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지 않는 것들 - 최영미 시집 이미 1
최영미 지음 / 이미출판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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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잃어버린 작은 개가 길가에서 처참한 사체로 발견된 사진을 봤다. 머리만 집중적으로 훼손되어 길에는 피가 흘렀다. 주인이 개의 억울한 죽음을 파헤치고자 본 CCTV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온 남자 두 명이 개의 머리를 집중적으로 차고, 결국엔 죽이고, 박수까지 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국민 청원이 열렸지만 확실한 해답이 나올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인간이 어디까지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 하루하루 시험하게 되는, 믿기 힘든 뉴스들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흘러나올 것이다.

차라리 귀를 닫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종종 생각한다. 사람들의 지나친 관여와 악담은 어떤 ‘약자’를 죽이고, 수그러드는 듯하다가도 금세 다시 타겟을 찾는다. 권력은 국가 위에 군림하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한다. “인간에겐 희망이 없어요.” 수많은 범죄를 목격하는 이수정 교수의 발언을 캡처해 돌아다니는 ‘짤’을 보고는 조금도 과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빛의 속도로 분노와 적의를 실어 나르는 우리는 / 누구를 가슴속에서 완전히 지우고도 / 흔적을 남기지 않는 기술을 아는 우리는 // 지우개를 발명하고 / 사랑과 증오를 오려붙이고 / 마음에 들지 않는 댓글은 차단하고 /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 심심해서, 라고 말하는 인류는 (97쪽, <쓰는 인류>)

환멸로 쓰인 시. 이 책의 모든 시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으나, 아무튼 이 구절에서 나는 세상에 대한 불만을 느꼈던 많은 일들을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시집의 처음도 아마 그랬으리라. 등단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참아온 일들을 터뜨리고, 문단을 세차게 흔들어 놓은 시인의 하루는 너무나 고단했을 것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시 <괴물>과 ‘미투’ 이후, 최영미 시인은 1인 출판사를 차렸다. 새 시집을 출간하려 했지만, 제안을 넣은 여러 출판사들에게 답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단 권력을 노골적으로 비판한 그의 이름을 부담스러워했다고 시인은 밝혔다. “그럼 내가 내야겠네.” 시인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당찬 해답을 냈다. 그의 인터뷰 기사(링크)에는 그렇게 자기 손으로 신작을 만든 일련의 과정이 간단히 드러나 있었다.

이미 존재하는 언어로 / 존재하지 않는 깊이를 표현하려는 / 욕망에서 시가 탄생했다 / 징그럽게 늙지 않는 얼굴들 / 깊이 없는 이름들, 검색어가 점령한 서울 / 새로운 기술에 열광하는 전염병을 피해 / 바빌로니아를 발굴하려는 욕망으로 / 시가 뚱뚱해졌다. (62쪽, <깊은 곳을 본 사람>)

요즘의 시대에 최영미의 시를 읽는다는 건, 낯설고도 재미있는 일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최영미의 시는 너무도 솔직하기 때문이다. 더 아름답고 더 깊이 있고 더 아리송해지려 노력하는 듯한 시들의 모임 속에서 오히려 뚜렷한 개성을 드러낸다. 직접적인 언어들로 감정을 전달한다. 시가 달아나 떠오르지 않는 순간을,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는 지난한 일상을, 법원에서 소장을 받은 모욕적인 기억을, 스스로 출판과 경영을 하며 겪은 새로운 경험들을, 시인은 쓴다.

허공에 색을 덧칠한 언어들 / 말이 말을 낳고 / 은유가 은유를 복제하는 / 요사스러운 말의 잔치에 질려, 나무를 보고 / 눈을 떴다 감았다 / 초록에 굶주린 몸이 도서관을 나온다 / 시 따위는 읽고 쓰지 않아도 좋으니 / 시원하게 트인, 푸른 것들이 보이는 / 자그만 창문을 갖고 싶다 / 담쟁이넝쿨처럼 얽힌 절망과 희망을 색칠할 (85쪽, <꿈의 창문>)

허무와 현실 앞에서 지나친 꾸밈 따위는 어떤 소용도 없다고, 시인은 말하는 듯하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말하던 그의 솔직함과 당당함은 아직도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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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페미니스트
서한영교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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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게 살면 편하다. 어떤 것도 고민하지 않고, 어떤 장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지나치며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군가는 불편함을 목격하고, 불편함을 생각하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불편함을 불편하다 인식하기 시작하기부터 피곤해지지만 발을 담근 순간 어쩔 수 없이 바짓단은 젖어든 상태다. 텅 빈 머릿속은 시끄러워진다. 보지 않던 것이 계속해서 보인다. 나 또한, 이런 갈등의 세계를 걷고 있다.

여성이 페미니즘을 생각하게 된다는 건 꽤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몸으로 겪고, 수없이 많이 목격한 일들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연구하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페미니즘이라 굳이 언급하고 규정하지 않아도 여성들은 마음으로 느끼고 은연중에 말한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그러나 남성의 경우엔 사실 잘 감이 오지 않는다. 여성과 마찬가지로 엄격한 젠더 규범 속에 남성성을 강조하며 자란 그들이 갈등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 어떻게 자신이 속하지 않은 사회를 위해 마음을 쓸 수 있을까.

저자는 문단의 젠더 권력 (페니스 파시즘)을 목격하고 나서 ‘이상한 세계’를 뼈저리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알았다. 항시 긴장상태로 많은 것을 점검했다. 그러나 남성인 그가 온전히 여성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한계가 있어 언제나 오해의 가능성이 다분했다. (20쪽)” 언어와 행동, 숨어있는 폭력적인 면모까지 모두 끄집어내어 고쳐야 했다. 많은 부분 압축된 글 너머에 엄청난 고통이 있었을 터. 그는 수많은 노력으로 자신을 다듬었다. 그런 도중,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녹내장에 걸려 실명 위기였던 애인을 ‘함께 아프자’라는 말로 붙잡았다. 그들의 결혼은 ‘혼인 의례는 우리라는 삶을 선언하는 날’이라는 문장 아래 철저히 주체적인 신념에 맞추어 진행했다.

이후의 내용은 저자가 ‘임신, 출산, 육아’라는 미지의 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들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이야기하는 것들이다. 언뜻 육아일기 같으면서도 진지한 고민들이 세밀하게 담겨 있다. 그는 출산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지 못해도 옆에 꼭 붙어 느끼고, 아내 대신 육아를 전담하며 다른 집은 보통 여성들이 겪는 일들을 체험한다. 머리로 경험하던 일들을 마침내 몸으로 제대로 경험함으로써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늘 긴장감을 유지한 채 올곧은 자신의 신념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아이에게도 올바른 자세를 전해주려 노력한다.

“함께 살아가게 되었다고 해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남성―인간으로서 살아왔고, 남성―무의식 속에서 살게 될 것이고, 남성―질서와 함께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내가 죽기 전까지 계속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287쪽, <두 번째 페미니스트)>

페미니스트라 언급하긴 하지만 그가 중요하게 바라보는 대상에는 단연 ‘여성’만 있지 않다. 여성, 장애인, 아이, 동물, 자연…… 억압받는 모든 것들이 있다. 이쯤 되면 대상은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같은 상황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고, 그 속의 자신의 존재를 생각하는 시선의 차이. 내가 존중받는다면 당신도 존중받아야 하고, 세상 어떤 존재도 말이 되지 않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여성인 나는 그에게 진정한 페미니즘, 아니 ‘살아가는 자세’에 대하여 배운다.

 

그 느낌의 세계로의 진입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한계가 있어 언제나 오해의 가능성이 다분했다. 피와 살의 느낌이라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가까워지려는 ‘노력’에 의해서 겨우 가능할까 말까 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또 수천 년 동안 인류가 축척해온 젠더 무의식은 꼭 실수를 하고 나서야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무릅쓰고 멈출 수가 없었다. 나의 어머니, 이모, 친구와 동료 중 절반이 여성이고 내 안의 여성성도 들끓고 있으니까. 여성들과 훌륭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몸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반복할 수밖에. 오직 반복뿐. - P20

이사를 하면서 우리는 다짐했다. 집을 근거로 해서 삶을 꾸려 나가겠다. 집을 소외시키지 않겠다. 남성―공적 영역 / 여성―사적 영역으로 성 역할을 분배하는 공간 배치를 거부하겠다. 집을 우리 삶의 장소로서 가꾸겠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집사람’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집을 근거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 집을 길들일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 바로 집사람. 눈사람이라는 말과 비슷해서 제법 귀엽기도 하다. 이날부터 애인과 나는 서로를 집사람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한다. 물론, 새롭게 태어날 아가도 집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집사람으로 해야 할 몫을 함께 할 것이다. - P66

막달인 당신의 바다에는 요즘 태풍이 자주 부나봅니다. 숨 쉬기가 힘들고, 갈비뼈가 아프고, 배가 뭉치고, 골반이 아픈 당신은 몇 번이고 자꾸 새벽에 혼자 깨어 몸을 동그랗게 말아 새벽을 건넙니다. 나는 가능한 한 질긴 해초 다발이 되어 당신이 떠내려가지 않게 등을, 배를, 허리를, 종아리를 스윽스윽 감아 다시 눕힙니다. - P82

베개를 베고 누워 잠깐 생각했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오래된 오해는 아닐까. 오해를 오래 해서 이해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이해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이해가 될 때, 이해는 오해가 된다. 이해를 둘러싼 투쟁의 영역에서 물러나 싸움을 그만두었을 때, 늙어간다는 걸 이해한다. 나는 오늘치의 이해를 과다 복용했다. 어딘가 쓸쓸하게 늙은 것 같다. 선크림 발라야겠다. - P103

장/애인과 아이를 동시에 돌봐야 하는 나에게 사람들은 저마다의 선의를 조금이라도 내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잠시라도 착해지고 싶었을 테고, 애써 다정함을 전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연민의 시선에 잘 적응되지 않는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시선을 두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얼어붙은 호수"라고 표현하면서 이러한 시선들이 세계와 주체의 거리감을 체험하게 한다고 말했다. 연민의 시선에서 나는 그들과 나 사이에 얼어붙어 있는 호수가 놓여 있음을 확인한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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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는 여자 - 체육관에서 만난 페미니즘
양민영 지음 / 호밀밭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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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학교에서 열린 체력장 시간이 고역이었던 내가 운동에 관심이 생긴 건 다이어트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다이어트 카페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정보들이 있었고, 충격적인 이야기도 쏟아져 나왔다. 가혹한 식단으로 식이 장애를 겪는 사람, 뚱뚱한 몸매를 면전에서 저격하는 친구와의 에피소드, 그렇게 원하던 마른 몸을 얻었지만 볼륨을 잃어버려 가슴 수술을 고민한다는 글이 있었다. 이후, 두 번째로 한 일은 브라탑을 구매하는 것이었다. 운동을 하다 보면 먼저 가슴 지방이 빠지고, 처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꼭 브라탑을 입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살이 빠지면 당연히 지방이 뭉쳐 있는 가슴이 빠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여자의 멋진 몸매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빛나는 바디 프로필의 이미지는 운동을 하는 여성들도 대상화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근력운동을 하면서도 여자들의 근육은 ‘남자같이’ 울룩불룩하지 않아야 한다. 볼륨과 근육은 특정한 부위에 있어야 하며, 한껏 섹시한 모습을 자랑해야 한다. 이상적인 몸은 한결같았다. 건강과 체력, 혹은 운동에 대한 순수한 열망보다는 섹슈얼한 몸의 이미지가 전면에 드러났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생각하게 된다. '운동하는 여자'들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 날씬하고 매끈하며 섹시한 건강미의 콜라병 같은 실루엣. 이러한 몸을 만들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조금은 다른 모습의 건강미를 발산하는 여자들이 있다. 거칠고 힘이 넘치며 강한 투지를 보이는, 우리의 인식 속에서 마치 '여성스럽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모습들. 그러나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일 듯한 모습들.

<운동하는 여자>는 오랫동안 남성적인 행위로 규정되었던 '운동'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찾고 있는 저자의 이야기다. ‘체육관에서 만난 페미니즘’이라는 부제가 적혀 있지만, 총체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상’에 대한 고민과 투쟁의 기록이기도 하다. 저자가 갖가지 운동을 하면서 느꼈던 경험을 토대로 갖가지 편견들과 이슈들을 담았다. 그는 본격적으로 강도 높은 운동을 시작하면서 '운동하는 여자'들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한번 체감하곤 했다. 근육과 힘이 늘어나면 여성적이지 않아 여성의 범주 안에 들 수 없고, 훌륭한 능력을 보여도 '여자치곤 - '이라는 말로 평가 절하되는 돌연변이 같은 존재가 바로 '운동하는 여자'들이었다. 저자는 주짓수를 배우면서 여자들이 싸움에 무지한 이유에 의문을 품고, 헬스장에까지 메이크업을 하는 여자들을 보며 현실을 인지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몸을 긍정하는 것과 예쁘게 치장함으로써 당당해지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다(66쪽)" 그리고 브라를 벗어던지고 힘차게 달린다. 자유로움을 향하여!

개인적인 경험은 책의 중반부에 이르러 사회적 문제로 확대된다. 출산 후 경력단절로 고생했던 '세리나 윌리엄스', 여자 선수와 남자 선수의 '샐러리 캡(팀 연봉 총액의 상한선을 정해두는 제도)'의 문제를 제기한 '김연경' 선수, 분노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맨스플레인의 대상이 되었던 '론다 로우지', 체육계의 성폭력을 고백한 '심석희' 선수 등,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스타들에게도 적용되는 여성차별 문제에 대하여 언급한다. 또한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의 광고와, 반대로 외모지상주의와 고정관념을 더욱더 강화시키는 넷생 (이를테면 인스타그램)의 수많은 이미지들에 대해서도 문제 어린 시선을 던진다.

"넷생을 점유한 트렌드는 다시 현생에 영향을 끼친다. 넷생과 현생이 영향을 주고받는 양상을 살펴보면 체육관의 욕망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알 수 있다. (…) 이 방면에 크게 관심이 없던 여성들까지 자신의 몸에 의문을 갖는다. 내 몸은 매력적인가? 얼마나 섹시한가? 충분히 말랐는가? 여기까지 도달하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은 순간이다. (…) 물론 인터넷 자아를 선택하고 연출하는 것은 개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노출과 그로 인한 섹스어필이 쿨한 것으로 통하고 그 반대는 따분하고 경직된 것으로 여기는 흐름 속에서 그것이 취향이고 선택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188쪽)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운동에 대한 즐거움과 투지를 얻길 바란다고 썼다. 남이 만든, 남이 투영한 모습이 아닌 진정한 '나'를 바라보고 자신을 긍정하기를 바란다고. 오랫동안 다이어트를 했고 체중계의 숫자와 칼로리의 압박을 이기지 못했던 나는, 요즘 내가 원하는 것이 진짜로 무언지 계속 갈팡질팡하며 고민하는 중이다. 빼빼 마르거나 섹시한 몸이 아니라, 오로지 건강과 체력을 위하여 몸을 움직이는 것. 어쩌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과 비슷하지만 다른, 진정한 행복을 찾아나가는 것이 바로 이쪽이 아닐까.

 

여성은 운동을 배우면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법까지 함께 익힌다. 예를 들면 내가 처음 역도를 배울 때 가장 어려웠던 동작이, 양 무릎의 방향이 바깥을 향하도록 벌리는 것이었다. 평영을 배울 때는 바로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같은 여성이어야 마음이 놓였다. 나중에 함께 운동하는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왜 아니겠는가? 여성들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다리를 오므리라고 교육받는데. - P17

하지만 문제의 ‘남자 같은 여성’은 진짜 남성이 아니다. 그래서 남성들의 비교 대상에나 머무른다. 이를테면 ‘여자도 이거보다 더 들어요’, ‘여자보다 기록이 안 좋군요’ 하는 말이 대수롭지 않게 오고 간다. 이쯤에서 궁금한 것은, 운동을 하는 남성들도 이토록 다양한 평가와 비교를 당하는가 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운동은 남성적인 행위로 규정돼 왔다. 남성이 운동하는 것은 남성성을 추구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환영받는다. 그렇다면 운동하는 여성에게 가하는 평가나 비교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운동하는 여성을 편견에 따라서 대상화하기 때문이거나, 또는 이들을 남성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한 불청객으로 간주하기 때문이 아닌가? - P35

덧붙여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우리 사회의 폭력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최초로 이 사건을 전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심 선수가 침묵해야 했던 4년의 세월과 그 지난한 고통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에게도 알리지 못하며 침묵했던 시간은 나에게까지 아프게 와닿았다.
심 선수는 그 극심한 고통에 맞서서 세계 정상이라는 성적을 냈고 그런 다음에야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신뢰할 만한 피해자가 되기 위해서, 이른바 꽃뱀을 골라내는 여론재판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자격이 필요하다는 것을. - P142

말하자면 우리는 단 한 번도 도와달라고 크게 소리치는 연습을 해본 적이 없다. 주먹을 휘두르거나 목을 조르는 남자의 팔을 어떻게 부러뜨리는지 배우지 못했고 가해자의 손에 들린 칼을 보고 얼어붙지 않는 법도 배우지 못했다.

요컨대 여성은 싸움을 모르고 싸우는 방법을 모른다. 그것이 여성성의 영역이 아니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싸움은 너무 과격하다는 편견 때문에, 다칠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배려 덕분에, 싸움을 모르는 존재로 길들여진 것이다. 그 결과 일부 여성들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말은 마치 사칙연산을 모르지만 함수를 풀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폭력을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것인가?
- P83

우선 근육은 필수지만 너무 크거나, ‘예쁘지 않게’ 발달해서는 안 된다. 전반적으로 마른 가운데 근육질인, 전문 댄서 같은 실루엣을 갖춰야 한다. 여기에 복근과 애플힙이 반드시 추가돼야 하며 몸이 완성될 무렵에 인공 태닝 등으로 피부색을 어둡게 해서 더욱 슬림하게 보이게끔 효과를 준다. 화보의 콘셉트는 시선을 끌면서도 너무 흔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콘셉트를 선택하든 노출을 빼놓을 수 없다. 어렵게 만든 몸을 인정받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 것이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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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 묵묵하고 먹먹한 우리 삶의 노선도
허혁 지음 / 수오서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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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기사님들에 대해선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크게 없다. 늘 나쁜 기억이 좋은 기억보다 선명하게 남지만 크게 거슬리는 기억이 없는 걸 보면, 꽤나 무감각하게 타고 다녔던 모양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 책을 읽게 된 이유가 있는데, 늦은 밤에 장거리를 이동하는 버스를 탔던 날이었다. 어둑하게 조명을 최소한으로 한 버스가 고속도로를 지나고 정류장이 있는 시내로 들어오니 벨소리가 끊임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각각 다른 사람들이 한 정거장에 두 번 울리는 일도 반복되었다. 버스 기사님은 하소연이 섞인 짜증을 내다가 ‘벨 좀 한 번씩 누르라’고 호통을 쳤다. 기사님의 업무 환경을 생각하면 소리 때문에 미치겠다는 말도 수긍이 가는데, 먼 거리를 이동하는 승객들이 정류장을 지나칠까 걱정되는 마음으로 누르는 것도 나쁜 마음이 아니란 걸 알기에 상황 자체가 너무 어려웠다. 고요 속에서 불편한 냉기가 감돌았다.

 

이전에 알고 있던 책이지만 이 사건 때문에 다시금 급하게 책을 찾아보았다. 버스 기사님들의 업무와 생활 반경, 감정들이 궁금했다.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는 실제 전주에서 시내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입사 5년 차 기사님이 쓴 에세이다. 전주는 특히 버스 대수에 비해 노선이 많고, 승객들의 불편함 호소도 많은 지역이라 한다. 물론 지역에 상관없이 버스기사들의 악명 높은 업무 환경은 여기도 비슷한 수준인 듯 보인다.

 

저자는 하루 열여덟 시간씩 버스를 몰다 보면 착한 기사와 비열한 기사의 마음을 순식간에 왔다 갔다 한다고 말한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참을 수 없고, 표정 관리가 격하게 힘들어진다. 끼니와 생리적 욕구 또한 신경 쓰기 힘들고, 연료 충전과 버스 청소 등 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업무를 넘어, 일상까지 버스의 속도로 달려야 하는 셈이다. 고작해야 한 시간 이하로 이동하는 일이 대다수인 시내버스 승객들은 수시로 일어나는 도로 위의 아찔한 상황과 기사들의 고충을 알 턱이 없다. 악의가 아니라 그냥 무심하게 지나가거나, 왜 내가 탑승한 시간에 기사가 불쾌감을 표출하는지 의아할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마음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짜증 나고 당황스러운 상황들을 적나라하게 꺼내놓고, 가끔은 툴툴거리며 당부하는 저자의 글은 재미있고 통쾌하다. 제대로 솔직해서 좋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책을 보는 느낌도 비슷하다. 읽다 보면 어느새 덜컹거리는 우리 동네 시내버스에 올라 있는 듯하다. 나는 정류장에서 버스가 오는 것을 살피고 티가 나는 수신호를 주고, 조금 더 세심하게 주변과 운전석을 살피고, 대답이 없어도 눈치 보지 않고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심코 지나치던 누군가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건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되는 일이다. 상황을 모르니까 그냥 지나치고, 이유를 모르니까 억울하다 (서로 시비를 걸고 싸우는 건 보통의 일이 아니라는 전제를 두고). 내가 하는 사소한 행동이 배려가 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 또한 승객과 기사 사이의 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해결돼야 할 일들이 있을 것이다. 육체와 감정을 넘나드는 노동 현실의 개선을 넘어 저자가 전하고 싶은 말은 “우리 삶 전반의 속도가 조금 더 낮아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많은 의미를 담은 말이다.

 

● 22쪽,
윤리적 판단을 하기 시작하면 바로 운전대 놔야 한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라도 그러려니 하며 무심하게 빠져나갈 수 있어야 운전을 계속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사람인지라 서서히 화는 쌓인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가던 길이 막히면 화가 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운전할 때 유독 짜증이 심해지는 것이 인격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 76쪽,
외진 도청 앞에서 목이 빠져라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던 가난한 승객들에게는 양심이 준 선물이다.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잔뜩 열이 받아 있는 승객이 화를 풀 길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기사밖에 없다. "어이 기사, 이 버스 몇 시 차여. 여기서 얼마를 기다렸는지 알어?" 눈물 나서 대꾸도 하기 싫다. 대꾸도 않는다고 또 시비다. 앞차를 빼먹은 동료도, 항의하는 승객도 그 어떤 누구도 잘못이 없다. 모두가 자기 입장에서는 옳고 자기 인식 수준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삶이 징그럽게 외롭고 고독한 대목이다.

● 79쪽,
산다는 건 리듬을 타는 일이다. 그 리듬으로 한 사회의 성숙도를 알 수 있다고 본다. 저상버스가 휠체어 탄 승객을 싣기 위해 리프트를 펴는 잠시 동안에도 ‘빵빵‘ 거리며 도로가 난리가 난다. 버스만 바꿔서 될 일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속도가 지금보다 확실히 낮아져야 한다.



● 116쪽,
시간에 대한 삶의 태도가 제각각인 시내버스에는 운행 정시성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현실은 간단치 않다. 적폐기사와 공정기사, 적폐승객과 공정승객이 마구 뒤섞여 있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다. 항상 타는 시간에 버스를 탈 수 있어야 삶의 질이 높아진다. 기사의 운전습관이나 도로 사정에 따라 운행 중간지점부터는 10분 이상 차이가 날 수 있다. 버스가 많은 노선은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버스가 귀한 노선은 한 번 놓치면 몇 시간이라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다.

● 160쪽,
버스기사는 운전원이면서 동시에 승무원이고 청소원이다. 운전은 기본이고 승무원의 역할이 더 강조되고 있다. 운전하려고 취업했지 스튜어디스 하려고 온 것 아니다. 당신 같으면 하루 세 번 이상 혼자 사무실 청소 다 하고 수시로 민원인들 상대하가며 생명을 담보한 주 업무는 한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언제나 친절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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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가장 자유로운 결혼 - 프랑스에서 부부 대신 파트너로 살기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24
이승연 지음 / 스리체어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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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기 시작하기 전부터 결혼의 필요성에 대해 늘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외로움을 심하게 타지 않는 성향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성향을 떠나서 왜 결혼과 출산이 의무여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문과 가문 사이에 오가는 어마어마한 자금들, 소속과 호칭의 변화, 무서울 정도로 다양한 간섭들 등, 많은 것들이 한여름밤의 꿈같은 결혼식 하루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게 어쩌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행복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두려운 마음이 먼저였다.

 

하지만 이 생각이 언제까지나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배우자로 맞이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 이상, 아마 나는 비슷한 경로를 밟아나가지 않을까. 무수히 많은 것들과 싸우기보다는 순응하는 식으로. 한국이 다양한 분야에서 많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가 사회적으로는 꽤 많이 닫혀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프랑스에는 ‘팍스’라는 제도가 있다. 팍스는 두 성인이 서로의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제도이며, 한국어로는 ‘시민 연대 계약’으로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 68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고, 팍스는 원래 동성 커플을 위한 제도였다. “결혼한 커플과 같은 수준의 사회보장 제도를 제공하면서도 입양 허용 문제는 시간을 두고 논의해야 한다는 합의를 하고 탄생한 제도가 팍스다. (55쪽)” 프랑스에선 동거 상태로 지내는 커플도 많지만, ‘팍스’ 인구 또한 상당하다. 많은 젊은이들이 동거나 결혼 대신 ‘팍스’를 선택하는 이유는 각종 증명서에 팍스 여부가 기록되고 배우자로서의 법적 권리와 의무를 가지며, 세금 공제 혜택과 재산 상속에도 어느 정도 활용할 수 있는 기특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며 (팍스) 파트너인 ‘줄리앙’을 만나게 되었고, 동거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는 부모님에게는 ‘동거’ 조차도 땅을 칠 일이었기 때문에 꽤 열심히 설득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후 프랑스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하여 줄리앙과 ‘팍스’를 맺었다. 근사한 식당에서의 식사와 서명 한 번으로 둘은 파트너가 되었다. 둘은 여름이 되면 줄리앙의 부모님 댁에서 휴가를 보낸다. ‘팍스’를 맺은 그들이 자유롭게 부모님의 집을 오가는 것도 재미있지만, 가족 분위기 또한 화기애애하고 자유분방한 것도 특징이다. 식사 내내 가족들이 돌아가며 접시를 내오고, 각자가 필요에 의해 일을 하고, 남성과 여성 구분 없이 자유롭게 대화하며 시간을 즐긴다. ‘시댁’이라고 할 수 있는 줄리앙의 집이 불편하지 않은 건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프랑스의 팍스 제도는 가족의 형태가 변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해 국가가 다양한 가족을 제도 안에서 보호하는 울타리를 만든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61쪽)

 

책을 통해 프랑스의 사회 복지 제도 일부분을 접하니 우리나라와는 달리 ‘사회적 합의’가 충분하게 갖춰진 느낌이었다. 개인의 선택과 권리를 중시하는 프랑스는 성별과 관계없이 각 개인이 활용할 수 있는 복지를 탄탄하게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 복지제도를 이용하는 개인들도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다. 프랑스에서 전업주부로 사는 여성은 전체 여성의 14퍼센트라 하고, 보육 시설도 무척이나 활성화되어 있다. 각자가 필요에 의해 일을 하며 육아는 부모 공동 책임으로 자유롭게 생활한다. 세심한 부분까지 고려한 국가의 복지 혜택과 그를 인정하는 사회적 합의, 책임감과 이해심을 갖춘 개인의 인식이 조화롭게 갖춰진 ‘그들이 사는 세상’이 어찌나 부러운지. 한국이 여러 방면에서 변화의 양상을 띠고 있지만, 보다 성숙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 큰 성장이 아닌 사소한 부분도 주목할 필요를 느낀다.

 

● 17쪽,
결혼식을 올린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준비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결혼 장소나 절차, 예복 등을 맞추다 의견 차로 다투기도 하고 가족들이나 친척들이 두 사람의 결혼에 개입하는 일도 많다. 이 모든 것을 수개월에 걸쳐 준비했더니, 결혼식 당일은 즐길 새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고 하는 커플도 있었다. 결혼이란 아름다운 일이지만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관습이라는 이유로, 전통이라는 이유로 해야 하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다.

● 49쪽,
그의 말처럼 팍스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제도라고는 말할 수 없다. 팍스를 맺고 사는 모범적인 커플이 있는 반면, 당연히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결혼 이외의 대안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혼이라는 일생일대의 선택을 현명하게 결정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함께 살며 상대방을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 76쪽,
아이를 낳은 커플은 유급 휴가 외에도 매달 이틀의 휴가를 더 사용할 수 있다. 주어진 휴가를 다 쓰더라도 아이들을 위해서 시간을 비워야 하면 회사와 원만히 협의할 수 있다. 내가 회사에 다닐 때도 많은 커플이 아이를 낳기 위해 육아 휴직을 사용했다. 아이 둘의 엄마가 되어서 일정 기간은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회사 안에서 이들의 업무 방식에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각자가 원하는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각자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업무를 배당해야 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아이가 자라면 회사로 돌아와 전일제 근무를 하면 된다. 고심해서 뽑은 사람이 아이를 길러야 한다는 이유로 회사를 떠나는 일이 회사에는 더 큰 손해다.



● 79쪽,
프랑사의 팍스나 스웨덴의 삼보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동거가 곧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이다. 이들 사회에서 팍스나 삼보와 같은 느슨한 계약 관계는 다양한 가족 형태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런 문화는 어린 시절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사회 보장 제도 덕분에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 105쪽,
한국의 가족관계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여전히 미완성의 관계다. 하지만 부모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결혼식을 서두르는 커플, 결혼하고 나서 생활 습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커플들에 비교하면 어떤가. 극단적인 예시일지 모르겠지만,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를 통과한다고 해서 연인, 가족 관계가 굳건해지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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