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해도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다. 원소는 돌아가서 남아있던 병력을 이끌고 자신에게 반기를 들려는 세력을 격파하면서 재기를 도모했다. 하지만 원소의 가장 약점은 그에게 결전의 장에서 물러난 비겁자라는 평판이 붙었다는 점과 좋지않은 건강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후계체계가 불안정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을 때가 다가오면 판단이 흐려지고 마는 같다. 원래부터 나빠지고 있던 원소의 건강은 참담한 패배로 매우 않좋은 상태가 되었다가 재기하지 못하고 결국 죽고 말았다. 이제 조조와의 대결은 원소의 자리를 물려받는 후계자에게 넘어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원소 진영이 분열되고 말았다.

농경사회의 전통대로 장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원담과 능력위주의 인선을 주장하는 원상의 세력은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대목에서 서로 갈라져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맞섰다. 둘이 힘을 합쳐도 상대하기 쉽지 않은 조조를 앞에 놓고 서로 싸운다면 결말은 보아도 뻔한 것이다. 과거에 원소와 원술이 서로 싸우다가 원술부터 몰락해버렸는데 이제 비슷한 모습이 나오는 것이다.

 

조조는 대목에서 원담과 원상을 분리시켜 대처해나갔다. 동생과의 싸움에서 밀려난 맏이인 원담이 조조에게 화친을 맺자고 제안했고 조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원담을 좋은 말로 타일러 사돈을 맺자고하고 원담의 딸을 보내라고 한다. 겉으로 보면 사돈의 관계이지만 내용을 보면 원담쪽에서 하나를 인질로 잡히는 것이다.

 

이렇게 해놓고 원상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시킨다. 기회를 틈타 원담이 자기 세력을 회복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서 수많은 수하 장수들이 조조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넘어간 장수들 중에 후일 죽는날 까지 조조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같은 사람이 원소 밑에서는 평범하게 보내다가 조조 밑에서는 화려한 활약을 했다면 결국 문제는 주인의 역량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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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간 대치가 계속 되자 조조는 원소에 비해 불리함을 압도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일단 병력이 불리한 점은 그냥 대치만 때는 느껴졌지만 그나마 가지고 있던 식량 또한 거의 여유가 없었다. 위안 삼을 있는 것은 하나 상대방이 먹여야 입이 많았고 본거지로부터 거리가 멀어서 날라야 군량의 보급에 어려움이 있다는 점이었다. 원소는 후방의 물자가 상대적으로 풍부했지만 막상 전장까지 나르기 위해서는 노력이 제법 들었다.

조조가 당시 힘이 다하도록 싸우다보니 진이 빠져서 본거지를 지키고 있는 순욱에게 편지를 띄워 그냥 물러나면 안될까 하는 죽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순욱의 답은 아주 냉정했다. 거기서 한발을 물러서면 천하를 잃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뒤로 물러설 수는 없고 그렇다고 앞으로 밀고 나갈 있는 것도 아닌 진퇴양난의 상태에서 조조에게 천운이 따른다. 원소쪽의 참모 한명이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조조에게 넘어온 것이다. 원래 조조와 동향이었던 허유라는 인물은 개인적으로 공명심이 강하고 금전을 밝히는 편이었는데 원소로부터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불만을 품어서 홀로 빠져나와서 조조의 진영으로 넘어온다. 허유로부터 원소의 군량수송대가 오고 있다는 귀중한 정보를 얻게 되자 이를 의심하는 참모들의 진언을 뿌리치고 조조는 결단을 내려 싸움을 시작했다. 차례에 걸친 기습 공격으로 원소의 군량을 획득해버렸고 대군을 먹일 없게 원소의 군대는 싸우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붕괴하게 된다.

식량을 놓고 싸운 전투에서 지자 원소는 비겁하게 홀몸으로 약간의 병력을 이끌고 도망가버렸다. 남아 있던 원소의 군대가 없이 조조에게 항복하였는데 이를 처리하는 문제에서 매우 냉혹한 고대의 방법이 나온다. 외견상 상대방이 진심으로 항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달아 모두 생매장하는 극단적인 처리를 하게 된다. 예전에 항우가 진의 항복한 사졸을 이렇게 죽이자 진나라 사람들의 원한이 골수에 박혔고 이후 유방과 항우의 천하 쟁패전에서 전적으로 유방을 후원한 사례가 있었다. 이런 전례에도 불구하고 조조가 방법을 택해야했던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보여진다. 당시는 식량의 확보가 가장 문제였고 따라서 싸움을 이겨 간신히 자기 군대를 먹일 것을 확보했지만 포로까지 먹일 수는 없는 상태였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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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에서 첫번째 판인 관도 싸움을 통해 중원의 승자가 결정되게 된다.

여기서 잠시 진영의 최고 지휘관들인 원소와 조조를 살펴보자. 당대의 여러 사람들이 둘을 놓고 내린 평은 둘로 나뉜다. 중원의 패자가 하나가 것이라는 점에는 모두들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지만 어느쪽이 승리 할지에 대해서 완전히 장담할 수는 없었다. 싸움이 끝나고 원소의 진영을 보면 조조측의 주요 인사들이 양다리 걸치기 위해 보낸 편지들이 다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식으로 양쪽에 어정쩡하게 걸쳐서 눈치를 보는 세력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싸움의 3자의 입장에 놓여있던 장수라는 권력자의 참모인 가후의 논리는 간명했다. 조조가 이길 것이고 조조의 편에 서야 원소편에 것보다는 훨씬 좋은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점이 요점이었다. 얼마전까지도 칼을 서로 겨눈 원수였지만 가후의 판단으로 장수는 단번에 조조편으로 돌아서게 된다. 조조 또한 과거 자신의 아들과 조카를 죽인 원한을 접고 장수를 후대하였다. 사실 거꾸로 보아도 이렇게 제발로 오는 사람을 박대한다면 다시는 아무도 저절로 항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역시 조조의 계산은 빨랐고 이렇게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 가후의 추정논리 또한 보통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다시 싸움으로 돌아가보자. 원소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우세한 물량이었다. 차지하고 있는 땅이 훨씬 컸고 전란을 겼었기에 안정되었다. 거기에서 동원할 있는 병력이 압도적으로 우위였으며 이들을 먹일 있는 식량의 보급 또한 훨씬 수월하였다. 숫자를 대충 세어본 원소 진영은 패배의 가능성을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많은 병력을 동원해서 세력의 우위를 통해 상대를 압도하려는 압박전략이었다.. 이에 반해 조조는 병력은 작지만 가장 뛰어난 정예를 뽑아 싸움에 임했다. 이렇게 이유는 무엇보다 양쪽이 가지고 있는 군량의 차이가 컸기 때문이었다. 조조는 많은 병사를 데리고 나갔다고 해도 먹이기가 힘들었다.

 

관도나루 대전의 서막은 기병전이었다. 원소가 기병대장 안량은 북방계 이민족으로 추정되는데 말위에서 싸우는 솜씨가 무척 뛰어났다고 한다. 그가 이끄는 기병대가 조조의 선봉과 부딪혔을 조조쪽에서도 상당히 고생했지만 조조가 꾀를 써서 이를 격파했다고 한다.

크게 믿었던 기병이 무너지자 당황한 원소는 지구전으로 들어갔다.

양쪽은 각기 진영을 건설하고 앞에는 흑산을 만들어 상대방의 공세를 막고 진영과 진영 사이는 흙길을 만들어 서로 통하도록 했다. 어떨때는 지하도를 뚫어 상대방의 진영으로 처들어가보려고 했지만 실패하기도 했다. 이렇게 벽뒤에 숨어서 서로에게 활을 쏘아대는 형세는 삼국지보다 400년전에 유방과 항우가 결전한 방식이었다. 이러한 참호전에서는 우선 식량과 물자의 보급이 성패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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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조조와 원소의 대결

 

처음 천하대란이 발생했을 조조와 원소는 오히려 가까운 사이였다. 조조는 이전에 원소를 동맹군 대표로 추대한 경력도 있기도 했지만 우선 사람의 근거지는 약간 떨어져 있었다.

여럿이 섞여서 무작정 싸울때는 먼저 자신에게 가까운 상대부터 꺽는 것이 필요하다. 괜히 먼거리에 있는 적들을 공략해서 이겼다 하더라도 그곳을 온전히 지키기는 힘들다. 그렇게 보면 한발 한발 본거지에서 전진해나가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이러한 원교근공遠郊近攻이라는 전략은 전국시대의 진나라에서 범수라는 사람이 제기하였는데 이때쯤해서는 하나의 상식이 같다. 따라서 조조와 원소는 동맹을 맺고 각기 여포와 공손찬을 견제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원소가 자리한 산동지방은 인재도 많고 자원도 풍부했으며 무엇보다도 지정학적으로 유리한편이었다. 후면에 공손씨의 세력이 있기는 했지만 이를 꺽고나서는 배후도 안전했기에 한방향으로 나아가 중원으로 도전하기도 좋았다. 하지만 원소는 때를 읽어내기 보다는 자기 세력을 서서히 키워나가는 쪽을 선택하였다. 한편으로 조조를 한참 낮게 보는 원소의 자만심도 몫을 하였다.

 

아래로 보던 조조가 세력을 충분히 기르더니 이제 도전을 해오자 양자간의 정면대결이 벌어지지 않을 없었다. 싸움은 후일 관도나루 대전이라고 불리운다.

삼국지의 세계에서 초반의 세를 결정한 것은 다음 번의 커다란 싸움이었다.

첫째 조조와 원소가 겨룬 관도나루 싸움.

둘째 조조의 남하에 맞서 유비와 손권이 동맹을 맺고 요격한 적벽싸움.

셋째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위해 동쪽으로 갔다가 패배한 이능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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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조조의 군대

 

조조의 군대가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황건적과의 싸움이었다. 연주에 머무르고 있을 황건적의 무리가 대규모로 몰려오자 지방관들이 두려워해서 과거 황건적을 무찔렀던 조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조조는 지략으로 황건적을 맞아 싸워 크게 격파했다. 여기서 황건적의 무리라는 것을 살펴보면 노인과 여자, 아이들까지 포함하게 되니 실제 무기를 들고 싸울수 있는 사람의 수는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들도 오랜기간 훈련을 받은 정규병이 아니라 단지 기세에 의해 수를 믿고 밀어붙이는 것이지 지도자에 의해 통솔되는 군대에 맞서기에는 부족했다.

 

패배한 황건적에서 추려낸 젊은이들로 이른바 청주병이라는 군대를 만들었는데 오랜 기간 조조군의 주력이 되었다. 농민에서 도적으로 다시 붙잡혀 병사가 이들의 사회적 지위가 그렇게 높지 못한것도 당연할 밖에 없다. 이른바 병호라는 이름으로 별도의 호적을 통해 관리되었고 다른 민호와 자유로운 통혼도 어려웠다고 한다.

국가로부터 땅을 받아서 둔전을 하다가 전쟁이 나면 소집되어 병역에 종사하는 고달픈 신세였다. 하지만 이들은 포로가 되어 죽을 목숨을 거두어주고 먹여주기에 어쩔 없이 따라나설 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들은 조조와 함께 오랜 시간 전장터를 누비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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