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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ㅣ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황정은 (지은이) | 민음사 | 2010-06-25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남겨진 생각들
나는 이 소설에 어떤 말을 보태야 할까? 작가마저 그 무거운 뭉치들을 간결하게 풀어놓은 이 소설에, "소설이 나온 것이 그냥 고맙다"고 말하는 평론가님의 말에 뒤이어, 수많은 독자의 감탄 어린 글 다음으로, 어떤 말을 주절주절 달아야 할까? 황정은의 소설은 독특한 느낌, 모호한 느낌, 좋다는 느낌이 차례대로, 쉽사리 정리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까지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 모든 느낌을 제대로 표현하긴 버겁다. '나는 절대로 이런 문장들을, 생각 끄트머리조차 따라 할 수 없겠다'는 경외감이 섞인 자괴감과 더불어.
곧 공원으로 바뀌기 위해 철거될 전자상가에 사는 그들에겐 그림자가 뻗어있다. 따라가면 안 돼, 조심해야 해, 되뇌곤 한다. 그림자는 때론 자라면서 일어설 기미를 보이기까지 한다. 아마도 그건 아슬아슬한 삶에 비틀거릴 때 나타날 듯한, 조금 따라가면 끌려갈 수밖에 없는 그런 무시무시한 것.
두렵지만, 무서운 꿈을 꾸지만, 그들은 딸린 그림자를 뒤로 한 채,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애써 여기며 살아간다. 무정한 현실을 닮은 그림자, 그림자에 묻히지 않기 위해 다른 곳을 보려고 시도하며 담담하게 삶을 살아낸다.
같은 상가에서 일하는 '무재'와 '은교', 그들에게 그림자를 없애버릴 시원한 그늘은 '사랑'이다. (단순히 '아름다운 연애소설'이라고 칭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림자의 세계를 파괴할 희망으로 존재하는 것이 이 소설의 '사랑'이기도 하다. '사랑'이라고 딱 잘라, 한 번도 얘기하지는 않지만 짧디짧은 대화의 흐름 속에서 분명히 느껴지는 '선량함'과 '진심'이 은연중에 '사랑'을 가리키고 있다. '무재'와 '은교', 그들은 서로를 의지한다. 일반적인 언어의 통념을 부숴버리는 이상한 말장난 - 이를테면 "가마" (38쪽) 같은 -, "네"라는 무심하고도 짧은 대답 뒤에 숨은 위로의 무게에 그림자의 두려움을 잠시 잊혀둔다. 무거운 어둠과 같은 삶 속, 그들의 대화는 작가의 말 속의 "여전히 난폭한 이 세계에 / 좋아할 수 있는 (것)들"에 공감할 수 있을 만큼의 따뜻함이다.
'무재'와 '은교' 곁에 존재하는, 또 다른 사람들 - 여 씨 아저씨, 유곤 씨, 오무사 할아버지 - 의 이야기 또한 허투루 지나칠 수 없다. 작가는 세심하게, 또는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무척이나 '선량하게' 그들의 삶을 살포시 드러낸다. 말하자면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감각적인 건물이나 예쁜 골목에서, 수년 전 무너졌을 누군가의 슬픔을, 떠나지 못하고 땅속에 묻혀버린 그들의 마음을 작가는 '볼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그 손길은 거칠지 않고 조심스럽다. 조심스럽고 따뜻해서, '씨발'이 난무하던 『야만적인 앨리스씨』보다도 더욱 처연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어두운 잿빛의 그림자로 어두워진 삭막한 세계인데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위로가 된다는 것이다.
문장 속의 품은 무게 만큼은 무겁지 않은 문장들로 채워진 탓일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함께 '걷고 있는' 그들의 모습 탓이다.
겹치고 겹친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손을 잡고, 노래하면서…….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노래할까요.
Written by. 리니
나는 냉면을 좋아합니다.
그런가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39쪽)
요즘도 이따금 일어서곤 하는데, 나는 그림자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니까 견딜 만해서 말이야. 그게 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맞는 것 같고 말이지. 그림자라는 건 일어서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고, 그렇잖아? 물론 조금 아슬아슬하기는 하지.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게 되어 버리면 그때는 끝장이랄까. 끝 간 데 없이 끌려가고 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하여간에 말이지, 라면서 여 씨 아저씨는 서랍 속에서 드라이버를 꺼내 앰프 껍질에 꽂힌 나사를 돌리기 시작했다. (46쪽)
입이랄지, 검은 것 가운데 오목하게 들어간 조그만 구멍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가져와, 가져와, 라고 말하다가 이내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 말은 더는 말이 아니고, 이상한 방식으로 발성되며 발성 자체가 목적인 듯한 미미, 라거나 가가, 하는 소리일 뿐이었습니다. 며칠 전에 버려진 상자 같은 건 벌써 며칠 전에 어딘가로 사라졌으므로 도무지 가져올 수는 없다고 이모가 빌고 내가 빌고 마침내 둘이 엎드려서 빌어도 용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나는 마루에서 어머니와 그녀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림자는 이때쯤 검디검게 휘어져서 어머니의 몸을 빈틈없이 덮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걸 모르거나 상관없다는 듯 그림자를 내버려 둔 채로 이따금 입을 벌려 미미, 하고 가가, 하며 그림자의 말을 따라갑니다. (70쪽)
가동에서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는 나는 그 자리에 공원이 조성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넓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앉아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다. 작네요, 라고 멍하게 말하자 무재 씨가 빈 우유갑을 반으로 접으며 생각했던 것보다 좁아서, 놀랐다고 말했다.
여기에 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잖아요.
다 어디로 갔을까요.
하며 잔디밭 너머를 바라보았다. (111쪽)
은교 씨, 나는 특별히 사후에 또 다른 세계가 이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사람이란 어느 조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건, 어느 정도로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생에도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래 허망하니, 허망하다며 유난해질 것도 없지 않은가, 하면서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 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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