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의 사랑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20
막스 뮐러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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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지은이) | 차경아 (옮긴이) | 문예출판사 | 2015-11-10 | 문예 세계문학선 120

 

남겨진 생각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냥 줄 수 있는 넉넉함이 아니라 꼭 줄 수 밖에 없는 절실함인거야.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단지 그 사람의 체온을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 체온을 닮아간다는 얘기야.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이 너를 끝없이 괴롭게 만든대도, 그래서 그 사람을 끝없이 미워하고 싶어진대도 결국 그 사람을 절대 미워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해. (응답하라 1998 중에서)

 

 사람은 사랑을 먹고 자란다. 오감을 자극하듯 달고, 짜고, 때로는 맵기까지 한 '사랑'은 누군가에게 살아갈 힘이 되고, 버릴 수 없는 절실함이 되고, 결코 놓을 수 없는 비장함이 된다. 이성 간의 사랑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 형과 동생, 친구와 친구, 동물과 사람, 그리고 사물과 보이지 않는 어떤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감정들이 세상 속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 단순한 질문에 따라오는 복잡한 대답들은 막막함에 우리의 머리를 쥐어짜게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복잡한 대답들을 제대로 파헤쳐보고 싶을 때가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랑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랑이 정답이라 믿는가?"

 

 

 『독일인의 사랑』을 읽기 전에 상상했던 이미지와 전개는, 책을 펼치는 순간 모두 희미해졌다. 주인공의 여덟 가지 회상으로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는 철학적 상념들이 가득하고, 그 상념들을 이어주는 얇은 줄기 하나는 어린 시절 새로운 세계로 다가왔던 '첫사랑'이다. 후작의 딸이었던 '마리아'와 어릴 적 낯선 타인으로 만나고, 재회하고, 오랜 인연으로 연결되어 깊은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 절절하고 숭고하게 표현되고, 사랑의 열정, 배신감, 허무감, 그리고 반성의 시간을 그린 곡선은 여타 인간의 사랑만큼이나 흔하디흔한 모양으로 뻗어있다. 하지만 그 속의, 절절한 사랑을 이루는 대화와 독백은 묵직하게 자리 잡아, 사랑의 참모습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있다.

 

 작가는 소설의 장을 각각의 '회상'으로 나누면서,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순수'의 의미를 작품 전체에 새겨놓았다. 물론, 지나가 버린 추억을 아무리 그때 당시로 되돌리려 애써도 꼭 그 지점까지 쫓지는 못하는 것처럼, 이미 '낯선 타인'의 존재를 알아버려 소모되는 감정들로 힘들어하는 우리는 완벽히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일단 그것은, 작가가 말하기를 '다른 유의 사랑'이다. 그리고 첫사랑, 어린 시절, 인생의 봄날, 그리고 수많은 잔상으로 표현되는 '순수로의 회귀'는 작가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다. 현대인들에게 사랑은 "결혼이라는 희극이나 비극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볼 수 없는, 순수한 사랑의 행복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표현한 소설 속의 사랑은 자칫 어렵고 답답해 보이며, 우리가 주변에서 줄기차게 봐오고, 스스로 겪었던 사랑의 모습과 확연히 달라 낯설고 당혹스러운 감정마저 든다.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주인공, 그리고 언젠가 다가올 죽음으로 인해 조금 더 고차원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마리아……. 그들은 "더듬대는 말로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것의 올바른 이름을 찾아내기 위하여" 해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리고 단순히 '플라토닉'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의 모습은, <독일 신학>에 대한 토론으로 '기독교적 사랑'의 의미까지 씌워지게 된다. '아가페적 사랑', 그리고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나누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큰 파장을 일으키는 또 다른 주인공 '의사'의 반전은 이와 같은 사랑이 주는 행복의 증거를 역설하고 있다.)
 

 

 어쩌면 이런 사랑을 재현해내기에,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해왔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고상한 사랑의 모습이, 아니 본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해명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사람과 사람, 그리고 낯선 타인과의 관계까지 메마른 지금, 이들의 사랑은 (완벽히 공감할 순 없을지라도) 아름답고 가치 있게 와 닿고 있다.

 

담아둔 문장

 

 인생의 새벽빛이 영혼 안에 감추어진 꽃받침을 열어줄 때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온통 사랑의 향기가 풍기게 마련이다. 우리는 서서 걷는 것, 말하고 읽는 것을 배운다. 하지만 사랑만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사랑은 생명과 더불어 이미 우리에게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사랑은 우리 현존의 가장 심오한 바탕이라고들 말한다. 천체들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서로에게 기울며 영원한 중력의 법칙에 따라 응집하고 있듯이, 타고난 영혼들 역시 서로에게 기울며 끌어당기고, 사랑의 영원한 법칙에 따라 결속하고 있다. 태양 빛이 없으면 한 송이 꽃도 피지 못하듯, 사랑이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다. (25쪽)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내게 지상의 행복의 절정을 보여주고 나서, 나를 인생의 넓은 사막으로 팽개치는 과정에 불과했다! 오, 이 땅에 얼마나 엄청난 보물이 감추어져 있는지를 차라리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을! 한번 사랑하고 나서 영원히 고독해져야 한단 말인가! 한번 믿고 나서 영원히 눈이 멀어야 한단 말인가! 이것은 엄연한 고문이다. 인간이 행하는 여타 모든 고문도 이 고문에 비하면 실로 아무것도 아니니라. (96쪽)

 

 

 어제, 도망치는 저녁 안개처럼 내 머리를 몽롱히 스쳐갔던 일들이 갑자기 생생히 떠올랐다. 그녀와 나는 서로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그 점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오빠와 누이처럼이든, 아버지와 자식처럼이든, 아니면 약혼한 남녀 사이든, 어쨌든 우리는 영원히 공존하는 관계였다. 문제는 우리가 더듬대는 말로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것의 올바른 이름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136쪽)

 

 

 그녀 앞에 서서 실재로 그녀 곁에 있게 되자, 그토록 행복하게 지냈던 이틀간의 회상의 세계가 한낱 그림자처럼, 무(無)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녀의 이마, 눈, 뺨을 손으로 감촉해보며 그녀가 실재함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밤낮으로 내 앞에 어른거리는 심상이 아니라 엄연한 존재임을. 나의 소유는 아니지만 당연히 나의 것이어야 하며, 나의 것이고자 원하는 존재임을. 내가 나 자신처럼 믿을 수 있는 존재, 나와 동떨어져 있지만 나 자신보다 더 가까운 존재, 그것이 없으면 나의 생명은 이미 생명이 아니며 나의 죽음조차 이미 죽음이 아닌 존재, 그것이 없으면 내 가엾은 현존이 한숨처럼 허공으로 사라지고 말 그 존재를 - 확인하고 싶었다. (142쪽)

 

 

Written by. 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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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고래 모노동화 1
김경주 지음, 유지원 디자인 / 허밍버드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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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겨진 생각들  

 

 아직 문자를 이해하기 어려운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이 우리에게 동화를 읽어주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 입술을 따라가며 우리는 세계를 느꼈다. 조금 섭섭한 일이지만 이제 우리는 세계가 어른들의 입술로만 만들어진 것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안다. 동화는 어른들의 입술의 세계가 아니라 어른들의 입술로는 다시 들어가지 못하는 세계라는 것을. (248, 기획 의원의 말 _ 김경주) 

 

 정말로 아쉽고 섭섭한 일이지만, 아이들만이 볼 수 있는 세계는 분명 있는 것 같아요. 아이들은 눈앞에 놓인 것들을 단지 호기심만으로 빛을 내는 물체인 양 바라보지요. 그리곤 어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들을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말하곤 해요. 자기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그리고 노래할 때, 저는 경탄 어린 눈으로 보게 됩니다. "저건 어린 애들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야." 하고 말이죠. 그러나 그 상상의 세계는 커가면서, 성장하며 많은 것을 보며 점점 현실로 바뀝니다. 세상을 배우고, 많은 것을 알아가는 것은 어쩌면 다른 쪽으로는 매우 슬픈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나무 위의 고래』를 읽고 어쩌면 '시인'은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세계를 유일하게 재현해낼 수 있는 '어른'이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그 순수함과 생각의 밀도는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죠.

 

 

 

 

 

 『나무 위의 고래』 에서는 나무 위에 사는 소녀가 등장해요. 쓰나미로 엄청난 파도가 밀려들어 마을의 모든 집이 잠겨버렸고, 보트 한 척이 나무에 걸려버렸죠. 그 보트 위에서 소녀는 일 년을 살았어요. 세상과 소녀를 이어주는 것은 오직 라디오 한 대지만, 갈매기와 방울새, 우편배달부, 낙하병이 간혹 찾아와 소녀의 말상대가 되어줍니다. 그들과의 대화와 소녀의 고백은 남다른 감수성으로 책을 꽉꽉 채우고 있어요. 소녀가 그리는 숲 속의 환상적인 그림들과 호기심 가득한 말들은 너무 예쁘고 슬퍼서 정말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의심할 만큼 모호하죠. 마치 꿈처럼 다가와요. 그가 정말로 나무 위에서 살고 있는지, 단순히 상상으로만 이루어진 세계인지 확신할 수도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어요. 따지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 어린아이들의 눈으로 말이죠.

 

 그러나 이 책이 어른 동화인 이유는, 어딘가 비틀린 부분을 어른들만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나무 위에 올라온 동물들은 소녀의 외로움을 자연스럽게 품어주지만, 낙하병과 벌목꾼, 윤리선생님 같은 '사람'들은 소녀의 환상적인 세계에 가려진 비틀린 세계를 언뜻언뜻 보여줍니다. 전쟁과 죽음, 윤리와 교육의 아이러니, 차가운 세계…… 아이들은 흐릿하게만 알 수 있는, 두려움과 잔혹함을 그리고 있어요.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그림 속에 숨겨진 흑백의 차가운 환영들은 어른 동화로 만들어진 이 책의 또 다른 볼거리예요.

 

 

 

 젊은 감각의 시인 · 소설가들이 창작하는 ‘자기 고백적 동화’라는 테마로 출간된 '모노 동화'는 텍스트뿐만 아니라 디자인에도 꽤 많은 신경을 쓴 듯 보여요. 그래픽디자이너 유지원은 이 아름다운 텍스트를 시각화하여 페이지에 그 이미지를 잔잔히 흘려놓았어요. 형체를 알 수 없는 이미지의 조각들은, 실제로 맞춰보면 위의 그림 10배 크기의 고래가 된다고 해요. 감각적인 그림은 『나무 위의 고래』의 몽환적인 텍스트를 더욱 깊은 감성으로 읽도록 도와주고 있죠.

 

 나무 위에 사는 작고 어린 소녀의 눈으로 본 인생의 이치를 담은 '모노 동화'. 외로움에 사무치고 막막한 성인들에게 현실의 복잡함 속에서 보지 못한 인생의 이치를, 우리가 잃어버린 순수함과 감수성을 찾아줄 거예요.

 

 

 

 

 담아둔 문장

 

 

 "바다가 보고 싶으면 날 한번 꼭 안아 봐도 돼."

 "왜 그렇게 해야 하지?"

 "날 꼭 안고 있으면 내 따뜻한 아랫배에선 바다 냄새가 날 거야."

 "넌 외롭구나."

 "응. 조금."

 "사람은 외로워지면 금방 몸이 차가워진대."

 "내 아랫배는 바다에 내려 앉을 때에도 항상 따뜻하지."

 그렇게 해서 나는 바다 냄새가 그리울 때면 날아온 부리갈매기의 아랫배를 꼭 안게 되었죠. (32쪽)

 

 

 숲에서 혼자 자고 일어나는 기분은 처음엔 맑은 공기 때문에 상쾌하지만 금방 외로워지기도 해요. 나는 내가 있는 곳이 꿈속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중얼거리죠.

 "내가 왜 여기까지 왔을까? 어떻게 이곳으로 걸어왔지?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혹시 낯선 사람이 잠든 날 안아서 여기 내려놓은 건 아닐까? 마녀의 빨간 빗자루를 타고 온 걸까? 집시의 초록색 기타를 타고 온 걸까? 아니면 썩은 몽키바나나를 너무 먹었기 때문에 나쁜 꿈을 꾸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주변을 보면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있었어요. 비록 꿈이긴 하지만요. 그러면 문득 겁이 나기 시작해요.

 "겁이 나면 외로워지는 것인지, 외로워지면 겁이 나는 것인지 아직 난 모르겠어." (34쪽)

 

 

 "이런, 구두끈이 풀렸잖아."

 어둠은 아저씨 앞에 도착하자 허리를 구부리고 자신의 구두끈을 묶기 시작했어요.

 "아저씨를 데리고 갈 거예요?"

 전 어둠에게 물었어요.

 "그럴 생각이야. 보고 싶지 않거든 눈을 감으렴."

 "전 너무 슬퍼요. 당신은 슬프지 않나요?"

 "난 이 사람이 더 이상 슬프지 않도록 해 주려는 거야."

 "어디로 그를 데려가세요?"

 "가족에게."

 "크루아상을 먹으며 그를 기다리나요?" (108쪽)

 

 

 "윤리는 뭐에요?"

 "네가 나무에서 사는 일이 없도록 교육하는 일이야."

 "그런 전 윤리를 배우고 싶지 않아요."

 "두려움을 가져야 이 사회에 필요한 윤리 의식이 생기는 거야."

 "전 자연에서 겁을 배우는 게 즐거운데요."

 "두려움을 버리면 반윤리적으로 보일 수 있어."

 "너무 어려워요. 윤리 선생님들은 지금 모두 뭘 하세요?"

 "모두 전쟁터로 끌려갔다. 아이들이 왜 무기를 들어야 하는지 리포트를 쓰는 중이야." (186쪽)

 

 

 첫 번째 연필에선 해일이 쏟아졌어요. 전 무서워서 다른 연필을 집었어요. 엄마가 깎아 주신 연필을 골랐죠. 그 연필에선 햇볕이 쏟아졌어요. 전 겨울에 맞는 단어를 하나 골라 하얗게 굴려서 눈송이를 만들고 입김을 불어 넣어 주었죠. 생명을 만들고 싶었으니까요. 지금까지 나무 위에서 보았던 자연의 눈부신 슬픔과 아름다움을 눈송이에 담아 보려고 했어요. 그러자 차가운 단어들이 눈송이 속에서 따뜻하게 숨을 쉬었어요. 전 눈송이가 된 단어들을 세상 여기저기에 뿌리기 시작했어요. 지붕 위에도 교회의 종소리 속에도, 햇볕이 들지 않는 캄캄한 동굴 속에도 눈송이를 날렸죠.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에게 눈송이를 보냈어요. 눈송이는 미소를 지으며 바람에 가까운 노래처럼 날아갔어요. (220쪽)

  

 

Written by. 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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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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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읽을 때마다,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읽힌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다. 오랫동안 필독도서였던 이 책을 읽고 느낌을 남기고 난 후에 다른 사람들의 감상을 구경했는데, 제각각의 의견을 내는 걸 보고 올해 참 즐겁고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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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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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지은이) | 예담 | 2015-11-16 | 초판출간 1995년

 

 

 

 남겨진 생각들  

 

 

 악의 주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소설은 자칫 위험하게 보일 수 있다. 일기로 채워진 글은 마치 강력한 독처럼 스며들어 온다. 주인공 '임순관', 대필작가인 그는 삶을 써내는 사람이었다.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글은 자신이 주체가 아닌, 다른 이의 삶을 기록하는 글이었다. 한평생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 다른 이의 삶에 배어들 수밖에 없었던 그는 결국 '토해내듯이' 일기를 썼다. 일기 속에는 우울과 냉소, 자기 허무에 가득 찬 문장들이 주체할 수 없이 실려 있다. 그는 왜 썼을까. "우리는 누구나 남다른 채로 남과 같지 않은가?"라는 소설 속의 말처럼, 자신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주르륵 펼쳐놓았던 것일까?

 

 

Q : 조금도 후회가 없는가?

A : 내가 묻겠다. 당신이 당신의 집을 더럽히고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쥐새끼들을 다섯 마리쯤 죽였다면 후회하겠는가? 당신이 후회하지 않는다면 나도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가 있다면, 더 많은 쥐새끼들을 처치하지 못한 것이다. (238쪽)  

 연쇄살인범이자 사형수인 '손철희'의 기억을 회상하고, 그의 삶 언저리에 들어가 대필을 준비하는 과정이 처음으로 펼쳐진다. 포동포동 살찐 광란의 쥐떼들, 그들을 바라보는 '손철희'의 기억은 의뭉스럽다. 주인공의 고객, '손철희'. 세상의 모든 쥐새끼를 벌했다는 착각에 빠져버린 반영웅의 싸이코는 그렇게 '임순관'의 내면으로 들어온다.

 

 

 '악'은 어디서 오는가? 부정한 세상과 사람들의 호들갑이 '악'을 만드는 것이라 단언하면, 그보다 위험한 말이 없을 것이다. 한 범죄자가 있다. 그의 마음속 악의가 어떻게 자라났느냐는 질문에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요"와 같은 대답은 황당하리만큼 비겁한 말이며, 그렇다고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가 순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악'은 어디서 오는가? 어떤 이유도 없이 무심코 찾아오는가? 인간이란 모두 순수하고 일부 사람들만이 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가? 작가 이승우는 이야기를 통해 말한다. 인간에겐 누구에게나 '악'이라는 본성이 있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속 '악'이 활개를 치지는 않는다고. 대신에, 세월과 시간으로도 채울 수 없던 균열은 이러한 '악'을 더욱 쉽게 부풀어 올라 악마의 얼굴을 하고 변해버리게 한다고. 『독』은 이러한 추상적인 과정을 그리면서, '악'을 부풀게 만드는 환경을, 누군가의 균열을 더욱 넓히게 하는 잔인한 도구들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악마를 키우고 악마에게 손과 발을 주는 것은 이 세상의 공기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다'고 덧붙이는데, 자신의 삶에조차 고유성이 없던 주인공 '임순관'의 삶이 딱 그런 모양새다.

 ​

 ​일기장이자 고백록인 이 글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정체불명의 여자 '민초희'와의 시간들, 자신과 동일시하는 연쇄살인범 '신철희', 우연처럼 배달되온 '연쇄살인범의 화살'과 같은 존재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다듬어져 만들어진 형상인지,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환상적이며 망상인듯한 주인공의 일기는, 섬뜩하리만치 무섭게 꺼내놓은 그의 마음속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하는 장치가 된다. 자신의 욕망과 행동에 관해 모순과 합리화로 일관하고 있는 그의 모습들을 되려 비판하면서, 잔뜩 차오른 소설의 위험수위를 살살 달래고 있는 것이다.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소재를 들인 『독』은 95년 『내 안에 또 누가 있나』로 초판 출간된 후, 인제야 연재할 때의 제 이름을 찾았다. 묵직한 관념들과 신화, 종교와 같은 이승우만의 문학 세계를 완전히 맛보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있지만, 힘 있고 강렬한 이승우의 서사와 문장이 살아있다. 그의 작품들은 그 무게가 육중할지라도 도전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함께 출간된 『에리직톤의 초상』도 곧 읽어볼 예정이다.

 

 

 

 담아둔 문장

 

 

 내가 타고 있는 것은 세월이다. 세월은 나의 의지를 묻는 일없이 정해진 길을 간다. 세월은 흐른다. 흐르는 것이 세월의 본질이다. 모든 것이 잠들어도 시간은 잠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멈춰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흐름이 시간의 본질이라는 말은 그런 뜻이다. 오늘의 시간은 어제로부터 흘러왔고, 내일의 시간은 오늘을 거쳐 흘러간다. 어제는 오늘 속으로 들어와 살고, 오늘은 내일 속으로 들어가 섞인다. 그 세월 안에서 아무리 발악을 해도 나의 의지는 세월 밖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세월에 제동을 거는 일 따위는 아예 불가능하다. 세월의 승객에게 필요하고 가능한 한 가지는 단지 버티는 것이다. 갈 때까지 가는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멈추면 같이 멈춰 서는 것이다. 그것이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25쪽)

 

 

 맹인이 본 것이 맹인에게 진실인 것처럼, 색맹이 본 것 또한 색맹에게는 진실이다. 개개인이 이 세계에 대해 느끼고 수용하고 응답하는 양식의 주관적인 요소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종종 시끄러워지고 헝클어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세계 내의 본질, 또는 이 세계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진실이 하나밖에 없다는 주장이야말로 전체적인 발상의 소산이다. 자기네들이 진리를 사유(私有)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행세하는 그런 종류의 위인들은 다른 쪽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너무 당연하고 너무 쉽게 파시스트가 된다. (…) 나는 이곳에 잘못 던져졌다. 이곳의 시간과 공기와 사물들과 사람들은 내 편이 아니다.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일체의 것들에 대해 단 한 번도 신뢰를 보내본 적이 없다. 그것은 물론 그 일체의 것들이 나에게 한 번도 신뢰를 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쪽)

 

 

 "진실은 은밀한 거지요. 봐요, 저것이 인간의 본색이에요."

 누군가 내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인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돌린다. 바로 뒤에 민초희가 서 있다. 유리 벽 너머에 있던 그녀가 어느새 이쪽 방으로 건너와 있다. 그녀의 존재가 나에게 현실을 상기시킨다. 그녀는 내 뒤에 서서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유리 벽 너머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나는 저 사람들에게 본색을 드러낼 공간을 제공했어요. 이곳이 아주 은밀하고 세상의 눈으로부터 단절된 안전한 공간이라는 믿음이 저들로 하여금 가면을 벗게 한 거죠. 가면을 벗으면 민얼굴이 나오지요. 여러 개의 가면을 벗어야 민얼굴이 나오는 사람도 있긴 해요. 너나 할 것 없이 민얼굴은 혐오스럽지요. 누구도 민얼굴을 해가지고 세상에 나다닐 수 없어요. 그러니까 가면을 쓰지요. (…) 그런데 이곳은 세상이 아니거든요. 세상으로부터 완전하게 단절되어 있거든요. (…) 저것이 본색이에요. 본색은 혐오스럽고 치욕이고, 슬픈 거예요." (265쪽)

 

 

 차가 떠난다. 길은 꼬불꼬불하고 어둡다. 더 검고 어두운 물속으로 빠져 몸을 담그기 위해 자동차는 어둡고 꼬불꼬불한 길을 달려가는 것 같다. 우주에 가득한 어둠이 이 깊은 산속에서 딱정벌레만 한 택시를 포위하고 있다. 딱정벌레 한 마리가 필사적으로 몸을 내돌리며 어둠의 포위망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길은 있으나 어둠을 향해 열려 있다 ……. 그러나 우리가 누군데 감히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겠습니까? 만들어진 물건이 그것을 만든 자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토기장이가 같은 흙으로 귀하게 쓰일 그릇과 천하게 쓰일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습니까……? 계속해서 그 테이프가 틀어져 있었던가. 차 안의 굵고 낭랑한 남자 성우의 목소리가 차 밖의 어둠과 한판 싸움을 벌이고 있다. 어느 쪽이 이길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어느 쪽이 이기기를 바라는지도 잘 모르겠다. (294쪽)

 

 

 

 

Written by. 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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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팽창 스토리 살롱 Story Salon 3
구보 미스미 지음, 권남희 옮김 / 레드박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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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남겨진 생각들 

 

 

 이건 분명 언급하기도 쉽지 않고,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은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 사랑이 향하는 곳으로 화살표를 그릴 수 있다면 분명 겹치고 겹쳐 어긋나 있을 것 같은 그런 이야기.


 스물아홉의 '미히로'는 사랑을 한다.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자라온 '게이스케'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불안하다. 섹스가 없기 때문이다. 밤마다 '미히로'는 생각한다. "저기, 나, 지금 욕정을 느낍니다만." 배란기만 되면 갑작스럽게 반복되는 상황과 몸의 변화에 '미히로'는 당혹스럽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머릿속에 맴도는 단어는 오래전 남자 때문에 집을 나가버린 엄마에게 붙은 '음란한 여자'라는 낯부끄러운 칭호다. 트라우마로 남은 그 단어는 이제 자신에게도 옮아있는 듯 아프다.


 그가 그냥 안아주기만 하면, 사랑받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모순이라 생각한다. 치밀어오른 감정과 몸의 변화를 추스를 수 없던 어느 날, 그는 '게이스케'의 동생이자 어릴 적 친구였던 '유타'의 집으로 달려간다. 순식간에 벌어진 격렬한 밤, 올라오는 감정들. 내 몸은 왜 그렇게 때가 될 때마다 날뛰는 것일까. 나는 그를 사랑하는 것일까,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우리의 사랑은 잘 되고 있는 것일까.


  '미히로'의 고민을 시작으로 하여, 그와 엮인 사람들의 조심스러운 사랑들이 연작 소설 형식으로 등장한다. 사고방식이 달라 주저하는 사랑, 잔잔한 호감에서 시작되는 사랑, 의지하듯 무언가를 잊어버리듯 빠져드는 사랑……. 어린 시절을 함께 한 세 사람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드러나는 그들의 성질과 과거는, 지금 매달리고 있는 사랑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왜 그들이 서로 만나게 되었는지 파악하게 한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 얕게 깔린 감정의 방해물들이 드러난다.


 성과 욕망, 불륜 (결혼하지 않았지만, 불륜은 불륜이니까) 등의 자극적인 소재가 중심인데도, 일본 소설의 잔잔한 감성을 끝까지 잡아내고 있는 소설 『밤의 팽창』은 분명 특별하다. 엇갈린 사랑을 그려내는 방식은 사랑의 모습만큼이나 다양하지만, 이 소설은 분명 다른 느낌이 든다. 사랑을 바라보는 각각의 생각들을 촘촘히, 어쩌면 무미건조할 정도로 담담하게 고백하는 모습은 먹먹하고 안쓰럽고, 그 모습을 표현하는 문장은 아름답다. 그들의 마음엔 공감할 수 없어도, 불쾌하게 바라볼 수 없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몸을, 멀어져 가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어른 아이'들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 찝찝하고 답답한 작품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음에도, 살짝살짝 가슴을 건드리며 녹이는 소설이다.


 

"…… 솔직히 말하면 좀처럼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아. …… 어릴 때부터 줄곧 함께 지내서 가족 같아."
게이스케가 띄엄띄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족 같아. 닌자 만화에 나오는 표창처럼 뾰족한 말이 내 가슴을 찔렀다. 그 말을 뱉으면 나는 여기서 한 걸음도 게이스케에게 다가갈 수 없다. 가족같이 느낀다는 사람과 섹스하길 바라는 내가 엄청나게 징그러운 인간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48쪽)

전단지를 든 오가사와라 씨의 목소리가 좁은 현관에 울렸다. 구두끈을 묶으면서 올려다보니 오가사와라 씨가 입고 있는 니트에서 나온 보슬보슬한 실 같은 것이 복도 조명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문을 닫았을 때 퍼뜩 떠올렸다. 포동포동 살찐 오가사와라 씨의 질감은 뭔가를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뭔지 몰라 답답했는데, 드디어 알았다. 오가사와라 씨는 담배 가게 마사코를 닮았다. (86쪽)

나는 언젠가, 아이 같은 얼굴로 잠든 이 사람과도 아픈 일이 있을 것 같은,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그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어 보고 싶어졌다. 내 머리에 뿌려진 씨앗은 퇴적층처럼 미히로와의 추억이 켜켜이 쌓인 내 마음속에서 딱딱한 껍데기를 깨고 작은 싹을 틔우기 시작했으니. 커튼을 걷자, 어린 시절, 설날에 보았던 것 같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보였다. (102쪽)

"그럼 왜 유산한 뒤에 후련한 얼굴이었던 거야, 너?"
엉겁결에 유타의 팔을 꼬집고 있던 손가락을 떼었다.
언덕길 커브를 천천히 올라오는 버스를 보았다. 차 안에는 불이 켜져 있지만, 어째서인지 아무도 태우지 않았다. 유타가 한 말이 긴 화살처럼 머리에서 발끝까지를 관통하고, 내 속에서 투두둑 하고 정체 모를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게이스케에게조차 보인 적 없는 거친 욕망과 감정이 유타 앞에서는 노골적으로 드러나 버린다. 작년 여름과 마찬가지다.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무서웠다. 말도 안 되는 유타의 말을 기쁘게 생각하는 자신에게 공포를 느꼈다. (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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