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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연 (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윤종찬 감독, 장진영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워낙 논란이 많은 영화였기에 보기도 전에 많은 정보가 머리에 차 있었다. 그런 선입견을 접고 잠시 영화에 몰두해보았다.
주인공 박경원이 여자로서 비행사의 꿈에 도전했고 남자들과 겨루어서도 당당하게 우위를 가졌다는 인물이라는 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부잣집 딸이 아니었기에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했고 여자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본원적 차별과 식민지 출신으로서의 차별을 이겨냈다는 것은 분명 칭찬받아야 할 내용들이다. 아마 현대적 의미로 보면 커리어우먼의 이미지가 포개질 것이다. 같은 대학 교육에 같은 역량에 같은 성과를 내고도 뒤로 밀려야하는 많은 한국의 딸들에게 그녀가 이루어낸 성취는 하나의 목표 내지 희망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일본에 가까웠다는 점이 비판이 되곤 한다. 고이즈미의 조부와 가깝다는 등의 이야기를 잠시만 접어두고 근대라는 시간이 우리에게 무엇이었는지를 먼저 살펴보았으면 한다.
시대적으로 볼 때 근대의 물질적 특징은 과학과 산업이고 정신적 특징은 자유였다. 일제시대가 되면서 사회적으로 남과녀, 상놈과 양반 등의 차별은 근대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당시 조선에서 막 발흥되었던 천민들의 권리 찾기 운동의 지도자가 친일로 돌아선 것이나 채만식의 <태평천하>에 나왔던 중인 출신의 지주가 일제시대가 훨씬 낫다고 외치는 것이 다 이런 연유에서 나온 현상이다.
종교의 자유가 외형적으로 허용되는 것 또한 대원군이 벌였던 수만명의 천도교인을 죽인 학살극과 대비된다. 무너져가는 권위를 유지하려고 피를 보고 경복궁을 보수했지만 제국은 그냥 그렇게 무너졌을 따름이다.
여성의 입장에서도 교육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넓게 부여되어 신여성이라는 이념상이 나타나는 것 또한 하나의 진보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근대의 측면인 과학 기술의 적용도 놀라왔다. 약품의 보급이 유아사망율을 급속히 떨어뜨려 인구가 증가하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술의 총아는 비행기였다. 린드버그의 횡단 비행이 받았던 성원이나 하워드 휴즈의 세계 비행 등 공간을 더 좁게 하고 시간을 빨리 돌리려는 과학 문명의 핵심에 비행이 있었다. 땅에서 바다로 나간 인간이 이제 하늘에 올라서면서 무한한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꿈들은 높아지고 커져가는데 비해서 조선의 현실은 상대적으로 비참해지고 있었다. 교육은 훈육으로 바뀌어 근대 산업에 맞는 노동자의 양성에 초점을 맞추고 다시 전쟁에 병사로 투입되도록 강요당한다. 식민지의 딸들은 전쟁에 또 다른 노예로 끌려가 아픔을 안아야 했다.
그런 점에서 근대는 분명 양날의 칼이다. 외면할수도 없지만 힘이 약해 피동적으로 끌려가면 그만큼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친일이라는 이야기를 다시 돌아보자면 박정희는 일본 군사학교의 우수한 학생이었고 제국에 충성을 바쳤다. 그의 후배 박태준도 마찬가지고 잠시 대통령에 머물렀던 최규하 등도 매한가지다. 조금 시선을 돌리면 동아일보의 김성수, 이화여대의 김활란 등 한국 사회 곳곳에서 그 뿌리가 깊게 내려있다.
무엇보다 영화의 장면에 나오는 고문은 깊게 뿌리 내려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 우리 주변에서 경찰과 안기부에 의해 마음껏 자행되었다.
친일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지만 정확하게는 우리 속에 아직 남아 있는 그늘을 제대로 알고 이겨내야만 할 것 같다. 포스코가 놀라운 기업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신대 할머니에게 돌아갈 돈을 가로채고 시침 뚝 뗀 행위까지 칭찬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박정희의 성과 또한 매한가지였고 아니 크게 보면 한국 사회의 공간 상당수가 그런 상태였다.
우리는 일본을 제국주의라고 미워하고 그 협조자로서 친일파를 증오한다. 힘을 앞세워서 약자를 핍박하며 자기의 이해만 관철하는 나라를 제국주의 행태를 보인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현대의 미국이 보이고 있는 행태가 떠오르지 않는가? 가깝게는 이라크,베트남 조금 멀리는 멕시코와 필리핀에서 보였던 미국의 침략 또한 제국주의의 모습이었다.
그럼 우리는 미국이라는 제국주의와 무관하게 존재할까? 아침에 먹는 스타벅스 커피 한잔에 지불한 나의 돈이 유태인 CEO의 손에서 이스라엘 후원금으로 바뀌어 팔레스타인 소년의 가슴을 꿰뚫는 총탄이 될 수도 있다. 근면 성실하게 낸 세금이 이라크 지원금이 되어 이라크의 장애인 가족의 머리위에 퍼붓는 폭탄값이 되곤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 또한 근대적 삶을 살아가면서 제국주의와 동거하는 것이다.
박경원은 자기의 한번 뿐인 삶을 누리기 위해 근대가 만들어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했다. 가난한 집안, 여자 등 여러 기본적 한계를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극복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그녀는 근대의 찬양자였다. 그리고 그 근대를 이끌어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협력과 옹호와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런식으로 당대의 선각자들은 일본과 손을 잡게 된다. 이광수를 비롯해 대다수의 한국 지식인들이 그 길을 갔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속에서 박경원이라는 인물의 평가에서 그녀가 이루어낸 성과 보다 과정에서 불가피 했던 친일만 문제 삼는 것은 좀 불공평한 점이 있지 않을까?
내가 볼 때 꿈을 이루어낸 그녀의 삶은 쉽게 부정하기는 어렵다. 지금도 아무나 하기 어려운 목숨을 건 도전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넓혀간 적극적 노력과 성취를 매몰차게 깔아뭉개기는 아까운 점이 많다. 오히려 솜씨 좋게 이용해낸 기교를 보며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그 기회를 만들어준 근대라는 공간을 무조건 미워할 수도 없다.
당대의 백정과 중인은 양반에게 받던 차별이 없어진 근대적 삶에서 전통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친일을 했었다. 이제 박경원에게 가난한 농촌으로 되돌아가 무학의 여성으로 전통이 주는 억눌림 속에 편안히 살아가라고 강요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었을까?
영화 자체를 다시 본다면 실패한 원인은 아마 치졸하게 스토리를 뒤바꾸려고 한 자세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기본적으로 친일 할 수 밖에 없었던 조건이 주는 아픔 보다 이를 어설프게 독립운동으로 엮어보려다 보니 앞뒤가 잘 맞지 않았다.
관객을 창공으로 데려가는 영상은 아름답고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모험가의 삶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도 나쁘지 않다. 그에 비해 스토리의 구성력은 너무나도 엉성하다. 주인공들이 주고 받는 말이 너무 많고 이를 통해 스토리 전개를 훌쩍 뛰어넘거나 배경설명을 한번에 해결하려는 것은 너무나 어설프다. 영화 구성 자체로 놓고 볼 때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면들을 다 긁어 본다면 종합적으로 볼 때 미진한 점도 많지만 무조건 배격하기에는 아까운 점이 많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