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사소한 구원 - 70대 노교수와 30대 청춘이 주고받은 서른두 통의 편지
라종일.김현진 지음 / 알마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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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들의 이야기'이고, '어쩌면 나의 이야기'이기에 허공에 질문을 던져보고, 스승의 따뜻한 말들을 되짚어 읽어본다. '가장 사소한 구원'이라 이름 붙인 그들의 서신이 나에게 닿아 '가장 소중한 구원'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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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움의 왕과 여왕들
대니얼 월리스 지음, 박아람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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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로움의 왕과 여왕들』 다니엘 월러스 / 책읽는수요일

특유의 분위기는 오직 그의 것

 

 

 

  책을 읽고 나서

 

 작가 '다니엘 월러스'는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야기를 쓴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바로, 팀 버튼이 영화화한 <빅 피쉬>의 원작자이죠. (우리나라에는 『큰 물고기』라는 제목으로 동아시아 출판사에서 출간되었고, 현재는 절판되었습니다) 팀 버튼의 환상적인 영상이 워낙 훌륭하긴 하지만, 그에게 영감을 준 '다니엘 월러스'가 책 속에서 그려내는 영상미 또한 아름답습니다. 이야기에 내포된 의미는 따뜻하고요. 작가의 삶의 방침인 양, 글에서도 '유머'의 중요함을 놓치지 않고 있어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작가였습니다. 그래서, 신작 『로움의 왕과 여왕들』을 만났을 때, 기대와 걱정의 마음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좋아하는 작가를 만날 때 당연하게 드는 감정이죠.

 

요만큼의 차이로 인생이 달라질 수 있어. 다른 삶, 완전히 새로운 삶이 펼쳐질 수 있지. (315쪽) 

 

 『로움의 왕과 여왕들』은 '로움'이라는 도시의 흥망성쇠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건설된 지 고작 백 년밖에 안 된 '로움'이라는 도시에는 마치 고대 국가의 경이로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지요. 한때 흥했지만, 지금은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이 살고 있으며, 협곡과 산으로 둘러싸여 외진 곳에 있습니다. 그중 작가가 주인공으로 내세운 건 창시자의 자손인 '매컬리스터' 자매입니다. 헬렌과 레이철,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단둘이 사는 두 소녀가 헤쳐나가야 할 인생은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헬렌은 외모가 부족해 항상 자신감이 결핍되어 있고, 레이철은 두 눈이 보이지 않아 자기가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레이철을 돌봐야 하는 언니 헬렌은 결국 둘의 인생을 바꿀 거짓말을 시작하게 되지요. 한번이 어렵지 두 번은 어렵지 않다고, 그녀는 동생에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상한 세상을 보여주죠. '너는 흉측해, 그리고 세상은 끔찍해.' 이런 식으로 말이죠. 언니가 말한 세상을 그대로 믿게 된 '레이철', 두 소녀가 작은 다툼으로 인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떨어지게 된 순간, 예상치 못한 인생의 길이 그들 앞에 나타납니다.

 

 '다니엘 월러스'는 글 속에 아름다운 영상미를 아주 잘 표현하는 작가입니다. 가끔 책을 읽다 보면 '이 책을 꼭 영화화하겠어!'하는 다짐이 느껴지는 것 같은 글을 만날 때가 있는데, 이 책이 그렇습니다. 각각의 씬들이 독립적이지만 부드럽게 이어져 있고,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때의 장면 전환은 영화를 떠올리게 하죠. 또한, 마법 같은 도시, 비밀스러운 숲, 유령들의 대화, 파란만장한 도시의 역사가 정말 실감 나게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판타지'장르에서 아주 매혹적입니다. 동화적인 느낌도 강합니다. 두 소녀의 이야기를 다룰 땐, 영화 <겨울왕국>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이야기가 아니라, 영상이 떠오른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유머는 그의 글에서 당연히 등장해야겠죠. 단순한 장면들에도, 작가는 재치있게 표현합니다. 이런 식이죠.

 

 죽음은 (그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침대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졌다) 그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팡은 이제 '시끄러워'졌다. 낮이고 밤이고 별것도 아닌 일로 낄낄거렸다. (…) 처음에 딕비는 그가 진짜 팡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환영이 아버지 친구의 탈을 빼앗아 쓴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곧 딕비는 옛사람들이 전부 다 그렇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세에서는 살아생전에 연기한 것과 다른 배역을 맡게 되는 것 같았다. (54쪽)

 

얼굴은 세월에 얼룩지고 비바람에 깎여 마치 돌산의 옆면 같았다. 두 뺨에는 심하게 골이 패어 있었다. 딕비는 그의 주름진 피부를 떼어내면 그 안에서 굴을 파는 동물이 나오거나 식물이 자라지 않을까 생각했다. 눈은 움푹 들어가 머리에 커다란 동굴 두 개가 뚫려 있는 듯했다. 턱수염은 숲과 같았다. 딕비가 그 안에 들어가면 길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의 수염은 그렇게 컸다. 사람 자체도 그렇게 컸다.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은 사람과 한 공간에 있는 것,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133쪽)

 

 환상적인 이야기이기에, 분위기가 좀 묘하다 싶었더니 작가가 '마술적 사실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현실과 환상이 겹쳐지는 이야기와,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들 또한 살짝 있지만, 논의될 만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배경 아래에서,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둡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마다 나의 삶을 조금씩 훔쳐가고 있다면?" 하는 물음과 함께 용서와 사랑에 관한 휴머니즘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야기 조각 조각을 살펴보면 작가가 조금 욕심을 부린듯한 느낌도 있지만, 환상적인 영상미와 동화적 분위기, 그리고 유머까지 녹아든 글의 분위기는 오직 '다니엘 월러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Written by. 리니

영미소설/ 환상소설, 동화/ 빅피쉬, 팀 버튼/ 상상력, 마술적 사실주의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비단 덕분에 엘리야는 큰 부자가 되었고 역대 부자들이 그랬듯 그 역시 남자 혼자 살기엔 지나칠 정도로 큰 집을 지었다. 그 집은 우아하고 장엄했으며 부조리했다. 그런 집은 어느 곳에서든 부조리했을 테지만 외딴곳에 만들어놓은 로움 같은 도시에서는 굉장하리만치, 비현실적일 정도로 부조리했다. 한 번 보려면 두 번 봐야할 만큼 거대할 뿐 아니라 무자비하게 아름답기도 했다. 운 좋게 야망을 배출할 통로를 찾은 어느 미치광이의 정신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징표일 뿐,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집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집이 모든 것을, 그리고 모든 사람을 삼키는 꿈을 꾸었다. (111쪽)

헬렌 자신도 자기가 지어낸 이야기들을 전부 다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의 창조물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복잡성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가 만들어낸 세상은 여러가지 면에서 너무도 신비로웠고, 바로 그래서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녀에게 가장 큰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은 그 어두운 몽상이 전체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었다. 본질적으로 잔인해서라기보다는 (잔인하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온전히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이 그녀를 즐겁게 했다. 그녀는 자신과 레이첼을 위해 세상을 뒤집었고 이제 그 안에서 아름다운 존재는 헬렌 자신뿐이었다. (174쪽)

사실 그런 사람은 많았다. 많은 이들이 고향과 친구들, 그리고 가족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렇게 떠났다. 이 골짜기로 온 사람들 그리고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그랬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 남은 사람들은 그들이 이곳에 살았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은 그저 우리가 잃어버린 그 모든 유실물과 똑같이 또 하나의 유실물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잃어버린 것들 가운데 일부는 갖고 있는 줄도 몰랐던 것들이다. 어쨌든 사람들이 떠나는 것은 여기서든 거기서든 행복해지기 위해서, 혹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 단순한 이유였다. 이를테면, `여기에 무언가가 있다면 저기에도 무언가가 있을 거야. 여기에는 살아봤으니까 이제 저기에 무엇이 있는지 보자.` 이런 생각을 하고 떠나는 것이었다. 애초에 사람들이 이 골짜기로 온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누구든 어디로든 바로 그런 이유로 가는 것이다. (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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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 블랙 로맨스 클럽
제인 니커선 지음, 이윤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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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 제인 니커선 / 황금가지

원작만큼 오싹한, 그러나 매우 섬세한

 

 

 

  책을 읽고 나서

 

 '푸른 수염'이라는 동화를 아시나요? 푸른 수염이라 불리는 남자가 새 아내를 맞이한 후에, 열쇠 뭉치를 주면서 "마지막 방은 절대 열어보면 안 된다"며 시험합니다. 그러나 철저한 금기엔 호기심이 따르는 법, 아내는 작은 방을 열고 남편의 비밀을 엿보며 위험에 빠지게 되죠. 오싹하지만 매혹적인 이 동화는 책과 영화, 오페라 등으로 오랜 세월 동안 각색되었고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책도 마찬가지로, '푸른 수염'이라는 샤를 페로의 동화를 모티브로 한 소설 작품이지요. 이 작품은 로맨스 소설의 전형적인 형식을 지양하고, 신선하고 개성 있는 작품들을 소개하는 '블랙 로맨스 클럽'에 걸맞은 독특한 작품입니다. '블랙 로맨스 클럽'의 '블랙'이 단순히 어둡고 오싹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이름 자체에서 풍기는 이미지와 아주 잘 어울리는 작품이기도 하지요. 물론, 원작의 신비스럽고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그대로 입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설은 원작 동화에 충실하면서도 개성 있는 전환이 엿보입니다.

 

 가장 눈에 띄었던 건, 원작과 다르게 추가된 설정입니다. 작가는 19세기 미국의 남부를 배경으로, 당시 팽배했던 '노예 제도'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놓았습니다. 그리고 푸른 수염의 모습이 덧입혀진 주인공 '버나드'가 순수하고 어린 소녀 '소피아'의 후견인이 된 것으로 설정했죠. 그리고 부유한 후견인의 저택에는 많은 흑인이 노예가 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저택에 들어가 살게 된 '소피아'는 '버나드'가 흑인들을 대하는 방식을 목격하고, 흑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점차 잔혹성을 발견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렇게 발견한 잔혹성은 남편과 아내로 변화하게 된 그 둘의 관계 속에서 '두려움'으로 변하게 됩니다. 사회적 약자로 대변되는 '여성'과 당시 '흑인'들의 모습들은 '푸른 수염'의 동화 속에서 볼 수 있었던 비밀스러운 이야기 전개와는 별개로 또 다른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동화 '푸른 수염'의 주인공과는 달리, 말끔하고 잘생긴 남자로 표현된 이 책의 설정과 저택에 들어간 '소피아'가 그에게 사랑에 빠지는 초반 전개는 다소 전형적일 수도 있는 로맨스 소설의 전개로 보일 수 있겠지만, 작가는 섬세한 묘사로 이 책의 많은 분량을 채우고 있는데요. 저택의 아름다운 배경 묘사는 물론이고, 주인공인 '소피아'의 심리 변화를 꼼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것'과 '사치'의 유혹 사이에서 흔들리는 철없는 10대 소녀에서 '호기심'과 '두려움'이 주체가 되어 생각을 바로잡게 되는 변화를 보는 것도 재미있지요. 또한, '노예제도'를 언급하는데 있어서도 기대했던 것보다 더욱 자연스럽고 효과적으로 이야기가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단, 여러 가지 새로운 설정이 끼어들었으면서도 원작 동화의 전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살짝 아쉽습니다. 이왕 판을 벌인 만큼 더욱 격렬하고 오싹하게, 또는 아예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틀어봐도 재미있었을 텐데, 예상하는 대로 '설마'하며 흘러가니 마지막은 약간의 허무함을 느끼게 하더라고요. 결국엔 로맨스의 법칙을 따랐던 걸까요, 절정 부분에 긴장감이 극에 달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말이지요.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원작 동화를 모티브로 삼아 더욱 풍부하게 이야기를 살려낸 소설을 읽는 내내 몰입하면서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로맨스와 스릴러가 묘하게 섞여서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는 소설입니다.

 

 

 

 

Written by. 리니

영미소설/ 로맨스, 스릴러/ 동화 '푸른 수염'/ 황금가지 블랙로맨스 클럽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우리 고향집 가족들은 언제나 브리짓에게 친절함과 예의를 갖춰 대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호의적이었다. 브리짓은 우리를 돌보았고 우리도 그녀를 돌보았다. 윈드리벤 애비에서의 세상은 내 예전 생활에 비해 훨씬 상류층의 삶다웠다. 이곳이 나에게 요구하는 우월의식을 내가 배우고 행하는 날이 올까?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그냥 못하겠다. 나는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의 존재 자체와 그들의 이야기에 너무나 관심이 많다. 그렇기에 그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68쪽)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들다니, 참…… 기이한 일이다. 그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이렇게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이 바보 같다. 따지고 보면, 윈드리벤 애비가 존재해 온 다양한 시기별로 여러 세대의 여성들이 이곳에서 살고 죽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당연히 인지하고 있는 바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내 후견인의 부인들이 모두 너무나 최근에 이곳에 살았다는 점과 …… 그들의 머리가 모두 붉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내가 동요하는 이유가 그 머리카락 때문만은 아니었다. 호화로운 생활을 좋아하던 나의 과거 성향으로 미루어 보면, 아름다운 물건들로 둘러싸인 이런 환경 속에서 나는 황홀해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과하게 느껴졌다. 마치 어떤 동화 속에서처럼 이 세계 전체가 화려함으로 뒤덮여 있지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78쪽)

"그대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그들에게 풀어질 틈을 조금도 주면 안 돼. 그들의 수가 너무 많아. 1791년 아이티 노예 폭동에서 벌어진 대학살에 대해 들어봤소? 내 종조부의 가족 전체가, 그의 자녀 여섯 명까지 모두 포함해서 그곳에서 살해되었소. 노예들의 반란 관례에 따라 흑인들은 백인 아기 시체를 곡괭이에 꽂은 후 그것을 들고 다녔소."

그런 것은 우리나라에서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흑인이든 백인이든 간에, 절대 그럴 리 없다.

버나드 씨는 마치 방금 한 일을 씻어 버리고 있는 것처럼 양손을 비볐다.

"나는 내 사람들을 진압할 수밖에 없소. 그대는 내가 채찍질을 즐겼다고 생각하오?"

나는 확신이 없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면 왜 그 일을 직접했을까? (184쪽)

"그대가 나에게 내 일거리만을 남겨 두고 내 곁을 떠나기 전에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나는 기다렸다.

"나는 곧 조금 먼 곳에서 진행하는 사업차 여행을 떠나야 하오. 내가 없는 동안 내 열쇠 꾸러미를 맡아줄 수 있겠소? 이 일에는 막대한 책임이 따른다오. 그대를 믿고 우리 착한 더키조차도 갖고 다니지 못할 열쇠까지도 모두 그대에게 맡기려는 거요. 그것들을 항상 지키되 절대 사용하면 안 되오."

내 입이 말랐다.

"기쁜 마음으로 하겠습니다, 버나드 씨."

그의 열쇠 꾸러미라니!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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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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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앤서니 도어 / 민음사

느릿느릿, 서정적인 문체에 걸려 왠지 맥이 빠지는 소설

 

 

 

 

  책을 읽고 나서

 

 

 전쟁을 소재로 한 책들을 좋아합니다. 잔혹하고 마음 아픈, 척박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심리란 더욱더 껍질을 벗겨내기 마련이죠. 악한 본성은 더욱 악하게 드러나고, 선한 본성은 때로 '고통 속에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기도 합니다. 독일 쪽을 공부했었던 저는 자연스럽게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도 파고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책을 통해서도 알게 되었죠.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리고 그토록 혐오하던 나치의 손길이 일반 사람들에게도 꽤 큰 폭으로 끼쳤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언제부턴가 전쟁의 참혹한 장면들을 다룬 문학들보다도, 일반인들의 상황과 기록을 그린 책들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은 '눈먼 프랑스 소녀와 독일 고아 소년의 만남'이라는 카피를 통해 저에게는 예전에 보았던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참혹한 도시 속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행동들은 눈시울을 자극하고, 이 책은 소년과 소녀의 만남으로 어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펼쳐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불러일으키게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른 식으로 소설은 펼쳐졌습니다. 독일 소년 '베르너'와 프랑스 소녀 '마리로르'의 이야기가 각각의 시점을 잡은 채 따로 번갈아 전개됩니다. 전쟁 상황의 묘사는 직접적이지는 않습니다. 소년과 소녀에게 영향을 미치는 작은 사건들을 중심으로, 그 상황들이 그들에게 가까이 있는 듯, 없는 듯하며 은밀히 조명되지요. '베르너'에게는 '히틀러 유겐트'를 양성하는 사관학교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 '마리로르'에게는 한순간에 변해버린 상황과 아버지의 부재를 통해서 전쟁의 피해를 암시합니다. 그리고 그 둘을 중심으로 한 채, 국가적인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보석 감정사 '롬펠'의 시점이 함께 전개됩니다. '마리로르'의 아버지와 관련된 인물입니다.

 ​그렇게 소설은 같은 날짜로 묶여 있는 다른 시점의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현재진행형으로 서술됩니다. 현재진행,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여도 소설의 서정적인 문체와 남다른 분위기에 한껏 힘을 실어줍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잘 읽히지는 않습니다. 부제에 날짜가 적혀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뒤바뀌는 시점과 전개는 읽는 내내 신경에 거슬렸습니다. 소년과 소녀의 '한여름 밤의 꿈'까지 이어지는 기록을 그리는 문체가 너무나 아름다운데도 말이지요. 전쟁의 참상을 표현하는 서술도, 그 끈질긴 묘사의 글도 이상하게 아름답습니다. (좋아하는 문체입니다.)

 딱 표지 이미지와 어울리는 책입니다. 흐릿흐릿한 잿빛에, 반쯤 눈을 감고 있는 소년처럼, 아름다운 소설이기에 수많은 상을 휩쓸었겠지요. 하지만 읽는 데는 만만치 않습니다. 굵직굵직한 사건이 없이 천천히 흘러가는 책이기 때문에, 참을성 있게 읽어야만 합니다. 읽다 보니 맥이 빠집니다. 느릿느릿, 서정적인 문체에 걸려 푹 빠져버린 것인지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큰 전쟁인 2차 세계대전을 이렇듯 따뜻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니 놀랍기는 한 소설입니다.

 

 

 

Written by. 리니

영미소설/ 전쟁소설/ 2차세계대전/ 2015년 퓰리처상 수상작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한 할머니가 마구 보채는 아기를 안는다. 그로부터 1.6킬로미터 떨어진 생세르방 바깥 골목에서 한 취객이 오줌을 누다가 생울타리에서 종이 한 장을 뽑아 든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다. 모든 주민에게 긴급히 전합니다. 지금 즉시 공터로 가십시오.

바깥 섬들마다 대공포대가 번뜩이고, 구시가 안 커다란 독일 대포들이 또 한 차례 쏘아 대며 바다 위에서 울부짖고, 해변에서 400미터 떨어진 곳, 위를 응시하는 달빛 어린 안뜰에 옹송그리고 있는 나시오날이라는 요새 섬에는 프랑스인 380명이 수감되어 있다.

사 년이라는 점령 기간 동안, 폭격기들이 다가오며 내는 괴성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구조? 절멸? (1권, 25쪽)

그들은 저 멀리서 자전거를 타고 길을 따라 내려가는 사람을 지켜본다. 유타는 두 손을 양쪽 겨드랑이 밑에서 죈다. "내가 뭘 듣고 있었는지 알아? 우리 라디오로? 오빠가 부숴 버리기 전에?"

"쉿. 유타. 조용히 해."

"파리 방송이었어. 거기선 도이칠란드젠더랑 정반대로 말했어. 거기선 우리가 악마랬어. 우리가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고 있댔어. 잔혹한 행위가 무슨 말인지 알아?"

"조용히 해, 유타."

"그게 옳아?" 유타가 말한다. "딴 사람들이 다 한다는 이유만으로 뭔가 하는 게?"

뱀장어처럼 미끄러져 들어오는 의심들. 베르너는 그것들을 도로 쑤셔 넣는다. 유타는 고작해야 열두 살이다. 아직 어린애다. (1권, 203쪽)

그들은 노래한다. 우리는 젊다. 꿋꿋하다. 결코 물러선 적이 없다. 우리가 함락할 성들은 많고도 많다.

베르너는 탈진과 혼란, 흥분 상태를 오락가락하며 휘둘린다. 자기 인생이 전적으로 방향을 바꿨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한다. 가사나 교실로 가는 길을 외우는 것으로, 눈앞에 기술 과학 실험실 환영을 띄워 두는 것으로 의구심을 밀어낸다. 테이블 아홉 개, 걸상 서른 개, 코일, 여러 종류 축전기, 증폭기, 배터리, 반짝이는 캐비닛 안에 자물쇠를 채워 보관해 놓은 납땜용 인두들.

그의 머리 위에선, 자기 침상에 무릎을 꿇고 앉은 프레데리크가 오래된 쌍안경으로 열린 창밖을 응시하면서 그가 이제껏 관측한 새들을 침대 가로널에 표시한다. 큰논병아리 밑에 새김눈 하나. 동유럽 나이팅게일 밑에 새김눈 여섯 개. 창밖 구내에서, 열 살 소년 그룹이 횃불과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들고 강으로 향하고 있다. (1권, 213쪽)


프레데리크는 일곱 번째 매질까지 버티다가 쓰러진다. 그다음엔 여섯 번. 그다음엔 세 번이 된다. 우는 법도 없다. 그만둬 달라고 부탁하는 법도 절대 없는데 특히 이 때문에 살해 욕구를 짓밟힌 사령관을 부들부들 떨게 만든다. 프레데리크의 몽상가적 기질, 그의 남다름이 향기처럼 그에게 감돌아서, 누구나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다. (2권, 40쪽)


바람, 모두 소련에서 불어오는 것이라고 사령관이 모두에게 즐겨 상기시키는 바람이. 카자흐스탄 바람, 수퇘지의 머리를 달고 독일 여자들의 피를 모조리 마실 수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양초를 먹는 야만인들의 바람, 지구에서 반드시 쓸어내 버려야 할 고릴라들.

치직 치직.

거기 있나?

마침내 그는 라디오를 끈다. 적막 속으로 선생들의 목소리가 들어가 그의 머리 한쪽에서 울리는 동안, 반대쪽에선 기억이 말을 건다.

눈을 떠요. 그리고 그 눈이 영원히 감기기 전에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걸 찾아봐요. (2권, 80쪽)

우리는 모두 단 하나의 세포에서 생겨난다. 티끌보다도 작은, 아니, 훨씬 더 작은 세포에서. 나뉘고, 증식하고, 더해지고, 덜어지면서. 물질의 주체는 바뀌고, 원자들이 흘러들어 가고 나오며, 분자들이 빙글빙글 돌고, 단백질이 서로 합쳐지며, 미토콘드리아는 산화 명령을 보낸다. 우리 존재는 미세한 전기가 모이면서 시작된다. 폐, 뇌, 심장. 사십 주 후에 6조나 되는 세포들이 죔쇠 같은 우리 어머니의 산도(産道)에서 뭉개지면서 우리는 울부짖는다. 그런 후 세계가 우리에게 들어서기 시작한다. (2권, 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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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제자들 밀리언셀러 클럽 140
이노우에 유메히토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마법사의 제자들』 이노우에 유메히토 / 황금가지

바이러스와 초능력의 독특한 조합

 

 

 

 

  책을 읽고 나서

 

 아무리 생소한 작품이라도 재미만큼은 믿고 보는 밀리언셀러 클럽 신작 『마법사의 제자들』입니다. 몇 주 전 휴가 계획을 짜는 내내 들뜬 마음에 독서가 잘되지 않을 때, 이 책을 펼쳐 들었죠. 영화 <마법사의 제자>와 제목이 거의 흡사해 단순 SF 판타지 소설을 생각했으나, 그게 다는 아닙니다. 이 책의 뒤편에도 쓰여있듯이, 책은 '엔터테인먼트 소설'을 표방하고 있는데요. 결국엔 오락용 소설이란 말이니, 속도감과 몰입감은 놀라울 정도로 좋습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심점은 '바이러스'입니다. 지금은 '종식 선언'이 이루어졌지만, 몇 달 전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메르스' 바이러스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공포감이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선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바이러스를 우리 상황에 대입해가며 읽게 되었는데요. 소설 속에서 치명적 바이러스인 '용뇌염' (드래곤 바이러스)이 발생하여 원내 감염으로 병원이 봉쇄되고, 일반인들은 정보를 알지 못해 우왕좌왕 공포에 휩쓸리는 모습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이러스를 소재로 진행된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요. 치사율이 높은 '용뇌염' 바이러스에서 회복된 단 세 사람이 초능력을 갖게 되는 설정이 이어집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초능력을 일종의 '바이러스 후유증'이라 표현하지만, 사람들이 한 번쯤 꿈꾸는 마법과도 같은 능력들이었는데요. 한 사람은 누군가의 미래와 과거를 볼 수 있게 되고, 또 한 사람은 물건을 움직일 수 있게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점점 젊어지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통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되지요. 이렇게 되니, 전염병으로 사람들의 기피 대상이 되었던 그들은 여러 사건을 만나면서 또 누군가의 '적'이 되고 맙니다.

 

 책의 두께만큼이나 다양하고 신선한 소재들로 꽉꽉 채워진 이 소설은 판타지와 현실이 비교적 잘 어우러져 매끄럽게 읽힙니다. 상상 속 이야기 같지만, 간혹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는 '바이러스'가 초능력 판타지로 이어진다는 설정이 독특했고, 단순한 이야기 진행뿐 아니라, 사람들의 심리에 주목하려 애쓰는 점도 좋았습니다. 한 가지 걸렸던 건 결말. 어찌 보면 '큰 판'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아이디어를 끌어넣다 보니, 작가가 이것들을 어떻게 마무리할까 싶었는데 역시나 아쉽게 끝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의미는 괜찮게 들어맞으니 누군가에게는 느낌 좋은 결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Written by. 리니

일본소설/ 판타지, 초능력/ 바이러스/ 밀리언셀러 클럽 140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건 말이지, 좀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를 찾아가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네. 왜 내가 이런 거에 푹 빠져 있는 건지, 왜 이런 놈이 좋은지 아닌지, 뭐 때문에 내가 살아가는 건가 싶은 게지."

"……."

"왜 이유가 필요한 겐가? 이유를 모르면 사람들은 대부분 엄청 불안해하더군. 그러니 안심하고 싶어서 이유를 찾는 걸지도 모르지. 불안하니까 그때 떠오른 걸 이유랍시고 자신을 어르는 게지. 즐거우니까 하는 것일 뿐이라는 둥 말이네. 어떤 이유든 상관없는 게야. 중요한 건 자기만의 이유를 찾아내는 거니까." (57쪽)

의사가 하는 말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격려이자 위로이기도 했다. 용기를 북돋아 줄 요량으로 해 준 말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이 말,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를테면 사고로 한 손을 잃었을 때 `양손을 잃은 사람에 비하면 당신은 행운이다`라는 말을 들어서 솔직하게 기뻐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보다도 불행한 사례를 들면 그걸 부정할 말은 없다. 없지만 납득이 되지는 않는다. 어물쩍 넘어가려는 게 아닌가? (66쪽)

의사는 그들이 드래건바이러스의 유행을 종식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고 말했었지만, 세간에서는 세 사람을 그런 식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교스케 일행은 오물이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은 말살해야 할 존재였다. 격리상태가 해제된 순간, 교스케 일행은 이러한 현실을 보게 됐다. 드래건 바이러스는 교스케 일행들로부터 모든 것을 앗아갔다. 남은 것은 정체 모를 후유증뿐이었다. 이 쇼크는 한동안 세 사람을 떠나지 않았다. (152쪽)

`미는 힘을 미묘하게 변화시킨다.`

그것은 마치 요가의 호흡법을 훈련하는 것 같았다. 민다기 보다는 어딘가 조용히 숨을 토해 내는 이미지에 가까웠다. ​거의 힘을 주지 않고 코끝에서 자연스럽게 숨이 흘러나가는 감각으로 대상을 받아들이면 마치 영상이 팔락거리며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은 이미지로 시간이 역행했다. 너무 돌아갔다 싶을 땐 토해 낸 숨을 조용히 멈추고 천천히 들이쉬었다. 그러면 투시하고 있는 대상의 시간이 빨리 감기를 하듯 앞으로 나아갔다.

재미있었다. 주어진 능력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감동을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그건 처음으로 자신의 양발로 일어선 어린아이의 감동과 닮았는지도 몰랐다. (165쪽)

​"내일 오후 3시경에는 큰길을 걷지 않는 게 좋아."

그런 교스케의 말을 들으면 사고는 회피할 수 있다. 미래는 고정돼 있지 않은 것이다. 병실의 소녀를 보고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사람의 힘이 미치는 범위라면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쏟아져 내리는 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우산을 가지고 나가면 옷이 젖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은 지진을 억제할 방법을 모르지만, 지진의 발생을 알고 있으면 미리 안전한 장소로 피난할 수 있다. 그렇다. 길흉을 점치는 건 `흉`을 감수하기 위한 게 아니라 그걸 `길`로 바꾸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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