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신문들이 인문학 위기 관련기사들로 도배돼 있다. 며칠전 고려대 문과대학 교수들이 '인문학 위기 선언'을 터뜨린 이후에 여론이 총동원된 듯한 인상이다(기자들로서도 '일거리'가 생긴 것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또 내주는 학술진흥재단과 인문학계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인문학 주간'이라고 한다. '벼랑끝'에서 탈출하기 위해 플라멩코춤에 사이코 드라마까지 선보인다고 하니까 '노력하는 모습'은 보여준다고 해야겠다.

 

 

 

 

'인문학위기'에 대한 진단과 반응은 언제나 두 가지이다. 한 신문의 타이틀이 뽑은 대로, 인문학자/전공자들이 변화에 소통에 무신경함으로써 위기를 자초했다는 자성과 학문의 전당마저 신자유주의 시장판으로 만들어야 하느냐는 분노이다. 이러한 정황은 소설가 김훈이 한 대담에서 든 예를 비틀어서 옮겨오자면, 마치 청나라의 대군을 성밖에 두고 주전파와 주화파가 서로간에 설전을 벌이고 있는 형국처럼도 보인다(내가 '담론들'을 신뢰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인문학이 살아있다는 자기증명은 말이나 선언이 아니라 '실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신문 세 곳의 특집기사들을 아래에 옮겨놓는다. 인문학 주간 행사 일정은 맨마지막에 붙여놓았다(시간이 나면 몇 마디 코멘트를 덧붙여놓도록 하겠다).

한국일보(06. 09. 20) 벼랑끝 인문학 자성과 분노

인문학이 죽어 간다. 대학사회에서 ‘인문학의 위기’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고 위기의식마저 마비된 상태다.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공자가 해마다 줄고, 각 대학의 인문ㆍ문과대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통폐합 또는 폐지 대상 1순위가 됐다.

이 같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인문학계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은 올해를 ‘인문학 부흥의 해’로 정하고 ‘새로운 국가 발전 전략으로서의 인문학’을 위한 갖가지 실천 방안을 내놓고 있다. 15일 고려대 문과대 교수 선언에 이어 각 대학 인문대 교수들의 연대 서명도 예정돼 있다. 그러나 아직 반향은 크지 않다. 인문학을 연구하는 전공자들을 통해 위기의 원인을 짚어보았다.

■ 변화에 둔감한 눈높이
서울 모 대학의 철학과 조교 황모씨는 얼마 전 지도교수의 신문 기고문을 약간 손질했다 심하게 혼이 났다. 기고문에 실린 한문투의 표현을 쉬운 우리 말로 바꿔 썼다가 “왜 글의 웅혼함이 떨어지게 만들었느냐”는 질책을 받았다. 황씨는 “다른 분야에서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학문적 시도가 많지만, 순수 인문학 분야는 아직도 중세적 사고에 갇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안대회 명지대 교수(한문학)도 “학문적 깊이만 있으면 인정받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대중과의 소통이 학자에게도 필수인 시대”라며 “학문적 업적을 대중과 공유하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최원식 인천문화재단 이사장(인하대 국문학)은 변화에 무딘 인문학 교수 사회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았다. 그는 “이공계는 산업현장의 수요에 따라 커리큘럼을 짜는 등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했지만 인문학계는 교수의 협소한 전공지식이 수십 년 째 반복ㆍ전수되고 있다”며 “취업뿐 아니라 학생들이 원하는 교양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인문학이 외면받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 시장 만능주의 극복이 과제
구체적 ‘성과’보다는 추상적 ‘계획’에 연구 자금을 지원하는 정부에도 비난이 쏟아졌다. 올 초 학술진흥재단이 주최한 ‘인문학위기 포럼’에 참석한 이진경(본명 박태호) 서울산업대 교수(철학)는 “인문학 위기는 김대중 정부 초기 ‘연구결과’가 아닌 ‘연구계획’으로 지원여부를 결정하면서부터 더욱 불거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연구자들이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한 연구계획서를 쓰느라 사회와의 소통을 통한 연구라는 본업에 오히려 소홀해진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김영미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장(사학)도 “정부의 인문학 연구지원비는 해마다 줄어들고 있는데 논문 발표수 등 인문학 연구방법과 어울리지 않는 계량법으로 학문성과를 평가하려는 시도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며 “정부의 잘못된 정책방향이 인문학의 깊이 있는 성찰을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공자들이 한결같이 위기의 원인으로 지적하는 것은 역시 ‘시장 만능주의’라는 현실이다. 경제적 부가가치 생산에 이익이 되는 것만 대접받는 현실이 이미 대학을 완전히 접수해 버렸다는 지적이다. 이승환 고려대 교수(철학)는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학문의 전당까지 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다”며 “심지어 국제화라는 미명아래 한국학 관련 학문까지 영어로 강의하도록 강요하는 게 바로 한국 인문학계의 현실”이라고 개탄했다.(유상호기자)

동아일보(06. 09. 20) “취업과 너무 먼 文·史·哲” 폐과 잇따라"

최근 대학 구조조정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더욱 위기에 몰린 분야가 바로 인문·사회학이다. 대학에 시장논리가 팽배해져 문학 사학 철학 등 이른바 문사철(文史哲) 학과들은 취업률이 낮거나 가시적인 성과가 적다는 등의 이유로 폐과 대상 1순위가 된 것이다. 지난해 전국 대학 졸업자의 취업률을 보면 공학계열 71.7%, 자연계열 69.2%, 사회계열 55.8%, 인문계열 53.4% 등 계열별로 큰 차이가 난다.

▽비인기 학과 폐과 속출=경원대가 2003년에 철학과를 없애는 등 최근 3년간 철학과 12개가 폐과됐고 독문과와 불문과도 각각 4곳이 문을 닫았다. 경북대는 5월경 독문과와 불문과를 사범대에 통합하려다 교수들의 반발로 계획을 일단 접었다. 90년 전통의 대구가톨릭대는 인문대 철학과를 비롯해 외국어대 불어불문학과 독어독문학과 이탈리아어과 등 문과 분야 주요 학과에 대해 내년부터 학생 모집을 중단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현재 1학년이 졸업하는 4년 뒤에 이들 학과는 폐과된다.

1982년 개설된 철학과의 경우 모집정원을 50명에서 40명으로 줄였지만 입학생은 갈수록 줄어 현재는 10여 명에 불과하다. 독문과도 사정은 비슷하다. 부산지역 대학들이 최근 2학기수시 학생을 모집한 결과 인문학 분야의 지원자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부산외대의 경우 영어학과는 1.2 대 1, 중국어학과는 미달됐으며 동의대는 인문학부 중 2 대 1을 넘는 학과가 드물었다.

경남대는 지난해부터 국제언어문화학부 4개 학과 가운데 중국어를 제외한 독일어 러시아어 프랑스어과 등 3개 학과의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고 이들 학과 소속 교수들은 일단 유사 전공으로 전보시키는 고육책을 내놓았다. 취업이 어려운 인문계열 및 야간학과의 통폐합 과정에서 실직을 우려한 교수들의 반발도 있었으나 고용 안정을 약속하고 협조를 유도했다. 이 대학은 과거 시간강사가 담당하던 상당수 강의를 정규 교수에게 맡기면서 시간강사가 일자리를 잃었다.

▽전공보다 취업이 우선=인문학의 위기는 전국적이지만 위기의 정도는 지역에 따라 다르다. 서울 소재 대학들이 이제 인문학의 위기를 체감하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면 지방대는 이미 무너지는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대로라면 지방대의 현주소는 서울 소재 대학의 가까운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학입시 면접 때 수험생들에게 “왜 인문학 관련 학과에 지원했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학생은 “교직에 진출하기 위해” 또는 “공무원으로 취직하기 위해”라고 대답한다.

전남대 사학과의 경우 4학년생 36명 가운데 대학원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은 5명, 전공을 살려 취업을 하려는 경우는 4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학생들은 취직 시험에 인생을 걸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가하게 철학을 논하고 역사를 고민하는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사그라질 수밖에 없다. 대학과 교수들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학생 없는 대학원=학부의 빈곤은 대학원으로 가면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대학원생이 아예 없는 학교도 적지 않아 교수들은 학문의 맥이 끊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지난 1학기 강원대는 독문과와 불문과 대학원생이 전무했다. 정교수 6명에 대학원생이 1명뿐인 모 대학의 불문과 교수는 “가르칠 학생이 없는데 어떻게 학문을 이어 가겠느냐”며 “학부생들을 붙잡고 대학원에 오라고 사정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취업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다”고 말했다.

조선대의 한 교수는 “대부분의 학생과 학부모들이 고교 때부터 취업을 지상 목표로 정하고 대학에 들어온 마당에 순수학문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인지 자문해 보게 된다”고 털어놨다. 모든 학생이 학자가 되려는 것도 아닌데 거의 모든 대학의 커리큘럼이 학자 양성 코스로 되어 있어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과 큰 차이가 있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대부분의 대기업에서 원어민과의 자유토론식 면접시험을 보는 마당에 정규 대학교육만으로는 그 틀에 맞추기 어렵다는 것.

전남대 최정기(사회학) 교수는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소위 순수학문이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강의실에서는 시험문제 풀이식 강의가 될 수밖에 없고, 논문의 소재 또한 현실과 접목되는 분야의 정책 대안 위주로 흐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수년 전 하버드대 총장이 신년사를 통해 ‘기술의 진보가 빨라질수록 학문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며 “결국 인문학이 새로운 변화를 수용할 그릇이 된다는 생각을 사회적으로 공유하지 않는다면 대안이 없다”고 지적했다.

▽인문학 지원 절실=학문은 기초순수학문과 응용학문이 균형을 이뤄 발전해야 시너지 효과가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고사 위기에 놓인 인문학에 대한 인식 전환과 정부의 과감한 지원이 절실하다고 학계는 촉구한다. 그러나 정부의 연구개발(R&D)비 중 인문학 연구지원비를 보면 △2003년 6조5000억 원 중 480억 원(0.74%) △2004년 6조9000억 원 중 590억 원(0.86%) △2005년 7조7000억 원 중 556억 원(0.72%) 등으로 열악한 수준이다. 교수들은 인기 분야는 사립대에 넘기고 국립대는 사립대가 꺼리는 기초·순수학문 분야를 집중 육성하는 등으로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공립인문대학장협의회 윤평현(전남대 교수) 회장은 “학부제와 신자유주의 등으로 인문학 위기가 가속화됐다”면서 “학부제를 없애 학생들이 원하는 전공에 깊이 빠져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북대 김영기 인문대학장은 “프랑스처럼 인문학을 집중 육성하는 정책연구소를 만들거나 국공립대만이라도 인문학 육성책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자들이 스스로 부르고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영남대 최재목(철학) 교수는 “자연과학과 첨단기술 분야와 인문학을 연계시켜 현실 문제에 접근하는 노력을 보여 주는 게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박사 학위는 해외서” 세계화 물결로 우수인재 눈뜨고 뺏겨▼
인문학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는 학문의 식민지화다. 1980년대 한국 지식사회는 학문의 토종화를 주창하고 나섰지만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인문·사회학계가 내세울 만한 보편적 이론의 등장은 여전히 요원하다. 여기에 학문 영역에도 세계화의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강의가 아니면 우수한 국내 인재를 해외 교수들에게 모두 뺏기는 형편이다. 이에 따라 국내 대학은 학사만 양산한 채 석박사 과정은 아예 해외 대학에 위탁하다시피 하면서 학문적 종속성이 더욱 심화됐다. 이는 주요 대학 인문·사회과학 전공 교수의 국내 박사 비율이 1980년 이후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을 통해 1980년부터 2005년까지 5년 단위로 전국 대학 전임강사 이상 교원들의 국내외 박사학위 비율을 추적한 결과 해외 박사 비율은 25.0%에서 35.5%로 10.5%포인트가 늘었다. 기초 학문이라 할 인문학 전공자의 경우 해외 박사 비율은 1980년 이전 25.1%에서 2001∼2005년 48.0%로 22.9%포인트나 증가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명문대 대학원들도 본교 출신의 일급 인재들을 해외로 뺏긴 채 하위권 대학에서 충원하거나 중국과 동남아에서 돈을 주고 연구원들을 데려오는 형편이다.

이는 일본 도쿄(東京)대 교수들 중 90%가량이 국내 박사인 점과 대조를 이룬다. 도쿄대 출신인 양일모(동양철학) 한림대 교수는 “일본에서는 박사과정 2년차 정도에 해외로 나가 언어 연수와 학위 과정을 거치도록 하지만 논문은 국내에서 발표하는 것만 인정하는 학풍이 정착돼 있다”며 “이는 일본 학계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자부심의 발로”라고 설명했다.

한국 인문학계가 자생력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결과를 생산하고, 이를 교육으로 연결하는 시스템의 복구가 가장 중요하다. 또 석박사 과정을 포함해 학문에 뜻을 둔 학생들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백종현(서양철학) 서울대 교수는 “한국에서는 대학원생들이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서 학문에 전념할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지만 외국에 나가면 5∼6년간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기 때문에 내공의 차이가 커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권재현 기자)

동아일보(06. 09. 20) 인문학은 학문의 ‘생명수’"

인문학의 위기에 관한 문제가 광범하게 제기되고 있다. 최근 고려대 문과대 교수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결의를 담은 ‘인문학 선언’을 발표했다. 인문학자로서의 반성과 각오가 포함되어 있는 이 선언은 인문학의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켜 주었다.

돌이켜 보건대, 상당수 대학에서는 인문계 학과를 선택하는 학생 수가 급격하게 감소하고 지원하는 학생들의 성적 등도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말도 있다. 여러 대학에서는 인문계열 학과 대학원 지망생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음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는 인문계 학과가 폐과되는 사태도 계속되고 있다. 대학 교양강의에서 인문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낮아지며, 실용적 학문이 교양의 주류인 양 주장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인문학의 위기 상황에는 다 원인이 있다. 우선 인문학이 처해 왔던 외적인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광복 이후 한국사회는 급격한 변화와 압축성장의 길을 걸어 왔다. 이 과정에서 성장에 급급했던 우리 사회는 너무 실용과 효율만을 강조해 왔다. 여기에서 인간 삶의 기본을 탐구하는 인문학의 중요성은 점차 망각되어 갔다.

인문학 위기의 본질이 인문학 자체에 있지 않고 인문학자들의 위기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진단도 가능하다. 분명 인문학과 인문학자는 구별되어야 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무한대로 뻗어나갈 수 있는 인문학의 가치를 제대로 밝히지 못했던 인문학자들 때문에 나타난 사태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굳이 그 위기의 더 큰 책임 소재를 찾는다면 역시 인문학에 대한 무관심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인문 정신은 인간의 진정한 가치와 삶의 의미를 따진다. 인문학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윤리와 도덕의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인문학이 빈사상태에 빠지고 인문 정신의 중요성이 망각된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눈앞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행동이 인문적 가치에 앞서게 된다면, 사회적 갈등과 충돌의 해소는 요원한 일이 되고 만다. 과학자에게 건강한 인문정신이 결여된다면, 과학이 인류의 행복에 기여하기보다는 인간과 자연을 황폐화하는 도구로 전락되고 만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우리의 구체적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서 절실히 필요하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업자로 세계적 갑부인 빌 게이츠 씨는 어찌 보면 인문학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인문학이 없었더라면 나도 없고 컴퓨터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모든 이에게 필수적으로 요청되고 있다는 말이다.

인문학은 학문의 세계에서 지하수의 수맥과 같다. 사람들은 지하수에서 생명에 필수적인 물을 끌어올려 마신다. 지하수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의 보전과 개발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지하수가 오염되거나 고갈되어 버리면 지상의 생명체도 위협을 받고, 산업 활동마저도 마비되어 버릴 것이다. 인문학이 없이는 다른 학문도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므로 인문학의 발전을 위한 사회의 인식과 국가의 배려가 요청된다. 인문학 분야에 관한 2005년도의 통계를 들여다보면 한숨이 절로 난다. 지난해 연구개발에 관한 정부의 총예산은 7조8000억 원이었다. 그러나 인문학 연구 지원비는 556억 원으로 0.71%에 불과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들어 많은 사람이 인문학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발 이런 말들이 구두선에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하여 인문학의 연구 성과가 다른 학문의 발전의 토대가 되고 나아가 국민 모두가 그 인문학의 열매를 향유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조광 고려대 문과대학장·한국사)

세계일보(06. 09. 20) "취업 안되는데…" 문학·역사·철학 폐강 속출

한국의 인문학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정부·사회의 무관심과 실용학문의 거센 파고 속에 인간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인문학이 고사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대학마다 수강생이 없어 폐강되는 강좌도 속출하고 있다. 급기야 교수들이 공동선언을 통해 우리 사회에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세계일보는 한국 인문학이 처한 실상과 더불어 위기의 원인과 해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취업률은 바닥권, 취업 후 직무수행에 가장 도움이 안 되고….’ 우리나라 인문학계 출신자들의 현주소다. 인문학만으로 경쟁력이 없다 보니 인문학 관련 학과생이 다른 전공을 함께 이수하는 게 필수처럼 된 지 오래다. 인문계열 학과 졸업 후 취직이 안 되자 교대나 한의대, 법대 등에 진학하려는 ‘늦깎이 재수생’도 많다.


19일 오후 서울 H대학 인문대 도서관. 150여석의 좌석에서 공부하는 학생 중에 인문학 전공서적을 펴놓고 있는 학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부분 토익·토플책이나 공무원시험 문제집을 펴들고 있었고 전공서적을 보는 소수 학생도 경제학원론과 민법총칙 등과 같은 서적을 읽고 있었다. 이 대학에 따르면 이 대학의 인문대 학생들의 복수전공 비율은 30.6%로 교육대를 제외하고 단과대 중에 가장 높다. 인문대 학생들은 대체로 경영학과 사회과학 계열을 복수전공하기를 가장 선호한다.

서울 Y대의 경우 경영학과를 복수전공하는 학생 399명 중 181명이 인문계열 학생이다. 서울 J대 경영학부 복수전공자 225명 중 78명도 인문계열 전공자들이다. 모 대학 국문학과에 다니는 김용훈(24)씨는 “같은 과 친구들은 학점이 좋은 순서대로 교직 이수나 복수전공으로 눈을 돌리고 일부는 일찌감치 사범대나 경영대 쪽으로 전과한 친구도 많다”며 “경영대 수업은 항상 만원이라 수강신청 매크로(자동입력 기능)까지 등장했다”고 말했다.

일부 대학은 아예 인문학 전공을 폐지했다. 2001년 호서대가 철학과를 폐지하고 문화기획과를 신설했고, 2003년 경원대도 역사철학부를 없앴다. 인문학도들의 수난은 졸업 후로도 이어진다. 한국교육개발원이 2005년도 4년제 대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취업실태를 조사한 결과 진학·입대 등을 제외한 순수취업률은 인문계열(어문학 포함)이 53.4%로 자연계열을 제외하고 가장 낮았다. 사학이나 철학 등 순수 인문학 전공자 취업률은 최하위권을 형성했다.

3년 전 명문 사립대 국문과를 졸업한 조모(26·여)씨는 현재 교대에 다시 입학하기 위해 재수 아닌 재수를 하고 있다.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했지만 국문과 졸업생의 경우 원서조차 받아주지 않아 취직이 잘되는 학과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조씨는 “아동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국문과에 입학했는데 먹고살 길이 막막하다”며 “나 같은 재수생 중에 인문계열 출신이 예상보다 훨씬 많다”고 귀띔했다.(백소용 기자)

세계일보(06. 09. 20) "바뀐 교육환경에 맞춰 학자들 스스로 변해야”

서울대 인문대학장 이태진 교수(국사학과·사진)는 19일 인문학의 위기는 바뀐 교육환경에 맞춰 학자들 스스로 변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극복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가의 무관심도 문제지만 ‘그들만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문학계 내부의 잘못도 크다는 것이다.

이 학장은 “우리가 먼저 변해 국가 경쟁력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들게 하면 국가도 관심을 가질 것”이라며 “서울대도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대 인문대는 당장 내달부터 공대, 경영대 등 단과대학들과의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한 포럼을 정기적으로 개최할 예정이며 일본의 도쿄대, 중국 베이징대와 함께하는 학술회의도 추진하고 있다.

그는 “인문학이 인간에 대한 학문인 만큼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면서 “예전엔 다른 단과대에서 인문대 교수들을 불러주기만 기다리고 있었지만 앞으로는 우리가 불러들일 것”이라고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인문학에 대한 국가적 무관심에 대해선 “나무에 물을 주는 마음가짐으로 꾸준히 지원해줘야 하는데 눈앞에 보이는 성과에만 집착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학장은 “공부를 열심히 해도 나와서 갈 데가 없다면 누가 의욕을 갖겠느냐”면서 “선진국처럼 학교와 국가가 나서 석·박사 과정생에 대한 학비와 생활비 지원, 일자리 모색에 도움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공대가 기여한 부분이 크지만 그것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면서 “국가 차원에서 인문계에 대한 지원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경희 기자) 

한국일보(06. 09. 20) 내주 人文주간… 7개 단체 온·오프서 다채 행사

인문학이 대중 속으로 뛰어든다. ‘열림과 소통의 인문학’이란 기치도 내걸었다. 한국학술진흥재단과 인문학계가 손잡고 25일부터 6일간 온ㆍ오프라인 공간을 넘나들며 펼치는 ‘인문 주간’행사는‘인문학의 위기’를 대중과의 접촉을 통해 정면 돌파하려는 절박한 몸짓이다. 행사를 위해 각 대학 인문대학은 물론 한국학 중앙연구원 등 정부 출연 연구기관과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등 대학 부설 연구기관, 그리고 그 동안 일반인 대상 학술 강좌 등으로 인문학 대중화에 힘써 온 재야 연구단체까지 모두 7개 단체가 손을 잡았다.

‘인문학은 고리타분하고 어렵고 딱딱하다’는 편견을 벗어 던지기 위해 세미나 강연 전시 시연 체험ㆍ참여 등 61개의 다양한 행사를 마련했다. 인문학계 전체가 ‘상아탑 안의 인문학’이 아니라 ‘생활 속의 인문학’만이 활로라는 데 뜻을 모은 것이다. 학술진흥재단 관계자는 “인문학의 위기는 연구자 스스로 대중과 소통하기를 꺼려서 생겼다는 자체 반성에서 출발했다”며 “연구 성과를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장을 마련해 보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규장각은 고문서를 통해 주택을 사고 파는 과정, 고발ㆍ고소 같은 송사를 어떻게 진행했는지 등 조선시대 서민들의 일상 생활을 살펴 보는 ‘고문서를 통해 본 생활사’ 강연을 연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든 과정도 풀어낼 예정이다.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는 ‘서울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내걸었다. ‘서울 100년, 시간 공간 그리고 인간’전시회와 함께 ‘영화 속에 나타난 서울의 이미지’와 같은 이색 강연이 기다린다.

철학아카데미는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했다. 플라멩코 춤 마임 행위예술 사이코 드라마를 선보이고 요가 최면술 무속 선(禪) 수행 등 참가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기회도 제공한다. 인문학 연구 모임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공부ㆍ몸ㆍ 언어의 하루’ 등을 주제로 한 영상제와 세미나를 함께 연다. 학술진흥재단과 인문학계는 앞으로 매년 한글날(10월9일)을 전후한 1주일을 공식 ‘인문 주간’으로 정해 인문학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계속 이끌어 갈 계획이다.(박상준기자)

06. 0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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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9-20 19:25   좋아요 0 | URL
행사의 구체적인 내용을 정확히 모르겠지만, 저도 좀 회의적인 건 사실입니다. 그다지 '인문학적'이지 않은 이벤트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더불어, 빌 게이츠나 소로스도 인문학 공부를 했다는 식의 접근법이 오히려 제 살 깎아먹기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한마디로 '돈'에 기대지 않는 인문학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거 아닌가 해서요. 한가지 덧붙이자면, 요즘 거론되는 '인문학의 위기'의 실내용은 '인문학 교수들의 위기'이기도 합니다(학생이 모이지 않고 학과 자체가 없어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나의왼발 2006-09-21 14:35   좋아요 0 | URL
저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이 인문학의 탐구 결과가 만들어낸 것도 크다고 봅니다.
더 이상 니체,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인문학은 진리의 추구라는 목표를 포기했고
더 이상 인간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할 능력도 없음을 자인했는데 그런 학문에
과연 누가 열정을 가지고 공부할런지....

로쟈 2006-09-21 22:57   좋아요 0 | URL
'인간에게 나아갈 길'이란 건 좀 거창하다 싶습니다. 개인사에서도 그렇고 인류사 또한 궁극적으로는 멸망과 멸종을 향해 나가는 것 아닌가요? 과학은 어떤 길을 제시하고 있는 걸까요?..

biosculp 2006-09-22 11:55   좋아요 0 | URL
근데 인문학하면 고등학교나 중학교선생님하면서 하면 안되나요. 임용고시의 벽이 있긴있지만 서울대 통합논술이니 논술의 시대로 접어들었는데, 애들 상대하고 잡일이 있지만 방학도 있고 욕심안부리면 먹고 사는것은 해결이 될텐데요.
그리고 인문학 위기애기하면서도 80년대 부터 나온 번역의 학술적 인정은 왜 아직 안되는것인지요(되고있는데 제가 모르고있나요)
학위한 분이 중고등학교 선생님 되어서(대학에 자리 많으면 모르겠지만 현상황은 이건아니잖아요) 수업은 수업대로 방학이면 특강형식으로 자기 전공분야 강독을 한다든지 뭐 이런식으로 전국학교에 몇명씩만 투입되서 특공대는 아니더라도 해나가면 나라수준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는데. 공상입니다.

로쟈 2006-09-22 19:03   좋아요 0 | URL
식혜bean님/ 예리한(!) 지적이십니다. 인문학이 '배고픈' 학문인 게 맞는데, 사실 배곯아가면서 인문학을 한다는 것도 좀 넌센스가 아닌가란 생각이 듭니다. '생존'의 문제가 아닌 '인간다운 삶'과 '삶의 기쁨/향유'를 다루는 학문이 인문학이 아닌가란 생각 때문에...

biosculp님/일본만 하더라도 박사급 교사들이 상당수 되는 걸로 압니다(국내에도 아주 없지는 않구요). 그런데, 교원자격증을 갖고도 교사자리를 얻지 못하는 교직지망생들이 아직 많은 상황에서 인문학 박사들에게 논술교사 자격을 부여한다면 시비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게다가 학교마다 원어민 영어교사들을 배치하는 데 교육당국과 학보모의 관심이 더 집중돼 있을 것도 같고...
 

며칠 미루어두었던 연재를 마저 해치우기로 한다(자꾸 미뤄지는 걸 보면 이것도 확실히 '일'인 모양이다. 아르바이트 아닌 아르바이트?). 이번에도 고른 책들은 일단 최근에 나온 책들 다섯 권이다. 개인적인 관심범위 안에 놓이면서도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책들을 꼽아보자는 게 이 연재를 끌고가는 나의 '원칙'이다(비록 모든 책에 적용되기는 힘들더라도). 단순하게 나열하는 건 재미가 덜하기에 내러티브를 부여하자면 '멸종의 역사에서 철학까지'이다. 내일 지구에 멸망이 와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그런 무의미한...

 

 

 

 

제일 먼저 꼽을 책은 <멸종의 역사>(아고라, 2006)이다. '지구를 지배했던 동물들의 삶과 죽음'이 부제니까 제목의 '멸종'은 비유가 아니다. 말 그대로 '멸종'이다. 멸종을 다루고 있는 책들은 리처드 리키의 <제6의 멸종>(세종서적, 1996) 이후에 드물지 않게 출간되었다. 멸종의 역사가 10년내 사뭇 달라졌을 리는 없는 만큼 초점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내용상의 대차는 없을 거라고 본다.

No Turning Back: The Life and Death of Animal Species Cover

이번에 출간된 책도 "지구가 탄생하고 30억 년 전에 생물체가 살기 시작한 이래 오늘날까지 생명의 역사를 다룬다. 책은 지구에 살았던 동물들의 생태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곧 멸종의 과정을 이야기 하는 것임을 밝힌다. 지구에 처음 생물이 나타났을 때 있었던 종 중에 지금까지 살아있는 종은 1,000분의 1밖에 되지 않으며, 대부분의 종이 나타난 지 1,000만 년 안에 멸종했다. 이 수치는 지구에 나타났던 생물 중 99퍼센트가 멸종했음을 뜻한다." 문학이론가 프랑코 모레티가 쓴 비유이지만, 진화사는 달리 '도살장의 역사'이다.

책의 저자는 리처드 엘리스인데, 동물학자이자(보다 정확히는 '해양생물학자') 미국 최고의 자연사 작가라고 한다. "리처드 엘리스는 놀라운 상상력과 뛰어난 글솜씨로 자연의 경이로움과 신비에 대해 이야기한다."라고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추천하고 있으니까 신뢰할 만한 책이기도 하고. 그가 어떤 책을 쓰냐면 아래와 같은 책들을 쓴다. 말 그대로 '해룡'인가, 아님 '어룡'?

 

다시 <멸종>으로 돌아오면 "책은 현재가 오르도비스기, 데본기, 페름기, 트라이아스기, 백악기에 일어났던 다섯 차례의 대량 멸종에 이은 제6의 대량 멸종이라고 말한다. 특히 제6의 대량 멸종은 진화와 멸종의 개념을 아는 유일한 종인 인간이 자연의 균형을 철저하게 뒤집은 결과라고 지적한다. '죽음의 기록'이기도 한 지구 생명의 역사를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풀어내면서 생명체의 소중함을 얘기하는 동시에 인류의 종말을 경고한다." 네들 다 끝났어!

 

 

 

 

사실 저 우주공간에서 빛나는 '항성'들 또한 '역사'를 갖는 것이니 이런 멸종의 위협이 구체적인 '실감'으로 다가서지 않을 수도 있겠다(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좀더 '노골적인' 경고를 기대한다면 엘 고어의 <불편한 진실>(좋은생각, 2006)을 펼쳐들어야 하는지도(최근에 영화도 개봉된 듯하다). 너무 불편하다면, 몇년 전 출간되어 파문을 불러 일으켰던 <회의적 환경주의자>(에코리브르, 2003)와 맞대결시켜보면서 읽는 것도 한 가지 방책이겠다. 그 길로 더 나가면 생태학적 위협(니콜라스 루만)과 위험사회(울리히 벡)를 경고하는 사회학자들의 책까지 (다시) 챙겨볼 수도 있겠다. 오버인가?

 

 

 

 

두번째 책은 도널드 케이건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까치, 2006). 저자는 예일대 교수라고 하고(<전쟁과 인간>이 이미 국역돼 있다) 국내 그리스/로마사 권위자들이 우리말로 옮겼다. 오전에 구내서점에 가보니까 '명품서적' 30% 할인판매장에 이미 책이 나와 있었지만, 형편상 페이지를 들춰보는 것에 만족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려면 여러 전쟁사들은 놔두고서라도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범음사) 정도는 같이 읽어줘야 할 텐데, 그럴 만한 여유를 내기가 어디 쉽겠는가. 하여 출간소식을 승전소식처럼 전하는 데 만족하기로 한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그리스의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민주주의의 흐름을 뒤엎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대의 투키디데스의 역사서를 뛰어넘어 2,400년 전의 전쟁을 오늘날의 세계에도 적용되는 보편적 질서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냈다"고. 마저 인용하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대제국의 흥망, 매우 이질적인 두 사회와 삶의 방식 사이의 충돌, 인간사에서 지성과 우연의 상호 작용, 리더십의 가능성과 한계를 알려준다. 이미 학자를 대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지은이는 일반 독자가 즐겨 읽을 수 있도록 쉽고 흥미로운 서술로 사라져버린 세계를 풍성하고 자세하게 그려낸다." 인간과 국가의 흥망을 집약하고 있는 것이 전쟁사인 만큼 흥미롭게 읽을 법하다. 무슨 '배틀'들에 몰입하시는 분들이 이런 쪽으로 방향을 트는 건 어떠실지?   

저자인 케이건 교수는 1932년 리투아니아 태생의 원로 역사학자이다. 1958년 오하이오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69년부터 예일대에 봉직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2003년에 출간된 그의 최신작이다. 알라딘의 저자 소개에는 그가 2002년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인권 메달'을 수상한 걸로 돼 있는데, 그가 받은 건 'National Humanities Medal'(국가 인문학 메달)이니까 인권과는 무관하다.

 

 

 

 

세번째 책은 김시천 교수의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웅진지식하우스, 2006). 국가간의 이기주의는 간혹 전쟁을 낳기도 하지만, 리뷰들을 얼핏 보니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이기주의는 소소한 개인, 곧 소인들의 이기주의이다. '진정한 개인의 행복을 찾은 동양 지식인들의 내면 읽기'란 부제가 말해주는 바 그대로. 사실 공자왈 맹자왈의 대종은 군자/대인에 관한 것이라 생각되지만 우리 인간의 대종은 아무래도 소인들이 아니겠는가. 책은 이 소인(배)들의 (정당한) 탐욕과 권리를 옹호하고자 하는 시도로 보인다.

소개에 따르면, "동양의 이기주의란 씨실과 동양고전이란 날실을 엮어 동양적 이기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담았다. 동양 이기주의의 역사적인 흐름을 만들고, 대인의 큰 이기주의와 소인의 작은 이기주의에 대한 명확한 구분과 그들의 역할을 명시했다... 책은 소인의 작은 이기주의, 즉 사회적 이기주의를 보다 당당하게 누리자고 권장한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이기적으로 살아보지 못하고 국가권력에게 자신을 희생했던 소인들에게 ‘당신들은 대인이 아니라 소인이니 권리를 내세우며 오늘 하루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보라’고 말한다."

저자는 소인을 '작고 평범한 사람들'로 평범하게 정의한다. 예전에 한 국가의 대통령이나 재벌 총수들도 스스로가 '보통사람'임을 내세워 난감한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이 그런 양반들의 자기변명서로 활용될까 걱정된다(하긴 이 책이 아니더라도 최근에 '행복한 이기주의'는 한 트렌드이기도 하지만). 인간됨의 그릇이 작아 '소인'이라고 하지만,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와 얼만큼 겹쳐지면 어떻게 구별되는가에 대해서도 합당한 관심이 기울여져야 할 것이다. 아직 실물을 보지 못한지라 책이 그런 내용까지 다 포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번째 책은 미국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인 힐러리 퍼트넘/퍼트남의 <존재론 없는 윤리학>(철학과현실사, 2006). 국내엔 <이성-진리-역사> 이후에 그래도 몇 권 소개돼 있는 편인데, 퍼트넘은 "캘리포니아 대학(로스엔젤레스)에서 H. 라이헨바흐에게 과학철학을 배우고 하버드 대학에서 W.V.O. 콰인에게 현대 논리학을 배운" 미국의 주류/정통파 철학자로서 1965년 이후 하버드대학의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그러니까 존 롤즈와 넬슨 굿맨 등의 그의 과 동료들이다. 한편으로 또 다른 동료인 저명한 철학자 스탠리 카벨의 책들이 소개되지 않는 건 상당히 기이한 일이다).

사실 윤리학 분야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책들은 피터 싱어의 책들이다(싱어의 책들은 열댓 권 가량이 출간됐다). 하지만, 눈길을 끈 건 퍼트넘의 책인데, '존재론 없는 윤리학'이란 제목부터가 뭔가 유혹적이지 않은가?  

 The Collapse o fhte Fact/Value Dichotomy and other essays

물론 퍼트넘의 전작들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 책 또한 상당히 '딱딱한' 책일 거라는 걸 미리 점쳐볼 수 있다. 그래도 고통을 좀 덜어주는 건 200쪽 분량의 아주 얇은 책이라는 것. 그의 전작 <사실/가치 이분법의 붕괴>와 합본을 해야 보통의 '철학서' 분량이 된다. 그 얄팍한 분량에 유혹되어 책을 사두긴 했는데, 언제나 정독하게 될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그래도 <수학의 철학> 같은 책에 비할 바가 아닌 건 분명하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스페인의 국보급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1883-1955)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2006)이다. 특이한 이름 때문에라도 기억하게 되는 27세에 마드리드대학 철학부 정교수가 된 '천재'였다. 소개에 따르면 알베르 카뮈로부터 '니체 이후 유럽 최고의 철학자이자 문장가'라는 찬사를 받았다고도 하는데, 책은 그의 대중 철학 강의를 엮은 것이다. 그러니까 오르테가 이 가세트 버전의 철학입문서이다. "서양 철학사를 꿰뚫는 오르테가가 철학이란 무엇인지, 왜 우리가 철학을 해야 하는지를 친밀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이야기한다. 철학이란 우리의 삶과 멀지 않으며, 자신의 삶에서 철학이 생성되면서 나 역시 철학 세계의 한복판에 서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라는 게 이 책에 대한 나머지 소개이다.

작년봄에 <대중의 반역>이 다시 번역돼 나와서 한번 언급할 기회가 있었던 듯한데, 내가 갖고 있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이미지는 대표적인 엘리트주의 혹은 귀족주의 철학자라는 것이다. 그런 첫인상을 심어준 이는 <예술의 비인간화> 등에 대한 서평을 썼던 문학평론가 이동하이다. 두번째 인상은 러시아 체류시 받은 것인데, 러시아어로는 대표작들이 문고본으로 출간되어 있어 그 지명도를 짐작케 했다. 그러니까 오르테가 이 가세트 정도를 읽는 건 '교양'에 해당한다는 것. <철학이란 무엇인가>는 그 '교양'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이겠다. 내가 더 기대하는 건 언젠가 을유문화사의 문고본으로 출간되었던 <돈키호테의 성찰>이 세련된 장정으로 재출간되는 것이다(저자 자신이 멋쟁이이기도 했으니까).

마지막에 덧붙인 책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리더스북, 2006)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문체가 니체에 버금한다고 하여 떠올려본 것인데, 철학서는 아니고 어빈 얄롬이라는 정신과 의사의 소설이다. 책이 친숙한 건 예전에 교보문고의 철학코너에서 뻔질나게 보던 책이어서이다.

소개를 옮겨오자면, "서구 사상의 흐름에 커다란 영향 19세기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에 지적 상상력을 더해 집필한 팩션"으로서 "음울한 천재 철학자 니체가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브로이어와 벌이는 화려한 지적 공방을 그린다. 1992년 미국에서 출간되어 이듬해 '커먼웰스 베스트' 픽션 부문 금메달을 수상했고, 이후 13년간 장기 베스트셀러에 오른 작품이다." 그러니까 니체와 프로이트에 관한 이야기들의 성찬일 텐데, 장기 베스트셀러였던 만큼 철학책보다 철학자에 더 흥미를 갖는 독자에게라면 자신있게 권할 만하겠다.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 우리는 이야기를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자. 그의 눈물이 비명이 되기 전에...

06. 0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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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6-09-19 17:47   좋아요 0 | URL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다가 생소한 지명이 나오는데 나오는 지도도 친절하지 않고 해서 포기했었는데 케이건 교수의 책은 상세한 지도가 새로운 지명이 나올때마 나와 읽어나가는데 헤메이지는 않더군요. 번역은 읽기는 무난한것 같은데 학자들이 번역한 뻑뻑한 느낌이 나고, 보자마자 눈에 띤 옥에 티는 책 앞날개에 donald kagan이 donal로 d가 빠졌더군요. 네오콘과 관계있다고 하는것 같은데 그리 강성인 책은 아닌것 같은데 끝가지 읽어봐야겠습니다.

로쟈 2006-09-19 17:49   좋아요 0 | URL
부지런하시네요.^^ Donald를 Donal로 오타를 낸 건 알라딘도 마찬가지입니다(그걸 베껴서 그렇겠지만).

푸른괭이 2006-09-19 20:52   좋아요 0 | URL
이렇게 어려운 책들 일색이라니 -_- 나는 요즘 뜻밖에도(!) 김탁환의 [리심]이 눈에 들어오네요.

로쟈 2006-09-20 00:05   좋아요 0 | URL
난이도 문제가 아니라 그냥 취향의 문제입니다...

털세곰 2008-01-01 04:23   좋아요 0 | URL
한참 때 늦게 "최근에 나온 책들"에 다는 댓글이라...

리투아니아 출신의 케이건Kagan 교수라 함은 러시아어로 까간 교수를 말함일 확률이^^...

로쟈 2008-01-01 11:12   좋아요 0 | URL
러시아어로는 그렇게 읽겠지만, (러시아계) 미국 학자이니까요.^^
 

오래전에 셰리 터클의 <라캉과 정신분석 혁명>(민음사, 1995)를 읽고 리뷰까지 올려두었는데, 다시 들춰보니까 옮겨놓지 않은 대목들이 눈에 띈다. 내용상 '밑줄긋기'에 해당할 듯도 싶지만, 그냥 페이퍼로 정리해둔다. 내 기억에 터클의 책은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이었으며 그녀의 책으론 <스크린 위의 삶>(민음사, 2003)이 더 번역돼 있다.

<라캉과 정신분석혁명>은  라캉 이론의 테두리를 긋는데 도움이 되는 저작이지만, 이론의 내면까지 들어가지는 않는다. 사실 그걸 목적으로 하지도 않은 책이지만. 정신분석의 사회학이면서 일종의 지성사인데, 프랑스에서 프로이트 혁명이 지니는 의의와 그 변모 과정을 잘 개괄하고 있다. 

인상적인 대목: “정신분석의 비전에서 가장 급진적인 것은 우리 내부의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며 라캉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과 자신 안에서 대면하도록 끊임없이 촉구한다고 많은 분석가들은 믿는다. 이것이 라캉 세미나의 위력이다.”(304쪽) “정신분석의 핵심은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진실, 즉 인간이 자신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과 대면하는 것이다.”(307쪽) 그런 점에서 미국식의 적응주의적, 실용주의적 정신분석은 일종의 ‘자살 행위’이다.

다음. “알튀세르와 라캉에 있어 <과학만이 전복적이다>”(310쪽) 두 이론가가 모두 왜 그렇게 과학(과 수학)에 집착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또 “사람들이 정치와 언어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에 미친 라캉의 영향은 프랑스의 새로운 대중적인 철학(신철학)과 알렉산더 솔제니친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평가에서 나타난다.”(311쪽)는 대목.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책세상, 1991)의 저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 등이 신철학의 대표자이다. 그리고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1973)가 제일 먼저 출간된 곳은 프랑스였다.

터클의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그래도 미국에서의 라캉을 다룬 에필로그이다. “라캉의 정신분석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자기를 형성하는 인간을 강조한다. 그것은 개인에 대한 일종의 시작(詩作)이다. 라캉에게 시인과 정신분석가는 언어에 대한 그들의 관게에 의해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332쪽) “<정신병은 엄밀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정신병자라고 말하고 싶다. 항상 엄밀해지고자 노력해 왔다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정신병자이다.>”

‘정신병자’ 라캉의 전략은 과학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는 어렵고 엄밀한 작업을 피하기 위해 시적인 합리화를 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수학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과학적 엄밀함이 시야를 좁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334쪽) 그리하여 “라캉은 정신분석을 과학으로 재발견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진 시인이다.”(336쪽)

06. 0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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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9-19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데리다에 '관한' 가장 좋은 책, 혹은 입문서는 그의 대담집들이라는 게 제 지론입니다. '데리다가 말하는 데리다' 쯤 되겠지요. 사실, 순전하게 데리다 자신의 책들만 해도 차고 넘치지요. 초기의 <입장들>만이 국역돼 있는 게 아쉽습니다(그나마 썩 좋은 번역은 아니고). 데리다를 많이 읽으셨다면 제가 굳이 추천해드릴 형편은 못되고 그래도 국역돼 나온 책들 가운데는 크리스토퍼 노리스의 책이 낫지 않나 싶습니다(원서와 대조해서 보신다면)..
 

어제부터 딸아이의 방을 '진짜로' 만들어주기 위한 '공사'를 시작한 탓에 집안이 어수선하다. 서가들을 대부분 거실로 내오고 방에는 벽지를 다시 바르거나 페인트칠을 다시 해야 하는 탓에 한동안은 준-전시상태로 지내야 할 듯하다. 그런 와중에 옛날 파일들도 정리하다가 언젠가 대학원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번역문을 발견했다. J. M. 번스타인의 <예술의 운명(The Fate of Art)>(Polity Press, 1993)에서 하이데거를 다룬 장의 한 절이다(2장 8절). 기억에 부분적으로 발췌한 번역문인데 문장을 약간 다시 손보면서 가급적 병기된 원어들을 삭제했지만 번역문을 원문과 다시 대조하지는 않았다([ ]안의 말들은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였던 것이다). 절제목이 '미적 소외'였던 탓에 '하이데거와 미적 소외'란 제목을 달아서 창고에 넣어둔다(아래 이미지는 다른 판본인데, 폴리티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까만색 장정이다).  

 

이 장 전체를 통해서 나는 예술과 미학의 담론이, 테크놀로지적 현전화의 지배에 대항하고 그러한 지배를 폭로(개시)하는 유리한 비판적 거점을 제공해준다고 주장해왔다. 이 [테크놀로지의] 지배는 [예술작품에서의] 유한한 초월에 대한 억압으로서 역사 속에 자리한다. 이러한 거점과 역사를 하이데거의 에세이(「예술작품의 근원」)는 제공하고 있다. 「근원」에서 하이데거의 전략,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결속을 다루는 그의 방식은 후기 에세이인 「테크놀로지에 관한 문제」에서 이들의 관계를 표지화하는 방식, 즉 테크네와 포이에시스의 동일성과 차이에 관하여 말하는 방식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근원」에서 제기하고 있는 중심적인 문제는 우리가 미학적이지 않은 방식[비-미학적 방식]으로 예술에 관여할 수 있는가, 즉 (미적) ‘쾌감’의 안쪽에, 그리고 (이론적) 인식과 도덕(적 실천)의 바깥쪽에 울타리 지워지는 예술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예술에 관여할 수 있는가이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하이데거는 미감적 지각이 ‘자신의 마땅한 제값’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초월한다는 테제를 세운다. 그리스 신전을 지적하면서 (하이데거는 예술의 또 다른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는 예술이 (지배적이건 위축되었건 하여간에) 지금도 [그런 또다른 개념에 따른] 동일한 요구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 그러한 미학-외적 요구는 예술이 더 이상 단순히 미적인 것[미학]이라는 범주적 분류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을 수[동일시할 수] 없다는 자각 안에서, 그리고 그런 자각을 통해서 성립한다.

이 자각은 예술이 주류적인(진보적인) 문화, 즉 모든 창조를 생산으로, 현전화 작용을 [눈앞의] 현전으로(만) 축소시키는 지배적인 현전의 경제[단도리]와 병치되도록 내던져져 있다는 자각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논변은 그 길로 빠질 수밖에 없는데[그런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데], 그리스 사원이 세계를 개시한다는 주장은 현대 세계가 그에 상응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데야 아무런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전은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지만, “그 작품속에 들어서 있던 세계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세계의 퇴거'와 '세계의 쇠퇴'는 어찌해볼 도리가가 없다.” 그리스 신전이 드러내주는 것은 한때 예술이 단순한 (심)미적 대상 이상이었다는 사실이다. 반 고호의 그림에도 이러한 ‘뭔가’가 더 있지 않는 한,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인식과 테크놀로지의 현전화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적인 것은 자신을 초과하는가?

 

 

 

 

휠덜린의 한 편의 자연시, 반 고호의 한 짝의 구두 그림, 하이데거가 들고 있는 이들 작품 속에 있는 무엇인가가 우리를 우리가 정당화할 수 없고, 지지할 수 없으며, 온전하게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개시에로 잡아끈다. 그것들은 우리를 거주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또다른 개시[세계의 열어젖힘]에로 유인한다. 이런 생각을 많이 듣던 소리로 옮겨볼까: 예술작품은 현재에는 현실화되지 않은 어떤 현상의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이해가능성을 제공한다]라고. 그래서 예술은 그것이 상상적인 가능성들을 다루기 때문에 허구적이라고.

 

비록 하이데거의 테제가 처음엔 이런 식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근원」의 의도가 그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사실 바로 그런 테제를 거부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단순한 가능성’이란 조작적 개념은 현전을 (초월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현전화 작용]보다 먼저, 그리고 그것과는 무관하게 현실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감적’ 인식을 (단순히) 취미로 축소시키는 것이 바로 이러한 가능성(에로)의 축소[환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 고호와 횔덜린의 작품에서 어떤 요구를 제기할 수 있는가? 위대한 예술의 종언이 암시하는 바대로, 이들 작품들은 그저 ‘사물-존재’, 그러니까 미감적 의식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위대한 예술은 한물갔지만 ‘작품-존재’적인 뭔가는 남아있는 것일까? 하이데거는 반 고호의 작품에 대해 그것이 “독특하게도 자신에 의해 열려진 영역 안에 속해 있다”고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새로운 세계도 아니고 상상력의 영역도 아니라면, 그 영역은 환상 세계인가?

 

 

 

 

 

 

 

 

 

<진리와 방법>에서 가다머 또한 예술을 미적인 것[미학]과의 유착에서 구출하고자 한다. 가다머에 따르면, 미의식은 그 자신 자유롭게 예술작품을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미의식은, 즉 취미판단에 기초하여 예술작품들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데 있어서 우리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우리의 자의식은 보다 더 기본적인 경험에 근거하고 있으며, 일단 어떤 예술작품의 요구에 붙들리게 되면,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작품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데 있어서 더 이상 자유롭다고 느낄 수 없다.

 

여기서 가다머의 요점은 말하자면, 무사심성[무관심성]이 우리를 작품에 대한 경험이 그저 좋아하고 말고의 차원을 넘어서는[초월하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예술작품의] 요구를 훨씬 강력한 것으로 간주한다. 하이데거를 좇아서 그는 예술작품이 이미 시초부터 단순히 미적인 수용(혹은 거부)만을 위해 창조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예술에 대한 우리의 의식, 즉 미의식은 “예술작품으로부터 발원하는 직접적인[즉각적인] 진리 요구[주장]에 대해 언제나 이차적인 것이다.” 

취미 판단은 우리를 예술작품과의 이러한 근본적인, 인식(론)적인 연계[동거]로부터 소외시킨다. 미적 소외의 경험은 작품 본래의 진리 요구와 그 요구에 대한 (심)미적 반응[수용] 사이의 간극에 대한 경험이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청원과 거절의 간극에 대한 경험이며, 작품의 유혹과 [그 유혹에] 자리할 수 없음 사이의 간극에 대한 경험이다. 그러한 간극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작품이 미학(의 테두리)를 초과하는 걸 경험한다는 것이다. 나의 주장은, 지배문화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정당한 가치평가는 그 간극 속에 놓이는 것이고 미적 소외의 경험(이 경험이 하이데거의 사유를 불러낸다) 속에 놓이는 것이라는 거다.

 

다시 한번 반 고호의 그림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우리를 잡아끌며 닦아세운다. 그러나 어떻게인가? 먼저 어떤 현상의 ‘진리’를 개시함으로써이다. 그 그림에 대한 하이데거의 재-평가가 우리에게 그 작품에 대한 한 가지 해명으로서 유효한가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한 그림이나 시를 두고서 우리가 하이데거의 해명이 보여주는 바에 상응하는 [진리] 요구를 감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그런 해명에 대해서 자연스럽지만 순진한 두 가지 비판적 반응이 있다. 첫째는, 마이어 사피로의 비판이다. 그는 그 해명을 다른 여러 가능한 성격부여에 대립하는 한 가지 재현적 성격부여로 다루면서, 하이데거의 해석에 당연한 시비에 건다. 그런 식의 비판[사피로의 비판]이 (비록) 부당하고 부적절하더라도, 그것은 재현(론)적이고 (심)미적인 고려가 예술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얼마나 철저하게 주도하고 있는가, 그래서 미(학)적 담론의 지반을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정말 잘 보여준다. 사피로의 비판은 본의 아니게도 중심의 지배, 즉 (심)미적 문화에 대한 진보적 문화의 헤게모니 앞에서 예술작품의 '어찌할 바 없음'을 드러내준다.    

 

하이데거의 해명을 인간과 사물, 그리고 자연이 함께였고, 마치 하나였던, 그래서 제각기 따로 노는 오늘날과는 전혀 달랐던 과거 농촌 세계에 대한 순진한 낭만화로 비판하는 것은 보다 핵심에 근접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와 동일한 비판이 <존재와 시간>에서 망치에 대한 하이데거의 유명한 논의에 대해서도 가해질 수 있다. 이 두 경우에 모두 문제가 되는 것은 하이데거의 뭔가 의고적인 접근방법이다. 도구(혹은 공간)에 대한 ‘사실적인’ 해명 대신에 하이데거는 우리를 이해와 실천의 이전 형태로 되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특정한 과거의 가능성의 재현을 도모하는 것처럼, 과거 농촌의 이데올로기를 현재에 대한 비판으로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확실히 수련발전 댐이나 로봇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망치나 시골 아낙의 구두와 동일한 의미연관을 가질 수는 없다. 도구의 본질은 그때 이후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에 사정이 그러하다면, 과거 도구 개념의 단순한 제시는 별로 의미가 없는 바, 그것은 상상의 세계에서의 가벼운 산책과 다를 바 없다. 「근원」에 대한 비판은 우리를 세계에 대한 이 두 개념으로부터, 사물에 대한 그 낙천적인 재현으로부터 떼어내는 것이다.(“우리가 믿기에 우리는 사물들의 직접적인 둘레 속에 안주한다. 그것은 친숙하며 신뢰할 수 있고 일상적이다. 그럼에도...”)

 

그래서 하이데거가 그 본성이 바뀔 수도 있다는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도구의 본성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겠다고 말할 때, 그는 명시적으로 이 두 해명들에 대한 이러한 비판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역사로부터 자유롭게 도구성을 숙고하고자 하는 그의 태도는 󰡔존재와 시간󰡕에서의 그것, 그러니까 망치의 예와 아날로지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가 세계를 탈은폐하는 그리스 사원과 [고호의] 그림을 대조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단지 그 시골 아낙이 알고 있는 바가 비역사적인 것이라는 걸 알려줄 따름이다.

 

 

 

 

 

 

 

 

 

<존재와 시간>에서의 형이상학적인 태도에 대한 하이데거의 자기비판과 모든 비역사적인 계시적 예술이론에 대한 그의 비판은 반 고호의 그림에 대한 해명이 그리스 사원과 대조되고 있는 결과, 도치된 형태로 [여기서도] 유효하다. 그리스 신전, 그리스 비극, 중세 성당, 그리고 <신곡>에 대해서도 이 작품들이 사물들에 드러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드러남을 가지게 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하이데거가 결코 충분히 해명하고 있지 않는 것이지만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반 고호의 그림에 대해서는 뭔가 그럴 듯하지 않다. 그것은 위대한 예술의 종언(의 시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하이데거는 탈은폐 같은 인식(론)적 체제와 동종적인 용어를 가지고 그 그림을 끌어들이는가? 반 고호의 그림은 어떻게 미학을 초과하는가?(즉 <존재와 시간>은 어떻게 형이상학을 초과하는가?) 비록 근대 예술작품에는 인식적 요구[진리 요구]가 결핍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반 고호의 그림은 그리스 신전이 아니다), 예술작품의 그러한 요구 자체는 재현론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작품은 여전히 생산물이 아니라 하나의 창조물이며 하나의 작품이다. 우리에게 부과되는 예술작품의 요구는 과거의 (진리)개시의 가능성을 불러모으는 그 작품의 현존이고 물질적인 만들어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끄집어내고 싶은 것은 근대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요구의 성격이다. 그것은[그 요구는] 어떻게 자신을 주장하고 우리 생활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는가? 한 가지 대답은 이미 제거되었다. 세계(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 탈은폐를 통해서라는 것 말이다. 그러나 좀 거리를 두고 볼 때, 그 작품이 세계의 탈은폐를 자신이 직접 전달할 수는[가져올 수는] 없지만 그 탈은폐를 부추긴다고 말하는 것까지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그것은[근대 예술작품은] 자신만의 [세계]개시 가능성에의 (필연적인) 실패 속에 거주한다. 그래서 그것을 생산물이 아닌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창조됨은 작품(들)의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세계와 대지를 뒤섞는다.

 

예술작품에 들러붙어 다니는 이념성, 허구성, 상상력은 그것의 내용들(농촌세계, 이상적인 미래 등등)의 기능이 아니라 그것의 ‘형식’이고 그것의 예술작품됨이다. 작품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요구는 바로 예술 자체의 과거와 미래의 가능성들이다. 그들[근대 예술작품]의 세계 개시 실패, 혹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개시하는 것, 그들의 인식(론)적 무능력, 진리문제로부터의 배제됨[소외] 등이 그래서 그들이 가진 힘의 원천이며 그들의 부정적 인식(능력)이다.

 

근대 예술작품들은, 천재의 작품들은 자신의 본질적인 불가능성[무능력], 위대한 예술작품이 되고 세계를 개시하는 데 있어서의 실패를 자양분으로 삼아 번성한다. 그리고 그런 거 말고는 다른 걸 할 수도 없다. 바로 거기가 [근대]예술이 서 있는 자리이다. 이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의 주변성을 특정한 주변성으로서 의식하게 되고, 그래서 중심적인 것[주류적인 것]의 지배의 의미를 경험하게 된다. [근대]예술작품은 예술의 힘과 잠재성에 대한 기억과 예감 속으로 (우리를) 잡아끈다. 이 잠재성은 그것이 현전의 실재성으로만 다루어지게 되면 그 작품의 진짜 의미, 기억과 예감의 작업을 숨기게 된다. 이 작업이 성취되면 현재적인 것은 특정한 현전으로 이동한다.

 

위대한 예술의 불가능성은 테크놀로지의 지배 하에 놓여 있는 예술의 운명이다. 만약 하이데거의 도식이 제대로 진행된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테크놀로지적인 개시는 현전하는 것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냄 없이 개시한다. 포이에시스에 대한 그것의 거부는 예술을 주변을 내보내고 그래서 예술은 그 근원[기원]으로부터 소외된다. 이것은 말끔하고 엘레강스한 정식화이지만, 틀렸다. 진리로부터의 예술의 소외는 하이데거가 공표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며 다른 문제이다.

 

 

반 고호의 그림이 떠맡아주리라고 하이데거가 기대했던 역할을 모더니스트 작품들만이 온전하게 실행할 수 있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준 것은 데리다의 성취이다. 그러나 [모더니즘 예술이] 일단 그러한 지위를 부여받은 이상, 일단 모더니티가 예술적 모더니즘 작품들을 통해서 그 반성적인 (자기)이해를 부여받은 이상, 하이데거적인 프로젝트에 대한 근본적인 변형이 일어나게 된다.

 

06.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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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는 배제하라? 문예지 신인상 심사에서 '노티'나는 작가들은 암묵적으로 차별대우를 받는다는 기사를 읽고 '소설가의 나이'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여기서 '시인의 나이'는 고려되지 않는데, 상업적인 계산과 밀착되어 있는 것은 소설가의 나이이지 시인의 나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관련기사는 이렇다. 

북데일리(06. 09. 13) 문예지 신인상 아줌마는 배제? 작가의 주장 파문

“문예지 신인상을 심사할 때 편집위원 혹은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아줌마를 배제하라’라는 규율이 암암리에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일단 무조건 아줌마 냄새가 나는 작품은 제외시킨다. 요즘은 신인상 공모 공고에 대놓고 ‘우리는 젊은 작가를 원한다’라고 주를 달아놓는 문예지도 있단다. 그럼 젊지 않은 작가는 아예 응모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한겨레출판. 2006)로 제11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조영아가 문예지 신인상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었다. 시사 주간지 한겨레21(제626호)을 통해서다. 조영아는 “수준이 고만고만한 몇 작품을 뽑아놓고 일일이 전화로 나이를 확인한 다음 연락이 없다. 그중에 나이 제일 어린 누군가가 다시 연락을 받는 행운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래서 공모를 준비할 때면 아줌마 티가 나는 작품은 일찌감치 제쳐둔다. 뛰어나게 잘 쓰지 않은 이상 뽑히기 어렵다는 지론에서다”라고 덧붙였다.

-문학상 심사에 나이가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은 일반인들로선 의외로 받아질 대목(*하지만 얼마간은 '상식적인' 것이기도 하다. 특히 수천 만원의 상금을 내건 신인상들의 경우, 잡지나 출판사에선 '본전'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고 판매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나이'를 한 가지 변수로 고려하는 것이다. 기사에서 이 '돈' 문제가 언급되지 않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일단 조영아가 민감할 수 있는 문제를 거론한 것은 젊은 작가들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문학판의 풍토를 지적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할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우려는 깊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조만간 문학상 공모에 나이 제한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나이가 많고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아줌마 티가 난다는 이유로 심사 대상에서 일찌감치 제외된다는 것은 창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나라를 떠나라’는 말로밖에 안 들린다”

-올해는 유독 신춘문예, 문학상에서 나이든 늦깎이 신인들의 출현이 돋보였다. 오래 묵혀 온 문학에의 열정과, 탄탄한 습작 과정을 통해 등단한 실력 있는 신인들에게 ‘나이’란 문제조차 되지 않는 납득할 수 없는 잣대다. 따라서 만약 신인상에 그같은 풍토가 작용하고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신인상에 거액의 상금만 내걸지 않으면 된다. 혹은 수상작가가 상금을 거절하든가. 그것도 아니면 독자가 작가의 나이와 무관하게 책을 좀 사주든가).

-조영아 역시 나이 마흔에 등단한 아줌마 작가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서른 넘어 시작한 부단한 글쓰기의 수련과정을 공개 한 바 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결혼 후 전업주부로 생활하면서도 늘 ‘글밭’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두 아이를 키우며 가정 살림을 이끌어야 하는 주부에게 창작의 여유를 부릴 시간은 충분치 않았다. 번갯불에 콩 볶듯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남편을 출근 시키고 고시원에 출퇴근하며 이를 악물고 글을 썼다.

-동화는 물론 단편, 중편 습작을 거듭했으나 등단은 쉽지 않았다. 각종 신춘문예와 각종 문학상에 도전했지만 최종심에만 오를 뿐 수상은 하지 못한 것. 그러나 창작을 향한 그의 투지는 쉽게 사그라질 만큼 약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잠든 때를 틈타 밤잠까지 줄여 가며 매일 10시간 이상 글을 쓰며 갈고 닦은 열성으로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하게 됐다. 조영아의 이번 칼럼은 그의 이같은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이번 신춘문예나 문학상에서 드러났듯이 실제로 잘 쓰는 아줌마 작가들, 혹은 나이 많은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반문하며 "`우리도 한 때는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아줌마들의 절규가 들리지 않는가”라고 일갈했다.

-그의 이번 주장은 고시원, 공공 도서관의 좁은 칸막이에 갇혀 등단에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전국의 늦깎이 습작생들에게 띄우는 격려이자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문예지 신인상을 향한 시의적절한 채찍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북데일리 김민영 기자)

기사는 최근에 번역돼 나온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뒤 부슈롱을 떠올리게 했는데, 지난 200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상을 수상한 그의 소설 <짧은 뱀>(문학세계사, 2006)이 그가 76세에 쓴 처녀소설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작가 부슈롱은 프랑스의 엘리트 학교인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했다. 항공 산업에서 시작해 텍사스 주의 테제베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산업분야에서 일했다고 한다. 사전 습작의 경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2004년, 76세의 나이에 발표한 첫 소설 <짧은 뱀>으로 일약 유명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작가의 나이를 불문하는 걸 보면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도 공쿠르 상처럼 상금이 얼마되지 않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려나 부슈롱의 '노익장'은 가령 미셸 투르니에처럼 40대에 데뷔하는 늦깎이 작가들조차도 젊어 보이게 만든다.

소개에 따르면 <짧은 뱀>은 "정교한 고증학적 지식과 잔혹한 상상력이 결합된 종교적 모험 이야기. 14세기 말 북극지대에서 펼쳐지는 문명과 야만의 충돌을 섬뜩하게 그려낸다. 작가 베르나르 뒤 부슈롱이 76세에 쓴 생애 첫 소설로, 200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을 수상했다. 야만의 지옥에서 타락의 길을 걷는 북방동토(누벨툴레)의 기독교도들을 구원하기 위해 출발한 원정대. 그들이 '짧은 뱀'이라는 선박 한 척에 의지하여 빙산과 폭설로 고립된 혹한의 섬을 찾아가는 과정이 일인칭 시점의 보고서 형식으로 기술된다." 나이로 보아 '긴 여정'을 남겨놓지 않은 작가의 데뷔작이지만, '굵은 여정'의 시발점으로 기록되기를 기대한다.

 

 

 

 

한편 한국문단의 가장 대표적인 늦깎이 작가 박완서(1931- ) 선생의 단편문학전집이 전 6권으로 문학동네에서 새롭게 출간됐다. "1999년 출간된 전집을 새로운 장정으로 다시 선보이는 개정판"으로 "초판에는 빠져 있던 1998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왔던 <너무도 쓸쓸한 당신>을 추가하여, 총 여섯 권으로 구성했"으며 "1971년 3월부터 1998년 11월까지 발표된 박완서의 단편소설들을 총망라했으며, 각각의 작품은 발표시기 순으로 나누어 실었다"고 한다.

1970년「여성동아」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의 경력이 올해로 서른 여섯 해이다(그간의 업적으로 몇달 전 작가는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소설가로서 나이보다 중요한 것이 작가로서의 태도, 혹은 각오에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 나이를 핑계삼는 문단/출판계 일각의 '계산'은 속좁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혹 그러한 계산이 요즘 한국문학의 독자들을 점점 말라붙게 한 것은 아닌가?). 문학의 신이시여, 그들의 소갈머리를 어찌해야 하옵니까?..

06. 09. 16-17.

 

 

 

 

P.S. 마흔도 멀지 않은 요즘 같아선 나도 소설을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와 폴 오스터/크누트 함순의 <굶기의 예술>을 (다시) 읽고 정신을 차려야겠다. 그들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선 얼마나 강퍅해야 하며 굶주려야 하는가를 증언해주고 있으니까(기름기 좀 들어간 작가들은 다른 종의 소설가들이다). 하긴 네가 지금 배부른 처지냐고 하면 대답이 사뭇 궁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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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9-18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화로 나이를 확인'하다니. 참 잔머리라고 해야할지 나름의 고심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으나 국외자가 보기에는 그저 '꼴깝'으로만 보이네요.

로쟈 2006-09-18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일이든 노골적으로 나오게 되면 좀 추해지지요...

니브리티 2006-09-21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소설이라... 로카드님도 전에 소설 쓰신다고 조금 올리신 적이 있는데.. 이번 문예중앙 시인들의 대담코너에서 이런 말들이 오가더군요..좀 다른 의미에서 동의하는 말이긴 한데, <장르는 운명이다>

로쟈 2006-09-21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가는 묘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해소시켜 준 작가가 쿤데라입니다. 쿤데라의 소설을 좋아하면서 저도 언젠가는 써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지젝 스타일의 책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도 갖고 있어서 어느 것이 실현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욕심을 뛰어넘는 게 또한 게으른 일상인지라...

다크아이즈 2006-09-27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의 묘사적 강박을 주입시키는 경로들(각종 신춘문예나 메이저급 문학 잡지)을 극복하는 게 우선이겠지요. 지겹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나저나 '참을 수 없는~' 말고 쿤데라의 어떤 소설을 읽으면 그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한 권만 권해주세요.

로쟈 2006-09-27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쿤데라의 모든 소설이 그런 건데요... 소위 에세이적 소설, 성찰적 소설 류라고...

다크아이즈 2006-09-28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은 소설을 묘사와 산문적 성찰로 구분해서 말씀하신 거군요. 저는 묘사와 서술(이야기)로 구분할 때 우리 소설은 지나치게 묘사에 올인한다는 뜻이었어요. 이것이야말로 인문학자와 일반독자의 차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또 배우고 싶은 게 있어요.


양파와 문첸가 하는 제목으로 김훈에 대해 언급한 것 읽은 적 있는데(아직 카테고리 성격을 파악 못해 다시 찾아 읽으려니 못 찾겠어요.) 로쟈님 말씀으로는 김훈은 소설가보다 에세이스트로서 탁월하다, 뭐 이렇게 읽혔거든요. 그건 문체만 얘기할 때 그렇다는 것인지요? 즉, 쿤데라 소설이 묘사보다는 성찰이 우선한다는 전제를 두고 볼 때 김훈은 해당 사항이 없는 건가요? 그 미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문체만으로는 '쿤데라적 소설가'(제가 지은 말)가 되기에는 어림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김훈의 문체를 부러워하지만, 소설이나 에세이 두 편 정도만 읽어도 김훈적 문체가 너무 드러나는 바람에 뻔하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제 질문의 요지는 김훈의 문체로는 쿤데라적 성찰에 이를 수 없다는 뜻인가요? 왜냐면 김훈 보고는 에세이스트가 어울린다고 하고 쿤데라는 그 에세이적 성찰 때문에 뛰어난(?) 소설가라 하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 지금 생각난 건데 김훈은 감각(감성)적 에세이스트, 쿤데라는 철학적 에세이스트, 고로 철학적 에세이스트가 더 소설가에 합당하다, 뭐 이렇게 해석해도 되나요? 아휴, 골치 아파, 제 미흡한 독해를 해독해주세요. 요즘 로쟈님 서재 훔쳐보느라 미치도록 즐거워요. 그나 저나 언제 이 보물들을 완독할 수 있을지...

로쟈 2006-09-28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을 간추리면 김훈의 에세이가 쿤데라의 에세이적 소설과 뭐가 다른가쯤 될까요? 저는 쿤데라를 에세이스트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그가 비평적 에세이들도 썼지만). 그는 작가, 곧 소설가이지요. 거꾸로 저는 김훈을 소설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좀 과도한 주장이지요. 하지만, 그가 아직 3인칭 소설을 쓰지 못한다는 점에 기대에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들은 독백적이며 제겐 김훈 자신의 복화술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3인칭의 시점으로는 세계를 기술하지 못한다는 것. 그런 게 에세이스트의 운명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반면에 소설은 (바흐친에 기대어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대화적이고 대화적이어야 하지요. 다른 말, 다른 의식, 다른 이데올로기의 간섭과 혼종이 소설의 규정항입니다. 얘기가 너무 거창해지는군요.^^

다크아이즈 2006-09-29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접수 잘 했습니다. 에세이스트와 에세이적 소설이 이렇게 다른 거군요. 혼자 씨불이느냐,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상충이 있느냐에 따라... 왜 김훈의 소설(문장)이 빛나긴 했지만 지겨웠는지 감이 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