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실제 사마의가 왕조를 찬탈할 있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크게 두가지를 있다.먼저 사마의가 자녀 교육을 해서 아들들을 하나 같이 뛰어난 인재로 키웠다는 점이다. 조조가 자식대에서 분열하고 결국 손자 대에서 무너진 것과 비교해보면 사마의 일가는 똘똘 뭉쳐서 조씨를 물리치고 자신들의 왕조를 성립시키는 단결력과 솜씨를 보였다.

둘째로는 역시 오랜기간 군무를 함께하며 만들어진 군맥이었다. 전장터에서 맺어진 인연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적을 앞에 놓고 서로 서로 목숨을 의지하는 사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인맥이 된다. 로마의 캐사르가 갈리아에서 함께 싸우면서 키웠던 군대를 발판으로 공화정을 뒤엎었듯이 사마의 또한 제갈량과의 오랜 싸움에서 단련된 군맥을 자산으로 활용했다.

 

사마의의 최후 싸움은 조씨 인척들과의 대결이었다. 워낙 커졌던 권한에 대한 견제로 조씨 가문의 인척들은 사마의를 강력히 견제하려고 했다. 그래서 사마의를 태위로 추대했는데 자리는 명예는 있지만 실질적인 병권은 없는 자리다. 이렇게 강력한 견제에 일단 몸을 낮추었고 상대방의 오만방자함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오랜시간 은인자중 기다리면서 상대가 방심할 때까지 기다렸다. 조용히 힘을 아꼈다가 밖으로 사냥을 것을 기회를 잡아 기습을 해서 도성을 장악해버렸다. 여기서 사마의의 상대는 조상이라고 이라는 유명한 장군의 아들이었다. 집안 또한 오랜시간 동안 군무를 담당해왔기에 믿고 따르는 이가 많았다. 이들 심복들은 조상에게 이왕 천자를 데리고 나왔으니 아예 외곽으로 이동한후 수도 바깥의 군대를 동원해서 사마의와 맞서 싸우자고 했다. 하지만 조상은 생각보다 유약하고 결단력이 없는 인물이었다. 싸움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간신히 이길 있을지 말지 여부가 결정된다. 그런데 귀족 출신으로 순탄하게 누릴 누리며 올라온 사람들은 자신이 갑자기 잃을지도 모르는 기득권을 먼저 고민한다. 덕분에 잃을 있는 쪽으로 선택하려고 하지만 때로는 그런게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다. 어쨌든 이미 전쟁터에서 수십년간 쌓아놓은 사마의의 위명이 두려웠던지 조상은 싸우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적당히 노후를 보장해준다는 상대의 감언이설에 넘어가버렸다. 아무리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결국 최후의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은 지도자일 밖에 없기 마련이다. 지도자가 그릇된 결정을 내리게되면 수하에 뛰어난 인재가 있다 하더라도 다같이 무너질 따름이다. 가깝게는 원소가 그런 예가 것이다. 그리고 결국 약속을 어긴 상대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며 후회를 밖에 없게 된다.

 

조상을 제거하면서 사마의는 자신의 역할을 했지만 권력은 고스란히 아들들의 수중에 남겨주었다. 이미 역심을 품었기에 중도에서 멈추면 일가족 모두가 몰살당할 밖에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사마의가 떠났지만 아들들은 싸워나갔다. 특히 조상과의 친소관계에 따라 우선 관구검과 문흠이 이탈하며 반기를 들었다. 두사람이 장악하고 있던 지역은 두개 주에 걸쳐 넓었고 수춘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지역 또한 원술의 본거지로서 중앙과는 오랜 적대관계에 놓인 곳이었다. 난리를 평정하고 얼마 지나자 이번에는 고분고분하지 않던 제갈탄을 압박해서 제거하게 되었다. 전쟁 모두 쉬운 싸움은 아니었지만 수행해냈다. 번째는 사마소가 무려 26만의 군대를 일으켜야만 해결할 있었다. 다른 지역 거의 전부에서 끌어들인 병력이었기에 어려웠던 면을 이해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사리 왕조를 수립하고 천하를 통일한 사마의의 가문도 모두 후일 팔왕의 난을 거치면서 서로 싸워 몰락하게 되었다. 결국 권력의 세계에는 결국 아무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는 무상함을 깨닫게 해주는 장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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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의 역량을 하나씩 살펴보자. 사마의의 가장 장점은 전장에서 발휘되었는데 매우 뛰어난 장수였다. 거의 싸움을 찾기 어려운 상승장군이었다. 특히 제갈량과의 싸움에서 활약이 컸는데 삼국지연의의 시각으로 보면 싸움들은 제갈량의 압도적 승리가 번번히 우연에 의해 좌절되는 아쉬운 전투였다. 실제 역사에서의 싸움은 거의 재미 없는 밋밋한 상태였다고 한다.

하지만 제갈량이 아닌 다른 상대들과의 싸움에서는 매우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맹달이 위를 떠나 촉으로 귀속하려고 했을 허창으로 보고를 띄우고 회답도 기다리지 않은 병력을 동원하는 무리한 행동을 보였다. 잘못하면 근무지 이탈과 월권으로 처벌 받을수도 있겠지만 시각을 바꾸어 보면 결단력과 실행력을 가진 지도자로서의 모습이 나온다. 공손연 토벌전도 그의 솜씨를 보여주는 전쟁이다. 요동은 낙양에서 수천리 떨어진 곳이다. 여기에 별도의 자기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공손씨의 반란에 위의 조정은 여러 가지로 걱정을 했지만 사마의는 단숨에 승패를 결정지웠다.

이렇게 계속 승승장구하자 역효과가 나타난다. 그를 따르는 무리가 생기고 이를 보던 조정의 반대파에서는 사마의의 군사적 권한을 제한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공손연과의 싸움에서도 얼마 이상의 군사를 한꺼번에 맡기지 말자는 건의까지 나왔지만 황제가 물리쳐버렸다. 역시 전쟁은 장수의 실력으로 수행되는 것이라 사마의를 대신해서 나섰던 장수들이 연달아 패하면 다시 불리워져서 원래의 자리에 놓이고는 했다.

 

전장에서의 승리는 뛰어났지만 정치적 처신은 매우 기회주의적이었다. 조비와 아들 조예만 하더라도 황제로서의 주권을 명확히 행사하고 있었다. 사마의는 충직한 신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조예가 일찍 죽으면서 여덟살 짜리 아들을 부탁하는 자리에서 있었던 세명의 신하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조씨로부터 위협을 받자 본색을 드러내어 위를 찬탈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같이 군주로부터 어린 아들을 보호해달라는 말을 들었지만 제갈량이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서 후일 존경을 받는 것과 비교할 사마의에게서는 역량과 위업에 비해서 찬사를 받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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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마의의 대두

 

사마의는 인기 있는 인물은 아니다. 최고 인기 인물인 제갈량의 적으로 나와 꾸준히 맞서서 싸웠고 결국 제갈량의 북벌을 좌절시켰기에 원망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삼국지의 주인공 조조,유비,손권을 물리치고 자신의 왕조를 만들어 통일하게 만든 사실을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역시 대단한 인물이라고 있다. 실제 군사적 싸움에서도 크게 적이 없는 것이나 후일 조씨 가문과의 정치적 투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것을 보아도 그의 솜씨는 대단하다. 이렇게 보면 응당 삼국지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져야 하겠지만 삼국지에는 많이 나오지 않는다. 진수가 삼국지를 당시에 이미 진나라가 성립되었기에 사마의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지라는 책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진서에 당당히 황제로서 한자리를 차지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원래 사마의 일가는 괜찮은 명문이었기에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는 자리가 잡혀있었다. 인품에 대한 평가를 들은 조조가 자기 정권에 참여하라고 권했지만 사마의 일가는 요리조리 피했다. 아직 대세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섯불리 나서는 것을 피한 것이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조조의 노여움을 사서 일가족이 한꺼번에 몰살을 당할 뻔도 했다. 이제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위험한 상황이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었고 마지막으로 부를 때는 고분고분하게 나왔다. 이렇게 의심을 받으며 시작한 관료로서의 생활속에서 사마의는 자신의 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계속 어려운 일을 맡으면서도 충실한 관료의 역할만 수행하려고 했기에 높은 성과를 있었다. 처음 사마의에게서 고분고분 하지 않다는 야심을 읽어내고 곱게 보지 않았던 조조였지만 되도록 공정한 인사를 깨트리려고 하지 않았기에 이상 후환은 발생하지 않았다.

여기서 조조가 사마의를 꺼려했는지를 보면 둘이 실제로는 상당히 닮았다는 점에서 원인을 찾을 있다. 예전에 조조가 평상시에는 충신 난세에는 간교한 영웅이 된다는 평을 듣고 좋아했다고 하는데 바로 사마의가 같은 유형의 인간이다.

조조의 사람 보는 눈은 매우 정확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래서 유비를 한껏 영웅이라고 치켜세운 술자리의 일화도 유명한데 실제 유비가 한귀퉁이를 차지하는 황제가 것으로 실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사마의를 꺼려하지만 가까이한 것은 길게 보았을 실수였다고도 있다. 역으로 보면 황제가 여럿 바뀌는 동안 자신의 야심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키운 사마의의 솜씨 또한 대단하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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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5호 16국 시대의 군주였던 손호라는 인물이 내린 평이 하나 있다.

조조는 자기가 충분히 이길 수 있고
후한의 광무제라면 비슷한 수준
마지막으로 유방이라면 무조건 부하로 들어가야 한다였다.
이말을 정리하면 유방 > 광무제 > 조조의 순이다.

우선 유방은 거의 가진 것 없는 농부의 상태에서 황제에 올랐고
그리고 중국을 완전히 다시 통일했다는  위업을 이루었다.
상대적으로 광무제는 전한이라는 후광, 자신의 호족으로서의 지위를 활용했다.
마지막으로 조조는 어느 정도 기반이 있는 호족에서 출발했지만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에서 점수를 적게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체제의 지속성이다.
유방의 한은 이후 400년 이상을 간다. 오죽하면 유비조차 촉한이라고
아류를 만들어 이어가려고 노력할까.
광무제는 더 짧고 후한의 체제는 전한 보다 훨씬 불안정했다.
마지막으로 조조의 경우는 3대를 넘자 곧바로 무너져버렸다.

완전한 정복의 달성 그리고 오래 남을 수 있는 체제의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조조의 성과는 유방 보다는 한참 미흡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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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변한다.

사람은 더 잘 변한다.

여자의 마음도 변하는데 하물려 권력을 잡은 군주는 어떠하랴?

조조를 보면 처음 출발은 매우 성실한 충신이었다.
당대의 관상가가 조조를 보며 현세의 충신, 난세의 영웅이라고 칭한 것은 딱 바로 본 것이다.

상황에 따라 동탁의 난에는 목숨을 걸고 의병을 일으켜 한왕조를 지키려 했지만
나중에 자신이 승상의 지위까지 오르자 자식에게 물려줄 욕심을 낸다.

그 과정에서 계속 자신은 욕심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를 액면 그대로 믿고 열심히 한왕조를 위해 일하려 하던 순욱이나 순유는
조조의 야심에 걸림돌이 되자 죽음을 맞게 된다.

조조가 처음부터 악인이었을까? 답은 아니다다.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자신의 작전이 문제가 있었다면 먼저 통곡하고
부하들에게 눈물로 과오를 사죄했다.
자식이나 조카 보다 측근인 전위의 죽음을 더 아쉬워했다.

법을 만들면 자신부터 지켜서 모범을 보였다. 보리밭을 들어가면 죽인다고 했다가
자신의 말이 놀라 보리밭을 들어가자 죽는 시늉까지 낸 사람이다.

하지만 권력이 강해지면서 서서히 변한다.
자신의 왕조 건설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자
이유가 안되는 걸 가지고 양수나 공융,최염을 처벌한다.

바로 여기서 인간의 영악함을 알아야 한다.
고락을 같이 해보라는 것은 이런 면들 때문에 하는 말이고 연애에서도 4계절을 사귀어보아라
화른 내게 해봐라 등도 비슷한 맥락이다.

과거의 민주화 투사들인 YS,DJ나 노동변호사 노무현이 권력을 잡더니 어떤 식으로
변해버리는지 우리는 잘 경험했다. YS에게 아들 현철의 전횡을 간언하던 박관용 비서실장은
결국 자리에서 날라갔다. 이런 걸 보고 역린을 건드렸다는 표현을 쓴다.
삼국지에 나오는 양수의 죽음은 이렇게 역린을 건드렸을 때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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