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이라는 정치 경제 공동체를 만들면서 벌어진 일 중의 하나에 각국의 역사학자들을 한데 모아 공동의 역사책을 만드는 작업이 있었다. 한 민족에게 영광을 안겨준 영웅이 다른 민족에게는 잊기 어려운 고통을 남겨준 침략자로만 기억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 시각의 불일치를 하나씩 교정해가면서 서로의 입장에 대한 이해를 키워가자는 것이 이 작업의 취지였다. 이제 한반도에서 열리고 있는 남북화해의 시대에도 그런 교정작업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누구도 쉽게 나서지 못하는 현실을 지켜보는 중이라 유럽사회의 이와 같은 노력은 꽤 부러운 일이다.
그런 역사적 화해의 분위기 속에서도 영국과 프랑스간에는 꽤 오랫동안 대립되어오던 해석의 문제 하나가 남아있다. 바로 잔다르크라는 여인이 만들어간 역사적 행위에 대한 부분이다.

잔다르크의 행위를 그냥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쭉 추적해본다면 사실들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한적한 농촌에서 평범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고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읽고 쓸 줄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무척 특이한 종교적 체험이 있었다. 자신이 신의 계시를 받았으며 왕태자와 국민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왕태자가 머무르는 곳으로 왔다.

이런 분위기를 틈타 영국의 왕은 자신에게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하며 프랑스에 들어와 파리 등 여러 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군림하였다. 귀족이나 왕가의 결혼에 의해 국경의 모양새가 바뀌는 당시 풍토에서 이런 주장이 그리 부자연스러운 것은 없었다. 원래 영국의 당시 왕가는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방에 머물던 군사집단이 건너가서 정복을 해 세웠던 관계로 두 나라 사이에는 복잡한 영토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섬나라에서는 왕노릇하지만 바다 건너로는 신하의 모습을 하는 이중적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백년전쟁은 이런 식으로 왕과 왕의 부자연스럽고 긴장하던 관계를 가지던 양측이 결국은 무력으로 충돌하게 된 것이다. 바다를 건너온 영국군은 숫자로도 1만5천 내외의 그리 많지 않은 수준이었고 출신도 대부분 기사의 입장에서는 상대하기 경멸스러운 농부들이 많았다. 몇백년 전에는 프랑스의 기사들이 바다 건너가 영광스러운 승리를 쟁취했기에 귀족들이 가소롭게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사정이 바뀌었다. 여전히 갑옷입고 말탄 기사들은 용감하고 충실히 싸웠지만 전쟁의 양상은 무척 바뀌었다. 영국의 시골 농부들에게 장궁이라는 무기를 쥐어주어 맨 앞의 대열에 배치했는데 이들은 150M 정도의 거리에서 자신에게 돌격해오는 기사들의 값비싼 갑옷을 꿰뚫어버렸다. 당시에 기사 하나를 완전히 무장시키기 위해서는 수십 마리의 말에 해당하는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 귀한 존재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땀흘려 농사짓는 농노의 신세가 되어야 했다. 그게 바로 중세의 봉건사회였는데 이제 그런 귀한 존재들이 천하디 천한 농노 출신들이 날리는 화살에 마구 거꾸러지는 것이다. 도저히 체면이 용납하지 않는 일이라 기사들은 분개했고 계속 더 큰 용기를 내어 달려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같았다. 전투 마다 많을 때는 1만명에 달하는 프랑스 군이 무모한 돌격으로 희생되었지만 전술을 바꾸는 지혜를 발휘한 것은 한참뒤였다.
하지만 영국군도 약점이 있었다. 영국이 원래 가난했고 군주의 권력이 강하지 못했기에 본국으로부터 충분한 보급을 받아서 전쟁을 유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원래 출신들이 농부였기에 정복지 주변을 돌아다니며 무차별적으로 약탈을 하고 다녔다. 그 장면의 하나가 바로 영화 처음에 나오는 잔다르크 마을의 학살이었다. 덕분에 농민들은 영국군이라면 이를 갈았고 종종 힘을 합쳐 봉기해가지고 후방을 습격했다. 전쟁을 정치의 연장으로 간주하기 보다는 용맹을 발휘할 공간과 정복자의 권리행사 정도로만 간주했던 당시의 한계였다. 그래서 영국군도 프랑스의 기사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농부들과 겨루고 싶지는 않았기에 물건을 빼앗는 자는 죽인다는 강력한 군율을 내세워서야 간신히 통제를 할 수 있었지만 이건 전쟁의 거의 막바지 이야기였다.

당시의 시대가 마지막 십자군 전쟁의 열광이 끝난지 얼마되지도 않았기에 사회는 종교적 분위기가 꽤 강했다. 물론 이런 열광은 종종 토속적인 미신과 혼합되어 기복적인 성격을 띄는 경우가 많았기에 여기저기서는 마녀사냥이 성행했고 교회는 이단 논쟁도 쉬지 않고 이어갔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그려내는 세계를 생각해보면 이 시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잔다르크가 처음 왕태자를 만나게 된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당시 궁정의 지도부는 백성들이 기적을 기대하는 분위기를 고려해 평시라면 있기 어려운 잔다르크의 접견 의뢰를 받아들였다. 당시 프랑스에게는 실은 상대를 물리칠 잠재력은 충분히 있었다. 전술적인 교정과 함께 새로운 군사들을 무장시켜 영국과 비슷한 방식의 싸움을 전개하며 상대의 보급을 끊는다면 본거지에서의 싸움은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도부의 자신감의 부족이었다.
당시 왕태자의 아버지 샤를 6세는 정신병자였고 어머니는 미모였지만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일반국민이나 왕태자 주변에서는 그가 정말 아버지의 아들인지를 의심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와중에 이 여인은 어느날 본인의 입으로 왕태자는 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공개적인 선언을 해버렸다. 사정이 이러하니 왕태자 자신도 항상 출신에 대해서 자신 없어 할 수 밖에 없었고 왕위를 둘러싼 피비린내나는 싸움에 별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잔다르크가 보인 몇가지 신기한 일도 인상적이다. 군중속에서 왕을 알아본 것이나 곧장 달려가 신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도 놀랍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궁정 카톨릭 사제들과의 논쟁이었다. 지식의 많고 적음을 놓고 씨름을 하려는 유식한 분들이 계속 무엇인가 놀라운 징표를 보여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여기에 대해 잔다르크는 딱 잘라서 “왜 내가 험난한 적진을 뚫고 무사히 이곳까지 온 것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유식한 여러분들은 왜 오를레앙의 시민들이 받는 고통을 외면한채 편안히 호의 호식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까?”라는 답변을 던져버린다. 이는 예수가 당대의 바리새인들에게 대하던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신앙을 외형적으로 드러내는 형식으로 계속 이끌어던 제도권 교회에 대해서 내면의 믿음을 더욱 강조하며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개혁자의 도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어쨌든 잔다르크는 오를레앙의 싸움터로 나간다. 당시 이 도시는 군주가 이미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공격을 받았는데 중세에는 이런 행위는 매우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포위전 또한 매우 치열했지만 왕태자는 그동안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 벌인 잔다르크의 활약은 매우 대단했다. 영화는 그런 전투장면을 다양하게 재현시킨다. 여러 차례 놀라운 예지를 발휘하며 처음에는 시종 회의적이던 지휘관들을 자기편으로 만들며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 덕분인지 요즈음 전쟁영화는 무척 사실적으로 바꿔 말하면 여과없이 잔인한 장면들을 내보인다. 목이 날라가고 팔이 잘리고 돌을 맞아 으깨지는 장면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영화의 재미를 위해서 만들어진 유머스러운 장면도 하나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긴팔을 가지고 있는 무기가 나온다. 트레부쉐라고 불리우는 이 무기는 성을 향해 돌을 날리는 도구로 긴팔만큼이나 꽤 먼 거리를 공격할 수 있다. 여기서 날라오는 돌을 지켜보던 성주의 부하가 돌이 날라옵니다, 그래 어디냐, 바로 여기요라고 말하는동안 벌써 돌은 성주의 머리 위 벽을 무너뜨린다. 한국의 어느 지방에서 “아버지 돌 굴러와유”하고 느릿 느릿 말하는 습성을 농담으로 만든 것들과 엇비슷하다.

오를레앙의 승리 다음으로는 내친김에 아예 랭스까지 손에 넣었다. 이 곳의 성당은 원래 대대로 카톨릭 교회가 프랑스의 왕들의 대관식을 거행하던 장소다. 그래서 더욱 정통성 싸움을 놓고 중요한 공간이 된 것이다.
여기서 성유가 들었던 병이 비자 자기 화장품에서 꺼내어 채우는 왕비의 말과 행동을 눈여겨보자 나중에 잔다르크를 사로잡은 부르군드 공도 자신이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당시 사회는 벌써 십자군 전쟁의 패배 후유증과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신의 지배를 벗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민중들은 달랐다.
겉으로 보면 무척 약해서 칼든 군인들에게 끌려가던 사제들도 대관식을 이끌어가는 모습은 무척 화려했다. 정말로 신이 그자리에서 왕을 축복하듯이 보였고 왕을 따라 여기까지 왔던 많은 신하들에게도 같은 감정이 전달되었을 것이다.
왕을 왕답게 만들었다면 이제 잔다르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물론 영국군을 남김없이 몰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중간 목적지까지 올라선 왕은 좀 더 차분하게 전쟁을 수행해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잔다르크를 계속 군사적인 영웅으로 만들 경우 발생할 사태 또한 염려했다. 그래서 더 이상 잔다르크에게 많은 군사를 주지 않았고 결과는 패배였으며 최종적으로는 잔다르크가 포로로 잡히게 된다.
잔다르크 자신도 이런 운명을 알았다고 전해진다. 항상 나에게는 수명이 일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고 다녔고 그래서 더욱 자신의 할일을 서둘렀다.
잔다르크를 잡아들인 부르군드 공은 꽤 많은 돈을 받고 그녀를 영국군에게 넘겨주었다. 이 과정에서 샤를 왕은 오늘의 자신을 있게 만들어준 잔다르크를 구하는데 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후세의 역사가들이 이대목에서 “배은망덕을 왕자들은 미덕으로 여겼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어쨌든 성녀인가 마녀인가를 놓고 재판을 벌이려는 영국군의 의도는 명백했다. 상대편에게 성녀가 있다면 자신들이 악마의 군대가 되기 때문에 이 싸움은 더 이상 끌어가기 힘들것이었다. 그렇지만 재판은 무척 길었다. 교육도 받은 바 없는 어린 처녀가 교회의 유식한 심문관들을 상대로 한 문답에서 놀라운 답변들을 하는 것에 모두들 놀랐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일부 내용들이 나오지만 즉흥적인 답변을 그렇게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한번 예수가 수많은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에서 보여주었던 놀라운 지혜가 보이는 듯 했다.
어쨌든 결론은 심문관들의 트릭속에서 잔다르크는 한번 자신을 유죄라고 시인하고 목숨을 구원받았다가 다음날 이를 철회한다. 그리고 화형에 처해진다. 이 장면은 아주 짧고 간략하게 영상처리된다.
잔다르크가 죽고나서도 전쟁은 계속 되었다. 많은 전쟁영웅들이 나타나 해방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이들의 등장은 무엇보다 잔다르크의 선행 행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년 남짓의 활동만으로도 그녀는 역사의 진로에 커다란 변화를 주는 엄청난 기적을 발휘한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왜 이렇게 기적이 없습니까”하고 묻는 사람에게 카톨릭의 신부는 “겸손히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에게 결코 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잔다르크가 들은 목소리가 정말로 하늘에서 내려왔는지를 과학으로 입증하는 것은 우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보여지는 것만 믿으려 하는 현실주의자라고 하더라도 그녀가 이루어낸 일을 부정하며 역사를 바라볼 수는 없다.
만약 그녀가 평범한 농부의 딸로 돌아가 여생을 다 보내고 행복하게 마무리했다면 후대인들이 그녀를 아쉬워했을까 생각해보자. 거기에 죽음이 있었기에 그 삶이 더 극적인 것 아니었을까? 결국 예수, 베드로, 바울이 걸어갔던 순교자의 길을 다시 한번 발견했기에 인상적인 것이다. 보이는 대로 믿는답시고 이들을 목수, 어부, 무두질쟁이라고만 보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마찬가지로 잔다르크를 농부의 딸로만 보려한다면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역사속에서 자기 확신을 가진 존재가 얼마나 위대해지는가를 다시 확인시켜주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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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body’s fool

폴 뉴먼이 정말로 나이에 걸맞게 늙은 노친네의 역할을 담당한다. 공간은 뉴욕 북쪽의 어느 조용한 시골이다. 식당도 하나 술집도 하나 순찰차도 동일한 차 하나 밖에 보이지 않는 정말 작은 동네다. 배우가 많이 나오지도 않았지만 그 중에서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이 단 한명도 없었다는 점도 특이하게 느껴진다. 정말 미국의 시골 촌구석의 전형이라는 느낌이 드는 그런 동네였다.
이곳에 살고 있는 설리는 나이 육십이 다되었지만 하숙하면서 하루 하루 벌어야 근근이 살아가는 날품팔이 노동자다. 그는 얼마전 일을 하다가 무릎을 크게 다쳐서 수십개의 병원을 왔다갔다 해보았지만 돈만 많이 쓰고 완치되지 않았다. 더욱 큰 불행은 고용주가 약간의 서류상 착오를 이유로 치료비를 대납해주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억울해서 재판까지 가보았지만 결과는 패배였다.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관객들은 영화의 제목에 ‘바보’라는 단어가 들어갔던 것을 떠올리게 된다.
설리는 화풀이를 하기 위해 고용주의 사무실에 갔지만 여전히 고자세인 고용주는 법률상의우위를 활용해 치료비 지불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설리가 하루를 벌어야 하루를 살수있다는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새로운 일거리를 떠맡게 한다. 참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구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렇게 일하러나간 설리는 차에 블록을 내던지는 자신에게 고용주를 던져버리는 용기가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현실과는 분명 거리가 있는 꿈이다. 더해서 짐을 다 싣고 몰고가던 차가 갑자기 펑크가 난다.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저렇게 낡은 차도 굴러갈 수 있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할수없이 길가에서 태워줄 사람을 기다리다가 세워진 차에서 아들이라는 사람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뭔가 어색한 장면이다. 몇 년만에 처음 서로 만났지만 결코 반갑다는 환영의 제스처가 보이지 않는다. 알고보니 설리는 아들이 육개월밖에 안되었을 때 집을 나와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설리의 불행은 그가 스스로 가정을 나옴으로써 하나의 결손가정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 그가 아버지와의 대화를 포기하고 집을 나온 과거에 있었던 것 같다. 스스로 받지 못한 사랑을 남에게 베풀지도 못할 것 같이 느꼈을까?
이런점은 특히 그가 아버지가 물려준 집을 완전히 내팽겨쳐버린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금만 수리해서 세를 주거나 아니면 팔아도 꽤 괜찮은 수입이 되었을 그런 집을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완전히 방치해버린 것은 그의 고집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라고 그의 전부인은 누누히 강조한다.
이런 그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하숙집 여주인의 아들로 성공한 은행직원인 그는 이제 마을옆에 대규모 위락시설단지를 꾸미는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수억불이 투자되는 돈벼락 프로젝트를 끌어들이는 그의 눈에 하루 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육체노동자는 아예 안중에도 없다. 그래서 집에서 내보내달라고 어머니에게 이야기하지만 답은 노우다.
이런 무시를 받는 설리에게도 긍정적인 면들이 있다. 마을의 조금 정신이 어지러운 노친네가 추운 겨울에 길을 가겠다고 나섰을 때 그는 자신도 허겁지겁 나오느라 신발을 신지 않은 상태였지만 잘 유도해서 가게로 돌려보낸다. 무척 발이 차가왔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남을 위해 베풀줄 알고 있었다. 하숙집의 주인 아주머니를 위해서도 어려운 일이 있다면 나서서 도와드린다. 아주머니가 가장 곤란함을 느끼는 순간에도 아들은 없다. 가장 어려운 고민을 하는 순간에도 아들에게는 그말을 하면 안된다. 이렇게 빡빡해진 미국 가정의 모습의 단면이 잘 보여진다. 물질적 욕구속에 매몰되어 정말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 아닐까하는 물음을 성공했다고 혹은 성공하려고 노력하며 바쁘게 사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것 아닐까? 하지만 설리는 반대다. 비록 삶이 고달프더라도 그의 마음은 결코 메마르지 않았다는 점을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장면이 여럿 이어진다.
그는 새로 만난 손자에게는 뭔가 다른 새로운 애정을 느끼게 된다. 아직 여리게 느껴지는 소년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감싸안고 돌봐주려는 감정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였다. 아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왜 아버지 노릇은 거부했으면서 할아버지 노릇은 하려고 드시죠”하며 묻게된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손자에게 애정을 쏟아가는 것을 보면서 아들과도 점차 화해를 하게된다.
그에게는 어느 정도 현명함도 있다. 용기가 부족한 손자에게 용기를 키워주기 위해서 몇가지 교육을 시키는데 제법 요령이 있었다. 손자에게 처음에는 시계를 쥐어줘서 일정 시간 버티도록 만들고 영화의 마지막에는 의족을 들고 곤란을 겪고 있는 변호사 양반에게 갔다주는 험난한 임무를 수행시킨다. 어린 아이의 모든 것을 바로잡는 것은 교육아닐까? 한편으로는 아들의 문제도 해결한다. 서로 고집을 세우며 평행선을 긋고 맞서던 아들 부부를 보면서 반은 강압적으로 아들에게 먼저 전화연락을 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본래 그럴 자격도 없었으면서 말이다. 결국 아들도 부인과 화해를 하게된다.
영화 막판에는 그의 곤란이 극에 달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이 벌어진다. 늘 자신에게 시비걸던 동네 경관이 그가 정말 어쩔 수 없이 차를 인도로 몰고 있는 것을 보더니 느닷없이 체포하겠다고 나섰다. 나도 어쩔 수 없다면서 계속 차를 몰고가는 그에게 총알이 발사된다. 물론 위협사격이었지만 화가난 그가 나가서 경관의 코를 쥐어박아버렸다.
유치장에 갖히는 신세가 되다보니 다 부질없이 보인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신은 한 가난한 남자에게 시련을 주시는 것일까?
하지만 이 순간부터 그에게 상황이 바뀌어나간다. 먼저 영화시작에 나왔던 법정이 다시 등장한다. 법정은 개인과 사회가 가장 곤란한 얼굴로 만나서 결정적 방향을 결정짓는 장소다. 영화의 시작에서 법정은 설리에게 제법 가혹한 판결을 내렸지만 이번에는 반대였다. 나이 지긋한 판사는 경륜을 담은 판단력으로 상황의 불가피성을 인정해 간단한 처벌로 설리를 놓아주고 요령없고 단순한 경관을 나무라게된다. 나가는 경관의 입에서 “미국이 어떻게 되려고 이 따위 판결이 나오게 되나”하는 소리가 튀어나오지만 반대로 판결이 나왔다면 아마 설리를 비롯한 관객의 입에서 똑 같은 소리가 나왔을 것 같다. 하지만 너무 영화에 푹 빠지지는 말아달라. 요즘도 뉴욕에서는 총을 들지도 않은 용의자를 경찰이 마구 쏴죽이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니까.
어쨌든 돈없고 삶이 고달픈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행운이다. 마지막까지 놓고 싶지않는 행운이 설리에게도 차례대로 찾아온다. 첫번째 행운은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그에게 도주여행에 같이 해달라고 한 것이다. 정말 남자로서 이렇게 감격스러운 순간은 없었을 것이지만 그는 지긋이 미소를 지으며 감사하지만 사양한다는 말로 마무리한다. 다음은 그가 세금을 내지 못해 억류당했던 집을 하숙집 여선생님이 대납해준덕에 되찾게 된것이다. 물론 앞서서 그가 친절과 애정으로 가족같이 살아온 보답이다. 가족을 찾아도 머무를 집이 없다면 곤란할 것이지만 이 문제도 해결된다. 마지막으로 경마에 걸었던 행운의 수가 통해서 육천불 정도의 배당금을 받게되었다. 육만불도 육십만불도 아닌 육천불 정도의 돈도 주머니에 단돈 40불 밖에 남지 않았던 그에게는 정말로 크게 느껴졌다. 갑자기 모두가 그의 존재를 보다 소중히 여기게 되면서 그에게는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풍족함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정말 인생은 끝까지 살아봐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니 좌절하지 말고 끝까지 착한 마음을 지켜나가다보면 무엇인가 돌아올 것이다.

관객으로서는 결국은 앞서 떠올렸던 바보라는 영화제목에 “아무도 아니라” 수식어가 붙어있다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지금 나는 어렵고 이는 몇가지 조건과 나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지만 그래도 노력하면 삶의 즐거움이 쏟아질 수 있는 그런 행운들이 밀려올 수 있다는 그런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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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은 뉴욕이다. 바쁘게 아주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는 뉴욕의 맨하탄이 적당한 공간인 것 같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컴퓨터 그래픽으로 적당히 디지타이즈된 모습의 뉴욕거리가 나오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남자주인공 톰 행크스가 Joe Fox 라는 인물로 나온다. Fox 가문은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대형서점 경영으로 돈을 벌고 있는 사업가 집안이다. 특히 조는 수완이 매우 뛰어난 청년 사업가로 크게는 사업장개설과 같은 기획에서 작게는 종업원의 심리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비결까지 경영에 필요한 요소들을 잘 터득하고 있다. 하지만 사적으로보면 이 집안 남자들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들 여자문제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옛날에 잠깐 보았다는 여자가 미인이었고 데이트까지 했다고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이 여자는 실은 여자주인공인 캐서린 켈리(멕 라이언)의 어머니로 쉽게 계산해보아도 벌써 한세대의 나이 차이가 난다. 아무리 노인이지만 예전해 한가락한 솜씨가 눈에 띈다. 다음을 조의 아버지는 영화시작할 무렵에 막 새로운 결혼에 골인하려는 중이었다. 상대방은 대단히 소비성향이 강한 금발의 미인이지만 나이는 자신의 아들과 별로 차이가 없어보였다. 이런 불균형한 결혼은 보나마나 거액의 위자료 소송으로 결판나기 마련이다.
우리의 주인공인 손자 조도 할아버지 아버지 보다 조금은 나은편이지만 그리 큰차이는 없어 보인다. 같이 동거하는 연인이 있는데 무엇인가 서로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상태인듯 보인다. 그래서 위안거리로 찾는 것이 바로 AOL(유니텔과 같은 미국 통신서비스) 메일을 통한 미지의 여인과의 만남이다. 그는 ny1415라는 아이디를 사용한다. 자신의 집주소를 표현한 간단한 아이디일 뿐이다.
그렇게 가상공간에서 만나고 있는 여인이 캐서린 켈리다. 그녀는 어머니가 시작한 작고 아담한 서점 Shop on the corner를 운영하고 있다. 늘 그렇듯이 단발의 금발미인인 그녀는 싱그러운 미소를 항상 얼굴에 담고 있다. 잠옷차림으로 막 침대에서 일어나 총총걸음으로 방안을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은 늘 20대 후반정도로만 보인다. 그런 그녀도 동거하는 유능한 남자친구가 있지만 무언가 잘 맞지 않는 듯이 보인다. 잠시라도 짬이 나면 인터넷의 가상공간을 누비고 다니는 캐서린에 비해서 남자친구는 아직도 틱틱 소리가 나는 타자기를 선호한다. 부드러운 촉감과 소리를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고 해도 지금 시대에는 너무 느린 것 아닐까? 남자친구의 전공은 평론인 것처럼 보이는데 열렬한 민주당 지지자이고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태도를 잘 취한다. 캐서린의 통신 아이디는 shopgirl이다.
조나 캐서린 모두 이제는 매일 상대방에게서 온 메일을 기대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사이가 됐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소재는 다양하다. 조는 코폴라 감독의 영화 <대부>에 대사를 거의 외울 정도로 뿍빠져있는데 대부란 영화가 그렇듯이 조의 남성적이고 대결적인 성격을 잘 나타낸다. 캐서린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무려 200번 이상 읽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19세기 초반의 영국의 중산층가정을 배경으로 결혼을 앞둔 젊은 여성이 자신에게 부가되는 온갖 사회적 규율을 뿌리치며 개성을 확보하고 결국 원하는 것을 얻게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캐서린의 성격 또한 개성과 자기 주장이 강하지만 기본적으로 섬세하고 여성적으로 보인다.
이 두사람의 가상공간에서의 거리는 측정하기 어렵지만 사실 현실공간에서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집도 한블럭 정도 거리이고 출근시간도 비슷해서 여러 번 스쳐지나가기도 했고 또 둘다 책을 다루는 비즈니스를 하기 때문에 결국은 얼굴을 대면하고 만나게 된다.
첫만남은 우연찮게 이루어졌다. 조가 새어머니의 아들, 할아버지의 딸을 데리고 잘 놀아주다가 캐서린의 서점으로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다. 첫눈에 캐서린이 꽤 미인이라는 것을 느꼈지만 어차피 둘은 경쟁자이고 보면 조도 자신을 노출해서 불편한 관계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이름을 물어보는 질문에 그냥 조라고만 불러달라고 했지만 사실은 Fox라는 성을 가르쳐주고 싶지 않은 마음 씀씀이 일 뿐이다. 그래서 계산도 크레딧 카드로 하지 않고 백달러에 가까운 돈을 현금으로 내놓는다. 실제 미국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이런일은 흔치 않다. 이런 주의깊은 행동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작은 해프닝이 벌어진다. 조가 데려간 새어머니의 어린 아들에게 캐서린이 여우라는 단어의 스펠링을 물어본 것이다. F-O-X라고 잘 대답한 것까지는 좋은데 똑똑한 아이를 격려하기 위해 이어서 물어본 개, 고양이에 대해 똑같이 F-O-X라는 대답만이 튀어나온다. 아이가 FOX라는 단어를 알고 있는 이유는 단지 하나 자기의 새로운 성이기 때문일 뿐이다. 이런 감을 잡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찝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캐서린을 앞에두고 조는 허겁지겁 가게를 빠져나온다. 그러면서도 가게의 배치나 운영상의 장단점을 재빨리 눈에 담는다.
조가 왜 그런행동을 했는지는 곧 두사람이 파티에서 만나게되었을 때 알게되었다. 이 시점에서 조는 벌써 대형 서적 체인점을 바로 길너편에 만들었다. 무려 35%의 할인율을 내세우고 사람들을 유인하기 위해 편한 공간과 전문점 못지 않은 카푸치노 커피 서비스를 제공하는 그런 복합공간을 선보였다. 여기를 잠시만 훑어보아도 벌써 상당부분은 캐서린의 가게가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차용한 면이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조는 남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솜씨까지 나무랄 것이 없는 민완한 사업가다.
파티장에서 모든 것을 알아채고 분개한 캐서린이 조를 보면서 말을 쏘아붙일 때 조도 지지 않으려고 맞받아친다. 그렇게 싸우고 난 두 사람이 실은 자신만의 메일박스에서 서로를 기다리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나면 우습지 않은가.
어쨌든 사업상 물러설 수 없는 캐서린의 반격에 조와의 싸움은 치열해지고 그 공간은 조의 가게 앞에서의 시위, 방송을 통한 선전 및 TV토론회 등으로 확대된다. 이 과정에서 shopgirl은 ny1415의 조언을 받아 전투의지에 불타오르며 기세당당하게 조에게 맞선다.
이렇게 현실의 치열해지는 전투에서 지친 shopgirl과 ny1415는 한번 서로 얼굴을 맞대면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만나러 나간자리에서 조는 캐서린이 바로 shopgirl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차리고 아주아주 놀라게된다. ny1415를 기다리던 캐서린이 눈앞에 나온 조를 보고 귀찮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잠시 산만해진 머리를 뒤로 하고 조는 문을 나왔고 우리의 둔한 캐서린은 바람맞은 것에 대해서도 그리 화를 내지는 않는다. 참 좋은 성격의 아가씨라는 티를 한번 더 내는 것 같다.
다시 쇼핑몰의 전쟁으로 돌아가보자. 미국의 대형체인점들은 시간과 돈을 절약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한푼이라도 싸게 사고 있다는 강박관념을 심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쿠폰, 카드, 세일 등 별의 별 방법이 다 동원되는 이 전쟁에서 중소가게들이 살아남기란 무척 힘들다. 캐서린이 운영하던 전통과 문화의 공간은 이렇게 조의 체인점 앞에서 허물어지게 된다. 할수없이 점포정리를 위한 40% 디스카운트를 하고 마지막으로 문을 닫으며 걸어나오는 캐서린의 눈에는 저절로 눈물이 흐르게된다. 그렇게 발길을 돌려서 들러본 조의 슈퍼스토어는 한마디로 화려함과 편리함이 잘 조화된 복합체였다. 여기저기에서 캐서린의 가게에서 훔쳐온 아이디어를 잘 이용해 꾸며놓은 매장 사이를 걸으며 캐서린은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대형체인에도 약점은 있기 마련이다. 한 손님이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책 하나를 어렴풋한 기억으로 찾아달라고 종업원에게 부탁하자 신속, 단순, 정형으로 잘 무장되었지만 전문지식이 없는 종업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이디어를 훔치고 규모의 경제로 몰아붙이지만 상대가 축적해놓은 가치만은 쉽게 모방하지 못한다는 이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켈리가 저자와 관련서적까지 대답해주는 것을 멀리서 조는 지켜보고 있다.
조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서 여자친구와 함께 켈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여자친구는 출판사의 기획자로 실은
켈리가 남자친구의 결별은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다. 켈리가 이모같이 여기는 어머님 친구분이 자신의 추억을 더듬으며 스페인의 통치자와 사랑에 빠졌었다고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를 했다. 이 대목을 짚고 남자친구는 아주 경멸스러운 말투를 던진다. 요즘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를 보고 유럽의 지식인들이 느끼는 혐오스러움과 같은 맥락이다. 거기에 대해서 켈리가 나도 지난 선거에 투표를 하지 않았다고 말하자 남자친구는 화를 내고 다시 용서해줄께라는 말을 던진다. 이에 발끈한 켈리는 결국 헤어지는 빌미를 잡게된다.

잠자리를 요트로 옮기고 있었던 조는 거기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미국에서 요트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부에 대한 상징이다. 요트 자체 값도 엄청나지만 이를 유지하기 위해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영화 초반에 나왔던 Fox III라는 조의 요트 옆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Fox II는 물론 조의 아버지 소유일 것이다.
엄청난 부와 대조되는 갈 곳없는 초라함을 배경으로 잘 보여주면서 부자간의 대화는 요트안으로 옮겨간다. 이 대화를 통해 미루어 짐작컨데 조는 대단히 불안정한 가정에서 성장했다고 보여진다. 조의 실제 어머니와는 아마 이혼한 상태인 것처럼 보이고 아버지의 나머지 연인들은 조의 유모들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조가 안정된 가정을 바라는 갈증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조는 다시 메일박스 앞으로 돌아온다. 처음에는 머리를 쥐어짜서 갖은 핑계를 만들어보았지만 다 지워버리고 솔직히 사과하는 짤막한 편지를 쓴다. 아무리 화려한 언사도 진지함이 빠져있다면 결국 기교에 그칠따름이다.
결국 shopgirl을 찾던 조와 ny1415를 찾던 캐서린 이 두사람은 진정 갈망하던 서로를 확인하게 된다.

전에 를 보면서도 느꼈던 것인데 남녀의 만남은 결국 함께 할 공통의 기반과 서로의 약점을 잘 메워줄 수 있는 보완관계 두가지가 다 있을 때 이상적이지 않을까 한다. 캐서린의 강점은 매우 가정적이고 평온한 집안에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책을 파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만들어내는 매개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녀는 어느새 아동서적을 창작을 할 정도로 전문성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 저변에는 역시 풍부한 감수성이 깔려있다는 증거가 된다. 하지만 사업적인 측면에서는 아주 아주 꽝이었다.
여기에 비해 조는 대단히 수치에 밝다. 모든 것을 이익과 손해, 투입과 손실로 환원시킬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다. 커피가게와 책가게를 짬뽕시켜놓은 복합매장으로 성공하지만 늘 가슴 한편에는 허전함을 가지고 있다. 내가 정말 무엇을 하고 있을까? 기껏해야 책을 올리브 기름과 다름없이 취급한다는 소리를 계속 들어야할까? 이런 물음들이 성공의 그늘에 자리하고 있다.
이런 상이한 성격의 두 사람이 벌이는 결합은 요즘 벌어지는 M&A 바람과 맥이 통한다고 느껴진다. 둘의 장점과 약점이 잘 조화된다면 상승효과가 기대된다.

만약 이 두 사람이 서로의 내면을 볼 기회를 갖지 않고 시선을 외면에만 고정했다면 상대방의 참모습을 알 수 있었을까? 이런식으로 우리가 포기해버리고 마는 기회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
그래서 영화는 우리에게 가상공간의 의미를 한번 더 생각해보게 한다. 가상공간이 우리에게 주는 기본적인 변화는 접촉의 기회를 급격히 증가시켜 준다는 것이다. 점점 이웃집 주인과는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내게되는 낯설음 속에 있으면서도 체면과 구김없이 자신을 보다 솔직히 드러낼 수 있는 가상공간으로 몰려가게 된다. 낯익은 일상에서의 늘 하던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어떨때는 당당한 정치평론가로 어떨때는 진지한 탐색자로 변모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는다. 이러한 행동들을 기껏해야 아이디 뒤에 숨어서 벌이는 소시민의 오버액션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런 행동을 즐기게 된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대기업의 광고판을 많이 담고있다. 먼저 배경으로 활용하는 통신 자체가 AOL이라는 거대 통신회사가 제공하는 공간이다. 이를 보고 올라가는 수익은 어느 정도가 될지 짐작도 가지 않을 정도다. 약간 교묘한 광고도 있었는데 톰 행크스가 스타뷰익이라는 커피전문 체인점을 놓고서 커피 하나를 주문하는 과정에서도 무려 여섯가지 결정을 내리게 한다는 점에서 사람을 결단력있게 만들어준다고 격찬해 마지 않는다. 잠시 이런 광고를 내보내주고 돈을 얼마나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요즘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늘어나는 제작비를 벌충하기 위해 광고를 한껏 껴안고 만들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워낙 다양한 이슈들이 이야기의 소재로 등장하는 이 영화를 조금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알아둘 것들이 있다. 대화중에 로젠버그 부부에 대한 것이 나오는데 이 두사람은 1950년대에 미국의 핵기술을 소련에 넘긴 스파이로 처형되었다. 증거는 불충분했지만 재판은 강행되었고 형벌이 과도한 편이었지만 당시 미국 사회 전반에 불었던 매카시즘의 흐름에 맞추어 처벌되었다. 그냥 스파이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들은 나름대로 사회주의에 대한 공감을 가진 지식인으로서 핵의 세력균형을 통한 전쟁방지까지 내다보았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주제를 이야기거리로 삼을 수 있는 인물들은 확실히 지식인들이고 영화는 그런 뉘앙스를 잘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에 브루클린에 가면 450$에 방 여섯개의 집을 구할수 있다는 대사가 나온다. 맨하탄에 있는 아파트들의 방세가 월에 수천불에 달하는 것과 비교하면 브루클린이 얼마나 싸구려 동네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를 본 사람은 아마 짐작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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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과 사랑, 가족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시간을 달리하는 두개의 플롯이 번갈아가면서 나타나고 오래 전의 삶이 오늘의 삶에 가치와 방향을 주는 쪽으로 작용하게 되어있다.
여주인공은 뚱뚱한 몸을 가진 중년여성으로 갱년기를 맞아 삶에 대한 자신감을 갈수록 잃어가고 있다. 성적인 매력의 상실을 다른 분야로 극복하기 위해 갖은 솜씨를 발휘해서 음식을 만들어보지만 퇴근에서 돌아온 남편은 음식을 들고 바로 TV 앞에 앉아서 스포츠 중계에만 몰두한다.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카운셀링을 하는 단체 모임에 나가보지만 큰 도움이 되지 못한채 실망감만 깊어간다.
이러한 모습은 대중문화로 가득찬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기혼여성들의 문제와 고민을 대변한다.

그러다 고모분을 문병하기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나이든 할머니와의 대화에 차츰 빠져들어간다.

옛날 이야기에 등장하는 두 여인 잇지와 루쓰는 사랑하던 사람을 잃었다는 공동의 아픔을 안고 있다. 선머슴같이 활달한 잇지와 조용하고 섬세한 아름다운 여성 루쓰는 언뜻보기에 대조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보인다. 하지만 마음에 함께 가지고 있는 아픔은 서로를 의지하며 좋은 친구로서 삶을 보다 밝에 영위하려고 노력하게 만든다.
잇지는 교회를 나가라는 주위의 권고를 무시하고 "그들은 입으로 외우는 교훈을 결코 몸으로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비꼬는 말을 던진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철도 화물객차에서 물건을 빼내 가난한 사람들에게 던져주는 의적 노릇을 한다. 옆에 있다가 우연히 이런 작업에 동참하게 된 루쓰를 향해 잇지는 마음을 연다. 역시 사람을 함께 만드는 것은 함께 풀어나가도록 주어지는 역경일 것이다.
루쓰가 결혼을 해서 이러한 관계는 더 유지되기 힘들줄 알았지만 실상 루쓰의 삶은 행복하지 못했다. 루스를 무한정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에게서 구출해온 잇지는 철도역 옆에 자그마한 카페를 열었다. 이곳의 메뉴 하나가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다. 흑인과 백인이 자유롭게 어울리고 가난한 자들에게도 음식을 나누어주는 그런 작은 공동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두여인은 서로를 닮아가면서 장점을 배우고 단점을 배우면서 루쓰의 아이를 키운다. 여기에 찾아온 전남편과 KKK단은 흑인들에게 테러를 가한다. 여기서 잠시 배경을 살펴보면 잇지와 루쓰가 살고 있는 지역은 알라바마고 루쓰가 전남편이 있는 곳은 조지아주로서 둘다 남북전쟁에서 남부군의 일원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던 지역이다.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은 포레스트라는 이름을 가지는데 이는 원래 알라바마에서 KKK단을 만들었던 남군 장군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여러 남성들 또한 KKK단의 일원이다.
전쟁의 패배와 경제의 파괴로 상처받은 백인남성들의 자존심이 만들어낸 폭력이 다시 여성과 흑인에게 가해지고 있다면 이렇게 차별받는 여성들이 학대받는 흑인들과 같이 어울리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전남편이 아이를 빼앗으러 온 것을 정당방위로 우연히 죽이고 만 이들은 결국 꼬리가 밟혀서 재판을 받게 된다.
가까운 현실에서 위협하는 주먹이 KKK라면 보다 멀리 있는 법 또한 이들에게 정의의 방파제가 되지 못한다.
재판정을 살펴보면 판검사는 물론이고 배심원들이 모두 백인남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수 있다. 흑인에 대한 백인의 차별, 여성에 대한 남성의 편견이 어떤 식으로 제도라는 위선의 탈을 뒤집어 쓰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를 돌파하는 것은 현대의 미국법정을 다룬 영화에 나오는 인권변호사의 활약이 아니라 목사의 위증이었다. 존경받는 목사가 성서에 손을 얻고 한 말의 위력은 곧 판사가 재판을 무혐의로 종결시키도록 하게 만든다. 하지만 선서에 사용한 책이 실은 성경이 아니라 그 정도 두께를 가진 <백경>이었다면 얼마나 우스운지 모르겠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이렇게 해야겠다는 의지가 가슴에서 불끈 솟게 마련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던 캐이시는 체력단련에 나서고 활기차게 행동한다. 이런 바뀐 태도는 남편에게 의지해서 살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가치를 스스로 발견하려는 것이다. 결국 주차장에 파킹할 때 잽싸게 자리를 빼앗은 얌체족의 차를 마구 박아버리는 것까지 발전한다. 이런 시원하고 통쾌한 태도는 관객을 대신해서 정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신감의 회복한 여인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물론 이렇게 변모해가는 과정에는 마음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호르몬 주사를 맞아야한다는 요령을 터득한 것도 합리적 배경으로 등장한다.

삶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게 만들어준데 따르는 고마움에 대해서 캐이시는 할머니에게 무한정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결국 갈 곳 없어진 할머니가 사실은 잇지라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를 자기집의 새로운 가족으로 맞아들인다.

결국 혈연으로 만들어진 가족의 유대가 느슨해지는 현대사회에서 마음을 통해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통해 새로운 의미의 가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교훈이 주어진다.
미국 사람들이 왜그렇게 자원봉사에 열심히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데 열성적인가 하는 물음에 쓸만한 답하나가 될수도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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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5-03-12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학교 2학년 때 엄마가 얻어 준 공짜 영화 티켓으로 극장에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외진 극장에서 했던 영화라 관객도 거의 없었죠 보러 들어갈 때는 제목도 이상하고, 관객도 하나 없네, 이랬었는데 나오면서 대체 이렇게 좋은 영화를 왜 사람들이 모르지? 이상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줄거리는 자세하게 생각나지는 않지만, 그 당시 무척 감동받았던 느낌은 지금도 생생해요 ^^
 

꽤 복잡한 무대를 만들어 놓고 여기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영화다

언뜻보면 말도 안되는 설정이라고 불만을 토로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 쉬지않고 머리는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움직이게 된다. 매트릭스라는 제목에서 옛날 수학시간을 괴롭게 만들던 행렬이라는 단어를 떠 올릴 수 있는 사람이 몇몇은 될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 나오듯이 세계를 꽉 채우는 모호하지만 거대한 무엇을 행렬이라는 수학 개념만으로는 소화할 수 없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뒤져본 영한사전에는 “place where sth begins or develops 모체, 기반” 이라는 해석이 달려있었다.
자 그럼 영화를 들여다보자. 처음 시작은 숫자가 가득채워져 나오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들리고 화면은 여자의 모습을 비쳐주게 된다. 뭔가 갸름한 얼굴에 진지한 분위기를 주는 그런 존재다. 곧이어 경찰이 쳐들어오고 총을 겨누며 손들어라고 외친다. 아무런 무기가 없는 갸녀린 여인은 손을 천천히 들며 자리에 일어선다. 여기까지는 흔하게 보는 체포의 현장이고 체포되는 여자에게 동정이 쏠리지만 다음 장면부터 영화는 관객에게 문제를 던지기 시작한다. 게으로고 평면적으로 보이는 경찰들의 무리에 낯선 존재들이 나타난다. 검은 양복에 검은 선글라스를 보고 이들이 수사관이겠구만 하는 짐작은 하지만 뭔가 이들의 얼굴 생김새와 행동은 Man in black에서 고대로 옮겨오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갖게된다.
그리고 이들이 던지는 “그 여자를 잡으러간 경찰 양반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오” 말은 관객들에게 의심스러운 느낌을 강하게 주기시작한다.  
다시 카메라는 여자를 비추게 된다.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그녀는 자신의 등뒤에 권총이 겨누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바로 이어지는 몸을 공중에 띄우며 발길질하는 동작은 일반영화의 무술유단자과 엇비슷하면서도 뭔가 색다른 느낌을 준다. 가볍고 빠르게 경찰들을 해치워 여유를 보이던 그녀도 곧바로 들이닥친 수사관들을 보고는 무조건 달아나기만 한다.
묘한 먹이사실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보통사람, 여인 다시 수사관으로 이어지는 힘의 관계가 나타난다.
도주와 추적은 공중전화에 들어간 여인에게 검은제복의 수사관은 트럭을 몰아 전화박스를 박살내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수사관은 다음 표적이 네오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뜨게된다.
여기까지만 도달해도 사람들은 무엇인가 묘한 것이 있지않냐는 호기심을 꽤 강하게 가지게 된다.

다음 등장인물은 물론 네오다. 젊고 똑똑한 청년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네오는 졸린 눈으로 자신의 컴퓨터에서 메시지를 받는다. 매우 평판있는 SW회사의 우수한 프로그래머인 이청년에게 곧이어 깔끔한 디자인의 전화가 배달되고 막바로 신호음이 울린다. 이 전화의 목소리는 청년의 주변과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다. 그리고 분명히 하나의 목적에 따라 가이드를 제시한다. 계속 그 가이드를 따라가다 보니 고층빌딩의 창밖으로 나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까지 놓이게 된다. 낯선 전화에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 이건 얌전한 회사원이 시도할수 있는 모험은 아니다.
화면은 곧 체포되는 청년의 모습으로 바뀌어가게 된다.
이 청년의 얼굴에서 키아누 리브스라는 원래 이름을 알고 있는 영화매니어들은 자연히 주인공다운 역할을 기대하게 된다.
우선 이 청년에게는 남과 다른 호기심이 있다. 낮에 열심히 일을 하고 나서 밤에는 더 열심히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계를 헤메다니며 자신의 호기심을 쫓아다닌다. 그의 물음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바로 “도대체 매트릭스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그 질문에 답을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하나 있다. 그의 이름은 모피어스. 수사관의 움직임보다 한발앞서 네오에게 접근했던 존재다. 수수께끼 같은 상황에서 네오 앞에 우리가 처음 보았던 여인이 나타난다. 이제 우리는 그녀의 이름이 트리니티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이 단어를 가지고 무언가 해석을 해보려고 했지만 잘은 모르겠다. 어쨌든 여기서 영화 처음에 현란한 발길질을 보여주었던 그녀가 바로 국세청 컴퓨터를 다운 시켰던 대단한 솜씨의 해커라는 것도 알게되었다. 자 두사람에게는 해커 그것도 매우 뛰어난 솜씨의 해커라는 공통점이 생겨났다.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그녀에 이끌려 모피어스까지 만나게된 네오는 막바로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빨간약과 파란약으로 각기 상징되는 두가지 길에서 한쪽은 안정과 일상으로의 회귀를 다른 쪽은 진실의 탐구를 목표로 고난을 감수하는 모습이다. 주인공이 앞서 빌딩의 창문에서 닥쳤던 상황에서는 어려운 쪽을 선택해야할 이유를 발견하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좀 더 분명히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네오는 주저없이 빨간약을 선택하고 진실을 찾아 떠나는 그의 여행은 관객들에게 무엇인가 낯설고 기계적인 상황으로 화면을 이동시킨다. 그동안 관객에게 꿈과 현실을 왔다갔다하게 만드는 영화는 눈앞에 나타나던 SF적인 상황이 전혀 꿈이 아니라고 분명히 주장한다.
이대목에서 키아누 리브스 주변에 나타나게 된 상황들로부터 몇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벌거벗고 빡빡 깍인 그의 몸에 붙어있던 고무파이프와 그가 담겨있던 캡슐로부터 이곳이 바로 인간을 자연스럽지 않은 방법으로 생성시키는 기술문명이라는 것을 알아채릴 수 있다. 자 이제는 인간과 인간의 산물이면서 인간을 지배하려는 기술문명의 갈등이라는 세기말적 주제로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머리에 구멍하나를 달고 돌아온 네오에게 모피어스는 견학을 시킨다. 발을 움직이면서 천천히 세상을 보는 그런 견학이 아니라 침대에 눕고 머리 뒤쪽에 생겨난 구멍에 쇠파이프를 꼽으니 머리속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는 그런 견학이다. 꽤 예전에 <환상특급>이라는 TV시리즈가 있었다. 이곳에서 그려낸 미래세계의 모습 하나가 바로 캡슐에 담긴 인간이 주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꿈을 꾸고 그 꿈을 현실로 인식한다는 것이었다. 영화작가들의 상상력은 이 작품과 거의 비슷한 모습의 미래세계를 만들었지만 모양은 약간 달랐다.

모피어스가 설명한 이 영화속의 매트릭스의 정의는 바로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공간으로 모든 인간들은 조금전에 네오와 모피어스가 보여주듯이 그 세계에 기계적인 방식으로 접속한다는 것이었다. 즉 이 공간은 참여한 사람들에게 모두 공유되는 것이다. 마치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네트워크 게임이 서로 떨어진 여러 사람들에게 하나의 세계를 열어주듯이 말이다. 인간의 감각을 전통적인 세계와 유리시켜 오직 신경에 주어지는 자극으로만 관리시킬 수 있는 이 새로운 공간을 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우리는 먼저 이런 세계는 왜 만들어졌을까 하는 물음을 가지게 된다. 첫번째로 이 시대가 1999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2199년이라는 제법 한참뒤라는 설명을 이해애햐 한다. 200년이라는 시간을 통해 엄청난 과학의 발전을 가져왔고 특히 AI로 약칭되는 인공지능의 발전은 놀라운 정도였다고 한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년 오딧세이>를 보면 벌써 컴퓨터의 능력이 연산과 추론을 넘어서 자신에게 닥치는 위협에 감정적인 대응을 하는 수준까지 발전해나가고 있다. 이 영화에서도 인간의 산물인 컴퓨터들은 그런식으로 발전해서 거꾸로 인간을 종속시키는 세계를 만들게된것이다. 이제 인간은 단지 에너지의 확보를 위해 적당히 만들어지고 길러지는 그런 존재로 전락하게 된것이다.
터미네이터를 비롯해서 무수한 SF영화들이 만들어낸 비극적 미래들 중에서 가장 빡빡한 상태에 놓인 것이다. 그리고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들이 사육되고 있기 때문에 전혀 이 세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것이 결론이라면 영화가 더 진행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영화에든 문제가 있다면 해결하려는 노력도 있어야 할 것이고 이는 당연히 주인공들의 임무라고 할 수 있다.
모피어스, 트리니티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기계가 지배하는 세계에 저항하려는 집단의 일원이다. 이들의 배후에는 시온이라는 유태교적인 냄새가 다분히 나는 본거지가 있다. 모피어스가 지금 놓인 곳은 하나의 저항선으로 이곳 저곳을 움직이면서 매트릭스에 들어갔다 나왔다하며 저항을 계속 한다. 영화 맨처음 공중전화를 통해 트리니티는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다시 이런방식으로 거꾸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영화는 전화선 하나를 통해 많은 움직임이 있는 그런 규칙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매트릭스를 만든 사람이 일부러 열어놓은 것은 절대 아니고 체제의 통제에서 벗어난 소수의 사람들이 제멋대로 해킹하는 것이다.
영화속의 수사관들은 잘 만들어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해석된다. 이들은 매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매트릭스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무조건적으로 뛰어넘을 수는 없다. 매트릭스안의 존재 누구나의 몸에 들어가 대신 활동할 수는 있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원적인 한계들 가령 날 수 없다든가하는 것들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이영화의 구도가 주인공의 적인 수사관들에게 주는 중요한 한계의 모습이다.

적들에 맞서기 위해서 주인공은 열심히 무엇인가를 배워야한다. 배우는 과정도 또한 조그맣게 만들어진 매트릭스와 엇비슷한 가상공간이다. 여기서 쿵후도 배우고 공중점프도 배우고 하면서 빠르게 적응을 해간다. 이 시점에서 모두들 네오를 쳐다보는 눈이 특이하다. 네오는 지금 저항군 중의 한 존재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은 이 모든 저항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존재인 “그”가 아닌가 하고 생각되는 것이다.
다분히 유태-기독교적인 세계관이 표방하는 구세주의 대망이라는 모티브가 여기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모피어스를 제외하고는 다들 반신반의하고 있는 상태다. 이 연약한 듯 보이는 청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를 구원의 세상까지 이끌어낼까?

네오가 정말 “그”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오라클이다. 오라클이라는 단어가 원래 신탁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라는 배경을 안다면 만나게 되는 사람은 신을 모시는 무녀이고 그녀의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라느 것도 짐작해낼 수 있다.
오라클을 만나기 전에 여러명의 소년소녀들을 보게된다. 그들 모두 “그”의 후보들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한 소년은 숟가락을 마음대로 휘는 능력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그 소년이 네오에게 던진 말이다. 존재하는 것을 부정해서 휘게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마음을 바꿔먹는다는 투의 말로 이는 네오에게 점차 많은 변화를 만들게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막상 만나보니 그녀는 기대와는 다른 형태의 답을 한다. 실망스럽게도 네오는 “그”가 아니고 더구나 조금만 지나면 모피어스와 네오의 목숨 중 하나가 위협을 받는다는 불길한 예언까지 던져준다.
지나가는 말로 네오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투의 언급도 있다. 똑똑한 관객이라면 트리니티라고 짐작을 해낼 것이다. 왜냐면 지금까지 등장한 여인중에 괜찮은 얼굴을 한 것은 트리니티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돌아가는 길에 막바로 위험이 닥치게된다.
배신자에의해 위치가 노출됐고 그 덕분에 매트릭스는 그 건물 자체를 수정해버렸다. 눈앞에 고양이가 똑 같은 모습으로 두번 지나가는 일이 벌어진다. 원래의 자연환경이라면 이런 일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어차피 매트릭스란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이고 따라서 수정이 가해졌다는 증거라고한다. 그 덕분에 건물의 바깥은 벽으로 막혀있고 밖에는 적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도 바뀐 건물의 설계도를 알아낼 수 있는 해킹 능력은 가지고 있다. 도망의 과정에서 모피어스는 네오를 위해 자신이 대신 잡힌다. 주저함을 남기고 돌아가려는 일행들에 새로운 문제가 닥친다. 배신자가 먼저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막고 서있는 것이다.
여기서 매트릭스의 규칙 한가지를 이해해야 한다. 몸은 비행선에 남아있고 정신만 매트릭스에 들어왔지만 매트릭스안에서 정신이 죽는다면 몸도 따라서 죽게된다. 거꾸로 비행선 안의 몸이 죽어도 죽는다. 한걸음 나아가 둘 사이에 연결고리인 쇠파이프가 끊어져도 죽는다.
이 과정에서 네오가 정말로 “그”인가 아닌가 하는 물음은 계속 이어진다. “그”라면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우연찮게 그 물음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모피어스가 놓인 위험에 대해 모피어스를 죽일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닥친다. 네오는 과감히 그 문제를 자신이 떠 맡는다. 얼마전 오라클이 분명히 예언하였고 여기에 대해서 자신의 “그”가 아니라고 확신한 네오는 미래를 위한 가능성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걸게된다.
막강한 능력을 가진 수사관들에 대해서 지금까지는 누구나 도망가려고만 했지 결코 맞서보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네오는 비록 많은 총을 들었지만 그에게 덤벼들었다. 여기에서 보통 총잡이하고는 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우선 눈앞의 몇몇 경비원은 총으로 해치울 수 있다. 하지만 다음으로 건물에 폭탄을 터트려 많은 전원을 끊어버리는 것은 지혜로운 사전공작이다. 다음으로 보통 총이 아니라 헬기의 기관총을 가지고 수사관들을 공격한 것은 정말로 똑똑한 전략이다.
헬기 앞에서 수사관과 벌인 싸움은 두 가지를 보여준다. 하나는 벌써 네오가 수사관과 비슷한 속도로 몸을 움직이면서 총알을 피하는 흉내를 낸 것이고 다음으로 자신의 바로 앞에 다가온 수사관을 옆에 있던 트리니티가 해치우게 만드는 똑똑함을 발휘한 것이다. 그는 원래 대단한 솜씨의 해커였으니 이런식의 행동이 부자연스럽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기관총으로 마구 쏘아서 수사관들을 해치우고 모피어스에게 도망쳐라고 외친다. 이때 중요한 것이 모피어스를 제어하던 전기의자가 건물의 전원으로 차단된지 꽤 시간이 지났다는 점이다. 그냥 모피어스가 맘대로 일어선다고 하면 좀 웃길 것이다.
다시 건물에서 빠져나오려는 모피어스의 발이 총알에 맞자 동작이 부자연스러워졌고 네오는 즉시 몸을 내던져 공중 구조를 시도한다. 다시 헬기는 총에 맞아 흔들렸고 이번에는 건물의 옥상에 내렸던 네오가 트리니티를 구하기 위해 솜씨를 발휘한다.
이 몇번의 동작에서 우리는 영웅의 탄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혜와 용기를 가졌고 세계를 구한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진 아름다운 영웅이 우리 앞에 서있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야말로 책무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제 깨닫게 된것이다.
이 대목에서 눈앞에 놓인 세계가 자연스럽지 않고 매트릭스에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장면이 하나 보여진다. 건물에 충돌한 헬기가 벽면을 휘게 만든 다음 조금 지나 폭발하는 것이다.
영화감독의 배려가 돋보이는 구성이다.

매트릭스에서 빠져나가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다. 둘을 먼저 돌려보내고 난뒤 막바로 수사관이 전화기 옆으로 나타난다. 여기서도 매트릭스안의 수사관은 누구의 몸에도 들어갈 수 있다는 규칙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제 단 둘만 남아서 치고받고 싸우는 장면이 되었다. 처음에야 주인공이 밀리지만 점차 점차 네오의 능력이 발휘되어갔다.
마침낸 수사관을 두들겨 패고 밖으로 빠져나가 또 다른 탈출구로 향해 달려간다. 이때는 상대방인 수사관들이 셋으로 늘어갔다. 우연인지 이번의 탈출구는 영화가 처음 시작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덕분에 기껏 방문앞까지 도망해낸 네오의 앞에 수사관이 나타나고 이어지는 총격에 네오는 쓰러진다.
상황은 끝났을까?
당연히 그러면 서운할 것 처럼 보일 것이다.
네오는 잠시 쓰러져있었지만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다시 자신에게 가해지는 총알을 멈춰세운다.
무엇이 있었을까? 유머스러운 영화도 아니면서 현실을 이렇게 무시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다시한번 이 공간이 “가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가정을 이해해야할 것이다. 어차피 0과1의 집합으로 만들어진 세계라면 그것을 마음대로 넣고 빼고 수정하는 작업도 굳이 컴퓨터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것이다. 책상위에 놓인 컴퓨터에 내가 원하는 프로그램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이름 모를 제작자의 바이러스도 움직이듯이 매트릭스도 만들어낸 컴퓨터의 의도와는 다르게 동일한 능력을 가진 사람의 의도에 맞추어 움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주인공들은 탁월한 컴퓨터 해커였던 것이다. 이제 주인공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존재가 숫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렇게 움직이는 연산의 세계는 이제 조정할 수 있는 사람에게 모든 가능성을 주게된다. 손을 한번 움직여 총알을 세우는 것 정도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네오의 동작은 그런 자신감의 표현 중 하나의 방법이었을 뿐이다.
화면은 컴퓨터 시스템이 정지(halt)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원래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네오의 선언을 전하게 된다. 그리고 네오는 하늘을 날아간다. 이것 또한 수사관들은 결코 보여주지 못하던 모습이다. 이미 네오로 대표되는 인간은 기계에게 빼앗겼던 주도권을 되찾고 훨씬 강력하게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화의 기획이 참신했고 진행 또한 탄탄하고 긴장감이 있었다. 그래도 남는 물음은 굳이 인간을 지배할 수 있었던 기계문명이 인간을 유지할 필요성에 대해서 설명이 불충분하다는 점과 하나의 매트릭스에 모든 사람을 모아둘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 등이다. 이런 식으로 물음을 던지기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게되어 끝에 도달하기 어려울 것이라 일단 접어두자. 그 보다 네오의 행동으로 대표되는 전자화문명의 극복이라는 문제 해결을 위해 제시되는 근본적인 메시지가 무엇이냐고 물어보고 싶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네오는 몇가지 면에서 영웅이 가져야할 중요한 요건을 충족시켜주었다. 그 이외에는 전자화문명 시대에 맞는 요소를 꼽으라면 딱 하나 우수한 해커라는 것 밖에 없지 않을까?
기계에 빼앗긴 주도권의 회복, 상실된 주체성의 회복을 통한 자기회귀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소화한 것 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네오로 대표되는 문제해결 역량에 대해서 물음은 남는다. 어떤식으로 해야 우리의 문명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고 또 설혹 주도권이 빼앗긴다고 해도 다시 찾아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네오의 해결방식이 이러한 질서를 만들어내는 컴퓨터의 파괴까지는 우리 시야에 들어오지만 그 다음 세상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들은 계속 남게된다.

원자폭탄을 생물무기를 만들어 같은 인간들 위에 던졌던 20세기 인류문명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던 여러가지 노력들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문명은 걸프전에서 보았듯이 컴퓨터 스크린위에서 움직이는 객체들이 만들어가는 움직임을 통해 세상을 물화시켜보고 있다. 물건의 움직임은 나에게서 저만치 있고 중요한 것은 물건이 내는 아픔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나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아픔은 지금 러시아의 공격을 받는 그로즈니에서 또 예루살렘에서 혹은 앞으로 미군 폭격기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북한에서도 나오고 있고 또 나올 수도 있는 것 아닐까?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을 굳이 우리시대의 매트릭스라고 비유한다고 해서 무리라고 반론할 만한 사람들이 많을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도 그런 매트릭스의 주인공 일지도 모른다. 검게 입고 움직이는 보통사람 아니면 검은옷을 입은 수사관 심지어 모든 일을 지시하고 기획하는 컴퓨터까지도 내가 담당하고 있는 역할일지도 모르겠다.

미덕과 방향, 문제 그런 것들을 남기고 영화의 자막들은 스러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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