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어떤 분은 나보다 13살 연상의 할머니인데 전직이 목사이시다. 오늘은 밥을 사주신다고 해서 아파트 현관에서 만났다. 만나자마자 갓 파마를 한 내 머리를 보고는 염색 좀 하라고 하신다. 벌써 몇번째인지 모르겠다. 그때마다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는데도 변함없이 지적하신다. 순간 밥을 먹으러 가야 하나 고민이 스친다.


"제 나이가 60이 넘었어요. 이 나이에 머리 염색하라는 말을 계속 들어야 하나요?" 얼굴이 예쁜 것보다 말씨가 예쁜 사람을 좋아한다는데 나는 죽다 깨어나도 (둘 다) 안되겠구나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 사실 나는 벼르고 있었다. 한번만 더 염색 어쩌구 하시면 한방 먹여야지 하고. 


염색 권하는 사회에 대해서. 젊어보여야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사회에 대해서. 젊음을 동경하는 사회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분명 기 - 승 - 전 - 하나님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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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컴한 새벽. 늙은 개는 늙은 인간처럼 새벽잠이 없는지 머리맡에서 끙끙대는 통에 잠을 이을 수가 없다. 더듬더듬 목줄 채우고, 배변봉투 챙기고, 눈 비비며 흐느적 흐느적 걷다가 오늘은 그만 빗물이 질펀한 화단가의 진흙을 밟고 말았다. 오른쪽 무릎이 땅에 부딪히면서 양쪽 다리가 꺾여 거꾸로 된 w 자가 되었다. 당장 아프기도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있는 오른쪽 무릎 때문에 걱정이 앞섰다. 설상가상이다.




이 녀석을 하루에 두 번씩 숙제하듯 꼬박꼬박 산책을 시키며 수발을 들어준다. 나의 원래 지론은 이랬다. '개는 개답게 키워라.' 즉 개는 실외에서 줄에 묶은 채 키우는 게 맞다는 생각으로 살았는데 딸내미의 '전도'로 유기견을 키우게 되면서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처음과는 달리 해가 지날수록 배변 실수가 잦아지는데 아마도 나이 탓이겠거니 여기다가도 짜증이 나는 건 나 또한 늙어가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딸이 어렸을 적에 이렇게 정성스럽게 딸이 누는 똥을 닦아줬던가. 부모가 늙고 병들었을 때 내 손으로 똥오줌 받아본 적이 있던가. 직장에 다닌다고 어린 딸을 시어머니께 맡기고 주말과 방학 때 잠깐씩 봐준 게 전부. 딸의 유아시절을 오롯이 함께 보내지 못했다. 정신차리고 보니 딸은 부모의 이상한 교육열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어린 딸의 똥오줌을 제대로 봐주지 못한 죄값이 컸다. 부모한테는 더 가혹했다. 역시 직장 핑계로 모든 돌봄에서 벗어나 있었는데 지나고보니 당장의 안일을 추구했을 뿐 생각과 행동이 한없이 가벼웠었다.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는 엄마의 똥오줌을 한번도 내 손으로 봐드린 적이 없었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부모한테 받는 것을 당연하게만 여겼다. 


그간 부모와 자식에게 못한 정성을 개에게 기울이면서 때늦은 감상에 젖는다. 어리석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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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떠도는 '동요에 담긴 부동산 시장의 진리'라는 꼭지에 한참 웃다가 급 씁쓸해졌다.

1.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강/호수 주변에 위치한 집이 핵심 지역임을 암시

2. 기찻길옆 오막살이....역세권의 중요성

3. 두껍아 헌집줄게 새집다오.... 재개발 재건축을 노리는 전략

4. 곰세마리가 한집에 있어...최소 20평, 쓰리룸인 30평대가 주력

5.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그린벨트 지역과 같은 개발특수지역은 먹기가 쉽지 않음을 암시


1, 2, 3 은 언감생심,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집 값 동요 따위와는 전혀 상관 없는 위치에 있지만 그나마 4번이어서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고, 강원도 오지에 오두막이 있어 나름 기대를 품고 있는데 그것이 그러니까 말 그대로 깊은 산 속 옹달샘이라는 것.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맑고 맑은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달밤에 노루가 숨바꼭질 하다가

목마르면 달려와 얼른 먹고 가지요


노래의 깊은 산 속 옹달샘은 야생 동물이 물만 먹고 가지만, 실상은 노루 대신 고라니가 숨바꼭질 하듯 텃밭의 푸성귀를 할퀴고 간다. 며칠 집을 비울라치면 상추 모종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고구마순, 가지순, 고추순 마저 깔끔하게 잎사귀를 먹어치운다. 야생동물 초음파 퇴치기를 설치했더니 시도 때도 없이 지나가는 바람에도 울어대는 통에 소음공해를 일으킨다. 


그래도 개울이 있으니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는 해당이 되려나. 알고보면 그것도 꿈만 야무지다.



폭 20미터가 채 안 되는 저 개울을 건너기가 어렵고 어렵고 어렵다. 비가 내리면 계곡물이 불고 물살이 세차 빈 몸으로도 건너갈 수 없다. 물이 빠져도 건너기 힘든 건 마찬가지. 납작한 잠수 시멘트 다리가 있으면 차량을 운행하여 짐이라도 쉽게 나르련만. 다리라도 하나 놔달라고 군청에 읍소한지 어언 16~17년. 응답없는 메아리. 매미/루사의 태풍 피해로 유실된 도로변에 산다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이야. 고민 끝에 수백만 원을 들여 사진 속에 보이는 폰툰을 설치했다. 비가 많이 오면 바위에 묶여 있던 한쪽 밧줄이 풀리면서 맞은 편 물가쪽으로 밀려가 폰툰 유실을 막을 수가 있다. 그런데 얌전히 밀려가서 맞은 편에 자리잡으면 좋으련만 가끔씩 폰툰 몸체가 뒤집혀지기도 한다. 건장한 성인 남자가 벌레 뒤집어주듯 뒤집을 수 있는 있는 무게가 아니다. 체인 블록을 이용해 겨우 겨우 힘들게 뒤집어 주는데...저 일을 혼자 묵묵히 감당하는 남편을 보면서 '저이는 삼손이었구나' 새삼 감탄과 존경의 마음이 샘솟는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으로 보이지만 저 길을 오갈 땐 가능하면 장화를 신는다. 언제 어디서 뱀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디 길 뿐이랴. 비가 많이 오면 전기가 누전이 되어 물을 쓸 수가 없다. 물 많은 동네에 물이 없다니...그렇다고 개울물 길어다가 화장실 변기통 채우기에는 몸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속 생활은 한번쯤 살아볼 만하다. 지방 소멸 시대에 작은 보탬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몇가지 장점이 있다. 우선 야생을 겪어본다는 것. 하늘, 바람, 비, 눈, 별, 나무, 야생화...이런 것들이 주인공이고 인간은 다만 기생적인 생물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봄철 양양과 간성(고성) 사이에 발생하는 양간지풍에 시달리기라도 하면 고해성사라도 하는 기분에 젖는다. 제 죄를 너그럽게 용서하시고...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북인도 레 지방의 산악지역에 덩그러니 위치한 곰파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고나 할까. 그리고 여행 욕구도 상당히 줄어든다. 청명한 밤 하늘에 총총히 떠있는 별들, 교교한 달빛에 서려있는 왠지 모를 오싹한 두려움, 시공간을 배분해서 들고나는 온갖 생명들과 그 짜임새 있는 질서, 칠흑 같은 밤. 여기 또한 이국의 땅. 도시와는 사뭇 다른 환경에서 불면증 없이 곤하게 잠자리에 든다. 다만 어려운 점이라면 역시 사람과의 관계. 인간 관계가 가장 어렵다는 법정 스님의 말씀은 역시 진리이지 싶다.


앞산 자락에 장막을 걷듯 내려 앉던 햇볕이 드디어 우리집 마당에 내려 앉는다. 빨래를 말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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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퇴직한 마당에 털어놓는 건데

나는 교원평가제 때
나에 대한 주저리주저리 서술형 평가를
한번도 읽은 적이 없다.
조롱 당하는 기분이 더러울까봐.

교원평가제 참여를 거부했더니
담당교사가 곤란하다며
사유를 적어야 한단다.
'교원평가제를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쓰시오.
이후, 불이익 같은 건,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저항이었다.
퇴직하게 되니 비로소 입이 열렸다.
얼마 후 퇴직했다.
무엇이 두려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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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9-13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김누리교수님 영상을 보고나서야 교원평가제가 분명히 문제라는걸 인식했어요. 그 전에는 그냥 이상하다고만...어쨌든 부끄럽네요.

2023-09-14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p.343

 영미야, 창근아, 그 시절엔 의리를 매우 중요시하고, 선배를 잘 따랐주. 반일 투쟁했던 선배들의 정신을 본받으려고 했어. 그분들이 대부분 좌익이었고, 그래서 후배들은 유식하면 유식한 대로, 무식하면 무식한 대로 좌익이 된 거라. 그땐 다 그랬주.


1945년 해방 때의 시대상황이다. 이 어렵지도 않은 상식적인 사실을 비틀고 억지를 부리는 무리를 보고 있노라면 화가 나서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해진다. 참으로 뻔뻔한 무리들.



2. 














수채화 같은 글을 읽노라면 가만히 감상에 젖곤하는데...하, 결정적인 단점이 자꾸 눈에 뜨인다.


p. 243

 두 여승은 앳된 소녀였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볼그레한 볼, 도톰한 붉은 입술, 크고 선연한 흰자위와 까만 눈동자, 가늘고 긴 목덜미의 뽀얀 살빛, 처녀성이 눈부신 아름다운 용모였다. 배코 친 파란 머리와 헐렁한 잿빛 승복이 속인의 마음을 공연히 안타깝게 하는데, 정작 두 여승은 여느 소녀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밝게 웃고 새처럼 맑은 목소리로 지저귀고 있었다.


  여승을 그저 여승으로만 볼 것이지, 외모를 하나하나 따지며 대상화하는 건 뭔가. 불편하다.


 p. 163

복지경의 소나기 한 줄기는 농부의 한계체온 이상의 무모한 인내에 대해서 여름날이 줄항복은 하는 것이다. 삼굿 같던 날씨가 제풀에 겁을 먹고 '독한 놈, 이러다 사람 잡지. 내가 졌다' 하듯 난데없는 시원한 바람 한 점을 백기처럼 흔들며 들판을 훑고 가버린다. 돌연한 날씨의 변덕에 농부들은 본능적으로 밭고랑에서 놀라 장끼 고개 쳐들 듯이 벌떡 일어나 건넌골 쪽을 쳐다본다. 아니나 다를까 컴컴한 골 안에서부터 막잠 자고 난 누에 뽕잎 먹는 소리처럼 버석거리며 뽀얗게 묻어 드는 소나기가 미처 피해 볼 새도 없이 순식간에 들판을 유린해 버린다. 유린! 그 얼마나 협쾌한 유린인가. 수절과부가 외딴 골짜기에서 범강장달이 같은 사내에게 겁탈을 당한들 그만큼 협쾌할까.


협쾌란 통쾌하다는 말일 터. 이런 식으로 여성을 비하하고 대상화 하는 표현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금 시각으로보면 매우 시대착오적이지만 1938년생인 지은이가 살았던 세계에선 이런 시각이 보편적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세계에서 살았던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러니 눈살은 찌푸려지지만 참고 읽는 수밖에. 



위의 두 책을 같은 주제로 열거하는 게 좀 무리인 듯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 그러나 패러다임을 왜곡하고 시대를 되돌리려는 자들에게는 당당하게 맞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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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3-09-09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마다 동작하는 무의식적인 인식의 틀이 있긴 하지만 수채화 같은 글에 큰 오점을 남길 구절들이 꽤 있네요.
‘그리운 시절‘중에는 ‘겁탈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주호의 모험심이 얼마나 순진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라는 뜨악한 구절도 나옵니다.

nama 2023-09-09 17:13   좋아요 0 | URL
그 시절에는 통용되었겠지만 지금 보면 핀셋으로 뽑아버리고 싶은 문장들이 꽤 있어요.
이런 책이 후세에도 남아 있다면 고전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