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의 운동화
김숨 지음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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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동화였습니다. 타이거(TIGER)라는 로고가 쓰인, 270mm 사이즈의 흰색 운동화였습니다. 공장에서 수십 켤레, 아니 수백 켤레가 넘게 만들어진 내 쌍둥이 운동화들은 많은 이들에게 팔려나갔습니다.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비슷한 운동화를 신었습니다. 내가 왜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냐고요. 세상에 수많은 흰색 타이거 운동화는 그 성질이 변해갔습니다. 시간과 상황과, 신는 사람에 따라서 말이지요. L의 발에서 20여 년 인생을 함께하면서 나는 진정으로 'L의 운동화'가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1987년,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쓰러진 내 주인의 발에서 벗겨져 한 짝을 잃었습니다."

 

 ​아마도 운동화가 증언을 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허황된 상상이지만 그리 허황되기만 한 상상은 아니다. 실제로 L의 운동화는 살아남았고 존재로서 증언을 대신하였다. 슬프지만, L이 살았던 생애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끝끝내 부서질 때쯤 한 복원가의 손을 거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운동화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이한열 열사 28주기를 기념하는 행사였다. 100여 조각으로 부서진 우레탄 밑창, 열화(劣化)가 일어나 끈적이고 깎이고 해진 운동화를 어떻게 복원해내느냐에 대한 어려운 결정이 복원가에게 맡겨졌다.

 

 

L의 운동화를 최대한 복원할 것인가?
최소한의 보존 처리만 할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둘 것인가?
레플리카를 만들 것인가? (21쪽)

 

 

『L의 운동화』는 그 과정을 소설로 담았다. 우리는 복원된 미술품이나 물품을 바라볼 때 어떤 생각을 하는가? 복원되기까지의 다난한 과정을 생각하며 그저 짧게나마 감탄할 뿐이다. 선 하나, 조각 하나하나, 전문가가 아니라면 그 정도까지의 생각에 미치질 않는다. (때로는 그것이 복원되었다는 사실조차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과정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복원의 시점, 복원의 상태, 복원의 의미, 그 모든 것들을 함께 고민한다. 소설은 '마크 퀸'이라는 작가가 5년 동안 자신의 피를 뽑아 냉동고에서 형태를 유지하게 만든 「셀프(Self)」라는 자화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왜 '김숨' 작가는 'L의 운동화'에 관해 쓰면서 이 작품을 생각했을까. 청소부가 냉동고의 전원 코드를 뽑아 버려 훼손되었다가 다시 응고된 (그 흔적을 지니게 된) 이 작품은, 'L의 운동화'라는 특별한 사물을 복원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고민할 '복원의 의미와 가치'를 시사한다.

 

소설 속에서 복원가는 정체불명의 냄새를 맡는다. 화학약품 냄새도 아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 어떤 냄새"를 작업실에서 똑똑히 느낀다. 마치 "사체가 썩고 부패하는 냄새"에 가깝다고 그는 표현한다. 죽어가는 운동화를 살려내는 순간, 냄새는 사라진다. 기성품이자 개인의 '사적인 물건'이었던 운동화는 비로소 '시대의 상징이자 유물'이 된다. 잘 벗겨지지 않기 위해 L만의 방식으로 꽁꽁 묶었던 운동화가, 최루탄 가스와 먼지를 머금은 운동화가, 증언이자 기록이 된다. 그리고 이는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언급되면서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기억은 신발에서 시작된다 (223쪽)", 그리고 또 다른 기억은 이 책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 이 책의 인세 일부는 이한열기념사업회에 기부된다고 합니다.

 

 

 

 

 

 

80쪽,
L은 걸을 때 왼발에 더 힘을 주었을까, 오른발에 더 힘을 주었을까? 쫓기듯 재게 걸었을까? 보폭을 크게 해 성큼성큼 걸었을까? 걸을 때 발가락에 더 힘이 실렸을까, 뒤꿈치에 더 힘이 실렸을까? 어릴 때 어머니는 연년생인 형과 내게 유니폼처럼 똑같은 옷을 사주고는 했다. 한날 한시에 똑같은 옷을 사 주는데도 형의 옷이 번번이 먼저 해지는 것을 나는 의아해했고, 습관뿐 아니라 성격과 기질이 그 사람의 옷과 신발과 가방 같은 물건에 고스란히 기록된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은 그 개인의 기록물이기도 하다는 걸.

100쪽,
내가 복원해야 하는 것은, 28년 전 L의 운동화가 아니다. L이 죽고, 28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버틴 L의 운동화다. 1987년 6월의 L의 운동화가 아니라, 2015년 6월의 L의 운동화인 것이다. 28년 전 L의 발에 신겨 있던 운동화를 되살리는 동시에, 28년이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28년이라는 시간을 바꾸어 말하면 고색(古色)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물을 복원할 때 고색을 살리는 것은 특히나 중요하다. 조형물에서 시각적으로 감지되는 세월의 흐름, 시간의 흔적이 고색이다. 인간이 고색을 선호하는 것은 영원성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중세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황색의 바니시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영원성을 추구하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무한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심이.

110쪽,
L의 운동화를 그대로 두는 것이, 운동화를 신화화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L의 운동화는 시위 현장에서가 아니라 보관 과정에서 파손되었다.
L의 운동화가, L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L을 집어삼켜서는.

194쪽,
나는 한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L의 운동화 끈을 풀 것인지, 맑 것인지. L의 운동화를 내 작업대로 가져온 지 두 주가 지나도록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L의 운동화 끈은 독특한 방식으로 묶여 있다. L의 운동화를 예술 작품이라고 가정할 경우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끈이다.
나는 끈을 풀 자신은 있지만, 묶을 자신은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L이 묶은 방식 그대로 묶을 자신이.

254쪽,
"아직까지는 쉰한 분이 살아 계시지만 다들 연세가 있으시니까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시겠지요? 한 분, 한 분 그렇게 세상을 떠나, 한 분밖에 살아 계시지 않는 날이 오겠지요? 단 한 분 밖에 살아 계시지 않는 날이…… 그리고 결국 단 한 분도 살아 계시지 않는 날이 오겠지요? 그분들이 다 돌아가시면 누가 증언을 할까요?"
그래서 기록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을 나는 구태여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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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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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갈 수 있는 남다른 친화력을 가진 사람을 보면 부럽다. 그래도 저 사람에게도 스트레스가 있겠지, 하는 볼멘소리로 포장하고는 있지만, 분명히 이건 부러운 마음이다. 내향적인 사람은 목소리가 작거나 어떤 상황에도 소심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만나는 자리에서 외향적인 사람과 달리 '에너지'를 빠른 속도로 뺏긴다고 했던가. 그런 점에서 나는 지극히 내향적인 사람이라서,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눠야 하는 자리에선 되레 피곤함을 느낀다. 그런 내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읽게 될 줄은 몰랐다.

 ​양귀자 작가는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인간상을 그려왔다. 그의 대표작인 『원미동 사람들』도 '사람'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라는 소재는 그의 문학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듯하다. 그러나 이 '인물 소설'이라는 것은 여타 소설과는 특이하게 다른데, 하나의 인간과 그의 인생을 그리는 것도 아닌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권에 모두 모아놓고 있다는 것이다. 단행본 한 권의 네다섯 페이지 될만한 짧은 글들이 한 아름 묶여 있는 이 책에는 남녀노소 가지각색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그득하다. '모든 대화를 군사적으로 변용시키는 박영국 씨', '버릇처럼 신도림역에서 폴짝 뛰어내려 버린 양민호 씨', 그리고 이름을 거론하진 않지만, 무척 특이하고 무척 재미난 이들, 택시 운전사, 시인, 동네 예술가, 어머니, 아버지 ……. 그들을 그리는 작가의 시선은 아주 따뜻해서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재미있는 건 이 사람들에 대한 글들이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에서 무척 자유롭다는 점이다. '인물 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분명 상상이 가미되었거나, 온통 허구이거나 할 테지만, 어쩌면 이 책은 소설의 탈을 억지로 입힌 것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에세이'라는 느낌이 진하게 나기도 한다. 어쩌면 자전적 소설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까. 짧은 글들에서 언뜻언뜻 드러내는 화자의 신상에 주목한다면, '에세이'와 '소설'에서 줄타기하는 소설의 참 재미를 느낄 수 있기도 하다.

 사실은 물어보고 싶다. "양귀자 선생님, 이 사람들 실제로 있는 것 아니에요? 진짜 경험한 이야기 아니에요?" 그러나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은 작가는 실제로 길을 걸으면서, 세상을 걸으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힘이 되는 무엇을 얻었을 것이란 사실이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관찰하는 눈이 아주 깊다는 사실도.

​ "언제, 여기,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일까, 그 붉은 목단꽃 이불 밑에서 하룻밤 짧은 꿈을 만지다가 다시 환한 세상으로 나갔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95쪽, 아슬아슬했던 시절, 목단꽃 이불 밑에 숨은 사연)​

 책의 문장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하니, 또 작가의 글에 폭 잠겨 들게 된다. '붉은 목단꽃 이불 밑에 숨은 사연'과 삶에 대한 질김을, 시인의 주파수를, 이야기가 스르르 들어와 소설이 되는 순간을 말하는 그 문장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가능하면 모두 다 적어 자랑하고 싶지만, 책의 문장들은 이상한 소유욕을 발동시킨다. 내가 만약 한 편의 글을 쓸 수 있는 능력과 여력이 된다면, 정말이지 이런 글을 쓰고 싶다.

 

 

88쪽, 아슬아슬했던 시절, 목단꽃 이불 밑에 숨은 사연
아마도,더듬어 보자면, 푸른 비단에 구름처럼 풍성한 붉은 목단꽃이 수놓아진 이불이었을 것이다. 이불깃은 빳빳하게 풀 먹인 광목이었으며, 바늘이 누비고 간 실뜸의 간격은 자로 잰 듯이 정확했었다. 붉은 목단꽃 이불의 그 홑청은 유난히도 자주, 장대로 곧추 세워놓은 빨랫줄에 널려 깃발처럼 펄럭이곤 했었다. 풀 먹인 그것을 자근자근 밟아대는 심부름도 참 많이 했었다. 잘 개킨 홑청 위에 옥양목 수건을 깔고, 그 위에 서서 나는 책을 읽었다. 책에 빠져 있다가 문득 내려다보면 밟아야 할 풀 먹인 홑청은 저만치 있고, 내 작은 발은 맨 방바닥만 헤매고 있었는데.

105쪽, 우리를 견디게 하는 것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는 내가 보호해드려야 할 지경으로 늙어버린 어머니의 장탄식을 듣고 나면 나는 불현듯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기운이 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괜히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말하고 싶거나 어깨가 빠지는 듯이 아프다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마음까지 불끈 솟아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이 사십을 앞두고 철이 없어도 유분수지 노모의 마음을 아프게 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철이 좀 든 나는 대신 이렇게 말함으로 해서 조그만 효도를 하기는 한다.
"엄마, 인절미 구워 먹을까요? 엄마가 구워주면 더 맛있더라."
그러면 허리 굽은 내 어머니는 당장에 얼굴이 환해지면서 부엌으로 달려가시는 것이었다.

116쪽, 책 사는 사람들
예전과는 달리 현대의 빛나는 과학문명은 고리타분한 독서 말고도 몰두할 수 있는 대상을 얼마든지 많이 만들어내고 있다. 영화며 비디오 또는 컴퓨터게임 등, 독서가 줄 수 있는 은은한 향기에 비하면 현대의 오락들은 너무나 강렬해서 한 권의 책이 그 강력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선택되어지는 것은 차라리 경이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런 까닭에 책을 펴내는 출판사는 늘 전전긍긍이다.


152쪽, 그 여자의 고정관념
긴 밤을 지새우고 났을 때, 동쪽 창에 발갛게 번져오는 햇살을 보았을 때, 그녀는 문득 동아줄 같은 삶의 질김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이란 것은 하루도 빠짐없이 잘도 찾아오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망연히 누워 있는데 이윽고 부지런한 이웃의 비질 소리, 아침잠 없는 갓난아이의 칭얼거림, 또한 근심 없는 사람들의 청명한 말소리들이 간단없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 살아있음은 뭐랄까, 지루한 반복 외 그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그래도 밝음은 동시에 희망 같은 것을 안겨 주기도 하였다.


186쪽, 꽃 지는 누이 - 들어가면서
제아무리 이야기 가닥이 많고 기둥 줄거리가 탄탄한 소설이라 해도 그것의 시작은 미미한 징후, 한 순간의 분위기에서부터 일구어진다. 현실의 그 미미한 징후와 찰나의 느낌은 마음속으로 들어와 오래도록 기척을 내며 꿈틀거린다.
나는 가만히 기다린다. 마음속에 터를 잡은 그것들이 저희들끼리 부딪치며 반죽이 되고 이스트 넣은 밀가루처럼 부풀어 오르기를, 그리하여 나를 충동질하기를. 여기 모인 이야기들은 말하자면 미미한 징후에서 하나의 소설로 가는 중간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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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카페의 노래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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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시작과 끝은 숱한 인생사와 책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그 감정은 어떤 사랑이든 비슷하다. 시작엔 설렘이 함께 하고, 끝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강도는 다를지라도 어느 정도의 환멸이 함께 한다. 그래서 나는 사랑의 시작과 끝을 다룬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전에 읽었던 여러 권의 책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별여행』 같은 책들을 말이다. 이들을 읽으며, 책 속의 사랑이 만들어낸 감정의 곡선을 그려보면, 그 시작과 끝은 비슷한 지점에서 머무르는 것 같다.

 그러나 사랑의 형태는 어떠한가? 인생사에서도, 인생을 담은 책 속에서도 너무나 다양해서 딱 한 가지로 정의 내리기 힘든데, 『슬픈 카페의 노래』의 사랑은 유독 기이하다. 6척 장신의 독하디독한 여자, 카페 주인 '미스 어밀리어', 그리고 그의 옛 연인 '마빈 메이시', 어느 날 찾아온 꼽추 '라이먼'. 그들의 사랑에 완전함은 없다. 복잡한 외사랑이다. '미스 어밀리어'는 우연히 만난 '라이먼'을 챙겨주며 사랑하게 되고, '라이먼'은 폭력적이며 당당한 '마빈'의 모습을 보게 된 후 그를 동경한다. '마빈'은 복수심으로 가려져 버린 사랑 (혹은 집착)을 분명히 '어밀리어'를 향해 내보이고 있다. 그러나 "사랑을 주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별개의 세계의 속한다 (50쪽)" 고 했던가. 그들의 기괴하고 일방적인 사랑은, 그 별개의 세계가 만날 틈도 없이 불현듯 찾아왔다가 불현듯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세 가지 사랑은 고통과 파국으로 남는다. 마을의 따뜻한 사랑방과 같은 '카페'라는 공간은 이 모든 순간을 더욱 극적으로 보이게 한다.

 

 사랑의 끝을 처절하게 겪고 나서 문을 걸어 잠근 '미스 어밀리어'의 감정을, 누구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왜 그토록 작고 초라한 꼽추 '라이먼'에게 사랑을 느꼈는지, '라이먼'은 그녀의 사랑을 알지 못했는지 알지 못하는 척했는지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사랑의 속성이지 않은가. 작가는 덧붙인다. "표면에 드러난 사랑 이야기는 서글프고 우스꽝스러울지언정, 진정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는 사랑하는 사람, 그 당사자의 영혼만이 알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신 외에 그 누구도 이 같은 사랑, 아니, 다른 그 어떤 사랑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 (65쪽)" 고. 우리는 가끔 누군가의 사랑에 자의 혹은 타의로 관여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뭐라 하든, 당사자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온 우주이며, 당사자가 하는 선택을 적극적으로 막기도 힘들다. 그러니 사랑의 선택, 사랑의 고통은 모두 당사자의 것이다. '미스 어밀리어'의 사랑 때문에, 마을 공동체의 소중한 공간이 황량해질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22쪽,

미스 어밀리어의 술에는 무언가 아주 특별한 게 있었다. 혀 끝에서는 정갈하면서도 짜릿한 맛을 내고, 일단 배 속으로 들어가면 화끈한 기운이 오랫동안 몸을 훈훈하게 녹이는 것이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백지 위에 레몬 즙으로 메시지를 쓰면 글씨가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종이를 잠시 동안 불에 대고 있으면 글씨가 갈색으로 변해 그 내용을 분명히 알아볼 수가 있다. 위스키가 바로 그 불이고, 메시지는 한 인간의 영혼 속에 쓰인 글이라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어밀리어가 만든 술의 진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무심히 흘려버렸던 일들, 마음속 깊이 은밀한 구석에 숨겨져 있던 생각들이 불현듯 모습을 드러내고 마침내 이해가 되는 것이다.



45쪽,

그녀는 마치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고통, 당혹감, 그러면서도 불확실한 기쁨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평상시처럼 그렇게 입을 굳게 다물고 있지도 않았고, 종종 침을 삼키기도 했다. 피부는 창백해진 듯했고,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큰 손에서는 진땀이 나는 듯했다. 그날 밤 그녀의 표정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 눈은 피안을 향하고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50쪽,

사랑이란 두 사람의 공동 경험이다. 그러나 공동 경험이라 함은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을 주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 속한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람의 마음속에 오랜 시간에 걸쳐 조용히 쌓여온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사랑을 주는 사람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65쪽,

이렇게 표면에 드러난 사랑 이야기는 서글프고 우스꽝스러울지언정, 진정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는 사랑하는 사람, 그 당사자의 영혼만이 알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신 외에 그 누구도 이 같은 사랑, 아니, 다른 그 어떤 사랑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

105쪽,

그들은 미스 어밀리어의 카페에 오기 전에 세수를 했고 카페에 들어올 때는 정중하게 문지방에 신발을 문질러 흙을 털었다. 카페에 앉아 있는 동안만은 단 몇 시간이라도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이 세상에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라는 쓰라린 생각을 조금은 떨쳐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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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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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 하나가 한 권의 책을 읽게 만든다. 희한한 일이다. 다음 장면이 궁금해서 못 견디게 만드는 문장은 아니었다. 오히려, 잔잔한 축에 속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다른 차원으로 가는 '투명한 막'처럼 읽는 이를 쏘옥 빨아당겼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어두컴컴한 터널을 통과해 자그만 빛으로 향해가는 기차를 타고, 나는 이제 그 한 문장을 통하여, 하얀 설국雪國 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여름에 설국을 읽는다니, 어찌 됐든 상상으로라도 은은한 추위를 맛볼 수 있으니 행운인지, 이 책을 겨울에 읽지 않은 것을 후회해야 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눈의 고장' 속에 머무르게 되었다.

 

 니키타 현의 온천 마을에 방문한 '시마무라'는 두 명의 여인을 본다. 이곳으로 다시 발걸음 하게 만든, 사랑하는 여자 '고마코'와, 유리창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운 처녀 '요코'. 소설은 그 여자들을 보는 '시마무라'의 시선을 철저하게 따라간다. 그 여자들에게 얽혀 있는 사연과 관계는 중요치 않다. 그저 담담하게 허무하게, 그의 마음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인상과 이미지를 그려갈 뿐이다. 그런 '시마무라'의 허무적 시선과 어조가, 다소 과하다 싶을 만큼 깊어지는 때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때이다. 새하얀 설경 속에 떠오른 여자의 붉은 뺨, 한기 어린 유리창에 떠오른 여자의 투명한 얼굴은 청결하고 아름답다. "이런 모습으로 자신이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13쪽)" 여자들은 전혀 알지 못하리라. 단지, 사랑에 빠진 '시마무라'의 눈 속에서 너무도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으로 존재할 뿐.

 

​ 그러나 그는 강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모든 게 흩어지고 말지 (102쪽)" 라는 그의 말처럼, 그들의 사랑도, 어쩌면 인생도 쓸쓸하고 결국엔 흩어져버릴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후반부, 그는 방 다다미 위에서 죽은 벌레들을 관찰한다. 이미 죽어서 바스락거리는 나방, 쓰러질 듯 살아나려 애쓰는 벌, 그는 곤충들을 보면서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곤충의 자연스러운 죽음 앞에서 존재를 생각한다. 사랑과 그 자신, 다분히 직업적인 의미밖에는 없는, 그가 쓰는 논평, '고마코'의 샤미센 소리. 현실에서 떠나온 이곳에선 아마 모든 게 흩어져버리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 일지도 모른다고. 두렵고도 아찔한 모든 것이 눈의 고장 속에서 사르르 사라져 버려도 뭐라 할 수 없는.

 

 지겹지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책의 첫 문장 이야기로 돌아가본다. 이 짧은 문장 하나는 마지막 문장까지 가는 그 과정을 통해야만 '명문장'이 된다고 생각된다. 청명한 하늘, 아득히 깊은 은하수의 이미지가 책 속에서 쏟아질 듯 흘러나오는 소설의 끝까지 읽어야만 알 수 있다. 눈물겹고 꿈같은 순간들을 담은 처음과 끝의 아릿한 맛을.

 

 

12쪽,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75쪽,
「플랫폼에는 들어가지 않을래요. 안녕」 하고 고마코는 대합실 안 창가에 서 있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기차 안에서 바라보니까 초라한 한촌(寒村) 과일 가게의 뿌연 유리상자 속에 이상한 과일이 달랑 하나 잊혀진 채 남은 것 같았다.
기차가 움직이자마자 대합실 유리가 빛나고 고마코의 얼굴은 그 빛 속에 확 타오르는가 싶더니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바로 눈 온 아침의 거울 속에서와 똑같은 새빨간 뺨이었다. 시마무라에게는 또 한번 현실과의 이별을 알리는 색이었다.

113쪽,
창문 철만에 오래도록 앉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이미 죽은 채 가랑잎처럼 부서지는 나방도 있었다. 벽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도 있었다. 손에 쥐고서, 어째서 이토록 아름다운가 하고 시마무라는 생각했다.



142쪽,
아아, 은하수, 하고 시마무라도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순간, 은하수 속으로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은하수의 환한 빛이 시마무라를 끌어올릴 듯 가까웠다. 방랑중이던 바쇼가 거친 바다 위에서 본 것도 이처럼 선명하고 거대한 은하수였을까. 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알몸으로 감싸안으려는 양, 바로 지척에 내려와 있었다. 두렵도록 요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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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치미교 1960
문병욱 지음 / 리오북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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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으로 검색하면 나오는 책은 『사건 치미교 1960』 단 한 권이다. 공식적으로는 그의 첫 작품이나 다름없지만, 예상보다 더욱 대담하고 능수능란한 작품이다 (물론 이것은 일반 독자의 개인적인 느낌일지도). 보통의 미스터리 소설은 스릴감이나 속도감이 돋보이기 마련이지만, 장면 속에 흠뻑 빠지는 이외에도 즐길 거리가 많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이답 스토리 공모전'의 최종 수상작답게, 이야기를 끌어가고 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할 말을 자연스럽게 꺼내놓는 '스토리 텔링'이 탁월한 소설이다.

 소설의 소재가 된 '백백교 사건'은 한국사의 실화이자, 미스터리나 스릴러의 소재로 많이 이용되는 사건이다. 일제강점기의 절망과 혼란을 틈타 사이비 종교를 창설하여 수많은 교인을 이용하고 심지어 살해까지 하였으며, 여성들은 교주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희생되기도 하였다. 작가는 이런 '백백교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치미교'라는 끔찍한 종교를 소설 속에서 탄생시켰고, 그 탄생의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그리고 교인들을 통한 세력 확장으로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지게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선 약간의 픽션을 더했다.

 '치미교'의 교주인 '해용'이 (이는 '백백교 사건'의 실제 교주 이름인 '전용해'와 비슷하다) 이 일제의 마루타 실험에 참여하였다는 전제로 기상천외한 일들을 펼치고, 그 얕은 지식을 이용하여 교인들을 협박하는 모습들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끔찍하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 의학계와 오묘하게 맞물리는 구성은 아주 흥미롭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버린 아버지와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교인이 되어 종교의 중심부로 들어가는 '상원'의 모습으로 소설은 더욱 박진감 넘치게 흘러간다. '상원'은 과연 그들을 구해내었을까.

 

​ 전쟁, 혹은 가장 어려운 시기의 '혹세무민(惑世誣民)'은 비단 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닐 것이다. 누구는 상술을 벌이고, 누구는 가장 궁핍한 이들을 꼬여 낸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또 다를까. '사이비'라 불리는 종교는 여전히 존재하며, 강매 혹은 다단계로 서민들의 부푼 희망을 이용해 삶을 짓밟기도 한다. 조금 더 가보자면 당장 지금의 일들도 많다. 연예계의 큰 가십이 터지는 순간, 가려지는 무서운 사실들은 그들이 얼마나 교묘한 방법으로 국민을 속이고 있는지 짐작게 한다. 『사건 치미교 1960』라는 작품의 여운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곧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게 한다.

 
 

29쪽,

의학이라는 건 지독히도 실체로의 파고듦을 기초로 하는 학문이라네. 치료를 위해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약을 개발하는 일도, 살을 찢고 암 덩어리를 도려내는 수술을 시행하는 행위도, 모두가 생명연장으로 향한 실체들이지.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근간과 근원을 잊어선 안 된다는 것이네. 의학은 단순한 장사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말일세. 만약 그렇게 되어버리면 인간의 생명에 숫자로 표시되는 가치를 적용하는 비극이 실현되고 말 테니까.



275쪽,

성훈은 참으로 무섭고 거대한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는다. 마치 별 볼일 없는 일상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듯 문장을 나열하는 식이다. 성훈의 어조와 어투는 설명을 시작하고 나서 끝을 맺을 때까지 짧지 않은 동안 한결 같다. 또한 설명 안에서 굳이 상원을 설득하려는 의도도, 혹은 위압적인 분위기도 일절 내비치지 않는다. 그래서 상원은 치가 떨린다. 단순한 두려움이나 분노가 아닌 안하무인에 인간백정이나 다름없는 족속들과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불쾌하기 짝이 없어서 치가 떨렸다. 더구나 해용은 성훈이 설명을 하는 동안 그 옆에서 교만과 우월감에 찬 얼굴을 해서는 암묵적으로 자신을 따를 것을 강요하는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300쪽,

이렇듯 자신의 책임은 전무하고 남의 허물만을 묻고 앉았으니 해결책을 찾기 위한 토의가 진행되기는커녕 근본적인 문제점마저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나마 보건복지부에서 병원균의 정체를 밝혀냄으로 해서 요란하기만 했던 치졸한 토의장이 잠시나마 소강상태를 맞을 수 있었다. 소강상태를 맞았다고 일컫는 근간은, 이들은 당장 눈앞에 닥쳐있는 사태만 어찌어찌 넘기고 나면 또 다시 경박하게만 입을 놀려댈 것이 여실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어쩌면 옛날 나랏일을 보았던 벼슬아치들로부터 유래된 말인지도 모르겠다. 백성의 본보기가 되어도 모자랄 판에 자기 그릇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꼬락서니라니. 예나 지금이나 그곳의 의지는 총명하고 올곧았던 인물들까지 졸부로 만들어버리는 마력이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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