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잖은 제목을 달긴 했지만 원제는 '역자에게 멱살잡힌 사연'이라는 '출판인의 편지'이며, 철학 전문출판사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이제이북스 전응주 사장의 글이다(전사장의 언론 인터뷰를 이전에 옮겨놓은 기억이 있다). 재작년 여름 교수신문에 게재됐던 것인데(그러니까 내가 한국에 있지 않을 때이다) 뒤늦게 옮겨놓는 것은 담뽀뽀님의 서재에 옮겨진 걸 보고서 '번역 관련'인지라 많은 분들과 공유해도 괜찮겠다고 판단해서이다. (인문서) 번역 출판에서의 역자와 편집자간의 관계와 윤리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보도록 하는 글이기에.  

교수신문(04. 08. 26) 역자에게 멱살잡힌 사연

번역서의 경우, 책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역자다. 편집자의 역할은 역자에게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고, 윤문을 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번역과 편집이라는 것이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작업이고 내용을 놓고서 따지는 일이다보니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번역이 바라는 정도의 완성도를 갖추지 못한 채 편집자에게 넘어오는 경우, 편집자는 고심해서 결단을 내려야한다. 문제 있는 부분을 다시 번역하거나, 새로운 역자를 찾든지, 아니면 어는 정도 수위에서 교열작업을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번역자와 편집자 사이에 마찰이 생기기 마련인데, 제대로 책을 내자는 뜻을 서로 잘 이해해 별다른 대립이나 갈등이 없이 작업이 이루어지면 다행이지만, 서로의 자존심 내지 자신의 의견에 대한 고집 때문에 불편한 관계에서 작업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책이 나오더라도 감정의 앙금이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며, 책의 완성도도 떨어진다.

 

 

  

 


50여종의 번역서를 내는 동안 겪은 몇 가지 경우를 말하려 한다. 먼저 <헤겔 또는 스피노자>를 번역하신 진태원 선생을 들고 싶다. 번역자의 원고가 너무나도 공을 들인 결과물이었고, 그 분야를 전공한 사람에게 외주교열자 역시 최선을 다해 부족한 부분을 보충했기에, 편집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교정과 윤문을 하면서 번역자와 의견을 교환했으며, 결과도 만족스러웠다. 사실 번역자는 번역이 끝난 후 주변의 동료들과 번역을 같이 읽고서 내용과 용어를 여러 번 고친 후 출판사에 원고를 넘겼던 것이다. 이는 분명 번역자와 편집자가 이상적으로 작업을 한 경우이며, 그 이후 2종의 책을 번역하고 있다(*현재까지 출간된 건 <헤겔 또는 스피노자>와 <스피노자와 정치> 두 권이다. 곧 한권 더 출간되는 것인지?).

이와 달리, <서양 철학사>의 경우 어떤 번역자의 원고는 거칠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빠진 부분도 있으며 앞뒤의 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이 있는 상태로 넘어왔다. 빠진 부분들을 채우고 내용상 문제 있는 부분들을 고치면서 번역자와 직접 만나 내용을 고치거나 몇 번 교정지가 오고갔으나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별수 없이 편집진이 달라붙어 하나하나 다시 고치기 시작했고, 몇 달에 걸쳐 작업이 끝났을 때는 사실상 새로 번역한거나 진배없었다. 이 과정에서 번역자의 후배이기도한 편집자는 멱살까지 잡히는 일도 겪었다.

(*)거명된 <서양철학사>는 앤서니 케니가 공저자들고 함께 엮어낸 욕스포드판 철학 개론서이다. 나는 이 글과 무관하게 이 번역서에 문제가 좀 있다는 이야기를 접했었고 당연히 구입하지 않았었다. 참고로 케니가 단독으로 쓴 <서양철학사>(동문선, 2003)도 번역/출간돼 있다. 알라딘의 리뷰에 따르면, 칸트의 정언명령을 "다만 당신이 할 수 있는 동시에 하게 될 처세법에 따라서 그것이 보편법칙이 될 것을 행동하라", "자신의 몸에 대해서건 다른 사람들의 몸에 대해서건, 언제나 인류를 다루는 방식으로, 수단으로 뿐만 아니라 늘 목적으로 그렇게 행동하시오"라는 식으로 '독특하게' 번역해놓은 만큼 역시나 손에 집어드는 데에는 무모한 용기와 남아도는 돈이 필요한 책으로 보이지만.

번역자도 편집자도 서로 책임을 회피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으며, 결국 대표인 내가 최종 책임을 지고 직접 교열 작업에 들어갔으며, 약 8개월이 소요되었다. 번역자 중 몇몇은 예전부터 꽤나 가깝게 지내던 사이인데, 이 일로 지금까지도 소원하다. 최악의 경우는 도저히 번역이라고 말할 수 없는 원문에는 없는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진 창작물로 원고를 넘긴 경우로, 고심 끝에 계약을 파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새로이 번역을 맡기게 되었다. 처음의 번역자의 이름으로 책을 낸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경우였으며, 아직 그 책은 출간되지 못하고 번역 중이다. 번역자와 편집자 둘 다 이 일을 떠올리며 몹시 불쾌해하고 있을 것이다(*절친한 사이라면 서로간에 번역과 편집을 맡지 말아야 하는 모양이다. 친구끼리 빚보증 서지 않는 것처럼).

번역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대체적으로 번역자는 해당 분야를 어느 정도 이상 공부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번역한 것이 최고이며, 편집자 누구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그런 아집을 가지지 않기를 바란다. 편집자를 완성도 높은 책이 나오기까지의 동반자로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진정 좋은 책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나오는 번역이니만큼, 번역에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번역에 임하기를 부탁드린다. 번역은 몹시 힘든 작업이다. 번역자의 노고에 비추어볼 때, 번역자가 받게 되는 보상은 분명 적다. 하지만 보상은 적지만 번역자가 보람을 느끼게 되는 일은, 편집자와 호흡을 맞춘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이것을 실현하는 것이 편집자의 행복일 것이다(*요컨대, 편집자가 행복한 나라, 그게 번역/출판의 선진국이다!).

06.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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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10-18 00:47   좋아요 0 | URL
진선생님의 이름을 보게 되는군요. ^^

로쟈 2006-10-18 01:08   좋아요 0 | URL
지금쯤은 아마 파리에 가 계시겠네요...

바라 2006-10-18 04:04   좋아요 0 | URL
또 나올 그 한권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일지도 모르겠네요...

자꾸때리다 2006-10-18 09:42   좋아요 0 | URL
아직 한국에 있사옵니다.

로쟈 2006-10-18 16:03   좋아요 0 | URL
바라님/ 제 짐작에도 그런 거 같습니다. 고대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완소지윤님/ 잘 아시나 보네요. 북핵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는 건가요...

자꾸때리다 2006-11-25 00:00   좋아요 0 | URL



왜 이렇게 거짓말이 하나의 진실로서 난무하고 그것을 마치 사실처럼 믿고 거기에다 의미까지 부여하는 멍청한 놈이 나타나는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 그는 지독한 열등감이 사로잡힌, 그러나 매우 똑똑한 자였다고 기억한다. 그가 출판사를 열었을 때 아마도 모두가 마치 자신의 일처럼 그것을 좋아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념으로 여럿이 철학사 책 하나를 번역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당연히 출판계약을 한 적도 없었고, 번역료를 인세로 할 것인지, 아니면 매절로 할 것인지, 매절로 한다면 얼마나 할 것인지조차 계약을 한 적이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사실 그런 것들을 따질 필요도 없는 그런 관계였다.




번역 원고는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제 날짜에 맞추어 진행되었다. 원문과 확인하여 틀린 부분이 있으면 수정하면서 우리말로 읽히지 않는 것을 우리말에 맞게 고쳤다면 이 원고가 책으로 나오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번역된 원고를 자기 입맛에 맞추어 고치기 시작했다. 고친 원고의 내용이 틀린 부분이 생겨나 다시 고쳐야 하는 경우도 일어났다. 그런 <헛수고>를 하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하여튼 예상보다 어렵게 책이 나왔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났던가 <교수신문>에 번역자와 편집자에 관련된 그와 관련된 기사가 실렸다. 그 내용은 선배인 번역자의 하나가 후배인 편집자의 멱살을 잡았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꾸며 만드는 놈이나 이야기를 퍼 나르는 놈이나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놈들이 이 기사의 내용을 거의 사실로서 간주한다. 이야기를 꾸며 내는 놈은 지가 꾸며 내면서 마치 이 이야기가 사실인 것처럼 여길 수도 있겠다. 이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놈은 마치 자신이 이 책을 사지 않은 것이 이 책의 번역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따라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사실처럼 확신하고 있다. 게다가 고약한 것이 이 책의 원래 편집책임을 맡은 철학자의 다른 번역서의 오역까지 지적함으로써 읽기에 따라 이 책이 오역의 온상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호기심이 강한 멍청한 인간들이 이 꾸며진 이야기가 감명을 받거나 흥분하면서 마치 진리인 것처럼 간주하고 있다.




번역에 관여 했던 한 사람은 그를 고발하겠다고 흥분했다. 고발의 이유는 인신공격이며, 없는 사실을 마치 있는 사실처럼 날조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이 책은 편집책임을 맡은 철학자나 그 글을 쓴 몇몇 철학자가 대단히 유명한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좋은 책은 아니다. 책 가운데 나오는 멋있는 사진이나 그림을 제외하면 그 책이 일반 독자를 의도하는 것인지 전문가를 의도하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 게다가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번역 부분은 사실 원문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렇게 되어 있다. 원문이 제대로 이해될 수 없게 되어 있으니 번역을 해보았자 우리말로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적절하게 되어 있지 않은 원문조차 고쳐 나가면서 번역을 했더라면 훨씬 좋아질 수 있지만, 그러나 이런 종류의 책에 그러한 수고를 해야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번역을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책의 성격을 정확하게 지적한 역자 서문조차 그 출판사는 아무런 허락도 없이 바꾸어 버렸다. 한 마디로 그 바뀐 내용은 그 책이 최고의 철학사 책이라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출판사가 임의로 바꾸어 버린 내용에 대해서 책임을 질 필요가 없고 다만 거기 이름이 박힌 역자들이 책임을 진다는 사실이다.




매우 오래 동안 나는 그와 친교를 맺어 왔지만, 바로 이 일 때문에 그를 다시 만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교수신문>에서 꾸며낸 이야기처럼 번역과 관련된 그 일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잘못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그의 성향이 싫었고, 친한 사람에게 오히려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기본적 품격조차 그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만나 이야기하기에도 바쁜 세상에 인간 아닌 것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것은 참으로 시간 낭비일 것이다. 출판사를 만들 때부터 철학책을 간행하자고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상업적인 이유를 제시하면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내 기억으로는 죽어도 철학책을 내지 않겠다는 그가 마치 몇몇 고전적 철학책을 간행한 후에 인문학 부흥의 기수처럼 신문에서 평가받는다. 흘러간 가수의 노래, <거짓말이야>라는 것이 유치하게도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게다가 여기에 놀아나는 소위 인터넷 <먹물>들의 거짓말과 허풍이 참으로 비지성적이다. 이 꾸민 이야기에 감격하는 그대여, 인터넷 공간에서 사기 치지 말고 공부하라.

자꾸때리다 2006-11-25 00:00   좋아요 0 | URL
김영건 선생의 글입니다.

로쟈 2006-11-25 00:41   좋아요 0 | URL
정확한 출처를 밝혀주시면 좋겠네요. 친한/친했던 사람들끼리의 티격태격은 관심사가 아니고 독자로선 어떤 책이 제값을 하는 것이지만 궁금할 따름입니다. 역자들 스스로가 별로 좋은 책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실 (일반 독자로선) 오역이냐 아니냐도 별 문제일 거 같습니다...

페일레스 2006-11-25 05:21   좋아요 0 | URL
http://blog.naver.com/sellars/100031118805 완소지윤님이 퍼오신 글의 출처입니다. 얼마 전에 저 책에 대해서(정확히 말하면 저 기사에 대해서) armarius.net에서 좀 얘기가 있었습니다. 저 블로그가 김영건님의 블로그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6-11-26 13:3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amarius.net에서의 '얘기'는 못 찾겠군요. 여하튼 '동업자들'끼리 '친구'가 되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요...

Octopus 2007-08-12 13:17   좋아요 0 | URL
음 이런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이런 상황을 방지하려면 시스템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만약에 출판사가 역자를 보는 안목이 있다면(또는 자기 입맛에 맞는 역자를 고를 안목이 있다면), 아니면 적어도 출판사측에 체계적인 계약 원칙이 있어서 먼저 원고의 한 꼭지를 받아보고 그 원고에 대해 평가한 뒤 역자와 서로 대화를 나눠보고 나서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한다든가, 미리 받아본 꼭지가 오케이 나올 수준일 경우 공동의 번역-교정 원칙을 먼저 정한 다음에 이후 계약과 작업을 진행한다면 이런 일은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겠습니다. 위의 경우 아마도 번역원고에도 문제가 있었겠지만 저로서는 먼저 한국의 후진적인 출판 시스템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출판사로서는 좋은 역자 만나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겠지만 도돌이로 역자가 좋은 출판사를 만나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니깐요. 일도 지지리 못하는데다 함부로 전횡 부리는 출판사도 많습니다.

사실 좋은 역자보다 더 귀하고 높이 쳐주어야할 것은 안목있고 유능한 편집자입니다. 대학이 좋은 번역자를 길러내지 못하는 한 좋은 역자를 발굴하고 북돋워주는 것(공동 작업, 높은 원고료)은 좋은 편집자와 출판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위 책은 공동 필자의 개론서 같은데, 번역도 공동역으로 여러 분이 나눠 하셨군요. 이런 경우 말썽이 날 가능성이 정말 높죠. 보통 이렇게 학계 인맥에 대충 기대서 기획하고 번역되는 책들은 원고나 출판 과정에 문제가 있어도 인간관계 때문에 출판사에서 대충 넘어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위 출판사 사장님은 아주 용감하게 이를 글에 발표하셨는데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그만큼 번역자들이 문제가 많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많은 부분 출판사의 책임회피로 보입니다. 애초 이런 기획 자체, 역자 선정 모두 출판사의 몫이니까요.

로쟈 2007-08-12 14:28   좋아요 0 | URL
이 페이퍼 때문에 뒤에서 욕을 먹기도 했는데, 출판사측과 역자들간의 반목이 생각보다 심각한 경우 같(았)습니다...
 

스웨덴의 전설적인 촬영감독 스벤 닉비스트(니크비스트)가 지난달 20일(현지시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다소 뒤늦게 접했다. 향년 83세이고, 외신에 따르면 그는 치매로 인한 실어증으로 치료받던 한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다. 간략한 부음기사에 따르면, 닉비스트는 거장 잉마르 베리만의 오랜 파트너로 베리만의 작품 <외침과 속삭임>, <화니와 알렉산더>로 각각 1973년과 1982년 두 차례 아카데미 촬영상을 받았다. 베리만 감독과는 1961년부터 30여년간 일했다. 그는 또 루이 말, 우디 앨런, 로만 폴란스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등 다른 거장 감독들과도 일했다. 대표작으로는 <희생>, <뉴욕 스토리>, <길버트 그레이프>, <테넌트>,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페르소나> 등이 있다." 그 중에서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물론 타르코프스키와 작업한 <희생>(1986)이다. 이 두 사람과 <희생>에 관한 몇 가지 관련자료들을 모아 고인의 삶을 추모하고자 한다. 

 

 

 

 

 

 

 

 

씨네21(01. 10. 10) 빛의 관찰자, 혹은 이미지의 모험가
- <처녀의 샘> <희생>의 스벤 닉비스트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순간,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잊게 된다. 렌즈를 통해 눈앞에 펼쳐진 작은 세상 앞에서 비로소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카메라와의 만남은 내게 유일한 즐거움이 되어주었고, 순수한 빛을 갈구하는 나의 노력은 더해갔다.”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과 느낌을 바르게 해석하여 영화의 분위기를 창출해내는 것이 촬영감독의 소임이라 여기던 스웨덴 출신 촬영감독 스벤 닉비스트는 이같은 철저한 자기집중 위에 영화의 삶을 세웠다.



근 30년 동안 그와 작업 해온 잉그마르 베리만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그립지 않지만, 그와 함께 작업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라고 자신의 시각이 되어준 닉비스트를 회상한다. 1998년 <셀리브리티> 촬영을 끝으로 실어증으로 영화계를 은퇴하고, 이제는 초로의 노인으로 묻혀 지내는 스벤 닉비스트의 모습 뒤로 어릴 적 영화에 대한 호기심에 충만한 작은 소년이 오버랩된다.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아버지는 영화를 보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고 아들이 영화관에 가는 것을 엄하게 금했다.

그러나 한번 각인된 스크린에 대한 미련은 신문배달을 하여 모은 돈으로 8mm 카메라를 장만하는 열성을 낳았고, 이후 이탈리아의 치네치타 스튜디오에서 촬영기사 생활을 시작으로 한 영화와의 인연은 53년 <톱밥과 금속조각>에서 베리만과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당시 이 둘이 이루어낸 강렬한 색채의 흑백 화면과 빛의 사용은 그 자체가 도전이자 용기를 필요로 하였으며, 평단의 달갑지 않은 시선 또한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빛에 대한 꾸준한 연구와 실험정신은 모더니즘 영화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갈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외침과 속삭임>(1974), <화니와 알렉산더>(1984)로 두번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닉비스트의 화면은 단순함에 그 기반을 둔다. 최소한의 빛과 최소한의 색으로 사실에 가까운 자연스러운 이미지를 창출해낼 수 있다는 믿음은 그의 화면 어디에서도 복잡한 조명이나 필터나 렌즈를 이용한 테크닉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이다. <겨울 빛>의 촬영 당시, 실제 교회에서 5분마다 시시각각 바뀌는 빛을 관찰하여 그 빛을 스튜디오에 세운 교회세트에 반영한 일례는 철저하게 빛을 연구하여 자연광의 효과를 내려는 의도를 잘 보여준다. 스웨덴의 음산한 숲에서 전망 좋은 경관에 이르기까지 그가 구가하는 화면은 이미 촬영에 들어가기 몇달 전부터 치밀하게 사고된 빛의 탐구에 연원한다.



유독 배우의 얼굴에 관심을 두는 촬영방식 또한 주목할 만하다. 미디엄 숏을 배제하고 대담하게 클로즈업된 화면에서 배우들의 심리상태는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콘트라스트가 강하고 번쩍거리는 조명 대신 부드럽고도 풍부한 그만의 빛은 인간 영혼의 깊은 곳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낸다. 애정과 관심으로 세밀하게 빚어낸 화면은 함께 작업을 한 배우들이 그와의 작업을 기쁘게 회상하게 만든다.

물론, 베리만과의 강렬한 인상으로 100여편이 넘는 또다른 그의 작품을 간과할 수는 없다. 우디 앨런, 로만 폴란스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필립 카우프만, 리브 울만에 이르기까지 그는 70년대 이후 스웨덴 안팎의 활동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독창적인 영상으로 한번 그와 작업을 한 감독은 또다시 그와의 작업을 기대하였다고 하며, 이는 10여분에 이르는 도입부의 롱테이크가 돋보이는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에서부터 화려한 촬영감각으로 브룩 실즈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한 루이 말의 <프리티 베이비>, 쇼비즈니스계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기에 효과적인 흑백화면을 구가한 우디 앨런의 <셀리브리티> 등에서도 잘 나타난다.



최근 그의 유려한 영상세계를 재조명한 다큐멘터리 <잉마르 베리만과 스벤 니크비스트>(Light Keeps Me Company, 2000)가 아들 칼 구스타프 닉비스트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그간 함께 일해온 동료들의 인터뷰로 조망된 79살 노장의 어깨 위에 걸린 훈장은 휘황찬란한 조명도 세인의 찬사도 아닌, 자연의 빛을 좇아 한길 영화에 바친 구도자의 모습 그대로이다. 소리없는 색채이지만 큰 울림을 자아낼 수 있는 힘, 그건 바로 빛에 대한 사랑이었다.(이화정/ 자유기고가)  

 

 

Sven Nykvist

On the Shooting of The Sacrifice

Source: "Vördnad för ljuset" (In Reverence of Light), by Sven Nykvist and Bengt Forslund. Albert Bonniers Publishing Company, ISBN 91-0-056316-1, © Nykvist/Forslund 1997. The following comprises pages 181–188 of the book (excluding all photographs), taken from the the chapter "From Tarkovskij to Woody Allen." This excerpt translated from Swedish by Trond S Trondsen of Nostalghia.com. It is translated and published here with the kind permission of the authors. A Japanese (re-)translation is provided by Kimitoshi Sato of Japan. The photo below is taken by Lars-Olof Löthwall, and is used with his permission.

  A personal motto of mine is "It is never too late." Many, as they reach the age of sixty start to feel as if they are at the end of themselves, the official retirement age is fast approaching. Thanks and goodbye.

But, those of us who are freelance and rather independent often do not think along those lines. Creativity surely doesn't cease at a certain age. Many artists, composers, authors, and filmmakers are still active will into their eighties - not to mention actors and actresses.

The fact is that I received some of my most exciting assignments, and did some of my best movies, at an age usually associated with retirement. It began with Andrej Tarkovskij's The Sacrifice, 1985, and continued the following year with Philip Kaufman's film adaptation of Milan Kundera's novel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followed by some years of cooperation with Woody Allen.

I had a great admiration for Tarkovskij (1932-1986) ever since I saw his fresco on the icon painter Andrej Rubljov. It was a true revelation to me when I saw it for the first time. Pure image magic! His exile from the Soviet Union led him, by chance, to Sweden via Italy where he in 1982 did Nostalghia with Erland Josephson in the lead role. They became good friends.

Anna-Lena Wibom of the Swedish Film Institute was also one of his long-time friends. In Cannes in 1984 Tarkovskij was invited to shoot his next film in Sweden. He had several potential film candidates, but in the end the choice fell on The Sacrifice, which was written for Erland Josephson.

My friendship with Erland, combined with Tarkovskij's admiration for Ingmar, resulted in me being asked if I wanted to be the cameraman. It was not a difficult choice at all, in spite of the fact that at the same time I was offered to shoot Out of Africa with Sidney Pollack. Erland and I even invested our artists' fees back into the film and thus became co-producers through our mutual corporation. It was not at all good business, but certain experiences are well worth the money, and, besides, I received a prestigious prize in Cannes for the film.

From a personality point of view, I and Andrej got along very well indeed. We started out by watching each other's movies. His appreciation for Bergman, and mine of his movies, caused us to muse on the many obvious differences. I could see that he obviously was not very interested in lighting. To him, of primary importance were composition, camera movements, the literally moving image.

He was not even interested in the actors. He blamed this on his shyness, combined with language difficulties. The important thing to him became choosing the correct types of people, with a particular kind of look, and to see to it that they had the right way of expressing themselves. Close-ups are also strikingly rare in Tarkovskij's movies. He preferred to see the actors' movements at a distance, almost choreographed, and alway in the center of the frame.

This caused our working relationship to be somewhat strained during the first few weeks of shooting. As opposed to in the case of Ingmar, Tarkovskij had no prior knowledge whatsoever of the location of shooting until he got there and could sit at the camera and plan and direct its movements. This would often take hours.

Add to this, that only when Tarkovskij had made up his mind on how he wanted things, could I come in and set the lighting. And since the shots at hand were more often that not extended tracking shots, things could take an inordinate amount of time. One must deal very carefully with what is only seemingly unchanging exterior lighting. In addition, there were the associated changes in image definition and contrast which the assistant cameraman had to learn to deal with.

But when the images had finally been recorded, there were as a rule a considerable amount of minutes of exposed film in the camera. It was a different way of working and the result bears witness to the fact that one way may be as good as, or better, than another. Great artists go their own ways. And the photographers role is to yield, it is always the director's wisdom that counts - if indeed he knows what he wants.

And Tarkovskij knew what he wanted. He had a scene he had dreamt about doing for a long long time, for ten years, he claimed. It was to be the final scene of The Sacrifice. The main character's house burns down to the ground before his very eyes, he apparently goes insane and is taken away in an ambulance. The entire scene was supposed to be done in one single take while the camera moves along a hundred meter long rail. We had special-effects people brought in from England as there was a requirement in place that the house burn down in eight minutes and ten seconds sharp. Otherwise the film cartridge would run out.

For an entire week this scene was meticulously rehearsed. We had decided to not shoot the scene under sunlit conditions, and so we were forced to get up at two o'clock in the morning, do a few test runs, and then to commence shooting the scene at a carefully selected moment just prior to sunrise.

Approximately half-way through the take, my assistant yells out, "Sven - the camera is losing speed! We got twenty..., now we're at sixteen frames per second! What shall we do?"

Just to be on the safe side, in case problems should arise, I had deployed another camera approximately midway along the rail, so I said, "Swap the cameras!"

Within thirty seconds he had changed the camera and we continued filming. Tarkovskij had not noticed that we had changed camera, nor had the majority of the others. They were all watching the fire, and when it was over and the ambulance had made its exit everybody cheered over the fact that everything had turned out so well.

Then I got to tell about what had happened. Tarkovskij almost cried. The film was immediately developed to see if we in spite of everything could use some of the existing material. But, there was no way. Whatever the case, it was definitely not the sequence Tarkovskij had dreamt about for all these years - and it was even supposed to be the climactic sequence of the movie.

We really didn't have the funds to re-build the house and to do a second take. Long discussions ensued, where even Erland and I were involved in our roles as co-producers. The actors were fortunately still under contract for another while. We received some additional funding through our Japanese co-producer, and in the end we all decided to give it another shot. Nothing is impossible, as Ingmar Bergman was fond of saying. It was his gang behind the camera here. The house was re-built!

This time, however, I requested of Andrej that he agree that we build two sets of rails, and that the shoot should, just to be safe, be be shot simultaneously by the two cameras mounted at slightly different elevations. For an entire day we rehearsed with both cameras to ensure that they both moved in identical manner. We shot the scene one morning when everything seemed just right, but at the same moment Andrej was about to yell "Camera!" the sun appeared.

Tarkovskij shouted, "What shall I do?"

I said, "Look, there's nothing you can do,...! The sun is coming out, the house is already on fire - and we're on our second house!"

Fortunately, it turned out just fantastic. As the smoke billowed forth from the house the sun shone right through it and generated some truly great shading on the ground. It was a lucky strike indeed that the sun appeared - entirely to our advantage, and Tarkovskij was exceedingly pleased when he saw the end result.

While certainly a stubborn perfectionist, he was also willing to be corrected, at least by people that he trusted. It turned out, actually, that he at times was remarkably bound up by what he had once learned at the Russian film school.

I recognized this exact phenomenon from my earlier cooperation with Barabas and Polanski, these also deeply affected by Eastern European film schools, perhaps the best schools in the world, with their much stricter set of ingrained rules than what is commonly found in the western world. At times there were purely practical reasons for such differences. For instance, Barabas and Polanski wanted to do fine tuning of color balance on-the-fly, directly in the camera, as opposed to later in the laboratory, which certainly is better and simpler, but then again the standards of quality at eastern laboratories were hardly the same as in the west. In this case they did yield to my suggestions.

They seem to have been taught that tracking shots should be employed as frequently as possible - I have rarely done as many tracking shots as I did with these three directors - shots which do indeed hold undeniable cinematic value. But in the case of Tarkovskij, the school had taken it so far as to even forbid the use of such a practical tool as the oblique pan.

One of the first images we were to shoot for The Sacrifice was such a shot. We were to pan across from a close-up on a glass of water and then up on Erland Josephson who was sitting at a distance away. Tarkovskij vehemently insisted on first tracking horizontally along the tabletop and subsequently vertically up to Erland, which of course took a much longer time than if we went at an angle up from the glass of water and right on to Erland's face. Only when he saw the alternate take did he admit that this was indeed the better approach.

As a rule, however, it was Tarkovskij's own visions that counted even if he at times had a hard time communicating them, partly due to the language barrier - he had to constantly work through an interpreter - but primarily due to the fact that he first and foremost wanted to communicate emotions, moods, atmosphere. By images, not by words. He wanted to impart a soul to objects and nature. Here he actually went further than Bergman ever did.

Once I understood this, it became a true delight to work with him and we ended up becoming very close friends. He also saw how my lighting had the effect of amplifying his own vision. I remember, among other things, how well we worked together when we after the shooting was completed performed the, to the movie so significant, color reduction in the laboratory. In the same way Ingmar and I did in A Passion, and he himself had done in Nostalghia, we removed from certain scenes almost sixty percent of the color content. A cameraman's work is indeed not done until there is a properly lighted and approved opening-night copy. Good lighting people in a laboratory are invaluable. Nils Melander of Film Teknik has been my great support during all my years of working in Sweden.

This my work on the color reduction on The Sacrifice eventually caused me to meet one of my big director heroes, namely the Japanese Akiro Kurosawa. There were at one time serious plans that he, Fellini, and Ingmar Bergman were to do a period movie together. Ingmar and Fellini met in Rome, but Kurosawa never showed up and in the end the movie never materialized.

Some years after The Sacrifice had been released I received an offer to shoot an industry commercial film in Japan. I had not previously had the opportunity to work there, the job was well-paid, and I saw the opportunity of perhaps running into Kurosawa. So, I took the job.

I am unfortunately a rather shy person, one who does not usually initiate making contact, so when my assignment was all but finished two weeks later, it looked like I would be going home without having met Kurosawa. But, once again, I was in luck. Kurosawa was at that time close to eighty years old (b. 1910) and was about to receive some prestigious national achievement award. A large party was being thrown in his honor. The organizing committee, which had taken notice of the fact that I was in town, actually invited me.

The Sacrifice had, as you know, been a Japanese co-production and the picture had been the object of much attention when it was first screened in Tokyo, which was only shortly prior to my visit. Kurosawa had seen the movie - and lo' and behold suddenly he was the one interested in meeting me! He absolutely wanted to know how we had managed to work out the color reduction.

As soon as we had been introduced to each other he pulled me off into a separate room where we could sit undisturbed during the dinner and discuss color reduction processes. One never forgets such an evening.

I also asked him why he never showed up in Rome. "I was too shy," he said, "Bergman and Fellini are way too big for me."

 

 




필모그래피
<셀리브리티>(Celebrity, 1998) 우디 앨런 감독
<사적인 고백>(Enskilda Samtal, 1996) 리브 울만 감독
<사랑 게임>(Something to Talk About, 1995년) 라세 할스트롬 감독
<라이프세이버>(Mixed Nuts, 1994) 노라 에프런 감독
<온리 유>(Only You, 1994) 노먼 주이슨 감독
<하버드 졸업반>(With Honors, 1994) 알렉 케쉬시안 감독
<길버트 그레이프>(What's Eating Gilbert Grape, 1993) 라세 할스트롬 감독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In Seattle, 1993) 노라 에프런 감독
<채플린>(Chaplin, 1992) 리처드 애튼버러 감독
<옥스>(Oxen, 1991) 스벤 닉비스트 감독
<뉴욕 스토리>(New York Stories, 1989) 우디 앨런, 프랜시드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시즈 감독
<범죄와 비행>(Crimes and Misdemeanors, 1989) 우디 앨런 감독
<또다른 여인>(Another Woman, 1988) 우디 앨런 감독
<프라하의 봄>(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1988) 필립 카우프만 감독
<희생>(Offret, 1986)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신의 아그네스>(Agnes of God, 1985) 노먼 주이슨 감독
<스완의 사랑>(Un Amour de Swann, 1984) 폴커 슐뢴도르프 감독
<즐거운 농장>(Cannery Row, 1982) 데이비드 S. 워드 감독
<화니와 알렉산더>(Fanny Och Alexander, 1982) 잉마르 베리만 감독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 1981) 밥 라펠슨 감독
<허리케인>(Hurricane, 1979) Jan Troell 감독
<집시들의 왕>(King Of The Gypsies, 1978) 프랭크 피어슨 감독
<가을 소나타>(Hostsonaten, 1978) 잉마르 베리만 감독
<프리티 베이비>(Pretty Baby, 1978) 루이 말 감독
<테넌트>(Le Locataire, 1976) 로만 폴란스키 감독
<고독한 여심>(Face to Face, 1975) 잉마르 베리만 감독
<마법 피리>(Trollflojten, 1975) 잉마르 베리만 감독
<외침과 속삭임>(Viskningar Och Rop, 1972) 잉마르 베리만 감독
<정열>(En Passion, 1969) 잉마르 베리만 감독
<페르소나>(Persona, 1966) 잉마르 베리만 감독
<겨울 빛>(Nattvardsgasterna, 1963) 잉마르 베리만 감독
<침묵>(Tystnaden, 1963) 잉마르 베리만 감독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Sasom I En Spegel, 1961) 잉마르 베리만 감독
<처녀의 샘>(Jungfrukallan, 1960) 잉마르 베리만 감독
<톱밥과 금속 조각>(Gycklarnas Afton, 1953) 잉마르 베리만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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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회복제를 먹고 허리에 파스를 붙인 다음에야 기력을 좀 차리고 인터넷에서 이런저런 기사들을 둘러보는데(정작 해야 할일은 이런 게 아니지만), 딱 내 얘기다 싶은 기사가 눈에 띈다. 문학평론가 권성우 교수의 '문화비평'이 그것인데, 제목이 얄궂게도 '책을 처분하면서'이다. 제목에 잠시 '놀라실' 분들도 있을까봐('반가워할' 분들일까?) '인문학자의 딸들을 위하여'로 바꾸었다(인용문의 문단들도 다시 조정했다).

실상 내가 이미 오래전부터 겪고 있는 '고초' 또한 '책을 처분하면서'의 소회와 진배없다. 때문에 아래의 '비평'은 '딸아이를 위해서' 지난 겨울 한 차례 책을 처분하고(정확하게는 '위탁하고') 이번에 또 한번 책정리를 하느라 허리에 파스 한 통을 다 붙여가고 있는 처지에서 십분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해서 옮겨온 글이지만 '방주'가 아닌 '창고'에 넣어둔다.   

교수신문(06. 09. 30) 책을 처분하면서

대개의 인문학자들에게 이사는 그 동안 엄청나게 늘어난 책을 어떻게 배치하느냐는 고민을 동반할 것이다. 늘 그렇듯이 공간은 협소한데, 책은 많다. 8년 여만에 이사를 하기로 결정하면서(*나도 내년이면 8년을 채우게 되지만 이사를 꿈꾸기는 어렵다!) 고민의 화두로 등장한 것은 역시 책 보관문제였다. 지금 집에 있는 세 개의 방 중에서 두 개의 방은 그야말로 책 보관소였다(*내 말이 그말이다). 이 방들의 거의 모든 책꽂이는 이미 책이 가득 꽂혀진 공간에 다시 세로로 포개서 보관하는 방식으로 책이 이중으로 배치되어 있다. 한마디로 책 수용의 임계에 도달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사할 집의 크기는 같은데 그 중의 방 하나를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을 위해 제공해야 하는 사정에 있다(*아으, 인문학자의 딸들이여!). 연구실 역시 책으로 완전히 포화상태이니, 결론은 현재 집에 있는 책의 약 30% 정도를 그게 기부가 되었건 양도가 되었건 어떤 방식으로든지 처분해야 한다는 쪽으로 날 수밖에 없었다(*아래는 나이가 턱에 차서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는 우리집 딸내미이다). 

요 며칠 동안 바로 그 30%에 해당하는 책을 따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 책들을 판별하는 기준은 앞으로 내가 평생 동안 볼 가능성의 여부와 그 책들을 쉽게 구할 수 있는가의 여부였다(*기준은 대개 비슷한 듯하다. '쉽게 구할 수 있는가'란 기준은 나의 경우에 '도서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가'이다). 그러다 보니, 우선적으로 철지난 잡지와 문예지가 그 30%에 해당되었다. 그리고 상당수의 소설책과 시집도 이러한 운명을 비켜가지 못했다(그 책의 저자들에게 마음 깊이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고민했던 것은 인문사회과학의 전성시대였던 1980년대에 출판된 무수한 인문사회과학도서였다. 여러 가지 형태의 철학서, 사회과학이론 책들, 사회구성체 논쟁을 다룬 책들, 리얼리즘 관계 이론서들 등등.

아마도 이 책들의 상당수는 내 평생에 다시 볼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감하게(?) 어떤 방식이로든지 이 책들과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이런 책들을 나는 그다지 많이 갖고 있지는 않지만, 갖고 있더라고 권교수와는 다르게 바로 '처분'했을 것이다. 대학 도서관들에서 쉽게 대출할 수 있는 책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을 가능케 한 것이 그 책들에 내 젊음의 방황과 모색이 진하게 배여 있다는 실존적인 이유만은 아니었다.

보다 현실적으로 이제 그 책들을 커다란 도서관이 아니면 어디에서도 구하기 힘들다는 정황이 이러한 선택을 유도한 결정적인 계기였다가령 당시 비평가로서의 삶을 모색하고 있던 내 문학 공부에 많은 지침과 암시를 주기도 했던 파킨슨의 <게오르그 루카치> (현준만 역, 이삭, 1984) 같은 책은 이제 고서점에서도 구하기 힘든 책이 되었다(*내 주변의 도서관은 '커다란 도서관'에 속하는 듯하다. 파킨슨의 <게오르그 루카치> 등도 원서와 함께 소장돼 있다). 

물론 80년대에 출간된 여러 가지 진보적 사회과학 도서들이 지금 현재도 유효한가라는 물음 앞에서는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겠다. 철지난 급진이론이라는 생각도 가능하겠고, 여전히 우리 현실을 읽는데 소중한 참조가 된다는 관점도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 여하를 떠나 내가 이 에세이에서 제기하고 싶은 것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책들을 불과 20여년 후에 구하기 힘든 우리의 경박한 인문적 풍토에 있다.

두루 알다시피 80년대는 혁명과 정치의 시대였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시대이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진 무수한 영세출판사에서 의욕적으로 출간된 다양한 인문사회과학도서들을 생각해 본다. 그 책들은 각각이 지닌 세계관의 한계까지도 포함해서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주었다. 가끔은 그 시절이 한국현대사에서 인문학의 진정한 전성시대가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한다. 그 책들을 모두 양서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점은 그 책들을 구하기가 너무나도 힘든 이 시대의 현실이 반인문학적이라는 사실이다.

 

 

 

 

인문학을 살리는 길은 거창한 선언이나 ‘인문학 주간’ 같은 일회성 행사로 결코 가능할 수 없다. 한 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우리가 얼마나 제대로 기억하는가의 문제,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소중한 책들을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체계적으로 보관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의 확보가 인문학을 위해서 더욱 필요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그러니까 굳이 '개인 도서관'을 가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공공도서관이 장서수나 편의성에서 획기적으로 개선된다면 딸아이의 방을 만들어주기 위해 책들을 처분해야 하는 '서민' 인문학자들의 비애는 재생산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딸에게 방을 따로 내주고도 책 보관을 위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권성우/ 숙명여대·국문학)

06. 10. 15.

P.S. 대학교수의 처지에서도 그런 고민을 한다면 무슨 '통뼈'가 아닌 강사들의 처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아래는 지난봄 엄마 생일때 딸아이가 내게 전달해달라고 했던(그러니까 아빠는 '우체국아저씨'였다) 축하편지인데, 지난 여름 내 생일 때 아이는 달랑 '아빠 생일 축하해요. 사랑해요."라고만 쓴 쪽지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언어학의 기본 상식을 갖고 있다면 이 두 메시지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메시지' 자체가 아니라 메시지를 담고 있는 형식(여기서는 '분량')이다. 딸아이의 '아빠사랑'은 '엄마사랑'의 발치 정도인 것.

다음주면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고가로 구입한 가구들이 딸아이방에 들어오고 우리는 작은 파티를 해줄 예정이다. 그럼 지난 두달의 '여정'이 마무리되는 것. 여하튼 책들을 '고아원'에 '처분'하고 또 정리하면서 내가 갖는 바람은 다른 게 아니다. 고작해야 내년엔 좀더 긴 편지를 딸아이에게 받는 것 정도. "아빠가 없으면 저도 없겠죠." 정도의 구절은 포함된 편지로 말이다(요즘 세상에 누가 '인문학자'를 따로 알아주는 것도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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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06-10-16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님 무척 예뻐요.(저 옴팡 들어간 눈매라니!) 그나저나 엄마 소중한 줄은 알아서^^* 내년 생일도 기대마세요. "아빠가 없으면 엄마 생일 편진 누가 배달하죠?" 이렇게 된다니까요. 참고로, 로쟈님이 당하는 서러운 역할 우리집에서는 제가... 진짜 서럽습니다.

책에 묻혀사는 인문학자들이 아니더라도, 저는 늘 '책 버리는'데 인색하지 않아야 된다고 주장한답니다. 안 보는 순서대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순서대로 마구 버려주는 센스. 책의 효용은 읽는 것이지, 모셔두는 것이 아니라고, 주변인들에게 설파하면 막 째려봅니다. 저는 가장 큰 방을 책방으로만 쓰고 있어서 공간적 여유가 있는 편인데도 책 처분, 수시로 합니다. 책꽂이에 꽂힌 책 30%이상이 두 번 다시 주인의 손길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라는 게 제 주장이거든요. 그 책들이 날아간 자리에 인문학자는 따님 방을 만들고, 평범한 독자는 새 책을 사넣고 그러는 거지요. 어쨌든, 책이라면 그 어떤 거라도 '소중해서' 못 버린다는 사람들을 저는 살짝(실은 많이) 싫어해요. 그래도 사람이 그 집의 주인이어야지, 책이 주인 행세를 해서야 되겠어요? 유익한 페이퍼, 감사합니다.

서현이는 조오케타. 자기만의 방이 생겨서...

herennow 2006-10-16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아이가 이쁘네요
나중에 남자들 속 좀 태우겠는데요
책 처분을 고민할 정도로 책이 많으신게 부럽습니다

로쟈 2006-10-16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크아이즈님/ 내년 생일도 기대하지 말라구요!(딸들이란 어째 그럴까요?) 물론 저도 책의 주인 행세를 하고 싶습니다. 그럴 만큼 넓은 집을 장만하기 어려울 뿐입니다(--;).
herennow님/ '대개의 인문학자들'이 갖는 고민입니다. 평생 책과 씨름하는 것도 '서러운데', 그걸 처분하느라 머리를 싸매야 한다니...

기인 2006-10-16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어떤 느낌일지 알것 같습니다. ㅜㅠ

로쟈 2006-10-16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훈련소에선 나오신 모양이군요.^^ '타산지석'으로 삼으시면 되겠습니다...

biosculp 2006-10-16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에서 이 기사 읽었을때, 어 어디서 본글인데 하고 생각해보니 로쟈님서재에서 비슷한 글 읽은것이 생각나더군요.

이네파벨 2006-10-16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님의 편지를 읽는데 눈시울이 젖네요.
"엄마 저예요"로 시작하는 서두가 저희 딸내미랑 똑같아서...(전화할때도 꼭 "엄마 저예요." 편지에도 종종 그렇게 쓰지요.)...로쟈님 따님 글에 저희 딸내미 목소리가 입혀져서 읽히더군요.

따님이랑 부인이랑 로쟈님 모두모두 언제나 행복하시길 빌어드립니다....

로쟈 2006-10-16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iosculp님/ '창고'에 다 모아두었습니다.
바람구두님/ 야근을 좀 줄이시면 되지 않을까요?..
이네파벨님/ 그래서 덤덤한 아들 키우는 것보다는 애교있는 딸들이 키울만 하다더군요...
 

지난달말 기사인데, 뒤늦게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내용은 국가기록원에서 러시아에서 입수한 북한 관련 자료들을 공개/전시했다는 것이다(간단한 뉴스 동영상도 인터넷에서 참고할 수 있다). '러시아 소재' 한국 관련 자료들의 의의와 수집 필요성을 되짚어보기 위해 한번쯤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굿데일리(06. 10. 01) 국가기록원, 러시아 정부 소장 북한관련 영상기록 제2차 공개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원장 : 김윤동)은 9월 28일 14시부터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별관 3층 국제회의장에서 「러시아 영상으로 본 북한의 기억」이라는 주제로 제2차 시사회를 개최한다. 지난 5월 「러시아 시각으로 본 해방과 전쟁, 그리고 외교」라는 주제로 제1차 시사회를 개최한 바 있으며, 제1차 시사회가 北韓의 政治史를 중심으로 개최되었다면, 제2차 시사회는 북한 사람들의 삶과 문화, 그리고 전후복구 등 제1차 시사회 이후 추가로 수집한 北韓의 社會와 經濟를 중심으로 개최된다.

이번에 수집한 러시아 정부 소장 북한관련 영상기록은 시기적으로 일제말기 아동들의 강제노동부터 1960년대 재일동포의 ‘北送’ 까지, 북한 정치사 이외에 1940-50년대 북한의 일상적인 모습을 다양한 각도로 생동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겠다.

제2차 시사회를 통해 공개되는 러시아 소장 북한관련 영상기록은 ① 북한의 민속경기와 각종 운동경기, ② 단군릉(檀君陵), ③ 북송 관련 기록, ④ 북한의 전후복구 광경, ⑤ 전시 지하공장의 모습, ⑥ 전시 지하당원들의 회의 장면, ⑦ 전쟁직후인 1953년 김일성의 중국․소련 방문 기록 등으로, 
▶ 이중 해방직후 북한의 민속경기 장면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기록으로, 남쪽에서도 널리 행해졌던 닭싸움․강강수월래․널뛰기․씨름 등은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의미 있는 자료이다. 특히 그네타기와 대동강변에서의 스케이트 경주 등은 북한 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 특히, 1964년 도쿄에서 父女 상봉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신금단 선수가 1962년 모스크바 국제대회(육상400m)에서 자신의 세계신기록을 갱신하는 경기 장면도 국내에서는 처음 상영되는 기록이다.
▶ 북한의 문화재 관련 기록 중 눈길을 끄는 것은 檀君陵 영상이다. 단군릉 사진은 현재까지 1990년대 초 북한에서 단군릉 재건 직전에 찍은 모습만 확인되고 있는데, 이번에 공개한 단군릉은 1947년에 구소련에서 촬영한 영상자료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 ‘北送’관련 기록도 주목된다. 이제까지 ‘북송’ 자료는 일본에서 출발하는 장면만 알려졌는데, 이번에 공개되는 기록은 북한에 도착한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며, 북한에 도착한 재일동포와 환영하는 북한주민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더불어 북송선으로 유명한 만경봉호의 건조 직후 실내모습도 공개된다.
▶ 북한의 경제관련 영상기록 중 북한의 戰時경제의 실상을 보여주는 장면은 주목할 만 하다. 이 자료는 북한 주민들이 파괴된 공장에서 거의 손노동에 의지한 채 철강 생산을 하고, 지하공장에서 전시 물자를 생산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특히 공습을 피해 지하동굴에서 북한 로동당원들이 당원회의를 하는 모습은 국내에서 최초로 소개되는 영상기록이다.
▶ 전후 소련․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전후복구에 참여하는  장면도 공개되었다. 수풍발전소 재건, 흥남비료공장 등 각종 산업시설의 복구, 농업 부문 등에서 소련의 기술자들과 북한의 노동자들이 함께 작업하는 장면, 중국인민지원군의 대동강 철교 복구 및 평양역 개통식 장면 등은 희귀한 자료들이다. 북한과 소련을 연결하는 ‘두만강친선교’ 개통식 자료는 국내에서 상영되는 최초의 영상물로 평가되고 있다.
▶ 1950년대 북한의 외교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되는 자료는 김일성이 전쟁 직후 벌인 1953년 9월 대소, 11월 대중 방문외교 기록이다. 김일성과 북한 대표단에 대한 소련에서의 환영행사, 중국 북경역 공식 환영행사 및 만찬장에서의 등소평과의 만남 등이 특징적이다.

이번에 공개한 영상자료는 제1차 수집한 영상기록과 함께, 해방직후 북한의 정치/경제/사회/문화 全 영역의 실상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이제까지 해방 직후 북한 관련 영상기록이 극히 미미하고, 얼마 안 되는 영상기록도 대부분 미국에서 수집한 영상기록이라는 점에서 러시아에서 수집한 영상기록의 가치는 매우 크다. 무엇보다 문헌 연구의 한계성을 뛰어 넘는 생동감 있는 실증적 자료라는 점에서 향후 한국현대사 연구의 확대를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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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정리와 아이방 페인트칠 이후로 허리 통증에 시달리고 있는데 어제는 유치원 운동회에서 달리기에다 줄다리기까지 한 탓에 거의 '가사' 상태이다. 지난주 몇 차례의 음주와 만성적인 피로가 보태지니까 거동 자체가 불편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밀린 원고와 강의준비를 걱정하며 드러누워 있던 차에 눈에 띈 책이 김현 문학선 <전체에 대한 통찰>(나남, 1990)이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초판이 아니라 1993년의 3쇄본인데, 출간당시엔 수록된 평문들의 대부분을 읽었거나 이미 갖고 있는 형편이어서 따로 손길이 가지 않았다. 몇 년 후에 책을 산 건 '기념'의 성격에다 '선집'으로서의 유용성을 고려해서이다(이후에 절판되었던 이 책은 하드카버로 재출간되었지만, 그래서 지금도 구해볼 수 있는 책이지만, 알라딘에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는 김현이지만 편자는 그가 아니다. 그의 제자인 평론가 정과리이다. 편집의 말에도 밝혀져 있지만, 그는 1990년 6월 27일 새벽에 세상을 떠났으며 책이 나온 건 그해 11월이다. 그리고 책의 서문격으로 실려 있는 건 이 선집을 위해 따로 씌어진 것이 아니라 그해 5월 그가 수상하게 된 제1회 팔봉 비평문학상의 수상 소감이다. 기억에는 이 상을 주관한 한국일보에 실리기도 한 이 소감문의 제목이 '뜨거운 상징을 찾으며'이다. 제목만큼이나 이 소감문 자체도 평균적인 체온 이상의 열기를 포함하고 있는데, 나태와 안락의 유혹을 받을 때마다 한번쯤 읽어볼 만한 글이기도 하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선 이 상을 만드시 팔봉(八峰) 선생의 유족 여러분과 이 상을 공식적인 것으로 확대시킨 한국일보 여러분, 처음 제정된 상의 심사를 맡아하신 존경하는 여러 선생님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스승-선배-동료-후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 상을 공적인 평가의 표시로서가 아니라 사적인 공감의 표시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공적인 평가는 지나칠 수 있고 모자랄 수도 있지만, 사적인 공감은 그것이 지나치건 모자라건 언제나 개인적인 즐거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평가는 과분한 것일 수 있으나 즐거움은 과분한 것이 아니고 향유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저는 이 상이 올해 처음으로 제정되었다는 점에 큰 기쁨을 느끼며 이 상을 받습니다." 

여기서 팔봉은 회월 박영희와 함께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맹주로 활동한 바 있는 김기진(1903-1985)을 말한다. 비평가와 소설가, 그리고 언론인으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팔봉의 서거 이후에 198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김팔봉문학전집>(전6권)이 출간되었고 유족의 뜻에 따라 팔봉 비평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김현은 그의 비평집 <분석과 해석>(문학과지성사, 1988)으로 그 상의 첫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참고로, 김윤식이 제2회 수상자였으며, 정과리는 <무덤 속의 마젤란>(문학과지성사, 1999)으로 2000년 이 상의 제11회 수상자가 되었다. 팔봉비평문학상은 문학사상사가 주관하는 김환태평론문학상과 함께 국내에서 비평가에게 주어지는 가장 권위있는 상이지만 해마다 수상자를 선정하다 보니 이젠 '웬만한' 비평가들을 모두 수상자 목록에 올리게 됐다. 첫 수상자를 선정하며 이 상이 가졌던 '뜨거운 상징성'은 그 사이에 다 식어버린 셈이다. 김현의 소감대로 '공적인 평가'보다는 '사적인 공감'의 차원에서 상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흠을 잡을 것도 없겠지만. 김현의 수상 소감/서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팔봉 선생을 생각할 때마다 제 머리에 우선 떠오르는 것은 길 한복판에 시체처럼 팽개쳐진 팔봉 선생을 찍은 한 장의 사진입니다. 그 사진이 어떻게 찍힌 것이라는 것은 여러분들 모두 다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나는 그 '여러분'에 속하지 않는다. 문제의 사진을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인데, 짐작에는 6·25전쟁 때 공산치하에서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봉변을 당한 팔봉을 찍은 사진이 아닌가 한다. 팔봉은 기적적으로 회생했다고 하는데, 1961년에는 '나는 살아있다'라는 그의 실제 체험기에 근거하여 <인민재판>이라는방공홍보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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