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책들이 그간에 또 쌓였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책은 없지만, 나름대로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은 책들은 많아서 두 번에 나누어 다루려고 한다. 먼저, 마젤란식의 세계 일주로부터 시작해본다. '마젤란의 해양 오디세이'를 다룬 로런스 버그린의 <세상의 끝을 넘어서>(해나무, 2006)가 첫번째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세계일주의 기록을 남긴 마젤란의 당시 항해 과정을 재구성한 책"으로 "처음에는 향료 제도를 찾아 떠났지만, 기상천외한 모험과 폭력, 이국에서의 향락과 섹스를 겪고 마젤란의 죽음을 거치며 결국 유령선의 몰골로 돌아온 것으로도 유명한 마젤란의 항해. 그 이야기의 앞뒤 사정을 역사적 문헌들을 참조하여 자세히 밝히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젤란>(자작나무, 1996) 등을 읽지 않았기에 내가 읽은 마젤란은 초등학교 시절에 읽은 '세계위인전집'의 마젤란이다(따지고 보니까 1970년대에 읽은 셈이 된다!). 남들처럼 역마살이 있는 건 아니어서 마젤란의 항해와 '모험'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는 건 아니지만 그 '오디세이적'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초등학교 시절로 잠시 되돌아가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 책에서 "어리석고 앞을 내다볼 줄 몰랐으며 몽상가적 기질까지 있었지만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전환점을 만들어낸 마젤란에게서 위대한 업적을 세운 한 인간의 나약한 이면을 발견"할 수도 있다고 하니 여유/여건만 된다면 느긋하게 '항해'에 나서볼 만하다. '마젤란의 무덤'까지?(정과리의 이 비평집 제목은 아마도 비평집으로선 가장 튀는 제목일 것이다.) 

 

 

 

 

마젤란의 항해 여정이 내겐 시간 여행의 의미를 갖는다고 적었지만, '근대성 문화 그리고 일상생활'이란 부제를 가진 해리 하르투니언의 <역사의 요동>(휴머니스트, 2006)은 실제 '역사 속의 시간 여행'이겠다. '근대성'과 '일상'을 키워드로 한. 이 책에 주목하게 된 것은 "근대성과 일상에 대한 권위 있는 설명을 통해 하르투니언은 일본과 아시아에 대한 지식 생산의 정치를 예리하게 비판한다. 이론적 정교화와 열정과 비전에 있어 이 책은 귀감이 될 만하다."라는 레이 초우의 추천사 덕분이다. <원시적 열정>의 여성 중국문화학자 그 레이 초우 말이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20세기 전반 유럽과 일본에서 일어난 다양한 일상담론을 탐구한 흥미로운 이론서. 우리 지식 사회에 넓게 퍼져있는 일상의 지형도를 꼼꼼하게 인식하고 세밀하게 서술했다. 미국의 동아시아학, 특히 일본학의 대표적 학자인 지은이는 정보수집과 실증성이라는 차원에 머물러있던 지역학에 비판적 문화이론을 도입하고 철학, 역사학, 문학, 정치학, 사회학을 넘나드는 학제 간 연구로서의 '새로운 지역학'을 모색한다. 책에서 중심적으로 다룬 '일상'은 '새로운 지역학' 사유의 자연스러운 귀착점. 지역학에 고질적인 중심/주변의 이분법을 깨기 위해 '동시적 근대성'을 사유하고, '동시적 근대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개념인 '일상'에 주목한다." 이젠 식상할 정도로 많이 듣던 얘기이다.

차이라면 "아직까지 국내에는 본격적으로 소개된 바 없는 크라카우어나 아르바토프를 비롯하여 하이데거에서 벤야민까지 다양한 일상담론의 서술"을 다룬다는 점. 하지만 "미국 내 동아시학에 대해 관심 있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이라는 건 친절한, 하지만 불필요한 멘트이다. 책은 '근대적 일상'에 조금만 관심있는 독자라면 흥미있게 읽을 수 있다, 정도의 멘트여야 하지 않을까? 한편 눈길을 국내로 돌리면, <근대의 첫경험>(이화여대출판부, 2006) 등이 근대적 일상을 다루고 있는 책들로 나와 있다. 학술서의 성격들이 강해서 다양한 일상담론을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세번째 책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말하는 나의 영화들'이란 부제가 모든 걸 말해주는 <말의 색채>(미메시스, 2006)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1914-1996), 적어놓고 보니까 올해는 20세기 프랑스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이 '전설적인 작가'의 10주기가 되는 해이다. 프랑스 여성작가로서 그만한 명성을 누린 작가가 많지 않을 듯한데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시나리오작가, 영화감독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한 뒤라스의 영화에 대한 담담한 증언과 고백을 통해서 그녀의 삶을 재구성하고 있는 책으로 보인다.

La couleur des mots : entretiens avec Dominique Noguez

소개에 따르면, "텍스트와 이미지를 넘나드는 그의 영화-글쓰기를 뒤라스 본인의 솔직 담백한 증언들을 통해 살펴보"는바 "작가이자 뒤라스 연구가인 도미니크 노게즈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하고 있는 책에는 영화의 스틸 컷과 현장 사진들을 비롯한 영화 작품들에 대한 상세한 자료와 함께 소설과 희곡, 에세이 등의 작품들, 뒤라스와 관련된 각종 미디어 자료들까지 수록하고 있다 그의 작품세계를 한 눈에 조감하게 한다"고. 그러니 뒤라스의 독자들이라면(아주 많지는 않겠지만) 놓칠 수 없겠다. 유지나 교수의 번역인데, 내 기억엔 역자의 학위논문이 뒤라스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도 뒤라스가 관여한 영화들 가운데 가장 높은 평판을 얻은 것은 알랭 레네가 감독한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일 테지만(뒤라스의 각본이다), 그녀의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여준 영화는 1984년 공쿠르상 수상작 <연인>을 영화화한 장 자크 아노의 <연인>(1992)일 것이다(토니 륭과 제인 마치 주연). 전세계적인 화제를 불러모은 이 소설/영화는 알려진 바대로 뒤라스 자신의 연애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언젠가 롯데극장(?)에서 본 기억이 새롭다(황톳빛 인도차이나의 강물결과 함께).

뒤라스에 관한 나의 또다른 기억은 몇년 전 한 작은 시립도서관에 갔을 때 서가에 뒤라스의 소설들이 잔뜩 꽂혀 있었던 것. 몇 권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연인>의 개봉 이후에 번역/소개된 책들이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 절판된. 덧붙이자면, 그녀가 세상을 뜬 1996년에 나온 <이게 다예요>(문학동네)가 얼마 안되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뒤라스이다. 고종석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읽을 만한 내용이 없어서 '고작 이게 다인가?'라고 혼자 툴툴댔던, 아주 얇은 책이다. 여하튼 그런저런 시간여행을 뒤라스와 함께 떠나볼 수 있겠다. 

 

 

 

 

그리고 네번째 책은 지난 8월말 정년을 맞아 퇴직한 독문학자이자 문학비평가 김주연의 <독일비평사>(문학과지성사, 2006)이다. 독문학자로서의 마지막 업적은 아니겠지만(아니기를 바라지만), 30년 가까운 대학 교단생활을 정리하고 기념하는 의미는 있겠다. 책의 제목에서 내가 떠올린 건 당연 저자의 막역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문학비평가 김현의 <프랑스 비평사>(문학과지성사, 전집판2001)이다. 두 비평사 사이에는 20년쯤의 간극이 놓여 있는데, 그래도 나란히 놓으면 우정의 끈은 이어지는 것이지 않나 싶다. 문지4인방 비평가들의 '새파란' 젊은 시절을 보여주는 아래 사진에서 맨왼쪽이 김현, 그리고 맨오른쪽이 김주연이다.

<독일비평사>와 함께 (아마도) 정년을 기념하여 같이 나온 책 <인간을 향하여, 인간을 넘어서>(문이당, 2006)는 저자가 드물게 내는 에세이/시론(時論)집. 가장 최근에 나온 평론집 <근대 논의 이후의 문학>(문학과지성사, 2005)의 경우에도 그가 아직 '현역' 비평가임을 두루 과시한 바 있으므로 '정년 이후의 문학비평'을 더 기대해볼 만하겠다.   

 

 

 

 

끝으로, 불가리아 산문 문학의 대가로 추앙받는다는 작가 요르단 욥코프의 1927년 작 <발칸의 전설>(문학과지성사, 2006)이 출간됐다. 저자에 관해서 이번에 처음 알게 됐는데, '불가리스'로나 알려진 나라의 문학을 접해보는 드물고도 유익한 기회가 아닐까 싶다. 발칸에 대해서라면 주로 영화감독 쿠스투리차의 유고슬라비아(세르비아)나 이즈마엘 카다레의 알바니아를 떠올리게 되는데, 욥코프 덕분에 불가리아를 첨가하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긴 줄리아 크리스테바나 츠베탕 토도로프 같은 걸출한 지식인들이 불가리아출신이지만. 아래 사진은 불가리아의 최고봉이라는 릴라산.   

책은 "이념과 관습, 그리고 죽음을 넘어선 사랑을 노래하는 열 편의 짧은 이야기"를 싣고 있다는데, "불가리아 중심부에 위치한 '스타라 플라니나(발칸 산맥)'에 흩어져 있던 전설과 민담을 채록하고,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입혀 재탄생시킨 단편들"이라고 한다. 소개를 더 보태자면, "발칸의 광활하고 풍요로운 자연과 민족 영웅, 범부 등을 그린 이야기 속에, 15~19세기 불가리아의 역사와 문화, 풍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500여 년에 걸쳐 터키의 지배를 받았던 불가리아를 배경으로 하며, 사라진 과거의 아름다움이 몽상적인 필치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작가 욥코프는 '(불가리아 국가가 형성된 이후 근 1300여년 동안)불가리아인에 영향을 준 100대 위인'에 뽑힐 만큼 불가리아인들이 사랑하고 존경해온 작가이다. 불가리아 출신 작가들 중 노벨 문학상 후보에 가장 많이 거론된 인물이기도 하다"고 한다. 그런 욥코프와의 발칸 기행에 한번 나서볼까? 집시들의 바이얼린 소리도 옆에 끼고서 말이다...  

06. 09. 15.

 

 

 

 

P.S. '마젤란의 해양 오디세이'에 덧붙이자면, 천병희 선생의 <오뒷세이아>(도서출판 숲, 2006) 개정판이 출간됐다. 단국대출판부판(2002) 이후 4년만인데, 직역투의 문장들을 좀더 유려하게 다듬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더 맘에 들어하는 것은 달라진 표지이다(예전 번역본은 표지 때문에라도 구입하고 싶지 않았었다). 이젠 오뒷세우스의 여정도 뒤따라가볼 수 있는 준비는 갖춰진 셈. 거의 등떠미는 수준인데, 그렇다고 짐짝 같은 우리의 마음이 가벼울 수는 없다... 아, 이 많은 책들을 모두 어이할 것이냐? 우리의 뼈도 못추리게 만드는 이 세이렌(사이렌)의 마녀들을 모두 어이할 것이냐?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이 물귀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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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저명한 진보저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한국판이 창간되었다. 어제(14일) 날짜의 일이다. 예전에 홍세화 한겨레신문 시민편집인이 등이 한국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필요성을 역설한 기억이 있는데, 그것이 '한국판'으로 구체화된 모양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프랑스에서는 발행인인 이냐시오 라모네가 방한하여 간담회까지 가졌다고. 그의 저서로는 공저인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백의, 2001)를 넘어서 외에도 <소리없는 프로파간다>(상형문자, 2002) 등이 번역/소개돼 있다(나는 그 두 권의 책을 갖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국내에 가장 널려 알려진 프랑스 언론인이 아닐까 싶다.

 

 

 

 

여하튼 새로운 언론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하는 소식인바, 관련기사를 읽어본다.

경향신문(06. 09. 14) “독립적 언론만이 진정한 비판 가능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창간을 계기로 한국지식인 사회에 진지한 토론의 장이 마련되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빨라진 인터넷 환경이지만 긴 호흡을 가진 디플로마티크 같은 언론을 원하는 독자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국제문제에 대한 심층 분석과 독립적 비평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14일 한국판(발행인 박승흡)을 창간했다. 창간행사와 토론회 등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이냐시오 라모네 발행인(64)은 이날 ‘세계화와 미디어·문화 민주주의’를 주제로 국내 미디어 기자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라모네 발행인은 모두 발언에서 “정치와 경제로부터 독립적인 언론이야말로 사회에 대한 진정한 비판을 가할 수 있다”면서 재벌들의 언론사 소유로 인해 다양한 여론이 반영되지 않고 비판이 약화되는 미디어 현상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라모네는 “프랑스의 경우 에르상과 라가르데르 등 양대 언론사가 닷소 등 거대 군수기업에 합병돼 언론으로서의 비판성을 거의 상실했다”고 지적했다.

라모네는 “소유구조가 독특한 르몽드만이 정치와 재벌로부터 독립을 유지한 가운데 사회에 대한 진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르몽드 독립성 유지의 바탕에 관해 “다른 언론과 달리 편집인집단 주주, 소액주주(독자), 사원주주 등 3대 그룹이 주식을 소유한 독립적 구조로 돼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라모네 발행인은 세계화의 흐름에 대해 “모든 것을 상품화하려는 움직임”이라고 규정하고 “이 흐름 안에서는 문화도 상품이 되며, 상품화된 문화는 획일화된다”고 비판했다. 그는 “상업화가 진행되면 겉으로는 다양한 미디어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 미디어는 거의 동일한 가치를 옹호한다”고 말했다. 라모네는 “문화와 미디어 부문에서 세계화는 다양한 지역의 문화와 미디어의 소멸을 초래하고, 그 결과 미국문화와 미디어만 살아남는다”고 경고했다. 이 때문에 문화다양성을 위한 투쟁과 미디어 다양성을 위한 투쟁은 일맥상통한다고 설명했다.

라모네 발행인은 문화적 다양성이 사라지면 국가와 민족이 가진 정체성과 창조성이 소멸된다고 걱정했다. 그는 이런 현상을 강자만 살아남는 ‘다위니즘’에 비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미디어의 다양성이 사라지면 동시에 비판성도 사라지게 된다고 말했다. 문화다양성 운동에 오랜 기간 관여해 온 라모네 발행인은 작년 10월 문화다양성협약이 탄생한 것에 대해 “약소 문화나 국가가 승리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문화다양성협약이 발효하려면 30개국의 비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세계적으로 진행중인 FTA에 대해 라모네는 “미국은 FTA를 통해 세계화 반대세력을 무력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FTA를 통해 미국이 원하는 것은 각국의 무역장벽을 없애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군사적·정치적·경제적 지배에 더해 문화적 지배도 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 FTA를 통해 자국 상품에 대한 장벽을 없애려 한다는 얘기였다. 라모네는 한국의 스크린쿼터 문제에 관한 질문을 받고 “쿼터가 절반으로 줄었다”고 들었다면서 “한국 문화계가 타격을 입을 것이며 결국 미국 문화가 그 빈 자리를 메우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프랑스 68혁명세대 출신인 라모네는 에밀 졸라, 앙드레 지드, 사르트르 등 프랑스 앙가주망 운동을 계승하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지난 15년간 디플로마티크를 이끌어 온 라모네는 파리 7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의 교수이기도 하다. 그의 저서 ‘아메리카-미국, 그 마지막 제국’ ‘커뮤니케이션의 횡포’ 등은 국내에서도 번역·출간됐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1954년 프랑스의 유력지 르몽드의 자매지로 창간된 이래 세계 56개국에서 22개 언어로 매월 2백만부 이상 발간되고 있으며 이번에 한국판이 생기는 것이다. 디플로마티크는 인터넷판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판은 주로 오프라인 신문에 집중하겠다는 방침이다.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은 디플로마티크에서 선별한 기사 70%, 한국판 편집진이 집필한 기사 30%의 비율로 편집할 계획이다. 편집위원회는 위원장 박순성 동국대 사회과학대 북한학과 교수를 포함해 이기언 연세대 불문과 교수, 이혜정 중앙대 정외과 교수, 홍세화 한겨레신문 시민편집인 등 모두 21명으로 구성돼 있다.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은 40면으로 매월 발행되며, 초기 발행부수는 1만부다.(설원태 기자)

06. 09. 15.

P.S. 참고로, 아래는 지난 5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한국판 창간예정 소식을 전하고 있는 레이버투데이의 관련기사이다. 필자는 이대호 기자이다.

레이버투데이(06. 05. 26)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창간

‘명품’ 국제관계 전문지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Le Monde diplomatique)> 한국판이 오는 9월 공식 창간된다. 르몽드코리아(대표이사 박승흡)는 지난해 12월 프랑스 본사와 독점판권계약을 맺고 6, 7, 8월 세 번의 창간준비호를 거쳐 9월15일 한국판을 공식 창간한다고 밝혔다. 온라인사이트(www.lemonde.co.kr)도 6월중 선보일 예정이다.


▲ 이냐시오 라모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과 박승흡 르몽드코리아 사장이 지난해 12월12일 프랑스 현지 본사에서 한국판 발간계약을 체결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프랑스의 <르몽드>가 54년 자매지로 창간한 월간지로 국제문제에 대한 깊이있는 분석과 대안 제시로 인권과 평등, 평화를 옹호하는 정론지로 위상을 굳혔다. 91년 이후에는 이냐시오 라모네 편집인이 주도하면서 미국 중심의 패권적 담론에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 대안 세계화 운동의 흐름을 확장시키는 등 권위지로 인정받았다. 현재 세계적으로 21개 언어로 총 150만부가 발행되고 있다.

22번째 언어이면서 오프라인으로는 아시아에서 처음인 한국판에는 프랑스 원판 번역기사 70%와 한국판 편집진이 기획·취재한 기사 30%가 실린다. 르몽드코리아는 “한국판은 프랑스판 편집 기조를 존중하면서 한국인들이 국제적 안목을 넓히고 언어와 인종, 국경을 넘어 세계 시민사회에 다가서도록 하는 안내자가 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르몽드코리아는 국제관계 등 분야별 전문가 10명으로 한국판 편집위원회(위원장 박순성 동국대 교수)를 구성했으며, 그 밑에 국제팀, 경제통상팀, 사회문화팀 등 기획전문가 그룹을 뒀다. 프랑스판 기사의 정확한 전달을 위해 10명 이상의 박사급 번역팀을 구성했으며, 불어전문 편집위원들이 감수를 담당한다.

박승흡 대표이사 겸 발행인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사회연대를 확장할 뿐 아니라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를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매체를 만들겠다”며 “정책결정자, 기업인, 시민사회 등 지성인과 세계적 안목을 가지려는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벗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한국판 창간 작업에 바쁜 최방식 편집장을 전화로 만났다. 최 편집장은 “서방 통신사 기사를 받아쓰는 ‘우물 안 개구리식’ 보도관행을 깨고, 이들이 무시해 온 또 다른 세계의 구석구석을 다 들여다볼 수 있는 매체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최 편집장은 <시민의 신문> 편집국장과 미주특파원을 역임했다.

- 기사의 30%를 직접 생산하는데 동북아의 이슈를 본사와 역할을 분담하는 것인가.
“국제정치와 외교에서 동북아는 관심지역 중의 하나다. 그러나 유럽의 다른 언론은 물론 국제관계 전문지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도 동북아와 관련해서는 기사의 양도 적고 전문성도 떨어진다. 따라서 한국판은 한반도 문제와 함께 동북아 관련 전문기사를 생산할 것이다. 이 기사가 좋으면 프랑스판에 실려 세계적으로 보급된다.”

- 지금 우리 사회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행이 필요한 이유는.
“우선 한국사회가 밖을 보는 시선이 아주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비교적 늦게 민주화가 되고, 국제적 관문을 넘나든 것도 늦었다. 국제사회를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 다음으로 국제사회를 보는 눈이 비뚤어져 있다는 것이다. 미국을 통해서 각종 정보가 들어오고 그것을 통해 세계를 본다. 편향이다. 국가마다 다른 시각이 있다. 이것을 우리사회에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 다른 매체 국제뉴스와 차별성은.
“기존 언론, 특히 일간지들은 AP 등 서방 4대 통신사의 국제기사를 받아쓴다. 그러면 그들의 시각을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북반구의 선진자본주의는 다루지만 그외 다수 나라들의 이슈는 중요해도 소외된다. 다뤄도 자신들의 시각에서 다룬다. 이런 관행을 깨고 세계 구석구석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차별성이다.”

- 한국판 발행의 어려움은 무엇인가.
“우선 번역이다. 프랑스어가 형용사, 부사가 다양하고, 특히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표현 스타일이 직설적이지 않고 한바퀴 돌린다. 이런 표현들을 한국 독자들에게 쉽고 간결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번역과 감수과정에 고통이 따를 것이다. 또 국내판 기사를 만드는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명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씨름을 하고 있다.”

- 국내판 기사는 어떻게 만드나. 상근기자가 있나.
“상근기자 체제는 아니다. 전문적인 프리랜서 기자나 국제관계에 밝은 전문가, 대학교수, 연구원 등 필자 풀을 만들고 있다. 해당분야의 이슈가 결정되면 국내외 네트워크를 통해 적임자를 선정해서 기사를 쓸 것이다.”

- 쉬운 글이 아닐 텐데 아무나 읽을 수 있는 수준인가.
“각 분야의 학자나 연구원, 정책생산자, 언론인 또는 대학원생들이 주요 독자층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말 그대로의 국제관계뿐만 아니라 교육, 환경, 정치, 문화 등 국제적인 이슈가 없는 분야가 없으므로 모든 분야가 한국판에 담긴다. 그리고 여기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게 만들 것이다.”

- 월간지인데 어떤 판형으로 만드나.
“흔히 우리나라 일간지가 취하는 대판과 타블로이드판의 중간 크기인 베를리너 판형을 택했다. 휴대와 읽기가 쉬워 유렵에서는 <르몽드>나 <가디언> 등이 이 판형이다. 국내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판형이기도 하다. 매달 15일 50페이지 분량으로 발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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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기사이긴 한데, 저명한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서거 소식을 전하는 교수신문의 기사를 옮겨온다. 국내엔 <지나간 미래>(문학동네, 1998)이 번역/소개돼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치를 '뒤늦게' 알게 된 건 몇달 전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를 읽으면서였다. 단토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독일의 위대한 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지나간 미래>라고 하는 놀라운 제목의 책을 썼는데, 여기에서 그는 과거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현재를 살아갈 때 참조했던 미래가 과거의 중요한 일부가 된다고 주장한다."(200쪽) 나는 부랴부랴 국역본과 함께 '역사적 시간의 의미론에 대하여'란 부제를 갖고 있는 영역본을 구한 적이 있다. 기사를 보니까 국내학계에서도 곧 추모학회가 개최된다고 하는데, 이 참에 그의 주저들이 더 소개되었으면 싶다.

교수신문(06. 09. 09) 라인하르트 코젤렉(1923~2006)의 타계에 부쳐

개념사 이론의 창안자인 라이하르트 코젤렉의 올 2월 타계 소식이 국내에 뒤늦게 알려졌다. 그로부터 배우거나 영향을 받은 국내 학자들은 꽤 있지만 미처 소식을 접하진 못했다. 한림대에서 개념사 사전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박근갑 교수가 코젤렉이 남긴 학문적 업적을 짚어 보았다. 국내에서는 서양사학회가 뒤늦게나마 오는 9월 23일 추모발표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 편집자주

올해 2월 3일 세계 역사학계는 한 거장을 잃었다. 한국에서 그의 이름은 조금 낯설지 모르지만, 저명한 문화학자 헤이든 화이트의 말대로 그는 지난 세기에 역사학을 빛낸 ‘가장 탁월한 이론가들 가운데 한 인물’이다. 그는 독일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이다.

뢰비트, 하이데거 등 사숙
오늘날 독일 인문학의 최대 성과로 손꼽히는 개념사 사전 ‘역사적 기본개념’을 처음부터 이끌고 마무리하면서 이름을 드날린 만큼이나 그의 학문생애도 이채롭다. 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뢰비트와 가다머로부터 역사철학과 해석학을 배웠으며 하이데거를 사숙했다. 이런 점에서 그가 랑케와 마이네케의 대를 잇는 역사주의 역사학의 한 가운데에 섰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세기를 넘어 풍미했던 ‘주류사학’의 그늘 속에 편안히 머물지 않았다. 1967년에 그의 이름을 유럽 학계에 널리 알린 교수자격 시험논문 ‘개혁과 혁명 사이의 프로이센’은 전통 역사학의 경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사회사 영역을 탐사한 저술이었다. 이어서 그는 곧 신설된 빌레펠트대의 역사학과 창설에 참여하고 여기에 장차 ‘빌레펠트 학파’로 알려질 ‘젊은’ 사회사가들을 불러 모았다. ‘역사적 사회과학’의 기치 아래 고전적 역사주의와 대결했던 이들이 오늘날 독일 역사학계의 ‘新정통’ 헤게모니를 이룬다.

그렇지만 그는 이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그는 무려 25년에 걸쳐서 1백여 명이 넘는 학자들과 더불어 개념사 사전을 편찬하고 수많은 학술지의 편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어떠한 학파도 만들지 않았다. 최근에 이르러 ‘언어적 선회’ 기류 속에서 그의 개념사 이론을 푸코나 데리다의 포스트모더니즘에 겹치려는 경향이 있었으나, 그는 그러한 문화주의와도 명백한 선을 그었다.

그렇지만 그는 어느 평자들의 말대로 “홀로 서면서도 여러 경계에 걸친 인물”이었으며, “위대하고도 성공적인 아웃사이더”이기도 했다. 왜 그를 뒤늦게나마, 그리고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추도해야만 하는가. 널리 알려진 대로 그는 현대적 개념사 이론을 창안했으며 이를 기념비적인 ‘역사적 기본개념’으로 체현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공적은 여기에만 있지 않다. 그의 이론과 실천연구는 ‘18세기 철학자’라는 별칭에 걸맞게 여러 학문영역을 넘나들고 있다. 이 짧은 글이 어떻게 그의 모든 지적 세계를 일별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우리 학계에도 절실하게 요청되지만 아직도 처녀지로 남아있는 개념사 연구의 지평에서 그를 잠깐 다시 만나보자.

코젤렉의 기본명제는 개념이란 사회적, 정치적 변화의 지표이면서 동시에 그 요소가 된다는 점에 자리하고 있다. 구체적인 시대상황에 담긴 지속, 변화, 미래성의 계기들을 개념 의미를 통하여 추적함으로써 사회상의 변화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부터 어떠한 개념들이 역사적 저류의 지표와 요소가 되었는가, 라는 질문이 개념사 연구의 핵심과제이다. 옛 언어들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신조어들이 등장하면서 ‘의미론적 투쟁’이 전개되는 위기상황이 그러한 시점에 해당한다. ‘근대’라고 명명되는 시기가 곧 그것이다. 이때부터 개념정립을 둘러싼 갈등이 사회적·정치적인 파괴력을 보인 것이다. 유럽 역사에서 보면 프랑스 혁명 이후에 이 투쟁은 첨예화되었다는 설명이다.

1백여명 학자 이끌며 개념사 사전 펴내
코젤렉은 이런 근대 운동개념의 동학을 추적하기 위해 ‘경험공간’(Erfahrungsraum)과 ‘기대지평’(Erwartungshorizont)이라는 새로운 인식범주를 창안했다. 그의 설명은 대강 이러하다. 경험은 사건들이 인간의 의식 속에 섭취되고 기억될 수 있는 현재적 과거이다. 기대 또한 현재 속에서 이루어지며, 현재화된 미래로서 경험되지 않은 것을 지향한다. 경험은 그 속에서 이전 시대의 많은 층위들이 이전과 이후 없이 동시에 드러나기 때문에 공간적이다. 이와는 달리 기대는 지평으로 열려있다.

그것은 아직은 볼 수 없는 새로운 경험공간을 나중에 열어주는 선을 의미한다. ‘근대’에 이르면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가 점점 커진다. 다시 말해서, 기대들이 그때까지의 경험들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이때가 ‘새 시대’로 파악된다. 이때부터 개념들이 점점 추상화되어 지나간 기억을 불러오기보다는 다가올 미래를 미리 상기시키는 이데올로기로 고양되는 과정에서, 경험은 공간에 갇히고 기대는 지평으로 향한다. ‘공화주의’(Republikanismus)를 하나의 예로 보자.

객관과 주관 넘어선 경계에 홀로서기
칸트는 처음으로 여러 정체들 중의 하나였던 ‘공화제’(Republik)를 그의 ‘실천이성’에서 도출하여 인류사회의 지속적인 목적으로 형상화하면서, 거기로 가는 과정을 새롭게 ‘공화주의’로 지칭했다. 이 용어는 이후로 ‘진보’라는 추상적 기대를 정치적 행동공간에서 수행하는 ‘운동개념’이 되었다. 이로써 하나의 상태를 가리켰던 예전의 ‘공화국’이 ‘주의’라는 어미를 통해 목적으로 전이되었던 것이다. 이 개념은 다가오는 역사적 운동을 이론적으로 선취하면서 실천적인 영향을 끼쳤다. 전승된 모든 통치형식들의 경험공간과 아직은 멀리 보이는 정치체제의 기대지평 사이에서 벌어진 시간적 차이가 개념화되었던 것이다. ‘근대’의 정치적, 사회적 개념들이 그렇게 역사적 운동의 조종간이 되었다.

코젤렉은 이렇듯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구조와 문화, 그리고 사실과 언어 사이의 해묵은 역사연구 경계선에서 홀로 서기를 자처하였다. 그의 이론적 성찰이 우리 학계에 어떠한 본을 보여줄 수 있을까. 우선 개항 전후의 정치적 혼란기를 개념의미의 경험과 기대가 서로 어긋나는 위기상황으로 새롭게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농민전쟁, 정변, 개혁, 쇄국 등의 사건들이 혼재된 이 시기야말로 역사적 시간체험과 미래의 도전을 함축하고 있는 수많은 텍스트들이 분출하던 시대이다. 따라서 민족사의 견지로선 ‘궁핍한 시대’가 풍성한 개념의 시기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개념사 사전 편찬도 시급한 시대적 과제라 할 것이다.(박근갑 / 한림대, 독일사)

06. 0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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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9-14 00:33   좋아요 0 | URL
지금 역사용어 바로쓰기라는 책 보고 있는데 거기서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이름이 잠깐 언급되었어요. 앗! 해버렸답니다.

로쟈 2006-09-15 00:34   좋아요 0 | URL
예, 역사학의 거장이라고 하는데, 국내에서는 좀 덜 알려진 감이 있습니다...
 

동국대 대학원신문에서 흥미로운 글 하나를 옮겨놓는다(교수신문에 링크돼 있다). '슬라보예 지젝과 가라타니 고진의 가상대담: 문제는 정치경제학이다!'란 제목이며 필자는 문학평론가 복도훈씨이다.

코기토(Cogito)……: 정신분석과 맑스주의

슬라보예 지젝: 안녕하십니까. 93년이었던가요, 제가 가라타니 고진 씨가 관여하던 ‘비평공간’에 초대되어 선생의 후배인 아사다 아키라 씨와 대담을 나눈 지가. 그 잡지에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연재번역한 때로부터 참으로 많은 시간이 지났군요. 상이한 조건 속에서도 비슷한 작업을 하는 지식인들을 만나는 일은 제겐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특히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비판에 대한 선생의 끈질긴 열정은 감동적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벌써 그렇게 됐나요. 최근에 선생께서 제 책인 <트랜스크리틱: 칸트와 맑스>(2003; 영문판)에 대해 쓰신 서평 ‘시차視差적 관점The Parallax View’(2004)은 잘 읽어보았습니다. 저 역시 선생님의 역작인 <까다로운 주체>(2005; 일역판)에 대해 짧게나마 서평을 썼습니다. 거기서 해체론을 포함하는 탈근대주의 이론에 맞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옹호하는 선생의 제스처는 제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일찍이 저도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던 일본에서 <탐구>1·2(1986; 89)와 같은 이론적 저작을 통해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옹호한 바 있지요. 그래서 선생의 책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 말마따나 상이한 공간에서 작업을 하는 데도 ‘섬뜩하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말 그대로 시차(時差, 視差)죠(웃음). 그 전에 독자들을 위해 간단히 자기 경력을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지젝: 좋습니다. 저는 49년에 지금은 해체된 유고슬라비아의 연방 국가였던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공산국가였기 때문에 저는 맑스주의와 친숙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맑스주의, 특히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당과 체제의 공식이론이었고 저는 거기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별도로 프랑스의 (탈)구조주의에 적극 관심을 가졌습니다. 제가 친구들과 함께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1967)를 대학 1학년 때 번역했는데, 68년의 일이었으니 아마 세계 최초의 번역이 될 겁니다(웃음). 이후에 저는 라캉정신분석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습니다. 80년대 초반, 저와 친구인 믈라덴 돌라르와 함께 이론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하고 라캉의 사위이자 수제자인 자크-알랭 밀레를 초청했습니다. 그때 밀레가 저와 돌라르에게 유학을 권해서 함께 파리 8대학에 갔습니다. 저는 88년에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증자: 헤겔이 지나간다>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듬해 영어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펴냈습니다. 동구사회주의가 무너질 즈음이고 자유주의 만세의 합창이 울려 퍼지던 분위기였죠. 그 무렵 유고슬라비아도 해체되었고 저는 슬로베니아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다가 다행히 떨어졌지요(웃음).

그로부터 약 20여 년 동안 저는 주로 영어권에서 활동하여 30권 가량의 책을 펴냈는데, 최근에 당신 책에 대한 서평을 토대로 <시차적 관점>을 냈죠. 저는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의 좌장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런 학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웃음). 그냥 저와 돌라르가 이론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해 각각 회장, 부회장을 맡은 격이지요. 그렇지만 돌라르를 비롯한 제 동료들인 알렌카 주판치치, 레나타 살레츨, 미란 보조비치 등은 매우 독창적인 저작을 펴내고 있지요. 저는 현재 라캉정신분석과 헤겔철학,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비판을 결합하여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맞설 보편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고진: 저는 41년생입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한편 당시의 좌익운동이었던 전공투에 몸담았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좌익운동이 테러리즘으로 귀결되고 난 후 저는 문학비평을 하는 동시에 <맑스, 그 가능성의 중심>(1974)과 같은 저작을 썼습니다. 맑스주의를 죽은 개 취급할 그 당시에 맑스에 관한 책을 써서 욕 좀 먹었지요(웃음). 한편으로 저는 <일본근대문학의 기원>(1980)과 같은 문학비평적 저작을 통해 근대문학이 제국주의적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와 공모하고 그것을 은폐한 흔적을 쫓으면서 일종의 해체론적 비평을 감행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푸코의 구성주의나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연관성이 있지만, 이른바 그것들의 속류판인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다릅니다. 나쓰메 소세키라는 일본근대 초창기의 대작가에서 저는 문학의 다른 가능성을 엿보았지요.

<트랜스크리틱>을 쓴 최근까지 제 관심사는 자본=국민=국가라는 보로메오 매듭을 해체하는 신연합운동(New Association Movement)의 구체적인 형태를 구성하는 데에 있습니다. 실패로 끝났지만 지역통화(LETS)에 기반을 둔 NAM운동을 했던 것도 그런 연유였지요. 돌이켜보면, ‘맑스, 그 가능성의 중심’의 자본주의 비판,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서의 국민국가비판이 <트랜스크리틱>에서 종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트랜스크리틱>까지 저는 맑스주의 정치경제학비판과 문학비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느라 부심했지요. 최근에 <근대문학의 종언>(2005)을 통해 저는 문학을 떠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문학의 사회적 역할이 그 소임을 다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혼자서 1인 2역을 담당하느라고 거의 분열될 지경이었지요. 라캉학파 정신분석가에게 정신분석치료를 받다가 그만두었을 정도니까요(웃음). 아시다시피 일본은 라캉학파 시장(市場)입니다.

……에르고(Ergo)……: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비판

지젝: 저 역시 밀레로부터 정신분석임상훈련을 받다가 그만두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둘이서 교활한 분석가 대 음험한 히스테리증자로 지적 곡예를 벌였다는 느낌이지요. 그나저나 그때부터 저는 라캉정신분석의 임상치료에 대해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밀레와도 사이가 소원해 졌죠. 물론 라캉에 대한 그의 정교화작업은 여전히 찬탄을 불러일으키지만요. 저는 정신분석의 사회적·문화적 활용을 더 중요시 합니다. 저는 선생이 문학에 대해 비평작업을 수행한 것에 상응해서 대중문화에 대한 일종의 ‘증상적 독해’를 해왔지요. 그러나 저는 <삐딱하게 보기>(1991)나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1992) 등을 통해 할리우드 영화와 고급이론을 접목시키고 거기서 사람들이 대중문화를 ‘즐기는’ 방식을 관찰했습니다. 거기서 저는 온갖 정치적·사회적 이데올로기적 꿈, 말실수, 소망충족, 특히 죽음충동과 향유(jouissance)의 뒤틀린 형태를 발견했죠.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저는 포스트이데올로기 시대의 인간은 이데올로기로부터 거리를 둔 냉소적(풍자적) 형태로 이데올로기에 붙들려있다는 공식을 내놓았습니다. 단순히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리를 둔, 맑스로부터 알튀세에 이르는 비판적 독해로는 만족할 수 없었죠.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에서 바로 자신들이 ‘즐길만한’ 뭔가를 발견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그릇된 것인 줄 알면서도 (거리를 두면서도) 그것을 행하는 (그것에 참여하는) 이상한 역설이 생겨납니다. 예컨대 90년대 이후의 인종주의, 특히 제 조국이 속해있던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인종적 증오와 폭력의 향유는 사실 그에 대해 경악한 서구의 냉소주의와 구조적으로 상동관계입니다. 돌라르는 발칸반도는 서구유럽의 무의식이라고 했죠. 저는 라캉, 특히 후기라캉의 정신분석을 이데올로기비판의 강력한 형태로 재가공했습니다. 실재(The Real)와 향유, 증환(sinthome) 등과 같은 개념이 제게 중요하죠.

고진: 저는 선생과는 조금 다르게 맑스, 특히 <자본론>을 제 비판적 사유의 준거점으로 삼고 출발했습니다. 제가 하부구조만 선생이 상부구조만 문제시했다는 건 오해가 되겠죠. 저와 선생 모두 상품형식에 대한 맑스의 비판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정치경제라는 매트릭스를 문제 삼고 있죠. 저도 '일본정신분석’이라는 글에서 정신증적 폐제(foreclosure)라는 라캉의 개념을 통해 안으로는 포스트모던적이지만 밖으로는 자폐적인 일본의 담론공간을 분석한 바 있습니다. 뭐, 일본의 어떤 포스트모던 역사학자들은 일본의 남경대학살(1938)은 구성된 담론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말하니까요(웃음). 지나가면서 언급했지만 <트랜스크리틱>에서 자본=국민(nation)=국가(state)라는 삼항조는 실재=상상계=상징계라는 라캉적 보로메오 매듭과 연결됩니다. 이건 단순한 유비는 아닙니다. 저는 오랫동안 <자본론>을 읽으면서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숨 막힐 듯한 영구적 순환이 자본주의경제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기묘한 틈새, 예컨대 공황(위기)을 통해 자본주의가 더욱 가속화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젝: 상처는 상처를 낸 창만이 치유한다!

고진: 그렇죠. 예컨대 물건은 팔리지 않으면, 다시 말해 유통과정에 참여하지 않으면 상품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특유의 ‘목숨을 건 비약’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황 때에 생산된 물건을 바다에 내다 버리는 것이지요. 그건 상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유통과정, 즉 화폐(M)-상품(C)-화폐(M) 사이에 틈새, 생산자인 노동자들이 동시에 소비자가 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은 생산과정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파업, 스트라이크와 같은 폭력적 형태로 자본주의에 저항해왔지만, 거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오히려 유통과정에 주목하면 문제가 풀리죠. 생산자는 곧 소비자이기도 합니다. 맑스가 2천년 동안 지속해온 수수께끼라고 말했던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물건을 생산해서 상품이 될 때 넘겨지는 차액이지만, 이것은 또한 노동자=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할 때도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역통화나 NAM을 통해 잉여가치가 0(zero)인 교환형태를 구상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노동력 상품을 팔지 마라’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이론과 함께 ‘자본가의 상품을 사지 마라’는 간디의 노력은 소중합니다. 지금까지 자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듯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비판만으로는 사라지지 않는 국민=국가를 재조명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국민에 대해 소비자연합을, 국가에 대해 소비자 연합단체나 기구를 상상해보면 됩니다. 그것은 국민=국가 ‘사이에 존재하는’(in between) 새로운 코뮌의 기반이 될 것입니다.

……숨(Sum): 레닌주의와 신연합운동

지젝: 칸트 식으로 말하면 국민=국가=자본은 초월적 가상과 같은 것이라서 계몽주의적 비판만으로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다문화주의적 탈식민주의와 국민국가비판에 대해 제가 마뜩해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죠. 선생도 이에 대해 언급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칸트철학에서 초월적 가상은 보통 신·세계·영혼 같은 것인데, 이것은 이성 자체에서 연유하는 형이상학적 가상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입니다. 비판의 탄환으로 쏘아 죽였다싶더라도 흡혈귀처럼 살아남죠. 억압된 것의 회귀입니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나 저나 오늘날에 벌어지는 ‘칸트로의 회귀’에 일조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의견차가 있을 듯 합니다. 저는 독일관념론에서 헤겔을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생각하는데, 선생은 좀 다른 듯 합니다. 선생의 헤겔 비판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헤겔 비판, 즉 절대지에 가보지도 않고 의식과 절대지의 순환을 처음부터 닫힌 체계로 파악하는 듯…

고진: 이제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일만 남은 건가요(웃음). 선생의 책을 읽다보면 참조하는 철학자의 계열이 다르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생은 데카르트-칸트-셸링-헤겔과 함께 기독교철학자인 말브랑슈-파스칼-키르케고르를 중요시하지요. 현대철학자 중에서는 플라톤주의자인 알랭 바디우가 선생의 이론적 동지이고요. 저는 데카르트-스피노자-칸트-니체와 함께 데리다-푸코-들뢰즈의 사유노선에 아무래도 가까운 듯 합니다. 참, <신체 없는 기관: 들뢰즈와 결과들>(2004)을 읽어보니 선생은 모두가 사랑하는 스피노자를 홀로 싫어하고 계시더군요. 상징계를 고려하지 않은 상상계의 철학자라고(웃음).

지젝: 들뢰즈의 표현을 비틀어 저는 그것을 스피노자 뒤에서 하는 헤겔의 비역질이라고 했죠(웃음). 사실 헤겔의 절대지는 의식의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그것이 끊임없이 실패하는 구조적 불가능성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저는 그것을 실재라고 부릅니다. 사드 소설에는 자신의 성기를 자신의 항문에 삽입하는 기괴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런 점에서 의식을 절대지 뒤에 삽입시켜 닫힌 원환 고리를 완성하는 도착증적 꿈을 꾸는 자들은 바로 헤겔에 대한 비판자들인 거죠.

고진: 글쎄요. 정신분석적인 사후(事後)의 시점에서 헤겔을 전유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공평을 기하자면, 헤겔의 ‘법철학’과 같은 저서는 중요합니다. 헤겔은 다양한 욕망의 형태를 긍정하는 시민사회(자유)를 인정하면서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불평등을 제어할 수 있는 국가(평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둘의 불일치는 국민(형제애)이라는 상상력으로 보완되지요. 이것은 나중에 맑스가 각각 <루이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1852)과 <자본론>(1867)에서 행했던 근대국민국가비판과 정치경제학비판으로 이어집니다. 공교롭게도 맑스는 헤겔에 대한 긍정적 언급으로 두 책을 시작하고 있죠. 헤겔에겐 확실히 이러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타인을 수단뿐만 아니라 목적으로도 대하라’라고 말하는 칸트에서 코뮤니즘의 시작을 보고 싶습니다. 그는 계몽에 내재하는 ‘적대’(antagonism)에 대해 누구보다도 민감했습니다. 칸트는 계몽이 먼 미래에는 완성될 것이라고 보았지만, 스탈린주의자처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죠. 우리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을 상상하고 투쟁해도 좋습니다. 환경문제나 석유전쟁, 기아, 치명적 전염병 등이 일어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체제에서 칸트의 정언명법은 훌륭한 21세기 윤리입니다.

지젝: 그렇군요.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전지구적 자본주의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데요.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본에 대한 대항운동에 대해 의견을 나누면서 짧은 대담을 끝낼까 합니다. 네그리·하트의 <다중multitude>(2005)에 대해 말해보죠.

고진: 점점 더 가혹해지고 있는 후기자본주의체제에서 다중은 분명 긍정할 만한 요소가 있는 대항운동의 우세한 작인이지만, 뭐랄까, 지나치게 낭만적(문학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체제가 허용하는 한에서의 일시적 축제라고나 할까요. 다중은 맑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에서 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21세기 판본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요점은 ‘만국의 노동자여, 일하지 말자’입니다. 하지만 아까 말한 것처럼 이것 역시 생산력의 측면에서 자본에 대한 대항운동을 구상하는 전통적 발상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국가개념에 대한 성찰이 없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 대항한다면 알 카에다도 다중이 아닙니까. 다중은 애매모호합니다.

지젝: 다중은 이렇게 말하죠. ‘나는 동성애자이고 전업주부이며, 비정규직 노동자이고 팔레스타인인이다…’ 이것은 은유, 시(詩)라면 문제가 없지만, 분명 정치는 아닙니다. 연대는 필요합니다만, 저는 다른 관점에서 다중이 성, 인종 등의 범주를 들여오면서 계급문제를 흘려버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그들도 계급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성, 인종과 같은 종(鍾)으로 격하됩니다. 계급은 종이되 종이면서 유(類)입니다. 유일무이한 적대죠. 역시 문제는 정치경제학입니다(웃음)! 다중이론가들은 스피노자의 정동(affect)개념을 근간으로 삼지만, 이 정동이야말로 파시즘의 구성요소이기도 하죠. 그들은 ‘권력 없는 권력’을 원한다 말하지만, 이건 손안대고 코풀자는 거 아닙니까. 만일 그들이 권력을 잡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오히려 당파적 레닌주의나 바디우식의 마오이즘이 역으로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진: 다중에 대한 선생의 비판에는 동의합니다만, 레닌주의, 마오이즘의 정치적 폭력과 테러리즘은?

지젝: 저는 세계를 비난하되 자신은 거기에 빠져있는 좌파적 ‘아름다운 영혼’의 자기기만을 선택하느니보다 보수주의자처럼 손에 피를 묻히더라도 단두대를 선택하는 행위(act)가 낫다 생각하는 편입니다.

고진: 쉽지 않은 문제군요. 선생 식대로라면 자코뱅적 테러와 알 카에다의 테러를 어떻게 식별하죠? 저는 오히려 자본의 적대를 인식하는 새로운 소비자운동이야말로 대안이 아닐까 싶은데. 그렇지만 저나 선생이나 자본에 내재한 적대로부터 코뮨적 유토피아를 구상한다는 점에서는 동지입니다.(웃음)

지젝: 네(웃음). 아마도 그러한 노력이야말로 유토피아적인 순간에서 영원을 창출하는 행위일 겁니다. 자, 이것으로 짧은 대담을 아쉽게 정리해야할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복도훈 문학평론가)

06. 0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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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9-14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뻬빠는 어디에 있나요? 한데, 그럴 수도 있죠. 뭐...

로쟈 2006-09-14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난해한' 발음에 오히려 일가견이 있으신 듯.^^

pax 2006-09-17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가도 될까용^^??? 근데 도대체 어떻게 요로코롬 그럴듯하게 가상대담을 잘쓸까욤?

로쟈 2006-09-17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내용은 퍼온 건데요.^^

Ritournelle 2006-10-21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퍼가겠습니다.^^*
 

London Review of Books(LRB) 최근호에 실린, 지젝의 'The Parallax View '(MIT Press, 2006)에 대한 프레드릭 제임슨의 서평 '첫인상들'을 옮겨온다. 몇달 전에 구입해둔 책이긴 한데, 책상맡에 놓아두고 아직 읽을 시간을 못내고 있다. 제임슨의 서평이 자극이 되었으면 좋겠다.

LRB | Vol. 28 No. 17 dated 7 September 2006

First Impressions

Fredric Jameson

The Parallax View by Slavoj Zizek · MIT, 434 pp, £16.95

As every schoolchild knows by now, a new book by Zizek is supposed to include, in no special order, discussions of Hegel, Marx and Kant; various pre- and post-socialist anecdotes and reflections; notes on Kafka as well as on mass-cultural writers like Stephen King or Patricia Highsmith; references to opera (Wagner, Mozart); jokes from the Marx Brothers; outbursts of obscenity, scatological as well as sexual; interventions in the history of philosophy, from Spinoza and Kierkegaard to Kripke and Dennett; analyses of Hitchcock films and other Hollywood products; references to current events; disquisitions on obscure points of Lacanian doctrine; polemics with various contemporary theorists (Derrida, Deleuze); comparative theology; and, most recently, reports on cognitive philosophy and neuroscientific ‘advances’. These are lined up in what Eisenstein liked to call ‘a montage of attractions’, a kind of theoretical variety show, in which a series of ‘numbers’ succeed each other and hold the audience in rapt fascination. It is a wonderful show; the only drawback is that at the end the reader is perplexed as to the ideas that have been presented, or at least as to the major ones to be retained. One would think that reading all Zizek’s books in succession would only compound this problem: on the contrary, it simplifies it somewhat, as the larger concepts begin to emerge from the mist. Still, one would not have it any other way, which is why the current volume – which, with its companion The Ticklish Subject (1999), purports to outline the ‘system’ as a whole (if it is one), or at least to make a single monumental statement – inspires some apprehension.

It will be dialectical to say that this apprehension is and is not confirmed. The first chapter, which explains the title and seeks to ground Zizek’s philosophy in some definitive method, is tough going indeed; I’ll come back to it. But later chapters – on Heidegger and politics, on cognitive philosophy and its impasses, on anti-semitism, on politics today – are luminous and eloquent, and will surely stand as major statements, with enough to provoke and irritate people from one end of the ideological spectrum to another (I am myself attacked in passing as some kind of gullible practitioner of commodification theory). Nor are they lacking in jokes, as tasteless as you might wish, and in passing remarks on current films (Zizek seems to have got Hitchcock out of his system, if not out of his unconscious – one never does that).

As for what has persisted through this now considerable oeuvre, I will start with the dialectic, of which Zizek is one of the great contemporary practitioners. The old stereotype is that Hegel works according to a cut-and-dried progression from thesis, through antithesis, to synthesis. This, Zizek explains, is completely erroneous: there are no real syntheses in Hegel and the dialectical operation is to be seen in an utterly different way; a variety of examples are adduced. Still, that stupid stereotype was not altogether wrong. There is a tripartite movement in the Hegelian dialectic, and in fact, Zizek goes on, he has just illustrated it: stupid stereotype, or the ‘appearance’; ingenious correction, the underlying reality or ‘essence’; finally, after all, the return to the reality of the appearance, so that it was the appearance that was ‘true’ after all.

What can this possibly have to do with popular culture? Let’s take a Hollywood product, say, Fritz Lang’s Woman in the Window (1944). (Maybe now Fritz Lang belongs to high culture rather than mass culture, but anyway . . .) Edward G. Robinson is a mild-mannered professor who, leaving his peaceful club one night, gets caught up in a web of love and murder. We think we are watching a thriller. At length, he takes refuge in his club again, falls asleep from exhaustion, and wakes up: it was all a dream. The movie has done the interpretation for us, by way of Lang’s capitulation to the cheap Hollywood insistence on happy endings. But in reality – which is to say in the true appearance – Edward G. Robinson ‘is not a quiet, kind, decent, bourgeois professor dreaming that he is a murderer, but a murderer dreaming, in his everyday life, that he is a quiet, kind, decent, bourgeois professor’. Hollywood’s censorship is therefore not some puritanical, uptight middle-class mechanism for repressing the obscene, nasty, antisocial, violent underside of life: it is, rather, the technique for revealing it.

Zizek’s interpretative work, from page to page, seems to revel in these paradoxes: but that is itself only some ‘stupid first impression’ (one of his favourite phrases). In reality, the paradox-effect is designed to undo that second moment of ingenuity, which is that of interpretation (it looks like this to you, but in reality what is going on is this . . .): the paradox is of the second order, so that what looks like a paradox is in reality simply a return to the first impression itself.

Or perhaps we might rather say: this is not a paradox, this is perversity. And indeed, the dialectic is just that inveterate, infuriating perversity whereby a commonsense empiricist view of reality is repudiated and undermined. But it is undermined together with its own accompanying interpretations of that reality, which look so much more astute and ingenious than the commonsense empiricist reality itself, until we understand that the interpretations are themselves also part of precisely that ‘first impression’. This is why the dialectic belongs to theory rather than philosophy: the latter is always haunted by the dream of some foolproof self-sufficient system, a set of interlocking concepts which are their own cause. This dream is of course the after-image of philosophy as an institution in the world, as a profession complicit with everything else in the status quo, in the fallen ontic realm of ‘what is’. Theory, on the other hand, has no vested interests inasmuch as it never lays claim to an absolute system, a non-ideological formulation of itself and its ‘truths’; indeed, always itself complicit in the being of current language, it has only the vocation and never-finished task of undermining philosophy as such, by unravelling affirmative statements and propositions of all kinds. We may put this another way by saying that the two great bodies of post-philosophical thought, marked by the names of Marx and Freud, are better characterised as unities of theory and practice: that is to say that their practical component always interrupts the ‘unity of theory’ and prevents it from coming together in some satisfying philosophical system. Alain Badiou has recently coined the expression ‘anti-philosophy’ for these new and constitutively scandalous modes of intervening conceptually in the world; it is a term that Zizek has been very willing to revindicate for himself.

Still, what can be the theoretical, if not indeed the philosophical content of Zizek’s little interpretative tricks? Let’s first take on the supremely unclassifiable figure who somehow, in ways that remain to be defined, presides over all Zizek’s work. One of Jacques Lacan’s late seminars has the title Les Non-Dupes errent. The joke lies in the homophony of this enigmatic proposition (‘the undeceived are mistaken’) with the oldest formula in the Lacanian book, ‘le nom du Père’, the name of the Father or, in other words, the Oedipus complex. However, Lacan’s later variant has nothing to do with the Father, but rather with the structure of deception. As everyone knows, the truth is itself the best disguise, as when the spy, asked what he does in life, answers, ‘Why, I’m a spy,’ only to be greeted with laughter. This peculiarity of truth, to express itself most fully in deception or falsehood, plays a crucial role in analysis, as one might expect. And as one might also expect, it is in that great non- or anti-philosopher Hegel that we find the most elaborate deployment of the dialectic of the necessity of error and of what he called appearance and essence, as well as the most thoroughgoing affirmation of the objectivity of appearance (one of the deeper subjects of The Parallax View). The other great modern dialectician, Theodor Adorno (whose generic tone compares with Zizek’s, perhaps, as tragedy to comedy), was fond of observing that nowhere was Hegel closer to his heroic contemporary Beethoven than in the great thunderchord of the Logic, the assertion that ‘Essence must appear!’

Yet this insistence on appearance now seems to bring us around unexpectedly to the whole vexed question of postmodernism and postmodernity, which is surely nothing if it is not a wholesale repudiation of essences in the name of surface, of truth in the name of fiction, of depth (past, present or future) in the name of the Nietzschean eternally recurring here-and-now. Zizek seems to identify postmodernism with ‘postmodern philosophy’ and relativism (an identification he shares with other enemies of these developments, some of them antediluvian, some resistant to the reification of the label), while on the other hand he endorses the proposition of an epochal change, provided we don’t call it that and provided we insist that it is still, on whatever scale, capitalism – something with which I imagine everyone will nowadays be prepared to agree. Indeed, some of his basic propositions are unthinkable except within the framework of the epochal, and of some new moment of capitalism itself; Lacan is occasionally enlisted in the theorisation of these changes, which have taken place since Freud made his major discoveries.

Take the new definition of the superego. No longer the instance of repression and judgment, of taboo and guilt, the superego has today become something obscene, whose perpetual injunction is: ‘Enjoy!’ Of course, the inner-directed Victorian must equally have been directed to enjoy his own specific historical repressions and sublimations; but that jouissance was probably not the same kind of enjoyment as that taken by the subject of consumer society and of obligatory permissiveness (Marcuse called it ‘repressive desublimation’), the subject of a desperate obligation to ‘liberate’ one’s desires and to ‘fulfil oneself’ by satisfying them. Yet psychoanalysis always involves a tricky and unstable balance between the theorisation of an eternal human psyche and the historical singularity of culture and mores: the latter tilts you back into periodisation, while the ‘eternal’ model is secured by the simple reminder that desire is never satisfied, whether you are a Victorian in thrall to duty or a postmodern intent on pleasure.

This is the point at which we reach the most persistent of all Zizek’s fundamental themes: namely, the death wish, the Thanatos, or what he prefers to call the ‘death drive’. Modern theory is indeed haunted by Freud’s death wish, that better mousetrap which any self-respecting intellectual owes it to himself or herself to invent a theory of (Freud’s own version having satisfied nobody). But we also owe it to ourselves to retain everything that is paradoxical (or perverse) in Zizek’s (or in Lacan’s) version of the matter; for here the Thanatos has nothing to do with death at all. Its horror lies in its embodiment as life itself, sheer life, indeed, as immortality, and as a curse from which only death mercifully relieves us (all the operatic overtones of The Flying Dutchman are relevant here, all the mythic connotations of the Wandering Jew, or indeed the vampire, the undead, those condemned to live for ever). The death drive is what lives inside us by virtue of our existence as living organisms, a fate that has little enough to do with our biographical destinies or even our existential experience: the Thanatos lives through us (‘in us what is more than us’); it is our species-being; and this is why it is preferable (following the later Lacan) to call it a drive rather than a desire, and to distinguish the impossible jouissance it dangles before us from the humdrum desires and velleities we constantly invent and then either satisfy or substitute.

As for jouissance, it is perhaps the central or at least the most powerful category in Zizek’s explanatory resources, a phenomenon capable of projecting a new theory of political and collective dynamics as much as a new way of looking at individual subjectivity. But to grasp the implications it is best to see jouissance as a relational concept rather than some isolated ‘ultimately determining instance’ or named force. In fact, it is the concept of the envy of jouissance that accounts for collective violence, racism, nationalism and the like, as much as for the singularities of individual investments, choices and obsessions: it offers a new way of building in the whole dimension of the Other (by now a well-worn concept which, when not merely added mechanically onto some individual psychology, evaporates into Levinassian sentimentalism). The power of this conception of envy may also be judged from the crisis into which it puts merely consensual and liberal ideals like those of Rawls or Habermas, which seem to include none of the negativity we experience in everyday life and politics. Zizek, indeed, includes powerful critiques of other current forms of bien-pensant political idealism such as multiculturalism and the rhetoric of human rights – admirable liberal ideals calculated to sap the energies of any serious movement intent on radical reconstruction.

All these ideals presuppose the possibility of some ultimate collective harmony and reconciliation as the operative goal or end of political action. It would be wrong to identify these ultimate aims with utopian thinking, which on the contrary presupposes a violent rupture with the current social system. Rather, they are associated, for Zizek, with that quite different absence of antagonism denounced in his very first boo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1989), a target also identified by Lacan and which has always been central in Zizek’s tireless explanations and propagation of Lacanian doctrine. This is the conviction that human subjectivity is permanently split and bears a gap within itself, a wound, an inner distance that can never be overcome: something Lacan demonstrated over and over again in an extraordinarily complex (and dialectical) articulation of the original Freudian models. But taken at this level of generality it is a view that might easily lead to social pessimism and conservatism, to a view of original sin and the incorrigibility of some permanent human nature.

It is to forestall and exclude just such a disastrous misunderstanding of the social and political consequences of the Lacanian ‘gap’ that is the task of The Parallax View. The book does so, however, not by any immediate extrapolation of the gap or constitutive distance from individual to collective; but rather by juxtaposing the theoretical consequences of split subjectivity on a variety of disciplinary levels (whence the difficulty of the opening chapter).

A parallax, Webster’s says, is ‘the apparent displacement of an observed object due to a change in the position of the observer’; but it is best to put the emphasis not on the change or shift, so much as on the multiplicity of observational sites, for in my opinion it is the absolute incommensurability of the resultant descriptions or theories of the object that Zizek is after, rather than some mere symptomal displacement. The idea thus brings us back to that old bugbear of postmodern relativism, to which it is certainly related. (Popular locution mutes this scandal by way of narrative: X tells the story of quantum theory, or modern dictatorship, this way; Y tells a different story. These convenient and widely accepted turns of phrase efface all the serious philosophical debates about causality, historical agency, the Event, philosophies of history, and even the status of narrative itself, which is probably why Zizek, assimilating the problems themselves to ‘postmodern philosophy’, has often been dismissive of narrative as such.)

The more fundamental difference at issue can be measured by comparing the parallax idea with the old Heisenberg principle, which asserted that the object can never be known, owing to the interference of our own observational system, the insertion of our own point of view and related equipment between ourselves and the reality in question. Heisenberg is then truly ‘postmodern’ in the assertion of an absolute indeterminacy of the real or the object, which withdraws into the status of a Kantian noumenon. In parallax thinking, however, the object can certainly be determined, but only indirectly, by way of a triangulation based on the incommensurability of the observations.

The object thus is unrepresentable: it constitutes precisely that gap or inner distance which Lacan theorised for the psyche, and which renders personal identity for ever problematic (‘man’s radical and fundamental dis-adaptation, mal-adaptation, to his environs’). The great binary oppositions – subject v. object, materialism v. idealism, economics v. politics – are all ways of naming this fundamental parallax gap: their tensions and incommensurabilities are indispensable to productive thinking (itself just such a gap), provided we do not lapse into some complacent agnosticism or Aristotelian moderation in which ‘the truth lies somewhere in between’; provided, in other words, we perpetuate the tension and the incommensurability rather than palliating or concealing it.

The reader will judge from the case-studies in this volume whether parallax theory has been fruitful. In particular, the chapter on the dilemmas of cognitive science – the material brain and the data of consciousness – is a superb achievement which transcends Spinozan parallelism towards the ultimate Hegelian paradox: ‘Spirit is a bone.’ As far as politics is concerned, it seems to me that Zizek’s lesson is as indispensable as it is energising. He believes (as I do) that Marxism is an economic rather than a political doctrine, which must tirelessly insist on the primacy of the economic system and on capitalism itself as the ultimate horizon of the political situation (as well as of all the other ones – social, cultural, psychic and so forth). Yet it was always a fundamental mistake to think that Marxism was a ‘philosophy’ which aimed at substituting the ‘ultimately determining instance’ of the economic for that of the political. Karl Korsch taught us eighty years ago that for Marxism the economic and the political are two distinct and incommensurable codes which say the same thing in radically different languages.

So how to think about the concrete combinations they present in real life and real history? At this point, we glimpse what is clearly Zizek’s basic Lacanian model for parallax: it is the Master’s scandalous and paradoxical idea that between the sexes ‘il n’y a pas de rapport sexuel’ (Seminar XX). ‘If, for Lacan, there is no sexual relationship,’ Zizek writes, ‘then, for Marxism proper, there is no relationship between economy and politics, no “meta-language” enabling us to grasp the two levels from the same neutral standpoint.’ The practical consequences are startling:

To put it in terms of the good old Marxist couple infrastructure/superstructure: we should take into account the irreducible duality of, on the one hand, the ‘objective’ material socioeconomic processes taking place in reality as well as, on the other, the politico-ideological process proper. What if the domain of politics is inherently ‘sterile’, a theatre of shadows, but nonetheless crucial in transforming reality? So, although economy is the real site and politics is a theatre of shadows, the main fight is to be fought in politics and ideology.

This is a far better starting point for the left than the current interminable debates about identity v. social class (it also seems to me a more appropriate climax than the enigmatic reflections on ‘Bartleby’ that actually close the book).

But it is appropriate, in the light of the earlier discussion, to ask just how dialectical this now turns out to be. I think an argument would run something like this: that third moment of the dialectic which returned to appearance as such is sometimes described (in Hegelian jargon) as returning to ‘appearance qua appearance’, to appearance with the understanding both that it is appearance and that nonetheless as appearance it has its own objectivity, its own reality as such. This is precisely what happens, I believe, with the two alternatives of the parallax, let us say the subjective and the objective one. To discover that neither the code of the subject nor the code of the object offers in itself an adequate representation of the unrepresentable object it designates means to rediscover each of these codes as sheer representation, to come to the conviction that each is both necessary and incomplete, that each is so to speak a necessary error, an indispensable appearance. I would only want to wonder whether there are not more complex forms of the parallax situation which posit more than two alternatives (on the order of subject and object), but which rather confront us with multiple, yet equally indispensable codes.

I cannot conclude without explaining my hesitant apprehensions about Zizek’s project. Clearly, the parallax position is an anti-philosophical one, for it not only eludes philosophical systemisation, but takes as its central thesis the latter’s impossibility. What we have here is theory, rather than philosophy: and its elaboration is itself parallaxical. It knows no master code (not even Lacan’s) and no definitive formulation; but must be rearticulated in the local terms of all the figurations into which it can be extrapolated, from ethics to neurosurgery, from religious fundamentalism to The Matrix, from Abu Ghraib to German Idealism.

Yet theory was always itself ‘grounded’ on a fundamental (and insoluble) dilemma: namely, that the provisional terms in which it does its work inevitably over time get ‘thematised’ (to use Paul de Man’s expression); they get reified (and even commodified, if I may say so), and eventually turn into systems in their own right. The self-consuming movement of the theoretical process gets slowed down and arrested, its provisional words turn into names and thence into concepts, the anti-philosophy becomes a philosophy in its own right. My occasional fear is, then, that by theorising and conceptualising the impossibilities designated by the parallax view, Zizek may turn out to have produced a new concept and a new theory after all, simply by naming what it is probably better not to call the unnameable.

06. 0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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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2006-09-13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메일로 편지 한 통 보냈습니다. 제대로 갔는지 모르겠네요. ^^;;

로쟈 2006-09-13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인해봤지만 없습니다. 그냥 서재주인에게만 보이기로 내용을 적어주시길...

2006-09-13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9-13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답장 보내드렸습니다...

로쟈 2006-09-14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다시 보내드렸습니다. 확인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