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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20
막스 뮐러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11월
평점 :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지은이) | 차경아 (옮긴이) | 문예출판사 | 2015-11-10 | 문예 세계문학선 120
남겨진 생각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냥 줄 수 있는 넉넉함이 아니라 꼭 줄 수 밖에 없는 절실함인거야.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단지 그 사람의 체온을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 체온을 닮아간다는 얘기야.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이 너를 끝없이 괴롭게 만든대도, 그래서 그 사람을 끝없이 미워하고 싶어진대도 결국 그 사람을 절대 미워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해. (응답하라 1998 중에서)
사람은 사랑을 먹고 자란다. 오감을 자극하듯 달고, 짜고, 때로는 맵기까지 한 '사랑'은 누군가에게 살아갈 힘이 되고, 버릴 수 없는 절실함이 되고, 결코 놓을 수 없는 비장함이 된다. 이성 간의 사랑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 형과 동생, 친구와 친구, 동물과 사람, 그리고 사물과 보이지 않는 어떤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감정들이 세상 속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 단순한 질문에 따라오는 복잡한 대답들은 막막함에 우리의 머리를 쥐어짜게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복잡한 대답들을 제대로 파헤쳐보고 싶을 때가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랑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랑이 정답이라 믿는가?"
『독일인의 사랑』을 읽기 전에 상상했던 이미지와 전개는, 책을 펼치는 순간 모두 희미해졌다. 주인공의 여덟 가지 회상으로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는 철학적 상념들이 가득하고, 그 상념들을 이어주는 얇은 줄기 하나는 어린 시절 새로운 세계로 다가왔던 '첫사랑'이다. 후작의 딸이었던 '마리아'와 어릴 적 낯선 타인으로 만나고, 재회하고, 오랜 인연으로 연결되어 깊은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 절절하고 숭고하게 표현되고, 사랑의 열정, 배신감, 허무감, 그리고 반성의 시간을 그린 곡선은 여타 인간의 사랑만큼이나 흔하디흔한 모양으로 뻗어있다. 하지만 그 속의, 절절한 사랑을 이루는 대화와 독백은 묵직하게 자리 잡아, 사랑의 참모습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있다.
작가는 소설의 장을 각각의 '회상'으로 나누면서,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순수'의 의미를 작품 전체에 새겨놓았다. 물론, 지나가 버린 추억을 아무리 그때 당시로 되돌리려 애써도 꼭 그 지점까지 쫓지는 못하는 것처럼, 이미 '낯선 타인'의 존재를 알아버려 소모되는 감정들로 힘들어하는 우리는 완벽히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일단 그것은, 작가가 말하기를 '다른 유의 사랑'이다. 그리고 첫사랑, 어린 시절, 인생의 봄날, 그리고 수많은 잔상으로 표현되는 '순수로의 회귀'는 작가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다. 현대인들에게 사랑은 "결혼이라는 희극이나 비극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볼 수 없는, 순수한 사랑의 행복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표현한 소설 속의 사랑은 자칫 어렵고 답답해 보이며, 우리가 주변에서 줄기차게 봐오고, 스스로 겪었던 사랑의 모습과 확연히 달라 낯설고 당혹스러운 감정마저 든다.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주인공, 그리고 언젠가 다가올 죽음으로 인해 조금 더 고차원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마리아……. 그들은 "더듬대는 말로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것의 올바른 이름을 찾아내기 위하여" 해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리고 단순히 '플라토닉'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의 모습은, <독일 신학>에 대한 토론으로 '기독교적 사랑'의 의미까지 씌워지게 된다. '아가페적 사랑', 그리고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나누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큰 파장을 일으키는 또 다른 주인공 '의사'의 반전은 이와 같은 사랑이 주는 행복의 증거를 역설하고 있다.)
어쩌면 이런 사랑을 재현해내기에,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해왔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고상한 사랑의 모습이, 아니 본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해명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사람과 사람, 그리고 낯선 타인과의 관계까지 메마른 지금, 이들의 사랑은 (완벽히 공감할 순 없을지라도) 아름답고 가치 있게 와 닿고 있다.
담아둔 문장
인생의 새벽빛이 영혼 안에 감추어진 꽃받침을 열어줄 때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온통 사랑의 향기가 풍기게 마련이다. 우리는 서서 걷는 것, 말하고 읽는 것을 배운다. 하지만 사랑만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사랑은 생명과 더불어 이미 우리에게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사랑은 우리 현존의 가장 심오한 바탕이라고들 말한다. 천체들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서로에게 기울며 영원한 중력의 법칙에 따라 응집하고 있듯이, 타고난 영혼들 역시 서로에게 기울며 끌어당기고, 사랑의 영원한 법칙에 따라 결속하고 있다. 태양 빛이 없으면 한 송이 꽃도 피지 못하듯, 사랑이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다. (25쪽)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내게 지상의 행복의 절정을 보여주고 나서, 나를 인생의 넓은 사막으로 팽개치는 과정에 불과했다! 오, 이 땅에 얼마나 엄청난 보물이 감추어져 있는지를 차라리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을! 한번 사랑하고 나서 영원히 고독해져야 한단 말인가! 한번 믿고 나서 영원히 눈이 멀어야 한단 말인가! 이것은 엄연한 고문이다. 인간이 행하는 여타 모든 고문도 이 고문에 비하면 실로 아무것도 아니니라. (96쪽)
어제, 도망치는 저녁 안개처럼 내 머리를 몽롱히 스쳐갔던 일들이 갑자기 생생히 떠올랐다. 그녀와 나는 서로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그 점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오빠와 누이처럼이든, 아버지와 자식처럼이든, 아니면 약혼한 남녀 사이든, 어쨌든 우리는 영원히 공존하는 관계였다. 문제는 우리가 더듬대는 말로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것의 올바른 이름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136쪽)
그녀 앞에 서서 실재로 그녀 곁에 있게 되자, 그토록 행복하게 지냈던 이틀간의 회상의 세계가 한낱 그림자처럼, 무(無)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녀의 이마, 눈, 뺨을 손으로 감촉해보며 그녀가 실재함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밤낮으로 내 앞에 어른거리는 심상이 아니라 엄연한 존재임을. 나의 소유는 아니지만 당연히 나의 것이어야 하며, 나의 것이고자 원하는 존재임을. 내가 나 자신처럼 믿을 수 있는 존재, 나와 동떨어져 있지만 나 자신보다 더 가까운 존재, 그것이 없으면 나의 생명은 이미 생명이 아니며 나의 죽음조차 이미 죽음이 아닌 존재, 그것이 없으면 내 가엾은 현존이 한숨처럼 허공으로 사라지고 말 그 존재를 - 확인하고 싶었다. (142쪽)
Written by. 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