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손잡기 봄날의 시집
권누리 지음 / 봄날의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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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두 얼굴

나는 여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름은 더위를 견뎌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제일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냥 너무 극적인 것은 싫어서 잔잔한 계절을 찾는 습관에서 비롯된 것 같지만. 그러나 다시 여름, 하고 입에 굴려보기로 한다. 여름,이라고 말하자 갑자기 눈부신 추억들이 떠오른다. 찌는듯한 더위의 길을 걷다가 모든 것이 씻겨내려가는 물줄기가 확 뿌려지는 것처럼. 스무 살 때 친구와 여행을 갔다가 너무 더워서 분수대에 그냥 뛰어들어간 적이 있다. 그때의 깔깔대던 웃음은 여름이라는 말과 닮았다.

권누리 시인의 시집 「한여름 손잡기」의 표지를 보고 거의 말을 잇지 못하는 심정이 되었었다. 이렇게 예쁜 표지가 있나? 이렇게 제목과 잘 어울리는 표지가 있을까? 멀리서 언뜻 보면 은은한 그라데이션으로 색상만 뿌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다양한 것이 보인다. 여름의 싱그러움과 뿌연 뜨거움이 함께 있다. 잔해처럼 뿌려진 물줄기는 내가 여름을 입에 굴렸을 때 떠오르는 기억들이 담겨 있을 것만 같다. 한동안 나는 잠깐 표지에 잠겼다가 시를 천천히 읽었다.



여름은 시 속에서 계속해서 언급이 되고, 여름이 들어가는 시는 특히나 더 좋았고, 시인이 쌓아 올린 여름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했다. 한낮에는 눈부시게 밝고, 저녁이 되면 모두 캄캄해지는 않은 채 어스름하게 바래지는 여름. 한없이 가볍다가도 물이 내리면 다른 계절보다 한없이 무거워지는 여름. 어쩌면 사랑과 여름은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밝음과 어둠 속에서


시인의 언어는 잔잔히 박동하는 듯하면서도 가끔은 어두운 질문들을 던지고, 나는 그 지점들에 멈춰서 생각한다. 오답과 죽음, 불신과 고립... 글의 초반 눈부신 여름의 추억을 상기했지만 시집에서는 꽤나 어두운 시어들도 많이 등장하는데 왜인지 모르게 아주 깊이 어두워지지는 않는다. 적당한 온도를 유지한다. 이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시를 좋아하게 된 건 시인이 만든 공백으로 ‘열려 있는’ 느낌이 좋아서였는데, 사실 시집 한 편을 읽으면서 모든 행간에 집중하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읽기는 조금 버겁긴 하다. 그러나 이렇게 긴 호흡을 다시금 할 수 있게 하는 건 무심코 읽다가 만나는 이런 멋진 문장들 같은 것.

권누리 시인의 「한여름 손잡기」 가 좋았던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표지를 닮은 시인의 색채가 일정한 온도로 유지되고 있어서였다. 한 쪽은 영롱하게 빛나고 한쪽은 바래진 채로 구르는 물방울 같은 시집이었다.


<하트*어택>

미안해하는 나를 상상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니?



물으면 나는 잘 모르겠고요

하지만 사랑에는 제법 재능이 있습니다

- P15

<한여름 손잡기>

여름이 여름이 아니었더라면.



사랑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무책임했고,

그래서 지난여름 내내 그것만 열심히 했다네요 - P79

<도로시 커버리지>

목적지를 위한 결정은 저 멀리 유리 숲에 유기해두었어요

버려두고 온 단단한 마음이 여기에서도 아주 잘 보이고요.



우리도 모르는 우리의 오답을 어떻게 아니?

- P47

<한철>

죽음이 태어나는 방법에 관해 생각하는 일은 멈출 수 없어 그것의 총량을 늘리지 않기 위해

나는 살아 있어요?



사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66

<소유>

끝에서부터 쓰러지고 있는 나의 중간을 재빠르게 쳐내는 일 그거 필요해요.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오래 세워두었네요.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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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채우는 감각들 - 세계시인선 필사책
에밀리 디킨슨 외 지음, 강은교 외 옮김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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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전에 민음사 세계시인선 필사책 「밤을 채우는 감각들」 책 수령 인증샷과 간략한 소개를 남겼었죠. 탄탄한 양장과 깔끔하고 감각적인 디자인, 두터운 내지로 필사하기 좋은 책이라 강력 추천을 남겼는데요! 이제 2주 정도의 시간 동안 직접 필사를 해보며 느꼈던 「밤을 채우는 감각들」 이야기를 전해볼게요.

민음사 세계시인선 필사책 「밤을 채우는 감각들」 은 에밀리 디킨슨, 페르난두 페소아, 마르셀 프루스트, 조지 고든 바이런 이렇게 네 명의 시인의 시가 순서대로 각 챕터대로 담겨 있어요. 무작정 그들의 좋은 시를 골라 가져온 게 아니라, 민음사에서 출간된 세계시인선에서 시를 발췌하고 제목도 그대로 가져왔어요. 네 명의 시인의 좋은 시가 막 섞여 있는 게 아니라 작가별로 나누어져 있으니

한 작가에 집중해서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순서대로.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필사하고 싶다면 자유롭게.

취향에 따라 각자의 방법대로, 좋은 시를 읽으며 필사를 하면 될 것 같아요. 저는 처음부터 이 네 분의 시가 어떻게 다른지 느껴보고 싶었기에 날마다 자유롭게 책장을 넘겨 보면서 골라 필사를 진행했어요. 하지만 편의에 따라 순서대로 정리해서 보여드릴게요.

Chapter 1.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에밀리 디킨슨

책을 사랑하게 되면서 에밀리 디킨슨의 이름은 참 많이 들어서 저의 책장에도 책이 있긴 하는데요. 에밀리 디킨슨은 19세기에 활동한 여성 시인으로 미국 문학계에 큰 획을 그었다고 하죠. 가정적인 배경과 건강, 여러 번의 정서적 위기로 오랫동안 은둔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것은 굉장히 상처를 주는데도 - / 상처 자국 하나 없어라. / 그러나 교감이 이는 내면에선 / 천둥같은 변화가-.” <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 에밀리 디킨슨

오랫동안 세상과 단절된 채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골몰했을 에밀리 디킨슨. 이제 우리는 빛나는 언어로 압축된 그의 세계를 볼 수밖에 없어요. 에밀리 디킨슨의 생애와 ‘고독은 잴 수 없는 것’이라는 제목은 참 닮아 있는 듯합니다. 이렇게 필사를 하면서 천천히 글자를 따라가다 보니, 작가의 내면에 깊이 빠져들어가게 되고 수록된 책들을 전체적으로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Chapter 2.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페르난두 페소아

페르난두 페소아의 이름도 잘 알려져 있죠. <불안의 책> 으로도 유명한 페소아의 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시 뿐만 아니라 철학과 비평으로도 능통했던 페르난두 페소아.
“내게는 야망도 욕망도 없다. / 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다. / 그건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양 떼를 지키는 사람> 페르난두 페소아''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라는 제목도 담백하지만 강렬한 의미를 주는 것 같아요. 이 말에 정말 공감하는 게, 시를 읽을 때와 쓸 때는 여느 때보다 나만의 세계를 꾸리고 얇은 살을 하나씩 붙여 나가는 느낌이거든요. 페소아의 시구절을 읽다 보면 그에게 '시'를 쓰는 것은 어떤 욕망과 야망에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습관적이고 필수적인 행위인 것처럼 여겨져요.

Chapter 3.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 - 마르셀 프루스트

제목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나요 ㅠㅠ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의 마들렌을 통해 향수를 떠올리는 도입부처럼 이 시집 속에는 오감을 활용한 그림과도 같은 시들이 담겨 있다고 해요. 어둡고 무거워 신비감이나 명확성이 떨어질지라도 꿈은 좋은 것. 삶 자체가 어차피 꿈꾸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 마르셀 프루스트

「밤을 채우는 감각들」 필사를 하는 날이면, 저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조금 속도감 있게 펼쳐 보며 바로 눈에 들어오는 시를 골랐는데요. 우연처럼 저 대목이 마음에 들어서 필사를 하게 된 것 같네요. 어쩌다 보니 오감과는 관계 없는 조금 비장한 시를 골랐지만요.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라는 유명한 작품으로 소설가로서의 명성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그의 첫 작품집에 수록된 산문시들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정말 제목이 다시 보고 다시 봐도 너무 아름다운걸요!

Chapter 4.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 - 조지 고든 바이런

저는 바이런, 하면 늘 가수 이소라의 노래 가사가 생각나는데요 ㅎㅎ 바이런은 굉장히 혁신적인 시인이었다고 해요. 기존의 전형적인 시 형식을 탈피하면서도 낭만적인 색채를 잃지 않았다고 하죠.

밤은 사랑을 위하여 이루어진 것, / 그 밤 너무 빨리 샌다 해도 / 우리 다시는 방황하지 않으리 / 달빛을 받으며" -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 조지 고든 바이런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는 수록된 민음사 세계시인선 중에선 가장 최근작이었네요. 우리 다시는 방황하지 않으리,라는 대목에서 약간 청춘의 마음이 연상되기도 하고, 어쩌면 전혀 무관하게 사랑이라는 감정에 집중해서 읽게 되기도 하네요. 언어를 과하게 현란하게 만지지 않으면서도 적당한 무게감으로 아름다운 선율처럼 느껴지게 하는 바이런의 시 세계가 더욱 궁금해집니다.

저는 상대적으로 외국 시나 세계시인선을 읽는 데는 소홀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번 민음사 세계시인선 필사책 「밤을 채우는 감각들」 필사를 하면서 외국 시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진 것 같아요. 책장에 있는 민음사 세계시인선을 이제는 열심히 꺼내 봐야 할 것 같아요. 리뷰로 마무리하지만 남은 페이지들 필사도 틈틈이 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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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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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 차별은 분명 양쪽의 불균형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모두에게 부정의함에도, 희한하게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만의 일처럼 이야기된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산술적으로 생각해도 내가 차별을 당할 때가 있다면, 할 때도 있는 게 아닐까?”

책의 초반, 프롤로그에 적힌 저자의 글을 읽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차별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인데, 왜 세상엔 차별적인 발언들과 그것을 당한 사람들의 에피소드가 넘쳐날까?

차별에 대해 연구를 하는 저자는 어떤 강연 장소의 많은 장애인들 앞에서 ‘결정 장애’라는 말을 써서 지적을 받은 일을 이야기한다. 아주 사소하고, 흘러가는 이런 말들 속에도 누군가를 비하하고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차별’이 존재한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과 차별을 하는 사람의 경계는 항상 뚜렷하게 나누어져 있지는 않다.

세상에는 다양한 차별이 있다. 인종, 성별, 학벌, 직업, 장애인, 성소수자, 외국인(난민)……. 시대가 변하고, 평등을 외치는 목소리는 커졌다 하더라도 어디선가 차별은 목격된다. 저자는 이에 관한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흔히 우리가 하는 착각과도 같은 생각들을 지적한다. 이를테면 비장애인은 교통수단을 편리하게 탑승할 수 있다는 사실을 ‘특권’이라 생각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장벽’이다. 사회적으로 약한 집단을 이용한 농담들을 듣고 때로 우리는 ‘웃겨서’ 웃고 ‘혼자 웃지 않는 게 이상해서’ 웃는다. 성소수자들이 거리에 나와 축제를 벌이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린다. 거리는 모두의 것이다. 그들은 이용할 자격이 없는가? 남들이 불쾌하다는 이유로 늘 숨어 있어야 하는가?

“정의는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누가, 혹은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저자는 비난의 대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과 변화의 시작은 생각의 전환부터 시작된다는 믿음을 토대로 약간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러나 ‘모두’를 위한 이러한 해법들도 개인들의 생각이 바뀜으로써 온전히 실현될 수 있다.

이 책의 시작이 되었던 자기반성과 검열은 내게도 필요하다. 일상이 된 나의 언어는 누군가를 깎아내리고 있지는 않은가, 자기 비하의 농담을 핑계로 어떤 집단을 나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지는 않은가. 혹시나 이 글에도 차별이 들어 있진 않은가. 내 언어를 점검하는 것은 분명 피곤한 일이지만,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은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를 힘들게 한다. 게다가 기회가 주어지는 만큼 과업이 따르고,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책임이 무거워지는 법이다. 그러니 누구의 삶이 더 힘드냐 하는 논쟁은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모두가 똑같이 힘들다”는 말도 맞지 않다. 그보다는 서로 다르게 힘들다고 봐야 한다. 불평등한 구조에서는 기회와 권리가 다르게 분배되고, 그래서 다르게 힘들다. 여기서 초점은 서로 다른 종류의 삶을 만드는 이 구조적 불평등이다. 그렇기에 불평등에 관한 대화가 “나는 힘들고 너는 편하다”는 싸움이 되어서는 해결점을 찾기 어렵다. “너와 나를 다르게 힘들게 만드는 이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공통의 주제로 이어져야 한다.

“당신들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 마”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나는 어디에 서서 어떤 풍경을 보고 있는가. 내가 서 있는 땅은 기울어져 있는가 아니면 평평한가. 기울어져 있다면 나의 위치는 어디쯤인가. 이 풍경 전체를 보려면 세상에서 한발짝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이 세계가 어떻게 기울어져 있는지 알기 위해 나와 다른 자리에 서 있는 사람과 대화해보아야 한다. 한국 사회는 정말 평등한가? 나는 아직까지 한국사회가 그 이상향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차별을 부정할 때가 아니라 더 발견해야 할 때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유머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는 청중의 반응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만큼 “누가 웃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웃찾사’의 흑인 분장 사건처럼 웃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유머는 도태된다. 누군가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농담에 웃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런 행동이 괜찮지 않다”는 메세지를 준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어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어야 할 때가, 최소한 무표정으로 소심한 반대를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니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몰랐다” “네가 예민하다”는 방어보다는, 더 잘 알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성찰의 계기로 삼자고 제안한다.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차별의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경청함으로써 은폐되거나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감지하고 싸울 수 있다. 우리가 생애에 걸쳐 애쓰고 연마해야 할 내용을 ‘차별받지 않기 위한 노력’에서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옮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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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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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는 간단하다. 오로지 주인공의 시점에서 바라본 영상을 담을 뿐. 그러나 단 한 줄의 줄거리로 요약될 수도 있는 이 소설은 어째서 이렇게 마음을 울리는 것인지.

죽음은 단연 무섭고 반갑지 않다. 삶을 치열하게 살기 위해 죽음을 생각하라는 말도 있지만 막상 떠올리면 막막하고 두렵다. 고통이 더해진 누군가의 죽음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하지만, 격랑 같은 삶을 살다가 모든 것을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는 의미에서도 죽음은 무척이나 마음 시린 것이 아닌가. 절대로 다가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아닐 수 있을까.

그러나 <아침 그리고 저녁>은 이러한 ‘죽음’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아름답게 미화하거나 과장해서 그려내지 않았다. 그저 생과 사의 경계에 선 한 남자를 둘러싼 주변의 세계들을 촘촘하게 담아냈다. 오랜 시간 살아온 터전, 어우러지는 자연, 먼저 떠나간 사랑하는 사람들, 기억, 남아있는 모든 존재들을. 책 속에서 흘러가는 주인공의 일상은 ‘모든 것이 다르면서 여느 때와 같고, 모든 것이 여느 때와 같으면서 동시에 다르다(58쪽)’. 어제, 그리고 지난주, 비슷하게 흘러갔을 ‘오늘’을 흘러가듯 잠잠히 서술하고 있으나, 책의 후반부 어딘가 다른 그림을 발견하고 그것이 하나로 맞춰질 때 독자는 경이로운 순간을 경험한다.

초록의 오랜 바닷속 물로 된 오래된 집 그곳에 오래된 모든 것 더이상 없고 빛나는 별들 멀리 물러났다 가까이 다가와 흐릿한데 모든 것에 별과 같은 광채, 땅속으로부터 드러난 부드럽고 또렷한 차가운 선 하나 그리고 저 고요 이 그곳에서 비롯되었으나 더이상 그 안에서 오지 않을 있어야 할 것 그러나 다시 오지 않고 사라지는 무엇 그 소멸은 늙음에 다름 아니나 결코 그와 같지 않으며 저 또렷한 외침 맑게 외침 별처럼 또렷하고 이름처럼 감각처럼 바람 이 숨 고요한 숨 그러고 나서 고요히 고요히 고요한 움직임들 (19쪽)

책 속에 묘사된 아이 탄생의 순간, 무의식으로 내뱉는 언어는 언뜻 보면 시 혹은 정리되지 않은 비문과도 같지만 각각의 어절을 발음할 때마다 야릇한 기분이 들게 된다. 고요하고 잠잠하지만 역동적으로 뛰고 있는 생의 모든 것들을 상상하게 한다. 소설 속에는 생과 사가 혼재되어 있다. 섞이고 섞이고, 마침내 분리되는 순간 ‘아침과 저녁’이라는 이 책의 제목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눈부신 아침, 그리고 저녁. 다가오는 죽음이 마치 날마다 이어지는 아침과 저녁의 순환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떠나는 거야, 자네와 내가(129쪽)”

최근의 숱한 안타까운 죽음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이 책을 만나며, 모두가 이렇듯 (갑자기 찾아온 죽음은 혼란스러울지라도) 평온하고 잔잔하게 사랑하는 존재들을 떠올리며 떠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 잘될 거야, 그럼그럼, 마르타가 여전히 느리고 깊은 숨을 쉬며 말한다, 이 세상 바깥의 고요한 어딘가에서 오는 숨이라고, 올라이는 마르타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서 생각한다, 그리고 어린 요한네스는 큰 소리로 울고 또 울며 세상 밖으로 울려퍼지는 제 목소리를 듣는다, 울음.소리는 아이가 새로이 속한, 세상을 가득 메운다, 그리고 다뜻하고 검고 조금 붉고 조금 축축하고 온전한 것은 더이상 없다, 이제 저 자신의 움직임뿐이다, 모든 것을, 존재하는 모든 것을 메우려는 듯한, 무엇인가, - P24

그래, 아침을 유달리 좋아한 적은 없지만, 아침에는 항상 너무 춥고 집안이 썰렁하니까, 어차피 춥고 흐린 날씨라 해도, 아침은 유독 흐리고 추운데다 하늘도 아침이면 제일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래 누가 뭐래도 하늘이 눈부시게 푸른 여름 아침도 물론 있었고, 이따금 하늘빛이 부드럽고 가벼운 새벽도 있었지만, 그래 물론 그렇지만, 그의 눈에는 항시 달리 보였다, 춥고 흐린 아침이라는 생각을 얼마나 자주 했던가, 밝고 부드럽든, 어둡든 심지어 칠흙 같든, - P54

부잔교와 부표에 묶여 있는 그의 작은 노 젓는 배, 그리고 보트하우스들과 거리 위쪽의 집들을 바라보며 그는 그 모든 것에 마음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낀다, 야생초들과 그가 아는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이 세상에서 그가 속한 자리다, 그의 것이다, 언덕, 보트하우스, 해변의 돌들, 그 전부가, 그런데 그것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것들은 마치 소리처럼, 그렇다 그 안의 소리처럼 그의 일부로 그 안에 머물 것이었다, 요한네스는 손을 들어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본다, 모든 것이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것을, 하늘 저 뒤편에서, 사방에서, 돌 하나하나가, 보트 한 척 한 척이 그에게서 희미하게 멀어져가고 그는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오늘은 모든 것이 과거 어느 때와도 다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대체 무슨 일일까? - P74

그리고 요한네스가 올려다보니, 페테르의 고깃배는 난바다를 향해 서쪽 항로로 나아가고 있다

나갈 수 있으려나, 파도가 높은데다 비바람까지 부는데? 요한네스가 말한다

갈 수 있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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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 With Frida Kahlo 활자에 잠긴 시
박연준 지음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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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것들을 만날 때 나는 당황하고 막막해진다. 시의 문장 속에 담긴 생각을 파악하지 못해서 답답해진다. 어떤 예술 작품 앞에서 창작자의 마음을 골똘히 생각한다. 사랑 앞에서 시시각각 널뛰는 기분이 못마땅하다. 문학과 예술과 사랑, 나는 이것들을 아직 다 알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이 능숙한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이들이 다 같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정확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이 모호함이 자유롭고 능동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각각은 더욱 풍성해진다’. 그림과 시와 사랑, 셋의 공통점이라 생각한다.

이 셋 모두를 함께 즐길 수 있는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는 정말로 풍성한 책이다. 사실 이 책은 ‘활자에 잠긴 시’라 이름으로 예술과 문학을 접목시킨 시리즈 중 한 권의 책인데, 화가 ‘프리다 칼로’와 시인 ‘박연준’이 주인공이다. 박연준 시인은 책 속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번역’한다. 그림에 대해 해박하지 않을뿐더러 낮은 수준의 미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솔직하게 밝히는 시인은, 그림 번역을 선택한 이유에 대하여 그림과 시의 공통점을 말한다. “그림과 시는 비와 눈처럼 닮았다 (‘책을 펴내며’ 중에서)” 미술 평론가의 해석 대신에, 시인은 “‘왜’라는 물음 대신 이미지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보았다"라고 말한다. 장르의 변형은 시인에게도 도전이지만, 그림 속에 살아 숨 쉬는 프리다 칼로의 영혼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나는 프리다 칼로의 형상을 한 시의 관절들 ―기형으로 꺾이다 나뭇가지처럼 자라나는 창작 욕망, 날것으로 파닥이는 혀, 꿰뚫는 시선, 우회하지 않는 손가락, 달을 가리키는 입술―에 매료되어 이 책을 썼다. 쓸모없어 보이는 이야기들과 주변을 맴도는 나 자신의 이야기들이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이룰 것이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를 기억한다. 청소년기 사고로 몸 한가운데 강철봉이 박힌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낸 자화상은 한동안 잊히지 않고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그림과 함께 알게 된 그의 삶은 고통과 비극이 넘쳐 났다. 사랑하는 사람은 줄곧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여성 편력과 외도로 그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런데도 프리다 칼로는 그를 목숨처럼 사랑했다. 그의 그림 속에는 그가 사랑했던 ‘디에고 리베라’의 모습이 종종 담겨 있으며, 때로는 상처 입은 마음과 눈물이 그대로 담겨 있다. 프리다 칼로의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프리다 칼로는 “살아남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사랑이 필요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선택한 사랑과, 삶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프리다 칼로의 그림은 시인을 통해 이 책에서 몇 편의 시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시인이 생각하는 사랑과 삶의 자질구레한 모습들이 더해졌다. 이 책은 프리다 칼로를 향한 애정의 기록이기도, 온갖 감정을 드러냈던 한 여인의 삶을 통해 쓴 사랑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림과 시와 사랑, 셋이 만나 풍성하기도 하거니와 각각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사랑을 들여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사랑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인생이 어떤 원리로 흘러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봄나무에 꽃망울이 맺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늙은 개의 입에선 비린내가 나고 눈곱이 많이 생기는 새끼의 건강은 좋지 못하다는 것을 ‘그냥’ 아는 것처럼, 받아들일 뿐이다. 살아 있는 것은 왜 늙는지, 왜 죽음을 피할 수 없는지 답을 알 수 없다. 그저 늙은 동물을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사람처럼 동물도, 늙으면 휜다, 모든 면에서. 익은 모과에선 향이 나고 오래된 모과는 기어코 썩는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냥’ 아는 것. 어떤 사랑은 죽지 못한다.

외로움이란 누구를 골라 찾아가고 비켜가는 감정이 아니다. 불시에, 누구에게든 온다. 비나 눈처럼. 온다.

이제 나는 외로운 상태를 ‘조금’ 안다. 하나일 때보단 둘일 때 오롯해지는 감정. 젖은 옷 같은 것. 비에 젖은 옷 아니라, 눈에 젖어 시나브로 축축해진 옷. 입고 있기엔 축축하고, 벗어 말리자니 유난을 떠는 일 같아 감추게 되는 것. 설명할 수 있지만, 하려다 마는 것.

"탁자를 벽으로 밀고, 밀고, 밀면 벽에 닿지. 벽에 닿으면 어느 순간 벽을 뚫고 벽 너머의 세계로 갈 수 있을 것 같거든? 정말, 벽 너머로 말이지. 아주 잠깐. 테이블이. 벽 너머로. 그 기분과 비슷해. 황홀하지.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하(려)는 일이니까. 벽 너머로 갈 수만 있다면! 동시에 불행한 일이기도 하지. 불가능한 일을 하려는, 하염없는 짓이니까. 끝나면 벽 밖으로 다시 튕겨져 나와야 하거든. 나는 다시 벽 밖의 사람이 돼. 허기지지(원래 사랑에 빠진 자는 허기지잖아?). 다른 사람이라는 벽. 사랑이 벽 밖에서 거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게 비극이지. 그렇지만 또 시도하는 거야. 벽 속으로, 벽 너머로, ‘잠시’라도 들어갔다고 착각하기 위해서. 당신이라는 벽, 말이야. 사랑의 환락을 경험하려고. 환락 끝에 마주하는 게 다시 벽일지라도. 다시 우리는 테이블을 밀고, 밀고…. 밀어 보는 거지."

마음이 변해서 사랑이 죽는 게 아니야.

돌보지 않아서 사랑은 죽는다.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돌보지 않으면 죽어. 이 자명한 진리를 사람들은 모를 때가 많아. 특히 더 많이 사랑받는 자들은 모르지. 사랑이 어디에서부터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어. 그러나 끝난 사랑은 누군가 돌보지 않은 결과야. 가꾸지 않으면 집 안에서 자라나는 모든 것은 죽는단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사랑은 깨지기 쉬운 원료로 되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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