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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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나서

 

 바다는 아름다우며 혹독하다. 하지만 채 자라지도 않은 티끌만 한 물고기에게 바다는 아름다움보다 혹독함이 훨씬 더 앞서는 곳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포식자와 어두컴컴한 심해 속 장애물들, 홀로 그 세상을 이겨내야만 하는 나약한 물고기의 표류는 외롭고 처량하다. 하지만 그 어린 물고기는 단순하기에 용감하다.

 

 

 라일라,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작은 흑인 소녀가 등장한다. "예닐곱 살 무렵에 나는 유괴당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글은 첫판부터 그녀에게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도록 한다. 그녀는 널따란 세상의 티끌 같은 손재지만, 그 작은 존재에게도 세상의 풍파는 빗겨가지 않는다. 아니, 빗겨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세차게 분다.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밤에 팔려왔기 때문에 지어진 '라일라(밤)'라는 이름밖에 없다. 처음으로 팔려간 '랄라 아스마'의 집에서는 사랑과 고통을 동시에 배운다. 버팀목이 되었던 엄마이자 보호자, '랄라 아스마'가 죽고 난 뒤, 그녀는 다시 거리로 나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화려한 거리의 여자들이 사는 여인숙에 들어간 라일라, 그녀에게 몸을 파는 여자들은 수치스럽거나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자신을 다른 의미로 봐준 '공주님'들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시기의 삶은 라일라에게 절제나 규율 따위는 없는 '욕망만을 따르는' 성향을 선물한다.

 

 

 어떤 고난도 겪을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는 어린 그녀는 주체적이진 못하다. 상황들이, 또다른 공격이, 그녀가 선택할 새도 없이 몰아치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오로지 장애물을 피하기 위해서다. 치이고 또 치이면서, 걸어가고 헤엄치는 다른 사람들에게 밀리면서 그 작은 소녀는 여러 세상을 돈다. 감금과 폭력, 욕망 어린 남자들의 추파,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거대한 문명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공격의 대상이 되고, 이따금 그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주는 행운을 발견하기도 한다. 인생의 굴곡이 있다면 출발점과 정상을 가로지를 '라일라'의 생은 한마디로 지옥이다. 지옥에서 달아나려고 하는 그녀의 몸부림은 안쓰럽다. 어떤 것에도 그녀의 선택은 없다. 다른 사람이 손길과 상황이 만들어낸 그녀의 삶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렇기에 그녀가 꿈꾸는 행복은 자유, 구속되지 않는 삶이다.

 

 

 정체성과 자유를 향한 갈망은 라일라에게 자칫하면 좌절할 수 있는 어두운 상황에도 한 걸음을 떼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고난과 역경들이 어디에서 왔든, 누군가에게는 넘을 수 없는 언덕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뛰어넘을 수 있는 무릎만치 자그마한 돌덩이가 되는데 라일라의 경우, 언덕이다. 하지만 넘을 수는 있었다. 그녀는 그 언덕에 깊은 구멍을 내가며 올라가고 내려온다. 그 과정은 생의 바깥에 서 있는 나도 참을 수 없게 고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언덕을 넘어간다.

 

 

세상은 조용했다. 이제 두 귀가 모두 먼 것 같았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복도 끝에 있던 화장실에서 토했던 것 같다. 그리고 소리를 질러댔던 것 같다. 철문을 열고 터널 같은 통로 안에서 건물 꼭대기까지 울리도록 울부짖었다.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 환풍기의 모터가 하나씩 가동되면서 비행기의 진동음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 소리가 모든 소음을 덮어버렸다. 나는 시몬을 생각했다. 그녀를 보고 싶었고, 그녀가 음악의 한 소절을 반복하여 들려주는 동안 그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바로 그날 밤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194쪽) 

 

 

 역경이 있으면 행운도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역경이 있으면 얻는 것은 있다고 말할 순 있을 것 같다. 라일라의 숙원이자, 행복한 삶에 대한 물음이었던 것을 스스로 찾는 순간, 그리고 삶의 근원인 고향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녀는 빛나는 물고기가 된다. 여전히 작디작은 물고기지만 어른이 되었다. 그녀에겐 또다시 역경이 징검다리처럼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겨낼 것이다.

 

 

 작은 존재라도 강하게 빛날 수 있는 특권은 그가 가진 '운'에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어두운 심해를 불빛 없이 나아갈 수 있는 끈질긴 용기, 그리고 그 불빛을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는 선택. 나는 이 소설의 끝을 믿고 싶다.

 

 

 

Written by. 리니

프랑스 소설/ 성장 소설/ 노벨 문학상/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소장하고 있는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나는 후리야에게 부탁했다. "내게도 일자리를 찾아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네게 어울리지 않아. 너는 다른 걸 해야 해. 학교에 가야지." 그녀는 내게 프랑스어와 에스파냐어, 영어로 된 책과 공책을 사주었다. 타가디르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 "너는 우리처럼 돼서는 안 돼. 변호사나 의사 같은 뭔가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지. 우리 같은 허드렛일이나 해서는 안 된단 말이야." 나는 그녀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하튼 내가 누군가와 결혼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처음이었다. 내게서 남편을 위해 부엌일이나 하는, 그저 하찮은 하녀와도 같은 존재가 아닌 다른 면을 보아준 사람은 그들이 처음이었다.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그녀들은 진실로 나의 착한 공주님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껴안았다. (72쪽)


"아무래도 미성년자인 것 같아. 집에 데려다주는 편이 낫겠어." 그가 여기저기에 전화를 거는 것 같더니 마침내 하킴과 연결이 되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자블로 거리에 있는 차고의 주소를 알아냈다. 그때 나는 세상이란 참으로 좁아서 실만 제대로 끌어당기면 모든 것이 끌려 온다는 것, 이를테면 누구든 어떤 일에 관련되면 서로 한 동아리를 이루게 되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되며, 노노와 나같이 그들과 무관한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몬의 남자 친구가 전화를 하는 동안 나는 내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머릿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몹시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이 담긴 시몬의 얼굴과 암소처럼 커다란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때 문득 나는 왜 그녀가 우리 둘이 서로 닮았으며 둘 다 자신의 육체를 가지지 못한 존재라고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뭔가 진정으로 원한 적이 없고 항상 타인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160쪽)

하킴은 나의 오빠였다. 나는 마리마였다. 나는 할아버지의 닳아서 반들반들한 손가락이 내 얼굴에 머물며 내 눈과 뺨과 입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을 느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무엇인가가 내 속에서, 내 가슴속에서 부풀어올라 목구멍을 막았던 것이다. "그분은 내 할아버지였어. 정말이야.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더듬거렸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나는 숨이 막혔다. 하킴은 내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눈물이 아니라 분노였다. 나는 건물 안의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고 싶었고, 할아버지의 시야를 가로막았던 불투명한 하늘에 구멍을 뚫어버리고 싶었고, 유리창과 블라인드를 깨버리고 싶었고, 열차의 차량과 버스의 차창과 철로, 그리고 세네갈의 강줄기와 팔레메 강변의 얌바 마을에 닿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배를 부숴버리고 싶었다. (184쪽)

이곳 사람들, 아사카, 나킬라, 알루굼, 울레드 아이사, 울레드 힐랄의 사람들, 그들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서로 싸워 부상을 입고 사상자도 생긴다. 여인네들은 운다. 아이들은 사라진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우리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곳이다. 이제 나는 확신한다. 하늘의 정점에서 쏟아져내리는 햇살에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보이고, 거리는 텅 비어 있다. 햇살에 눈이 부셔 눈물이 고인다. 뜨거운 바람이 벽을 타고 먼지를 날린다. 바람과 햇살을 견뎌내기 위해 나는 네모난 커다란 천을 사서 이곳 여인들처럼 온몸을 감싸고 틈을 만들어 눈만 내놓았다. (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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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합
한창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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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나서

 

 여행이 주는 맛은 방방곡곡 아름다운 절경과 생소한 체험에 있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 그 맛은 땅의 끝, 비릿하고 시원한 냄새가 나는 바다로 갈 때 더욱 진해진다. 산과 언덕에 다닥다닥 자리 잡은 작은 집들, 혹은 밤에도 빛나는 높은 건물과 바다의 오묘한 조화, 항구에 묶여 있는 어선들의 풍경이 생소하지만, 매혹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는 그런 풍경들 말고, 조금 더 깊이, 좁게 들어가면 강한 생명력을 가진 사람들이 보인다. 한적한 해변에 쭈그려 앉아 바닷물에 떠내려온 미역을 건지는 꼬마와 그의 엄마로 보이는 정다운 모습, 마치 너무나 익숙한 자동차를 몰듯 흔들리는 배의 키를 잡고 있는 햇볕에 탄 아저씨의 모습들. 여행할 틈이 생길 때마다 가능한 한 다시 그곳으로 향하고자 하는 마음은 바로 이 모습을 그리워함에서다.

 

 

 그리고 그곳의 냄새에 취해, 그곳에 매력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는 한창훈 작가의 책을 읽으며 대리만족을 한다. 뼛속까지 '바닷사람'인 그의 책들에는 바닷냄새가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장편소설 『홍합』은 아름답고 혹독한 바다의 모습을 그리는 데 중점을 두진 않는다. 오히려 바다는 배경으로 존재한 채, 그보다 더 좁은, 구석구석의 '사람'들을 관찰한다. 좁은 장소로 선택한 곳은 '홍합 공장'이다. 차에서 실어온 수많은 홍합을 까고, 삶고, 깨끗이 씻어 얼려 포장하는 '삶의 현장' 속에서 작가는 땀 흘리는 그들의 노동을 본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을 먹여 학교 보내고 저는 도시락 하나 싸들고 공장에 나와 일을 하고 점심 땐 식은 밥을 두고 망연자실 먼 산이나 한동안 바라보다가 꾸역꾸역 뱃속에 집어넣고, 퇴근해서는 자꾸 가라앉으려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또 아이들 밥 먹여 재우고 천장이나 쳐다보다가 엉엉 우는 날들이었다. 그렇게 사는 것도 하는 것이라면 산다는 게 그런 것이었다. (274쪽) 

 

 세심한 수작업을 필요로 하는 일의 특성상, 홍합 공장에는 많은 아낙네가 모여든다. 자신의 이름 대신, 'ㅇㅇ네'와 같은 자식의 이름으로 불리는 그들의 삶은 사투리를 그대로 살려 적나라하게 표현된 수다와 우스갯소리 속에 녹아든다. 그 속을 보면 어느 하나 순탄한 인생들이 없다. 남편에게 손찌검을 당하고, 버림받고, 술과 노름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시어머니의 잔소리는 예삿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서럽고 서러운 인생사를 수다로 풀어낸다. 제각기 사연들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그 인생사를 구구절절 풀어내고, 분노하여 서로 욕을 뱉어주고, 복수 해주겠다며 소매 걷어붙인다는 이들의 수다는 '어찌 됐든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이겠다. 삶의 동력, 웃음 그리고 해학. 작가는 그들의 녹록지 않은 인생을 그저 구슬프게 읊지 않고, 마치 판소리처럼 신명 나고 능청스럽게 전해준다.

 

 

 홍합 공장 속 사람들의 인생 속에서 약간은 다른 분위기로 이야기되는 주인공의 사랑도, 그들을 보는 작가의 시선만큼이나 담백하다. "산다는 게 그런 것이었다."라는 철학은 사랑에도 어쩔 수 없이 적용되는 것일까. 자그맣게 피어나 설레고 두근거리기만 한 사랑도 삶의 무게와 저울질 되어 아스러지지만, 그들은 한탄하지 않는다. 그렇게 사는 것도 사는 것이라면 산다는 게 그런 것인 것처럼, 사랑도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었으니까.

 

 

 소설 『홍합』은 분명 아름답게 빛나는 서정적인 언어들로 가득 찬 소설은 아니다. 작가가 소설 속 말한 바에 의하면 '촉촉하게 달궈진 닳은 굳은살' 같은 소설에 가깝다. 감정을 다독이기보다는, 퍽퍽 두드리거나 긁어 없애버리는 식이다. 하지만 이 거친 '굳은살' 같은 소설은 우리네 삶을 품고 있어 거칠고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다. 그래서 때로는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그 모든 것을 표현한 작가의 글에 어찌 빠지지 않을 수 있으랴.

 

  

 

 

Written by. 리니

한국소설/ 제3회 한계레문학상 수상작 

소장하고 있는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하루에 네댓 번씩 저 사는 마을로 홍합을 실러 온 차라는 걸 뻔히 아는 터라 여자는 스스럼없이 안면을 붙여 왔다. 하긴 그게 한 세월 묵은 여인네들의 장기이기는 했다. 그네들에게 세월이란, 수줍음이 무늬가 되던 몸에서 독기가 새록새록 피어나오다가 끝내 몰염치의 아성으로 굳어지는, 그 독한 시간대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에는 부드러운 맨살도 있고 일에 혹독하게 달궈진 끝에 반들반들 닳은 굳은살이 있듯이 사람들 중에도 교양으로 제정신의 꽃을 피우는 부류와 이렇게 딱딱한 살로 차가운 바닥을 버텨내주는 부류가 있었다. (10쪽)

"입고(入庫) 다 됐소."

"이, 알았어."

냉동공장 황기사가 단추들을 눌러 냉동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시끄럽던 기계가 더 요란해졌다. 이제 냉동실은 영하 삼십오 도까지 온도가 떨어져 홍합을 얼릴 것이다. 어미 몸에서 뿔뿔이 뿜어져 나와 바닷물을 타고 흐르다가 아무 데고 저 몸 닿는 곳에 뿌리를 내리고 몸을 피웠다가 양식줄에 촘촘이 묶여 살을 키운 홍합은 현장에서 솥에 푹 삶겨 뜨거운 맛을 보고는 벌러덩 벌어져 흐물흐물 고물고물하다가 껍질과 떨어져 이렇듯 차가운 맛을 보게 된 것이다. 하루 종일 삶기고 씻긴 저것들은 밤새 꽁꽁 얼었다가 다음날 낱개로 떨어져 박스 포장이 된 다음 다시 냉장실로 옮겨지고는 훗날 컨테이너에 실려 멀리 유럽으로 갈 터였다. 이름만 들어본 먼 외국으로 가는 것도 그렇지만 새끼 두셋 낳아 반평생 뒷바라지로 허덕이는 인간들에 비하면 어쩌면 저 알아서 흘러가고 저 알아서 크는 이것은 훨씬 더 고급스러운 생물일지도 몰랐다. (19쪽)

풀과 나무에 물이 오르고 겨우내 겨울잠 자던 물이 몸 풀고 흘러내리는 봄이나 풀과 나무가 기운을 뿜어내다가 도가 지나쳐 얼굴이 붉어지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가죽에 윤기가 도는 가을이면 시간은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손아귀로 움켜진 한줌 물처럼 절로 흘러가버리는 거였다. 그것은 인생에서 청춘과 같아 지금이 좋을 때구나 싶어지면 이미 화려한 시간대의 끝물이어서 사람의 생이란 게 언제나 시간보다는 한 호흡 뒤지는 물건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란 무서운 것이었고 살아 있는 생물 같았다. (210쪽)

커피와 비스킷은 다과(茶菓)의 대명사이면서 한담(閑談)보다는 권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위치가 격하되었다. 저 권태의 여대생들이 그렇게 한 사 년 살아보니 남는 것은 결혼하기에 적당한 나이가 되었다는 것말고는 없다고, 차라리 돈이나 벌고 사회 경험이나 하는 게 낫다고 노련하게 말할지라도 그 속에는 아무런 삶의 근력이 없게 마련이었다. 하여 저 솔로몬이 떠들었던, 모든 영화(榮華)가 다 부질없고 헛되도다,는 말처럼 부질없고 헛된 게 없었다. 넘치는 잔과 배부름의 여가(餘假)와 권태를 한번도 맛보지 못한 이들의 마음을 바늘 끝만큼도 짐작하지 못한 소리였다. 그 뇌까림은, 영화가 부질없음을 깨닫기 위해서는, 풍요가 넘실대는 그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 보기 전에는 수천 수만의 말씀이 다 걸레 조각이었다. 아프리카 원주민에게 어떻게 얼음의 맛을 설명할 수 있을까. 손을 담가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투성인데, 그 말 외에 어떤 것이 삶을 설명할 수 있을까. (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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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존 버거 지음, 강수정 옮김 / 열화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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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존 버거 / 열화당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기억창고 

 

 

 

 

  책을 읽고 나서

 우리가 거닐었던 모든 공간과 우리가 만지던 모든 사물은 깊이가 불분명한 기억의 항아리처럼 존재한다. 누군가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있는 그곳에, 나의 기억도 살포시 얹어 놓고, 그 흔적들을 기록한다. 그리고 그것을 여는 순간, 다음에 거쳐 가는 사람들의 생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나에게는 수많은 사람이 거쳐 가는 동네 거리가 그렇고,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사물들과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책들이 그렇다. 나는 실제로 중고 책에서 꽤 의미 있는, 누군가의 생의 기록을 발견한 적이 있다. 내게도 인생의 책이 돼버린 한국 작가의 소설 맨 앞 페이지에서, 누군가가 또 누군가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견했던 것이었다. "사는 게 별거냐, 잘 먹고 잘 웃고 잘 살자."라는 메시지는 가볍게 던지는 말 한마디였지만, 꾹꾹 볼펜으로 눌러 쓴 글씨에 생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흠뻑 담고 있어, 그 책을 다시 누군가에게 선물한 지금의 나에게도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리스본, 제네바, 크라쿠프…… 그리고 마드리드까지의 여정을 담은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은 기억과 흔적에 관한 책이다. 분야는 소설이지만 에세이로도 읽힌다. 중간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죽은 이들이 기억하는 과일들'이라는 한 묶음의 글은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장르를 다시 확인하게 하고 앞표지를 왔다 갔다 하게 한다. 하지만 의심은 뒤로하고 그저 읽어본다. 작가는 소설 속에 투영되어 또 다른 ‘존’의 모습으로 길을 걷고, 서로 다른 매력을 뿜고 있는 도시의 장면들을 관찰하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승, 까마득한 옛날에나 존재했을 선사시대의 사람들까지. 그리고 그 대화와 서술 속에 작가가 사랑하고 고민하는 것들이 한 꺼풀씩 드러난다.

 

 

, 인생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선을 긋는 문제이고,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지는 각자가 정해야 해. 다른 사람의 선을 대신 그어줄 수는 없어. 물론 시도는 해 볼 수 있지만, 그래 봐야 소용없는 일이야. 다른 사람이 정해 놓은 규칙을 지키는 것과 삶을 존중하는 건 같지 않아. 그리고 삶을 존중하려면 선을 그어야 해.

그래서 시간은 중요하지 않고 장소는 그렇다는 거예요? 내가 다시 물었다.

, 이건 그냥 아무 장소가 아니라 만남의 장소란다. 이제 전차가 다니는 도시는 많지 않잖니. 여기서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밤에 몇 시간만 빼고. (16)

 

 

 그들을 만나 ‘존’은 묻는다. 가장 사소한 질문부터, 다소 무거운 질문까지. 그들을 자신과 연결해주는 특별한 이 공간 속에서, ‘존’은 자신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헤아릴 수 없는 생(生)들을 느낀다. 잊어버린 순수함, 소중한 기억, 누군가의 에피소드, 한 번쯤은 귀에 들어왔었던 익숙한 소리를.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에서 죽은 자들의 것이지만 숨을 쉬며 살아있는 것들을 통해, 어둠 속의 얇디얇은 희망을 배운다. 선을 긋는 인생의 문제, 수많은 사람의 얽히고 얽힌, 굵고 얇은 선들을 피해 나만의 색깔로 빛나는 한 획을 그어 나가기 위한 희망 말이다.

 또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입 베어 물던 신선한 과일들을 떠올리게 하는 몇 토막의 글은 짧지만 강한 인상으로 남는다. 뒤이어 그 과일들은, 낡디낡은 어떤 사물이 되고, 기억 속에 존재하는 특별한 사건을 떠올리는 매개체가 된다. 나의 모든 오감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기억 창고가 된다. 소설의 끝, 누군가의 입을 빌려 "네가 찾아낸 것만을 쓰렴"이라고 답하는 장면까지의 여정은 분명 작가가 소유하는 기억이지만, 어떤 통로를 거쳐 나에게로 들어온다. 누군가의 인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찌릿한 감정을 선물해준다는 생각과 함께.

 

 
 
 

 

Written by. 리니

영미 소설/ 기억과 공간, 흔적들

소장하고 있는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하얀 나비 두 마리가 어머니 머리 위를 맴돌았다. 이만한 높이의 수도교 위에는 나비가 꼬일 만한 게 별로 없으니 어머니를 따라 온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처음은 탄생이라 생각하지 않을까요? 내가 물었다.

그게 일반적인 오류지.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너도 그 함정에 빠졌구나!

그러니까 모든 게 죽음으로부터 시작됐다는 말씀이세요?

바로 그거야. 그리고 탄생이 뒤를 따랐어. 탄생이 일어난 건 - 그게 탄생이 있는 이유인데 - 더도 덜도 아닌 처음에, 그러니까 죽음이 있은 후에, 손상된 것들을 고칠 기회를 제공받았기 때문이야. 그게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란다. 존. 고치려고.

하지만 진짜로 여기에 계신 건 아니잖아요?

너는 어쩌면 그렇게 멍청할 수 있니? 우리 - 우리 말이야 - 우리는 모두 여기 있는 거야. 너나 살아 있는 다른 사람들이 여기 있는 것처럼. 너희와 우리, 우리는 망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고치기 위해 여기 있는 거란다. 우리가 생겨난 이유는 바로 그거야.

생겨났다고요?

존재하게 됐다고.

아무도 뭔가를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뭐든 원하는 대로 선택하렴. 네가 할 수 없는 건 모든 것을 희망하는 거야. (59쪽)


책을 돌려줄 때면 그와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가 긴 인생을 살아오며 읽은 것을 그만큼 나도 더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책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 한 책이 다른 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도 많았다.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에서의 밑바닥 생활』을 읽은 후엔 『카탈로니아 찬가』가 읽고 싶어졌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려준 사람도 켄이었다. 아물지 않은 상처지. 그가 말했다. 그 상처를 지혈시킬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지혈`이라는 말을 직접 듣기로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술집에서 당구를 치던 중이었다. 당구봉에 초크 바르는 거 잊지마.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94쪽)

내가 글쓰기를 처음 배운 건 지금 마드리드 리츠 호텔 라운지에 앉아 파슬리로 장식한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타일러 선생님의 녹색 오두막에서였다. 글자를 그리는 법은 유치원에서 이미 배운 후였다. A부터 Z까지 전부. 그 글자들은 사마귀나 모반이나 가짜 점처럼, 내가 좋아했던 릴리 선생님의 날렵하고 예쁘고 둥글둥글한 몸의 일부였다. 하지만 그린헛에 간 첫날 타일러 선생님이 지적했듯이, 글자를 그리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달랐다. 글쓰기에는 철자법, 직선, 띄어쓰기, 적당한 기울기, 여백, 크기, 가독성, 펜촉을 깔끔하게 다듬는 것, 잉크가 절대로 번지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연습장마다 예법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된다. (150쪽)



우리를 한데 묶어준 건 뭐였을까? 피상적으로 볼 때는 호기심이었다. 우리는 나이를 포함한 거의 모든 것이 어떻게 감춰 볼 도리 없이 달랐다. 우리 사이에는 처음으로 하는 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를 한데 묶어준 건 같은 슬픔에 대한 말 없는 이해였다. 자기 연민은 없었다. 내게서 그런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그녀는 그걸 뿌리채 뽑아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앞에도 말했지만 나는 그녀의 확신을 사랑했고, 그것과 자기 연민은 양립할 수 없었다. 보름달을 보고 미친듯이 짖어대는 개의 울부짖음 같은 슬픔.

이유는 달랐지만 우리 둘은 희망을 품고 살기 위해선 스타일이 필요불가결하며, 사람이란 희망을 가지고 살거나 아니면 절망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중간이란 없었다.

스타일? 어떤 가벼움. 어떤 행동이나 반응을 배제시키는 부끄러움. 어떤 우아한 제안.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떤 멜로디를 기대할 수 있으며, 때로는 찾을 수도 있으리라는 가정. 하지만 스타일은 희박하다. 그것은 안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찾아 나선다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스타일과 패션이 같은 꿈을 공유할 수는 있어도, 그 둘은 서로 다르게 창조된다. 스타일은 보이지 않는 약속이다. 그것이 인고의 기질과 세월을 대하는 무던한 자세를 요구하고 키우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스타일은 음악과 매우 흡사하다. (1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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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갈 김원일 소설전집 9
김원일 지음 / 강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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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갈』 김원일 / 강

독을 품고 비극에 대항해 온 사람들

 

 

 

 ▒ 책을 읽고 나서.

 김원일 작가의 가장 유명한 작품 『마당 깊은 집』도 읽지 않은 채, 나는 작가 소설 전집의 이 작품을 대뜸 구매했었다. 전집에 수록된 목록도 자그마치 28권이나 되는데, 언젠가 우연히 발견해서 홀린 듯이 책장에 넣어둔 책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다시 눈에 들어와 펼쳐 들었다. 압도적인 현대사, 장엄한 비애, 책 뒤쪽에 나와 있는 짤막한 해설에 저절로 수긍이 가는 작품이었다. 한참이나 오래전에 활약하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현대사'와 삼대의 이야기라는 이야기만 듣고 현대 작가인 '천명관'의 『고래』를 떠올렸을까? 어찌 됐든 그 작품 또한 나에게 큰 인상을 주었기 때문일지 모르겠지만, 어느샌가 옛 작가들의 작품들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리고 작품을 읽은 후, 다시 한 번 한국의 오래된 작가들의 책들을 찾아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전갈』은 한 권의 책이라고 부르기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이야기들을 촘촘하게 엮어놓은 소설이다. 그 많은 이야깃거리를 어떻게 한 권으로 담아냈는지도 의문이었다. 한국사의 질곡을 아우르는 다양한 사건들이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버지, 그리고 조부의 삶에 걸쳐 등장하며, 이는 세 개의 소설 속 액자 속에 사르르 녹아든다. 조직 생활로 콩밥 먹고 나온 주인공 '강재필'이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이어 자신의 아버지 '강천동'의 기막힌 삶을 드러내고, 어쩐지 끈질기게 추적하고 싶어지는 조부 '강치무'의 일대기를 재구성하는 식이다. (작가는 감방에서 나온 이후 할아버지의 일대기를 기록으로 보전하는 것에 몰두한다) 실제로 마주하지도 못한, 아니 사진에서만 언뜻 보았던 조부의 삶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주인공의 행동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부터 기인한다. 한 여자를 강간하여 온 가족을 협박함으로써 신붓감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주인공 '강재필'이 태어났다. 개를 야만적인 방법으로 훔치고 학대하여 팔아 자신의 사업으로 선택했고, 나중엔 불의의 사고로 손마저 잃게 되어 무력한 삶을 살게 된다. 폭력과 포악한 행동들로 살아간 아비의 인생을 보고 자란 주인공은, "네 아비 때문에 망친 인생인데 너까지 이러기냐."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오히려 더욱 방탕한 생활을 즐기면서 살아왔고 어머니와 관계된 정신병 또한 안고 살아간다.

 ​'강재필'이 아비에 대해 하는 회상은 모조리 증오와 트라우마로 비열한 시선을 건네지만, 조부에게만큼은 왜인지 모를 경외감이라는 감정을 내보인다. 마치, 아버지를 부정하고 또 다른 아버지를 찾는 것처럼. 마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아비에게 돌리고, 조부의 기록으로 갱생의 희망을 품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것이다. 그렇게 소설 속 한 액자 속에, 주인공이 다양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재구성한 할아버지의 삶이 등장한다. 일제강점기에 두만강을 넘어 운동가로 활동했지만, 수많은 기록을 통해 얻어낸 그의 인생은 그리 녹록지만은 않았던 것을 '강재필'은 알게 된다. 조부는 독립군으로 활약하기도 했지만, 일본군 초소에서 마루타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고, 어떤 의도 없이 충동적으로 빨치산에 들어가기도 했고, 아비의 삶처럼 마지막에는 무기력하게 살았다. 삶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하는 크나큰 권력과 폭력 앞에 조부 또한 멀쩡히 살아남진 못 했던 것이다. "사람 한평생이 부평초(개구리밥)"​과 같아 삶과 죽음이 여반장"이라는 책 속의 말은 천신만고와 같은 삼대의 삶을 대변해준다.

 '전갈'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소설은, 어떤 책보다 불편한 감정으로 다가온다. ​폭력, 학대, 강간, 마루타 (인체실험), 조직 등의 소재들을 자세한 이야기로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어찌할 수 없이 눈앞이 캄캄해지고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지만, 그런 불편함을 온몸으로 안고 살아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역사의 우울 속에서 개인 또한 희생되고 말았던 비극, 그리고 삼대까지 이어져 왔던 슬픔과 운명……. 단단한 갑옷을 입고 독을 품고 있는 전갈처럼, 비극 앞에 나름대로 맞설 수 없었던 그들의 삶을 보고, 소설의 끝에는 어쩐지 코끝이 아릴 슬픔이 느껴졌다. 그 운명에 흔들렸던 주인공에게 '할아버지의 일대기'를 기술함은 삶을 갱생할 수 있는 희망이었고 구원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조부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지만, 아비의 삶을 회상하고 조부의 일대기를 기술하는 과정을 통해 '결과보다도' 더욱 값진 빛나는 희망을 안게 되었을 것이라고 희망해본다.

엄마 무덤에 절하며, 불효자를 용서하란 말은 읊기 싫었다. 전과자로 전전해온 내 꼴을 안 보고 가신 게 차라리 잘된 일인지 몰랐다. 엄마 무덤에 참예를 마치고 나는 묏등에 박힌 잡초를 뽑았다. 가족이란 단어조차 내겐 그 연상 작용이 슬픔과 분노를 환기시키는 질료이지만, 엄마 무덤은 당신의 생전 모습과 닮아 볼썽사납게 초라했다. 엄마 무덤에 번듯한 묘비라도 세워드리고 싶은 마음인데 어디에 묘지 관리를 의뢰해야 할지 방책이 서지 않았다. (...) 나는 무덤 옆에 비켜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뿌리엉겅퀴 잔가지가 바닷바람에 떨고 있는 저 멀리로 둥그렇게 반원을 그린 동해가 활짝 펼쳐져 있었다. 눈부신 양광 아래 드넓은 바다는 잔잔했다. 잘게 부서져 반짝이는 너울들이 눈에 시었다. 갯뜰도, 형제섬도, 꽃바위도 눈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북쪽 해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49p)

시간에 매인 몸이 아닌데도 나는 어쩔 수 없이 하룻밤을 울산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루를 지체하게 된 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삼 년 만에 바깥세상으로 나오자 누추한 기억의 창고인 출생지를 찾은 탓에 기분이 하강 국면으로 떨어졌다는 이유를 댈 수 있다. 밀양 땅을 밟고 싶지 않다는 잠복된 거부반응이 지체하게 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 내 심리 상태를 표현하기에는 미흡하다. 묵은 상처를 긁을 때 다시 촉발된 가려움증으로 상처의 화농을 박박 긁어도 성이 안 차는 그런 덧남이랄까. 내 마음이 울증의 바닥으로 추락했다. 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게 지상에서 벌써 사라진 아비와 엄마가 남기고 간, 머릿속에 송진처럼 붙은 기억이 가역반응을 일으킨 탓이라 볼 수밖에 없다. 그 기억에서 벗어나려는 안간힘이 오히려 어린 시절을 재생시켜 들쑤셨고, 서른다섯 해 생애와 뒤죽박죽 섞이더니 분열증을 일으켰다. 슬픔과 분노가 배출구를 찾을 수 없자 탈진 상태라 걷기조차 힘에 부쳤다. 빈곤이 우울증을 유발한다는 말대로, 빈곤과 공포 자체였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나를 자실케 한 셈이다. (86p)

가리실은 하늘 아래 살기 좋은 고장으로, 태평성대를 누렸다고 다들 말했어. 철 따라 꽃이 피고 지고, 호랑이, 곰 등 뭍짐승들이 살았고, 긴긴 동절기에는 집채만큼 눈이 쌓이면 옆집과는 굴을 뚫고 내왕했지. 외지 사람 보기는 이따금 들어오는 포수가 고작이었어. 하늘 가리는 잣나무, 봇나무 숲길을 뚫고 산 넘고 물 건너 회령 읍내까지가 사십 리라. 조선이 망했다는 말이 산골로 흘러들어왔을 때, 어른들조차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대. 밭농사 짓고 사냥해서 사는 무식쟁이 산골 사람들이라 그런 걸 안다고 형편이 달라지리라 생각을 못한 게지. 그러나 그런 바깥 사정이 첩첩한 산골까지 영향을 미쳐 천지개벽 시대를 맞게 되었지. 마을에 당꼬바지 입은 일본 병정이 말을 타고 나타난 게 그즈음이야. 일본 사람들이 그 산골까지 들어와선 조선인 인부를 부려 목재와 석탄을 실어 나르는 철도를 깐 게라. 부근에 광산이 생기고, 회령 가는 철길이 깔리게 되니 낯선 타지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더군. (299p)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무엇보다 용병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싶게, 주어진 운명을 뿌리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할아버지가 그랬고, 아비 역시 발버둥쳤으나 주어진 운명의 올가미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나 역시 남들처럼 평탄한 길을 순조롭게 걷지 못했으니, 내리막 돌멩이길만 내 앞에 펼쳐졌을 뿐이었다. 저 아래쪽에서, 네가 오올 길은 이쪽밖에 더 있냐고 소리치는 아비의 환청이 기차 레일의 마찰음과 진동에 섞여 따라왔다. 뜬금없이 아비가 왜 갑자기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3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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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의 핀볼 -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소설,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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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의 핀볼』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사상사

희미한 출구를 찾아가는 하루키의 여정

 

 

 

 ▒ 책을 읽고 나서. 

 

 생각만 해도 얼굴이 발개질 정도로 창피한 일이 있었던 날, 별것도 아닌데 눈물이 죽죽 흘러서 끅끅대며 울었던 날, 허공에 붕붕 떠 있는 듯 상실감을 느꼈던 날. 언젠가 그날의 축 처진 기분은 어떻게 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는 "지나고 나면 괜찮겠지"하는 말을 믿지 않았지만, 지나고 나니 정말로 그 기억들이 꿈처럼 사라진 듯한 느낌이다. 물론 조각조각 깨어진 기억들은 아직도 머릿속에 존재하지만, 그 존재가 무시무시하게 모나고 뾰족하지는 않게, 두루 뭉실하게 떠다니고 있는 느낌이다. 나는 아직은 젊으니 (젊...젊은 거겠지.) 그런 일들이, 사건들이 젊을 때의 방황과 어리숙한 감정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답답함이 지금은 조금 흐려져 있는 것을 보면, 나는 하루키가 말한 '입구'와 '출구'의 경로를 시간을 통해 차츰차츰 다듬어 통과한 것일까. 나의 '입구'와 '출구'는 어떻게 이어져 있었을까.

 

 

 『1973년의 핀볼』은, 상실의 아픔을 겪은 주인공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을 견뎌내고, 기가 막힐 정도로 평범하지만 독특한 일상을 헤매고 있었던 이야기다. 마치 과거를 절대 손에서 놓지 않으려는 듯 핀볼 기계를 찾아 헤매는 주인공, 존재와 이름 따위가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쌍둥이 자매, 따뜻한 대화를 나누는 곳 '제이스 바', 『노르웨이의 숲』을 떠올리게 하는 '나오코'의 존재까지. 어딘가 모호한 이야기의 흐름과는 관계없이 이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자리를 깊게 새겨놓고 있다. "모든 사물에는 반드시 입구와 출구가 있어야" 했고, 모든 일에도 입구와 출구가 있어야 했지만, 주인공은 오로지 핀볼에만 집착한 채 도돌이표 같은 일상을 걷고 있었다. 그는 황홀했던 '핀볼과의 짧은 밀월 기간'을 뒤로 한 채 출구이자 '끝'을 찾아 나서야 했다. 잊지못할 따스한 추억을 방황하는 과거는 '나의 손으로' 잡아 둔채, 다시 걸어가야 했던 것이다.

​당신 탓이 아니야,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잘못하지 않았어, 열심히 노력했잖아.

아니야, 하고 나는 말했다. 왼쪽이 플리퍼, 탭 트랜스퍼, 9번 타깃. 아니라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지. 하지만 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할 수 있었을 거야.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어,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무엇 하나 끝나지 않았어. 아마 언제까지나 똑같을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146p)

  그가 집착하고 있었던 핀볼은, 누군가에게는 또다른 물건으로 같은 의미를 지닐 것이다. 책, 전화기, 향기가 남은 옷, 사진, 앨범, 식물…… 그것들을 통해 무언가의 흔적을 찾는다. 일종의, 조용한 몸부림이며 추적이다. 그러나 현실을 견뎌낼 수 있는 법이 단지 이것 뿐이었을 것이다. 주인공이 출구를 찾았던 것처럼, 언젠가는 멈추게 될 추적이니까. 그리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와 비슷한 행동을 반복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사실상 독특한 듯 보이는 이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현재와 미래로 넘어가지 못하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감정의 출구를 찾지 못하는 어리숙한 젊은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적당히' 살아가는 어른 아이의 이야기일지 모르고, 하루키 자신이 겪었던 젊은 시절의 방황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허무를 견딘 채 살아간다. 과거와 현재, 미래 어디선가 출구를 만나기를 기대하면서. 

  여담으로, 많은 사람이 느끼겠지만 『1973년의 핀볼』은 다른 하루키의 장편소설들을 떠올리게 하는 시작점과도 같은 작품이다. 다른 초기작들과 더불어……

 어딘가 뭉뚱그려진 이야기가, 걸러지지 않은 잔잔한 이야기의 색다른 느낌이 좋다.

 

당신이 핀볼 기계 앞으로 계속 고독한 소모전을 벌이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은 프루스트를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어떤 사람은 자동차 전용 극장에서 여자 친구와 <진정한 용기>를 보면서 진한 애무에 열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시대를 통찰하는 작가가 되고 혹은 행복한 부부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핀볼 기계는 당신을 아무 곳에도 데려가지 않는다. 재시합 불을 켤 뿐이다. 재시합, 재시합, 재시합......, 마치 핀볼 게임 그 자체가 어떤 영겁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도 생각된다. 영겁성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걸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그림자를 추측할 수는 있다. 핀볼의 목적은 자기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변혁에 있다. 에고의 확대가 아니라 축소에 있다. 분석이 아니라 포괄에 있다. (40p)

한 계절이 문을 열고 사라지고 또 한 계절이 다른 문으로 들어온다. 사람들은 황급히 문을 열고 이봐, 잠깐 기다려, 할 얘기가 하나 있었는데 깜빡 잊었어, 하고 소리친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다. 문을 닫는다. 방 안에는 벌써 또 하나의 계절이 의자에 앉아서 성냥을 켜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 잊어버린 말이 있다면 내가 들어줄게, 잘하면 전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 하고 그는 말한다. 아니, 괜찮아, 별로 대수로운 건 아니야, 하고 사람은 말한다. 바람 소리만이 주위를 뒤덮는다.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하나의 계절이 죽었을 뿐이다. (53p)

등대에 도착하면 쥐는 제방 끝에 앉아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에는 붓으로 그은 것 같은 가느다란 구름이 몇줄기 흐르고, 사방은 온통 푸른 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푸른색은 끝없이 깊었고, 그 깊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년의 다리를 떨게 만들었다. 그것은 외경과도 비슷한 떨림이었다. 바다 내음도 바람의 색깔도 모든 것이 놀랄 만큼 선명했다. 그는 시간을 들여 주위의 풍경에 조금씩 마음이 익숙해지게 하면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깊은 바다로 인해 완전히 단절되어 버린 그 자신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하얀 모래밭과 방파제, 푸른 소나무 숲이 짓눌린 것처럼 낮게 퍼져 있었고, 그 뒤쪽으로는 검푸른 산들이 하늘을 향해서 우뚝 솟아 있었다. (71p)

어느 날 무엇인가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뭐든 좋다, 사소한 것이다. 장미 꽃송이, 잃어버린 모자, 어릴 때 마음에 들어하던 스웨터, 오래된 진 피트니의 레코드....... 이미 어디로도 갈 곳 없는 하찮은 것들이다. 이틀이나 사흘 정도 그 무엇인가는 우리의 마음을 방황하다가 본래의 장소로 되돌아간다...... 암흑. 우리의 마음에는 우물이 여러 개 파여 있다. 그리고 그 우물 위를 새가 지나간다. (1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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