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다리 텍스트에 관해 미뤄놓은 이야기들 중 하나를 해치우기로 한다. 점심을 먹은 포만감이 좀 가라앉을 때까지. 이런 잡담을 늘어놓는 대신에 가벼운 산책이라도 하면 좋겠지만, 날은 약간 후덥지근하고 아파트 단지를 대낮에 반바지만 입고 돌아다니는 것도 좀 우스운 꼴이 아닐까 싶어서 나는 '좋은 걸' 포기한다. 그래도 이번 토픽은 괜찮군. 문학의 성감대라..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런 몽상을 바로 깨게 되어 미안하지만, 내가 읽은 건 <유종호 깊이 읽기>(민음사, 2006)에 실린 한 대담이다. 책은 이 원로 비평가에게 바쳐진 문집 형태인데, 편집을 맡은 비평가 정과리의 서문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게 상식적인 진리라고 한다면 유종호 비평이야말로, 정보의 팽창과 역사의 붕괴 그리고 이론의 폭발이라는 오늘의 상황 속에서, 규정하는 힘인 존재에게 규정당하는 의식이 개입해 존재의 운동에 정지와 성찰과 교정을 촉박하는 역류의 힘으로 작용하는 희귀한 덕목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이의 비평을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읽히게 하는 원천은 이 덕목에 있을 것이다."(8쪽)

비록 문법적으로 비문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 유종호 비평의 가장 큰 덕목은 이런 '난삽한' 문장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인용문은 유종호 비평의 미덕을 정확하게 반증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평이한 언어와 상식에 맞는 감각에 근거하여 깊이와 기품을 겸비한 작품 읽기와 해석을 제시해왔던 것. 책은 바로 그런 그의 면모를 동료/후배 비평가들과 문인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집약해놓고 있다(개인적으로 처음 알게 된 것은 평론가 유종호와 시인 신경림 사이의 깊은 사적인 인연이었다).

 

 

 

 

한데, 이 '깊이 읽기'에 대한 리뷰는 이 페이퍼의 목적이 아니다(아직 다 읽지도 못했다). 제목과 관련된 대목은 이런 것이다. 평론가 이남호와의 대담에서 민음사에서 1974년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를 첫권으로 하여 간행하기 시작한 '오늘의 시인총서'에 관한 질문을 받자 유종호는 이렇게 응대한다. 

"그건 김현 씨가 발간 취지문을 쓰고 김현 씨 아이디어가 많이 들어간 기획물이에요. 오늘의 시인총서 뒤 표지의 '기획의 변'을 내가 써다고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쓴 게 아니에요. 거기에 보면 '문학의 성감대'라는 말이 있는데 옛날부터 나는 '성감대'라는 말을 안 썼어요. 그건 김현 씨의 아이디어에요."(20쪽)

이 '기획의 변'이 고 김현(1942-1990)의 '작품'으로 알고 있었던 나로선 별로 새로울 게 없는 얘기지만, "거기에 보면 '문학의 성감대'라는 말이 있는데 옛날부터 나는 '성감대'라는 말을 안 썼어요."라는 지적은 유종호다운 취향과 감식안을 드러내주는 것이라 흥미를 끈다(그러니까 김현 비평과 유종호 비평의 차이는 이 '성감대'에 있다. 두 비평가는 프로이트와 정신분석비평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상대적인 무관심에 따라 각기 다른, 정반대의 이론적 포지션에 배치된다. 시읽기에 관해서라면 각기 일가를 이룬 비평가들인지라 이러한 차이는 음미해볼 만하다). 그는 한 단어의 쓰임새만으로도 텍스트의 의미를 길어올리고 꿰어내는 것이 유종호 비평의 특장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기획의 변' 혹은 '오늘의 시인총서를 내면서'의 내용은 무엇인가? 텍스트 바깥(뒷표지)에 박혀 있는 이 '곁다리텍스트'는 이런 내용으로 돼 있다(이 기획의 변은 김현의 나이 32살에 씌어진 것이겠다).

"문학이 그것을 산출케 한 사회의 정신적 모습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면, 시는 그 문학의 가장 예민한 성감대를 이룬다.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한 사회의 이념과 풍속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을 개인의 창조물 속에서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이해하는 것이 지식인들의 중요한 작업이 되어있는 오늘날, 시인들의 창조적 자기표출을 예리하게 감득하지 못하는 한, 그것도 한낱 도로에 그칠 가능성을 갖는다. 시인의 직관은 논객의 논리를 뛰어넘어 어떤 것을 그 작품 속에 표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의 시인총서>를 발간하기로 결정한 것은 시인들의 그 날카로운 직관을 통해 한국사회의 정신적 상처와 기쁨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강조는 나의 것)

즉, 시는 '문학의 성감대'이며(포에티카는 에로티카이다. 그러니 시를 읽으면서 '찌릿찌릿'하지 않다면 당신은 불감증일 가능성이 높다), 한 개인의 창조물로서의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한 사회의 이념과 풍속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을 이해하는 것이다(킨제이 버전으로 말하자면, 한 여자/남자의 성감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여자/남자의 존재 전체에 대한 이해가 걸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전제하에 기획자 김현이 힘주어 강조하는 것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이해하는 것이 지식인들의 중요한 작업이 되어있는 오늘날, 시인들의 창조적 자기표출을 예리하게 감득하지 못하는 한, 그것도 한낱 도로에 그칠 가능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한국 시인들의 창조적 자기표출을 예리하게 감득/이해하지 못한다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짱 도루묵이다. 이건 생각보다 파격적인 발상이고 발언이다(고전적 인문주의자로서 유종호라면 보다 겸손한 의의와 역할을 시에 할당했을 것이다).

그에 공감을 표하면서, 내가 새로이 던지게 되는 질문은 이것이다. "한국사회의 정신적 상처와 기쁨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시들이 씌어지고 있는가? 혹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기꺼이 "시인들의 그 날카로운 직관"에 동참하고 있는가? 이건 철지난 질문인가?..

06. 06. 22.

P.S. '오늘의 시인총서' 1, 2권인 <거대한 뿌리>와 <처용>은 내가 대학 1학년 여름방학때 급조한 시들로 자작시집을 만들어 판매한 수익으로 제일 먼저 산 시집들이다(나는 시를 읽고 시를 쓴 게 아니라 시를 쓰고 시를 읽었다). 그날 두 권의 시집을 사들고 가는 나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비평가 김현이 아닌 불문학 교수 김현을 나는 1989년 한 강의실에서 잠깐 볼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불어 동사 활용형을 말하는 목소리이다(!)... 아래는 목포 자연사박물관 뒤뜰에 있는 김현 문학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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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문화에 대한 한 학기 강의 끝에 지난 월요일 기말시험을 봤는데, 상당수의 학생들이 '트로츠키'가 누구인지에 대한 단답형 문제에도 손을 대지 못했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다소간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다(강사나 학생이나 서로가 한 학기 동안 무얼했는지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더불어 요즘 학생들이 학점에 너무 신경을 쓴다는 말도 별로 신빙성이 없다는 걸 다시 확인하게 된다(언제나 그랬지만, 대학생들의 상당수는 날라리 대학생이다. 아마도 그들은 방학때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하여간에 내 몫의 반성을 하는 의미에서 러시아에 관한 이야기들을 좀더 강화하기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거창하게 '계몽'적 의도를 갖고 있는 건 전혀 아니며, 다만 언젠가 빛이 들 만한 '쥐구멍' 정도는 만들어놓고자 하는 것. 그런 취지에서, 진보언론을 표방하는 '레디앙'에 들렀다가 하영식의 칼럼 '아테네에서 온 편지' 중 '러시아 혁명은 근대화 운동이다(?)'가 눈에 띄길래 옮겨온다.

 

 

 

 

필자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여행>(밀리언하우스, 2005), <굿바이 바그다드>(홍익출판사, 2004) 등의 저서를 이미 갖고 있지만 내겐 생소하다. <여행>은 "80년대,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저자가 당국의 추적을 피해 해외 도피길에 올라 세상을 방랑할 때의 기록"으로서 "프랑스, 영국, 멕시코를 방랑하던 저자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조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과 폴란드의 외딴 마을 크렘프나에서 보낸 1년간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는데, 러시아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담고 있어서 기회가 되면 들춰볼 생각이다.

레디앙(06. 03. 28) 지난해 가을 러시아의 페테르부르그를 방문했을 때 한 러시아 노인이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 "러시아는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했던 위대한 국가"라는 말이었다. 그 노인의 말처럼 과거의 그 위대했던 러시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해는 1905년 1차 러시아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였지만 러시아의 대학가 어디에서도 이를 기념하는 행사는 열리지 않았다. 혁명의 진원지이기도 했던 페테르부르그 대학을 찾아 그 대학의 역사학과 석좌교수를 만나 러시아 혁명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 있다. 그의 말을 빌린다면 러시아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라기보다는 근대화를 위한 운동"이었다. 공산주의체제의 산증인이기도 했던 노교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나는 곧 말문이 막혀버렸다. 러시아에서조차도 지난 혁명의 역사는 이렇게 철저히 부정되고 있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존재하지 않고 노동과 분배의 정의가 실현된다는 공산주의 사회는 이렇게 몰락해버렸다(*이게 대략 러시아의 현실이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이론이 실험이었다면 그 실험은 실패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그동안 많은 이론가들이 나름대로 원인을 진단해왔다. 트로츠키주의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느니, 레닌의 네프(NEP, 신경제정책)를 지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느니 하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스탈린의 정책노선이나 중국의 문화혁명이 지나치게 반인텔리적인 정책이어서 몰락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는 진단을 하는 이도 있다. 아니면 아예 후진농업국가였던 러시아나 중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 원인은 너무 단순할 수 있다.

 

 

 


-이제는 누구도 사회주의자니 공산주의자라고 스스로를 규정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면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꼴통이라 왕따 당하는 세상이 돼버렸다. 특히 공산주의 시절 공산당간부로서 부귀영화를 잔뜩 누렸던 가짜 공산주의자들은 이미 인민복을 벗어 던지고 너무도 쉽게 돈 많은 자본가로 둔갑해버렸다. 이렇게 현실사회주의는 철저히 몰락해버렸다.

-어쨌든 인간의 사고가 빚어낸 최고의 이론이라는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이 현실에 제대로 적용됐는지의 여부는 제쳐두고서라도 최소한 시도만이라도 해본 것은 사실이다. 어설프나마 그 수준에서 흉내라도 내봤다는 데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필자의 감상은 다소 불철저하다. 그러니 칼럼의 말미에서 피상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건 당연해 보인다). 공산당 간부들이야 다른 세상이 오면 자본가로 둔갑해버리면 그만이지만 그 짐은 고스란히 민중들이 짊어질 수밖에 없다. 


 
-시베리아를 열차로 횡단하던 중 모스크바에 살면서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는 티나라는 러시아 여인과 대화를 나눈 적 있다.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은 러시아 공산주의사회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를 제공했다. "어릴 때 언제나 사탕과 초콜릿이 그렇게도 먹고 싶었으나 전혀 구경도 하지 못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티나의 회상은 마치 먼 나라의 얘기처럼 들렸다. 국영상점에서는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만 구비해놓았지 어린이들을 위한 것들은 전혀 없었던 모양이다.

-러시아의 공산주의 체제가 망한 현재의 상황을 티나는 더 선호한다고 했지만 그 이유란 별 게 아니었다. 초콜릿이나 사탕을 마음대로 볼 수 있고 살 수 있다는 게 중요한 이유였다. 티나의 얘기를 들으면서, 만약에 공산당 간부들이 자기주머니 채우는 일에 열중하기보다는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초콜릿이나 사탕을 만드는 일에 더 신경 썼더라면 세계 공산주의 체제는 여전히 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비록 공산주의의 종주국이 망하고 대부분의 공산주의를 표방하던 국가들이 자본주의의 길을 걷고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나라들이 있다. 시리아로 대표되는 중동의 몇 개 나라들과 아프리카의 몇 개 국가들과 쿠바와 북한이다. 이들 국가들은 반미를 중심정책으로 두면서 일인 장기독재가 유지되고 있다. 시리아는 아버지 아사드 대통령이 죽은 뒤 아들이 정권을 물려받았고 북한도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죽은 뒤 아들이 정권을 물려받았다는 점이 너무 유사하다.

-물론 미국의 부시일가도 아버지와 아들이 정권을 잡았다는 점이 유사하지만 빠르면 4년, 늦어도 8년이 지나면 물러나게 돼있다는 점이 이들 국가와는 조금 다르다. 패밀리 장기독재의 문제는 둘째로 친다 하더라도 이들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과연 행복한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지난해 시리아를 방문했을 때 수도 다마스커스시에 사는 시리아인들과 몇 차례 대화를 시도한 적 있었다. 이들은 이리저리 눈치를 보면서 말하기를 꺼려했다. 특히 대통령의 이름인 ‘아사드’는 성스러운 이름인양 꺼내기조차 두려워했다. 그의 이름이 나의 입 밖으로 떨어지는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천벌이라도 내릴 것 같은 분위기로 돌변했다. 북한도 시리아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없는 세상이 아니라 전국민들이 공포에 떨면서 살아가는 세상이 사회주의라는 명분으로 유지되고 있다(*사회주의자를 자처하지만 필자가 특별한 '상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권유지를 위해 인간의 기본적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인간에 대한 착취이다. 배만 채우면서 목숨만 유지한다고 인간이 행복함을 느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인간에게 밥은 없어서는 아니 될 요소지만 자유도 밥만큼이나 중요하다. 자유는 인간의 영혼에 있어서 공기와 같은 요소이다. 


 
-어쨌든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사회주의 세상의 끄트머리를 부여잡고 다시 끌어올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지나간 사회주의 사회는 인간의 행복과는 거리가 먼, 초콜릿과 사탕이 없는 선언만 풍성한 사회였다. 인간에게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회가 바로 이상사회이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없고 생산과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이 반드시 와야 한다. 인류의 고귀한 이상을 이대로 망한 세상과 함께 떠내려 보낼 수는 없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 최소한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

(*)두서없는 마무리이다. '인간에게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회가 바로 이상사회이다'라는 건 '사회주의'의 구호가 아니라 '실용주의'의 구호 아닌가? 현실 사회주의는 망했지만, (러시아도 그렇고) 우리가 그로부터 얻은 교훈은 별로 없는 듯하다.

06. 60. 22.

P.S. 이 칼럼을 옮겨온 이유는 필자의 이상사회론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포스트-소비에트를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의 역사와 생활에 대한 감각을 일러주는 두 발언을 칼럼이 포함하고 있어서이다.  "사회주의 혁명이라기보다는 근대화를 위한 운동"이라거나 "(자본주의에서는) 초콜릿이나 사탕을 마음대로 볼 수 있고 살 수 있다"는 발언 말이다. 그러한 인식/감각에 근거하여 러시아 혁명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똑같이 반복하게 되는 게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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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에 대하여(*이 코멘트는 1999년에 씌어진 것이고 2004년에 모스크바에서 약간 손질되었다). 드레피스/레비노우의 <성숙이란 무엇인가>(What is Maturity?)는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주석/해석을 놓고 벌어진 푸코와 하버마스 간의 논전을 잘 정리하고 있는 글이다. 이 글의 우리말 번역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불어본(<푸코와 하버마스>)을 번역한 것이고(<우리시대의 문학 6>), 다른 하나는 독어본을 번역한 것이다(<외국문학> 1995, 겨울). 그리고 나에겐 이 둘과 영어본이 있다.

 

 

 

 

이 중에서 불어본의 번역은 난삽하고 부정확하다. 문맥에 대한 역자의 정확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고 밖에는 볼 수 없겠는데, 가령 “푸코에 의하면, 칸트는 현대적이긴 하지만 성숙하지는 않다”(On Foucault's reading Kant was modern but not mature.) 정도로 번역되는 문장을 역자는 “푸코의 칸트에 대한 독서를 알려 주는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칸트는 근대적이기 위해 성숙성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로 옮기고 있다(불어가 더 어렵긴 한 모양이다). 근대적이기 ‘위해’ 성숙성에 이르지 않았다니?

그리고 글의 결론에 해당하는 “우리가 이 논문에서 옹호하고 발전시키려고 하는 논지는 인간 시대 혹은 성숙성이 적어도, 행동을 개별적 주체와 글쓰기의 보편적이고 비역사적인 이론들 위에나, 공동체를 위해 그리고 발언을 위해 요구되는 조건들 위에다 세우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는 논리, 그리고 사실상 이러한 의도들이, 현존하는 모든 부분들이 일치하여 그것에서 우리의 현재 상황 내에는 더 불안한 요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어떤 것을 활성화할 수 있다고 하는 논리이다.” 같은 부분은 오역을 넘어서 해독이 불가능할 지경에 이른다(이런 ‘most troubling한’ 문장이 번역으로 통용되는 한, 한국의 인문학은 가망이 없다).

이 부분의 영어본은 이렇다. “The thesis of this paper is that maturity would consist in at least being willing to face the possibility that action cannot be grounded in universal, ahistorical theories of the individual subject and of writing, or in the conditions of community and speaking, and that, in fact, such attempts promote what all parties agree is most troubling in our current situation.”

비록 저자들이 확정적인 표현을 피하고는 있지만, 이 부분의 요지는 이렇게 옮겨질 수 있다. “이 논문에서 주장하는바, 성숙성이란 우리의 행위가 더 이상 개별 주체와 글쓰기에 대한 보편적이고 비역사적인 이론들이나, 혹은 공동체와 화행(말하기)의 조건들에 토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과 기꺼이 대면하는 것이다. 더불어, 그러한 이론이나 조건을 도출해내려는 시도들이 부추기는바 모든 정파가 동의하는 일이야말로 사실상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가장 곤란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오늘날의 성숙성은 비역사적인 보편적 이론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것이다. 오히려 곤란한 것,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보편적 합의’이다. 정파간의 이해관계를 초월한 합의에 따라 한쪽에선 의원들의 세비도 올리고, 다른 쪽에선 이라크 침공도 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이때의 ‘보편적 합의’는 기만과 폭력에 대한 ‘보편적 정당화’이겠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저자들은 하버마스보다는 푸코의 편을 들고 있다. 이때 푸코가 말하는 성숙한 태도는 아이러니적인 태도이다. 

참고로 독어본의 번역. “이 논문의 테제는 다음과 같다. 개별적인 주체나 글쓰기의 보편적이고 반역사적인 이론 속에서는, 또는 공동체의 조건이나 말하기의 조건 속에서는 행위의 토대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최소한 성숙의 본질이 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위에서 열거된 이론이나 조건들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시도들은 실제로 모든 철학적 당파들이 일치하고 있는 것을 촉진시킨다는 점. 그리고 이렇게 촉진시키는 것이 우리의 현재의 상황에서 가장 불안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

불어본의 번역보다는 이해하기 쉬운 편이나 만족스럽지는 않다(독어가 불어보다는 쉬운 것인가?). 요컨대, 저자들이 칸트-하버마스 계열의 성취와 한계(“현대적이긴 하나 성숙하지 않다”)를 지적하고 있는 맥락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줄 필요가 있다.

06. 06. 22.

 

 

 

 

P.S. '성숙함'에 관한 가장 추천할 만한 책은, 몇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브뤼크네르의 <순진함의 유혹>(동문선, 1999)이다. 즉, 성숙이란 '순진함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때의 순진함이란 자신을 어린아이나 희생자로 간주하는 태도를 말한다. 유치하거나 기만적인 태도 말이다. 물론 그 유치함/기만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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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6-06-23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숙이란. '순직함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 때의 순진함이란 자신을 어린아이나 희생자로 간주하는 태도를 말한다.

뜨끔하네요. 생각해보면 저는 순진함의 유혹에 정말 잘 빠져드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제 자신의 내면에서 그것들을 분리 시키는 것이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유치하거나 기만적인 태도도.. 참 어렵네요.

유치하거나 기만적인 태도가 어떤 태도인지 알고 있다면 좀더 쉬울텐데,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고, 또 알고 있다고해도 그런 태도를 취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른다면 더 왜곡되어서 표출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성숙... 이란. 어렵고도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아.. 성숙해지고 싶은데..

로쟈 2006-06-23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진함의 유혹>은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성숙에 도움을 줄지도 모르구요.^^
 

월드컵 관련 기사를 몇 개 옮겨온 김에 교수신문(06. 06. 21)에 게재된 김진석 교수의 문화비평도 옮겨온다. 타이틀이 '축구열풍이 그저 파시즘이라고?'이다. 내가 잘 쓰는 표현으로 그의 주장은 '상식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그 상식을 잊거나 헐거워한다. 필자의 시론집 제목을 반복하자면, 우리는 폭력과도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워야 한다. 그런 상식이 좀더 강화되었으면 싶다.  

-다시 뜨거운 월드컵바람. 2002년과 달리 거리응원이 광장을 독점 계약한 기업과 미디어의 주도와 후원 아래 놓이고, 방송들은 과잉편성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열풍만이 아니다. 4년 전에도 그랬지만 벌써 그 열풍을 다시 ‘파시즘’의 이름으로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냉풍들도 윙윙거린다. 이 냉풍은 저 열풍과 맞물리면서, 이것이 뜨거워지면 더 차가워진다. 뜨거운 축구상업주의 바람이 드는 것도 짜증스럽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축구에 들뜨고 환호하는 풍경 자체를 파시즘의 광기로 낙인찍어야 하는가. 열풍의 지나침을 경계하면서도, 그것을 금방 파시즘의 광기라고 말하지 않는 태도도 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뜨거운 바람 속에 서있으며 그 바람을 맞을 각오만 있다면.

 

 

 


-뜨거운 바람들이 폭력적 경향을 띠기 쉬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경향성 때문에 축구에 달아오르는 몸과 마음들에 파시즘의 낙인을 찍을 필요는 없다. 이렇게 예민하게 태도를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 사회가 알게 모르게 다수의 폭력적인 바람들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며, 금방 거기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무망하기 때문이다. 월드컵열풍처럼 다소 폭력적인 현상들이 일어나더라도 그것들이 일어나는 구조적 정황을 고려하거나 인정한다면, 그것을 금방 파시즘적 광풍으로 몰고 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거대담론의 차원에서 월드컵 혹은 축구 바람이 민족주의나 상업주의를 부추기는 것도 사실이다. 국민이 아니라 자본이 응원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고, 사람들이 국가적으로 환호하고 열광하는 모습에 병리학적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극단적인 행위들을 빌미로, 그것들과 닿아있는 모든 적극성과 능동성에 파시즘 딱지를 붙일 필요는 없다. 이 경우 ‘파시즘’이란 표현이야말로 과도하게 남용되는 것이며, 심지어 그 말의 그런 과도한 사용행태도 자칫하면 ‘거꾸로 파시즘적’일 수 있다(*이 파시즘 남용/남발에 나도 불편하다).

-‘파시즘’이란 말은 오늘날 수사학적 표현으로 널리 쓰인다. 이 경우 그 말은 사회와 정치의 폭력적 불모성에 대한 인간의 불안을 표현하는 역할을 널리 수행한다. 반면 그 말은 과도하게 사용되고 남용될 때도 있다. 우선, 어떤 집단적 행위들이 폭력적으로 보이더라도, 다만 그 이유로 그것들을 모조리 파시즘의 광기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정치적 차원에서 폭력의 원인과 결과, 배경과 맥락을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폭력적으로 보이는 행위들이 있더라도 그것을 먼저 유발한 더 폭력적인 원인이나 주체가 있다면, 우선 그것에 비판의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모든 폭력적 현상을 똑같이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일은 공허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가 주변의 강한 권력과 폭력의 자장 때문에 시달려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내부의 폭력적인 증상들을 다룰 때도 세심한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파시즘 개념으로 사람들의 행위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은 전혀 폭력에 손을 담그지 않고 있고 우매한 사람들만 스포츠에 사로잡혀 있다고 상정하는데, 이런 지적 계몽성은 편협하거나 공허하다.

-월드컵이 괴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따지고 보면 대학도 지식폭력을 생산·소비하는 괴물 아닌가. 월드컵이 상업주의에 물들어있는 것을 마치 시민들이 모르는 것처럼 훈계하는 비평들도 많다. 환호하거나 감동하는 민중이 그저 바보일까. 함정임을 알면서도 거기에 몸을 싣는 복잡한 행위가 존재한다. 그들은 칸막이된 지적 비평으로 밥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 직접 폭력적 사회구조 안에 빡빡하게 끼인 채 그것을 살짝 타고 넘어야 하는 실존들이다.

-물론 국가와 자본의 이름으로 경기에 열광하는 집단행위에 광적인 도취가 불안하게 어른거리곤 한다. 그러나 거기서 꼭 국가와 자본의 큰바위얼굴만을 보아야 하나. 그것이야말로 그 얼굴들을 근엄하게 만드는 일일 수 있다. 오늘 이 불안한 시대에도, 아니 어쩌면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감동하고 몰입하고 때로는 싸우는 경기장을 원하는 듯하다. 국가와 자본, 특히 큰 것이 너무 불안하다고? 그럴수록 그것들의 이름을 빌려 그것들 사이에서 기쁘게 싸우고 대적하는 살풀이 마당이 있을 법하지 않은가.

06. 06. 22.

P.S. 참고로, 이 칼럼에 붙은 댓글 하나는 이렇다: "수십만명이 밤에 잠도 안자고 거리에 나가 붉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제스처를 하고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부르며 '대한민국~'을 외치는 것... 이는 병적인 애국주의이다. 이 정도로 광분하는 나라는 없었고 없고 없을 것이다. 한국인임이 수치스럽게 느껴질 정도이다." 댓글의 제목은 '파시즘이 아니라 미친 또라이들'이다. 문제는 파시즘이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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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 2006-06-23 03:58   좋아요 0 | URL
-_-;;; 댓글에 공감.. 읽기 꽤 불편하네요.. 월드컵 열풍을 파시즘의 광기로 몰아세우는 것도 볼쌍사납지만 월드컵을 불쾌해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들을 높은 테라스에 앉아 혀를 끌끌차는 지식인들의 잘난척으로 획일화시켜서 보는 진석이님의 시선도 거북하네요. 진석이아저씨 또한 자신을 얍쌉하게 괄호치는건(난 엘리트의식에 빠지지 않은, 하지만 상업주의에 대책없이 빨려들어가는 대중도 아닌 양식있는 지식인이다.) 마찬가지인듯.

로쟈 2006-06-23 07:52   좋아요 0 | URL
축구 열광을 불쾌해/불편해하는 것과 그것을 '파시즘'으로 몰아붙이는 건 다른 문제라고 봅니다. '폭력과도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라는 포지션 자체가 '얍쌉한' 건 아니고 그걸 유지하기가 힘든 게 아닐까요? 어부님도 광화문에 나간 이들을 '미친 또라이들'로 보십니까?..

어부 2006-06-24 00:36   좋아요 0 | URL
댓글에 공감한다는건 저역시 그들을 미친 또라이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근본주의 어쩌구 하는 진단과는 무관할 뿐이다. 그저 난 그들이 불쾌한 것이다. 라는 어조거든요.

어부 2006-06-24 00:40   좋아요 0 | URL
자신이 하는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 발언은 근본주의로부터 자유롭다는 의식. 하지만 다른 비판적 발언들에 대해선 근본주의 어쩌구 판결 내릴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생각한는 것. 훨씬 근본주의적으로 보입니다.
월드컵 열풍을 파시즘으로 몰아붙이는 이들과 그들을 또 근본주의로 몰아붙이는 진석이님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겠다는 거죠.(근본주의는 남발해도 되는 말이지만 파시즘이란 용어는 고이고이 아껴서 순도측정 한 다음에 사용해야 되는 말이라고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_-)
비판적 입장에 대해.. 자신도 결국 똑같은 애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떼쓰고 있는듯이 보이거든요.
꼴보기 싫은 것은 자신의 시선만이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수아저씨의 태도에요.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포지션에 대한 성찰이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괜한 심통..^^

2006-06-24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6-24 12:18   좋아요 0 | URL
어부님/ "댓글에 공감한다는건 저역시 그들을 미친 또라이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근본주의 어쩌구 하는 진단과는 무관할 뿐이다. 그저 난 그들이 불쾌한 것이다."라고 하신 건 '댓글'에 대한 취사선택 아닐까요? 월드컵 열광에 불편/불쾌해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축구 열광을 파시즘으로 지목하거나 열광적인 응원자들을 '미친 또라이들'로 부르지는 않습니다. 저는 두 가지가 차이가 있다고 보며, 김진석 교수의 견해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꼴보기 싫은 것은 자신의 시선만이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수아저씨의 태도"라고 하셨는데, 월드컵 열광을 파시즘으로 규정짓는 태도를 그가 반복하고 있다는 것인가요(그렇다면, 꼴보기 싫은 대상에는 '근본주의자들'도 포함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괜한 심통'이라고 하시면 할말은 없지만...

어부 2006-06-25 01:38   좋아요 0 | URL
전 댓글에 '동의'가 아닌 '공감'한다고 했는데요..-_-;;;

진석아저씨가 그들에게 근본주의자라는 모자를 씌우는 순간 그의 비난이 스스로를 향하게 된다는 것. 비난하려는 대상의 면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월드컵 열풍에 대해 불평하는 발언들과 그들을 몰아세우는 진석아저씨의 발언을 똑같이 보고 있다는 뜻은 아닌데요..
진석아저씨의 시각과는 다르게 월드컵에 대한 비판적 발언은 소수의 발언일 뿐이며 여간 귀를 귀울이지 않고는 잘 들리지 않는 타자의 목소리라고 보여지는데.. 로쟈님 말씀대로 그들을 파시즘으로 보는 이들도 또 다르게 비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 다른 목소리들이고 귀 귀울여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열광을 파시즘적으로 보려는 이들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라고 보구요. 그렇게 주장하게 된 맥락을 따져보고 비판하려면 월드컵 열풍을 파시즘으로 보는것이 어떤 부분에서 부적절한지를 지적하면 그만입니다. 근본주의 어쩌구 하는 틀을 함부로 씌울만큼 진석아저씨가 그들의 주장을 빠짐없이 들어보았는지 의문이구요.
파시즘이란 고전적 모델에 대한 어떤 원형이 존재하는지 지식과 생각이 짧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오리지날리티를 가려내는 일이 과연 생산적 사유인지 모르겠군요. 지금의 우리들은 특정 체제를 파시즘으로 볼 수 있는가가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파시즘적 경향성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질문해 보는 것이 훨씬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이전에 잠깐 훓어보았던 권명아 선생의 '역사적 파시즘'에 이끌렸던것 같습니다.) 월드컵 현상에서 파시즘적 경향을 읽어내려는 시도들을 무작정 근본주의로 깎아내리는 것은 문제있어 보입니다(그렇다고 제가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파시즘에 대한 낡은 시각틀을 진석이 아저씨가 가지고 있는것이 아닐까 하는 근거없는 의심만 생기네요

파시즘이란 용어는 고유하고 엄밀한 틀이 있어야 한다고 보진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파시즘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단일한 형태로 환원되지 않는 경향들에 세포를 열어두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아..논점이 좀 멀리 간듯..-_-;;;;
마지막 사족은 제게 괜한 심통이라 하신다면 제쪽에서 할말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엽적인 부분에 대한 지적또한 제 서툰 발언을 가다듬게 하는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되어서 감사하지만 거칠게나마 제가 말하고자 한 전체논점에 대한 생각도 말씀해주시면 더더욱 감사하겠습니다. ^^

로쟈 2006-06-26 13:12   좋아요 0 | URL
너무 덩치가 큰 문제들이 걸려 있는 듯한데, 간단하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부님은 파시즘에 대한 낡은 시각틀에 대해서 의문시하며, "파시즘이란 용어는 고유하고 엄밀한 틀이 있어야 한다고 보진 않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어떤 용어 사용이 취미나 취향의 문제와 연관될 경우에 의미의 전용은 문제될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공론장 같은) 대화적 소통 상황에서라면 가급적 정확하고 구체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야겠죠.

'파시즘'이란 말이 사용된 고유한 역사적 문맥이 있고, 일차적인 의미는 거기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그런데, 파시즘이란 말이 포괄하는 여러 의미역 가운데, 한두 가지에만 초점을 맞춰서 '파시즘'이라고 '일반화'할 수도 있겠구요. 그러는 가운데, 의미의 전이, 수축/확장이 발생하는 것일 텐데, 제가 보기에 몇 년전부터 '남용'되는 듯한 '파시즘'은 본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전이/전용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인바 거기서 정확하게 어떤 '역사적 반복'을 지적해내는 게 아니라면 과잉일반화(오버)라고 생각합니다(대개 그러한 일반화는 대에충 게으름의 산물입니다. 당대적 현실에 대한 '적확한' 분석/설명에의 요구로부터 빠져나가는).

시각에 따라 "역사적으로 다양한 '파시즘들'이 존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정도의 문제까지 집어넣으면 '50% 파시즘' '70% 파시즘' 등의 다양한 유형학까지 세울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것이 생산적일지는 의문입니다.

수잔 손택이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의미의 전이 혹은 어떤 단어의 은유적 사용은 시적인 특권일 수도 있지만 때론 위험한 만용이거나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축구에 대한 열광을 '파시즘적'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에이즈를 '현대판 흑사병'이라고 부르는 태도만큼이나 부정확하다고 봅니다. "나는 에이즈를 혐오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이즈는 우리 시대의 흑사병이야!"라고 말하는 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지적조차도 어떤 우월적인 포지션을 전제로 한 오만한 태도이며 똑같이 '파시즘적'이라고 한다면 할말이 없습니다. 말씀대로 '다양한 파시즘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걸 막을 도리는 없어 보이니까요...

 

 

 

 

 

어제부터 '공식적으론' 방학에 들어간지라 집에 있는 날이 많아지게 됐다(강의 없는 강사는 대략 백수이다. 즉, '니그로'이다. 아무리 할일이 많다고 저 혼자 우길지라도 말이다). 당장 딸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데려오고 피아노학원에 보내고 데려오고 하는 일이 '아빠의 일'로 다 떨어진다. 그나마 유치원으로 데리러 가는 일도 딸아이와 사이가 좀 좋아졌기에 '허락'받은 일이다.

학원에서 데려와 이것저것 챙겨주고 잠시 놀아주고 저녁 먹이고 양치질 하게 하고 공부하자고 꾜셔서 한글 두어 쪽과 수학 두어 쪽 문제풀게 하고(이런 공부도 딸아이는 '연극놀이'로 하는 걸 좋아해서 내가 친구나 동생 역을 맡아서 문제를 풀어달라고 졸라야 한다) 자리 펴주고 재우고 나니 9시 반이다.

아이는 자기 전에 꼭지점 댄스를 두번 연습했고(아이는 모레 상암경기장에 견학을 간다), 박지성이 골 넣는 장면에서 프랑스 선수가 뒤늦게 볼을 잡으려고 애쓰던 장면이 너무 웃겼다고 어제 새벽의 경기를 한번 더 되새기고는 잠이 들었다(보다 정확하게 기술하자면 좀 늦게 퇴근한 엄마에게 꼭지점 댄스를 한번 더 보여주고 잤다). 아이는 어제 경기 후반전의 후반에 잠이 깨어 극적인 무승부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비로소 '자유시간'이 됐길래 학회 발표문을 정리한답시고 책상머리에 앉아 머리를 굴리면서 이곳저곳의 뉴스들을 훔쳐보는데 딸아이의 블로그에도 한번 들어가보라는 핀잔이 들려온다. '무관심한 아빠'라는 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이미 듣고 있지만) '쑥쑥 자라는 종팔이!'(박찬욱 감독이 써먹은 거지만, 나도 그냥 '종팔이'라고 해둔다)에 들어가 새로 올려진 사진들을 훑어본다. 그리고는 그 중 한 장을 옮겨놓는다(두 손가락 포즈가 아이의 '공식' 포즈이다). '자상한 아빠'의 가장 확실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놓기 위해서.  

아빠, 엄마의 '결점'들을 모두 타고난 탓에 (한)약을 달고 사는 편이지만, 아이는 잘 먹고 잘 자라주었다. 그래서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달력에다 스케줄을 잔뜩 적어놓으면서도 문득 딸아이를 위한 스케줄은 전혀 없다는 걸 얼마전 발견하고 반성한 적이 있는데, 이번 방학때는 얼마나 교정될 수 있을지(사실, 나는 내 스케줄도 다 소화를 못하고 있다. 무슨 '업적'을 남기는 이들은 대체 어떤 묘수를 갖고 있는 것인지?). 

아이는 혼자서 그림 그리고, 무얼 만들거나 오려붙이면서 노는 걸 좋아하는데, 엄마가 올려놓은 건 그 중 하나인 '우리 동네'이다. 말은 '동네'이지만, 아이의 '우주'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부동산과 교회와 가게와 만화가게는 피아노 학원이 있는 건물 하나에 다 들어 있지만, 아이는 모두 독립시켜서 따로 그려놓았다. '우리동네'인 아파트는 15층 건물이지만, 아마도 정서적인 축약을 거쳐서 2층짜리가 된 듯하다. 내가 읽어낼 수 있는 건 그런 정도이다. 아이의 마음을 읽기 위한 투자를 좀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에게 어떤 아빠로 기억될 수 있을까? 아주 오래전 스무 살 남짓 되던 나이에 나는 인생의 목표가 한 여자에게 존경받는 거라고 친구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때 염두해둔 '한 여자'는 '딸아이'였다. 적어도 딸아이에게만은 존경받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게 나의 심사였고 그럴 경우 구제받을 만한 인생이 아닐까라는 게 계산이었다. 한데, 이후에 여러 '딸들'에게서 확인한 바이지만, 그 '존경'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노력 없는 결과란 없는 법이다. 사랑은 일시적인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반복적인 일상이다. 그리고 물론 가끔씩의 이벤트이다!

 

다 뒤져보니 지난 겨울에 롯데월드에 데리고 갔던 게 마지막 '이벤트'였다(장시간 걷고 기다리고 하느라고 아이는 녹초가 됐고 결국 저녁을 먹으러 들른 분식집에서 오후에 먹은 걸 다 토해냈다. 덕분에 나는 롯데월드에 다시는 안 가도 될 '명분'을 쌓았다!). 아이의 생일이 여름방학때인지라 이번엔 뭔가 또 '계획'을 세워야 한다(작년 여름을 조용히 보낸 탓에 더더욱). 이 또한 한참 머리를 굴릴 일이다.

흔히, 학문은 이루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생각해 보면, 아빠의 일, 곧 부업(父業)도 마찬가지이다. 그걸 '아르바이트'로 대충 때우려고 하면 금방 들통난다. 대개 아이들은 아빠의 머리 꼭대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건 아이들이 능숙하게 꼭지점 댄스를 추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지 않은가? 

아이가 자는 모습을 보면서 어떨 때는 이 아이가 혹 아빠의 인생이 구제할 만한 것인가를 탐색하러 온 '스파이'가 아닌가란 생각도 한다. 그 정도면 나는 이미 '세상의 음모'를 모두 간파한 수준이다. 그래서 오늘도 딸아이의 볼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몰래 이 페이퍼를 쓴다. 내일 아침에는 고구마 맛탕을 해줄 것이다(아빠식 맛탕이다). 이틀 정도는 아빠를 존경해주지 않을까? 아니면 반나절? 안되겠다, 좀더 연구해봐야겠다...

06. 0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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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6-20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재밌다가 끝났네요...;; 로쟈님 글을 이렇게 편하게 읽을 수 있다니. ^^

Joule 2006-06-20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예뻐요. 지적인 미모네요. 아빠와 딸,이라고 해서 저는 마이클 두 독 드 빗 감독의 저 유명한 애니메이션 <아버지와 딸>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어 들어왔다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림도 잘 그리는군요.

twoshot 2006-06-20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뛰어난 미모+근사한 그림+꼭지점 댄스를 더해보면 '결점'만 닮은 건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로쟈님의 독자에게는 '고구마 맛탕(?!)'같은 페이퍼였습니다.:)

LAYLA 2006-06-21 0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인 미모라는 쥴님의 표현에 왕동감입니다

로쟈 2006-06-21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도 물정을 다 알아서 귀엽다는 말보다는 예쁘다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칭찬해주신 분들께는 아이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아이는 자고 있어서). 참고로, 종팔이는 저를 별로 안 닮았고 저보다 그림을 잘 그리며, 저보다 춤도 잘 춥니다(이건 비교 자체가 안되지만). 대신에 아직 저만큼 책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조선인 2006-06-21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딸에게 존경받는 건 쉬워요. 다 큰 딸에게 존경받는 거, 그건 정말 정말 어렵다는 거 강조해 드립니다. =3=3=3

로쟈 2006-06-21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제 목표는 '다 큰 딸'에게 존경받는 겁니다. 한데, '다 큰 딸'은 이해심이 많아지지 않나요? '어린 딸들'은 변덕이 심해서, '존경'을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릴케 현상 2006-06-21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을 듯 웃지 않는 아이의 표정이 아주 예술이군요^^=3=3=3

바벨의도서관 2006-06-21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님이 이렇게나 이쁘다니요... 저도 그런 딸 있으면 좋겠습니다^^부럽습니다...

biosculp 2006-06-21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애들 환심(아부) 사기위해서 엄마들이 질색하는 일에 맞장구를 치는데요.
가끔 피시방 데리고가 메이플이나 스타시켜주기, 드래곤볼 만화 전질 사주기, 유희왕 카드 사주기. 길거리 음식(불량식품이라고 못먹게 하는것) 사주기 뭐 이정도랄까요.
저는 아들들인데 딸들보면 이쁜 수첩에 스티커 붙이기 이런거 좋아하더군요. 그리고 어린이 보기에 유치찬란한 색이들어있는 장식품등. 저녁에 시간나시면 앞 문방구에 가서 유치찬란한 스티커만 같이 보고 사주셔도 환심정도는 얻을수 있을것 같습니다. 애들 눈높이에서

nada 2006-06-21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에는 인상적인 사건 한두 개라도 기억 속에 남아 있으면 언젠가는 이해하는 거 같아요. 핏줄이란 징글징글하지만 그런 미덕이 있죠. 자잘한 건 좀 미흡해 보이십니다만 큰 거 한두 방으로 때우세요.ㅋ 그나저나 저 시도 때도 없는 V자는..ㅋㅋ 전형적인 성배형 V자가 아니어서 좀 다행이긴 합니다만.. 깜찍한 얼굴에 어울리는 사랑스러운 포즈를 좀더 개발해 주시어요~~~

로쟈 2006-06-21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언들 감사합니다. 스티커북들은 저도 사줍니다(기본이죠!).^^ 큰 거 한두 방이 글쎄, '자기방'을 만들어주고, '피아노' 사주고 하는 것들이라(--;), V자형 포즈는 유전형인지 다른 포즈는 어색해하더군요.^^

로드무비 2006-06-21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리바이라기보다는 자랑 페이퍼 같은데요.
딸에 대한 애정을 감출 수 없는.
너무 이쁩니다.^^

로쟈 2006-06-21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복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꽃핀 나무들의 괴로움'입니다. "어쩌자고 세상엔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라는 난감함...

Joule 2006-06-21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복 시인의 그 싯귀가 있는 시집 제목이 뭔가요.

SMOKE 2006-06-21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쁘군요.

에바 2006-06-21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반갑습니다. 이 서재를 거의 매일 찾고 있는데 배울 게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이쯤 되니 너무 진부한 인사말입니다. 그리고 따님 사진을 자주 보다 보니 꼭 제 딸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로쟈 2006-06-21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oule님/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입니다.
껄껄선생님, 에바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보다는 딸아이가 더 인기가 있는 듯하네요(^^;)...

기인 2006-06-26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로쟈님 이쁜 따님 처음 뵙겠습니다 :) 저는 또 오타 말씀드리고 갑니다. ^^;;;
따님 사진 바로 아래 아래 문단.
아이는 혼자서 그림 그리고, 무얼 만들거나 오려붙이면서 노는 걸 좋아하는데, 엄마가 올려놓은 건 그 중 '하니인'
요즘 친구들도 '달려라 하니'를 알까요. 생각해보니, 로쟈님도 모를수도;;;
(달려라) 하니가 아닌 '하나'로 추측됩니다. 저도 이쁜 딸-스파이 ^^ 한 분과 함께 할 날이 오기를... :)

로쟈 2006-06-26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밝으시군요.^^ 스파이 한 분 모시고 사는 게 공부보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참고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