. 저자의 긍정 에너지가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영향이 간다면 분명 좋은 일이 아닐까.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특히나 어려운 ‘말버릇’을 가꿔나간 저자의 노하우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언제든 이러한 상황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여유롭게 대처하는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52쪽,
매 순간 자신의 얼굴을 거울로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미소의 간’을 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요리의 간을 맞출 때 먹는 사람의 기호에 맞게 조미료를 적절하게 조절하듯이 최상의 미소를 찾기로 한 것입니다.

 


71쪽,
일부러 멋있는 말이나 어려운 문자를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은 금세 티가 나기 때문입니다. 느낀 점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이 나를 위해 시간을 투자해주었다는 진심이 전해집니다.

 


102쪽,
이유 없는 악의에는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감정의 스위치를 차단해버리면 됩니다. ‘마음의 장벽을 쌓는다’란 말은 긍정적인 의미로 잘 쓰이지 않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보이지 않는 벽을 쌓는 일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상대방의 악의를 흡수하지 않기 위한 ‘마음 코팅’입니다.

 


120쪽,
대화 상대방을 관찰하고 대화하기에 적절한 타이밍을 생각하는 습관만 들인다면 이 세상은 이야깃거리로 가득합니다. 평소와 같은 귀갓길에도 남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저 사람에게 말을 건다면 어떤 주제가 좋을까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면서 주변을 살펴보면 어떨까요. 이야깃거리는 물론이고 사물을 보는 시각도 넓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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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지음 / 첫눈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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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바쁘고 팍팍한 일상이라도 주변을 서서히 둘러볼 수 있는 순간은 온다. 길거리에서 잠시 시간이 남아 머무를 때, 지하철과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릴 때, 카페에서 잠시 딴생각을 할 때. 티 나지 않게 사람들의 모습을 살짝씩 들여다본다. 약속시간에 늦은 듯 헐레벌떡 뛰고 있는 사람, 군복을 입고 있는 남자친구를 배웅하는 사람, 전단지를 돌리고 있는 사람, 무거운 배낭과 딱딱한 안경을 쓰고 어딘가로 걸어가는 사람. 모든 사람들의 모습은 평범하지만 자못 특이하게도 보인다. 북적한 도시의 공간 속에서 서로의 긴 숨 ― 일상의 내음 ―이 섞여 알아차리기 힘들 뿐.

모자를 좋아하고, 모자라서 그렇다는 짧은 소개 이외에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필명 모자 작가의 글도 비슷한 모습이다. 뭐든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고 언뜻 보면 매우 평범해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무척 특이하기도 하다 (표지도 그렇다. 그냥 제목만 떡하니 쓰여있는데 거의 파격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편집이라서). 작가는 <숨>이라는 책에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이 품은 이야기를 꺼내 보인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혹은 그녀라고만 불리지만, 이야기는 어찌나 풍부한지. 어떤 사람은 이별을 하고, 어떤 사람은 지나간 추억을 회상하고, 어떤 사람은 시큰거리는 배를 안고 추위 속에서 넘어지고,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기억하며 ‘인연’을 생각한다. 특유의 감성적인 문체 때문에 이들의 모습은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숨’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뚜렷이 나타나있지는 않지만, 다양한 역할과 직업과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는 점에서 나는 ‘각자의 일상, 혹은 일생’의 은유적 표현일 거라고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읽다 보니 이전에 만났던 ‘양귀자’ 작가의 인물 소설이 떠올랐는데, <숨>의 정보를 보니 에세이 분류에 속해 있다.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너무나 소설 같지만, 에세이 같기도 한 독특한 책. 게다가 잠깐씩 시로 쓰인 이야기도 등장하기도 한다. 그와 그녀, 그들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허구인지 확실히 알 순 없으나, 작가의 눈은 꽤 깊고 따뜻하다는 것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나와는 다른 상황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여느 때보다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가오고 있다. 혹독한 추위, 그리고 삶이 온통 겨울이었던 사람들도 조금이라도 따뜻해지기를


17쪽, <초콜릿 장식>
아니,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짝을 버린 신발 한 짝이 갈 수 있는 곳은 고작 여기구나. 버려지는 것도 버리고 떠난 것도 결국에는 마찬가지겠구나. 얼룩지고 찢기고 외로워지는구나. 한 켤레의 신발은 헤어진 후에도 서로를 닮았겠구나.

69쪽, <예전에는 경비원이 아니었을>
마음을 지키려고 경비 일을 한다니 말이 안 되지. 상처받는 일을 하면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딱딱해진다는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야. 그런데 내가 경비원이 되고 싶었던가. 하긴, 예전에 다니던 회사도 그냥 다녀야 하니까 다녔지. 그땐 다들 그랬으니까. 그래도 예전에는 사는 게 그럭저럭 재밌을 때도 많았던 것 같은데.

87쪽, <그믐밤, 제페토는 없었다>
유모차에 담긴 어떤 이의 삶은, 그믐에 기대어 종이를 그러모으는 것으로 결말을 맞이해야만 하는가. 그녀는 흩어지는 삶을 대신할 용도로 폐지를 주웠는가. 진정 담고자 했던 세상은 어디로 갔는가. 폐품이 대신 차지해버린 삶의 자리를 언제고 감당해야만 하는 건가. 그녀의 유모차는, 그녀에게 휴식인가 족쇄인가. 생의 끝자락에 다다른 자의 단막은 심오하였고 나는 어느 것도 추측할 수 없었다.

129쪽, <결국 그녀는 네버랜드로 떠났다>
그녀는 쉬는 시간이면 화장실로 달려가 얼굴을 씻었다. 볼이 빨개질 정도로 얼굴을 문지르다가 종이 치고 나서야 교실로 돌아왔다. 친구 몇이 괜찮은지 물어보는 바람에 괜찮아진 줄 알았던 마음이 다시 괜찮지 않아졌다. 아직도 엄마의 이름이 얼굴에 남아서 친구들이 물어보는 걸 테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친구들이 엄마의 이름을 잊어버릴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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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학개론 리토피아포에지 55
윤종환 지음 / 리토피아 / 2017년 2월
평점 :
품절


 

 

어느 날 쪽지가 한통 와 있었다. 목록에 쌓인 많은 쪽지들이 '안녕하세요'로 시작하기 때문에, 어쩌면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뻔했던 쪽지 한 통. 그 속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자신은 젊은 새싹 시인이며 순수한 독자와의 소통이 필요하다는 말. 어투는 수줍지만 강단이 있는 느낌이었다. 겸손한 마음이 드러나면서도 호평과 혹평 모두를 받아들여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드러났다. 내가 고르는 책만으로도 요즘은 유독 읽는 시간이 빠듯해 이런 글에 긍정적인 답변을 주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 진심 어린 쪽지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사실, 쪽지 얘기를 빼고서라도 이 책을 읽어볼 이유는 충분하긴 했다. 짧은 글과 감성 글, 그리고 시時의 경계가 허물어져 누구나 자유롭게 시를 따라 쓰는 지금. 하루에도 몇 건씩 SNS에 올라오는 사진 속엔 예쁜 그림과 캘리그라피 등으로 편집해 꾸민 글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조금 더 고뇌하고, 조금 더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잡다하게 꾸밀만한 것들을 벗어던지고, 단지 글로만 승부하는 젊은 시인의 시들은 어디에 있는가. 궁금해도 정보가 없다. 한 발짝 뒤에 물러나 서 있는, 시는 어렵다는 편견 속에서 독자를 필요로 하는 젊은 시인의 시를 읽어보고 싶었다.

 

당신과 머문 곳을 별이라 할 때
별과 별을 연결하는 선은
우리가 걸어온 길입니다
캄캄한 은하 저 너머에는
수만 개의 .과 .이 -으로 이어져 빛이 납니다 (59쪽, 점과 선의 밤하늘)

 

 '별빛학개론'이라는 제목처럼 감성적인 이미지의 시가 많았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마음과 마음이 주고받는 일들을 ('벽이 못에게') 누구에게나 애틋한 관계인 가족들의 모습을 ('김밥 단무지') 표현하는 따뜻한 그림이 돋보였다. 작은 존재들과 소외받는 이들을 위한 시, 기억해야 할 사람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추모 시 또한 실려 있는데,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그대라는 바다를 품고'는 응급환자 구조를 위해 출항했다가 순직한 故 오진석 경감의 추모시라고 한다. 별과 별, 점과 선을 말하는 시인의 모습처럼 따스한 시선이 느껴졌다.

 

뜨겁게 끌어안는 듯 가슴에
시집을 품고 잠들겠노라
그러면 꿈에
가장 아름다운 은유가 날 반길 터이니,
그 뜻을 음미하며
나와 그 사람과, 또 나의 글이 하나가 되겠노라 (33쪽, 한 시인의 고백)

 

 대부분의 시들이 '감성'과 '공감'을 매개로 독자와의 소통을 청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이 시들은 많은 독자들에게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대학생활을 하는 청년으로서 주변의 사물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연상하고 고심해 쓴 것 같은 풋풋한 시들도 있고, 세태를 풍자하거나 깊은 감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털어버리는 것 같은 시들도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고 싶은 건 시를 잘 안다고 하기엔 어려운, 단지 시와 책을 사랑하는 일반 독자의 마음에 박힌 문장들이 여럿 있었다는 것. 아직 젊은 새싹 시인이 무럭무럭 자라나, 깊게 무르익기를 기대하고 응원한다.

 

17쪽, 번역하는 남자
다른 곳에서 태어나
다르게 살아온 두 식물성 객체
번역된 글과 주제 하나로 결합되는 밤
서로를 비틀며 자라나는 줄기
결말로 갈수록 짙어지는 활자 향기

55쪽, 사랑니 · 1
누구나 하나씩은 갖고 있는 망치
고통을 박제하는 방법으로
힘껏 두더지 머리를 내려치지만
흔들리는 것은 그 밤처럼 고요했던 기억
더욱 더뎌지는 두더지의 진도//
밖으로 튀어나와
응어리진 것을 토할 때, 아파도 된다며
망치질을 포기하는 게 이기는 게임
마취는 빨리 풀려야 한다

65쪽, 달팽이가 달팽이인 이유
묵묵히 걷는 이를 무심코 밟지 않기를,
부지런한 느림보에 은총이 있기를,
가장 낮은 것도 지킬 것이 있다

143쪽, 떡
사람의 발은 모두 떡이다
뛰지 않으면 금방 말라버리고
걷지 않으면 딱딱하게 굳는다
출근길에 구두를 신는 아버지
그의 발은 질은 시루떡이고
설거지하는 오색버선의 어머니
그녀의 발은 무지개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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