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배경을 꼼꼼하고 충실하게 반영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역히 보인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먼저 열심히 거리를 달려가는 사람들 앞뒤에는 창밖으로 내던지는 무엇이 있다. 밤을 보내면서 만들어진 다양한 유형의 배설물들이다. 바로 이렇게 쏟아지는 오물들과 가끔씩 극장문을 닫게 만들고마는 전염병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하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아직 이런 의학상식은 보편적인 것이 되지 못해있었다. 전염병 중에 가장 무섭게 여겼던 페스트만 하더라도 병균을 옮기는 쥐를 잡아 태워죽이는 방 식의 해결책은 한참뒤에나 보급된다.

어쨌든 이렇게 거리에 쏟아져있게되는 똥물을 피하기 위해 여자가 안쪽으로 걷게되고 또 되도록 굽이 높은 구두를 신게되었는데 이것이 하이힐이 되었다는 문화사적 상식도 하나 머리에 챙겨두자.

영화에서 여주인공과 정략결혼을 하게되는 에섹스공은 실제 역사책에 이름이 나올 정도로 꽤 명문으로 알려져있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관련된 일화중에 유명한 것이 진흙탕 위로 망토를 깔아 좀 더 우아하게 넘어가게 했다는 것이 있다. 바로 월터 롤리라는 측근이 이 일화의 주인공인데 에섹스 공이라는 사람도 비슷한 유형으로 여왕의 가까운 존재였다.
따라서 에섹스공이 자신의 부인감을 여왕의 면전에 보이고 결혼승낙을 받는 장면은 사실과 그리 거리있는 대목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결혼에서 나오는 자금으로 담배농사를 지어볼까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선택일 것이다. 당시 신대륙의 북반부는 스페인이 탐구했던 남반부와는 다르게 애당초 콜럼버스가 기대하던 것과 같은 금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땅에 담배가 꽤 잘 가꾸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인간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 작물을 키우기 위한 여러가지 노력이 있게 되었다. 에섹스공이 향하는 곳이 바로 버지니아로 불리우는 땅이다. 처녀로 늙어죽게 되어 있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기념해서 붙여진 곳이다. 농사짓기 좋은 지역이라 후일 대농장주들이 많이 나오게 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역시 조지 워싱턴일 것이다.
어차피 신대륙이라는 곳에 기득권을 주장하는 땅주인은 없고 보면 왕실에 가까운 사람이 특허장이라는 종이 한장을 들고 여기가 내땅이오 하고 선을 긋기는 쉬울 것이다. 그래서 앞서 설명했던 식으로 수익성 좋은 담배농사를 짓는 다면 괜찮은 벌이가 될 것이다. 그 기본 자금을 얻기위해 신흥 Gentry 계급과 통혼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게 보일 것이 없다. 후일 미국의 졸부들이 유럽의 귀족들과 돈과 이름을 교환해서 나오는 시너지 효과를 기대해서 결혼을 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타이타닉>이라는 영화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는 것을 상기해주기 바란다.
어쨌든 우리의 여주인공은 이런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여 결혼에는 응하지만 무엇인가 자신만의 삶을 위한 일탈 또한 전개한다.

셰익스피어의 경쟁자 겸 친구로 나오는 말로라는 극작가 또한 실존인물이다. 매우 촉망받는 젊은이였지만 영화에서 처럼 일찍 죽고 만다. 술집에서 벌어진 사소한 시비로 결투까지 이어져서 짧은 생을 마감한다. 이 대목을 교묘하게도 활용해서 극에 삽입한 재주는 인정해주어야 할 것 같다.

극단에서 여자 단원이 허용되지 않은 것은 물론 성적 타락을 방지하기 위함일 것이다. 실제로 조선에서도 유랑극단의 여단원들이 매춘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보면 당시 기독교 사회에서 이런 위험성을 충분히 고려했던 것 같다. 덕분에 매우 밋밋하고 재미없는 여자 역할을 보게되는 것 같다. 상대적으로 여자배역이 작은 것도 제대로된 여자배우 역할을 구하기 힘들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갖는다.

당시 채무자들에게 무자비하게 고문하는 장면도 시대배경과 잘 맞는다. 서구사회에서 고문이 정말 없어지게 되는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였다. 채무자의 인권에 대한 보호가 확립되는 것도 그렇게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에는 한가지 명백한 오류가 나오는데 막바지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끝나는 장면에서 여왕이 스스로를 대영제국의 우두머리로 표현하는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당시 영국은 유럽의 변방에 위치한 존재로서 매우 가난하고 척박한 땅에서 간신히 오랜 전쟁의 끝에서 간신히 회복해가는 상태였다.
여왕이 우아하게 생을 마칠 수 있었던 것도 굳이 전쟁을 벌이지 않고 대내적으로 관용정책을 펼쳐서 모두를 포용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그녀 스스로가 매우 검소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영제국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붙인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행위였다. 겸손히 대카톨릭 군주인 스페인 왕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조심조심스럽게 행동했었을 것이다.
영국이 해외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내륙의 전쟁에서 쇠락해진 스페인을 대신해서 강국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은 한참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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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서 한참을 울게되었다. 스토리는 거의 알고 있었고 진행 또한 느릿느릿해서 급한 성격과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눈물이 나왔다. 무엇보다 부모님 세대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들었다.
다 보게 되니 언뜻 앤서니 홉킨스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주었던 작품 <남아있는 나날들>과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주인공은 철도와 함께 한평생을 보냈다. 기관차에 석탄을 부어넣는 화부에서 출발해서 운전을 하다가 승진해서 역장으로 한참을 보내고 이제 막 정년을 앞두고 있다. 맡은 일에 너무나도 충실하게만 살아온 사람이다.
철로라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만큼 큰 자유를 허용할까? 프랑스에서 인상파 화가들이 활약할 수 있었던 기반에는 철도가 있었다고 한다. 화가들이 기차를 타고 도심을 벗어나 자연을 바라보니 빠르게 스치는 풍경을 느끼며 전통과는 다른 터치를 가지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행동반경을 넓혀주는 철도였지만 종사자들에게도 똑 같은 자유가 주어졌을까?
그 보다는 꽉 짜여진 틀이라는 개념이 더 들어맞을 것 같다. 워낙 빨리 달리다보니 길의 일부분만 흐트려져도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기차운행은 종사자들을 매우 엄격한 규율속에 생활하도록 만든다. 다양한 수신호를 주고 받으며 점검하고 또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삶을 조금 확대해보면 그대로 우리가 요즘 이야기하는 공장굴뚝의 시대가 느껴지지 않을까? 한번 들어가면 평생을 머물게되는 직장, 엄격한 연공서열, 자신의 일은 정말로 자신이 사명을 다해서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 등 일본 내지 한국식의 사회구조를 잘 나타내는 셋트가 바로 철도가 아니였을까?

그가 책임을 맡고 머무르는 역 자체가 더 이상 기차가 나아가지 않는 종착역이다. 꽉 짜인 틀에서 주어진 일에 너무나도 충실하게 사느라 자신의 소박한 욕구도 마음대로 드러내지 못했던 사람이 바로 주인공이다.

결혼 17년만에 아이가 생겼어도 그는 아내를 포옹하며 같이 기뻐해주지도 못했다. 그저 공적인 업무시간에 사적인 희로애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원칙만 되풀이 할 뿐이다. 이렇게 고지식한 남편을 나 말고 누가 돌볼수 있을까하는 고운 심성을 가진 아내가 옆에 있다. 하지만 그 아내도 급성 폐렴에 걸려 생사가 걸린 자식의 병원길에 동행해주지도 못하고 제때 큰병원으로 옮기지 못해서 마침내 싸늘하게 식어버린 자식의 몸뚱이를 안고 오는 아내가 탄 기차를 평소와 다름없이 수신호와 구호로 맞이하는 남편에게는 정말 한없는 원망을 쏟아내고 싶었다. 마침내 병약하던 아내도 기차를 타고 병원길을 가게된다. 역시 교대근무자가 없기에 혼자 보낼 수 밖에 없지만 이번만은 그도 그냥 보내기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역에서 몇분을 더 끌어보았지만 그래도 기차는 떠나야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내마자 돌아오지 못하는 객이 되고 말았다. 홀로남아 지키는 역은 쓸쓸했다.

그렇게 열심히 앞만보고 주어진 일에 충실했지만 사회는 빠르게 변모하고 만다. 인정과 배려보다는 돈의 효용에 따른 합리성이 더 중시되는 모습으로 바뀌어간다. 새파랗게 젊은 자식뻘의 아이가 벌써 조직의 상층부에서 자신을 컨트롤하는 지위에 올라가있다. 그리고 매우 유감스럽지만 이제는 그만두어야 한다는 조직의 뜻을 전달한다. 지금 머무르는 집도 비워야 할 것이다.

이제 정말로 정년을 얼마남기지 않은 날에 철도원 생활을 같이 시작했던 동료가 기차를 타고 왔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 저런 일들을 회고한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일본판 포레스트 검프라고나 할까? 짤막한 배경장면들을 활용해서 일본사회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느라 겪어야 했던 힘들었던 집단적 잠재의식을 개인의 시선으로 보여나간다.
회사의 이익에 맞서서 동료들이 단합해가지고 취업열차를 운행하게 했던 점은 가슴 뿌듯한 추억이다. 이제 막 취업하러가게 된 어린 고교생들을 싣고 가면서 고향에 대한 좋은 기억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기적소리를 울려줄 정도로 자상한 마음가짐들이었다. 그 뒷면에는 전원취업을 기뻐하며 도회지에 나가서는 모두 열심히 먹고 살아라는 격려를 하면서 만세 삼창을 하는 교장선생님의 모습이 보인다. 모두가 힘을 합쳐 잘 살아 보자는 소망은 한국의 새마을 운동과 다를바 없을 것이다. 서울역과 미아리에서 보듯이 그렇게 도회로 나간 소년 소녀들 중에는 힘에겨운 일에 눌려서 옆으로 삐져나가 술집의 매춘부로 도심의 부랑인으로 살아가게된 존재들도 꽤 있을 것이다. 씁쓸했던 부분을 옆으로 젖혀놓고서라도 고생을 추억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시간이다.
탄광촌이 지금은 노인밖에 없는 소멸해가는 공간이지만 과거에는 엄청난 달러를 벌어와 전체 국민을 먹여살렸던 그야말로 효자산업이었다는 회고도 담겨있다. 그러다 보니 아이 하나 데리고 달랑 왔다가 탄광사고로 목숨을 잃은 어떤 아버지의 모습도 생각난다. 한국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눈물겨운 사연들이다. 사진 한장 변변한 것이 없어서 아이가 어린 마음으로 그려낸 아버지의 영정은 바로 산업현장에서 고유의 인격이라기 보다 대체될 수 있는 그리고 소모되는 기계의 부품으로 취급되며 살아가다 짓눌려버린 우리의 아버지들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부모가 없어진 아이를 보면서 집에 자손이 없기에 거두어 대를 잇게하고도 싶었지만 아내의 건강이 염려되어 포기했는데 되돌아보니 너무도 아쉽다.
그러던 중에 조그마한 아이가 역앞에 나타나서 왔다갔다하다가 옛날 인형을 놓고 갔다. 한밤중에는 다시 그 아이의 언니가 와서 재롱을 떨다간다. 정말로 귀여운 아이였다. 따끈한 음료수를 나누어 주었더니 눈을 감게하고 입에 뽀뽀를 하는 그런 사랑이 담뿍안기는 그런 아이였다. 하지만 이아이도 여전히 인형을 놓아두고 갔다. 다음날 정말로 묘하게 자신의 아내와 닮은 제법 큰 아이가 나타났다. 상당히 구닥다리 교복을 입은 이 아이를 보면서 너무도 아름답다고 느낀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맛있게 요리를 해놓고 같이 먹자고 한다. 잠시 여러이야기를 하면서 참 이쁘다고 생각하는 때에 전화가 한통화 온다. 현실이 너의 행복은 환영이라고 깨우쳐주려는 것이다. “아 이제야 알겠다. 너야 말로 나의 아름다운 딸,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줄 알았던 너가 이렇게 커서 나에게 왔구나.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데 사회에서 조금만이라도 출세 했다면 도회지에서 근무할 수 있었겠지. 그랬다면 감기 정도 걸린 것으로 작디작은 너를 싸늘하게 식혀서 땅에 묻지는 않았을 것인데 말이다.”
먼저 간 사람들 중에 보고 싶던 얼굴이 나타나게 되면 그건 다음 차례가 자신이라는 메시지라고 했던가? 딸은 떠나가면서 인형은 들고 갔지만 아직도 식탁에는 보글거리는 찌게가 남아있다. 꿈일까 생시일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단지 눈발을 헤치고 달려온 제설차의 시선을 따라갈 수 있을 따름이다. 한참을 달려와보니 눈에 뒤덮인 역에 쓰러져 조용히 누워있는 우리의 주인공의 모습이 나타났다. 한 철도원의 삶의 매듭을 보여주면서 그렇게 영화는 매듭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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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케이지가 나왔다는 점,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비디오를 집어들었고 무려 2시간이 넘게 보았다.

2차 대전 중의 몇년간을 - 대략 40년에서 44년 까지
그리스의 작은 섬에서 실제 벌어졌다는 일을 가지고
보여주었다.
작은 섬이 이탈리아에 점령되고
평화롭지만 긴 점령기간 끝에
주민과 이탈리아 군인들이 서로 이해하며
동화되다가 마지막에 독일에 대항해서
함께 싸운다.

여주인공도 아름답고 행동도 귀엽게 봐줄만하지만
영화 전체로는 별로 집어들고 싶은 메시지가 없다.
그리스 전쟁은 이탈리아가 먼저 시작했고
역량이 안되자 - 영화에서도 나오듯이 14000명이 8000명에게 밀리고
동맹군의 체면 때문에 독일이 개입한다.
이탈리아는 리비아에서도
영국군에게 먼저 도발했다가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박살이 났고
롬멜이 급파되게 된다.
도대체 역량이 안되면 벌리지나 말지
히틀러가 무솔리니 한테 싸워달라고 나선 것도 아니다.
어쨌든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고깝게도
이탈리아 군에게 점거 당한다.
하지만 이 군대는 정말 놀기만 좋아하는 날라리들이다.
그 덕분에 서로 좀 더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막바지에는 갑자기 독일군에 맞서서 함께 싸우다가
대거 희생된다.
이것도 정말 우스운 진행이다.
거의 의미 없는 개죽음에 가깝기 때문이다.

전쟁 영화를 보고 싶다면 명작으로 꼽히는 옛날 작품을 보고
예를 들면 <콰이 강의 다리>
연애 영화를 보고 싶다면 다른 작품들을 추천하는 게 좋겠다.
예를 들면 <구름속의 산책>, <You've got mail>, <When harry met s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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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시대에 실제로 있었던 비극들 중 하나를 소재로 삼아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의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무척 낡아보이는 구식 탱크가 눈에 들어왔다. 이 탱크를 앞세운 채 일단의 군대가 전진해간다. 용감한 적군의 용사들 앞에 놓인 평지는 그냥 아무나 지나가는 길이 아니다. 그 위에는 농부들이 한여름 흘린 땀으로 만들어진 작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제발 멈춰달라는 농부들의 하소연에도 군대는 이미 잡은 진로를 바꿀 줄 모른다. 농부들은 이 상황에서 어느 노인에게 달려간다. 상황을 바로 판단한 그는 말을 타고 달려와 지휘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진로정정을 명한다. 혁명전쟁의 영웅인 코토바 대령의 위세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위세 좋은 사람이 그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을까 하는 아찔함이 느껴진다. 이미 혁명에는 관료주의의 냄새가 짙게 배이기 시작한 것이다. 말단 조직에게 순간순간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순발력을 키우게 하기 보다는 무조건적인 충성만이 요구된다.

그냥 천천히 비추어 주는 화면은 정말 평화로운 농촌의 모습이었다. 여기에 울리는 사이렌은 민방공 훈련을 나타낸다. 이 시점에서 피아니스트를 가장한 젊은 청년 하나가 나타난다. 그를 대하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는 이 사람이 가진 사연의 무게를 나타낸다.
이제는 대령의 아내가 되어버린 옛날 애인과 잠시 만남을 가지고 옛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가 이곳에 나타난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대령과 사적인 대화를 얼마간 나누었고 처음에는 정중히 차로 모시는 행동을 하는 과정에서 결국 그가 드러낸 정체는 정보부 요원이었다. 둘 사이의 갈등이 얼마간 나타났지만 저 건너편에 떠오르는 스탈린의 초상화는 잠시 침묵을 갖게한다. 둘 다 같은 초상화를 향해 경례를 붙인다. 한때는 대령에게 직접 훈장을 수여했던 바로 그 스탈린이지만 이제는 냉혹한 독재자로 변모해서 자신의 권력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존재들을 숙청해가고 있다.
그래서 이어지는 장면은 대령의 처형이었다.
어제는 전장에서 목숨을 걸어 영웅이 되었고 이제는 선량한 노인이고 마을의 어른인 그가 이렇게 죽어야만 했다.
이 때 단지 목격자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죽어야만 했던 사람이 있다.
가끔 어떤 목적지를 찾아서 트럭을 몰고 헤매며 다니는 운전수가 있었다. 그에게는 분명 목적지가 있었다. 하지만 정말 아무도 그곳에 대해서 대답해줄 수 없었다. 그는 누구의 상징일까? 그가 그렇게 안타깝게 가려고 했던 곳은 결국 아무도 모르는 유토피아가 아니었을까?
바로 이 사람이 여기서 같이 죽게된다.
이는 스탈린의 숙청이 기존의 당과 군의 관료 뿐만이 아니라 그저 열심히 유토피아를 쫓던 무수한 평민층에까지 미쳤다는 점을 상징하게 된다. 아울러 한걸음 나아가 유토피아를 추구하던 모든 사람들이 다 위협을 받았다는 점까지도 나타낸다.
트로츠키주의, 개량주의, 인민주의 운동 등 같지 않은 모든 의견들이 배제되었다. 그 과정에서 고려인들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후르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이 나타나게 되는 배경을 상징적인 기법으로 잘 표현해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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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겟돈

Deep impact와 엇비슷한 주제를 다루었지만 이쪽이 더 길고 더 유명한 배우를 주연으로 썼고 그리고 무엇보다 더 재미있다.

브루스 윌리스는 드릴을 이용해 땅을 파는 사람이다. 땅을 파서 기름을 찾는 고된 작업을 하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이 분야의 세계적 전문가다. 이론적으로도 많은 것을 알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활용하는 측면에서 탁월한 역량을 보여준다. 보통사람의 상식으로는 드릴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영화의 처음 부분은 그런 생각이 편견일 뿐이라고 관객들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여러 장면을 할애한다.

성격적으로 볼 때 브루스 윌리스는 매우 직선적이다.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기도 하고 바꾸어 말하면 순수하게도 볼수 있다. 부하직원 AJ의 침대에서 딸을 발견하고서는 곧바로 총을 찾으러간다. 거의 좌우를 고려하지 않고 쏘아대는 그의 모습을 보니 얼마전 한국에서도 어느 아버지가 딸의 침대에서 발견한 외간남자를 방망이로 두들겨팼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딸이 이렇게까지 아버지의 뜻과 어긋나게 나가게 된 책임의 상당 부분은 아버지에게 있다. 브루스 윌리스는 일찍 이혼했고 온전한 가정을 꾸리지 못해서 항상 딸을 작업장에 데리고 있었다. 자신의 죄가 있기 때문에 딸에게만 나무라지 못하지만 지금은 무척 후회하고 있다. 그래서 딸의 애인에게 처음에는 총질을 했지만 다음에는 가만 놔두었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화해하게 되는 과정을 밟아나간다.

<아폴로 13>에서 보여주는 NASA의 모습은 매우 합리적이고 유능한 인재들의 집단이다. 우주 공간에서 부딪힌 예상치 못한 사태에 대해서 가능한 최선의 방법을 이끌어내는 능력을 보면서 완전치는 못하지만 충분히 자기 교정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조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아주 아주 영웅적 역할을 한 개인에게 양보하고 가슴을 졸이면서 쳐다만 보는 무력한 존재로 그려진다.

브루스 윌리스가 필요하다고 지적한 몇몇 동료들이 카지노장에서 도박에 빠져있다가 도로에서 질주하다가 혹은 젊은 여인을 유혹하다가 잡혀온다. 이들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 보자. 대부분 덩치크고 외골수로서 "머리보다는 몸을 주로 사용해온" 백인 블루칼라들이다. 이들의 속내를 잘 드러내주는 면모는 역시 생명 수당 대신 내건 조건들이다. 카지노 숙박권, 경찰에게서 떼인 교통위반 딱지를 면해줄 것 등 개성에 따라 나오는 여러가지 조건이 내걸리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생동안 세금을 면제해달라는 조건이다. 세금에 대한 양적인 고민과 함께 이런일도 제대로 처리 못하는 무능한 정부가 세금을 거둬갈 명분은 또 무엇이냐는 반문이 스며인는 듯한 말이다.

고된 훈련을 받으며 다들 정상적이지 못한 상태가 된 이들이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들을 하자 브루스 윌리스는 하루의 휴가를 요청한다. 엄청난 대사를 치르는데 하루라는 시간이 귀중하지만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왜 죽으러가느냐하는 존재의 이유를 각자가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희생이다.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큰 작업에 한사람의 이탈자도 없이 모두 동참한다. 역사적으로 보여준 자기 희생의 좋은 예 하나는 데르모필라에서 보여준 스파르타 인들의 행동일 것이다. 위기에 빠진 그리스 전체를 구하기 위한 시간을 벌려고 이들은 데르모필라라는 좁은 계곡에서 페르시아인들의 진격을 막으러 나간다. 몇백 정도의 군사로 수십만 대군에 맞서러 나가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를 바가 없지만 이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모두의 안위를 위해 자기 헌신을 하게된다. 단 이들 자원자의 조건은 아들을 둔 남자들이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존재가 혈육을 통해 승계될수 있을 때 자기 희생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짧은 휴가를 통해 찾으려는 가치는 다양하다. 사채업자에게 거금을 빌려 카지노에서 마음껏 뿌리는 사람도 있지만 상당수는 가족을 찾아나선다. AJ는 물론 브루스 윌리스의 딸을 만나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여러가지 대화를 한다. 또 한명의 예비 우주인은 작고 하얀집을 방문한다. 이곳에서 노는 아이는 실은 그의 아들이지만 법원의 판결은 냉혹해서 접견의 권리까지 금지되어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식에게 이 사람을 "외판원"이라고 둘러대면서 즉시 물러나 줄 것을 요청한다. 어쨌든 이들이 보낸 시간들은 희생이 이루어져야하는 근거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 급조된 우주인들은 모험을 떠났다. 이들이 우주로 떠나는 장면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중간에 구 소련의 우주정거장 미르에서 연료보급을 받는 것부터 예기치 못했던 어려움이 닥친다. 미르의 다 낡은 시설은 보급과정에서 폭파되 버리지만 대신 경험많은 우주비행사 한명이 모험에 동참하게 된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살아온 방식에 따라 행동해서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되는 복선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이 소행성에서 벌이는 활약은 결국 모험 드라마들의 패러디다. 이런 형태의 드라마의 구조는 장소만 바뀔뿐 대체로 일정한 편이다. 보통사람들이 가보고 싶지만 자주 경험하기는 어려운 공간이 선택되고 주인공은 여러가지 난관을 초인적인 노력과 운을 적당히 결합해가며 해결하게 된다. 영화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이런 장소로 기차가 선택되었고 점차 비행기가 많이 나오다가 이제는 우주선이 활약하는 시대가 되었다.

폭파 과정에서 역시 우리의 영웅 브루스 윌리스의 개성이 드러난다. 본부의 유유부단하고 맹목적인 지시에 대해서 브루스 윌리스는 자신이 결코 주어진 목표를 채우지 못한 적이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저항한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자기의 전문 영역 - 바꾸어 말하면 밥줄 - 에 대해서 남이 터치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미국 사람들의 일반적 특성이 잘 드러난다.
어쨌든 구멍파기 작업은 성공하였는데 문제는 한 사람이 남아서 폭파를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비뽑기라는 고전적인 방법을 통해 선택된 영웅은 딸의 연인 AJ다. 흔쾌히 그 역할을 맡겠다는 이 친구 대신에 브루스 윌리스는 자신을 희생한다. 모든 영화가 그렇듯이 아주 아주 막바지까지 시간을 소모해가면서 그는 폭파에 성공한다.

살아남은 영웅들이 돌아오는 마지막 장면은 역시 또 하나의 가족 회복 드라마가 된다. 아버지 대신 애인을 맞게된 딸의 희비가 교차되는 모습이 먼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어서 외판원으로 취급되었던 또 하나의 가족상실자가 이제 존경받는 영웅으로 변신해서 떳떳이 아들을 품에안게 된다. 한가지 더하자면 늘 도박과 여자를 좋아하던 놈팽이조차 자신을 마중나온 스트립걸을 만났다.

진행상 몇가지 문제점들이 있다.
먼저 과학적인 차원인데 소행성의 중심을 폭발해서 거의 비슷한 크기의 둘로 나누어 지구를 벗어나게 한다는 해결책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과학적이지 못한 것 같다.
또 지구 곳곳이 파괴되었는데 다른 지역에서 닥치는 위험을 모른채 정상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다. 70년대에 뉴욕시가 잠시 정전되었을 때 엄청난 폭력이 발생했던 것이나 LA의 흑인폭동때 난장판이 되었던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굳이 이런 면을 배제시키는 것은 역시 영화는 사실성보다는 오락과 교훈을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가지 유념해서 보아야할 것은 영화에 나온 주인공이나 일반 사람들이 거의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더기로 몰려나와 자신이 믿는 신을 의지하려는 사람들은 오직 이슬람 밖에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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