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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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나서

 

 한밤에 깨어있는 걸 좋아해요. 큰 판을 벌이지는 않죠. 조용한 집안에서 혼자, 하루의 시간 중에 가장 활발한 상태로 읽고 쓰는 게 일상이지만, 때로는 작은 일탈도 감행해요. 새벽 1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간식을 사러 나가는 거예요. 신호등의 불이 모두 주황불로 깜빡이는 새벽, 엄마 차를 빌려 끌고 나갔다 오는 거죠. 집에서 입던 추레한 옷, 혹은 잠옷에 외투만 걸친 채로 아무도 안 만나기를 바라며.

 

 바깥의 세상은 온통 조용해요. 꼭, 그 길가에는 누구도 없는 것처럼. 그러나 조금 올려다보니 죄다 불 꺼진 창문 사이에 밝게 켜진 집이 보여요. 그리고 차로 한 코너를 돌아 넓은 길가로 들어서면, 이전과는 다른 세계가 펼쳐지게 되죠. 반짝거리는 간판, 이보다 더 역동적일 수 없는 사람들의 움직임. 이 어둠 속에 누군가는 깨어있고, 고요함 속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그런 신기한 풍경인 거예요.

 

 『애프터 다크』, 어둠의 저편에는 갖가지 풍경이 있고, 하루키는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하루의 자정부터 아침까지의 시간을 촬영 카메라로 담고 있어요. 도시의 넓은 풍경을 광각으로 조명하다가, 세세하고도 아주 사실적으로 피사체를 쫓기 시작하죠. 그 프레임에 들어온 사람은 자매인 '마리'와 '에리'예요.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거리의 심야 식당 '데니스'에서 동생인 '마리'는 밤을 지새우고 있어요. 그녀의 공간 속에서는 수시로 사람들이 바뀌어 가며 말상대를 해주고, 어떤 사건으로 끌어들이기도 하고, 잔잔히 음악도 흐르죠. 그러나 언니인 '에리'는 방 안에서 잠을 자고 있어요. 동생의 말에 의하면 언니는 "오랫동안 잠을 자겠다"고 선포하고 침대에 누웠다고 했어요. 그리고 두 달째, 그녀는 분명 잠을 자고 있는데 어렴풋한 움직임을 보이며,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작가는 이 둘, 생동감 있는 '마리'의 시간과 멈춰있는 '듯'한 '에리'의 시간을 각각 다른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어요. 새벽에 나가면 한 코스 너머로 밝고 시끄러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과 같이, 그들의 시간도 비슷하죠. 공통적인 건 그들을 쫓고 있는 카메라는 마치 감시하듯 그녀들의 일분일초를 훑고 있다는 거예요. '마리'가 만난 새로운 인물들, 호텔 '알파빌', 누군가에게 폭행당한 창부, '다카하시'와의 은밀한 대화들은 어둠의 저편에서도 생동하고 있는 움직임을 포착해요. 그리고 '에리'의 방에서는 텔레비전을 통해 왠지 모르게 오싹한 세계를 그려내죠. 아주 철저하게 단절된 세계를 기계적으로 서술하고, 의식의 흐름을 딱딱하게 조각내어 표현하고 있어요.

 

 소설은 역시나 무엇인가를 결론 내거나 판단하지 않은 채, 새벽 흘러가는 시간처럼 그들을 조용히 따라다니고 있어요. 자매의 '밤'은 움직임도, 분위기도, 냄새도 확연하게 다르고, 하루키는 자매의 '밤'에 특별히 개입하지도 않아요. 대신에, 그녀들의 삶의 접점을,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접점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지요. 중반부부터 시작되는 '시라가와'라는 남자의 기계적인 일상, '마리'와 '고오로기'의 기억에 관한 대화, '에리'의 동창인 '다카하시'를 통해 그 접점을 하나씩, 하나씩 터치해가며 그려내요. 어쩌면 그 접점은 둘만의 것이 아닐지도 모르죠. '다카하시', 혹은 그들의 부모님, 심야식당 '데니스'에 앉아 있는 누군가, 호텔 '알파빌'에 묵었던 사람의 것일 수도 있어요. 그렇게 이어지고 지나치는 삶은 제각각 다른 모습이며, 누군가의 밤 속에는 또 누군가의 순간이 깃들고, 누군가의 냄새가, 손짓이 깃들어 있어요. 그리고 때로는 그 접점이 어둠을 관통하며 '각성'할 수 있는 도구가 되죠.

 

 어둠을 관통하는 도구를 집는 법요? 그것은 순전히 자기 의지로, 라고 하루키는 말하는 듯해요. 두 자매를 감시하는 카메라의 렌즈, 그 경계는 어디를 바깥이고 어디를 안쪽으로 나누고 있을까요. 카메라가 그들을 찍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들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그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요. 항상 확실하게 호불호를 찍을 수 없는 하루키의 소설이지만, 한 편의 잔잔한 영화 같은 『애프터 다크』 는 제게 확실하게 와 닿은, 매력적인 작품으로 남았어요. 한 방울의 알코올도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왠지 모르게 알딸딸하고 희미한 새벽, '결론 없음'을 아무런 불평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에 읽기를 바랄게요.

 

 

 

Written by. 리니

일본 소설/ 하루키/ 『어둠의 저편』 개정판 ​

우리는 하나의 시점이 되어 그녀를 보고 있다. 어쩌면 훔쳐보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시점은 공중에 뜬 카메라가 되어 방 안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현재 카메라는 침대 바로 위에 위치하며 그녀의 잠든 얼굴을 포착하고 있다. 사람이 눈을 깜박이듯 간격을 두고 앵글이 바뀐다. 그녀의 잘생긴 조그만 입술은 한일자로 곧게 다물어져 있다. 언뜻 보면 숨을 쉬는 기척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목에서 이따금 어렴풋한, 아주 어렴풋한 움직임이 엿보인다. 호흡은 하는 것이다. 그녀는 베개에 머리를 얹고 천장을 올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눈꺼풀은 겨울철 단단하게 오므라진 꽃봉오리처럼 닫혀 있다. 잠은 깊다. (32쪽)

"프로 뮤지션이 될 거야?"

그는 고개를 내젓는다. "난 그런 재능은 없어. 음악을 하는 건 재미있지만, 그걸로 먹고 살 순 없어. 어떤 걸 잘하는 것하고 어떤 걸 정말로 크리에이트하는 것 사이엔 크나큰 차이가 있단 말이지. 난 트롬본을 꽤 잘 분다고 생각해. 칭찬해주는 사람도 있고, 칭찬받으면 물론 기뻐. 하지만 그뿐이거든. 그래서 밴드는 이달 말까지만 하고 음악에서 손을 뗄까 해."

"어떤 걸 정말로 크리에이트 한다는 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야?"

"그러게…… 음악을 마음속 깊이 전달하는 걸로써 자기 몸도 물리적으로 어느 정도 슥 이동하고, 그와 동시에 듣는 사람의 몸도 물리적으로 슥 이동하는, 그런 공유적인 상태를 낳는 거야. 아마도." (112쪽)

이윽고 에리의 얼굴에 또다시 움직임이 나타난다. 뺨에 앉은 조그만 날벌레를 쫓듯 근육이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이어서 오른쪽 눈꺼풀이 몇 차례 바르르 떨린다. 사유의 물결이 일렁인다. 그녀의 어둑어둑한 의식 한구석에서, 한 작은 조각과 또 하나의 작은 조각이 말없이 호응해 파문을 그리듯 엮여간다. 우리는 그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단위가 형성된다. 이어서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단위와 그 단위가 엮여 자기 인식의 기본 시스템이 형성된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그녀는 한 발짝, 한 발짝 각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각성은 답답하리만큼 느리게 진행되지만, 역행은 없다. 시스템은 이따금 당혹감을 내비치면서도 조금씩조금씩 확실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한 동작에서 다음 동작으로 이어지는 데 필요한 공백의 시간도 점차 단축된다. (131쪽)

"그전엔 평범한 회사원이었어. 고등학교 나와서 오사카에서 그래도 이름 있는 상사에 들어가서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유니폼 입고 일했어. 너랑 비슷한 나이일 때. 고베 지진이 일어났을 무렵 이야기야. 지금 생각하면 어쩐지 꿈같지만. 그러다가…… 어떤 계기가 있었어. 아주 작은 계기가. 처음엔 별일 아닌 줄 알았어. 그런데 문득 정신이 들고 보니까 옴짝달싹 못할 상황에 이르렀더라고.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고. 그래서 직장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 "마리, 우리가 서 있는 지면은 말이지, 단단해 보이지만 조금만 무슨 일이 있으면 밑이 쑥 꺼지고 그래. 한번 꺼지면 그걸로 끝장이야. 두 번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해. 저 아래 어둑어둑한 세계에서 혼자 살아가는 수밖에 없어." (188쪽)

그녀는 말한다. "그래서 생각하는 건데, 인간은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사는 게 아닐까? 그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기억인지 아닌지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아. 그냥 연료야. 신문 광고지가 됐든, 철학책이 됐든, 야한 화보사진이 됐든,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 됐든, 불을 지필 때는 그냥 종이 쪼가리잖아? 불은 `오오 이건 칸트잖아`라든지 `이건 요미우리 신문 석간이군`이라든지 `가슴 끝내주네`라든지 생각하면서 타는 게 아니야. 불 입장에선 전부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해. 그거랑 같은 거야. 소중한 기억도, 별로 소중하지 않은 기억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억도, 전부 공평하게 그냥 연료." (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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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사자 1 블랙 로맨스 클럽
송주희 지음 / 황금가지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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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을 읽고 나서

 

 익숙하지 않은 작가의 이름, 그리고 판타지 로맨스라는 장르. 이 책을 고를 때의 장애물이라면 내게는 바로 이런 것들일 것이다. 특히나 '판타지'는 내가 낯설게 느끼는 장르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보고 싶어진 이유는, 신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는 점과 색다른 로맨스를 지향하는 '블랙 로맨스 클럽'의 신작이라는 것이었다. 같은 로맨스도 색다르게 표현해내며, 탄탄한 구성이 뒷받침하고 있을 터. 가끔은 로맨스도 당길 때가 있으니, 한번 읽어나볼까 하고.

 

 이렇게 펼쳐진 『안개의 사자』는 일단, 독특하고 새로웠다. 주인공은 무려 신들이다. (신들의 이야기라니, 호기심부터 인다) 작가는 가장 오래된 신화인 '수메르 신화'와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소설 속 세계를 구축했고, 안개와 얼음의 나라인 '셰올'에 군림하고 있는 여신 '헬'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재밌는 건 그녀의 성정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들의 아버지 '아누'에게 버림받은 '헬'은 흉한 외모를 가졌고 믿는 건 힘밖에 없었다. 아름다워지기 위하여 여신의 머리를 뜯고, 님프의 피를 짜고, 세이렌의 목을 뜯어 갈취했다. 그렇게 완벽한 '여신'이 된 헬은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잔혹한 여신의 등장은 로맨스 소설의 캐릭터로서는 무척이나 매력적이라 할 수 있는 동시에, 로맨스의 향방이 어떻게 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하는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역시나 등장하게 되는 삼각관계, 아니 사각 관계 속에서 그 잔혹한 여신의 행동들은 역시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머물고 있었다. 독특해 보였지만, 그렇게 파격적이진 않다고 해야 할까? (로맨스가 돼야 하니까!) 하지만 그 사랑의 과정을 그려내는 작가의 솜씨는 아주 능수능란하다. 그녀와 비교하면 약자인 듯하지만, 왠지 모르게 말려들게 하는 인간 '아담', 그리고 시종일관 애정을 보내는 오빠 '카옐' 사이에서 방황하며 진정한 사랑을 찾는 과정이 다른 이야기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나타난다. 초반에 다소 가볍게 느껴지는 듯 했던 사랑은, 후반부로 갈수록 무겁고 복잡한 감정의 사랑으로 변화되는데, 인생을 송두리째 걸만한 절절한 사랑 이야기는 로맨스 소설의 면모를 톡톡히 보여준다. 로맨스 그 너머의 이야기들, 주인공이 정체성과 비밀을 찾는 과정에서도 소설은 슬픔과 공허, 집착, 갈등과 같은 이들의 감정들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판타지에 신화가 곁들여진 장르기 때문에, 신들의 싸움이나 생생하게 그려지는 환상적인 액션들은 또 다른 볼거리다. 친숙하지 않은 용어들이나 상상 속 풍경들이 양날의 검처럼 가독성을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꼼꼼히 읽는다면 색다른 세계를 느낄 수도 있겠다. 또한, 소설의 배경이 된 신화를 읽어본 독자라면 더욱 풍성한 재미를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 책장 속 묵혀 두었던 북유럽 신화를 읽어 뒤늦게라도 소설의 몇몇 장면들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한다.

 

 

 

 

Written by. 리니

한국 소설/ 판타지 로맨스, 신화/ 블랙로맨스 클럽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글입니다.

 

 

"제가 그렇다 말하면 어찌하실 셈입니까?"

"죽여 줄게."

간드러진 목소리로 헬이 서슴없이 제의했다. 어떻게든 이 인간 사내의 마음에 들고 싶었다. 그는 헬의 눈동자를 보고도 현혹되지 않았고, 그 자태에도, 체취에도 홀리지 않았다. 신들이 내린 축복 때문인지 아버지가 수를 쓴 건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헬에게 달갑지 않은 건 맞았다. 어쩌면 이제 막 태어났으니 욕정을 아예 모를 수도 있겠다. 헬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아담이 아연하며 웃는 채 다가오는 순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1권, 32쪽)

"이것만은 기억해 두렴, 아담. 나는 너에게 뭐든 해 줄 수 있어. 지금처럼 세계 사이를 여행할 수도 있고, 막대한 재물이나 오랜 젊음, 신과도 겨룰 수 있는 정도의 강한 힘 따위를 아낌없이 선물하는 것도 가능하지. 네가 원한다면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수고를 아끼지 않을 거야. 하지만 단 한 가지, 내가 줄 수 없는 게 있단다."

아담이 헬의 표정을 열심히 살폈다.

"그게 무엇이죠?"

"영원한 사랑. 그건 내가 누구에게도 바치지 못하는 유일한 것이야." (1권, 112쪽)

너는 잘못한 게 없다.…

이 모든 건 아버지 아누 때문이야.

그러니까 그 남자만 사라지면 너도 나아질 것이다.

모든 게 본디 있어야 할 자리에, 마땅한 모습으로…….

그렇다면 현재의 나는 그릇된 존재인가? 옳지 않은가? 카옐을 잊어버리고 아누가 빚은 이 육체 안에 있기에? 헬은 혼란스러웠다. 떨리는 입술을 이로 꾹 깨물고, 저도 모르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으나 이미 카옐의 언사는 비정하게 마음을 후벼파고 간 뒤였다. 단 한 마디로 난도질을 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이토록 지나치게, 또한 철저하게 갈구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아, 이것은 물론 나도 안다. 하지만 카옐의 말은 제 생각보다 공격적이었고, 꽤나 비틀려 있었다. 설마 싶었던 추측이 확신을 얻고 현실이 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애석하게도 아주 찰나였다. 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2권, 129쪽)

그를 미치도록 싫어하면서도, 그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우면서도 헬은 완강하게 그를 거부하지 못했다. 필요에 의해서도 있었고, 그가 주는 애정이 몹시도 지당하게 느껴졌기 때문도 있었다. 때때로 그의 손길에 기분 좋았던 적도 없지는 않았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엔 죽을 만큼, 생명을 다해 증오했었다. 그가 없으면 저도 사라질 것 같다는 우려 때문에 미치도록 불안해서. 그가 제 전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내치고, 손을 뻗고, 안아 달라 조르고, 나와 너에겐 서로밖에 없음을 만족할 때까지 확인하다가 다시 내치고, 거부하고 욕을 퍼붓고. 하루에도 수천 번씩 감정이 뒤틀리는 바람에 마음을 헤아리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그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과거의 기억을 엿본 지금까지도 격정적으로 치솟는 감정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2권, 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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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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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나서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거예요? (71쪽)   

 

 지금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데, 당신도 나를 사랑하고 있는데, 이토록 사랑하게 한 그동안의 기억들을 떠올릴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함께 했던 경험, 차곡차곡 쌓인 감정들은 흐릿하게라도 기억이 나지 않고, 사랑해서 낳은 아이의 존재만 알뿐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과연 어떨까? 과거가 없다면, 사랑하는 감정 또한 식어버렸을지도 모르는데, 대체 우리 사랑은 어디서 온 걸까?

 

 

 『파묻힌 거인』 속의 노부부, 토끼굴 마을에 사는 그들은 언젠가부터 이런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아들의 이름을 알 수 없고 어디로 떠나버렸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마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 여자는 어느 샌가부터 사라져버리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잊혀버렸다. 그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져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둘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같은 현상을 겪는 듯 보이지만, 아무도 그 의문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금기가 아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기억들, 그 속에 있었을 수많은 추억을 찾기 위하여, 액슬과 베어트리스 노부부는 모험을 떠난다. 당최 어디로 간 것인지 알 수 없을, 아들의 집을 향하여.

 

 

 고대 잉글랜드의 평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의 영상미는 훌륭하다. 노부부가 모험을 떠나는 길목에는 도깨비, 용, 황야, 뱃사공 같은 환상적인 풍경들이 그려지는데, 회색빛의 을씨년스러운 안개가 텍스트 전체에 걸쳐있는 듯 오묘한 느낌을 준다. 모험 길에 오른 그들이 만나는 전사들과 풍경들은 영화 『반지의 제왕』을 떠올리게도 하고, 신비스러운 뱃사공의 에피소드는 마치 신화 같기도 하다. 그 풍성한 볼거리들 속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가? 바로 '사랑'이다. 낯선 모험 속에서도 끈질기게 드러내는 '사랑'의 철학 속에는, 기억과 용서, 복수, 다양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망각이라는 슬픔, 기억의 소중함, 그리고 그 기억을 재구성하면서 받아들여야 할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또한,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유고슬라비아 해체나 르완다 대학살 등의 역사적 사건에서 이 소설의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는데,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작품은 또 다른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개인적인 취향과는 잘 맞지 않은 작품이었다. 신비스러운 배경과 계속해서 등장하는 의미심장한 대화들이 좋았지만, 무거운 주제와 낯선 풍경 탓인지 읽는 속도는 매우 더뎠다. 하지만 읽는 속도와는 별개로, 몽환적인 분위기와 마지막 장면의 여운이 마음속에 깊이 남아 쉽게 잊히지는 않는 작품이 될 것 같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으려는, 서로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부부의 모험. 그들은 계속해서 함께, 사랑을 나누고 있을까. 언제까지나 그 사랑을 확신할 수 있을까? 

 

 

 

Written by. 리니

영미소설, 영국문학/ 기억과 망각/ 사랑과 용서에 관하여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위스턴 씨." 비어트리스가 끼어들었다. "내 남편 얼굴에서 뭘 찾고 있는 건가요? 이 기사님은 지금 이 순간까지 우리 모두에게 낯선 사람이었는데 왜 그런 걸 묻는 거죠?"

"용서해주세요, 부인. 이 고장은 제게 많은 기억들을 일깨웁니다. 하지만 기억들은 마치 가만히 못 있고 언제라도 바람 속으로 날아가버리는 참새 같아요. 남편분의 얼굴은 온종일 제게 뭔가 중요한 기억을 떠올려줄 것 같은 느낌을 주었고, 진실을 말하자면 두 분과 동행하겠다고 제안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습니다." (163쪽)

"제가 말씀드린 사람들은 잔인함의 끝을 체험했어요. (…) 이런 일이 곧 다가올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적들이 나중에 저지를 짓에 대한 대가를 먼저 치르는 며칠 동안의 포위 작전이 소중했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마땅히 복수를 해야 할 곳에서 하지 못하는 이들이 미리 복수의 맛을 보는 거지요. 그런 이유로 우리 색슨족 형제들이 이곳에 서서 환호하고 박수를 쳤을 것이라고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적들이 잔인하게 죽을수록 그들은 기뻤을 겁니다."

"믿을 수 없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그토록 깊이 증오할 수 있단 말이오?" (212쪽)

어둠 속에 누워 여전히 잠이 오기를 바라는 액슬은 조너스 신부 방에 있던 내내 자신이 왜 그렇게 이상할 만큼 아무 말이 없었는지 기억해내려고 했다. 뭔가 이유가 있었다. 비어트리스가 안개의 원인을 알고는 얼굴 가득 기쁜 표정을 띠며 그에게 소리쳤을 때에도 그는 아무 말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녀에게 손만 내밀었다. 그는 뭔가 강렬하고 이상한 감정의 고통에 휩싸여 있었고,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단어가 여전히 또렷하게 귀에 들리는데도 그 자신은 거의 꿈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추운 강물 위에서 배를 타고 있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배에 서서 멀리 짙은 안개 속을 바라보면서, 언제든지 안개가 걷히고 그 사이로 저 앞 육지의 또렷한 모습이 보일 거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는 공포 비슷한 것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동시에 호기심 - 아니면 아주 강렬하고 어두운 어떤 느낌 - 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단호하게 속으로 말했다. "그게 무엇이든 내가 확인해볼 거야. 내 눈으로 볼 거야." (233쪽)

"뭐가 두려워요, 신부님? 오늘 액슬과 제가 각자 마음속으로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들여다보면 아무리 이 안개가 위험을 숨기고 있더라도 기억을 되찾는 길이 우리에게는 어떤 위험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이건 해피엔드로 끝나는 이야기예요. 그러니 이전까지 아무리 우여곡절이 많았더라도 두려워할 게 없다는 건, 어린아이라 해도 알 거예요. 액슬과 전 우리의 삶이 어떤 모습이었더라도 함께 기억할 거예요. 그건 우리에게 소중한 거니까요."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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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 없는 한밤에 밀리언셀러 클럽 142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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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나서

 

 30년 만에 출간된, 그리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스티븐 킹'의 중편 소설집이다. 중편소설이야말로 스티븐 킹 식 소설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는 이야기에 기대를 하고, 한편씩 끊어 읽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스티븐 킹 식'이라는 수식어에 대해 정확히 잘 모르고 있었다. 대작인 『샤이닝』은 영화로 봤고, 후속편인 『닥터 슬립』은 책으로 읽었지만, 공포나 스릴감을 짐작하기엔 다소 약한 느낌이었다. 그러니, 이 중편 소설집을 읽기 시작할 때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무서울 것 같지만 뭐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별도 없는 한밤중에' 손에는 간식을 쥐고 태연하게 누워서 책장을 펼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말로 실수였다. 한낮, 혹은 이른 저녁에 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간식을 집어 들지 말았어야 했는데. 첫판부터 묵직한 무게로 밀고 들어오는 <1922>라는 작품은 예상보다 더 호되게 나를 괴롭혔다. 상상초월의 적나라한 묘사, 그리고 '이런 게 스티븐 식 공포인가'라고 생각될 정도의 극심한 공포. 정말로 작품 속 농장에 들어가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정신을 바짝 차렸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눈을 감고 싶지만 홀린듯이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는 마법에 빠져든 것 같았다. 아, 정말 이건 실수다. 일단 열고 나면 빠져들 수밖에 없으니, 애초에 정신을 바짝 차리든가, 아니면 열지 말아야 한다.

 

 수록된 4개의 중단편 (『공정한 거래』는 단편 정도의 분량이다) 소설들은 모두 '복수'와 '응징'에 관련되어 있다. "어떤 절박한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이 저지를지도 모르는 일, 또 그들이 선택할지도 모르는 행동 방식"을 기록하였다고 작가는 말한다. 초반에 나온 <빅 드라이버>는 작가가 말한 '복수와 응징'이라는 의미에 가장 직관적으로 부합하는 작품이고, <공정한 거래>는 '복수'의 의미를 가진 어떤 '악의'에 대하여 짧고 굵은 이야기를 펼쳐내며, 그리고 <행복한 결혼 생활>은 '복수'와 다른 갈림길 사이에 고민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그린다. 이 중 가장 독하게 표현된 첫 작품 <1922>는 다른 이야기들과 반대로 '응징당하는' 입장에서 판타지와 현실이 교묘하게 어우러진 공포를 그린다.

 

 솔직히, 읽기 힘든 부분도 많다. 복수라 하더라도 '통쾌함'을 맛보긴 어렵다. 특히 시체의 강도 높은 묘사는 눈살이 찌푸려지고, <빅 드라이버>의 이야기는 참을 수 없이 화가 난다. (여성범죄를 다룬 스릴러 등의 소설들은 아무리 재밌다고 하더라도 읽기가 힘들다, 피에르 르메트르의 『이렌』이 비슷한 경우였다) 하지만, 작가가 이야기하는 방식은 분명 특별하고, 끌고 나가는 힘이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책장을 넘기게 된다.

 

 '스티븐 킹'의 작품이 무서운 건, 단순히 살인이 배경이 되고 끔찍한 장면의 묘사가 적나라해서가 아니다. 어떤 장면이 있다면, 닿을 수 없는 곳까지, 주인공의 마음 깊숙이 숨겨둔 심리를 상세하게 포착해내기 때문이다. 숨이 막힐 듯 진행되는 살인이나 도피 장면에서도 그것은 쉴 틈 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조명한 장면들은 독자들에게 "만약 이렇게 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하는 상상을 꼭 한 번씩은 해보게 되는 것이다. 이는 미스터리나 스릴러의 법칙을 생각해 곧 나올 장면들을 상상할 수 있다 하더라도, 벌벌 떨게 하는 긴장감을 느끼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끝없이 계속되는 생생한 공포, 당신은 그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Written by. 리니

영미소설/ 추리, 미스터리 소설/ 브람스토커 상/ 밀리언셀러 클럽 142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1922년 그해에 내가 얻은 교훈이 있다면, 안 좋은 일에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장 끔찍한 상황을, 그러니까 모든 악몽을 합쳐서 현실에 빚어 놓은 섬뜩한 공포를 자기가 이미 겪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안 좋은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믿음을 삶에 하나뿐인 위안으로 삼는다. 설령 일어난다고 해도 눈으로 본 순간 머리가 홱 돌아서 더는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끔찍한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 그때에도 당신의 머리는 멀쩡하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그러다가 어쩌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이 사라져 버렸음을, 간절히 얻고자 했던 모든 것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어졌음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라리 죽었으면 하고 바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버텨야 한다. 그것 말고 다른 길은 없기 때문이다. (77쪽, <1922>)

공포 소설과 미스터리 소설의 규칙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이는 유혈극도 없고 시체도 달랑 한 구밖에 안 나와서 테스의 팬들이 좋아하는 코지 미스터리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테스는 휴대전화 창을 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게 소설이라면 전화가 안 터지겠지. `삶은 예술을 모방한다`는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왜나면, 테스가 노키아 휴대전화의 전원 버튼을 누르자 표시창에 통화권 이탈이라는 글자가 떴으니까. 당연한 수순이었다. 휴대전화를 쓸 수 있다면 이야기가 너무 간단해지니까. (244쪽, <빅 드라이버>)


햇빛 때문이겠지. 노을이 질 때는 눈이 착각을 일으키기 쉬우니까. 그리고 난데없이 풍기는 고약한 냄새 역시 항공기 연료가 타는 냄새이지 싶었다. 철조망 바깥의 이 조그만 자갈밭에, 변덕스러운 바람을 타고 날아온 냄새. 말이 되는 추측이었지만…… 그럼에도 스트리터는 엘비드가 시킨 대로 했다.

"사람들은 왜 연장을 하고 싶어 할까? 생각해 본 적 있어?" (419쪽, <공정한 거래>)

"인생은 공정한 거야. 엄마 뱃속에서 아홉 달 동안 주사위 두개를 굴리다가 어느 날 휙, 던지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니까. 어떤 사람은 7이 연달아 나오기도 하지. 어떤 사람은, 불행하게도 1이 두 개씩 나오기도 하고. 세상이란 게 원래 그런 곳이야." (460쪽, <공정한 거래>)

그럼 안 열어 보면 되잖아.

역시 좋은 충고였지만, 그 충고를 따르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다아시였다. 카지노에 왔다가 뭔지 모를 터무니없는 이유 때문에 카드 한 장에 평생 저축한 돈을 걸어 버린 여자처럼, 다아시는 상자를 열었다.

비어 있었으면. 하느님, 제발. 저는 아끼신다면 이 상자 안이 비어 있게 해 주세요.

하지만 비어 있지 않았다. 상자 안에는 고무줄로 묶은 네모난 플라스틱 카드가 세 개 들어 있었다. 더러워서, 또 병균이 득시글거릴까 봐 무서워서 버려진 인형을 조심스레 집는 여자처럼, 다아시는 손가락 끄트머리로 그것을 살짝 집어 꺼냈다. 그러고는 고무줄을 풀었다. (489쪽, <행복한 결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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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지나가다
조해진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고 나서

 

 팔꿈치가 찢어졌다. "아무리 꼬집어도 안 아프다"며 장난을 치던 주름진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딘가에 긁혀 찢어질 때도 아프지 않았다. 무심코 그곳을 보았더니 꽤 많은 피가 고여 있었다. 작은 상처라 민망했지만, 관절이 있는 부위라 병원에선 꿰매라고 했다. 그리고 엊그제, 실밥을 풀었다. 속살은 다 붙고, 몇 주 동안 붙이고 있던 반창고 덕택에 각질이 일었다. 각질이 떨어지고 가운데서 새 살이 돋아난다고 했다. 이제 신기하게 아문 살 위로 아직은 빨간 실 자국이 남아 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팔을 최대한 안쪽으로 돌려, 보기도 힘든 팔꿈치를 계속 쳐다보고 만져본다. "잘 붙었네."

 

 상처가 아무는 사이, 여름이 반쯤은 지나갔다. 아직은 자국이 있어 부끄러운 그곳을 긴 소매로 가릴 수 있을 만큼의 날씨다. 아직은 기온이 제멋대로 오르락내리락 심술을 부리지만, 가을의 냄새를 감지할 수는 있다. 잠깐 산책을 하러 어젯밤에 같이 나갔던 강아지가 어느새 떨어진 낙엽에 몸을 부볐다. 가을이 온 것만 같다. 그토록 혹독한 열을 선물했던 여름이 지나가는 건 언제나 순식간이다. 언제 이만큼 건너왔을까.

 

 『여름을 지나가다』는 지금 이 계절, 딱 펼쳐보기 좋은 책이다. 후끈한 오후와 차가운 바람이 부는 저녁, 여름과 가을을 모두 가진 하루의 계절이 소설과 참 많이 닮았다. 부동산 중개소에서 일하며 매물로 들어온 집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는 '민',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신분증을 주워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수'. 그들의 은신처는 폐업하기 직전의 가구점이다. 가구들의 익숙한 실루엣, 적정한 온도, 포근히 안아주는 그곳에 머문다. 낯선 공간이지만 '민'에게 위안이 되는 그곳, 아버지의 절망을 엿볼 수 있지만 '수'에게 그의 흔적을 전해주는 곳. 그리고 또 다른 청춘 '연주'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지만, 곧 일자리를 잃을 운명에 서 있다. 정처 없이 방황하는 그들, 뜨거운 여름을 지나는 청춘이다.

 

 무슨 꿈을 꾸었니?

 민은 속으로 물었다. 묻고 다시 물었다.

 현실이 좀 덜 끔찍한 거, 맞니?

 더웠다. 밤의 열기는 새벽까지 이어지려는 듯 좀처럼 식지 않았다. (148쪽)

 

  작가는 그의 말마따나 '기차 같은' 삶들을 그린다. 생애와 생애가 이어져, 선로를 지나는 긴 기차처럼 그들의 흔적은 살포시 이어져 있다. 하는 일은 달라도, 비슷한 인생이다. 다른 이의 공간을 단 하루씩 빌려 사는 삶, 다른 이의 이름을 빌려 진짜 자신을 회피하며 사는 삶, 반복되는 알바로 생활을 이어가는 삶……. 뜨겁고 뜨거운 여름, 이들을 살아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생애 한 자락이라도 이어져 있다는 것, 타인의 고통을 보고 듣고 따뜻한 믹스커피를 나눠마실 수 있다는 것. 거듭 실패하고 넘어져 상처가 생겨도,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온다면 쓰린 상처를 씻어내 줄 수 있다는 믿음이다.

 

 호된 여름이 간다. 소설 속 이들의 찌뿌듯한 삶이 생을 통과하는 우리의 모습과도 닮았다. 머리를 누르는 뜨거운 해의 무게감보다는 산뜻하고 약간은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적셔주길 바라는 나의 마음과도 이어진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계절이 온다면, 내 팔꿈치의 상처가 어느새 아문 것처럼 언젠가는 지워질 것이다. 아직 남은 빨간 자국은 언젠가 없어질 것이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또다시 여름이 온대도 그 계절을, 겪어낼 것이다.

 

 

 

Written by. 리니

한국소설/ 계절, 여름/ 청춘, 성장소설/ 문예중앙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목이 마르면 샘을 찾아가는 무구한 초식동물처럼 민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게 의심될 때마다 이곳으로 거울을 보러 왔다. 그럴 때 가구점의 화장대 거울은 다른 그 누구도 앗아가거나 침범하지 못하는, 오로지 민 혼자만 향유할 수 있는 무기질 조각이 되었다. 가구점의 잔잔한 어둠, 그 어둠 속에 느슨히 스며 있는 깊은 정적, 그리고 그 앞에 앉은 사람을 성실하게 복원하지 못하는 흐릿한 거울의 불명료함, 민이 좋아하는 건 그런 것들이었다. 흐릿한 거울 속에서 흐릿한 자신이 흐릿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 흐릿한 생애가 상상됐다. 가령 일정 기간 살다가 미련 없이 죽고 그 죽음에서 빠져 나온 뒤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다시 태어나는, 그러니까 일생이라는 개념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 태어남과 죽음의 끊임없는 반복. 그런 식의 삶은 기차 같은 거라고 민은 생각했다. (9쪽)

그즈음 그도 터득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계획에도 없던 다른 종류의 삶으로 빨려 들어가는 허약한 지점들이 우리의 인생에는 생각보다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어쩌면 민보다 더 절박하게, 구체적으로. 그럼 이곳은 흐릿한 곳일까, 명료한 곳일까. 진짜 세계인가, 거짓으로 빚어진 허상인가. (50쪽)

쉭쉭 소리를 내며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가로수의 무성한 나뭇잎이 출렁였다. 세계의 농도가 묽어지는 게 느껴졌다. 묽어지면서 흐릿해지는 세계, 낯설지는 않았다. 눈 깜빡할 사이에 생애가 지나가는 곳, 죽는 건 또 다른 생애를 위한 준비에 불과하므로 불안할 것도 아플 것도 없는 세계, 생애와 생애는 기차 칸처럼 연결되어 있으니 손에 쥐고 있는 표를 잃어버린대도 상관없는 곳, 그런 세계를 지나가고 있는 거라고 민은 생각했다. 그러니 지금은 무서울 것도, 미안할 필요도 없었다. 방금 전 뇌성마비 청년의 애인은 죽었고 다시 중개사무소 보조원의 생애가 시작되었으므로, 전생의 죄책감과 기만적인 비애는 이번 생애에서는 무효가 되는 거니까. (116쪽)

은희 할머니의 천장을 고쳐주지 못했듯 동욱의 외로운 일상을 채워줄 수는 없다. 동욱의 휠체어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다시 중개사무소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며 민은 생각했다. 그와 함게 식탁을 차려 밥을 먹는다든지 느슨한 자세로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장면은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비가 새서 눅눅하게 젖어갈 수밖에 없는 건 낡은 천장만이 아니다. 삶에도 누수의 흔적은 남기 마련이고, 그 흔적은 좀처럼 복원되지 않는다. 아니, 절대로 복원될 수 없는 흔적도 있다. (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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