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는 월요일이 죽음이다. 두 군데 대학에서 다섯 시간의 강의가 있고, 덕분에 네 시간 반을 버스와 전철을 타며 보낸다. 아마도 외판원들의 일상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조금 늦은 저녁시간에 집에 돌아오면 또 골골대는 식구들 탓에 마음 한 구석이 무겁고,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머리마저 무거워진다. 커피 한잔 마시고, <맥베스>에 관한 글을 마저 정리할까 하다가 잠시 20대에 쓴 시들을 읽어본다. 늦게 저녁을 먹었기에 허기진 상태는 아닌건만 '만두를 생각하며'란 시가 눈에 들어온다(하긴 '닭곰탕을 먹으며'도 옆에 있긴 하다). 냉동실에 유통기한이 지난 물만두도 있긴 하지만, 내가 떠올리는 만두는 설연휴에 온가족이 달려들어 빚어먹는 김치만두국이다(그러고 보니 좀 뜬금없군).

 

다진 고기에 두부와 김치를 잘게 썰어넣고 당면도 넣고

그걸 자루에 넣어 잘 쥐어짜면 만두 속이다, 만두의 속마음

물기 빠진 속마음은 그렇게 잘 다져진 칼로리들의 집적이고

맛의 배합이며 뻗친 정성의 맛깔스런 빛깔이다

만두의 속마음


그걸 끊는 물에 넣어 만두국을 만들고

그걸 튀겨 튀김만두를 만들고

그걸 삶아 물만두를 만든다


피가 너무 얇은 만두는 때로 터지기도 한다

이미 속마음의 핏줄이 보이던 만두

저 혼자 온몸이 부서져라 통곡하기도 한다


터진 만두도 맛은 괜찮다

 

 

옮겨놓고 보니까 좀 싱겁다는 생각도 드는군(간장도 갖다 놓아야 할까?). '만두'하니까 러시아식 '고기만두'인 피로그(복수형은 '피로기')가 생각난다. 하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어떤 모양의 어떤 맛이라고 꼬집이 말하기 어렵지만. 게다가 '고기만두'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상은 '파이'에 더 가깝다. 그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헐리우드 영화 <아메리칸 파이>가 러시아판으로는 <아메리칸 피로그>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래는 '치즈를 넣은 피로그'인데 이쯤되면 그냥 피자 아닌가? 그러니까 피로그는 만두이자 파이이고 피자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아주 비싸게 먹은 아르메니아식 만두가 생각나는군. 그건 그래도 우리식 '고기만두'에 가장 가까웠다. 터무니없이 비쌌다는 걸 제외하면...

겉모양으로는 다 제각각이지만 속터지는 마음들만큼은 다 비슷비슷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06. 0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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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9-11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터지는 마음들이야 다 비슷비슷해서일지도 모르지요...

마노아 2006-09-12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좋은 걸요. 근데 이 밤중에 배고파졌어요ㅡ.ㅜ

로쟈 2006-09-12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시로는 배를 채울 수가 없지요.^^

이네파벨 2006-09-12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장을 갖다놓아야 할까" 멋진 농담입니다. ^0^
시로는 배를 채울 수 없을뿐더러 더욱 허기지게 만들지요...

만두먹고싶어요!!!
(저도 그 김치 넣고 만든..집에서 손으로 빚어먹는 만두...너무 좋아합니다. 저희 할머니가 이북분이셔서..어릴때 명절이면 실컷 먹곤 했지요...첫애 가져 입덧할때도 다른 음식은 다 먹기 싫은데 이 만두가 먹고싶어서 친정엄마가 잔뜩 만들어서 얼려서 공수해주셨던 기억이....지금은 친정엄마도 기력이 약하셔서 만두만들 엄두를 못내시고 저는 아예 시도조차 해본 일이 없고..남편도 김치만두를 좋아하지 않아서...집에서 만든 수제만두는 먹어볼 일이 없어요....가끔 아들내미 학원 끝나고 데리고 오면서 그 근처 만두집에서 황해도식 만두를 사먹는데...그런대로..꿩대신 닭이예요~)

sommer 2006-09-12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만두 속은 터질 운명이었군요...^^ 들키지 않게 꼭꼭 숨겨 놓아도...

자꾸때리다 2006-09-12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만두와 물만두 뭐가 더 맛있을까연?

로쟈 2006-09-13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군만두를 더 좋아하긴 합니다만...

노부후사 2006-09-13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이 어떤지 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배가 고파서 그런지 굉장히 궁금하네요.

로쟈 2006-09-13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로기 맛이 궁금하신 건가요? 만두도 마찬가지지만, 밀가루피 같은 거에 이것저것 넣어서 싸먹는 걸 총칭하는 게 아닌가 싶고, 맛은 당연히 내용물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제가 먹어본 건 몇 종류 안되지만). 허기를 때울 정도는 됩니다...
 

마땅한 핑계가 없을 때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주일 예배를 다녀온다. 대개는 설교 시간에 졸다가 오기 십상이지만(내가 좋아하는 시간은 설교시간이 아니라 기도시간이다) 그래도 '다윗의 덫'이란 제목의 오늘 설교말씀은 몇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어서 절반은 졸지 않을 수 있었다(이럴 때는 들고 간 한영성경과 러시아어성경을 이리저리 들춰보기도 한다). '다윗의 덫'이란 설교말씀은 사뮤엘하 11장 1-5절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그 유명한 '다윗과 바세바'의 일화를 다룬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남의 아내와 동침하고서는 그 남편을 죽게 만든 후에 그 여자를 아예 아내를 맞아들인 다윗의 '색욕'과 '주책'에 관한 일화인데, 다윗에 관한 허다한 일화들 가운데 그래도 가장 '재미있는' 일화가 아닌가 한다. 이게 내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건 헐리우드에서 이미 <다윗과 바세바>(1951)란 영화를 만든 바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그레고리 펙과 수잔 헤이워드 주연이다. 그레고리 펙은 '맥아더 장군' 역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배우).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여기에 다 늘어놓을 형편이 되지 않기에 성경말씀과 함께 몇 가지 이미지들만을 먼저 저장해둔다. 사무엘하 11장의 1-5절을 읽단 읽어보기 전에 렘브란트가 그린 '바세바'(<다윗왕의 편지를 받은 바세바>)를 잠시 감상해본다. 성경의 구절은 우리말로 읽기 편한 공동번역 성경에서 인용한다.   

1 해가 바뀌는 때가 왕들이 싸움을 일으키는 때였다. 그 때가 되자 다윗은 요압에게 자기 부하 장교들과 이스라엘 전군을 맡겨 내보냈다. 그들은 암몬을 무찌르고 마침내 라빠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다.
2 어느 날 저녁에 다윗은 침대에서 일어나 궁전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을 하고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다.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3 다윗이 사령을 보내어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니, 사령은 돌아와서 그 여인은 엘리암의 딸 바쎄바인데 남편은 헷 사람 우리야라고 보고하였다.
4 다윗은 사령을 보내어 그 여인을 데려다가 정을 통하고는 돌려 보냈다. 여인은 마침 부정을 씻고 몸이 정결한 때였다.
5 바쎄바의 몸에 태기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다윗에게 자기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렸다.

이 구절들에 대해서 목사님이 설교말씀을 하시는 중에 내가 한 딴짓은 4절에서 "여인은 마침 부정을 씻고 몸이 정한 대였다", 즉 '목욕했다'의 시점 문제를 따져본 것이었다. 러시아 성경에서는 다윗과 정을 통한 이후에 목욕하고 집에 돌아갔다는 식으로 번역돼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내가 갖고 있는 한영성경에서는 모두 다윗에게 오기 전에 목욕하고 온 것으로 돼 있다. 러시아어 성경의 오역일까? 하긴 오며가며 했을 목욕일 텐데, 순서야 대수롭지 않을 듯도 하지만. 아래는 영화속에서 목욕하는 바세바 역의 수잔 헤이워드.

50이 넘은 '늙은' 나이에 남의 아낙을 탐한 다윗의 '정력'이 부러워할 만한 것인지 지탄받을 만한 것인지는 다윗과 바세바를 그린 다른 그림들을 보건대, 다윗과 바세바의 관계가 영화에서처럼 멋있는 커플 관계였을 법하진 않다. 한 산부인과 의사는 ''핍쇼' 중독자 다윗'이란 칼럼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관음증은 다른 사람이 옷을 벗거나, 나체의 모습 혹은 타인의 성관계하는 장면을 몰래 보는 것을 즐기고 성적 쾌감을 느끼는 경우를 말한다. 사춘기를 거쳐 청소년 시기에는 누구나 이러한 경향이 있으므로 병적이고 비정상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청소년기를 지난 후에도 강박적으로 이러한 행위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사회생활, 직장생활에 비건전한 악영향을 준다면 진단될 수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위대하고 현명한 유대의 왕으로 추앙받는 다윗 역시 ‘관음증’의 희생자였을 가능성이 큰데, 그림(*어느 그림인지는 모르겠다)에 묘사된 것을 보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푸른 하늘에 흰구름이 떠있고 눈부신 햇살만큼 투명한 알몸을 드러낸 저 멀리 옥상의 아찔한 눈부신 여인의 알몸은 이민족과의 전쟁을 앞두고 깊은 시름에 잠긴 왕의 눈동자를 단숨에 사로잡는다. 번쩍 태양보다도 강렬한 자극에 이성을 잃은 왕은 백성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유부녀인 그녀를 차지하고야 만다. 믿을 수 없게도 이 과정에서 음모를 꾸며 그녀를 과부로 만들어 버리는 만행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바세바, 그녀가 별볼일 없는 남편에게 실망해 화려한 권력을 꿈꾼 채로 대낮의 목욕이라는 치밀한 각본 끝에 스트레스 쌓인 왕을 유혹한 것인지, 정말로 우연한 대낮의 목욕에 ‘핍쇼’중독자인 늙은 왕이 주책없이 매료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남성의 부정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한 사람들은 그의 욕망을 추악한 관음증 탓으로 돌리지 않고 천하의 악녀 바세바가 그의 페니스에 술수를 부린 것으로 해석해 남성을 단지 어쩔 수 없었던 희생자로 격상시킨다('스포츠서울' 05. 10. 10).

적어도 이후에 벌어진 결과는 다윗의 '주책'보다 바세바의 '각본'에 힘을 실어주는 듯하다. 11장의 나머지 절들을 마저 읽어보기로 하자. 

6 그러자 다윗은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어 헷 사람 우리야를 자기에게 보내라고 하였다. 요압이 우리야를 다윗에게 보냈다.
7 우리야가 당도하자 다윗은 요압과 병사들의 안부를 묻고 싸움터의 형편도 알아보고 나서
8 집에 돌아가 푹 쉬라고 하였다. 우리야가 어전에서 물러나올 때 왕은 술상까지 딸려 보냈다.
9 그러나 우리야는 집으로 가지 아니하고 대궐 문간에서 근위병들과 함께 잤다.
10 다음날 다윗은 우리야가 집에 돌아가 자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우리야에게 물었다. "그대는 먼 길에서 돌아온 몸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집에 내려가 보지 않았는가?"
11 우리야가 다윗에게 대답하였다. "온 이스라엘 군과 유다 군이 야영 중입니다. 법궤도 거기에 있습니다. 제 상관 요압 장군이나 임금님의 부하들도 들판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만 집에 가서 편히 쉬며 먹고 마시고 아내와 더불어 밤을 지내다니,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12 다윗은 "그럼 오늘은 여기에서 지내도록 하오." 하며 우리야에게 내일은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우리야는 그 날도 예루살렘에서 묵었다.
13 다음날 다윗은 우리야를 불러들여 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게 하여 그를 흠뻑 취하게 만들었다. 우리야는 그 날 저녁에도 어전에서 물러나와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근위병들과 함께 잤다.
14 날이 밝자 다윗은 요압 앞으로 편지를 써서 우리야에게 주어 보냈다.
15 다윗은 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야를 가장 전투가 심한 곳에 앞세워 내보내고 너희는 뒤로 물러나서 그를 맞아죽게 하여라."
16 요압은 성을 지켜보고 있다가 강병이 지키고 있는 데를 알아내어 그 곳으로 우리야를 보냈다.
17 그러자 그 성에서 적군이 나와 요압의 군대를 쳤다. 다윗의 부하들은 쓰러지고 헷 사람 우리야도 죽었다.
18 요압은 다윗에게 전황을 보고할 전령을 보내면서
19 이렇게 지시하였다. "이번 싸움의 보고를 드리면,
20 왕께서 화를 내시며 '어쩌자고 그렇게까지 성에 가까이 쳐들어갔었느냐? 성벽에서 화살이 날아올 줄도 몰랐느냐?
21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이 누구의 손에 죽었느냐? 데베스 성벽 위에서 어느 하잘것없는 한 계집이 내려 던진 맷돌에 맞아 죽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성벽 가까이 갔었느냐?' 하고 꾸짖으실 것이다. 그 때 너는 왕의 부하 헷 사람 우리야도 죽었다고 아뢰어라."
22 전령은 길을 떠나 다윗에게 와서 요압이 이른 대로 보고하였다. 그러자 다윗은 화를 내며 전령에게 호통을 쳤다. "어찌하여 그렇게까지 성에 가까이 쳐들어갔었느냐? 적군이 성벽에서 화살을 쏘아댈 줄도 몰랐더냐?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이 누구의 손에 죽었느냐? 데베스 성벽 위에서 한 계집이 내려 던진 맷돌에 맞아 죽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그렇게까지 성에 가까이 갔었느냐?"
23 전령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적군이 들에까지 나와 우리를 몰아대기에 우리도 마주나가 놈들을 쫓다 보니 성문 가까이까지 쳐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4 그 때 성 위에서 활을 쏘아대는 바람에 임금님의 근위병도 몇이 죽었고 임금님의 부하인 헷 사람 우리야도 죽었습니다."
25 이 말을 듣고 다윗은 전령에게 말하였다. "요압에게 돌아가거든, '전장에서는 누구든지 죽을 수 있는 것이니, 이 일로 걱정하지 말고 힘을 다하여 기어이 그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시오.' 하고 일러라." 이런 말로 그에게 용기를 주라고 하였다.
26 우리야가 전사했다는 전갈을 받고 그의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곡을 했다.
27 곡하는 기간이 지난 다음, 다윗은 예를 갖추어 그 여인을 궁으로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는데, 그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다윗이 한 이 일이 야훼의 눈에 거슬렸다.

야훼(여호와)의 눈밖에 난 다윗과 바세바의 아이는 결국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아 죽고 만다. 하지만, 그들은 곧 둘째 아들을 갖게 되는바 그가 바로 (생전에!) 다윗의 대를 잇는 솔로몬이다. 우리야의 아내로 남아있었다면 바세바가 솔로몬의 어머니, 곧 국모가 될 수 있었을까? 더불어, 이 솔로몬은 다윗뿐만 아니라 야훼의 사랑마저도 독차지하게 되는데 말이다(사무엘하 12:24 "다윗이 아내 바쎄바를 위로하여 잠자리를 같이 하니 바쎄바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였다. 야훼께서 그 아이를 사랑하셨다").

내가 들은 설교말씀의 결론은 성도들이 '다윗의 덫'에 빠지지말아야 하다는 것이었는데, 좀 일면적이란 생각이 든다. 만약에 그랬다면 다윗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때로 악은 선을 잉태한다. 그것이 선악의 변증법인가? 둘 사이에서 낳은 첫째 아들은 죽게 했지만 둘째 아들은 사랑한 게 또한 야훼의 법이었으니 이 또한 사랑과 증오의 변증법이라 할 만하다.

해서, 러시아 화가 마르크 샤갈이 다윗과 바세바에 관한 그림을 이처럼 그릴 때, 그가 염두에 둔 건 '불륜'이 아니라 '섭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은총'이었는지도. 인간의 우연한 의지란 그렇게 역사의 필연을 만들어가는 것 아닌가?..

06. 09. 10.

P.S.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내가 궁금해한 '목욕' 문제에 대하여 정확하게 답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성경의 난해구에 대한 질의응답인데, 답변은 민영진 목사의 것이다. 바세바/밧세바는 혼용돼 있다.

 

 

 

 

질문: <개역 개정판> 삼하 11장 4절 번역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개역>의 이해를 따르면, 1) 다윗이 자기 부하를 바세바에게 보냅니다. 2) 그 들이 바세바를 다윗에게 데려 옵니다. 3) 바세바는 자기 집을 떠나기 전에 벌서 월경(月經) 을 끝내고 깨끗하게 목욕을 하였습니다. 4) 다윗이 바세바와 동침합니다. 5) 그 일이 끝나자 바세바는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개역 개정판}의 번역을 따르면, 1) 다윗이 바세바에게 자기 부하를 보냅니다. 2)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합니다. 3) 다윗이 그 여 자와 동침합니다. 4) 다윗이 그 여자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합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습 니다). 5) 그래서 그 여인은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개역 개정판>)

바세바가 자신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한 것은 그가 자기 집을 떠나기 전입니다. 이 진술 이 다른 진술보다 시제상(時制上)으로 먼저 일어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후에 일어난 다른 연 속적 사건들 속에 진술되기 때문에 번역판들은 이 진술을 연속적인 사건 전개 속에 들어 있 는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이 본문을 괄호 속에 넣기도 합니다. 우리말 <공동번역>도, <표준새번역>도 이러한 <개역>의 이해와 상치하지 않는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만 <개역 개정판>은 "다윗이 전령을 보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여 그 여자와 동침 하고 그가 그 여자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개역 개정판>) 라고 달리 번역하였습니다. 이러한 개정의 배경을 묻고 싶습니다.

Het toilet van Bathseba

대답: 이미 질문 안에 대답이 주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우리말 번역들을 좀 구체 적으로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 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개역>)

    다윗은 사령을 보내어 그 여인을 데려다가 정을 통하고는 돌려보냈다. 여인은
   마침 부정을 씻고 몸이 정결한 때였다. (<공동번역>)
 
    그런데도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서 그 여인을 데려왔다. 밧세바가 다윗에게로
   오니, 다윗은 그 여인과 정을 통하였다. (그 여인은 마침 부정한 몸을 깨끗하게
   씻고 난 다음이었다.) 그런 다음에, 밧세바는 다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 (<표준새번역>)
  
    다윗이 전령을 보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여 그 여자와 동침하고 
   그가 그 여자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개역 개정판>)

<개역> <공동번역> <표준새번역>이 문제의 본문을 같게 번역하였는데 반하여, <개역 개정판>만이 같은 본문을 달리 번역하였다면, 일단 {개역 개정판}을 의심해 볼 수 있을 것 같 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역 개정판>에는 다윗을 가리키는 "그"와 바세바를 가리키는 "그 여자"의 용법에도 부정확한 데가 있습니다. "그가 그 여자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 로 그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에서, 앞의 "그가"는 다윗인데 반하여, 뒤의 "그가"는 문맥 으로 볼 때 "바세바인데도 불구하고, 듣기에 따라서는 마치 다윗을 가리킨 것처럼 들리기 도 하는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여러 동사의 주어를 구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을 보면 다음 과 같습니다.

1) 부하들을 보낸 이는 다윗이다.
2) 부하들을 시켜 밧세바를 데리고 온 이도 다윗이다.
3) 다윗에게 온 것은 바세바이다.
4) 그 여자와 동참한 것은 다윗이다.
5) 자신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한 이는 밧세바이다.
6)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은 밧세바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의 발생 순서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사건을 히브리어 본문으로 한 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1) 다윗이 부하를 보냈다 (히브리어 완료태 동사)
2) 그가 그 여자를 데리고 왔다 (히브리어 완료태 동사)
3) 밧세바가 다윗에게 왔다 (히브리어 완료태 동사)
4)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였다 (히브리어 완료태 동사)
5) 밧세바가 자신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다 (히브리어 분사)
6) 밧세바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히브리어 완료태 동사)

위에서 보듯이 여섯 개의 동사 중에서 다섯 번째의 동사를 제외한 다른 다섯 개 동사가 모두 와우 연결법(waw consecutive) 형태를 지니고 있는 완료태 동사임을 확인할 수 있습 니다. 그리고 이들 동사들의 발생 순서는 여기 나열된 순서 그대로입니다. 다만 밧세바가 자 신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한 것만은 완료태가 아닌 분사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분사 로 표현된 동사의 사건이 다른 완료태 동사와 관련된 다른 사건들과 같은 맥락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의 본문은 밧세바가 이미 다윗에게 오기에 앞서서 월경을 끝 낸 상태에서 목욕을 하여 자기의 몸을 정결하게 하였고, 그런 상태에서 다윗과 동침하여 임신을 하게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역 개정판>의 모호한 표현도 다음과 같이 고치면 더 분명해 질 것입니다. 

    다윗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 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
   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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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6-09-11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엉뚱한 이야기입니다만 생물학적으로만 보자면 월경을 막 끝낸 상태에서는 임신이 안되지 않을까요?

로쟈 2006-09-1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에 그렇게 디테일하게 서술하는 것 같지는 않구요(^^), 그냥 논리적인 순서가 그렇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톡톡캔디 2008-11-25 0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에서는 월경 중에도 임신하는 여자도 있더군요...(더 엉뚱한 이야기입니다만 -__-ㅋ)
 
류블랴나학파 혹은 '지젝과 그의 친구들'

지젝과 그의 친구들을 흔히 'Slovenian Lacanians'라고 부른다. '슬로베니아 라캉주의자들' 혹은 '슬로베니아 라캉학파'라고 옮길 수 있겠다(이들에 관해서는 언젠가 '지젝과 그의 친구들'이란 페이퍼를 쓴 적이 있다). 얼마전에 나온 사라 케이의 <슬라보예 지젝>(경성대출판부, 2006)의 서론에서 이들에 대한 한 문단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오역들이 눈에 띄어서 교정해둔다.  

"지젝은 뛰어난 사상가이다. 그러나 그는 고립되어 작업을 하지 않는다."(14쪽) 

원문은 "Zizek is a leading thinker, but he does not work in isolation."이다. 번역에 흠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 붙은 각주에서(이 책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각주인데) 거명되고 있는 지젝의 슬로베니아 라캉학파 동료들이 이렇게 표기돼 있다: "영어권에서 가장 잘 알려진 슬로베니아 라캉학파는 밀러던 도러, 레나타 살레츨, 알렌카 주판치치 등이다. 그 외에는 마이란 보조비치, 라호 리아, 즈드라브코 코베가 있다."(255쪽) 찾아보기에 보면, 'Mladen Dolar'는 '믈라덴 돌러'로 표기돼 있다. 내가 읽은 대목들에서 모두 제각각으로 표기돼 있는 것인데, 부주의하달 수밖에. 그리고 국역본이 나와 있는 'Miran Bozovic'의 표기는 그냥 '미란 보조비치'라고 해야겠다. 그런 정도는 사실 독해에 장애가 된다고는 볼 수 없다. 계속 읽어보자.  

"그는 1949년 옛유고연방인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나서 류블랴나에 있는 철학연구소의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의 일원이다."  

일반적으로 '슬로베니아 라캉학파'라고 부르고 국내에서는 그 총서까지 나오고 있지만, 사실 '학파'란 말은 좀 거창하다. 모임의 실체라는 건 '지젝과 그의 몇몇 동료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지젝이 류블랴나에서 세운 건 '이론정신분석학회'이며, 지젝이 회장, 돌라르가 부회장인 2인 학회였다. 물론 이후에 걸출한 후배들/제자들이 합류하게 된다.

"이 단체의 특징은 대륙철학(데카르트, 칸트, 헤겔, 마르크스)의 배경을 공유한다는 것과 라캉식의 정신분석에 매혹되었다는 것, 타자의 용어로 각자를 설명하려는 치열한 충동이 있다는 것이다."  

지젝과 그 일당의 이론적 기획이 독일 관념론과 라캉 정신분석학을 접속에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일이다(지젝은 하이데거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프랑스로 건너가 알랭 밀레의 지도하에 정신분석학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런데, 번역문에서 '타자'는 무엇이고 '각자'는 무엇인가?

이런 류의 번역서에 '정통한' 독자라면, 그게 각각 '대륙철학'과 ''라캉 정신분석'를 가리킨다는 걸 짐작할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역자는 그런 생각으로 옮기지 않은 듯하다. 그랬다면, 적어도 "언제나 각각을 다른쪽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경향(a relentless urge to explain in terms of the other)" 정도로 옮기지 않았을까? 혹은 풀어서, "그들은 대륙철학을 정신분석학의 용어로, 그리고 정신분석학은 대륙철학의 용어로 설명하려는 경향을 공유했다"라고 해주던가.  

"진정한 교육자적인 열정이 그들로 하여금 책을 쓰게 한다. 이데올로기와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 역시 그들을 하나로 묶는다." 

'진정한 교육자적 열정'? 그만큼 그들이 쉽고 재미있게 쓴다는 얘기이다. 적어도 라캉과 헤겔을 한두 페이지라도 읽어본 독자라면 지젝이 난해하다는 얘기는 할 수 없다. <안티-오이디푸스> 이후 최고의 지적인 경험을 제공해준다고 하지만, "지젝은 들뢰즈와 가타리보다 훨씬 더 재미있기도 하다."(13쪽)

 

"지젝이 편집한 몇 권의 책들이 그를 따르는 슬로베니아인들에게는 연구의 본보기가 된다. 그들은 우수한 언어학자들이고, 지젝처럼 유럽 여러 나라의 말을 자유롭게 쓰며, 독일어와 프랑스어 원서로 헤겔과 라캉을 읽을 수 있다."  

여기엔 좀 심한 오역들이 포함돼 있다. 먼저, 첫번째 문장의 원문은 "Several of the volumes edited by Zizek contain examples of work by his fellow Slovenians."이다. 다시 옮기면 "지젝이 편집한 몇 권의 책에는 그의 슬로베니아 라캉학파 동료들의 작업 사례들이 포함돼 있다." 

이들의 이름을 떨치게 해준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지젝은 자신이 편집을 맡은 'Wo ES WAR'(Verso출판사)나 'SIC'(Duke대 출판부) 시리즈에 '동료'들을 대거 참여시킨다. 물론 이 '슬로베니아인'들만으로 시리즈의 목록이 채워진 건 아니지만.

다시 돌아가면, '유럽 여러 나라의 말을 자유롭게 쓰'는 'linguists' 가 '언어학자들'인가? '언어능통자들' 정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즉, 이들의 강점은 불어와 독어에 능통하면서 영어로도 저술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변방'의 지식인들이 세계무대에 진입하기 위해서 갖춰야 할 기본조건이 무엇인가를 시사해주는 듯싶다.  

Žižek, Slavoj: Kako biti nihčeDolar, Mladen: ProzopopejaZupančič, Alenka: Poetika. Druga Knjiga

"그들의 문화는 세계주의적이며 그들 대부분의 작업은 지젝처럼 여러 언어로 이뤄진다. 지젝처럼 그들도 처음에는 주로 그들이 창간한 Problemi지와 시리즈 책인 Analecta에 슬로베니아어로 출판했다."  

그러니까 먼저 슬로베니아어로 발표한 다음에 그것이 다른 언어들로 옮겨지는 식인데, <항상 라캉에 대해>의 경우도 슬로베니아어본이 먼저 출간된 다음에 영어본으로 새롭게 편집됐다...

06. 09.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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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랑의 대상으로서 시선과 목소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15 17:11 
    '지젝 읽기'를 연재하다 보니 여느 때보다도 더 자주 '지젝'에 관해 검색해보게 되는데, 지젝이 편집한 <사랑의 대상으로서 시선과 목소리>(인간사랑, 2010)가 출간됐다. 그의 두 번째 아내였던 레나타 살레츨과 같이 편집 책임을 맡은 SIC시리즈의 첫 권으로 나왔던 책이다. 원저는 1996년에 나왔으니까 상당히 '오래된' 책이다.    라캉주의 연구서라고 분류할 수 있을 텐데, 전체 8편의 논문
 
 
기인 2006-09-10 0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댓글 답니다 :) 맨 아래 책들 바로 위에
'다시 돌가아면'이라는 오타 지적하고 자려고요 ㅎㅎ

로쟈 2006-09-10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는 일부러라도 내야겠군요.^^
 

아침에 지젝의 레닌론에 관한 페이퍼를 쓴 김에 그와 무관하지 않은 내용을 모스크바통신에서 옮겨둔다. 재작년 9월말에 쓴 것으로 '민주주의와 그 너머'라고 다시 정리해놓은 글의 군말로 덧붙였었다. 주로 <이라크>(도서출판b, 2004)의 오역에 관한 것인데, (그에 대한 역자의 해명이 있었고) 당시에 영어본을 갖고 있지 않아서 러시아어본만을 참조하여 나름대로 '고투'한 흔적을 담고 있다. 부수적으론 지젝의 레닌론을 따라가볼 수도 있다. 내용을 따로 업데이트하지는 않으며 일부 불필요한 대목만 지우기로 한다.

문제가 된 건 160쪽에서, “레닌은 <이천만 인민이 아니라면, 열명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라고 옮겨진 문장이다. 이 대목에서 인용 부분은 역자에 따르면,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if not twenty million people.”을 옮긴 것이다(이 대목은 영역본 <국가와 혁명>에 나온다). 나는 러시아어본을 참조하여 그것이 “우리는 20명이 아니더라도, 천만 명으로 구성된 국가기구를 즉각 도입할 수 있다.”의 오역이라고 지적했다(*하지만 내가 제시한 번역도 정확하지 않았다. 아래에서 정정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문맥상 번역본의 문장이 오역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역자가 ‘가능한 다른 번역’으로 제시한바, “이천만이 아니라면, 천만의 인민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는 좀 검토의 대상이 될 만하다(*러시아어 네이티브 화자에게 확인한 결과 러시아어 문장도 이렇게 읽혀야 한다).


 

 

 

애당초 나는 역자가 제시한 영역본의 문장을(원문은 러시아어이다) 일종의 ‘삽입’구문, 즉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if not twenty) million people.”으로 읽었다. 그러면 그것은 내가 번역으로 제시한 것과 일치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론 그것이 ‘생략’구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조금 나중에 들었다. 그럴 경우는 그 문장을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people) if not twenty million people.”라고 읽는 것이다. 그것이 역자가 새로 제시한 번역, “이천만이 아니라면, 천만의 인민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에 대응한다. 나의 영문 독해력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이 문장을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 할지 확정해서 말할 정도는 못 된다.

내가 참고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레닌이 말한 러시아어 원문이다(결국은 이게 최종 심급일 테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My mozhem srazu privlech’ gosdarstvennyj apparat, millionov v decjat’, esli ne dvadchat’ chelovek.” 역어 선택에서 약간의 이견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가령, ‘set in motion’/‘작동시키다’로 옮겨진 의 사전적 의미는 ‘끌어들이다’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러시아어 원문과 영역문을 대응시켜보면 이렇게 된다.

“My(We) mozhem(can) srazu(at once) privlech’(set in motion) gosdarstvennyj apparat(a state apparatus), millionov(million) v(consists of) decjat’(ten), esli(if) ne(not) dvadchat’(twenty) chelovek(people).”(러시아어 원문에는 콤마가 들어가 있다.) 이걸 정리해서 옮겨보면,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if not twenty people.”이 된다. 내가 이해한 러시아어 문장이 그런 식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문장을 “우리는 20명이 아니더라도, 천만 명으로 구성된 국가기구를 즉각 도입할 수 있다.”라고 옮겼던 것이다(*한데, 러시아어 화자에게 확인한 결과 문제의 인용문은 “My mozhem srazu privlech’ gosdarstvennyj apparat, millionov v decjat’, esli ne dvadchat’ (milionov) chelovek.”처럼 생략문으로 읽어야 한다고 한다. 러시아어에 대한 이러한 직관을 사실 나는 갖고 있지 않으며 그로 인하여 영역본과 매치되지 않는 혼선이 빚어졌다).

그런데, 영역본 <국가와 혁명>은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if not twenty people.”라고 직역될 수 있는 문장을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if not twenty million people.”이라고 옮겼다. 영역본의 문장(=후자)이 오역이 아니라면 이 둘은 같은 뜻의 문장, 즉 동치인 문장이어야 한다. 앞에서 다소 모호하다고 했던 삽입구문과 생략구문을 동치인 새 문장에 적용해보면 먼저, 삽입구문은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if not twenty) people.”이고, 생략구문은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people), if not twenty (million) people.”이다. 영역본의 문장에서와는 달리, 이 경우에도 문제의 문장을 생략구문으로 읽기는 힘들어 보인다(*한데, 생략구문이 맞다!).

나는 본문에서, “영어본의 문장도 특별히 난해할 것 같지 않은데, ‘20명-천만’조차 ‘이천만-열명’으로 탈바꿈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일반적으로 내각은 20명 정도의 각료로 구성되는 것 아닌가?).”라고 적었는데, 실제 영역문은 난해하지는 않지만 좀 모호하다. 내가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if not twenty million people.”(나는 ‘if not twenty’ 앞뒤로 콤마가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지만, 콤마가 빠져도 되는 건지는 알지 못한다. 나의 영문법 지식은 ‘규범적인’ 것이 아니라 ‘실전적인’ 것이어서 사례를 보고 배울 따름이다) 같은 문장을 옮기더라도 역자와 같은 실수를 피할 수 있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문장의 모호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참조할 수 있는 것은 문맥이고, 이 경우 문맥상 “이천만 인민이 아니라면, 열명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는 국역은 지지될 수 없다. 그 근거는 본문에서 제시한 바와 같다(“만인이 사회적 문제들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새로운 코뮨이라고 했으므로, 20명만이 아닌 천만 명이 내각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문맥상 ‘논리적’이다.”)

두번째 대안으로 제시된, “이천만이 아니라면, 천만의 인민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 같은 경우도, 양보구문에 걸맞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일견 설득력이 있지만(적어도 영문상으로는 그렇다),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if not twenty people.”으로 직역될 수 있는 러시아어 원문의 번역이 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한편으로 이천만의 국가기구나 천만의 국가기구나 50보 100보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해서, 성실하게 답변해준 역자에게 감사를 표하지만, 아직은 애초의 나의 판단을 번복할 상황이 아닌 듯하다(다만, 가능성만은 아직 열려 있다. 나의 판단이 무오류적일 수는 없으니까). 내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이다(*한데, 몇몇 전공자들이 나와 함께 레닌의 난삽함을 탓했던 이 문장의 영어 직역은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if not twenty milion people."이며,  그에 따라 "이천만이 아니라면, 천만의 인민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가 올바른 번역이다.)



한편으로, 국역본 <이라크>는 번역 자체에도 의의가 있고, 어느 정도의 수준은 유지하고 있는 번역서이지만, 여러 차례 지적한바 아쉬움도 많은 번역서이다. 충분한/정밀한 수준의 교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바인데, 이건 비단 이 책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인문/이론 번역서에 두루 걸쳐 있는 문제이다. 번역자들의 대우가 상식 이하인 형편에서 교정자들에 대한 ‘상식에 맞는’ 대우를 요구하는 건 ‘비상식적’이겠지만 제대로 마무리된 책을 읽기 위해서라도 교정자들의 자질과 대우가 격상될 필요가 있다(출판 관계자들의 관심과 결단을 촉구하고 기대한다).

끝으로, <이라크>를 다시금 뒤적거리다가 상기된 오역들의 일부를 더 지적한다. 대개가 피할 수 있는 실수들인바, 교정이 왜 필요한가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110쪽 중간에서 “1987년에 그곳은(=카두노스) 브라질 정부군에 의해 파괴되었다.”에서 ‘1987년’은 ‘1897년’의 오기(誤記)이다(같은 쪽 마지막 줄에는 ‘1897년이라고 제대로 표기돼 있다). 1장의 경우 라캉의 용어 ‘누빔점’이 ‘정박점’으로 번역되었고, ‘향유’는 ‘향락’이라고 옮겨졌다(물론 내가 지지하는 건 ‘향락’이다). 장마다 다른 역자들의 용어가 다 조율되지 않은 것은, 조율의 흔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정’이 불충분했다는 증거이다. 서로 한번씩만 읽어주었더라도 피할 수 있는 실수들이 아닐까? 아래는 러시아어본 <이라크>. 표지의 인물은 조지 부시이다.



가령, 119쪽에서 “오히려 바울의 요점은 바로 이러한 대립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문제가 되는 것은 생과 사의, 구원과 상실의 투쟁이라는 것이다.”란 문장을 보자. 바울주의(내지는 바울주의적 보편성)는 바디유/지젝에게서 새롭게 강조되는 주제인데, 그 핵심은 ‘투쟁적 보편주의’의 발명에 있다(118쪽). 더 근본적인 적대(적 투쟁) 앞에서는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남자도 여자도 없다”라는 것이 그 투쟁적 보편주의의 요체이다. 이때의 ‘근본적인 적대’란 ‘생과 사’, ‘구원과 상실’ 사이의 투쟁을 말한다. 하지만, 그 투쟁을 우리말 성경에서는 “삶(=영생)이냐 죽음이나” “구원이냐 멸망이냐”라는 문구로 표현한다(‘구원’의 짝개념은 ‘상실’이 아니라 ‘멸망’이다).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삶과 죽음 사이의, 구원과 멸망 사이의 투쟁이라는 것이다.”라고 옮겨져야 한다.

131쪽, “자유주의자들은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전체주의’의 두 양태로 본다. 스탈린주의자들 자신도 궁극적으로 우파적 편향과 좌파적 편향을 확인한다.” 같은 대목도 읽어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문맥의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오역은 (아마도) ‘identify’를 옮긴 ‘확인한다’. 여기선 ‘동일시한다’라고 옮겨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이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동일시한 것처럼 스탈린주의자들도 우파적 편향(=부하린)과 좌파적 편향(=트로츠키)을 (똑같이 반동적인 것으로) 동일시했고, 결국은 그들을 제거했다. 140쪽에서 ‘부농(富農)’이란 뜻의 러시아어 ‘쿨락(kulaks)’은 왜 그대로 음역됐을까? 영어에서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도 그 정도로 인지도가 있는 단어인지? 169쪽의 ‘쿠플레(couplet)’도 마찬가지이다. ‘대구(對句)’라고 옮기는 게 왜 불편했을까? 177쪽의 “보스니아 유엔 보호군”은 “보스니아의 유엔평화유지군”이 아닐까?

176쪽에서 “다중적(多衆的)이고 공들인 정제된 분석”이란 말에서 ‘다중적(multiple)’에 맞는 한자는 ‘다중적(多重的)’이다. 더 적절한 역어는 ‘다수의’ 혹은 ‘다양한’ 정도이지만. 역자들은 다수(多數)란 뜻의 다중(多重; multiplicity)과 네그리의 새로운 ‘유행어’ 다중(多衆; multitude)을 아무런 구별 없이 자주 혼용한다. 이런 혼용은 (언어유희로서) 시적이기는 하지만 좋은 번역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가령, 들뢰즈의 ‘multiplicity’도 전부 ‘다중’으로 옮겼는데, 과문한 나로서는 그래도 되는 건지 의심스럽다. 그게 정말 ‘多重’이면서 동시에 ‘多衆’을 의미하는 것인지?(‘다중주의자’ 들뢰즈는 원조-네그리주의자인가?) 189쪽, “하지만 주인-기표가 퇴조하고 달성(consummation)이 고조되는 오늘날 일어나는 것은 정확히 그 이면이다.”란 문장에서 “달성이 고조되는 오늘날”은 무슨 뜻인지? 적어도 “종말론적 분위기가 고조되는 오늘날” 정도로는 풀어줘야지 독자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같은 189쪽에서, “TV 리얼리티 쇼의 승리와는 대조적으로 그것이 어째서 실패했는가를 아는 것은 쉬운 일이다.”의 오역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다. ‘승리’는 (아마도) ‘triumph’를 옮긴 것인데, 여기서의 뜻은 ‘성공’이다(리얼리티 쇼의 ‘전쟁’이 있었던 게 아닌 이상. 해서, 승리/실패가 아니라 성공/실패가 짝이다). 178쪽에서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패러디한 우디 앨런의 영화 <사랑과 죽음>의 대사들이 나열되고 있는데, 그 중 “아, 그는 정말로 범죄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처벌 받았지요!”라는 것도 (문학작품의 번역에서라면) ‘오역’에 속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건 <범죄와 처벌>이 아니라 <죄와 벌>이기 때문에(우리말로는 그렇게 옮겨져 왔다), “아, 그는 정말로 죄를 범했고, 그래서 벌을 받았지요!"라고 번역해야 하는 것이다 등등. 이런 수준까지의 정밀한 교정을 요구할 수는 없더라도 하여간에 교정은 필요하다. 우리에겐 일급의 번역자도 부족하지만, 일급의 교정자도 더없이 부족하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라크>의 다른 역자께서 또한 내가 오역이라고 지적한 부분에 대해 해명을 주셨다(성의껏 답변을 주신 데 감사드린다). “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지식은 사랑하는 사람의 현실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대상의 현실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차지하는 금지된 자리라는 정황에 관한 바로 그 지식이다.”(227쪽)에 대해서 나는 오역이 아닌가라는 의혹을 제기했던 것인데, 역자에 따르면, 원문은 이렇다. “The truly forbidden knowledge is thus not the full knowledge of the reality of the beloved, but the very knowledge about how there is NOTHING to learn about the reality of the object, about how what makes the object the cause of my desire is the prohibited place that it occupies.”

“<이라크>를 두 번 통독하면서 가장 난해했던 문장인데(그래서 여러 번 반복해 읽어야 했다), 평범한 듯한 번역문이 잘 안 읽혔던 것은 뭔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본문에서 적었지만, 원문은 난해하기는커녕 아주 단순한 문장이다(믿을 건 지젝뿐이란 생각이 든다). 해서, 내가 본문에서 대안으로 제시한 번역(“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지식은 사랑하는 사람의 실상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대상의 ‘아무것도 아님’이라는 실상에 관해서 결코 알아서는 안 된다는,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금지돼 있다는 바로 그 지식이다.”)은 역자의 지적대로 ‘금지의 금지’에 너무 집착한 것이며, 좀 빗나간 번역이다.

굳이 변명하자면, 한국어본과 러시아어본을 절충해서 원문을 상상하다 보니까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나는 “대상의 현실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표현 때문에, 원문에 ‘can not’이 들어갔을 거라 짐작하고, 그것이 ‘능력의 can’, 즉 불능/무능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금지의 can’(-해서는 안된다)으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반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참고로 이 대목의 러시아어 번역은 “o realnost’ obekta nichego nel’zya uznat’”이며, 영어로 직역하면 “it is not allowed to know nothing about the reality of the object”이다.

내가 ‘금지’의 문장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는 셈인데, 지젝의 원문에 비추어 본다면, 엄밀하게 말해 러시아어번역도 오역이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번역이다. 하긴 러시아어 번역이라고 해서 단 신뢰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그 신뢰란 건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최근에 번역돼 나온 바디우의 들뢰즈론, <존재의 함성>(러시아어 제목은 <존재의 소음>) 서평을 읽어 보니까 이 번역과 들뢰즈 러시아어본들에 대한 불만이 씌어져 있기도 했다(참고로 러시아어로 번역된 바디우는 <철학을 위한 선언>과 <바울>이 더 있으며, <존재와 사건>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들뢰즈의 책으론 지난달에 <영화1,2>가 합본으로 출간됨으로써 들뢰즈의 단독 저작은 모두 번역됐다). 또 이전에 들은 바이지만, <에크리>의 스페인어본에 대해서는 오역을 지적하는 책이 한 권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스페인어와 불어의 친연성을 고려하면 좀 놀라운 일이다. 하물며 일어나 한국어본이 ‘정상적’일 것으로 기대하는 건 무리일 것이다). 요컨대, 어느 수준까지의 오역은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역자는 국역본의 번역을 원문에 충실한 것으로 간주하는 듯하지만, 내가 보기엔 미흡하다. 일단 나를 헷갈리게 했던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금지된 자리라는 정황”에서 ‘정황’이란 표현도 나를 헷갈리게 했는데, 굳이 더 삽입될 필요가 없는 말이다). 내가 읽기에 지젝의 원문은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고 ‘금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대상에 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의 욕망의 원인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이 차지하고 있는 (금지된) 자리일 뿐이기 때문에.

지젝의 원문을 다시 옮기면, “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앎은 사랑하는 대상의 실상에 대한 완전한 앎이 아니라, 그 대상의 실상에 관해서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앎이며,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금지된 자리일 뿐이라는 앎이다.” 해서, 나로선 국역본의 문장이 ‘불가피한 오역’에 속한다고 생각하며, 역자가 국역본의 문장을 이와 같은 뜻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면, 번역은 여전히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무튼 역자들의 ‘적극적인’ 반응은 고무적이다. 적어도 내가 혼자 떠들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나 또한 고무되어 눈에 띈 몇 가지를 제안과 더불어 더 지적한다. 가령, 209쪽에서 ‘눈물의 계곡’이란 표현은 ‘눈물의 골짜기’가 더 적합하다. 우리말에서 ‘계곡’과 ‘골짜기’는 동의어이지만, 용례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고난이나 시련을 뜻할 때는 흔히 ‘골짜기’란 표현이 사용된다(“백합의 골짜기”, “눈물 같은 골짜기의 외로운 달밤은 싫어” 등). 반면에 계곡은 “물 좋은 계곡”이나 “계곡 산장”이라고 할 때의 계곡이다.



210쪽, “철학은 도시의 신들과 에토스를 의문시함으로써 시민의 충성을 와해시키며”에서, ‘도시의’란 수식어는 ‘신들’이 아니라 ‘에토스’에만 걸린다(다시 확인해 보시길). 해서 “철학은 신들과, 도시의 에토스를 의문시함으로써”라는 식으로 된다. 215쪽, <다빈치 코드>에 관한 내용인데, “교회는 필사적으로 무지비하게 그 문서를 억류하려 하고”에서, ‘억류하다’란 동사는 사람에게만 쓰는 동사이다. 문서가 제발로 걸어다는 종류가 아닌 이상 ‘억류하다’란 말은 부적절하다. 그리고, 213, 215, 216쪽 등에서 ‘서민’이란 역어가 나오는데, 이 또한 적절하지 않다. 우리말에서 ‘서민’은 경제적으로 중산층 이하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다. 이해력이 중간층 이하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은 아닌 것이다(예컨대 나는 ‘서민’이지만, 스트라우스나 지젝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역자들의 생각은 나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내가 읽은 책에 대한 소감을 말할 권리가 있다…

04. 09. 28-29/ 06. 09. 07.

P.S.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를 오늘 배송받았는데, 서문에 역시나 문제의 구절이 포함돼 있다: "1917년 10월 레닌은 '우리는 당장 2,000만명이 아니라 10명만으로 이루어진 국가기구를 작동시킬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순간의 충동이야말로 진정한 유토피아이다."(27쪽) Neil Harding의 'Leninism'(듀크대출판부, 1996)으로부터의 인용도 <이라크>와 동일하다. 이 인용문에 대한 나의 의견은 본문에서 적은 대로이다(*다시 확인하자면, "우리는 당장 2,000만명이 아니더라도 1,000만명으로 이루어진 국가기구를 작동시킬 수 있다"로 옮겨져야 한다). 지젝은 이어서 "우리는 이 레닌주의적 유토피아의 '광기'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부연하는데, 과연 10명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만드는 게 '광기'인지, 천만명으로 구성된 국가기구를 만드는 게 '광기'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지젝은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에 대해서 쓴 텍스트의 제목을 빌려 레닌의 이 '광기'와 그로 인한 고립을 '레닌의 고독'이라고 부르는데, 그 고독은 아무래도 현재진행형인 듯하다...

06. 09. 09./ 0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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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8 0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9-09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맞습니다. '소주의 힘'이죠.^^

am 2006-09-24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골골거린다던 식구들은 이제 다들 좀 좋아지셨는지요 

 

위의 글 처음 읽을 때 의문이 들었는데 그때는 글을 쓸 요량까지는 못했습니다. 어떻게 정리를 하셨을지 궁금해서 다시 와 읽어 보니 추신이 생겼네요. 그 부분을 읽다가 의견을 나누었으면 해서 글을 써 봅니다.         

 

전 러시아어를 몰라요. 그래서 원문이 영어본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어떤 오역이 (혹은 오기가) 생겼을 가능성은 (저로서는 판단이 어려운) 대전제로 삼아야 할 것 같아요. 그 점을 분명히 하고서, 저는 주어진 영문의 번역에 대한 로쟈님의 설명에 관해서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읽은 바로는,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if not twenty million people.”라는 문장의 번역으로 1) 이천만 명 대 열 명 (책의 역자), 2) 이십 명 대 천만 명 (로쟈님), 3) 이천만 명 대 천만 명 (역자가 제시한 차후 번역) 등이 제안되었는데, 로쟈님은 1) 은 문맥상/러시아본과 비교해 볼 때 명백히 오역이며, 3) 은 영어 문장을 생략구문으로 보았을 경우 맞는 번역일 수 있으나 석연치 않고, 마지막 2) 가 러시아본의 문장을 기준할 때 맞는 번역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 때 제시된 영문을 삽입구문 (if not twenty) 으로 해석하면 로자냠의 러시아본 독해와도 일치한다. 따라서 보다 분명한 근거가 없는 한 이 문장은 2) 로 옮겨져야 맞다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내 놓으신 듯 합니다.

 

그런데 저는 다시 읽어 봐도 3) 의 뜻으로 이 문장이 읽혀요. 전에 읽었을 때는 1)을 그 다음으로 생각해 보았었는데, 로쟈님께서 러시아어 문장과 영문 대입해 주신 것 보고 (그림 모양 맞추는 수준이기는 했습니다) 더 고려하지 않았고요. 말씀하신 규범적인 설명이 될 지는 자신이 없지만 아무튼 제 눈에는 이 문장 중의 “if not twenty”를 삽입구문으로 파악할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추가하려는 문구가 원래의 문장의 뜻과 구조에 큰 변화를 초래하지 않아야 삽입구라는 이름을 쓸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바로 지금 보고 있다시피 이렇게 여러 해석이 분분하니, if not twenty 가 삽입구문이고자 한다면 혼란을 막기 위한 규칙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if not twenty 가 삽입구였다면 앞뒤 콤마는 절대로 임의적으로 생략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원문을 영어로 옮긴 이가 이런 규칙을 모르고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 경우는 원문이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의 오역 (혹은 오기) 판정이 필요할 것 같아요), 번역자가 일부러” if not twenty 앞 뒤의 콤마를 빼고서 마치 콤마가 있는 것처럼, 혹은 콤마를 생략해도 되는 경우처럼, 혹은 그러니 독자더러 알아서 콤마 있는 것처럼 읽게끔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설령 앞뒤 콤마를 생략하더라도 삽입구가 전체 문장의 구조 및 뜻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경우를 가정하더라도 (하지만 저는 그런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if not twenty million” 까지, people 이라는 앞의 수와 단위 (million 이 그렇게 쓰였다고 생각했어요) 를 받는 명사 앞에서 끊어야 자연스럽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점을 고려해서 1) 의 번역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문장은ten twenty 가 모두 million + people에 걸리고 이 때 ten million people if not twenty million people 에서 반복되는 수와 단위를 생략해서 쓴 문장인 것 같다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이천 만이 아니라도 천 만의 인민들로 구성된 국가기구를 출범시킬 수 있다 정도의 뜻이라고 보고요. 혼동을 막기 위해 한 예로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if not twenty million people. 아니면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if not twenty million people식으로 쓸 수 있을까 생각은 해 보았는데 확실치는 않네요.        

 

로쟈님 설명을 읽다가 꼭 그 방향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정도로 별 근거 없이 떠올랐던 생각을 저도 추신처럼 덧붙입니다. 일반적으로 내각은 20 정도의 각료로 구성되는 아닌가? 그러셨잖아요. 그런데 저는 바로 그 일반적인 것들에 정반하는 상황이 이 문장이 놓인 문맥이 아닐까, 소수에게 집중되었던 통치권력을 혁명을 통해 인민에게 (물리적 상징적 문화적 등등 전면적으로) 되돌리자는 것이 지금의 주장의 바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스무 명의 각료로 대리/대표되는 국가기구 이야기를 뜻하는 것이 아닐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요. 그와 비슷하게 미루어 짐작하면 천만과 이천만이 오십보의 차이가 전혀 아닐 수 있고 비록 어떤 목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게 왜 이천만인지는 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천만의 인민들로 직접적으로 구성된 새로운 국가기구를 띄워 낼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는 그럴 수 있다, 에 무게를 실을 수 있지 않나 했습니다.

 

맞나 틀리나를 떠나서 이럴 때 좀 확실하게 왜 맞고 틀리는지를 알고 넘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써 보았는데, 의견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 아래 언급하신 지젝의 문장에 관해서도 로쟈님과 제가 조금 다르게 읽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쓰다 보니 시간이 많이 가서 (그나저나 그 문장은 문장 자체가 좀 별로인 것=괜히 복잡한 것 같아요) 그건 나중에 기회가 되면 질문 드리겠습니다.


로쟈 2006-09-27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처럼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셔서 고맙습니다. 본문에서 "아직 가능성만은 열려있다"라고 적었는데, 제가 염두에 둔 것은 레닌의 원문 “My mozhem srazu privlech’ gosdarstvennyj apparat, millionov v decjat’, esli ne dvadchat’ chelovek.”을 일종의 생략문으로 보는 것입니다. 러시아어를 저보다 잘하는 이들에게 한번 문의를 해보겠습니다. 만약에 그런 식의 생략문으로 읽힐 수 없다면, 제 의견대로 영역문에서 if not twenty는 삽입구로 읽혀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오역이라고 봅니다(매번 같은 문장이 나오는 걸 보면 '오역'일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이긴 하지만요). 다른 대목에 대한 이견은 저도 기대가 됩니다.^^   

확인한 결과 러시아어 문장은 생략문이며 am님의 영문해석과 러시어는 동일한 뜻입니다. '국가기구'가 20명 정도로 구성되는 게 아닌가라는 제 판단 때문에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결과적으로 제가 간과했습니다. 지적에 감사드리며 본문 내용을 다시 정정했습니다... 


am 2006-09-25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를 받아도 될만한 내용도 못 되고, 게다가 제가 말 꺼내 놓고 시간이 가면 숙제처럼 느끼게 될까봐 정돈되지 않아도 얼른 적었습니다.

“The truly forbidden knowledge is thus not the full knowledge of the reality of the beloved, but the very knowledge about how there is NOTHING to learn about the reality of the object, about how what makes the object the cause of my desire is the prohibited place that it occupies.”

이 문장과 그에 대한 로쟈님 설명 읽을 때는 의문스럽다기 보다 혼란스러웠어요. 서로 거의 같은 이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최종적으로 제시하신 번역문을 보면 눈으로나마 해 본 제 번역문과 조금 달라 보이고, 하지만 그걸 말로 풀어 보면 또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이건 독자의 문제가 아니라 저 따위로 쓴 자(다시 읽다 덧붙입니다-감정이 많이 실린 것처럼 읽히네요. 헛갈리게 해서 에이 밉다, 그런 마음은 있었지만 나쁘게 말하려고 쓴 표현은 아니었습니다) 에게 탓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에이 모르겠다 하고 넘기려고 닫기 직전에 다시 보면 실제 글이 말하려는 메시지는 단순/명백한 것 같기도 해서요. 이런 상황이다 보니, 같은 듯 하지만 다른 독해인 것 같다는 제 감이 실제 그런지를 확인하는 정도로 또 적어 보겠습니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내가 읽기에 지젝의 원문은 ‘능력’ 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고 금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필요’ 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대상에 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의 욕망의 원인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이 차지하고 있는 (금지된) 자리일 뿐이기 때문에. (중략)
지젝의 원문을 다시 옮기면, “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앎은 사랑하는 대상의 실상에 대한 완전한 앎이 아니라, 그 대상의 실상에 관해서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앎이며,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금지된 자리일 뿐이라는 앎이다.” 해서, 나로선 국역본의 문장이 ‘불가피한 오역’에 속한다고 생각하며, 역자가 국역본의 문장을 이와 같은 뜻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면, 번역은 여전히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저 두 문단에 제가 말하려는 내용이 다 있어요. 우선, 저는 영문만 보아서는 저 문장이 능력(알 수 없다) 의 문제가 아닌 필요 (알 필요가 없다) 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신 근거를 찾지 못하겠어요. 제 이해로는 저 문장은 그리 길지 않은 문장에 ‘not A but B’ 의 대구를 썼고, 금지 그것도 진정 금지된 무엇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겠다는 강한 도입부가 있으므로 문장의 주 의미가 forbidden (=must not) 에서 파생될 것이라고 보았어요. 그래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 (이 문장에서는 앎) 혹은 그러도록 절대 허용되지 않은 것과 그 반대로는 용납되는 것 그러는 것이 가능한 것의 대구로 보았고요. 아무튼 저는 로쟈님께서 말씀하신 ‘need not’’don’t have to’의 의미는 못 읽어 냈습니다. 혹시 그런 필요가 아니라 소용없음이나 무위를 말씀하시나 했지만 확대해석인 것 같아서 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전처럼 문장 앞 뒤는 물론 지젝거리기에 관해서도 전혀 아는 바 없음을 전제하고) there is nothing to learn about the object 가 말씀하신 ‘필요’로 해석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한 두 번째 이유를 그냥 문장구조가 같은 다른 문장들을 떠올리면서 찾았어요. there is nothing to see/there is nothing to eat/there is nothing to say 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 (먹을 것, 말할 것) 이 없다고 다른 식으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시계에 보도록 허용된 게 없다 등등이 아닐까요. 여기 어디에 그럴 필요 없다 의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마지막은 로쟈님 설명에 상응해서 나온 생각은 아니고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헛갈리는 와중에 직감적으로 느껴지던 생각이었어요. 저는 여기서 저자가 말하려는 바는 nothing to learn about something 과 the reason of something is impossible to know because it occupies the prohibited place 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흔히 무엇에 관해 다 알지 못함을 크게 말하지만 실은 그게 아니라 근본적인 어떤 불가능성, 용납불가성이 있음을 아는 것이 금지된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불가능의 이유는 그것이 무엇을 통해 듣고 보고 익혀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what can be learn about is nothing), 그게 금지되었다는 이유에서, 그게 금단의 무엇으로서 우리/사회/세계?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했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특히 the object 에서였는데 the beloved 는 주관성이잖아요. 내가 사랑하고 내가 소중히 하고 하지만 무엇에 “관해”아는 것은 대상과 객관이고. 그 앎은 무엇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흔히 그에 관해 잘 아느냐 잘 못 아느냐, 완전한 앎이냐 아니냐를 따지지만 그 모든 것은 실은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그것의 문제라면 우리는 무엇도 알 수 없는 것이고, 그 알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 사실 쉽게 허용되지 않는 앎이다..이렇게요.

엉성하긴 하지만 제가 읽은 바를 아래에 옮겨 보면,

영문/ “The truly forbidden knowledge is thus not the full knowledge of the reality of the beloved, but the very knowledge about how there is NOTHING to learn about the reality of the object, about how what makes the object the cause of my desire is the prohibited place that it occupies.”

로쟈님 번역/ “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앎은 사랑하는 대상의 실상에 대한 완전한 앎이 아니라, 그 대상의 실상에 관해서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앎이며,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금지된 자리일 뿐이라는 앎이다.”

제가 해 본 번역/

“정말로 금지된 앎은 사랑하는 대상의 실재에 관한 완전한 앎이 아니라, 그 대상의 실재에 관해 우리가 터득할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는 바로 그 앎, 어떤 것을 내 욕망의 원인이게 하는 것은 그것이 금지된 자리에 있기 때문임을 알게 되는 앎이다.”

혹은 how 의 의미를 why 로 살려서 해 본다면,

“정말로 금지된 앎은 사랑하는 대상의 실재에 관한 완전한 앎이 아니라, 왜 그 대상의 실재에 관해 우리가 터득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는지를 깨닫는 바로 그 앎, 즉 그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이게 하는 것은 왜 금단의 자리에 있는가를 알게 되는 앎이다.”

정도입니다. 역시 어떤 의견이건 잘 받고 또 생각해 보겠습니다. 남은 하루 잘 보내세요.

로쟈 2006-09-25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설명이 난삽했을 수도 있고, am님 말씀대로 저자(지젝)가 좀 고약했을 수도 있습니다. 인용문장이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관한 거라는 설명은 번역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고, 문장의 논지에 대한 저의 '해석'입니다. 과정은 좀 복잡해보이지만 제시하신 두 번역 중 첫번째 것은 제가 한 번역과 별로 차이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에 국한하자면 "서로 거의 같은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되며 (조금 달라보이더라도) "말로 풀어보면 또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번째 번역은 제가 이해하기엔 너무 복잡하군요. 지젝만큼이나...

am 2006-09-26 0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리 잘 생각하고 쓰지 못해서 쓸데없이 복잡했나 봅니다.^^;;

위에 역자의 번역문에 나온 ‘정황’ 이라는 말이 불필요하게 삽입된 문구 같다고 말씀하신 부분을 읽다가, 혹시 번역자들이 how 의 뜻을 살리려고 저 말을 썼나 의문이 들어서 두 번째 번역이 나왔습니다. 제 생각에 저기서의 how 는 이러저러하여, 이런저런 정황에 라는 의미 보다는 이유나 왜의 의미가 더 크지 않겠나 해서요. 첫 번째 것 보다 어색하다는 지적, 동감하고 알겠습니다. 아 참, 첫 번째 번역에서의 ‘어떤 대상’은 아무래도 ‘그 대상’으로 바꾸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날 말을 옮기다가 문득, the beloved 를 the object 로 받아야 문장 상 맞을 줄 알지만 혹시 저자가 the beloved를 포함한 일반적인 대상을 칭한 건 아닌가 하는 괜한 추리가 들었는데 그만 그 생각이 그대로 옮겨졌네요.

논지파악과 번역어 선택 사이에 관한 말씀은 제가 아직 완전히 이해를 못한 것도 같지만, 저 문장에 관해 어떻게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를 더 잘 알겠습니다. 감사드려요. 여러모로 눈으로만 볼 때보다 구체적인 생각들이 들어서 불쑥 질문 겸 의견 드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로쟈 2006-09-26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주 의견을 말씀해주시면 저도 공부가 되겠습니다.^^ '학문'이란 게 물어서 배우는 것이니까요.
 

지난 화요일자 한국일보에 게재된 과학기사를 옮겨온다. 스크랩해놓은 것인데, 이 정도 기사는 많은 분들이 함께 읽어도 좋을 듯하다. 필자는 발군의 과학기사들을 쓰면서 현재 매주 화요일 '과학을 읽다'를 연재하고 있는(그래서 화요일엔 한국일보를 본다) 김희원 기자이다. 며칠전 복잡계 과학에 관한 책들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소개한 바 있는데, 거기에 '링크'에 관한 책 몇 권을 보태기로 한다. '링크' 혹은 '넥서스'의 교훈?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한국일보(06. 09. 05) 내가 쓴 1달러 3년후엔 어디에...

-미국의 인터넷 사이트 중에는 '고무도장'이 표시된 달러 지폐를 입수했을 때 달러의 일련번호와 입수 위치를 등록하는 사이트가 있다. 1달러 지폐에 그려진 대통령(조지 워싱턴)의 이름을 딴 '조지는 어디에?(Where's George?)'(www.wheresgeorge.com)라는 이 사이트는 고무도장이 찍힌 지폐의 이동경로를 파악하는 순전히 재미를 위한 게임 사이트다. 누구든 지폐에 고무도장을 찍어 돌릴 수 있고, 등록한 지폐가 돌고 돌아 많은 사람들이 기록할수록 점수를 많이 받아 순위에 이름을 올린다.

-이 단순한 게임사이트가 사람의 이동경로를 파악하는 복잡계(Complex Systems) 연구의 데이터 생산지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복잡계 연구는 복잡다기한 변수들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정치 사회 경제현상 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의 이동은 분자와 같다?
-복잡계 물리를 연구하는 일군의 물리학자들은 1998년 이후 '조지는 어디에?'에 축적된 100만여건의 지폐이동 데이터를 분석, 수학적 모델을 수립했다. 독일 막스 플랑크연구소의 D 브록만, T 지젤 박사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의 후프나겔 교수는 이를 지난해 1월 네이처에 발표했다. 최근 이들은 이 모델을 전염병 사스(SARS)의 확산에 적용, 해석했다.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 김승환(포스텍 물리학과) 교수는 "전지구적 차원에서 인간(지폐)의 이동을 실제 데이터를 분석해 수학적으로 모델화한 최초의 연구사례"라고 말했다.

-물리학자가 왜, 어떻게 인간의 여행법칙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 사람의 움직임을 분자의 운동과 같이 여기는 것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사람의 움직임을 분자들이 무작위적으로 서로 부딪히면서 균일하게 확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아서, 대형 운동장을 설계할 때 군중의 입·퇴장을 유체의 흐름으로 계산하곤 했다. 교통의 흐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최근 복잡계 연구가 발달하면서 인간의 여행은 비로소 본격적으로 방정식을 찾아냈다. 복잡계란 변수가 너무 많아 언뜻 무질서하게 보이는 현상이다. 날씨예보, 주가의 등락, 단백질의 3차원 구조, 생태계 분석, 유전자의 조합 등이 복잡계의 문제들이다. 이 문제들을 솜씨 있게 다루는 이들이 바로 통계물리학에 뿌리를 둔 연구자들이다. 고체가 액체가 되고 액체가 기체가 될 때 무수한 분자들이 무작위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를 연구하고 계산해내던 통계물리학자들은 최근 경제물리학자, 구조단백체학자 등으로 놀라운 변신을 하고 있다.

●게임에서 시작된 복잡계 연구성과
-브록만 박사 등의 연구는 분자 확산을 설명하는 아인슈타인 확산법칙과 비교해 사뭇 다른 점들을 시사한다. 아인슈타인 확산은 분자들이 두 배 멀리 퍼질수록 시간이 제곱만큼 소요된다고 요약된다(상대성이론으로 유명한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통계청에서 일하던 1905년 분자의 확산 이론은 발표했다). 즉 분자들이 1m 퍼지는데 10초가 걸렸다면 10m 퍼지는데는 16분, 100m 퍼지는데는 2시간 46분이 걸린다.



-브록만 박사 등은 '조지는 어디에?' 사이트에 수록된 100만여건의 지폐 이동 데이터를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가, 얼마나 멀리 움직였는가 라는 시간, 거리 척도에 따라 입력해 분포곡선을 그려 방정식을 구했다. 그 결과 공간적으로 지폐의 이동은 짧은 거리를 자주 움직이지만 간혹 먼 거리를 도약하는 멱급수(冪級數)함수로 설명되며, 속도에 대해선 초확산(super-diffusive spread)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아냈다(*무슨 말인가?). 아인슈타인 확산과는 비교할 수 없이 신속하고 효율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도 가까운 동네에서의 움직임이 아닌 전세계적 범위에서 그렇다. 이는 당연히 현대인이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해 세계여행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의 초확산 분포는 전염병 확산을 예측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2004년 전세계가 사스의 공포에 휩싸였던 것은 질병 자체가 치명적이어서가 아니라(사스의 사망률은 독감이나 폐렴보다 낮다) 전염 범위와 속도가 유례없이 넓고 빨랐기 때문이었다. 김승환 교수는 "게임 사이트가 방대한 로 데이터(기초 자료)를 제공했고, 현대인이 초확산법칙을 따라 여행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점에서 현대에서나 가능한 흥미로운 과학"이라고 말했다.(김희원 기자)

06. 0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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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09-08 15:56   좋아요 0 | URL
김희원 기자의 기사는 저도 잘 보고 있습니다. 집에서 한국일보를 보거든요. 여기서 만나니까 반갑군요. :)

로쟈 2006-09-08 20:05   좋아요 0 | URL
저는 황우석 사태 때 논리적인 분석기사로 처음 이름을 기억해두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