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를 앞두고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몇 권을 꼽아본다. 나로선 당장 연휴에 읽을 책들은 아니지만 한두 권 정도는 연휴에 구입할 계획이다. 개인적으로 일주일에 평균 5-60권의 도서정보를 처리하고 그 중 최소 10여 권을 구입하거나 복사한다. 절반 정도는 전공이나 관심사와 관련된 원서들이고 나머지 절반쯤이 우리말 책들인데, '최근에 나온 책들'은 그 가운데 특별히 눈에 띄거나 한번쯤 관련서들을 뒤적거려보고 싶은 책들에 속한다. 이번 경우엔 <로맹 가리>나 <도구적 이성비판>이 특별히 그러한 종류에 해당된다. 먼저 <로맹 가리>부터 시작해보자. 

 

 

 

 

도미니크 보나의 <로맹 가리>(문학동네, 2006)는 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유일한 작가이자, 수수께끼 같은 작가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에 관한 전기로 1987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전기부문 대상을 수상했다고 하는 만큼 신뢰할 만한 평전이다(보나의 책으론 <세 예술가의 연인>도 출간된 바 있다). 요컨대 "<자기 앞의 생>,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작가,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번갈아 소설을 발표하며 '매너리즘에 빠진 거장'과 '자유로운 영혼의 신인'이라는 두 페르소나를 연기했던 작가, 1980년 권총 자살로 생을 마치기까지 열정과 야망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소설가 로맹 가리의 66년 생애를 조명한다."

소개를 좀더 옮겨보면 "<로맹 가리>는 문학비평 기자이자 르노도 상 수상 작가인 도미니크 보나가, 저널리스트의 치밀함과 소설가의 감수성으로 쓴 평전이다. 프랑스 문학계를 뒤흔들었던 '아자르 사건'을 포함하여, 로맹 가리의 내면세계와 모든 작품과 창작의 배경,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린다. 화려한 성공을 꿈꾸는 한 가난한 소년의 열망이, 화려한 언변과 세련된 외모로 세계 외교 무대를 사로잡은 한 외교관의 카리스마가,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한 남자의 외로움이, 창조적 에너지를 마음껏 분출하고자 했던 한 작가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사실 내게 로맹 가리보다 더 친숙한 이름은 그의 가명이자 '또 다른 작가' 에밀 아자르이다. <자기 앞의 생>을 먼저 읽었기 때문이다(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의 여주인공도 내 기억에 로맹 가리의 광팬이었다). 

내가 책을 읽은 건 기억에 1990년 봄쯤이다. 나는 제대를 얼마 안 남겨두고 한 부대 관사의 당번병 방에서 뒹굴며 몇몇 소설들을 탐독했었는데, 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와 함께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이 바로 <자기 앞의 생>이었다. 주인공 모모와 로자(로쟈가 아니다) 아줌마가 엮어가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 이후에 다시 읽은 적이 없으므로 작품에 대해 정확히 평하기는 어렵지만 여하튼 에밀 아자르란 이름을 기억하게 해주었고 이후에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까지 관심이 이어지도록 했다. 비록 <유럽의 교육>(책세상, 2003)은 구입해두지 않은 것이 지금 생각으론 다소 의아하지만. 아무튼 이번에 나온 전기를 읽다 보면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란 한 작가(혹은 두 작가?)에 대해서 좀더 분명한 판단과 열정을 갖게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두번째 책은 역시나 평전으로 '과학지식인의 탄생'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폴 화이트의 <토머스 헉슬리>(사이언스북스, 2006)인데, 실상은 지난번에 다루어져야 할 책이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이월됐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헉슬리'란 성이다. 조금 견식이 있는 독자라면 이 '허슬리'가 여럿 된다는 것쯤은 상식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주로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잘 알려져 있는데, 헉슬리 가문을 일으켜세운 토머스 헉슬리(1825-1895)가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조부이다. 토마스의 또다른 손자인 생물학자 줄리안 헉슬리 경은 올더스의 형이고, 그들의 배다른 동생 앤드류 헉슬리는 노벨상 수상 과학자이다. 토머스 헉슬리는 '다윈의 불독'으로 불렸을 만큼 진화론의 강력한 옹호자로 유명한데, 이 '불독' 집안이 가히 지성의 명가인 것이다.

저자 화이트는 책에서 "19세기 과학계의 발전사와 '과학 지식인' 토머스 헉슬리의 삶을 다뤘다. 헉슬리가 신문, 잡지 등에 기고한 글과 부인 및 동료들과 나눈 서한 등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과학 및 과학자의 정체성을 확립시킨 토머스 헉슬리를 재조명한다. 좁게 정의되는 과학이 아닌, 다른 문화 영역들과 연결되는 실천방식으로서의 과학을 추구한 그의 삶을 세세하게 그려낸다... 책은 과학의 실천, 대중화, 변호 과정에서 헉슬리에 관련된 여러 자료를 통해,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한 사람의 '과학 지식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적한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 과학 및 과학자들의 사회.문화적 위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세밀하게 밝힌다."

해서 '과학 지식인의 탄생'이란 부제가 공으로 붙여진 것은 아닌 셈인데, 헉슬리 가문과 과학 지신의 자기정체성이 모두 토머스에게서 기원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니까 이 '대단한' 위인의 생애에 한번 눈길을 주어볼 만하다.  

 

 

 
 
 
 
세번째 책은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작가로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주제 사라마구(1922- )의 신작 <도플갱어>(해냄, 2006). 제목 그대로 자신과 똑같은 대상을 마주하게 되는 '도플갱어'의 모티브를 차용한 소설이라는데, <눈먼 자들의 도시>, <동굴>과 함께 주제 사라마구 '인간의 조건' 3부작으로 불린다고 한다(영역본의 제목은 ' The Double').
 


"인구 500만의 대도시에 거주하는 중학교 역사교사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 어느 날 그는 동료교사의 추천으로 비디오 한 편을 빌려보다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한다. 자신의 5년 전 모습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영화에 나오고 있었던 것. 막시모는 집요한 추적을 시작, 배우의 본명과 거주지를 알아낸다. 그리고 배우와 그 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배우를 발견하면서 그가 가졌던 자신에 대한 불안감은 이제 배우 부부에게까지 전염되고, 거울 앞에 선 것처럼 몸에 난 상처까지 똑같은 두 남자는 누가 원본이고 누가 복사본인지를 따지며 존재의 불안감을 떨치려 한다..."
 

 

 

 

 

나는 아직 사라마구의 책을 읽어본 바 없지만 노벨상 수상작인 <수도원의 비망록>(문학세계사, 1998)을 읽어본 지인의 호평은 기억하고 있다(드라마들도 번역되지 않았나?). 그럼에도 다소 낯설다는 느낌은 주지만, 이번에 출간된 '도플갱어'는 상당히 낯익은 테마의 작품이다. 도플갱어, 혹은 분신을 다룬 문학작품들이 적지는 않기 때문이다(만화와 영화에도 두루 걸쳐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에서 최수철의 <분신들>에 이르기까지.

사실 자신과 똑같은 또다른 존재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좀 섬뜩한 이야기를 함축하는 것이어서 공포영화에서도 즐겨다루어지는데, 가령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도플갱어> 같은 게 (나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대표적인 경우이다. 아무튼 이러한 배경하에 놓이는 작품이기에 사라마구의 <도플갱어> 읽기도 다소 수월할 수 있을 거라는 짐작을 해본다.

 

 

 

 

'도플갱어'란 테마가 정신분석을 자극하고 요청하는 테마인데, 네번째 책은 이와 무관하지 않은 연구서 박찬부 교수의 <라캉: 재현과 그 불만>(문학과지성사, 2006)이다. 모처럼 국내 필자의 저작이어서 반가운데(국내에서는 홍준기, 권택영 교수 등이 라캉 관련 저작을 갖고 있는 정도이다), 저자는 이미 10년전에 <현대정신분석비평>(민음사, 1996)을 상자한 바 있고(알라딘의 저자 소개에는 역서로 돼 있지만 저서이다), 프로이트 전집의 <쾌락원칙을 넘어서>(열린책들, 1997)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재현과 그 불만'이란 표제 자체는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의 영어 제목인 '문명과 그 불만'에서 따온 것인데, 라캉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저자의 길잡이가 되는 듯하다. 소개에 따르면, "이 표현은 프로이트의 '문명과 그 불만'에서 유래한 것. 프로이트가 인간 발달의 동인으로 문명화의 필연성을 강조하면서도 '죽음 본능'으로 대변되는 '그 불만'을 주요 논제로 다루었듯, 상징적 재현의 불가피성을 인간 주체의 '강요된 선택'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언제든지 불만 세력인 실재계에 의해 전복될 수 있다고 말한다. 라캉의 '상상질서'에서 시작되어 '실재계' 쪽으로 옮겨졌던 관심사를 그대로 되짚어 살핀다. 지나치게 어렵거나 해체적인 서술을 지양해, 라캉의 이론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였다."

'죽음본능' 혹은 '죽음충동'을 화두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라캉-지젝 라인의 사고방식과 겹치는 듯하지만 저자는 지젝과 같은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라캉 담론의 탈근대적 유산'이란 서론의 제목이 이미 이를 암시해준다. 지젝이 방어/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라캉의 '근대적' 유산이기에). 방점이 '정신분석'보다는 '비평'에 두어져 있던 <현대정신분석비평>에서 저자가 사숙한 스승으로 거명한 이는 미국의 저명한 정신분석비평가 노만 홀란드였다. 독자반응이론가로도 분류되는 홀란드의 대표작은 <문학적 반응의 역학(The Dynamics of Literary Response)>(1968)이다. 말하자면 '미국화된 라캉'의 한 사례를 <라캉>에서 읽어볼 수 있을지 모른다.  

 

 

 

 

끝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끌었던 독일의 사회학자 호르크하이머(1895-1973)의 대표적인 저작 중 하나인 <도구적 이성비판>(문예출판사, 2006)이 거의 40년만에 출간됐다. 아도르노와의 공저인 <계몽의 변증법>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리고 아도르노의 그늘에 가려 사실 덜 주목받는 편이긴 하지만,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멤버들을 그린 한 캐리커쳐가 말해주듯이(이 흔한 이미지가 잘 검색되지 않는군) 대학의 사회문제연구소장이었던 호르크하이머는 학파의 대부이자 좌장이었다.  

호르크하이머는 책에서 "부정의 철학을 지향하며, 자연과 인간을 도구화하고 파멸로 이끄는 도구적 이성의 전면화에 대해 고발한다. 오늘날 이성은 이성이라고 불리는 것들의 비이성적 태도를 고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성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고발은 이성의 전면적 해체가 아니라, 오직 이성의 자기 비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론적 염세주의자이면서 실천적 낙관주의자가 되자.' 개인을 무력하게 만드는 파시즘의 출현을 인식하는 비관주의와 보편적인 인간의 유대를 꿈꾸는 낙관주의를 가진 호르크하이머의 사상을 느낄 수 있다."

호르크하이머의 책이 이번에 처음 소개된 것은 아니다. 예전에 <철학의 사회적 기능>(전예원, 1983)이란 책이 출간된 바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절판된 책이지만 이 참에 새로 때깔을 입혀도 좋지 않을까 한다. 더불어, 황재우(시인 황지우) 등이 공역한 마틴 제이의 <변증법적 상상력: 프랑크프르트 학파의 역사와 이론, 1923-50 >(돌베개, 1981)도 다시 손을 봐서 재출간하는 건 어떨까?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근간으로 한 책은 지상사적 시각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탄생과 이론적 진화과정을 섬세하게 추적하고 있는 저작이다...

06. 09. 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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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9-29 23:11   좋아요 0 | URL
주제 사라마구의 책이 있었군요.좋아하죠..전.

로쟈 2006-09-29 23:55   좋아요 0 | URL
'무척' 좋아하시나 봅니다.^^

다크아이즈 2006-09-30 09:34   좋아요 0 | URL
뽑아 먹기 좋은 막대사탕(그 안에 든 쓴 약까지), 날로 먹으려니 송구스럽고 감사하네요. 한데, 로쟈님 목소리와 따온 목소리를 선명하게 구별할 수 있도록 색깔처리 해주심 안 될까요? 어떤 님의 요청에 색칠하는 것 별로 안 좋아한다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따온 글을 색깔처리하면 로쟈님 글이 되려 보호될 수 있으니 좋을 것 같은데... 날로 먹는 주제에 독자를 배려해달라고 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죠?

로쟈 2006-09-30 09:50   좋아요 0 | URL
따온 글들은 모두 인용부호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약간 불편하실 수 있지만 헷갈리실 정도는 아닐 겁니다. 칼라풀한 글자들이 제 경우엔 오히려 독해에 방해가 되는지라...

깽돌이 2006-09-30 12:35   좋아요 0 | URL
진중권씨가 비트겐슈타인의 '청갈색책' 옮겼던데 이에 대한 리뷰도 부탁^^

로쟈 2006-09-30 16:39   좋아요 0 | URL
청갈색책은 저도 책은 갖고 있는데, 책세상에서 나오는 전집들과 연관해서 나중에 다루려고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을 좀 들춰볼 여력이 현재는 없기도 해서요(^^;)...
 

교수신문에서 며칠전 기사를 읽었다. '나의 학문적 우상은 무엇이었나'란 기획기사인데, 내용이 흥미로워서 옮겨놓는다. 더불어, 잠시 '나의 학문적 우상'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최장순 기자의 기획의 변은 이렇다: "偶像. 보통, 신처럼 떠받들어지는 사람이나 대상을 우리는 우상이라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초년병 시절 우상을 만들어내고, 그 우상을 좇아 자기와 동일화하는 과정을 겪게 마련. 우리시대의 학자들은 어떤 우상화의 과정을 겪어왔을까. 그리고 학문적 우상은 어떻게 학자의 내면을 장악했다가 결국 쓸쓸히 떠나고 마는 것일까. 그 내밀한 풍경을 살펴보았다." 당신들의 우상은 안녕하신가?..

교수신문(06. 09. 23) 기획취재_나의 학문적 偶像은 무엇이었나

“나는 그 분의 지대한 영향을 입은 사람이다. 1980년대 초반엔 내 논문을 지도해주시기도 해,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박지향 서울대 교수(영국사)가 에릭 홉스봄을 떠올리며 남긴 말이다. 박 교수의 회상은 이어진다. “그 분의 영향을 받아 노동사 공부도 했다. 나도 언젠가 이런 글을 써야지 하는 걸 느끼게 한 유일한 분이었다. 나에게 우상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홉스봄에 대한 박 교수의 마음이 맹목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홉스봄에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은 세계 정치지형의 변화 속에서 홉스봄의 문제점을 조금씩 발견했기 때문이다.

박 교수가 홉스봄과 거리를 두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 2003년 발간된 ‘Interesting Times: A Twentieth-Century Life’였다. 이 책에서 홉스봄은 젊은 시절의 행동에 대한 자기변명을 일삼으며 총체적 시각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다. 박 교수는 “가령 스탈린이 행한 악행을 두둔하려는 홉스봄의 태도는 못참겠다”며 “80세 넘게 살았으면 자기 삶과 20세기를 연관지어 당시 현장에 좀 더 거리를 두고 써도 될 것을… 그런 걸 발견하지 못해 많이 실망했다”고 전했다(*박정희를 두둔하려는 태도와는 어떻게 연관되는지?). 홉스봄에 대한 진한 애정에서 나오는 진심어린 충고다. 조승래 청주대 교수는 “동구권이 몰락하는 등 세계의 정치적 판도가 변화하자 영국 좌파 연구자들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가 많이 사라져갔다”며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 역시 토마스 쿤에 대한 소회를 풀어놓았다. 쿤의 두 제자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홍 교수는 자연스럽게 토마스 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쿤의 방법론은 “텍스트 이해에는 도움이 되지만 과학의 내용을 넘어 사회 문화적인 측면을 보는 데 한계가 있”어 현재 홍 교수는 “쿤의 방법론을 버리고 있는 중”이다.

특정 지식인에 대한 학문적 우상화는 학자라면 누구나 거치는 관문이다. 이와 관련해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박사논문을 쓰는 동안에는 학문적 우상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학위를 받고 나서 지식인으로 바로 서야 할 때는 곤란하다”라고 말했다(*학위논문을 쓰면 자립/분가해야 하는 것인가). 우상을 냉철하게 비판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실행하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다. 특정 대가들을 뛰어넘는 걸출한 학자가 드문 게 사실. 누군가를 넘어서려면 ‘부단한 노력’ 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고 연구자들은 입을 모은다.

누군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은 다른 대상들을 향해 미끄러지는 작업을 동반한다. 임지현 한양대 교수(서양사)는 90년대 폴란드 문제와 시름하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스탈린을 좇다가 문제가 생기면 레닌으로 돌아가고, 그게 또 문제면 볼셰비키로, 그리고 다시 청년 맑스로 돌아가면 된다는 게 하나의 흐름”이었다고 전했다. “우상이란 결국 신화화 작업을 동반하므로, 다채로운 프리즘을 갖고 대상에 접근해야 한다”는 말도 이어졌다. 이와 관련해 장석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은 “지적 우상에 대한 모방은 필수적인 과정인데, 그것이 자기 자유를 신장하기 위한 것이 아닌 권위에 기댄 기계적 모방이 되면 교조주의나 근본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설명했다(*너무 당연한 말씀들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지적 탐구 대상을 우상화하는 일. 그 내부에 어떤 심적 기제가 작동하는 것일까. 이창재 프로이드정신분석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정신을 안정시키며 동시에 확장시켜주는 이상적 대상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소장은 “특히 연구를 하려고 하는 사람의 경우엔 연구 욕구를 유지시켜주기에 일정한 지식활동의 모델이 긍정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정 인물 및 그 연구작업과의 동일시를 통해 연구활동을 지속할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 그는 특정 인물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과도하게 진행되더라도, 처음에는 괜찮다고 한다. 하지만, “동일시가 한 사람에게만 고정되다 보면 발전이 정체”되기에 “주체적으로 새로운 대상을 선택해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더 나아가 이 소장은 학자 일반의 정신을 분석하면서 “학계에 남는 사람들의 경우 학문의 목적이 자기 고양이나, 개발, 개성 실현에 있는 게 아니라, 대상 결핍 때문에 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자기에게 평생 보호자가 될 사람이 필요하기에 ‘정신의 아버지상’이 있는 학계에 남게 된다는 설명인데 흥미로운 주장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손종업 선문대 교수(국문학)는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자신을 탕진하고 싶은데 그 대상의 거짓 내지는 오류를 발견했음에도, 그에 대한 열정을 철회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전했다.

가령, ‘황우석’을 믿었던 사람들은 ‘황우석’의 일정한 문제점이 발견되었기에, 그에 대한 열정을 접어야 하는데, 오히려 합리화하기 위해 사태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이게 학자들의 케이스인가?). 그런데 손 교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요즘 젊은 학자들이 점점 더 현실주의화해가고 있다”며 “더이상 그럴 듯한 것도 없고 모든 존재가 점점 더 왜소해지고 냉소적으로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오히려 적절한 우상을 갖는 일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닌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진정한 우상이 없는 시대”라는 것(*내가 동의하는 바이다. 학문에서 자신의 우상을 절대화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지만, 우상을 갖지 못하는 건 불행한 일이다). 그리고 몇몇 학자들은 학문적 우상에 관한 취재를 한다고 하자 “특정 학자나 학문에 대한 단순한 개인적 열정 보다 패거리 안에서 확대, 재생산, 조직화되는 열정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최장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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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페이퍼'에 이런 거창한 제목이 달릴 리는 만무하다. 조간신문에 게재될 김우창 교수의 칼럼을 미리 읽어보려고 했을 뿐이다. 요 며칠 자주 다루었던 시사적인 주제여서 따로 옮겨놓기도 하면서. 주로 하버마스의 '보편적 화용론'에 기대어 인문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재차 강조하는 칼럼으로 읽힌다. 내가 안 갖고 있는 책을 포함하여 몇 권의 책을 나열해본다. 내키면 <하이데거, 하버마스, 그리고 이동전화>(이제이북스, 2003) 정도는 바로 읽고 생각할 거리를 마련해도 좋을 듯싶다. "여보세요? 저, 인문학도인데요. 예? 안 들린다고요?"

 

 

 

 

경향신문(06. 09. 28) 공적공간의 윤리성과 인문교육

하버마스의 글에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호 이해에 이를 수 있는가, 또 그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들이 선행돼야 하는가를 논하는 것이 있다. (“보편적 실천 어용론(語用論)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대화의 기본 조건 가운데 그가 강조하는 것은 주로 네 가지, 즉 해독가능성, 진실, 진실성, 정합성이다(*'어용론'은 pragmatics의 번역이겠다. 일반적으론 '화용론'이라고 옮긴다).

첫번째 조건으로 거론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써야 한다는 조건은 자명한 것이라고 할 것이나, 이것이 문법이나, 논리나, 상황의 적절성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자명한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두번째의 조건은, 말이, 일단은 진실 또는 진리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실을 담은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세번째 조건은, 말이 진지한 또는 성실한 태도에서 나온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네번째는, 대화자들이 보편적인 타당성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써 자신들의 말의 옳고 그름을 헤아려 볼 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의미는 그의 전체적인 관심의 틀 안에서만 바르게 평가될 수 있다. 하버마스는 사회문제에 대한 이성적 해결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믿고 있는 철학자다. 다만 그에게, 이성은 사람이 사는 소란하고 번거로운 세계를 넘어 초월적 공간이나 역사의 큰 움직임 안에 존재하는 높은 원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접하고 이야기하고 논의하고 타협하고 하는 사회공간 안에서 태어나는 원리이다. 그러면서도 이 원리는 잡다한 경험적 현상의 일부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형식적 정형성을 갖는다. 그러니까 이성적 원리는 경험적 현상 속에 존재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초연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대화의 네 가지 조건은, 현실 상황에서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대화에도, 문법이나 의미를 떠나서, 그 아래에 일관된 어떤 바탕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위의 조건들에서, 두드러진 것은 대화의 진행에는 말의 내용에 관계없이 어떤 실제적인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관찰이다. 그것은 세번째의 진실성 또는 성실성이라는 조건에 가장 분명하게 나와 있다. 그것은 대화에 임함에 있어서 대화자는 화제의 대상 또는 자신이나 대화의 상대자에 대하여 일정한 도덕적·윤리적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조건에도 그에 비슷한 윤리적 태도가 들어 있다. 사람이 자기 주장을 내놓는 것은, 이 주장과 함께, 진리를 존중하며, 그 기준에 의한 여러 주장들의 평가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내놓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같은 글의 뒤편에서 다시 설명하듯이, 전제의 하나는 누구의 것이든지 논증된 주장에는 승복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말도 틀린 것으로 판명되면, 그 주장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증명되면, 그것이 실천적으로 함의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약속이다. 건설적 대화가 성립하려면, 대화자들은 그들의 상호연계성을 받아들이고 그 관계가 합리적 또는 이성적 바탕 위에 서야 한다는 것에 승복해야 한다. 즉 대화에는, 간단히 말하여, 실제적 전제로서, 공동체적 상호인정 그리고 공동체의 기반으로서의 이성적 원칙의 수락-이것이 선행돼야 한다.

대화의 선행조건에 대한 하버마스의 말은, 그 이론 전개의 까다로움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단순하고 큰 현실적 의미가 없는 말로 들린다. 문제는 대화의 전제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떻게 하여 그러한 조건을 성립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회적 균열이 심한 사회는 대체로 그러하다고 하겠지만, 우리 사회의 문제는 그러한 공론의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데에 있다. 공동체적 상호존중이나 진리에의 순응의 태도를 전제하는 공론의 공간이 사라지고 공동의 진리가 설 자리가 없는 것이 오늘의 우리 사회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 대신 공적인 광장에서 발언한다는 것은 다른 가능성은 고려할 것도 없이 자기주장을 밀어붙이는 것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태도이다. 문학논의의 지침으로서 레닌이 내세운 것에 당파성(黨派性)이라는 말이 있거니와, 요즘의 발언과 논쟁들을 보면,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 없이, 이 원칙을 지상으로 받든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판국에 하버마스가 말하는 진리성과 윤리성의 조건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순진한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사람이 가지게 되는 생각들의 물질적·사회적 기초를 중시하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나온 철학자이다. 대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현실적 요인들을 모르고 그가 대화의 조건에 대하여 논의를 펼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적 상황의 어려움에 대한 의식이 그로 하여금 바로 경험의 혼란 속에서 생겨나는 이성을 중시하게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사회가 진리 공동체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도외시하는 입장들의 역사적 파국을 직시한 까닭에 위에 말한 원칙들을 천명하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는 그러한 공동체의 원칙을 살려 나가는 것이 좋은 사회를 위한 중요한 실천적 작업의 일부로 생각된 것이다.



어떻게 하여 진리와 공동체적 상호존중에 입각한 대화적 상황이 조성될 수 있는가? 여기에 간단한 답이 있을 수가 없다. 삶의 교사는 현실이다. 우리는 이웃들이 행하는 바를 모범으로 하여 우리 스스로의 행동 방안을 만들어 간다. 이렇게 보면, 대화적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 사회는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도리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악순환의 고리 속에 있으면서도 새로운 길들이 트이는 것이 또한 인간사이다.

최근에 여러 곳에서 인문과학의 위기에 대한 논의가 일고 있는 것을 본다. 인문과학은, 인식과 윤리에 있어서의 보편적 원리를 배우고 그것을 몸의 습관으로 지니게 하는 데에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는 학문이다. 물론 모든 학문적 수련에는 이러한 원리에 대한 수련이 따른다. 그러나 그중에도 끊임없는 상상적 연습을 통하여 실천적 현실에서 비판적 그리고 자기비판적 이성을 끌어내려는 훈련이 인문과학의 방법론적 기본을 이룬다. 이 점에서 인문과학은 다음 세대의 공동체적 대화자를 기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경직된 교리 학습이 인문과학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인문과학 옹호론이 많이 나와 있는 이 시점에서 이런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보탬이 되지는 아니할는지 모른다. 필요한 것은 실제적 조처에 대한 궁리이다. 한 가지만 말한다면, 모든 인문과학의 제도적 바탕은 인문과학을 포함한 기초 과학의 교육을 대학 교육의 핵심이 되게 하는 데 있다. 오늘의 산업 사회의 필요에 맞는 기능 교육을 무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대학원이나 직장의 직업 훈련에 미루고 대학은 기초과학의 교육에 주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뒤따를 기능 교육에도 좋은 준비가 되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 맞추는 학제, 재정, 연구 조직의 적응도 물론 별도로 생각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사회 구조 자체가 진리 공동체로서의 이념을 수용할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다. 이 공동체는 경제 성장 또는 그 과실의 분배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열매가 아니다. 하버마스의 대화적 이성철학은 이 사실에 대한 역사적 반성의 일부이다.(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06. 0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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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8 1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0-01 23:21   좋아요 0 | URL
**님/ 몇년전에 방한했었지요. 저는 '얼굴'보다 '목소리'가 신기했었습니다...
 

아침 출근길 전철에서 여느 때처럼 조간신문을 읽었다. 수요일인지라 한국일보를 사들었는데 최근의 '인문학 사태'와 관련하여 강준만, 전봉관 두 교수의 칼럼이 눈길을 끌었다. 이 시사적인 이슈에 대한 나의 생각과 닮은 점이 많아서 옮겨놓도록 한다. 강조는 나의 것이다.

한국일보(06. 09. 27) 오락공화국

한국의 40대 남성 사망률은 세계 최고다. 한국인의 스트레스 지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인의 자살율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특히 대학입시 경쟁은 전쟁을 방불케 해 매년 200여명의 어린 학생들이 성적 문제로 자살을 한다. 한국인의 행복도는 세계 중하위권 수준이다.

● 전쟁 같은 한국인의 삶
이런 기록만 살펴보자면 한국은 지옥에 근접한 나라로 보이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지옥과 천국을 수시로 왔다갔다 할 정도로 나름대로의 대비책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한국은 세계 50대 교회 중 제1위를 포함하여 23개를 갖고 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겐 음주ㆍ섹스ㆍ도박ㆍ스포츠가 있다. 음주ㆍ섹스ㆍ도박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스포츠는 세계 최고 수준은 아니지만, 스포츠 국가주의에 열광하는 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여기에 더하여 세계 최고 수준의 오락이 있다. 영화는 히트만 쳤다 하면 천만명의 관객을 끌어들인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비롯한 오락프로그램은 세계에서 가장 재미있다. 한국은 인터넷 강국이되 인터넷이 주로 오락용으로 소비된다는 점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1등이다. 한국은 게임 강국이며, 비보이 문화의 새로운 종주국으로 떠올랐다. 오락 기능이 강한 각종 방(房) 문화의 발달도 세계 1위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한국은 '오락 공화국'이다! 냉소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자신을 정확히 이해하자는 뜻이다. 한류 열풍은 '오락 공화국'의 역량을 보여준 사건이다. 나라를 빼앗긴 일제 치하에서도, 민주주의를 박탈당한 군사독재정권 치하에서도, 오락문화는 전혀 주눅들지 않았으며 내내 번성했다. 한국인이야말로 이른바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전형이다.

'오락 공화국'은 한국인의 기질만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다.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땅 좁고 자원 없는 나라가 살 길은 근면과 경쟁 뿐이다. 한국은 그냥 생존하는 것만으론 만족하지 못하고 선진국 되는 걸 국가종교로 삼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그래서 택한 게 바로 '삶의 전쟁화'였다. 전쟁 하듯이 산다는 것이다. 그런 전쟁을 지속할 수 있게 만든 조건 중의 하나가 바로 오락이었다(*그러니까 각종의 오락은 한국인들의 지옥 같은 삶을 지탱해주는 '마약'이다).

한국인들은 정치를 욕하지만, 정치야말로 고급 오락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욕하면서 즐기는 오락, 이건 오락의 최고봉이다. 특정 정치인을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따르는 이른바 '빠' 문화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정치에 대해 말이 많지만 매우 재미있는 범국민 오락을 제공한다는 점에선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오락 공화국'에선 삶의 속도가 빠르다. 오락은 유행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싫증나게 만드는 건 죄악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이런 속도전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건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속도의 폭력에 치이는 분야가 생겨났다.

인문학도 그런 분야 중 하나이다.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선언하고 나섰지만, 인문학만 위기인 건 아니다. 오락적 가치가 사회의 전 국면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오락적 효용이 떨어지는 건 모두 다 위기다. 신문을 보라. 신문을 구독하지 않는 대학교수들이 의외로 많다.

● 오락 외에는 대안 없나
문화관광부가 이름을 문화체육관광부로 바꾼다는데, 그 이유가 재미있다. "세계 10대 레저스포츠 선진국 진입을 달성하기 위한 조치"라나. 한국은 이미 세계 1위의 '오락 공화국'인데, '세계 10위'를 목표로 삼다니 우리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오락 공화국'은 한국적 삶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택한 대안이었겠지만, 이를 계속 밀어붙일 것인지 본격적인 공론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기에 앞서 '오락 공화국'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더라면 더욱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다(*나의 아쉬움이기도 하다).(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

한국일보(06. 09. 27) "이 녀석아 진리가 변하냐?"

인문학을 전공한 노교수는 30년 가까이 같은 학교에서 똑같은 과목을 강의했다. 30년을 사용하다보니 강의노트가 너덜너덜 해어졌다. 대학원생 조교는 노교수의 해어진 강의노트를 타이핑해 컴퓨터 문서로 정리하면서 이렇게 권했다. "선생님, 이참에 내용도 한번 정리하시죠?" 노교수는 무례한 제자를 한심한 듯 한참동안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녀석아! 진리가 변하냐?"

● '인문학 위기 선언'을 보고
필자가 다니던 대학원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던 이야기다. 실화인지 허구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실화라고 믿는 대학원생이 더 많았다. '인문학 위기 선언'을 접하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그 전설이었다.

나는 인문학 위기 선언이 그동안 학자들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것, 뼈를 깎는 자기혁신을 단행하지 않은 것, 학문 후속세대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 것, 사회의 통합은커녕 분열에 앞장선 것 등에 대한 진지한 자기반성에서 시작될 줄 알았다. 인문학 전공 대학원생으로 보낸 10여년 동안, 내가 경험한 인문학의 위기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학에 입학할 때도, 대학원에 입학할 때도 과정이 끝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는 단 한번도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인문학자가 처한 경제적 곤란은 위기가 될 수 없었다. 같은 국문학자끼리도 전공이 고전문학이냐 현대문학이냐에 따라 서로의 논문을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으므로, 인간성 회복이니 사회적 통합이니 하는 거창한 구호가 인문학의 존립 근거가 될 수도 없었다. 논문과 학술서는 전공자가 아니면 도저히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지엽적이고 난해했으므로, 대중의 무관심 역시 위기의 본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젊음을 인문학에 바치면서 절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학원생이 열심히 연구해 제출한 논문을 교수들이 대충 읽고 깎아내릴 때, 학술지 논문심사가 형식적으로 이루어질 때 절망했고, 신진학자의 새로운 견해가 학계의 낡은 기준으로 난도질당할 때, 후배들이 '형처럼, 교수들처럼 살기 싫다'고 하나둘씩 대학원을 떠날 때 절망했다. 무엇보다도 인문학자들이 '나태'를 '영혼의 자유'로 분식(粉飾)하려 들 때 절망했다.

● 해어진 강의노트부터 찢어라
아무리 '남 탓'이 우리 시대의 '정신'이라지만, 인문학자들마저 남 탓만 해서는 안 된다.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원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청춘을 인문학을 공부하는데 바치려는 무모한 젊은이들이 아직은 대학원에 남아있다. 사회는 인문학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를 얻고 싶어하는데, 인문학자는 전공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독백만 하고 있다.

젊은이들을 인문대 대학원에서 내쫓는 것은 '무차별적 시장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맹신'이 아니라, "이 녀석아! 진리가 변하냐?"는 오만과 만용, 시대착오와 자가당착이다. 해어진 강의 노트는 찢어버려야 한다. 진리가 변하지는 않지만, 해어진 강의노트에 적힌 것은 진리가 아니다. 설령 진리라 하더라도,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은 대상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인문학자들마저 남 탓에 내몰리면, 이 나라는 정말로 희망이 없어진다.(전봉관ㆍ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절충적인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의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기 전에 먼저 '오락공화국'의 문제를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아야 하며 자신의 해어진 강의노트를 찢어버려야 한다(내 강의노트는 어디에 처박혀 있나?). 그러니까 문제는 인문학 일반의 위기가 아니다. 문제는 '한국'의 인문학이고, 인문학자들 자신의 인문학이다(혹 무늬만 인문학은 아닌가?). 그리고 사실 이러한 반성이야말로 (몰염치한 정치와 무반성적인 과학에 대하여) 인문학의 장기이자 특권 아닌가?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네 주제를 알라!" 

06. 0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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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9-27 15:36   좋아요 0 | URL
아, 서늘합니다. 칼럼도, 님의 결론도.

biosculp 2006-09-27 17:00   좋아요 0 | URL
인문학의 위기 애기는 10년도 더된 애기 아닌가요.
인문학의 위기라는것이 더 나아가면 문제 해결능력의 위기는 아닐런지.
10전부터 나온 애기에 무슨 뭘 했다는 애기는 없고 선언과 돈 지원해주세요.이게 전부.
국민들은 능력있는 진보세력을 원한다는 신문보도가 있던데 능력있는 인문학자들이 필요한것은 아닌지. 여기서 능력은 돈버는것은 아닙니다.

로쟈 2006-09-27 17:03   좋아요 0 | URL
웰-다잉도 웰-빙만큼 의미있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대세라면. 정현종 시인의 시에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라는 게 있는데, 인문학에 대해 제가 느끼는 감정의 대부분은 슬픔입니다. '슬픔의 종언'을 굳이 말릴 이유도 없다고 생각되구요. 왜? 우리는 '오락공화국'에 사니까요...

페일레스 2006-09-27 17:34   좋아요 0 | URL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 종사자들의 위기' 같은데요. 탁석산씨가 100분 토론에서 몇 마디 했더군요.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번 건 좀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페이퍼로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마천 2006-09-28 08:42   좋아요 0 | URL
낡은 강의 노트부터 찢어라. 정말 와 닿는 말이네요. 스스로 구원하지 않으려 한다면 남이 구원에 나서줄 수 없겠죠
 

요즘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벌이고 있는 젊은 문인들은 문학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에 대한 유용한 지표가 될 만한 조사결과가 나왔다. 교수신문이 대략 1970년 이후 출생하고 2000년 이후에 등단한 신진문인들을 상대로 가장 과대평가된 문인은 누구인가, 다시 주목해야 될 문인은 누구인가, 가장 주목하는 동료 문인은 누구인가 등을 묻는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를 짚어보는 특집기사들을 옮겨온다. 소위 '2000년대 문학'의 판도와 실상을 이를 주도하고 있는 젊은 문인들의 의식과 시각을 통해서 이해하는 데 유익한 자료가 될 만하다. 기사에서의 강조와 군말은 나의 것이다.  

교수신문(06. 09. 23) 유사이래 문학작품의 물량이 지금처럼 넘쳐나는 때가 없었다. 몇년 전에 비해 발표지면이 10배 이상 늘어난 탓이다. 그만큼 새로운 신진들의 작품도 쏟아져 나오고 그에 대한 비평적 리뷰가 필요한 시점이다. 교수신문은 외재적으로 신세대를 조명하기보다는 이들 신진문인 95명의 의견을 직접 들어보았다. 과연 이들은 전세대 문학전통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 문학적 모티프를 어떻게 만들어왔고 또 만들어나갈 예정인지를 그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보고 이를 통해 향후 한국문학의 전개를 엿보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편집자주)

[특집] 신진문인 의식조사(1) 조사결과를 보고

문학사가 보여주듯 어느 시기에나 문학의 새로움은 신진 세대들의 몫이었다. 2000년대 이후 문학판의 크고 작은 지각 변동 역시 기성문인보다는 새로운 세대들의 주도적인 움직임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런데 비평가의 촉수는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문학판의 흐름에 대해  이 새로움이 과연 어떤 진정성을 갖고 있느냐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그 진정성을 따지는 작업은 신진으로 부상한 문인의 작품을 읽고, 그 시비를 따지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 길만이 전부는 아니다. 작품보다는 신진 세대의 문학적 의식의 근저를 훑어보는 방법도 매우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그들의 문학적 토대를 형성한 선이해의 바탕과 그들이 선망하거나 비판하는 작가들을 눈여겨 살피는 길이 그 중의 하나이다.

물론 한 작가나 시인의 문학적 의식의 근저를 더듬는 작업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이들의 문학적 의식의 토대를 형성한 요소들이 다양하고, 다층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교수신문’에서 젊은 문인들에게 설문으로 들고 있는 항목들은 이들의 문학적 의식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징검다리가 강을 건너는 훌륭한 다리가 되듯, 여기의 항목들이 비록 일부일지라도, 2000년대 새로운 젊은 작가들의 문학적 지향 전체를 암시할 만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이번 설문이 지닌 의미가 있다.

설문 중 필자의 관심을 끄는 항목은 우선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젊은 작가들의 반응이다. 소설가들의 답변 비율이 동의 쪽으로 기울어진 듯하지만, 시인이나 비평가들의 입장은 동의할 수 없다는 쪽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보면,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문학판의 상황이 위기감으로 팽배해 있지만,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는 의식의 근저는 무엇일까. 이는 자기세대의 문학에 대한 당위성과 함께 가능성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은 아닐까. 문학은 소생 불능이 아니라, 끊임없이 갱신되고 진화해야 할 시대의 명확한 목표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 주체는 물론 젊은 작가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신세대 의식’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젊음을 갱신과 진화의 무기로 인식하고 있다. 기력이 쇠한 늙은 문학이 아니라, 젊고 건강한 문학을 통해 시대에 대한 전망을 이끌어내려 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그 젊고 건강한 문학이 과연 어떤 문학인가. 신세대의 화살이 어느 과녁을 겨냥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 물음에 간접적으로 답변을 얻을 수 있는 설문이 ‘존경하고 영향을 받은 문인들, 과대 평가되어 비판이 필요한 문인, 새롭게 조명받아야 할 문인, 마지막으로 최근에 주목하고 있는 동료문인’ 등의 질문이다. 여기에 대한 신진 작가들의 답변은 매우 흥미롭다.

먼저 젊은 비평가들의 응답이다. 이들에게 비평을 문학의 한 장르로 인식하게 해준 김현의 존재는 여전히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김현은 우리 비평사에서 비평도 문학작품임을 실천비평을 통해 확인시켜 준 비평가다. 그런데 젊은 비평가들이 김현의 비평적 작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비평을 창작의 한 장르로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비평 행위를 작품에 대한 단순한 해석과 평가만으로 인식하는 선이 아니라, 문학예술의 장내로 적극적으로 끌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비평이 지닌 매혹을 경험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비평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긍정적인 측면으로 이해된다. 시나 소설처럼 가독성을 지닌 비평이 존재할 때, 비평은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평이 창조적 비평만을 추구할 때는 텍스트에 대한 분석력과 현실에 대한 응전력을 방기할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젊은 비평가들이 존경하고 영향을 받은 자들이 텍스트를 현실과 관련시켜 구심적이면서 원심적으로 꼼꼼하게 읽는 김우창이나 유종호 같은 비평가들과 현실 인식과 예술성을 함께 보여주는 황석영 같은 작가들이란 점이다. 이런 비평가나 작가들의 영향권을 무시할 수 없다면, 이들이 생산할 비평적 작업의 방향은 일방적으로 텍스트 자체에 함몰되거나 텍스트가 현실 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전락되지는 않을 것이다.

젊은 비평가들이 자기세대의 문인으로 전성태에 주목하고 있는 점도 이런 측면에서는 이해되는 대목이다. 그의 소설이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리얼리즘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성과 함께 새로운 소설미학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비평가들의 고민은 자기세대의 모든 작가나 시인들이 문학성과 함께 현실성이 잘 융합된 작품만을 만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젊은 시인들의 설문응답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한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만난다.

시인들의 응답에서, 자신들이 영향을 받은 시인들의 공통된 사항은 치열성과 실험성이다. 현존하거나 작고한 시인 중 영향을 많이 받은 시인들은 이성복, 김혜순, 백석, 김수영, 이상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들에게서는 현실성의 문제를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세대의 주목받는 시인으로 오면, 시의 경향은 실험성을 지닌 쪽으로 기울어진다.

젊은 시인들은 김경주, 황병승, 김행숙 등을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시가 지닌 상상력을 통한 실험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의 영역에서 실험성 짙은 작품들이 성행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소위 리얼리즘 시의 경향이나 서정시 계열의 시인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이미 주류에서 멀찌감치 밀려나 있는 형편이다. 영향을 받은 외국 문인으로 보르헤스나 보들레르를 우선 들고 있다는 점도 이들이 시에서 상상력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과장 평가된 시인의 첫 자리에 고은 시인을 두고 있음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젊은 시인들이 내세우는 새로운 형식과 실험 정신을 소위 미래파라고 명명하며, 그 가능성을 긍정하는 논의들이 일고 있지만, 아직 소통의 시문법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문학 위기론의 가장 큰 이유로 젊은 문인들 역시 독서인구 감소에 의한 문학시장의 협소 침체로 들고 있는데, 시의 영역에서 시도되고 있는 실험시들이 지닌 소통불능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이런 현실적인 과제를 풀기 힘들기 때문이다.

소설가들의 응답에서는 시에서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본다. 영향을 받은 주요 작가로 김승옥, 오정희, 조세희, 이상 등을 들고 있다는 것은, 젊은 작가들의 문학적 의식의 근저가 현실에 뿌리를 내린 상상력을 통한 소설미학을 추구한 작가들에 가닿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젊은 작가들이 자기세대의 작가로 주목하는 대상을 살펴보면, 김애란, 김중혁 등에 관심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 방식에 더 비중을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민석, 김윤영 등 자기세대의 젊은 작가를 새롭게 조명해야 할  대상 작가로 내세우는 것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된다.

설문 응답에 나타난 결과들의 개관을 마치면서 내리는 결론은, 젊은 문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지향점은 새로움이란 것이다. 이 새로움의 추구는 새로운 세대가 응당 져야할 작가의 몫이다. 자기세대의 문학판을 만들어 가야 하는 숙명을 지닌 자들이 문인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새로움의 추구가 오늘의 현실 속에서 얼마나 진정성을 지니는 작품으로 읽히느냐 하는 점이다.(남송우 / 부경대, 국문학)

[특집] 신진문인 의식조사(2)소설가

젊은 작가들은 아고타 크리스토프, 파스칼 키냐르, 레이먼드 카버에서 오르한 파묵, 살만 루시디, 프랑코 모레티, 척 폴라닉까지 퍽 다양한 독서편력을 보여줬다. 선호하는 국내 문인도 박상륭에서 김승옥, 오정희, 이인성, 장정일, 천운영 등 범주가 넓다.

그러나 “문학사적으로 과대평가된 외국 문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7명이 공통으로 “하루키”를 꼽았다. 응답자들은 하루키에 대해 “초기작은 좋은데 후기로 갈수록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아쉬움 겸 불만을 표했다. 이는 그만큼 “하루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그들의 삶”과 연관되는 부분일 수도 있다. 몇몇 작가들은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하루키를 꼽기도 했다.

현존 국내 문인 중 ‘과대평가된 문인’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이는 이문열이다. “작품의 질에 비해 지나친 문학 권력을 보유”했고, “매체들이 ‘위대한 작가’라고 칭송해 반감이 든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의 문학에서 ‘문학적인 무엇’을 바라는 일에 회의적”이며 문학 자체에 대한 “정밀한, 문학적 평가가 필요하다”고 답했다.(*하루키와 이문열에 대한 평가는 상식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춘원 이광수 또한 3명이 ‘비판이 필요한 문인’으로 꼽았다.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과장된 수사로 점철된 문인”이라는 것. 김동인에 대해서도 2명의 작가가 “작가적 이데올로기의 실체가 보이지 않”고 “습작기적 자태를 벗어나지 못한 수준”이라고 평했다. 비교적 젊은 문인으로는 소설가 한강이 “특색이 없”어 “간혹 ‘누구의 목소리’인지 헷갈린다”고 언급됐으며, 김영하에 대해서도 “그의 문학에는 시대적 진정성이 없으며 그것은 전략적으로 제거된 것이 아니라 김영하 자체의 불완전함 때문이다”라는 일침이 가해졌다(*김영하에 대한 평가도 상식적이다. 다만, 한강에 대해서는 내가 별로 읽어본 바 없어서 잘 모르겠다. 최근에 읽은 그녀의 단편은 수작이었다).

문학적으로 새롭게 조명해야 할 문인에는 세 명의 작가가 이승우를 거론했다. 이승우는 영향을 많이 미친 작가로 거론되기도 했다. 1981년 스물 한 살에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등단한 그는 이후 <생의 이면> 등의 작품을 통해 지속적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이를 작품을 통해 명쾌하게 결론내린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의 소설이 가볍지 않아서인지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는 않은 편이고, 평단에서도 인기 주제는 아니었다. 이외에 젊은 작가들은 제3세계 문학에 목말라했다.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문학에 대해서는 알려고 해도 방법이 없다”며 보다 많은 번역·연구·관심을 주문했다.

“주목하는 동료 문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5명이 ‘김중혁’을 꼽았다. 한 작가는 김중혁에 대해 “작품의 소재는 아날로그적인데 이것이 또 디지털적이기도 하다”며 “디지털 요소와 아날로그적 요소가 잘 결합돼 있다”라고 밝혔다. 이는 작가적 테크닉에 대한 부러움으로 보인다. 평론가 김형중은 “기능적 가치로부터 해방된 사물들을 작품 속에 수집함으로써 인간까지 해방시킨다”고 ‘김중혁 論’을 펼친 바 있다(*<문학동네>의 가을호 특집이 김중혁을 다루고 있다. 젊은 세대, 혹은 '레고블록 세대'의 감성이 나와 다르다는 걸 알겠다).

<달려라 아비>의 주인공 김애란은 주목받는 만큼 평이 엇갈렸다. “젊고, 잘 쓰고, 인기많은” 김애란에 대해 몇몇 작가들은 “지금의 평가는 80년대 출생이라는 문학 외적 사실, ‘아버지를 부정하는 방식’에만 과도하게 치중됐다”라거나 “잘 읽힌다는 점으로 과하게 주목받고 있다”라며 ‘김애란’ 자체보다는 ‘김애란’에 과도하게 주목하는 평단을 비판했다(*김애란은 주목할 만한 작가이다. 다만, 평단의 그 주목이 다른 작가들에게도 두루 할애되고 있지 않다는 건 문제를 제기할 만하다). 

신예 작가들은 몇몇 작가들에게만 주목하는 비평에 불만이 많았다. 한 작가는 “새롭게 조명해야 하는 문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조명은 누가 하는 것이냐”라는 근본적 문제를 제기했다. “조명 자체가 문학이라는 사건을 ‘무대화’시키는 것이며 누군가를 새롭게 조명하기보다는 조명받을 기회조차 없는 신인들에게 눈길을 돌려야 한다”라고 말했다(*문학판 또한 얼마간은 '스타 시스템'에 의존한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문학판은 자본주의 체제 바깥에 따로 있는 게 아니니까).

또한 ‘문학적으로 새롭게 조명해야 하는 문인’으로 공선옥과 전성태를 꼽은 한 작가는 “비평가들이 자신들의 지평에서 담론을 펼치기 쉽거나 혹은 적합한 문학에만 먼저, 자주 손을 대는 경향이 있다”며 “김영하, 성석제, 전경린, 배수아 등이 그런 점에서 많이 노출된 반면, 훨씬 공력이 높은 공선옥, 전성태 등은 비춰지지 않는다”며 비판했다. 문학의 위기를 초래하는 내적 요인으로 “몇몇 문예지와 비평가 중심으로 문학 판도가 좌우되는 것”을 꼽기도 했다(*공선옥에 대해서는 판단유보이지만, 전성태가 공들인 작품들을 쓴다는 건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

‘한국 문학 위기론의 이유’에 대해 신진 소설가들은 “독서인구 감소에 따른 문학 시장 협소”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 외에 “문학을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는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 “왜 한국 문학을 접해야 하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하는 현 교육 시스템의 결함”을 꼽기도 했다. 그러나 “문학의 위기란 문학 내생적인 것”, “세계문학사에 비춰보더라도 한국문학은 이제 시작인데 위기라고 생각하는 인식 자체가 문제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문학이란 더 이상 ‘위기’라고 부를 만큼 커다란 것이 아니며 개인적인 향유와 소통의 차원의 것이다”라는 답변도 나왔다.(박수진 기자)

[특집]신진문인 의식조사 (3)시인

젊은 시인들은 공교롭게도 애증의 사제지간으로 얽힌 고은과 서정주를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시인으로 평가했다(*이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이다. 고은에 대한 평가에는 나도 동의한다). 한편, 주목하는 동료시인으로는 황병승과 김경주를 많이 꼽았다. 2000년 이후 등단한 시인을 중심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현존하는 작가 중에서 과대평가된 시인으로는 4명중 1명이 고은을 꼽았다. 이는 설문조사 문항 자체가 보기 없이 주관식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젊은 작가들의 일반적인 인식으로 여겨진다.

고은 다음으로 이문열, 김영하, 신경숙 등 기존 문단에서 문학성과 상업성을 겸비했다고 인정받던 소설가들이 각각 2명으로부터 “과대평가 됐다”고 거론됐다. 작고한 문인으로는 “작품성보다는 권력 편에 선 삶의 과오가 컸다”는 이유로 5명이 서정주를 지목했다. 전세대를 매료시킨 서정주의 미학적 魔力은 통하지 않았다. 이 외에 기형도와 윤동주(3명), 김소월·한용운(2명) 순으로 나타났다. 교과서 첫머리를 장식하는 이들이 젊은 시인들의 의식 속에서는 ‘제대로 청산해야 할 과거’가 되고 있었다. 

70~80년대 민중시단을 선도했고, 한때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던 고은을 과대평가 됐다고 평가한 주된 이유는 “목청과 활동반경에 비해 그다지 개성적이거나 뚜렷한 문학적 성과를 남겼다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창비가 만들어낸 가장 대표적인 '신화'가 아닌가도 여겨진다). 실제 작품보다 ‘주변인’들의 주관적 평이 고은의 ‘이미지’를 굳혔다는 얘기며, 나아가 “근작들이 매너리즘에 빠져있다”는 혹평도 더러 있었다. 시인 서정주는 “작품성만으로 평가하기에는 민족에 대한 과오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과대평가된 문인에 올랐다. 이처럼 신인들은 ‘민족’을 중요시 여겼다.

결국 고은과 서정주는 사회적 활동이 작품을 압도한 경우로 해석된다. 기형도에 대해서는 “요절시집에 붙은 문학평론가 김현의 해설이 크게 작용”했고 이후 “요절의 상징이 됐다”, “작품의 폭이 넓지 않고, 암울하며 서술적이다”는 평가가 주어졌다. 한 응답자는 시인 진이정이 기형도 못지 않게 뛰어나지만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기형도와 진이정에 대해서는 나도 짤막한 페이퍼를 쓴 바 있는데, '기형도 못지 않게 뛰어난 진징정'이란 평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윤동주에 대해서는 “유약한 센티멘털리즘에 도취된 청춘”, “혁명가와  저항시”라는 수식어가 과장됐다는 평가다. 외국 작가로는 “태작이 많고, 상업추수주의”인 점을 들어 무라카미 하루키(4명)와 무라카미 류(2명)를 꼽았다. 작품활동을 하는 데 있어 영향을 받았거나 가장 존경하는 작가로는 백석(10명), 김수영(8명), 이성복·李箱(6명), 보르헤스(5명), 김혜순(4명), 보들레르(4명) 등을 꼽았다.

지난해 ‘시인세계’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현대시 1백년 최고의 시집으로 백석의 <사슴>이 꼽히기도 했는데, 한 젊은 시인은 “외롭고 높고 쓸쓸하지만 단단한 갈매나무”라는 싯구로 백석의 시세계를 묘사했다. 고향과 추억, 언어의 순도, 유랑자의 시선으로 백석의 시는 많은 젊은 시인을 매혹시키고 있다. 이는 도회적 시가 유행하는 현대 시단에서 젊은 시인들이 향토적 서정을 갈망하고 있다는 반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시인 김수영에 대해서는 “현실에 직면하는 詩作”, “치열함에서 오는 새로움”, “첨예한 의식으로 구성된 산문”이란 평가가 뒤따랐으며, 시인 이상에 대해서는 “치열한 부정과 혁신정신”, “실험정신과 문제의식”이란 수식어와 함께 “청소년기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고 문학정신을 배우고 싶다”며 거론됐다(*20세기 한국시는 점차 '백석이냐 김수영이냐'로 정리되는 듯하다).

현존하는 시인 가운데 젊은 시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시인 이성복에 대해서는 “문학에의 진정성이 돋보인다”, “치밀한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섬세한 감수성과 실험정신, 전통의 조화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현실에 대한 비유의 다양성과 시간초월성이 탁월한 작가”라는 추천사를 받은 보르헤스는 이 세대만의 아이콘으로 여겨졌다(*개인적으론 80년대의 이성복이 그러한 문학사적 평가를 감당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시인 김혜순에 대해서는 “초기작에 비해 최근의 시가 더 좋은 시인” , “최승자와 더불어 늙지 않는 시세계” 등 의 이유가 조심스레 들어졌다. “천상의 노래를 지상으로 끌어내린 시인”, “현대성, 현실에 가장 탄력적 반응을 보인 시인”으로는 보들레르가 꼽혔다. 이밖에도 신경림, 김지하, 박상륭, 오규원 등에 각 2명씩 답했다. 하지만 이성복과 더불어 80년대 시단을 양분했던 황지우 시인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탈-황지우'는 모처럼 눈에 띄는 현상이다).

새롭게 조명해야할 작고문인으로는 손창섭, 김종삼, 백석, 리처드 브라우티건 등을 각각 3명씩 거론했으며, 현존 작가로는 “노동과 삶의 새로운 상상력을 보여준” 시인 김신용과 “도시적 감수성에서 자연, 사물의 존재성으로 돌아간 변화에 대해 주목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오규원이, “자기철학을 운동으로 밀고 나가는 신념에 동감한다”는 이유로 김지하가 나란히 2명씩 추천됐다.

낯선 이름인 미국의 소설가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깨끗한 스타일, 전혀 다른 새로운 소설”이란 이유로  몇몇 젊은 시인으로부터 주목받았다.올 7월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 중앙)를 펴내 문단 안팎으로 주목을 받았던 시인 김경주는 동료시인들로부터 “서정과 실험이 적절히 어울어진다”, “철학적 사유가 독특하다”, “땅에 발 딛고 쓰는 시인이 없는 세상에서 대비되는 시인이다”라는 평을 얻었다. 이밖에도 김행숙, 이준규, 김애란, 진은영, 김언이 2명으로부터 추천됐다.

한편 ‘‘근대문학의 종언’에 동의하는 가’라는 질문에 젊은 시인들 21명은 동의하지 못한다고 답했으며, 12명은 동의 내지 부분적으로 동의한다고 답했다. 기타의견 2명은 문학은 ‘종언’이기보다는 ‘항상 시작’으로 여긴다는 마음가짐으로 답을 대신했다.

‘한국문학의 위기론’을 묻는 질문에는 “독서인구 감소에 따른 문학시장의 침체화”를 들었으나, “사적 생활로 흐르는 문학적 테마”, ”해외 유명작가들 베끼기에 급급한 상상력 부족”, “매너리즘 답습” 등도 문학을 위태롭게 하는 요인으로 파악됐다. “인터넷 문화 약진으로 인한 문학의 위상 변화”, “변화에 인색한 문단”, “편가르기와 특정작가와 평론가의 상호인정으로 인한 권위 독점”, “저질 작품 과잉생산” 등의 의견도 잇달았다. 하지만 “위기론은 일상적 수사일 뿐, 한국문학은 독자와 너무 많은 소통을 원하는 건 아닌가”, “자본주의 구도에서 자리변화일 뿐 생산담론 형성이 더 중요하다”는 등의 희망적 견해도 있었다.

젊은 시인들의 주요 창작 모티프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화해’ 및 ‘독서’가 가장 많았다. 독서는 대부분 문학 외에 철학서와 예술, 영화관련서들을 많이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상의 모든 것이 모티프”라고 말한 시인도 있었다.(신정민 기자)

[특집]신진문인 의식조사 (4)평론가

30대 젊은 문학평론가들은 현존 문인 가운데 소설가 이문열과 무라카미 하루키를, 작고한 문인 중에서는 시인 李箱과 서정주를 과대 평가된 문인으로 꼽았다. 최근 가장 주목하고 있는 문인으로는 소설가 전성태와 시인 황병승을 추천한 평론가들이 많았다. 이번 교수신문이 실시한 의식조사에서 문학평론가는 모두 31명이 참가했다. 30대를 중심으로 40대 초반까지 평단에서는 젊은 편에 속하는 평론가들이다.

문학평론가 31명 가운데 7명은 국내, 국외에서 과대평가된 문인으로 각각 이문열과 무라카미 하루키를 들었다. 소설가 이문열은 △정치적 발언의 의미 파장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의 결여 △초기의 탁월한 미적 재능이 단조롭고 틀에 박힌 정치적 의식으로 더 이상 전개되지 못한 점 △정신과 지향의 불구성 △봉건성 등 주로 보수 우파의 입장을 대변했던 정치적 행보에 따른 ‘과대평가’ 요인이 많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는 지나친 상업성에 대한 지적이 많았는데 상품으로서의 문학, 세계시장과 문학의 관계에서 그가 미친 영향에 대한 성찰 필요, 일시적 유행 모드라는 지적이었다. 20살 초반의 감수성에 기댈 뿐이라는 혹평도 있었다.
이문열에 이어 고은(3명), 문태준(2명), 신경숙(2명), 공지영(2명)도 과대평가 문인으로 꼽혔으며, 답변이 적었던 외국에서는 하루키 외에 귄터 그라스(2명)도 비판이 필요하다는 응답이었다.

작고한 시인 李箱과 서정주는 각각 5명이 ‘과대평가’ 됐다고 말했다. 李箱은 그의 시세계에 대한 납득할만한 해명과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인식이 많았고, 작품에 대한 신비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서정주는 친일 행각과 전두환 정권 찬양 등 현실을 외면하거나 현실에 영합하는 태도와 문학권력에 의해 그의 작품들이 교과서를 비롯 대중들에게 많이 소개되는 바람에 다른 뛰어난 시인들의 작품이 사장되거나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새롭게 조명해야 할 문인으로 소설가 박태순이 유일하게 중복(2명) 답변이 나왔고, 공선옥, 김애란, 배수아, 임헌영, 장정일 등 23명이 거명됐다. 작고한 문인 가운데서는 김사량, 김종삼, 김소진이 각각 2명씩 의견이 모였다. 이태준 등 월북 작가 재평가 지적도 빠지지 않았다. 특히 김사량은 식민지적 삶의 극단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문학적 성과에 비해 전집조차 발간되지 못한 상황이 한심스럽다는 평가가 나왔다.

평론가들이 최근에 가장 주목하고 있는 문인으로 꼽힌 소설가 전성태(3명)는 종전의 리얼리즘과는 달리 그의 소설은 환상을 품고, 공간도 한반도에 국한시키지 않는 다른 가능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크게 봤다. 여전한 문제의식을 다른 각도로 볼 여지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 모순의 진중한 고민도 한몫을 했고, 전통의 창조적 계승을 이유로 들었다.

시인 황병승(3명)도 주목하고 있었는데 시의 새로움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시의 정치성에 대해 새롭게 사고하게 해준다고 평가했다. 한 평론가는 “시는 황병승 전후로 나뉜다”라고 극찬했다. 생물학적 성을 넘어선 여성적인 비평, 폭넓은 교양과 작품을 보는 깊은 눈과 유려한 문체 등을 이유로 신진 평론가 신형철(2명)도 주목을 받았다.

문학평론가들이 시인, 소설가와 달리 가장 두드러진 의식을 드러낸 것은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데 대한 동의 여부 였다. 소설가는 동의한다는 입장이 앞섰고, 시인은 두 배 정도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으나 평론가들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답변(21명)이 ‘동의한다’는 답변(4명)보다 압도적이었다(*나로선 동의한다는 쪽이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 자체가 고진의 관점에 원용하자면 이미 근대문학의 종언을 함축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제기의 진정성엔 동의할 수 있지만 한국적 맥락에서 굴절돼 논의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가타라니식 의제 설정 자체에 동의하기 힘들다는 이유를 제시했다.

‘한국문학 위기’의 원인을 묻는 질문엔 낯익은 비판들이 쏟아졌다. ‘독서인구 감소에 따른 문학시장의 협소·침체화’를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으나 기타 의견도 많았다. “위기를 늘 품고 있어야 모색도 치열해 질 수 있다는 문인들의 자기 암시도 한몫을 한다”, “문학만 위기일까”를 들기도 했다. 또, 문학의 권력화와 아카데미화(대학중심의 문학판)에서 찾을 수 있다는 지적도 어김없이 나왔다. “절대적인 독서 인구는 결코 줄지 않았다. 한국문학은 지식독자층 뿐만 아니라 대중으로부터도 ‘왕따’를 당하고 있다. 작가들은 대학교수(평론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품을 쓰고, 평론가는 그 장단을 맞추고, 그들이 쓴 평론(논문)은 오직 그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만 읽힐 뿐”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문학평론가들이 가장 존경하고 영향을 받은 선배 문인으로 황석영(4명)이 가장 많이꼽혔다. 다음으로 유종호, 오정희가 3명씩, 김우창, 백낙청, 조세희, 최인훈도 2명씩 응답했다. 외국의 문인 중에서는 밀란 쿤데라(4명), 가라타니 고진(2명), 귄터 그라스(2명), 마르께스(2명)가 ‘영향’을 많이 끼친 것으로 나타났다. 작고한 문인중에서는 ‘비평도 문학작품임을 일깨워 준’ 김현이 6명으로부터 헌사를 받았다.(김봉억 기자)

설문에 참여해주신 분들
고인환, 권오현, 김나정, 김대산, 김동윤, 김미정, 김양선, 김영찬, 김정남, 김종욱, 김형중, 류신, 복도훈, 안미영, 엄경희, 오윤호, 오창은, 이경수, 이선영, 이성혁, 이수형, 이재영, 이현식, 이희환, 장일구, 정재림, 조강석, 허병식, 허윤진 이상 30명. 가나다순.

06. 09. 23-24.

 

 

 

 

P.S. 결론 삼아, 젊은 문인들이 주목하는 동세대 작가/시인들을 꼽아보자면, 소설가로는 김중혁과 김애란(비록 논란의 대상이지만)이 대표주자라 할 만하다. 더불어, 앞세대 작가로서 <생의 이면>의 작가 이승우가 시에서의 이성복만큼 높이 평가된 것은 이 설문의 '수확'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평론가들이 주목하는 작가로 전성태, 시에서 황병승이 꼽힌 것은 수긍할 만하다. 김경주 시인이 거론된 것이 뜻밖인데, 내가 아직 접해보지 않은 유일한 시인이어서 그렇다(참고로, 최근에 내가 주목한 작가/시인은 백가흠과 이근화이다). 맛보기로 한 편을 인용해놓는다. 이게 또 왜 목련인가?!..

목련

마루에 누워 자고 일어난다
십 이년동안 자취(自取)했다

삶이 영혼의 청중들이라고
생각한 이후
단 한번만 사랑하고자 했으나
이 세상에 그늘로 자취하다가 간 나무와
인연을 맺는 일 또한 습하다
문득 목련은 그때 핀다

저 목련의 발가락들이 내 연인(戀人)들을 기웃거렸다
이사 때마다 기차의 화물칸에 실어온 자전거처럼
나는 그 바람에 다시 접근한다
얼마나 많은 거미들이
나무의 성대에서 입을 벌리고 말라가고서야
꽃은 넘어오는 것인가
화상은 외상이 아니라 내상이다
문득 목련은 그때 보인다

이빨을 빨갛게 적시던 사랑이여
목련의 그늘이 너무 뜨거워서 우는가

나무에 목을 걸고 죽은 꽃을 본다
인질을 놓아주듯이 목련은
꽃잎의 목을 또 조용히 놓아준다
그늘이 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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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3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9-23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제가 가끔은 부지런을 떨지요. 요즘은 옮겨오는 걸 자제하는 편인데, 용케도 맞히셨네요.^^

닉네임을뭐라하지 2006-09-23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봤습니다- 퍼갈게용

끼사스 2006-09-24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는 기사네요. 퍼가겠습니다.

비로그인 2006-09-25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요즘 나오는 시인이나 소설가는 단 한명도 없습니다. 오히려 일본작가들을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자조와 쓴 웃음이 맘에 번집니다. 대학시절 시인 장정일과 이성복을 좋아해 그들의 시집은 아직도 다 가지고 있지요. 서울대 나온 이성복은 제대로 대접받는 것 같은데 아직도 시인 장정일은 아니네요. 서글프군요 현실이. 꽤 친하게 지냈던 교수님조차 장정일을 너절한 시인쯤 알고 있었는데 15년이 지난 지금도 시인 장정일의 위치는 아직도 갈팡질팡이군요 끝에 써 놓은 시 누구시입니까 ?

로쟈 2006-09-25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어놓은 대로, 김경주 시인의 시입니다...

니브리티 2006-09-25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도 황당한 질문에 명쾌한 정리더군요.

sommer 2006-09-27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의 존재론과 시인의 존재론이 가능하다면, 위에서 보이는 젊은 문인들의 '고백'은 그 둘이 분간 안 되게 겹쳐서 나타난다는 게 인상적이네요. 더불어 그들의 대답으로 잠재적인 문제/질문을 구성해 보는 것도 흥미있어 뵈네요. 이를테면, 문학판에 들어서기 전과 후의 심경의 변화, '한때'와 '지금'의 차이, 소년에서 어른이 되고 난 뒤의 판단의 변화 등등으로 말이죠.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그들은 일종의 '고백'의 형식을 빌어서 말하고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