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고의 작품을 영화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 깊이 있는 사색에서 나온 통찰을 소설이 아니고 영화로 보여주는 것은 범상한 감독에게는 무리한 일이다.
그래도 앤서니 퀸 주연의 작품은 수작이라고 평할 만 하다.

영화의 남자주인공은 꼽추다. 어머니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자신에게 주어진 종치는 일만 하고있다. 성당의 종탑에서 내려다보면 세상의 사물들은 조그맣게 보인다. 그 거리만큼 이상으로 그와 세상과의 사이에는 깊은 강이 흐르고 있다. 아무도 그에게 다가오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세상속으로 다가가고 싶다. 적어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욕망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가 주인님인 신부의 명령에 의해 에스메랄다라는 미모의 집시여인을 납치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덕분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여주인공 역할인 이 여인은 매혹적인 춤을 추며 여러 남자들의 유혹이 담긴 시선을 받는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분명 미덕이 있다. 거지들에게 붙들려 죽을 뻔한 3류 시인을 살리기 위해 ‘위장’ 결혼도 해준다. 작은 욕망에 쉽게 분노하는 하류세계 속에서 그녀는 하나의 아름다운 꽃이고 나아가 성녀의 수준으로 대우받는다. 그녀는 거지속에 같이 머무르지만 분명 다르고 그런 다름이 서로를 구별 짓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고 포용해서 한 단계를 높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꼽추는 에스메랄다의 호의에 의해 한결 가벼운 처벌을 받았고 이를 감사하며 한걸음 나아가 죄에 대해서까지 포용하고 베푸는 그녀에 대해 감히 애정까지 품게 된다. 그가 세상으로부터 받게 된 첫번째 호의였기에 이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애정은 그만큼 맹목적일 만큼 절대적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애정이 머무르는 것은 잘생기고 멋진 수비대장이었다. 그는 이미 귀족 처녀를 약혼자로 두었지만 프랑스 남자답게 풍류를 즐겨보려고 시도한다. 둘이 은밀히 만나 서로를 떠보다가 사랑을 맺으려하는 순간에 날카로운 칼로 누군가가 수비대장을 찔러 버린다. 이 사건의 범인으로 에스메랄다가 잡혀서 마녀로 몰려 사형을 선고 받게 된다. 고문에 의한 자백유도를 최선의 수단으로 여겼던 당대의 우울한 풍경을 보여주며 교회와 권력의 우매함을 드러낸다.

에스메랄다가 위기에 빠졌는데 누가 구하러 나설 것인가?
그녀는 짧은 기간이지만 자신이 마음을 주었던 수비대장이 나서주기를 바라지만 그는 진실을 밝히는 것을 비롯해서 아무것도 도와주기를 거부한다. 그냥 될대로 되도록 놓아둔채 파리를 빠져나가 버린다. 꼽추의 신부는 이 대목에서 이중적인 자세를 보이며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아예 존재조차 없애버리려 한다.
그의 약혼녀와 그 어머니들이 잠시 보여진다. 이들에게는 결코 남을 이해하려는 배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저런 것들과는 접촉하고 싶지도 않을 뿐이다.
이들을 모습을 차례대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지배계급들의 무책임, 위선, 허위의식들 이다. 겉으로는 뻐기고 자기들만 고귀한 척 나서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요모양 요꼴로 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그럼 누가 나서야 하냐면 역시 주인공인 꼽추밖에 없을 것이다.
위기에 빠진 여인을 구하기 위해 그는 두 가지 미덕을 보인다. 하나는 용기다. 창칼을 치켜든 군병들 사이로 뛰어들어 여인을 낚아채는 것은 보통 사람이 발휘하기 어려운 용기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혜다. 성당이 가지고 있는 불가침 특권을 교묘하게 활용해 안전한 보호처로 만들어가는 작업 또한 보통 사람을 넘어서는 지혜를 보여준다.

영화의 앞부분이 보여주었던 조화롭고 질서 있던 사회를 제대로 보니 이렇게 뒤집어지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가장 무시 받던 꼽추 보다도 용기도 없고 지혜도 없는 모순덩어리의 인간들로 꽉 찬 세상을 보며 위고는 답답함을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꼽추에게는 사랑의 메아리가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에스메랄다는 달아나려고 하고 거지들이 몰려온다. 꼽추와 거지의 대결은 어쩌면 안타까운 행동이다. 에스메랄다를 구한다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각기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지만 결과는 서로간의 충돌이다.
이들의 뒤에 권력이 움직인다. 왕의 명령에 따라 궁수들과 창검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는 빠르게 움직여 거지들을 해치운다. 한점의 고려도 없이 그들의 화살은 거지들의 가슴에 꽂이고 창검은 살을 베인다. 바로 이 것이 중세 사회였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결정과 시행에 대해 단 한 순간의 주저함도 없다. 하층민의 목숨이란 그저 그런 것일 뿐이다. 이런 비참한 모습은 단지 중세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1800년대 후반까지도 프랑스 사회에서는 주기적으로 민중들의 봉기가 있었고 몇번의 성공을 제외하고는 이런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위고의 말년에 있었던 파리코뮨의 봉기와 실패도 영화의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위고는 과거를 그려나가면서 현재를 제대로 보게하도록 만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영화 속의 에스메랄다는 그 화살 중 하나를 맞고 숨을 거둔다.
허무한 죽음 뒤에서 꼽추는 자신에게 군림하던 신부를 멀리 던져버리고 에스메랄다의 시체 옆에 가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그리고 세상 이편에서 이루어지지 못했던 사랑은 저편에서는 이루어진 듯 보인다.

영화속에서 벌어진 일들의 기록자는 누구일까? 당연히 시인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둘러본다. 그리고 열심히 기록하지만 그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보전해야만 하기 때문에 자신의 명목상 아내이며 목숨의 은인인 에스메랄다를 구하러가는 행렬에는 유감스럽지만 동참할 수 없다는 자세를 보인다.

늘 세상을 위해 발언하고 변화를 위해 더욱 노력하고 싶었던 위고였지만 항상 스스로에게 부족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런 아쉬운 점을 반영시킨 인물이 바로 여기의 시인이 아니었을까? 조금 더 나아가면 세상의 모든 지식인들이 보이는 말과 삶이 일치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자세를 비판한다고도 보여진다.

이 소설을 텍스트로 사용해서 최근에 디즈니에서 나온 영화도 있다. 하지만 이건 졸작이다. 최근의 헐리우드 영화에서 비극적인 결말로 마무리되는 작품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원작에서 슬프게 죽어야 했던 인어공주를 살려내는 솜씨야 나도 동감하며 어물쩍 넘어갔지만 그건 동화고 <노틀담의 꼽추>의 주인공들의 역할을 제멋대로 바꾼 것은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운 행위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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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흐름이 주는 진행이 아름다운 영화였다. 제목이 그대로 상징하듯 영화의 주제는 사랑과 관련된 편지다. 하지만 통상 연인들이 서로 밀어를 담아 주고받는 그런 편지와는 좀 다른 모습이다. 영화에 나오는 남녀는 모두 세명이다. 훌쩍 저세상으로 떠나가버린 연인을 못 잊고 있는 여인, 멀리 떨어진 도시에 살며 이름이 같다는 인연으로 서로 연결된 또 하나의 여인이 나온다. 한여인의 연인이고 다른 여인의 중학교 동창이었던 주인공 남자는 중학생 시절의 모습만으로 나타난다.
남자 주인공은 벌써 죽어버렸다. 그래서 허탈감에 빠진 와타나베라는 곱상하고 예쁜 여인은 그냥 한번 편지를 띄워보았다. 옛날 옛적 지금은 없어진 주소로 말이다. 한데 이 편지는 우연찮게 같은 이름을 한 다른 후지이라는 여인 집으로 떨어진다. 이렇게 서로 주고받다가 놀라서 와타나베는 직접 오타로 시를 방문하게 된다. 집까지 찾아갔지만 머쓱해서 돌아오다가 전철역앞에서 조금전에 만나려던 후지이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크게 불러보았다. 이름을 듣고 잠시 멈춰섰던 후지이의 모습은 잠깐 동안은 홀로 서 있는 특별한 아주 특별한 존재였지만 곧 사방에서 쏟아져나오는 사람들의 물결속에 잠겨버린다.
이어졌다 끊어지는 통화 같다는 생각도 들면서 나에게는 회자정리라는 고색창연한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어쨌든 이 두 여인 사이에는 꽤 깊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 다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을 우연찮은 사고로 급작스럽게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후지이는 아버지를 폐렴으로 와타나베는 등산 사고로 또 다른 후지이를 잃었다. 흔히들 병으로 오래 누워있다 죽은 사람에게는 아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하지만 갑작스레 사고로 떠난 사람에게는 한참동안을 미안한 감정을 갖고 간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와타나베는 후지이에게 추억을 나누어 달라고 한다.
감기를 몸에 달고 사는 여린 고립된 섬으로서의 삶으로 묘사되던 후지이가 한사람과의 인연을 줄기로 해서 하나씩 과거의 실타래를 따라간다. 대부분 그리 유쾌하지 못했던 학창시절의 장면들에서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의 모습도 점점 새롭게 새롭게 다가오게된다.
이름이 똑같다는 우연으로 시작해서 같은반 학생들의 짖굳은 장난거리를 함께 받다보니 한편으로는 같이 맞서야 할때도 있었고 왜 내가 저친구 때문에 이런 환경에 놓였나 하는 원망도 생기고 하는 그런 기억들이다. 그러고보니 상대방도 짖굳은 장난을 한두번 시도하기도 했고 100미터 경주에 나가 망신당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가끔 마음에 예사롭지 않았다는 기억도 되살아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읽지도 않는 책을 무작정 빌려가는 습관 덕분에 대출카드들에만 잔뜩 이름이 남는 것이다. 왜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빌렸을까? 궁금하지만 답은 다음으로 미뤄지게 된다.

어쨌든 첫눈에 반했다는 말이 실은 첫사랑의 모습과 무척 닮은 이미지 덕분이었다면 꽤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인들은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말에 너무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첫눈에 반할 정도라면 아마 나의 운명이 아니었을까? 측정하기도 어렵고 조건이 주어지지도 않은 그런 사랑이 내게 다가오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 말에 뿍빠져서 감동했던 여인이 사실은 자신 이전에 존재했던 또 다른 존재와의 유사성 때문에 발생한 착시현상이었다고 과학적인 분석 결과를 들이댄다면 어떤 기분이들까? 웃어야 할까 말아야할까? 갑자기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는 어느 경전의 구절이 떠오른다.
어쨌든 누군가가 내게 물어온다면 이미지의 파편으로 남아 몽상 속에서 흐릿하게 보여지는 사랑보다는 호흡과 시선이 교차하는 그런 현실의 사랑을 받는 것이 더 뿌듯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후지이가 다시 찾아간 학교에서 자기 임무에 너무나도 너무나도 충실했던 어느 여선생님을 고리로 도서실에 다시 방문하게 된다. 아마 여선생님이 아니었다면 그냥 혼자 도서실로 걸어들어가 후배들을 만난다는 설정이 좀 부자유스러웠을 것이다. 이렇게 십수년을 떨어져서 만나게된 후배들에게서 자신의 흔적에 대한 질문을 받게된다. 왜 수많은 도서카드들에 후지이라는 이름이 남아있을까요? 아무도 읽지 않아서 오직 한명만 적혀있게되는 이런 묘한일을 누가하신 것입니까?

잠시 머쓱해있다가 그러면서 마지막 만남을 기억해낸다. 후지이가 후지이를 만나러와서 두터운 책을 대신 반납해달라고 한 것이다. 책이라는 두텁게 보이는 속에 무엇인가 메시지가 있었으리라는 짐작은 한다. 그것이 꽤 난해해보이는 제목에 담겨있을까 아니면 책반납 심부름을 대신해달라는 노력봉사 부탁에 담겨있을까는 쉽게 판단이 서지 않는다. 하긴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도 내용에 사랑에 얽힌 스토리가 담겨있기는 하다.

와타나베는 이쯤에서 눈덮인 산으로 가서 주검도 찾지못하는 연인을 향해 목소리를 한컷 높여 불러본다. “잘 있었어요 나는 잘 있어요” 고스란히 되돌아오는 그런 반복을 한참 하게된다. 감독은 이 대목에서 친절하게 옆사람의 말을 빌어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라고 코멘트를 달아준다.
눈속의 산은 무겁게 느껴진다. 저 눈속에 나의 연인이 갖혀있구나 나와 그 사이에는 이렇게 두터운 눈이 있구나 하는 절망감이 들게된다. 하지만 눈은 또 다른 사람에게도 분명 장벽이었다. 갑자기 독감이 폐렴으로 발전해 위급해진 후지이가 병원으로 달려가려고 할 때 눈은 분명 장벽이었다. 특히 아버지가 그 눈 때문에 응급조치가 늦어져서 죽고만 경험은 더더욱 무거운 기억이다. 하지만 70이 넘은 할아버지는 고집스럽게 달음질을 친다. 결국 병원까지는 생각보다 빨리 도달했지만 둘다 응급실 신세를 지게된다. 그렇게 누은 후지이의 입에서 조금전 와타나베가 외치던 소리가 반복되어 나온다. 신비롭게 느껴지는 묘한 교감을 나타내는 장면이다.
그리고 후지이는 깨어난다. 와타나베는 자신을 누르던 중압감에서 벗어난다. 좀 더 살펴보자면 후지이의 가족 특히 할아버지가 가졌던 무거운 느낌도 이번에 확 벗게되고 만다. 얼마나 아름다운 거듭남들인가?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으로 치달으면서 우리의 추정을 확실히 매듭지워주는 증거를 나타내보여준다. 집앞에 찾아온 후배들의 성화에 열어본 대출카드의 뒷면에 정성껏 그려진 데생이 하나 보였다. 물론 후지이의 싱그러운 모습이 세월을 넘어서서 웃음으로 다가온다. 결국 아무도 읽지 않는 책들에 이름을 넣는 것은 아무도 없는 곳에 너만을 먼저 놓겠다는 순수한 의도였다. 첫사랑을 확인한 순간 얼마나 뿌듯한 느낌이었을까? 하지만 자신이 받은 사랑을 굳이 남에게 과시하려는 허영은 없다. 그래서 마지막 편지에 이 내용은 포함시키지 않는 배려를 한다.

사람과 사람은 의사소통을 위해 매우 다양한 전달방법들을 개발해왔다. 손짓 발짓에서부터 편지, 인터넷 시대의 이메일까지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버스와 지하철 외부에 굵게 쓰여졌던 “선영아 사랑해”라는 메시지가 화제가 되었듯이 정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가끔은 이런 메시지에 담긴 상업성이 사람을 씁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런 메시지들은 모두 똑 같은 무게로 보여지지는 않는다. 하나의 메시지는 다른 메시지를 포함하기도 하고 다른 메시지에 연결되는 관문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예사롭게 보이던 대출카드 였지만 이를 살짝 뒤집는 행위가 이어져 발생했다면 서로들 또 다른 형태의 인연으로 몰고가는 고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우연들을 뒤로하면서 가끔은 다음으로 이어지는 우연들을 우리는 인연이라 부르고 또 운명이라고 까지 거듭 주장하고 자위하면서 오늘 여기까지 끌고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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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만 쇼>와 비슷한 사회비판물인데 흥행은 앞서 보다 더 참패로 끝났다. 짐 캐리가 여기서는 헐리우드 영화판에서 세속적 의미로 잘 나갈 수 있었던 극작가로 나온다. 2차 대전이 막 끝났지만 미국 사회는 새로운 냉전으로 돌입해간다. 매카시의 선동에서 시작한 빨갱이 사냥은 곳곳에 청문회라는 새로운 마녀재판 공간을 만들었고 마구잡이로 삐딱한 사람들을 끌어내 죄인으로 만들었다.
이런 냉냉한 분위기는 영화에도 반영되어 마제스틱에서 상영되는 B급 영화 속에서 우주선에서 내린 화성인에게 총질을 하는 미군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나에게 낯선 것은 적이고 그들에게 총질 할 수 밖에 없다는 자기 방어적인 논리다.
어제까지 영화사의 차기 유망주였던 짐 캐리 였지만 오늘은 동료도 상사도 기피하고 애인마저 떠나버린 홀몸이 되고 만다. 청문회를 피해 무작정 떠난 짐 캐리가 도달한 곳은 로슨이라는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서는 마을 사람 모두가 서로를 잘 알고 나아가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곳은 헐리우드의 몰인정과 대비하기 위한 설정이다. 그래도 이 마을에는 깊은 아픔은 있다. 2차 대전에서 희생된 숫자가 인구에 비해서 매우 많아서 젊은이들을 약 20여명이나 잃고 말았다. 사족 같지만 비율적으로 보아 미국이 2차대전에서 보인 희생보다는 너무 많은 편이다.
어쨌든 어둡게 깔린 이 마을의 공기를 바꾸기 위해 사람들에게 꿈이 필요하다. 영화는 바로 그런 꿈을 제공하는 도구고 극장은 꿈의 공간이다.
마을의 중심에는 마제스틱이라는 극장이 있고 이 극장을 복원하는 작업을 짐 캐리가 주도하게 된다.
잠시 찾아온 행복이었지만 결국 매카시주의자들에게 발견이되고 그들에 의해 청문회장에 세워졌다가 용기 있는 자기 변론을 하고 로슨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남은 스토리 전부이다.

여자주인공이 에밀 졸라에 대해서 몇차례 이야기한다. 여러 작가를 놔두고 왜 굳이 졸라일까? 결국 드뤠피스 사건을 언급하려는 것이고 나아가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매카시즘이 그런 광기일 따름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영화가 담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를 잘 이해하려면 시간을 두고 발생한 두 사건을 잘 이해해야 한다. 프랑스에서 1900년 전후를 통해 발생했던 드뤠피스 사건과 1950년대 초 미국에서 발생한 매카시 사건이다. 여기서 두 사건에 대한 기록을 인용해보겠다. 먼저 드뤠피스의 기록을 보자.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유대인 사관(士官) 드레퓌스의 간첩 혐의를 둘러싸고 정치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사건. 1894년 10월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포병대위 A.드레퓌스가 독일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비공개 군법회의에 의해 종신유형의 판결을 받았다. 파리의 독일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정보 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었으나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이 혐의를 짙게 하였던 것이다. 그 후 군부에서는 진범이 드레퓌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확증을 얻었는데도 군 수뇌부는 진상 발표를 거부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드레퓌스의 결백을 믿어 재심(再審)을 요구해 오던 가족도 진상을 탐지하고, 97년 11월 진범인 헝가리 태생의 에스테라지 소령을 고발했지만, 군부는 형식적인 신문과 재판을 거쳐 그를 무죄 석방하였다. 그러나 재판결과가 발표된 직후 소설가인 E.졸라가 공개한 ‘나는 탄핵한다’라는 제목의 논설로 사건은 재연되었다. 졸라는 드레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군부의 의혹을 신랄하게 공박하는 논설을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으로 98년 1월 13일자 《오롤》지에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사회여론이 비등하여 프랑스 전체가 ‘정의·진실·인권옹호’를 부르짖는 드레퓌스파 또는 재심파(再審派)와 ‘군의 명예와 국가 질서’를 내세우는 반(反)드레퓌스파 또는 반재심파로 분열되었다. 전자는 자유주의적 지식인을 비롯하여 사회당·급진당이 가담하여 인권동맹을 조직하였고, 후자는 국수주의파·교회·군부가 결집하여 프랑스 조국동맹을 결성하였다. 마침내 이 사건은 한 개인의 석방문제라는 차원을 넘어 정치적 쟁점으로 확대되면서 제3공화정을 극도의 위기에 빠뜨렸다. 98년 여름 군부는 어떤 새로운 증거서류에 의거하여 드레퓌스의 유죄를 확언하였으나, 그것이 날조로 판명되고, 체포된 증거서류 제출자는 자살함으로써 반(反)드레퓌스파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정부도 재심을 결정했으며, 또 이 때 반드레퓌스파에 대항하면서 공화정 옹호를 내세운 발데크 루소내각이 성립되어, 사태는 재심파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99년 9월에 열린 재심 군법회의는 드레퓌스에게 재차 유죄를 선고하였으나, 대통령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무죄 확인을 위한 법정 투쟁을 계속한 끝에 그는 1906년 최고재판소로부터 무죄판결을 받고 복직 그 후 승진도 하였으며, 프랑스군부도 95년 9월 사건 드레퓌스의 무죄도 공식으로 인정하였다. 자유주의적 재심파의 승리로 끝난 이 사건은 프랑스 공화정의 기반을 다지고, 좌파 세력의 결속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http://my.dreamwiz.com/mydefect/year172.htm에서 인용

매카시 사건에 대해서는

미국 위스콘신주(州)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J.R.매카시의 이름에서 나온 말이다. 1950년 2월 “국무성 안에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매카시의 폭탄적인 연설에서 발단한 것이다. 1949년 이래 수년에 걸쳐 매카시가 상원의 비미(非美)활동특별조사위원회를 무대로 하여 행한, 공산주의자 적발 추방의 선풍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이 심각해지던 상황에서 전통적인 미국자본의 시장이던 중국의 공산화와 잇달아 발생한 한국의 6 ·25전쟁 등 공산세력의 급격한 팽창에 위협을 느낀 미국국민으로부터, 그의 주장이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
매카시즘이 먼저 공격목표로 삼은 것은 중국정책에 영향력이 컸던 외교관, 국무성 및 중국통 정치학자 오언 래티모어, 국제법학자 제삽 등이었는데, 대통령 H.S.트루먼도 공산주의자에게 약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당시 국무장관 J.F.덜레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매카시즘의 공포에 떨었고, 그 때문에 미국의 외교정책이 필요 이상으로 경색된 반공노선을 걷게 되었다. 유력한 정치가나 지식인들도 매카시즘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매카시는 육군에 도전한 것이 치명상이 되어서 마침내 1954년 상원의 사문결의(査問決議)에 의하여 실각하였다. 매카시는 히틀러와는 달리 아무런 비전도 가지지 못하였으나, 보기 드문 선동가였다. 그가 미국의 대외적 위신이나 지적(知的) 환경에 끼친 손해는 막대한 것이었다.

멀리 프랑스에서 한참전에 발생했던 드레퓌스 사건이 50년대 초의 미국에서 반복된다면 마찬가지로 비슷한 상황을 우리 주변에서 찾지 못한다는 법도 없을 것이다.
바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한국판 드레퓌스, 매카시 사건이었다. MBC 특집 추적 프로그램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마지막 편은 바로 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다룬 것이다. 1991년 여름 동안 치열했던 공방을 벌였던 이 사건의 핵심적인 증거로 제시되었던 강기훈씨의 필적에 대해서 다시 감정을 해본 결론은 무엇일까? 일본, 미국, 한국 세 곳의 전문가 모두 강기훈씨의 필적이 아니라고 했고 검찰이 내세운 가장 강력한 증거인 가족의 증언도 진실이 부정되었다고 한다. 진실은 도대체 어디에 있고 정의는 또 어디에 있는지 고민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분노하고 슬퍼해야 할 일은 그 다음에 있다. 바로 이 사건의 주임검사가 김대중의 지명에 의해 지금 대법원 판사로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김대중 개인에게 본격적으로 실망하게 된 주요한 계기 중의 하나다. 의회의 동의과정에서도 추미애 의원을 비롯해서 여러명에게 질문공세를 받았지만 당시 강 대법원 판사 지명자는 상황논리로 일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명은 통과되었다.
한마디로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법철학 부재, 한국 사회의 법에 대한 관념의 저열성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해프닝이었다. 물론 보수에서 진보까지 두루 안배해야하는 정황을 이해해야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마제스틱>에서 나오듯 법이란 계약의 한 종류에 불과하고 상황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운용될 수 있다는 궤변론의 반복일 따름이다. 그 보다 짐 캐리가 청문회 마지막에 이야기 했듯이 하늘은 인간에게 준 고유한 권리가 있다는 천부인권에 대한 고려가 없을까하는 의문이다.

미국은 우리와 경우가 다르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이 누리는 가장 강력한 특권의 하나가 대법원 판사의 임명이라고 한다. 미국의 대법원 판사는 종신제로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재판에 임하고 그 하나 하나의 판결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영화 <펠리칸 브리프>를 보면 개발사업자들이 친환경적인 두 명의 대법원 판사를 암살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려는 것을 보여준다. 그만큼 사회에서 대법관의 위치가 중요도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그렇게 사법제도와 사회의 건전한 상식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마제스틱>에서 짐 캐리는 로슨으로 돌아오지만 대한민국의 강기훈은 감옥으로 가야만 했다. 내가 왜 없던 죄를 인정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양심의 주장을 끝내 형벌로 가두려고 했던 대한민국의 사법체계에 대해 아직도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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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공간은 아는 사람을 통해서
열리는 것 같습니다.

맨하탄을 잘 아는 분을 만나서
You've got mail을 찍은 장소 중에
몇몇을 발로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톰 행크스와 둘이 만나는 카페,
멕 라이언의 집,
쇼핑하다가 현금이 떨어졌는데
캐쉬어한테 구박 받던 장면에서
톰이 확 나타나던 곳
서점들.
날이 어두워져서 마지막 장면을 찍은
가든은 못 보았습니다.

첫번째 소감.
속았다.
두번째 소감.
정말 대단한 연출이다.

어떻게 이런 약간 특이한 정도인
장소들을 가지고 그렇게 깊은
인상을 만들어가는
재주에 대해서 놀랐습니다.
카페의 경우만 하더라도
벽에는 영화의 장면들이
걸려있었습니다.
하지만 분위기는 매우 시끄러워서
정말 영화와는 딴판이더군요.
자리도 물론 아주 빽빽했습니다.

멕의 집도 밖에 에어콘이
달려있고 해서 별로
깔끔해보이지는 않더군요.
가든도 아는 분 말로는
별로 이쁘지 않은 평범한 곳
하지만 꽃은 꽤 예쁜 곳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쇼핑하는 곳 책방 등은
여전히 꽤 좋은 분위기였습니다.
특히 멕이 쇼핑하던 델리는
상당히 그 동네의 고급 명소더군요.

이 지역들 대부분 웨스트엔드라고
80th Columbus 교차하는
지역 주변인데
문화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고 하더군요.

근처의 식당들도 꽤 훌륭하더군요.
가격도 적당하고.

참고로 이라는
책이 영화속의 맨하탄의 장소들을
쭉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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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들을 주인공으로 현란한 컴퓨터그래픽으로 그려졌지만 내용은 순백색의 미국 가치관이 가득 담긴 영화다. 스토리는 주인공의 본의 아닌 일탈, 도움 주는 존재에 의한 성장, 본래의 무리에의 복귀, 능력 발휘에 의한 영웅으로의 등정 등 일반적인 영웅담의 구성을 그대로 따른다. 이 영화의 관객이 될 사람들은 먼저 미국의 어린아이들일 것이다. 그들에게 보여주는 영화는 그만큼 교육을 의식하지 않고 만들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간략히 몇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쉽게 좀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표현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메시지는 꼭 아동물에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성인들을 위한 영화에서도 손쉽게 발견되기 때문에 한번 짚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 떠올리는 것이 좋을 듯해서 여기 요약해보았다.

첫번째 메시지는 약자를 보호하라는 것이다.
주인공이 어리고 늙은 대조적으로 기존 리더는 약자들이 낙오하거나 도태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태도를 취한다. 현대사회에서 아무나 붙들고 “약자를 보호해야 하느냐 마느냐”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표면적으로는 대부분 보호해야 한다는 답을 할 것이다. 하지만 속으로 꼭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태도가 공식적으로 표면화된 것에는 무엇보다 기독교의 영향이 크다. 그 이전의 사회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이고 힘이 곧 정의라는 주장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대사상가인 플라톤의 글에 보면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대우하라는 내용이 있는데 실은 여자가 남자와 같은 수준의 역할을 할 때만 그렇게 해주라는 것이다. 능력 있는 사람을 대우하되 장애인이나 지진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냉정하게 끊어버리는 태도가 바로 플라톤의 정의로운 국가의 사회정책이었다.
여기에 비해서 기독교는 사랑을 가르친다. 사회가 꼭 그렇게 운영되는 것은 아니지만 표면적으로는 늘 그런 주장을 반복한다. 그것만으로도 한국이나 일본 보다는 훨씬 우월한 사회다.

두번째 메시지는 전체를 위해 기여하라는 것이다.
혼자만 낙원에 머무르면 편하게 살 수 있지만 굳이 남들을 위해 위험을 자처하는 자세를 본받고 높이 사달라는 것이다. 공동체를 위한 자원봉사를 미국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번째 메시지는 너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Back to the future> 시리즈를 보면 늘 비실비실하게 사는 아버지가 마음에 들지 않던 아들이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을 해서 아버지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되돌아 오게 된다. 와서 돌아보니 모든 것이 너무나 환상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작은 계기가 사람을 너무나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실제 삶은 꼭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지만 항상 그들은 무한한 가능성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각자 최선을 다하도록 교육하게 된다.

네번째 메시지는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니까 너무 결과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신에 최선은 꼭 다하라는 요구다.
이것도 생각해보면 우습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 같이 보이기도 한다. 사회란 아무리 열심히 모두들 뛰었다고 해도 모두를 만족시키기에는 너무 비좁다. 그렇게 볼 때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겠다는 자세다.

영화의 마지막에 있었던 멘트는 낙원이 있기 위해서 있었던 여정을 기억해달라는 것이다. 결국 미국의 건국신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에 모형으로 놓여 있는 <메이플라워>라는 배를 보면 정말 이렇게 조그맣고 약하게 보이는 나무배를 타고 거친 대양을 건너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자유를 찾아서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해 길을 떠난 사람들이 만들어낸 국가가 바로 미국이다. 그리고 이 나라가 어떻게 해서 오늘까지 발전하게 만드는 원동력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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