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민음사, 2006)에 대한 서평 하나를 옮겨놓는다. 책의 출간 직후에 일련의 언론 리뷰들을 옮겨놓은 적이 있었고 지난달에는 꼭 읽어보려고 했지만 60쪽 정도를 읽는 데 그쳤다. 책은 여전히 책상머리에 꽂혀 있는데, 독서를 중단한 이유는 책이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꽤나 재미있어서였다. 그 '재미'가 다른 일들을 하는 데 방해가 되었기에 일단은 접어두었던 것이다. 한데, 이달 말까지도 일들은 밀려 있는지라 이 책은 연말까지 읽으면 다행이다 싶다. 해서, 당분간은 읽을 만한 리뷰를 읽어보는 걸로 면피할까 하는데, 교수신문에 링크돼 있는 서강대 대학원신문의 이 집중서평은 그런 필요를 가뿐히 충족시켜준다. '엄청나게 발랄하고 믿을 수 없게 오스터적인'이란 제목 자체가 책을 읽기 이전에 내가 기대했던/예상했던 바와 별반 다르지 않다. '리틀 오스터' 사프란 포어의 재능과 그 재능의 문제점(?)에 대해서 짚어보고 있는데, 나의 독후감이 크게 다르다면 나중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교수신문(06. 10. 13) 엄청나게 발랄하고 믿을 수 없게 오스터적인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하 『엄청나게』로 함)을 읽다. 참으로 오랜만의 동시대적 미국 소설의 도착이 아닐 수 없다. 시즌을 노리는 블록버스터 영화나 케이블 드라마를 빼면 지난 10년간 한국내  미국문화 영향력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하지만 엄청난 자본과 매력적인 스토리가 결합된 드라마 시리즈물은 과거 할리우드 영화나 팝음악의 영향을 압도하고도 남기에 이런 판단은 엄살일지도 모른다). 비교적 최근에 각광받은 <브로크백 마운틴>의 후광을 업고 E. 애니 프루의 단편집이 동명의 타이틀로 소개되었지만 90년대에 이미 그녀의 장편이 두 권이나 출판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매년 무수한 외국소설이 번역되지만 입지를 단단히 굳혀 차기작까지 소개되는 영광을 누린 작가는 극소수에 한정되고 미국 작가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 중 하루키와 거의 같은 즈음에 소개된 폴 오스터(『고독의 발명』의 번역본 2종이 이미 90년대 초반에 출간되었다)는 영화   <스모크>로 대중적으로 알려진 후, 현재는 모출판사에서 거의 오스터 산업에 가까울 정도로 자질구레한 글모음까지도 소개되어 매우 친숙한 인기 작가군에 속한다. 여기서 굳이 오스터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소설에서 오스터의 첫소설인 『고독의 발명』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사실 오스터의 대중적 이미지가 『고독의 발명』과 같은 진지한 초기 소설들에 대한 접근을 방해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고독의 발명』은 젊은 소설가 지망생에게 현대 산문이 제기할 수 있는 가장 개인적이고도 어려운 과제를 부여했다. 개인사의 정점인 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으로 남겨진 것에 대한 정면 대결. 그것이 젊은 시절의 오스터가 탐색 했던 것이라면, 포어는 같은 연장선상에서 그 위에 발랄함을 얹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책날개에 적힌 작가소개에서 알 수 있듯, 그는 2차 대전 시 할아버지를 구해준 여인을 찾기 위해 단지 사진 한 장만 들고 우크라이나로 떠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첫 소설이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일종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으로서 여행이란, 확실한 목적과 대상을 품고 출발하기에 그 결과에는 상관없이 존재에 대한 강한 ‘긍정’의 서사일 수밖엔 없다(이러한 긍정의 확인이란 경험을 단지 기억하는 행위 이상으로 고양시키게 마련이고, 사람들은 흔히 그걸 글쓰기-문학이라고 말한다). 청년 작가 포어의 이러한 경향은 『엄청나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포어 소설이 갖는 강점 중 하나다.

소설은 9.11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꼬마 오스카가 리무진을 타며 장례식으로 가는 도중 떠벌리는 독백으로 시작된다. 오스카는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에 대답하지 못했던 자신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다. 벽장에서 우연히 떨어뜨린 꽃병 속에서 ‘블랙’이라는 이름이 서명된 봉투와 봉투 안의 열쇠를 찾기 전까진 말이다. 열쇠와 ‘블랙’이라는 단서를 통해 오스카는 드디어 아버지에게 진지한 용서를 구할 구실을 찾게 된 것이다! 비밀 탐문 수사를 통해 한층 성숙해지는 오스카는 동시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오스카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간의 화해를 지켜보는 유일무이한 목격자가 된다. 세상에 대한 긍정과 희망이라는 낯익은 주제는 재기 넘치는 구성과 병렬적 목소리의 겹침 속에 다소 시끄럽지만 매우 근접한 거리로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살아 있음에 대한 실재감-기억의 대리물로서 열쇠와 열쇠로 열리게 될 자물쇠-과 아버지라는 숨은 의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꼬마 오스카는 짧고 단편적인 여행들을 통해 숱한 ‘블랙’들과 만난다. 이러한 어둠이란 『고독의 발명』에서 피노키오와 주세페 노인이 재회하는 상어 뱃속의 잉크병 속 같은 어둠(마침내 고독-상실과 화해를 가져다주는!)과 대응한다(한편, ‘블랙’이라는 서명이 적힌 봉투안의 투박한 열쇠는 또한 오스터 초기 소설 『뉴욕 3부작』의 「잠겨진 방」을 떠올리게 한다). 오스터가 존재론적으로 성찰하고 있는 이 고래 뱃속 요나 모티브는, 포어에게는 오스카와 만나는 낯설지만 애틋한 실제 인간들로 변형되어 화해와 치유의 구체적인 표정들로 드러나고 있다.

한편, 오스터가 형식적 생활 패턴 뒤로 숨어 영영 자아를 유폐시킨 아버지를 회상하던 중, 내밀하고 끔찍했던 가족사와 맞닥뜨린다면, 『엄청나게』에선 총 17장 중, 각 4장 씩 할애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육성을 통해 할아버지의 미처 태어나지 못한 아들을 비롯한 가족사의 질곡을 얕은 음영처럼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고독의 발명』에서 화자 A(오스터)가 횔덜린, 안네 프랑크, 고흐, 에밀리 디킨슨 등의 방을 찾아 그들의 방에서 울려 퍼져 곧 A(오스터)와 공명하는 목소리들로 독창적인 고독의 형식을 창조했다면, 포어는 태어나지 못한 아들과 아버지라는 존재를 알지 못하고 죽은 아들을 둔 할아버지의 정신적 공백을 3대에 해당하는 꼬마 오스카의 어둠에의 탐험을 통해 메워나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한편으론 2차대전과 9.11이라는 무거운 관념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자 택한 형식이지만, 오스카의 발랄함과 전복적 이미지가 가지는 실제적인 한계들을 직시하지 않는 결과로 다소 가볍게 읽히는 점은 문제점으로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독자들은 오스카와 기왕의 소설들에 등장했던 너무 아이 같거나 어른스러운 어린 화자들과의 차이점을 거의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니 거의 그럴 정신이 없게끔 만드는데, 이는 형식을 뒷받침해주는 사진, 타이포그래피들의 삽입이라는 의도적 중단의 효과 때문이다(이런 시도를 새로운 소설 형식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꼭 사진이 아니라면 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소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설은 사진들만 넘겨보아도 재미가 있다!).

하지만 이 ‘리틀 오스터’ 포어의 두 번째 소설은 9.11이라는 초유의 사건을 배면에 깔고 있기에, 4년의 시간이 제공하는 미진한-미숙한 시선을 애초에 지니고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의 시각은 자신의 세대가 내릴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방식의 봉합이며 그것이 문학적으로 올바르냐라는 물음을 교묘히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말해져야 할 것들이 매우 난삽하게 떠돌고 있음에도 ‘그 이후의 것’들은 고스란히 남겨둔 채, 여덟살 짜리 꼬마 뒤로 가뿐히 숨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9.11에 대한 정면 대결을 바라는 것 자체가 젊은 작가에게 무리일 수 있긴 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 전 세대의 보편적인 전쟁의 상흔(2차대전)과 동시대 9.11을 나열하며, 할아버지의 두 아들을 희생시킨 것은 조금 작위적인 면이 없진 않다(조각가가 꿈인 할아버지가 실어증에 빠져 사람들과 글을 써서 소통한다는 장면은 간혹 소설을 희극적으로 몰고 간다). 또 새로운 문학이나 새로운 소설 형식의 실험적 측면에서도 역시 좋은 평가를 받긴 어려워 보인다. 이 소설에 실린 사진들만 보자면 결코 이미지에 대한 문학적 상상력을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선별되어 호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앞으로 이미지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는 텍스트를 양산할 부작용 또한 낳을 지 모른다.

포어는 공교롭게도 필자와 동년배이다. 같은 시절 오스터의 소설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어찌할 수 없지만, 결코 쉽지 않는 긍정적인 세계관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자 호감으로 작용했다면 너무 개인적일까? 포어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곧 소개될 첫 소설 『모든 것은 아름답다』를 읽은 후로 미뤄야겠지만, 영화로 제작되었을 정도라면 나이에 비해 일찍 찾아온 성공이 차기작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지가 더욱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엄청나게』 역시 일정 정도 영상화를 목표로 하고 있는 소설이라 짐작된다. 일본의 신세대 작가들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지금, 포어 부부의 성공적인 진입의 가능성을 타진한다면, 뭐랄까, 오스카 식으로 ‘갑자기 부츠가 무거워진다’.(남승민 | 문화평론가)

06.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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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OKE 2006-10-15 10:48   좋아요 0 | URL
이 작가의 부인인 니콜 크라우스가 쓴 '사랑의 역사'도
오스터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기더군요.

로쟈 2006-10-15 15:28   좋아요 0 | URL
<사랑의 역사>를 저는 제쳐놓았었는데(제목이 좀 감상적이어서) 여러 사람들의 호평에 떠밀려 다시 읽어볼 생각을 해보고는 있습니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과 김상환 교수(서울대 철학과)와의 대담을 이미지 버전으로 옮겨놓는다. 원래는 <철학과 현실>(2003년 겨울호)에 '철학과 정신분석의 만남'이란 제하로 실렸던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예전에 짤막한 코멘트를 단 바 있다. 알다시피 지젝은 2003년 10월에 방한하여 다섯 차례의 강연을 가진 바 있는데(이 강연문들은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 2005)로 출간돼 있다), 대담이 이루어진 것도 그 즈음이다. 가벼운 서두에 이어서 여섯 가지 주제에 관해 대담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대담 자체는 인터넷상에 떠돈 지 오래됐는데, 얼마전에 알라딘 서재에에도 전문이 돌아다니길래 좀더 읽기 편하게 정리해놓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지젝 입문'으로서 아주 유용하겠기 때문이다. 언제나처럼 이미지들 외에도 강조와 군말은 나의 것이다.

 

 

 

 

김상환: 시작하기 앞서 <철학과 현실>의 독자들을 대신해서 대담에 응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독자들이 당신의 생각을 구체적이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지젝: 말씀을 끊어서 죄송합니다. "철학과 현실"이라는 제목에서 '현실'은 어떤 뜻을 담고 있죠? Wirklichkeit, realte, actualtite, matterialite 등등 중에서 어떤 말에 해당하죠?

김상환: Wirklichkeit에 가장 가깝습니다.

지젝: 아, 알겠습니다.

1. 정신분석과 철학의 관계에 대하여

김상환: 우선 정신분석, 혹은 정신분석과 철학 사이의 긴장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당신 책을 읽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가령 푸코, 들뢰즈, 데리다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은 모두 정신분석과 논쟁을 벌였고, 그들 자신의 철학적 개념들을 가지고 정신분석을 넘어서거나 보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출발점은 오히려 프로이트나 라캉의 정신분석 바로 곁에 위치하고 있고, 당신은 철학 쪽에서 가해오는 공격에 맞서 정신분석을 지켜내거나 옹호하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정신분석과 철학 사이에 어떤 긴장과 갈등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갈등의 본질적 성격은 무엇입니까? 어떤 지점에서 이런 투쟁이나 논쟁이 이루어지는지요?  

지젝: 제가 정신분석을 대표한다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저로서는 대답하기 다소 곤란한 질문입니다. 저는 정신분석을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제가 알고 있는 정신분석을 이론화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정신분석과 철학 사이에 그와 같은 긴장이 감도는 방식을 살펴보면 대개 두 쪽의 관점에 모두 오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물론 이것은 가장 통속적인 수준의 오류일 텐데--몇몇 정신 분석가들의 경우 진료적 용어들을 들먹여가며 철학을 예단, 처단해 버립니다. 마치 철학이 일종의 편집증, 과대망상증이기나 한 듯 단정하는 것인데, 이는 심지어 프로이트에게서조차 엿볼 수 있는 경향입니다. 

그는 철학자의 충동을 사유의 전능성을 믿는 어린아이 같이 순진한 태도에서 나온다고 보고, 이 태도가 철학에 남은 최후의 잔여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철학이 하는 모든 일을 병리적인 어떤 것으로 환원하거나 철학을 병리화 해버리는 일입니다. 게다가 프로이트는 철학자들이 항상 하나의 완성된 그림, 곧 총체성을 고민하고 있다고 비판하는데, 라캉 역시 이 점에서는 그를 따르고 있습니다.

사실 정신분석은 어떤 비일관성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포착, 해명하고자 합니다. 라캉이 반복해서 정신분석이 탁월하게 반(反)-철학적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어떤 개별 과학의 입장에서 반대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총체성에 대한 해석학적 관점에서 반대한다는 것이고, 또 어떤 환원 불가능한 미해결의 간극을 포착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철학에 대한 이런 원초적인 반대에 대해 그 세부사항을 구구절절이 늘어놓는 것은 무용할 뿐 아니라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겁니다. 진정한 철학은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총체적 체계를 구축하려는 어리석은 시도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철학도 역시 어떤 환원 불가능한 간극에서 출발합니다. 이를 하이데거처럼 "존재론적 차이" 등으로 부를 수도 있겠죠. 우리는 늘 생활세계, 삶의 세계에 함몰해 있고, 일차적인 철학적 제스처는 어떻게 이 세계에 균열이 존재하는가, 어떻게 그 균열이 기능하거나 하지 않게 되는가를 밝히는 일입니다. 심지어 철학은 본래적으로 이런 간극을 정식화하는 작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가령 칸트 같은 철학자가 초월적인 것과 초월적이지 않은 것을 구별하면서 현상과 본체 사이의 어떤 간극을 발견하고 이 간극을 환원 불가능한 인간 조건으로 제시할 때가 그렇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정신분석 쪽의 비난내용과는 반대로 철학은 우리 지식의 유한성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칸트, 하이데거 등과 같은 최상의 철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유한성을 적극적인 존재론적 조건으로 발전시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와 맞서는 어떤 다른 경향이나 관점이 있습니다. 이는 철학이 정신분석을 초월론적 관점에서 비판, 단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이런 쪽의 사람들은 정신분석이 그 자신의 용어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가령 프로이트에게서 나타나는 리비도 개념이나 에너지 개념, 이것들이 의존하고 있는 기계론적이고 생물학적인 모델 등이 그 사례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들은 정신분석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렇게 주장할 뿐입니다. "정신분석은 개별 과학이고 그 자체로서는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을 감당할 수 없다. 의미의 역사적 지평에 대한 물음과 같은 해석학적 질문을 수행할 수 없다. 가령 정신분석은 이미 의식, 무의식, 인과성, 섹슈얼리티 등등과 같은 일련의 개념들을 자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이 개념들을 통해 전개되고 있지만, 이 용어들의 존재론적 의미나 지위를 설명할 수는 없다."

정신분석 자체가 어떤 철학에 의존한다는 것이고 그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철학적인 전제들에 의존한다는 것인데, 이런 의미에서 다른 모든 개별 과학처럼 정신분석 역시 철학적 반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묘한 지점입니다. 우리는 분명 프로이트에게서 생물학적인 진술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가령 그가 억압, 트라우마 등에 대한 경험을 생명 에너지 차원에서 일어나는 어떤 생물학적 불균형으로 말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물론 이것들은 생물학이 더 발달한다면 풀릴 수 있는 문제일지 모르고,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정신분석의 개념적 장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이 문제를 생물학적 용어들로 곧바로 정식화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여기서 저는 자크 라캉을 따르는데, 누구든 프로이트를 면밀하게 읽어본다면 그가 실천했던 고유한 의미의 정신분석은 바로 상호주관적인 실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정신분석이 어떤 단순한 실증과학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대화라는 것은 이미 명백해집니다. 물론 정신분석이론 자체를 생물학적 관점에서 읽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리석게도 프로이트의 충동, 죽음충동 등등의 개념을 일종의 선천적 본능이나 자기 해체, 자기 파괴 등과 같은 생물학적 개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개념들이 프로이트 안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를 자세히 살펴본다면 생각을 달리해야 하고, 또 이것이 라캉이 이루어낸 큰 성취입니다.

우선 프로이트는 상징적 질서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충동(Trieb)은 본능(instinct)이 아닙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이고, 삶과 죽음 너머에 있습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본능이 아니라 정확히 자연 혹은 자연적 순환을 탈자연화하는 심급, 어떤 근본적인 심급입니다. 따라서 저는 정신분석이 단지 특수한 영역을 다루는 어떤 존재적(ontisch) 학문일 순 없다고 봅니다. 정신분석의 실천과 개념들의 존재론적 지위를 묻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초월론적 철학의 수준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가령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억압 등과 같은 인간 심리의 발생을 설명할 때 프로이트는 셸링이 <세계시대 Die Weltalter>(1811)에서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어떤 사후적 추정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현실, 그리고 이 현실을 지각하는 주체가 어떻게 출현했는지에 대한 초월론적 성찰을 제공하는 것이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거세 등의 개념들은 존재적이지 않고, 심지어 정신분석의 범주에 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개념들은 일종의 초월론적(=선험적)인 것, 독일어로 전(前)-역사(Vorgeschite)에 속하는 것을 명명하고 있고, 우리가 주체로서 출현하기 위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비롯됩니다. 저는 "우리는 이미 언어 속에서 존재한다" 등과 관련된 라캉의 이론은 바로 이와 같은 초월론적 물음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우리가 되기 위해 어떤 일이 일어났어야만 하는가에 있는 것이고, 정신분석이 생물학적이냐 심리학적이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죽음충동 같은 프로이트적 사유의 가장 근본적인 차원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독일 관념론, 헤겔과 셸링 등이 말하는 어떤 근본적인 부정성 등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정신분석과 철학적 전통의 만남, 특히 정신분석과 독일 관념론의 예기치 못한 마주침은 두 쪽에 모두 중요합니다. 정신분석이 진정 무엇에 대한 물음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이런 철학적 참조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길 바랍니다.

김상환: 프랑스 철학자 쥬랑빌(Alain Juranville) 교수를 알고 계실 텐데요, 그는 그 유명한 저작 <라캉과 철학 Lacan et la philosophie>(1984) 말미에서 오늘날 정신분석은 철학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음을 지적하고, 철학과 정신분석 사이에 어떤 적극적인 대화가 필요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묻겠습니다만, 정신분석이 서양 현대철학의 전개과정에 적극적으로 기여한 바와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바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지젝: 저는 서양철학사를 어떤 근본적 통찰에 대한 망각의 역사로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동의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라캉뿐 아니라 이른바 서양의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이 어떤 근본적인 수준에 대한 망각과 연루되어 있다는 하이데거에게도 동의합니다. 어떤 근본적인 간극, 차이, 잉여 등등과 같은 것을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차이"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요. 저는 이 잉여를 하이데거와는 달리 단지 철학의 시작(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에서만이 아니라 철학사 전체를 통해 여기저기 위치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가령 데카르트와 같은 서양 근대 철학의 출발점을 생각해봅시다. 그가 코기토를 사유하는 실체(res cogitans)로, 다시 말해서 어떤 실증적인 실체로 바꿔버리는 순간 어떤 간극이 곧바로 닫혀버렸습니다. 이는 칸트에게서도 마찬가진데, 그가 뭔가에 접근해 가다가 끝까지 사유하기를 두려워할 때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좀 다릅니다. 셸링에 대한 위대한 해석에서 그는 인간자유에 대한 셸링의 논제에서 벗어나고 있는 어떤 차원을 돌파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저의 첫 번째 전제는 철학의 유한성이 그 자체로 닫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철학에는 어떤 근본적인 부주의(in-attention)가 존재합니다. 어떤 유한성, 불완전성에 대한 어떤 진정한 철학적 경험이 있지만, 이 경험은 어떤 형이상학적 구축물에 의해 곧바로 가려져 버리는 것이죠. 저는 정신분석이 철학 안에서 억압되어 있는 것을 어떤 근본적인 방식으로 자리매김하고 정식화할 수 있게하는 사유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억압된 것이 병리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이데거가 셸링을 해석하면서 발견해 낸 멋진 구절처럼, 그것은 항상 자기-오인을 발견해내는 몸짓입니다.

우리는 이런 몸짓에 너무 맹목적입니다. 많은 분들이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등한시되고 잘못 지각되어온 철학 자체의 발견적 몸짓, 발견적 경험을 사유하게 합니다. 이는 칸트가 멋지게 표현했던 것처럼, 세계의 존재론적 불완전성의 관념에 대한 근본적 경험입니다. 이는 단순히 현실 바깥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 안에는 어떤 간극이 존재하고, 때문에 현실은 완결성을 띤 것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나 문제제기야말로 유일하고도 독특한 철학적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2.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하여   

김상환: 그러면 철학에 대해 더 묻겠습니다. 당신은 꾸준히 데리다와 들뢰즈, 그 밖에 포스트모더니즘 등에 맞서는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하려는 제스처와 노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현대 프랑스 철학과 당신 사이에 어떤 긴장이나 갈등이 있는 것 같은데,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젝: 이 갈등은 우리가 어떤 의미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지에 달렸습니다. 만일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을 "거대한 형이상학적 정초의 계획은 끝났다, 우리는 거대 사유는 할 수 없고 단지 일상적 행위만을 실천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시작에는 환원 불가능한 복수성, 분산과 산포가 존재한다" 등등의 의미로 이해하다면, 저는 이런 종류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반대합니다. 물론 이 용어는 유행을 따르는 명칭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보통 포스트모더니스트라 불리는 사람들 중 거의 아무도 자기 자신을 포스트모더니스트로 생각하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포스트모더니스트일까요? 들뢰즈는 거대하고 거의 고전적인 철학체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데리다의 경우는 간단히 말하기 어렵고 훨씬 더 애매하지만, 어쨌든 레비나스처럼 일종의 부재하는 절대자에 다시 준거점을 두고 있고 윤리적 명령을 해체론의 해체 불가능한 조건으로 설정하고 있으므로, 그 역시 일종의 초월론적 관점을 끌어들이고 있는 셈입니다. 어떻게 보면 데리다는 해체론 자체를 일종의 초월론적 아프리오리(a priori)를 발견하는 활동으로 이해하고 있고, 이 아프리오리를 일종의 윤리-종교적 용어를 써서 메시아적 정의(正義)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흔히 위대한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들 하는 리오타르도 마찬가집니다. <포스트모던의 조건 La condition postmoderne>(1979)에서 그는 환원 불가능한 다양성이나 복수성을 강조하고 거대담론을 비판하지만, 이를 상식적인 의미의 비판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게다가 리오타르 자신이 거대담론의 종말에 대해 말할 때 그 자신이 거대담론을 구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또한 리오타르 자신이 나중에 다시 어떤 윤리적 차원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자신이 말하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셈이지요.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푸코는 더 복잡하구요.

따라서 여기서 일차적으로 주목해야할 점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은 매우 다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라는 것이고, 이런 용어상의 애매성에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포스트모더니즘을 단지 문화적 영역의 역사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확실히 포스트모더니즘의 계기는 예술적 아방가르드가 위축되고 조형예술, 영화 등등에서 급진적 근대성이 종결되었을 때이고, 이는 1970년대에 일어난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런 표피적 관점에서 벗어나 보다 심층적인 사상사적 이해를 구한다면, 최초의 포스트모더니스트는 니체일 뿐 아니라 이미 셸링이었으며, 심지어 후기 헤겔도 포스트모더니스트였습니다. 이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성, 계몽의 기획에 대한 일종의 의심이자 자기 비판적 고찰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흔히들 포스트모더니즘과 결부시키는 이른바 후기구조주의에 초점을 맞춰보면, 여기서 역설은 훨씬 심하게 나타납니다. 당신도 알고 계실 테지만, 프랑스에서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실질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후기구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 용어들은 앵글로 색슨적 지칭일 뿐, 프랑스에서는 전혀 무의미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어떻게 "후기구조주의"라는 딱지 아래 우리가 앵글로 색슨적인 학문 담론에 들어서게 되고 또 동일한 영역의 일부로 인식되는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프랑스에서조차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스트나 후기구조주의자로 불리는 사람들은 서로를 무시하고 혐오합니다.

 

 

 

 

프랑스에서 데리다와 들뢰즈를 함께 묶어서 보는 것은 정신 나간 짓입니다. 그들은 사상의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개인적 차원에서도 서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저도 데리다가 들뢰즈와 가깝다거나 들뢰즈가 데리다와 가깝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후기구조주의자들이 만나는 방식은 데리다와 푸코 사이의 유명한 논쟁이 그렇듯이 대개 엄청나게 험악합니다. 데리다가 끊임없이 광기를 비웃으면 푸코는 광기가 어떤 극단적인 폭력 속에서 파열되고 사라져버렸다고 응수하지 않습니까. 저도 이 프랑스 철학자들이 서 있는 영역에 개입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가 이때 항상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자크 라캉이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스트나 후기구조주의자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적어도 앵글로 색슨적 관점에서 라캉은 "의미가 해체되어야 한다, 주체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에 의해 지배된다, 등등......"을 입증했다고 간주되고 있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저는 데리다적인 해체의 영역과 라캉적인 정신분석의 영역이 총체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이에 대해 점점 더 커다란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두 사람이 "총체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은 둘 중 누구 하나가 더 옳다는 게 아니라 그 둘 사이의 직접적 대화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입니다(*즉, 데리다와 라캉의 '관계'는 불가능하며, 이 불가능은 위상학적 불가능성에 속하다).

물론 저는 데리다를 존경하지만, 가령 <우편엽서 Carte postale>(1980)에서 그가 라캉을 직접적으로 비판할 때 명백히 단순한 오독을 범하고 있으며, 라캉 측에서의 몇 가지 답변 역시 마찬가지임을 저는 인정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 수준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라면 정직하게 담론의 환원 불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제가 거듭 밝히고자 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후기구조주의의 지배력에서 벗어나는 라캉의 특수성입니다. 저는 라캉의 이런 특수성을 이론적, 윤리적, 정치적 차원에서 부각시키고자 합니다.

먼저 이론적 특수성에 대해, 가령 데리다의 라캉 비판이 지닌 문제점을 생각해 봅시다. 데리다의 비판점은 라캉이 주체-형이상학의 울타리(cloture)에 머물러 있다는 것인데, 라캉 자신은 이 울타리 안에 남아 있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라캉의 기획 자체가 주체라는 울타리 안에 남아 주체 개념을 다시 부여잡는 것이었으며, 그러나 또한 이 주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정의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해체주의자나 구조주의자에서와는 대조적으로 라캉에게서 주체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라캉은 주체가 단지 담론의 효과라거나 어떤 익명적이고 전(前)-주체적인 텍스트적 과정으로부터 상이한 주체적 위치가 발생한다는 알튀세르 같은 사람들의 관점에 반대합니다. 라캉이 제기한 문제는 상징적 구조에 종속되어 있는 한에서의 이 주체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라는 데 있습니다.

저는 정치적-윤리적 차원에서도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체주의에는 리오타르, 데리다 등의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적어도 레비나스의 윤리학과 데리다의 윤리학은 어떤 근본적인 지평에서 서로 수렴하게 됩니다. 타자를 환대하고, 전적으로 우연한 타자와의 마주침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서 그들은 한 목소리입니다. 이 수준에서 데리다와 라캉을 함게 묶어주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가령 사이몬 크리츨리(Simon Critchley)가 지적했듯이 데리다의 환대가 라캉이 말하는 전적으로 우연한 실재와의 마주침이라는 점입니다.

라캉의 용어로 말하자면, 그것은 상징적 구조의 바깥에 있는 실재의 우연성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런 점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라캉의 윤리학은 그 기본적 입장에서 데리다의 윤리학과 다릅니다. 물론 저는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차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고, 이것은 라캉의 새로움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정식화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상환: 여기서 질문을 덧붙이고 싶은데, 차이란 정확히 무엇일까요? 현대 프랑스 철학은 보통 차이의 철학이라 불립니다. 그렇다면 데리다나 그 외 다른 철학자들의 차이 개념에 맞서 라캉의 차이 개념은 어떤 것입니까? 라캉의 차이 개념은 다른 이들의 차이 개념, 철학적 개념상의 차이와는 매우 다를 텐데요.

지젝: 아마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이 있다면 "은유 대 환유"라 할 수 있을 겁니다(*매우 흥미로운 주장이다. 은유/환유의 이분법은 사실 러시아 출신의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을 원조로 가지며, 라캉은 야콥슨의 은유-환유론을 새롭게 전유한 바 있다). 보통 해체론에서는 환유가 은유에 대해 우위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여기서는 궁극적인 존재론적 사실은 원초적인 환유적 복수성, 분산과 산종(散種)에 있고, 이것이 데리다적 차이입니다. 은유는 언제나 그 다음, 두 번째에 옵니다.

 

 

 

 

기본적으로 니체나 다른 사상가들,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들뢰즈 역시 이런 차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원초적인 사실은 수동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않은 창조적 행위로서의 분산적 생산성에 있고, 그런 생산성을 이루어내는 활동에 있습니다. 그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원초적-기록(archi-ecriture)이나 초월론적 활동으로서의 차연(differance)이고, 또 그 차연의 생산성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이 창조적인 복수적 운동과 형이상학적 재현 사이에 어떤 간극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발생의 과정이 대개 그 자신의 장애를 생산하는 과정임을 뜻합니다.

 

 

 

 

당신도 알고 있듯이, 이미 니체가 바로 그와 똑같은 문제를 제기했죠. 그는 환원 불가능한 욕망의 복수성이나 다원성을 강조했고, 또 여기서 계보학의 문제를 찾았습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의지 자체가 그 자신의 장애물, 곧 도덕성 등을 생산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지나친 단순화일지 모르지만, 저는 바로 이것이 데리다적 해체론이며, 심지어 들뢰즈적 접근 역시 이런 원초적인 발생적 분산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데리다는 이를 다른 이름들, 가령 원초적 차이(archi-difference), 흔적(trance), 산종(散種) 등등으로 부르는데, 이런 운동은 어느 정도 그 자신의 한계나 마감국면을 스스로 발생시킵니다.

라캉에게서 이 모든 것이 거의 정확히 그 반대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일종의 근본적인 간극, 어떤 입벌림 현상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고, 다양성은 바로 이 간극을 사후적으로 메우기 위한 어떤 폭발현상이라는 겁니다. 원초적 사실은 다양성이 아니라 하나 안에 있는 간극입니다. 다양성은 이런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나중에 발생할 뿐입니다.

단순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대부분 페미니스트인 미국의 해체주의자들은 라캉이 이항대립의 논리에 빠져 있다고 비난합니다. 다양성 대신 주체 대 타자, 남자 대 여자 등등의 대립 관계를 설정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실상은 그런 게 아닙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라캉이 성적 차이라는 토픽을 전개할 때, 그는 단순히 이항대립의 논리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서 한 항이 사라지는 순간의 이항 대립의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라캉은 이를 "여성의 기표는 부재하는 기표"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고대 우주론에서 남성과 여성이 각각 양(陽)과 음(陰)의 원리라면, 라캉은 우리엔 단지 양만 있고 음은 없다고도 말하는 셈입니다. 라캉의 문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다양성이 하나 안에 있는 이 근본적 불균형을 메우기 위한 과정의 산물임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로 제가 제 책에서 언급했던 영화를 들어보겠습니다. 그의 초기 작품 중 톨스토이를 패러디하고 있는 영화가 있는데(*우디 알렌의 영화 <사랑과 죽음>을 말한다), 톨스토이의 자연스러운 대립항은 물론 도스토에프스키지만, 이 영화에서 도스토에프스키는 어떤 식으로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는 빠져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한 보충이 일어납니다. 두 주인공이 나눈 짤막한 대화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대작의 거의 모든 제목들이 한꺼번에 언급되는 것이죠. "그 백치는 어디 있지?" "아, 카라마조프 형제 말이니?" "그는 지하생활을 하고 있어." 이렇게 다양성이 폭발되어 나오는 이유는 타자가 억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원초적 사실은 하나는 하나가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하나는 그 자신과 일치하지도, 일관적이지도 않습니다. 원초적 사실은 차이가 두 항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구조주의적 용어로 말해서 어떤 한 항과 그것이 기입되는 자리 사이의 차이입니다(*지젝이 자주 인용하는 것은 말라르메의 시구이다). 이는 이미 유럽 중세 논리학에서 이중화(二重化), 상징적 이중화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가령 당신이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일 때 당신 앞에는 대상과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름이 단지 대상에 외부적인 무언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름은 그 대상 자체의 구멍에 대한 포착이자 보충입니다. 이름은 어떤 대상을 명명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서 당신이 지각할 수 없는 어떤 구멍을 명명합니다.

고유명사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생각해봅시다. 이상하게도 당신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이 겨냥하는 것은 정확히 바로 기술(記述)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이름 안에 있는 어떤 직관적 진리입니다.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내가 참되게 기술할 수 없는 새로운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이름을 기술(記述) 문장으로 번역할 수 있다는 버트란트 러셀의 생각은 여기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름은 꼭 필요한 것이고 이름 없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지만, 왜 그런 걸까요? 만일 대상에 어떤 간극이 없고 그래서 그것이 꽉 차 있다면, 당신은 단지 그 대상을 기술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대상에는 어떤 구멍이 있는 것이고, 이 구멍을 명명하기 위해서 바로 이름이 필요한 겁니다.

또한 이런 원초적 간극이 저에게는 궁극적 사실, 궁극적 지평인데, 정신분석에서 그것은 상징적 거세에 해당합니다. 이 거세 개념은 하이데거의 의도와 매우 근접한 아이디어를 담고 있습니다. 거세는 역설적으로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세는 당신에게 무언가를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원초적인 증여에 해당하는 부정적 운동입니다. 나는 너에게서 무언가를 앗아감으로써 너에게 뭔가를 준다는 것, 어떤 공간이나 여백을 열어준다는 것. 바로 여기에 거세 개념의 역설이 있습니다.

 

 

 

 

부정성을 사유한다는 것은 오로지 부정적인 것만을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주는 것을 사유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가 차이(Unterschied), 빈터(Lichitung)를 언급할 때처럼, 이는 마치 물러서고 후퇴하면서 선사하고 증여하는 장면을 생각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물러감(Withdrawal)을 선사(Giving)로 사유하기. 어쩌면 이런 역설로부터 멋진 지각 이론을 전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다면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 대상에서 어떤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대상으로부터 뭔가를 상실해야 한다는 것, 물러섬과 철회가 지각의 조건이라는 것 등등......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라캉과 데리다는 서로 다른 차이를 말합니다. 그들을 존경하느냐와는 별도로 우리는 이 차이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에게 들뢰즈는 들뢰즈이고, 데리다는 데리다이며, 라캉은 라캉입니다. 이는 제 새 책의 토픽이기도 합니다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저는 이들의 작업이 어느 정도는 이전의 철학자들, 가령 스피노자, 칸트, 헤겔에 대한 거대한 재해석이자 반복이라고 생각합니다(*자세한 논의는 <신체 없는 기관>에 포함돼 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이고, 그 자신이 그렇게 말합니다. 데리다에 대해 말하자면, 물론 그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저는 그가 자신의 주요 용어들이 어떤 해체 불가능한 조건임을 강조하므로 칸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라캉은 그 누구보다 헤겔적이죠. 혹은 더 멀리까지 소급하자면, 들뢰즈는 그리스적 이교도이고, 데리다는 유대교이며 라캉은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3원성은 서양사상사의 근본적 정식이고 아마 계속 다시 반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큰 구도를 제안하고 이를 증명하는 것도 큰 가치가 있겠지만, 제가 여기서 따르고자 하는 규칙은 프로이트가 "세부에 대한 해석"이라 부른 것, 곧바로 큰 대답을 찾지 말고 공명을 주는 작은 지식, 작은 과학들을 보라는 것입니다(*문학은 이러한 디테일에 관한 것 아닌가? 나는 이 디테일에 대한 주목이 과학/철학에 대해서 문학이 갖는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큰 시각에서 이런저런 비교작업을 해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비교가 아니라 뭔가를 밝혀주고 빛을 비춰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양 형이상학이고 이것은 동양 철학이고 하는 식의 거대한 종합을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큰 것을 직접적으로 찾으려 한다면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3. 영화에 대하여  

김상환: 이제 주제를 철학에서 다른 주제로, 가령 영화로 바꿔보지요. 물론 세부적으로는 묻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영화를 보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고 창안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지젝: 물론 그런 새로운 방식들이 있습니다. 가령 들뢰즈의 영화 이론 같은 것이 그렇다고 인정합니다. 영화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들뢰즈를 암묵적으로 참조하고 있죠. 그러나 저에게도 새롭게 뭔가를 창안했다는 말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이 점에 관한한 저는 매우 자기 비판적입니다.  

김상환: 그래도 영화를 다루는 데 있어 들뢰즈적 방식과 구별할 수 있는 지젝적인 방식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지젝: 저는 여전히 회의적입니다. 다만 저 자신은 영화를 세 가지 수준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대부분의 경우 저는 영화를 단지 정신분석이나 철학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한 사례로 이용합니다. 이용만 있지 창조는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수준에서 저는 일상적 삶에 암묵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이데올로기를 조명하기 위해 영화를 이용합니다. 오늘 이 시대의 징후로서의 영화라고 할까요. 이 수준은 그래도 첫 번째 수준보다는 나은데, 그 이유는 이런 작업이 이론적 논점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어떤 영화적 세계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진정한 영화 분석은 아닙니다. 영화를 어떤 존재론적 사태로서 다루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미지의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건 아니죠. 저는 이런 물음을 소홀히 했고, 이 점을 자기 비판적 시각에서 지적하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영화분석에서 저는 기본적으로 줄거리를 해석하고 배우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해석하는데, 여기서 영화는 시각적 매개에 그치고, 정말 철학적인 분석은 아주 조금 밖에 안 됩니다. 그렇다고 그런 분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히치콕을 다룬 책에서 <현기증>이나 <사이코>를 분석할 때, 제가 진정으로 묻고자 했던 것은 고유하게 존재론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이미지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해서는 물론 "이미지와 사운드는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 등과 같은 문제 말입니다.  

제가 공동편집자로 참여한 논문집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응시와 목소리 Gaze and Voice as Love Objects>(1996)에서도 저는 이런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저는 영화에서 아주 흥미로운 현상을 봅니다. 그것은 영화가 자연적인 것으로 지각되지 않게 되는 현상입니다. 물론 영화에서 말하는 자는 현실적인 인간입니다. 그러나 목소리는 마치 떨어져 나온 공포스런 육체로, 무례한 침입자로 지각됩니다. 영화의 존재론적 의미가 드러나거나 영화가 영화로서 체험되는 것은 이런 대목입니다.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가령 초기 유성영화에서 우리는 환각적인 목소리, 신체 없는 목소리, 감지할 수 없는데도 우리 주변을 떠돌아다니는 목소리만을 지각하게 됩니다. 이는 매우 길들이기 어려운 외상적 목소리죠. 이는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Enjoy Your Symptom!>(1992) 1장에서 제가 검토한 찰리 채플린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찰리 채플린이 어떻게 유성영화에 저항했느냐를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목소리가 얼마나 외상적인가에 대해 남다른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고, 히틀러를 패러디한 위대한 작품 <독재자>(1939)에서조차 그는 전형적인 두 명의 목소리 캐릭터를 설정합니다. 좋은 녀석, 유대인 아버지는 항상 말이 없고 조용한 인물인 반면, 나쁜 녀석은 항상 목소리입니다. 그는 소리를 냅니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자기 비판적인 시각에서 말하자면, 저는 이런 현상에 어떻게 접근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욕심도 크지만 그만큼 좌절도 큽니다(*지젝을 읽고 좌절하는 이들은 어떡해야 하나?). 영화에 대해 더 정통해야 하고 더 근본적인 범주를 찾아야 하는데.... 저는 또 고전 음악에 대해서도 역시 어떤 정통하고 내재적인 지식을 가지고 싶습니다. <환상의 돌림병 The Plague of Fantasies>(1997)의 두 번째 부록(<로베르트 슈만: 낭만적인 반휴머니스트>)은 인간의 노래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유감스럽게도 저의 작업은 단지 모방에 불과했고, 명백히 저는 충분한 내재적 지식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큰 좌절입니다.

김상환: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계속 영화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죠. 문학, 연극 등 다른 장르에 비교할 때 영화만이 갖는 커다란 이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리고 영화가 미래 문화에 대해 갖는 적극적 의미가 있다면 또 무엇일까요?  

 

 

 

 

지젝: 저는 영화가 20세기 예술이라는 질 들뢰즈의 개념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시선은 신체 없는 기관으로 자동화되기 때문입니다. 몽타쥬, 카메라 움직임 등등의 공정을 거친 영화에서 시선은 말 그대로 "실재적 대상"으로 주변을 둥둥 떠다니게 됩니다. 다른 한편 저는 새로운 시각적 디지털 기술에 주목합니다. 이를 아직 무엇이라 정의하진 못하겠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여기에 함축된 논리가 더 이상 과거와 동일한 논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상현실은 우리를 전혀 다른 곳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당신에겐 프레임이라는 단위만이 남습니다. 당신은 시선을 도둑맞고 이 도둑맞은 시선은 당신 주변을 떠다니죠. 하지만 이런 디지털 기술과 가상현실에서도 어떤 유기적 전체성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 드러남의 방식이 과거와 달라졌습니다. 프랑스의 영화 이론가이자 저의 좋은 친구인 미셸 시온(Michel Chion)은 풍경(Landscape)이라는 말을 따와 풍음(Soundscape)라는 아주 멋진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런 아이디어는 뉴미디어의 영향 아래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전 영화에서 목소리는 기본적으로 이미지에 수반되는 것입니다. 사운드는 이미지에 맞춰 조정되고 부여되죠. 그러나 지금은 마치 유럽 중세의 그림으로 되돌아가기라도 하듯, 당신은 단지 시각적으로 파편화된 대상만을 발견합니다. 당신의 시각적 주의는 파편화되는 반면, 이 파편들에 전반적 배경(Hintergrund)을 제공하고 위치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사운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현실을 총체적으로 지각하는 방식에서 더 중요한 것은 흔히들 생각하듯 시각이 아니라 사운드입니다. 시각이 파편화될 수 있는 것도 사운드 트랙이 배경을 제공하기 때문이죠.

저는 이것이 매우 다른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저로선 이런 현상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분석해야 할지 충분히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서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고 앞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 것인지도 확실히 모릅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영화는 문학보다는 훨씬 더 커다란 변화와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영화는 분명 테크놀러지와 매우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테크놀러지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시선, 부분적 시선, 클로즈업 등에 대한 어떤 존재론적 함축을 지니는 기술입니다.

 

 

 

 

들뢰즈나 몇몇 형식주의자들에 따르면, 영화에서 근본적인 존재론적 현상은 화면상의 파편적인 대상이나 감각이 폭력적으로 현실 안으로 들어와 장악력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네 전부를 앗아가지 않는다, 다만 네 머리를 앗아가고, 네 손을 앗아간다...." 새로운 방식의 디지털 기술에 내재하는 이 새로운 유형의 폭력과 더불어 무엇인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불행히도 저에게는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뽀족한 이론이 없습니다. 누군가는 정직하게 이렇게 말할 겁니다. 우리의 탈근대적 세계, 이 디지털 세계에는 형태소들을 만들어내는 공정이 있어 우리는 장면을 연출할 필요조차 없다고, 우리는 단지 하나의 형태를 다른 형태로 변형시키기만 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가령 제 아들이 갖고 노는 보잘 것 없는 로봇 장난감이 바로 그런 것이겠죠. 이 로봇은 인가의 형상과 신의 형상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 연속적으로 변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더 이상 우리가 포착하여 장면으로 연출해야 할 실질적 바탕 같은 건 없음을 뜻합니다. 현실 자체가 훨씬 더 탄력적인 조형성을 띠어가고 있으니까요. 이제 지각의 차원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가령 청소년이나 성인들 간의 범죄 같은 데서 이 수준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면, 이는 바로 우리 자신이 디지털 비디오게임 속의 현실과 관계하는 방식일 겁니다.

 

 

 

여기서의 현실, 가상현실의 기본 아이디어가 무엇입니까? "당신은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 당신은 되돌아갈 수 있다, 아무 문제없이 당신은 게임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당신은 심지어 여러 명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것 아닙니까? 아마 저는 여기서 "그렇다면 어떻게 진짜 현실 자체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령 전쟁의 테크놀러지화라는 콜린 파월의 생각은 저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비디오 게임의 모델을 전쟁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아마 이 수준에서 생겨나고 있는 문제는, 어떻게 기술해야 할지 아직 적절한 용어를 찾지 못했지만, 하여간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둘러싼 어떤 근본적인 수수께끼일 겁니다. 무한한 조형성을 지니지만 논리적으로는 아무런 연루성(committement)을갖지 않는 자기 정체성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항상 자아를 그 어디에도 진정으로 연루시키거나 개입시키지 않고서도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발상입니다.

가령 비디오 데이트나 가상 데이트는 오늘날 매우 대중화되었는데(*이미지는 왕가위의 영화 <2046>의 한 장면), 그 이유는 당사자가 완전히 연루되지 않고 언제든지 발을 뺄 수 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주 옛날 캘리포니아에 있던 호모섹스 공동체의 관습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익명의 섹스가 진행되는데, 어떤 구멍이 있어서 당신은 자신의 성기를 거기다 삽입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누가 자신의 파트너인지 모르고 단지 자기 자신을 한 쪼가리의 대상으로 환원시켜 제공할 따름입니다. 여기서는 인간 상호 간의 소통 같은 건 없습니다. 이는 영화극장과 거의 흡사한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작은 스크린 같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에 대단히 폭력적인 뭔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리가 미친듯이 고조될수록 당시은 더 자유로워지죠. 당신은 거기에 기관을 제공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뒤에 머물러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4. 종교에 관하여  

김상환: <철학과 현실>의 독자들은 종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당신은 최근에 이 분야와 관련된 책을 몇 권 출판했습니다. 대부분의 현대 철학자들은 반-기독교적이거나 무신론자인데, 당신은 오히려 무신론에 맞서 기독교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유물론자입니다. 라이트(Wright) 부부가 출판한 <지젝 읽기 The Zizek Reader>(1999)의 서문에서 당신은 자신의 입장을 "바울적 유물론(Paulinian matterialism)"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매우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어떻게 보면 이런 역설이 당신의 사유에서 매력적인 측면이기도 하지요. 하여간 자본, 기술, 소비주의 등등이 총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우리 시대에 기독교나 종교가 갖는 적극적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당신이 기독교나 종교를 옹호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지젝: 제가 기독교에서 찾는 것은 어떤 실증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카톨릭 교회에서 악마의 실증적인 실존을 찾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에게 흥미로운 것은 상징적 실천의 사회적 공간을 지배하는 논리 같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저의 작업은 하이데거의 작업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지젝의 철학박사학위논문은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다). <존재와 시간>을 위한 예비작업의 첫 단계로 <성 바울의 편지>를 읽을 때 하이데거가 말하고 있는 것은 어떤 형식적 구조입니다. 실증적 교리와는 독립적인 어떤 형식적 구조, 형식적 존재론을 기독교에서 떼 내어 볼 수 있다는 것이죠. 바로 이것이 제가 기독교에서 찾으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 관심사는 기독교가 형식적 수준에서, 특히 인간의 사회적 공동체와 상호성에 대해 뜻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있습니다. 제가 이런 데 관심을 두는 이유는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대규모의 투쟁은 쾌락주의, 유물론, 과학주의, 무신론, 유신론 등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표면적으로는 무신론이나 유신론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형태의 정신주의 사이의 투쟁이라는 생각에 있습니다.

당신이 언급한 자본주의, 테크놀러지 등등에서도 저는 정신주의의 한 형태인 어떤 새로운 그노시즘을 봅니다. 이런 방향에서 등장하는 지도적인 인물은 프로이트의 적수였던 칼 쿠스타프 융입니다. 그를 중심으로 새로운 형태의 그노시즘이 열리고 있는데, 여기서 저는 어떤 위험이나 악(惡)을 감지하고, 이에 대한 치유책이나 대응방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깊게 보아야 하는 것은 근대 자본주의와 테크놀러지가 낳은 새로운 형태의 정신주의, 새로운 정신주의적 태도인데, 이것은 단지 주변적인 현상도 아닙니다.

미국에는 분명 이른바 테크노-그노시스(techno-gnosis), 그노시스틱-테크놀러지(gnostic-technology)를 향한 경향이 있고, 다시 말해서 가상현실과 디지털 세계를 삶의 가상화라는 그노시스적 논리와 연결짓는 경향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현실적 인간이 아니다. 현실은 빌어먹을 똥이다. 우리는 정신적-가상적-잠재적 존재로서, 우리 자신의 유한성에서 해방될 수 있고, 또 다른 현실로 자리를 바꿀 수가 있다...." 요컨대 이와 같은 새로운 그노시스적 정신성이 탄생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그노시즘은 윤리적 관점을 재도입하고 있습니다. 레비나스 같은 철학자는 이미 윤리학이 존재론보다 더 근본적이고, 일차적인 실존적, 사회적 경험은 타자에 대한 윤리적 체험에 있다고 했지만, 그노시즘에서도 근본적으로 윤리가 인식보다 근원적이고 원천적입니다. 윤리는 부차적이지 않고, 악은 오직 인식의 세계에만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저는 이들이 말하는 계시나 영적 인식 등이 오늘날의 테크놀러지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관념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특히 미국에서 칼 쿠스타프 융은 프로이트와 비교하면 엄청난 베스트 셀러입니다. 프로이트의 저작은 학문적인 것이지만, 융의 저작은 수많은 대중들이 읽고 있습니다. 제가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고, 저에게는 종교 그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이는 데리다의 문제의식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메시아주의적 방법론이 내건 쟁점이 형식적이고 초월론적인 구조에 있다고 했는데, 저도 오직 그런 관점에서만 기독교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5. 서양철학과 미국의 관계에 대하여

김상환: 프레스센터에서 있었던 어제의 강연에서 당신은 이미 미국의 현실에 대해, 특히 미국의 패권주의나 이라크 전쟁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저는 좀 다른 각도에서 묻고 싶습니다. 오늘날 서양 철학에 대해 미국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이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는 물음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미국은 다양한 사조나 이론들이 서로 충돌하는 경쟁과 논쟁의 무대, 그 힘을 겨루는 거대한 싸움터입니다. 각각의 이론이 지닌 역량이 검증되는 장소라고도 할 수 있겠죠.  

지젝: 프랑스 철학자들이 공식적으로는 아무리 반미를 내세운다 하더라도, 이들은 모두 미국에 침투해 들어가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당신 말대로 오늘날 글을 작성하고 널리 소통시키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어떤 보편적인 철학으로 승격되기 위해선 미국의 학문시장을 거쳐야만 하니까요. 예를 들어 라캉 역시 그랬습니다. 처음에 그는 미국에서 완전히 무시당했지만 절망을 극복하고 서서히 침투하기 시작하여 드디어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제 친구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도 마찬가집니다. 그는 처음에 미국을 무시했지만 그 다음엔 미국에 매료되었죠. 이런 매력에 어쩔 수 없이 이끌린다는 건 놀라운 일입니다. 물론 미국 그 자체는 전투를 위한 극장, 배경에 불과하죠. 미국 그 자신은 사유하지 않습니다. 유럽에 교훈을 주거나 직접적으로 유럽의 영향에서 비롯된 산물이 미국에 들어오면 곧장 수락되고 미국인들의 수중에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미국 철학에는 아마츄어리즘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프래그머티즘, 실용주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미국에서는 이 실용주의가 철학에 선행합니다. 하지만 이것 자체가 철학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는 저는 유럽 보수주의자입니다. 실용주의는 일상적 삶의 훌륭한 건축술이지만 철학의 본령은 아니죠. 하지만 흥미로운 문제는 미국의 학문시장에 편입되기 위해 유럽 철학이 치러야 할 대가에 있습니다. 이는 데리다에게서 아주 명백히 드러나는데, 미국에서 성공하고 난 이후의 그의 텍스트들은 미국인들을 모방한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잘 보이지 않는 변형이 일어난 셈이지요.  

 

 

 

 

이는 푸코의 사례를 보아도 마찬가집니다. 처음에 그는 '성(性)의 역사'로 돌아가 차갑고 냉소적으로 권력을 분석하고자 했지만, 샌프란시스코에 다녀온 말년의 푸코는 모든 것을 자아의 문제로 환원시키고 있습니다. 이에 비할 때 들뢰즈는 지병과 같은 개인적인 이유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들 때문에 실질적으로 미국을 여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원래 꼼짝하지 않습니다. 들뢰즈는 이미 실천적으로 반(反)-데리다적이었던 거죠. 라캉도 마찬가집니다. 그는 몇 번인가 미국을 여행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방문은 완전한 실패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캉의 책은 몇몇 부분에 훌륭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비상업적이진 않지만 매우 훌륭한 영화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죠.

가령 로버트 알트만의 <숏컷 Short Cuts>이 그 사례인데, 제가 보기에 아주 훌륭한 작품입니다(*<숏컷>은 지젝이 꼽은 세계 10대 영화에 포함된다). 물론 이것말고도 다른 멋진 작품들이 많이 있죠. 특히 문학에서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유에서는 아닙니다. 미국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미국을 우리의 투쟁이나 논쟁을 수행하기 위한 어떤 분파영역이나 지국(支局)으로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철학사에 대한 괜찮은 연구가 매우 많이 있습니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헤겔에 대한 최고 수준의 연구가 그렇습니다. 미국에서 헤겔 연구나 독일 관념론 연구의 질은 제가 보아온 독일에서의 연구보다 월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이런 측면에서 충분히 새롭게 기능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보다 더 나아가 보다 일반적 방식에서도 철학에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이는 유럽뿐 아니라 한 때 제 2세계라 불렸던 나라들과 관련된 이야기이기 십상입니다.

산업화되긴 했지만 아직 미국화되지는 않은 이 나라들은 너무 작아서 반미의 중심에서도 벗어나 있죠. 저는 동유럽과 러시아, 한국, 일본 같은 나라들이야말로 유일하게 미국에 대한 저항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1세계와 제 3세계라는 두 세계의 구분을 믿지 않습니다. 미국은 이상적인 방식으로 두 세계에 명령을 내릴 수 있고, 그 명령은 항상 기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 자신이 그 두 세계를 개발했으니까요.

미국과 저개발국 사이에는 식민주의나 신식민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이 벌어지지만 저는 이를 믿지 않습니다. 제 1세계와 제 3세계는 늘 상호보완적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유럽인은 바로 이 양자 사이에 있습니다. 가령 일본의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이 제시한 시차(Parallax)라는 개념을 생각해봅시다(*<트랜스크리틱>에서 다루어진다. 한데, 정작 지젝의 책에서는 특이하게도 고진이 한번도 인용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이행할 때 진리는 바로 이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것이죠.

이에 대해 칸트를 참조할 수도 있는데, 칸트주의의 가르침은 현상과 본체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이 양자 사이의 차이에 있습니다. 자유는 현상 가운데 출현하는 본체에서 옵니다. 자유는 양자 '사이'에 존재합니다.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저는 제 1세계와 제 3세계의 대립에서 우리 역시 시차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충분히 특권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안정된 위치에 있지 않고 '사이'에 있기 때문이죠.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한 해결의 장이 있다면, 바로 이와 같은 우리의 위치에 있는 것이지 두 세계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김상환: 당신은 유럽인이라는 데 대해 커다란 자긍심을 가지고 계시군요.

지젝: 요즘 미국에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반대운동이 거센데, 이 나라에서는 정치적 올바름과는 무관하게 외설적 태도는 금기시되고 있습니다. 제가 제 모든 책에서 외설적 유머, 섹슈얼리티 등등에 대해 섰던 것은 이런 점잖은 경향의 제 친구들을 도발하기 위한 것이죠. 들뢰즈가 그만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매우 천진난만하게 인간 안에 있는 어리석음에 대해 말할 때, 이 어리석음은 어떤 자연스러운 성질이 아닙니다. 프랑스인들은 반(反)-자연적이려고 노력하는데, 라캉을 참조하지 않더라도 사유는 그런 반-자연성, 반-정상성에서 잉태됩니다.

제가 내면으로의 여행에서 지혜를 찾으려는 그노시즘의 발상에 반대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저는 진리가 항상 어떤 외상적 마주침에 있다고 믿는데, 이런 마주침은 제가 저 자신을 스스로 보고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가 단지 내면으로만 여행할 경우 외상적 마주침의 대상인 똥, 작은 환상, 짐승 등등을 발견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와 같은 외상적 마주침에 대한 능력 없이 사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전적으로 동감이다. 해서, 나는 면벽수도식의 온갖 명상주의 따위를 믿지 않으며, '자기계발'의 수작들을 혐오한다).  

6. 슬로베니아의 철학계와 지젝의 사후 계획에 대하여  

김상환: 당신은 유럽인이지만 프랑스인도, 독일인도, 영국인도 아닙니다. 그래서 묻겠는데, 당신의 글에서 슬로베니아적 요소를 찾을 수 있을까요? 당신이 의식적으로 계승하는 슬로베니아의 어떤 문화적 전통이나 유산이 있는지요?  

지젝: 아닙니다. 저는 종족주의를 혐오하니까요. 제가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슬로베니아라는 이름 아래 앞에서 말한 시차를 새롭게 위치 지을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슬로베니아는 공산주의 국가였지만 서유럽만큼이나 반공산주의 국가이기도 합니다. 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서유럽으로 여행을 할 수 있었고, 정치적 생활이나 활동을 제외하면 책을 사거나 지적 생활에서 뭔가를 창안해 내는 등등의 모든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말 그대로 두 세계 사이에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이른바 공산주의적 전체주의라는 것을 경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을 충분히 창안해내고 정식화했습니다. 또 서양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서양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환상이나 가상을 뿌리 뽑을 수 있는 기회였죠. 이는 매우 행복한 상황입니다. 제가 제 조국을 인정해야 한다면, 이는 이 나라가 바로 에피큐로스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두 세계 사이에, 그 사이의 틈에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적 질서에서 볼 때, 지금은 낡은 질서가 해소되는 국면이자 새로운 질서가 완전히 확립되기 이전의 단계죠. 바로 이 이행과정에서 곧바로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것들을 우리는 다시금 포착할 수 있습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저는 고유한 의미의 슬로베니아주의자도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슬로베니아에는 정신분석과 관련된 어떠한 이론적 전통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와 제 친구들은 오히려 프랑스 철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슬로베니아에서 '공식 철학', 지배적인 철학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회철학과 하이데거적 현상학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지겨워졌고, 그래서 제3의 입장에 서게된 것입니다. 이는 우발적인 현상이었고, 분석해본다 해도 무엇인가 근본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김상환: 그러나 프랑스나 독일, 영국 등 다른 유럽 출신 철학자들과 비교할 때 당신이 슬로베니아인으로서 가질 수 있었던 이익이나 불리한 점은 없었습니까?

지젝: 제가 젊었을 때 프랑스 철학과 독일 철학 사이에는 교류가 없었습니다.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 등은 독일에 거의 낯설었고 프랑스에서는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이론을 전혀 모르고 있었죠. 이 두 나라의 문화적 접촉은 우리나라 같은 데서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70년대부터요.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실상 모든 영향들에 노출되어 있었고, 여기서 나름의 전통이 생겼습니다. 농업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큰 나라들은 단일경작체제이지만 우리는 다경작 체제인 것이고, 이는 매우 좋은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슬로베니아 철학계의 면모를 살펴보면, 이곳은 프랑크푸르트학파, 하버마스, 하이데거, 분석철학 등이 나란히 존재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독일, 미국, 프랑스에서는 그렇지 않죠.  

김상환: 한국도 그런 비슷한 장소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기획에 대해 묻겠습니다. 현재 준비하고 계시는 일이나 몰두하고 계신 주제가 있다면 무엇인지요?  

 

 

 

 

지젝: 지금은 이라크 전쟁과 그 귀결들에 대한 작은 책을 끝내가고 있습니다. 이는 별로 심각한 책은 아닙니다. 몇 가지 커다란 기획을 구상 중인데, 먼저 정신분석-철학과 생물학적 발생학, 과학, 두뇌과학 등을 체계적으로 대질시키고 싶습니다. 이런 영역들이 철학에 어떤 도전이 되는지, 이런 영역들을 경험주의적 관점에서만 다루지 않고 어떻게 철학에 융합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진지한 책을 쓰고 있는 중이기도 한데, 여기서 저는 어떤 근본적인 형이상학의 물음으로 되돌아가고자 하고, 특히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와 같은 역사 존재론을 다루고자 하며, 이런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과제를 다루기 위해 데리다, 레비나스, 하이데거 등등을 다시 읽고자 합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구상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기획이고, 또 이 책이 당분간 제가 역작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불안정한 주체(*까다로운 주체) The Ticklisch Subject>(1999)의 2부에 해당할 것이라 생각합니다(*아주 기대가 되는 책이다). 몇몇 잠재적 독자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저는 여기서 성생활 등에 관한 것들은 그렇게 많이 다루지 않고 오직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만을 다룰 생각입니다(*다소 아쉬운 일인가?).  

김상환: 좋은 생각입니다. 정말 기대가 됩니다. 저는 당신을 다산기념강좌에 초대하자고 처음 제안했고 저와 제 동료들은 항상 서울에 초대할 후보를 찾고 있습니다. 유럽 철학자들 중에 당신이 추천하고 싶은 분이 있으신지요?  

지젝: 마피아들의 논리대로 한다면 제가 이번에 받은 강연료의 10프로를 당신에게 지불해야겠군요, 하하. 하여간 저는 알랭 바디우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제 친구라서가 아닙니다. 제가 좋은 철학자라고 생각하는 많은 친구들 중에는 그들이 사용하는 난해한 용어나 포스트모던한 특수어법들이 다소 어렵고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바디우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데카르트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프랑스 최고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찬탄할 만한 명료성을 보여주는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바디우의 주저 <존재와 사건>은 언제쯤 번역될 수 있을까?).

 

 

 

 

그 다음에는 이탈리아의 아감벤(Giorgio Agamben)을 추천하고 싶은데, 이 뛰어난 철학자도 시야가 큰 포스트모더니스트이지만, 글도 명료하고 학술회의에서도 명확하게 말합니다(*적어도 <호모 사케르> 정도는 올해 안에 나올 수 있을까?). 또한 바디우에게서는 유럽 사회철학의 공통 임무에 대한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어떤 특이한 맥락을 전제로 하는 방언이나 관용어를 외부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데, 바디우와 아감벤은 모두 이런 말들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빼어난 능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방언은 이미 특정한 공동체의 일부가 되어있기 때문에 이런 내부적 농담 없이는 그 세계를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디우는 정말 저보다도 이런 농담을 더 잘할 뿐 아니라 고전적인 주제들에 대해서도 잘 말할 수 있고, 게다가 정치-신학적인 축을 가지고 있기도 하죠. 저로선 이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추천할 수가 없습니다(*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지젝의 추천은 효과를 보고 있지 못하다).  

김상환: 감사합니다.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한국의 독자들이 당신의 깊이와 재미를 모두 즐길 수 있는 대담으로 남으리라 생각하고, 무엇보다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질문에 응해주셔서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돌이켜보건대, 지난 90년대 이후 지젝이 없는 철학계의 풍경을 상상할 수 없다. 그의 열정과 파격적인, 리얼한 통찰들이 없었다면 철학은, 아니 삶은 또 얼마나 밋밋하며 막연했을 것인지. 그의 건강을 축원한다!).

06.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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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0-14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로쟈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

깽돌이 2006-10-14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 철학자들이 공식적으로는 아무리 반미를 내세운다 하더라도, 이들은 모두 미국에 침투해 들어가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 부분이 사실 제가 궁금해했던 것입니다.지젝이 확실히 찍는군요

yoonta 2006-10-15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올만이네요..로쟈님..^^
보고싶던 글을 올려주셨네요..일단 퍼가구요. 위에 지젝의 The Parallax view라는 책이 고진이 <트랜스크리틱>에서 말한 "시차"와 비슷하다면 어떻게 비슷한지 또 다르다면 어떤 면에서 다른지 궁금해지네요..^^ 혹시 읽어보셨으면 무슨 내용인지 힌트좀 부탁드립니다..^^

로쟈 2006-10-15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모처럼 뵙는 분들이 계시군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지젝의 서평 제목이 'The Parallax view'이기도 하고, 번역문은 인터넷상에서 구해보실 수 있을 겁니다. 원문도 물론. 그것도 정리해놓을 계획은 갖고 있지만 당장은, 적어도 이 달에는 어려울 거 같습니다...

바람꽃 2006-10-18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거, 2005년 가을에 병특하면서 사장 몰래 사무실에서 타이핑한 글인데 여기서 멋진 모습으로 다시 보게 되니 너무 반갑네요. pdf로 된 걸 타이핑하느라 금요일 반나절을 꼬박 보냈었죠.

로쟈 2006-10-18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확한 출처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바람꽃님의 노고가 담긴 바로 그 글일지도 모르겠네요.^^

붉은녹차 2006-11-28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퍼갈게요

마누스 2007-01-06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첨언.. 저도 예전부터 Ticklish Subject를 '불안정한 주체'로 옮기는 게 맞(낫)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로쟈님도 비슷한 생각인 듯 하여 반갑군요..

로쟈 2007-01-06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장난섞에 말하자면, 제 의견은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주체'로 하는 겁니다. 원서의 표지에도 있듯이, 깃털 같은 주체이니까요...
 

시중에 '마시멜로 이야기'가 뜨고 있다. 출판 불황기의 '밀리언셀러'로 한동안 업종 관계자들의 마음을 (착잡하게 하기도 하면서) 들뜨게 했지만, 이번에 뜨는 이유는 좀 유쾌하지 않다. 나는 이번에 알게 됐지만(고백하건대 알라딘 메인에 뜨던 <마시멜로 이야기>란 책이 좀 많이 팔리나보다 했지 100만부가 넘게 팔린 줄도 몰랐다) 역자가 인기 아나운서였고 그녀는 현재 '대리번역' 의혹을 받고 있다(물론 의혹의 주모자는 출판사이며, 출판사측 해명으로는 '대리번역'이 아니라 '이중번역'이라고 한다. 많이 들어봄직하지만, 의미상으론 번역학 사전에 등재될 만한 '신조어'이다).

 

 

 

 

아래 국민일보의 기사는 그간의 자초지종을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바, 기사를 읽으며 생각이 미친 것은 이 대리번역 파문의 순기능이다. 이번 파문을 계기로 번역이 무엇이며, 대리번역(이중번역)이란 또 무엇이고, 우리 출판계의 번역관행과 그 문제점들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초등학생들까지도 '학습'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사실 이 번역서가 벌어들였을 수십 억의 매출이익에 대한 세금보다도 우리 사회에 대한 더 '가치있는' 기여가 아닌가 싶다. 그러한 대의를 위해서, '당사자들'이 조금만 더 '고생'해주었으면 싶다, 는 게 개인적인 바람이다.

국민일보(06. 10. 13) “다방 얼굴마담도 커피값은 알고 해야죠”

베스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의 대리번역 의혹은 9월25일자 국민일보에 실린 한 칼럼에서 비롯됐다. 국민일보 오피니언면 '에세이' 코너의 고정 필진인 일본 문학 번역가 권남희씨(여)는 '번역하는 아나운서'란 제목의 칼럼에서 번역 경력이 전혀 없는 정지영 아나운서가 정말 '마시멜로 이야기'를 번역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칼럼에서 "어느 여성 아나운서가 처음으로 번역한 책이 장기간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어 화제다. 아나운서가 번역을 했다는 사실도 화제이고 그 책이 출판 불황 시대에 100만부를 돌파하여서도 화제다. 아무리 베스트셀러여도 언론에서 역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쳐주는 일은 좀처럼 드문데,이 책은 나오면서부터 온갖 언론이 '역자'에 주목하여 주었다. 이런 효과를 노려 출판사에서도 그녀에게 역자의 이름을 맡겼을 테지"라고 했다.

이어 "그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처음 번역한 것이다. 두렵고 떨렸다. 하룻밤에 100쪽 한 적도 있다. 그 인터뷰를 보며 생각했다. 오,얼굴만 예쁘고 목소리만 좋은 게 아니라 번역 실력도 뛰어나네. 두렵고 떨리는 첫 번역인데 하룻밤에 100쪽이나 하다니. 10여년 번역일을 했지만 난 아직 하룻밤에 100쪽은 무리인데 말이다"라며 이번 대리번역 사건을 예견이라도 하듯 의심스러운 부분을 지적했다.

또 "실제 역자 대신 대학 교수나 유명인을 내세우는 관행은 비단 어제 오늘 일이 아닐 것이다. 나 또한 내 이름이 있는 첫 책이 나오기 전에는 대역을 했었고,지금도 주위에는 울며 겨자먹기로 대역하는 후배들이 많으니. 그녀는 인터뷰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으면 좋지 않냐고. 좋지 않다"라면서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기도 했다.

이 칼럼이 보도된 뒤 인터넷 번역 카페 등을 중심으로 '마시멜로 이야기'의 대리번역 의혹이 확산됐고,결국 대리번역 당사자인 전문번역가 김모씨가 스스로 전모를 밝혀야 할 상황까지 오게 됐으며,출판사측도 '이중번역'임을 인정했다.

권씨는 출판사 해명이 나온 뒤 쿠키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의혹을 제기하게 된 배경과 이번 사건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그는 '번역하는 아나운서'란 칼럼을 쓸 때 이미 '마시멜로 이야기'의 대리번역자인 김씨로부터 직접 대리번역 사실을 확인한 상태였다고 했다. 또 "정 아나운서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서 과연 원서를 한번 읽어는 봤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며 "예쁜 얼굴 마담 내세워 장사만 잘하면 된다는 출판사의 상술에 경악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권씨는 '정지영씨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나'란 질문에 "역전 다방 얼굴마담을 해도 커피값 정도는 알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고 답했다.(신은정 기자)

◇다음은 권남희씨 일문일답

-마치 대리번역 사건을 예견이라도 하듯 칼럼을 썼는데.

△제가 아는 사람이 정지영 아나운서의 대리번역을 했다는 것을 지난 해부터 알고 있었다. 공교롭게 국민일보 칼럼을 쓸 즈음 그 분을 포함해 몇몇 번역하는 사람끼리 모여 식사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이미 알던 사실을 본인에게 한 번 더 듣게 됐다. 칼럼이 나가고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 돌다 보니 결국 제보가 들어가 기사화된 것 같다.

-정지영씨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나.

△역전 다방 얼굴마담을 해도 커피값 정도는 알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녀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서 과연 원서는 한 번 봤을까 싶은 생각조차 들었다. 모두 112쪽밖에 안 되는 원서,표지 빼면 100쪽 내외인 원서를 석달이나 번역을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들도 그렇다. 기자의 오보라고 변명은 했으나 하룻밤 100쪽 운운 하는 말도 그렇고. 국어책 잘 읽는다고 누구나 9시 뉴스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그러나 이런 인터뷰나 역자 사인회나 모두 출판사의 기획이었다면 그리고 출판사의 말대로 이중 번역을 하였다면(절대 아닐 거라 생각하지만) 그녀도 피해자일 수도 있다. 좋은 책으로 승부를 보는 게 아니라, 예쁜 얼굴 마담 내세워 장사만 잘하면 된다는 출판사의 상술에 경악할 따름이다.

-출판업계에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들었다.

△대학생 때 조교나 교수님이 시켜서 원서 한 권을 여러 친구들이 번역했는데 나중에 보니 교수님 이름으로 책이 나와 있더라 하는 경험들 아마 많을 것이다. 물론 나도 겪었다.

-칼럼에서 본인도 번역 대역 경험이 있다고 했는데.

△15,16년 전의 일이다. 처음 출판사에 소개받아 갔더니 당시 한창 인기있는 외국 작가의 소설 번역을 맡기더라. 영어를 일본어로 번역한 소설이었다. 책을 낼 때 영어권 소설을 일어 전공자 약력으로 내면 중역인 게 드러나니 역자는 다른 이름으로 내겠다고 하더라. 맞는 말인 것 같아 그러라고 했는데 나중에 일본 작가의 소설을 번역했는데도 다른 역자 이름으로 내는 거다. 그래서 당장 그만 두고 제가 기획한 책으로 번역해 처음으로 내 이름을 건 번역서를 냈다. 그 후로는 대역을 한 적이 없다.

-번역가들이 어떤 이유로 대리 번역을 하게 되나.

△우선은 경제적인 이유다. 대리 번역을 안 해도 먹고 살만 하다면 누가 하겠나. 이번 책만 대리 번역 해주면 다음엔 꼭 네 이름으로 내주겠다는 출판사의 감언이설 때문이다. 아직 경력이 많지 않은 역자들에게는 출판사와 연결되기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약자가 되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알고 계신 후배 번역가 중 이런 대역작가가 얼마나 되나.

△번역하는 한 후배 말에 의하면 주위에 많은 사람이 대역을 경험한다고 하더라. 물론 그 후배도 몇 권째 대역을 하고 있고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출판사에서 “다음엔 네 이름으로 내줄게” 해놓고 또 대역을 맡긴다. 그러면 울며 겨자먹기로 다음을 기대하며 받아들인다고 한다. 문장력도 훌륭하고 번역도 잘하는데 자기 이름으로 나온 책이 없다는 이유로 계속 대리 번역을 맡는 걸 보면 안타깝다. 그럴 때마다 “그런 시절도 있어야 나중에 성공하여 자서전 쓸 때 쓸 얘기가 많아지지” 라고 위로한다.

-이런 관행은 없어져야 할텐데. 하고 싶은 말은.

△출판사나 독자들이 역자의 번듯한 학력이나 경력보다 실력으로만 평가해준다면 이런 대리 번역 관행이 아주 조금씩이라도 사라질 것 같다. 이번 경우처럼 방법이야 어찌 되었든 책만 많이 팔면 된다는 생각으로 얼굴 마담(출판사에서는 명예 역자라고 표현한다)을 내세우는 상술에 독자들이 현혹되지 않는다면 새로운 풍조가 뿌리를 내리지 않을까?

국민일보(06. 10. 13) 새내기 번역사 유혹하는 출판 ‘관행’

아나운서 출신 정지영(31)씨를 번역자로 내세운 베스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가 대리번역 의혹에 휩싸이자 해당 출판사는 ‘대리번역이 아닌 이중번역’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출판사는 대리번역이 아니라 해명했지만 이번 사건으로 번역 출판계의 ‘대리번역’ 관행은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 출판사 “마시멜로, 정씨 캐릭터와 맞아 섭외 결심”

출판사 한경BP는 12일 보도 자료를 통해 “마시멜로 이야기의 번역을 정지영씨와 제3의 전문 번역자에게 원고를 동시에 의뢰했다”면서 “이것은 대리번역이 아닌 이중번역”이라고 밝혔다. 정씨와 지난 7월 번역 계약을 맺었으나 오역과 번역 수준을 우려해 정씨에게 알리지 않고 8월 초 전문 번역가와 별도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출판사는 섭외 초기 정씨가 이중번역 사실을 알게 되면 계약 의사를 철회할 수 있다고 판단해 이를 정씨이게 알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정씨는 내부 편집자에 의해 자신의 번역 원고가 고쳐진 줄만 알고 있다는 것이다. 출판사는 정씨에게 제3의 번역자가 있는 것은 끝까지 알리지 않았다고 못박았다.

출판사는 “편집팀은 물론 전사적 차원에서 이 책을 띄워야 겠다는 중압감이 있었다”면서 “타깃 계층인 20∼30대에 강하게 어필할 수 있는 역자를 내세우는 스타 마케팅으로 방향을 잡았다. 정지영씨 캐릭터가 이 책의 마케팅 방향과 잘 맞는다고 판단해 섭외하게 됐다”고 사건 발단을 설명했다. 이어 “이중 번역 작업과 내부 편집자에 의해 정씨의 번역 원고를 많이 고쳤다”고 밝혔다. 또 “골 깊은 출판계 불황 속에서 나름대로 살 길을 모색하려 한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됐다”며 정씨에게 사죄의 뜻을 밝혔다.

◇ ‘대리 번역’은 번역사로 가는 길?
이번 사건으로 출판계에 만연한 초벌 번역이나 번역 대행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름 없는 역자 대신 대학 교수나 유명인을 내세우는 것은 출판 번역계에 통용되는 공공연한 관행으로 굳어져있다. 전문 번역가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출판계에 만연한 번역 대리 관행이 사라져야 한다고 목소리 높였다.

일본 문학 번역가인 권남희씨(여)는 이번 사건을 예견이라도 하듯 지난 달 국민일보에 실린 ‘번역하는 아나운서’란 제목의 칼럼을 통해 정지영 아나운서 번역서에 의구심을 보냈다.

그는 출판사들이 얼굴 마담격으로 유명인을 내세운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 책은 나오면서부터 온갖 언론이 ‘역자’에 주목해 주었다. 이런 효과를 노려 출판사에서 그녀에게 역자의 이름을 맡겼을 테지”라고 적었다. 또 “나도 대역을 했고 지금도 주위에는 울며 겨자먹기로 대역을 하는 후배들이 많다. 이름 없는 역자 대신 대학 교수나 유명인을 내세우는 관행은 비단 어제 오늘 일이 아닐 것이다”라고 고백했다.

그는 '마시멜로' 사건이 불거지 뒤 쿠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정지영 아나운서 인터뷰 기사를 접하고 ‘과연 그녀가 원서는 봤을까’하는 생각에 대리 번역을 의심했는데 지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그녀의 책을 대리번역한 전문 번역가 본인에게 확인해 대리 번역 사실을 알았다”고 밝혔다.

이어 “좋은 책으로 승부하는 게 아니라 예쁜 얼굴 마담을 세워 장사만 하는 출판사 상술에 경악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또 “많은 출판사가 경력이 많지 않은 번역자를 ‘이번 책만 대리 번역 해주면 다음엔 꼭 네 이름으로 내주겠다’는 감언이설로 유혹한다”면서 “새내기 역자들에게는 출판사와 연결되는 일이 쉽지 않아 약자 입장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의 저자 박상익 교수도 “교수들조차 대학원생에게 번역을 대신 시키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면서 “이번 사건은 정보 전달에 대한 자부심 없이 상업주의를 지향하는 출판업계의 고름이 터진 셈”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통·번역 대학원이나 학원을 다니고 대필 번역가로 일한 뒤 전문 번역가가 되는 것이 수순이라고 들었다”고 전했다.

네티즌들도 한국 출판계에 만연한 대리 번역 관행을 지적했다. ‘규보’란 아이디의 네티즌은 “나도 고스트 라이터(대필 작가)를 한 적이 있다”면서 “제가 쓴 잡문이 출판사 편집장 이름으로 출간됐을 때 기분이 묘하더라”고 고백했다. ‘minhapapa’란 아이디를 사용하는 네티즌은 “출판계에서 유명인을 저자로 내세우고 실제 저자는 따로 있는 경우는 흔한 일 아닌가”라며 “한 친구는 유명인 이름으로 서적을 여러 권을 썼다. 그래도 유명인들은 자기가 쓴 것처럼 인터뷰 하더라”고 지적했다.

‘푸르미’란 아이디의 네티즌은 “초벌 번역이나 번역 대행은 이미 남들도 하는 관행이고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면서 “그러나 이번 사건이 정지영씨에게만 초점이 맞춰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적었다. 아이디 ‘mmm777000’는 “이번 사건으로 오금저린 출판사가 많을 것”이라며 “대필 작가가 얼마나 많은데 이제 이런 사건들이 계속 터지겠다”고 비꼬았다.(신은정 기자)

06.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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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6-10-13 11:12   좋아요 0 | URL
"역전 다방 얼굴마담을 해도 커피값 정도는 알고 해야 하지 않을까"
속이 씨원한 한 마디네요.
저도 이번 사태의 순기능에 희망을 걸어봅니다.
아니...이번 사태가 없었다면 일어났을 일들 (수많은 출판사들이 유명인 얼굴마담 역자를 내세워 성공한 이 새로운 경영전략을 벤치마킹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하네요.)을 예방했다는 것만으로도 권남희씨의 용기에 커다란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예쁘고 돈 잘벌고 인기 많고 탄탄대로를 걷는 celebrity가...하고많은 일 중에서 번역사 밥그릇을 뺏어먹으려다(지금까지 받은 인세가 억대라지요.) 된통 당하는군요. 그 밥그릇이 얼마나...얼마나...각박하고 초라하고 피와 눈물에 쩔은 밥그릇인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 아나운서 '이미지' 좋아했는데..예쁘고 깔끔하고 지적이고..등등) 뭐 대단한 악의나 욕심이 있어서도 아니라....시쳇말로 "개념"이 없다가..운나쁘게 잘못걸린 것 같네요...

이번 일로 정말...대리번역 관행 뿌리뽑혔으면 합니다. (모든게 그렇듯 잊혀질만하면 슬금슬금 되살아나겠지만...약발이 몇년이라도 갔으면...)

라이더 2006-10-13 12:08   좋아요 0 | URL
이쪽 세계를 전혀 모르는 저로선, 좀 놀랍습니다. 그럼 집에 있는 책들의 역자들이 거짓일수 있다는 말인가요? 솔직히 안 믿기고 좀 놀랍고, 화도 나네요.

dream4fly 2006-10-13 12:43   좋아요 0 | URL
대리번역, 대리집필 너무도 흔하고 오래된 일입니다. 좀 유명한 사람 이름팔면 우~ 몰리는 레밍쥐와 같은 대중, 돈 앞에는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우리 사회가 그를 키울뿐입니다. 얼마 전 명품시계 사건에서 보듯 우리나라에서는 연예인이 착용하면 명품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선 정작 읽고 싶은 책이 있어도 입맛 상해 못 보지요.

GOMi 2006-10-13 20:43   좋아요 0 | URL
97페이지가 173페이지가 되다니.. 핑 만큼이나 큰 글자.. 우습군요.. 동화책도 아니고.
97페이지로 냈다면 저 가격에 팔기 어려울것이라 생각했던가요?

사마천 2006-10-14 10:47   좋아요 0 | URL
지적노력에 제값 주지 않으려는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면 일류국가 되기는 쉽지 않죠. 늘어나는 초등 유학생 숫자와 지금 같은 지적사기 행태는 맥이 다른 현상이 아닙니다.

기인 2006-10-14 13:33   좋아요 0 | URL
하룻밤에 100페이지라....
사이드 글 한달동안 울면서 -_-; 번역했던 일이 기억나네요. ㅜㅠ
 

'번역과 인문학'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 소식을 스크랩해놓는다. 번역과 번역학, 번역비평에 대한 관심이 더 고조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교수신문(06. 10. 10) '번역과 인문학' 국제학술대회 열려

고려대 문과대학이 창립 6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오는 19일 고려대 국제관에서 '번역과 인문학 국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주최 측은 학술대회의 목표가 "우리의 인문학과 관련하여 현금의 번역 역량을 점검하고, 번역 원론과 각론에 걸쳐 학문 분야별‧언어별로 중요 주제들을 검토하여 바람직한 번역문화를 전망함과 동시에 우리의 학문 현실에 적합한 번역학과 번역비평론을 창도하는 데 있다"라고 밝혔다.

번역은 하나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언어 경험을 공공적이고 보편적인 언어 경험으로 바꾸고, 한 시대에 한 지역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 사고에 시공을 뛰어넘는 보편적 형식과 가치의 시험을 부과하는 고도의 학술적 작업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 또한 출발 텍스트와 그 문화를 객관화하는 가운데 목표 문화 속에 그에 대한 정신적‧언어적 터전을 준비하는 번역활동은 대상 문화를 존중하는 일이 자문화의 유연성을 높이고 폭을 넓히는 일과 통하는 고도의 윤리적 작업이라고 이번 학술대회 프로그램을 풀이한다.  

이번 학술회의는 이 목표에 달성하기 위해 일련의 개막강연과 네 개의 주제별 분과토론을 3일에 걸쳐서 진행한다. 첫날의 개막강연에서는 앙리 메쇼닉(사진) 파리8대학 교수, 金聖華 홍콩중문대학 교수, 전성기 고려대 교수 등 선도적 연구자들의 발제가 있고 이어서, ‘번역 일반론’ ‘문화 수용으로서의 번역’ ‘번역이론과 번역현장’ ‘한국작품의 외국어 번역의 문제’ 등 네 개의 큰 주제를 둘러싸고 펼쳐질 이틀간의 분과토론에는 30명의 국내외 관련 연구자들이 사회자와 주제발표자와 토론자로 참석한다.

특히 마지막 날 토론에서는 이연숙 히토츠바시대 교수, 파사레바 라리사 고려대 교수, 삐오 세라노 스페인 베르붐 출판사 대표, 노자끼 미츠히코 오사카시립대 교수 등 우리의 문학작품을 각기 해당 국어로 옮긴 바 있는 번역자들이 토론자로 참석하여 한국문학의 외국어 번역 실태를 살피고 향후의 전망을 논의하게 된다.

프로그램은 아래와 같다.

첫째 날 10월 19일(목) - 국제관 214호 국제회의실(국제대학원동)

개막식

사회:김재혁 교수

 (고려대)

3:30 ~ 3:40

개회사(조광 고려대학교 문과대학장)

3:40 ~ 3:50

축사(윤지관 한국문학번역원장)

3:50 ~ 4:00

감사의 말(대회준비위원장 황현산 교수/고려대)

개막강연

사회:김춘미 교수

     김양순 교수

 (고려대)

4:00 ~ 4:45

앙리 메쇼닉 교수(파리 8대학):번역의 의도는 언어이론을 통째로 바꾸는 데 있다

4:50 ~ 5:35

진성화 교수(홍콩중문대학):문화의 차이와 번역의 책략

5:40 ~ 6:25

전성기 교수(고려대):번역인문학과 번역비평

저녁식사 (6:30 ~    ) : 국제관 교직원식당

둘째 날 10월 20일(금) - 국제관 321호 원형강의실(국제어학원동)

주제발표 1

번역 일반론

사회:김승옥 교수

 (고려대)

9:30 ~ 10:15

발표-김응종 교수(충남대):번역은 제2의 창작인가

토론-김경현 교수(고려대)

10:20 ~ 11:05

발표-서지문 교수(고려대):사랑도 번역이 되나요? - 번역자의 이질적 언어, 문화권 간의 교량역할 -

토론-이성일 교수(연세대)

11:10 ~ 11:55

발표-박여성 교수(제주대):‘번역투’와 번역비평에 대한 텍스트과학적 접근 -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과 한국어 번역본을 중심으로 -

토론-장영준 교수(중앙대)

점심식사 (12:00 ~ 1:30) : 국제관 카페테리아

주제발표 2

문화 수용으로서의 번역

사회:황현산 교수

 (고려대)

1:30 ~ 2:15

발표-조성택 교수(고려대):번역과 오․이해: 한역불교용어를 통해서 본 동아시아불교

토론-박태원 교수(울산대)

2:20 ~ 3:05

발표-정광 교수(카톨릭대):개화기 시대의 성경번역에 대하

토론-전성기 교수(고려대)

3:10 ~ 3:55

발표-김용민 교수(한국외대):한국에서 루소 사상의 수용과 그 번역문제

토론-박홍규 교수(고려대)

※ 종합토론 (4:05 ~ 5:05) : 사회 최동호 교수(고려대)

저녁식사 (5:30 ~    ) : 인촌기념관 1층 귀빈홀

셋째 날 10월 21일(토) - 국제관 321호 원형강의실(국제어학원동)

주제발표 3

번역이론과 변역현장

사회:이재훈 교수

 (고려대)

9:30 ~ 10:15

발표-이연숙 교수(일본 히도츠바시대학):개념의 번역과 문체의 번역

토론-정병호 교수(고려대)

10:20 ~ 11:05

발표-황현산 교수(고려대):시와 번역

토론-김인환 교수(고려대)

11:10 ~ 11:55

발표-김동준 교수(동덕여대):한국한문문학작품 번역을 위한 제

토론-윤재민 교수(고려대)

점심식사 (12:00 ~ 1:30) : 국제관 교직원식당

주제발표 4

한국작품의 외국어 번역의 문제

사회:김양순 교수

 (고려대)

1:30 ~ 2:15

발표-피사레바 라리사 교수(고려대):한국시의 러시아어 번

토론-최선 교수(고려대)

2:20 ~ 3:05

발표-삐오 세라노(베르붐 출판사 대표):한국문학작품의 스페인어 번역: 성과와 도전

토론-이재학 교수(고려대)

3:10 ~ 3:55

발표-노자끼 미츠히코 교수(오사카 시립대학):일본에서의 한국 고전문학 번역

토론-최관 교수(고려대)

※ 종합토론 (4:05 ~ 5:05) : 사회 민용태 교수(고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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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6-10-13 0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이런 '번역학'에 대한 세미나가 열리는군요. '번역'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학계 풍토에 대한 자책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번역에 대한 논의가 붐을 이루는 것 같습니다. 번역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번역학 즉 번역'에 대한' 논의만 무성한 현 상황은 안타깝습니다.

'번역'에 관한 세미나의 경우, 이제는 '번역의 어떤 부분이 문제인가'에 대해 기획의 방향을 섬세하게 세워야 할 것입니다.
이 세미나같은 경우, 개화기 성경번역이나 루소의 수용같은 논문은 역사학 계통의 논문이 나올 것입니다. 개화기 번역에 대한 논문은 동아시아학, 국문학의 제일 인기 분야입니다. '번역은 제2의 창조인가'와 같은 논문은 김효중의 <번역학> 한권만 읽어도 왠만한 것은 커버할 수 있을 것인데 무슨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요.
하지만 문제는 이 세미나에서의 번역에 대한 여러 논의가 짬뽕이라는 것입니다. '번역학'이 있을 정도로 논의가 복잡한데도 원론, 각론 다 모아 한큐에 진행하겠다는 것인데, 이런 기획 자체가 아직도 번역에 대한 논의의 중요성에 대해 세밀한 인식이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일전에 번역과 관련한 리포터를 한편 쓰기 위해 KISS에서 '번역'키워드로 한글 논문 20여편을 찾아 읽어본 적이 있는데, 그 태반이 김효중의 개론서 이상을 뛰어넘지 못하거나, 번역학 개론과 자신의 분야를 적절히 배합한 것들이었습니다.
정말 한국에서 필요한 번역에 대한 논의는, 번역의 강국 일본의 경우 출판사들은 어떻게 번역관련 작업을 하는가, 일본이나 미국의 대학 출판사들은 어떻게 번역을 하는가, 출판물 선정, 필자 섭외, 섭외의 기준, 번역까지의 기간 선정, 편집자와 번역가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등에 대한 수많은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실증적 연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찾아본 논문 중에는 외대 통번역 교수 두분이 연구비 받고 한국 출판사를 선정해 이러한 사항들에 대해 인터뷰한 것을 토대로 한 논문이 딱 한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터뷰한 대상이 출판사 단 네곳밖에 되지 않아 논문이라고 하기에 턱없이 그 기준이 모자랐습니다.

원래 각국의 번역 상황에 관한 자료를 찾으려고 했으나, 한국에 관한 위 논문을 제외하고는 단 한편도 찾기 힘들었습니다.
번역에 대한 중요성에 대한 인지만 있을 뿐 번역 대국의 번역 상황에 대해 실질적으로 실증적인 취재, 연구가 치밀하게 되지 않는 한, 이러한 '번역학'세미나는 80년대 초반 김용옥이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번역에 대해 그리도 강조한 것 이상을 뛰어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번역학' 교수들이 생기는 것이 나쁘지는 않겠지만요...

로쟈 2006-10-13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매님/ 유익한 코멘트를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이번 학술대회 조직위에서 열매님 같은 분을 초빙했어야 했는데요^^). 매달린 일들 때문에 제 의견을 본문에 자세히 적지는 못하겠지만, 제기하신 문제들에 공감합니다. '학술대회'란 건 그냥 '행사'이죠. 실질적인 변화를 누가, 어떻게 가져올 수 있고, 또 가져와야 하는지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라이더 2006-10-13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좋은 댓글 이네요.

biosculp 2006-10-13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에 들렸다 을유문화사에 신복룡교수가 번역한 군주론이 이 책과 더불어 강정인교수가 번역한 까치판을 같이 사서 읽고 있는데, 같은 책 다른 번역으로 읽은적은 처음입니다. 갈수록 다른면이 많더군요. 술어부터, 강정인은 식민지라고 한곳을 신복룡은 이주민 정책으로 번역하고 각자 잘 이해되는 부분도 다르고. 역시 번역은 두권이상을 동시에 봐야 뭐가 다른지 알수있는것인지. 그러다 보니 이거 영어판이라도 같이 봐야 되겠다 이생각이 들더군요. 영어판도 두권이상(이탈리아어는 모르니)
번역, 읽다가 이해 안되는것은 한권읽었을때고 동시에 두권을 읽어보니 또다른 세상입니다.

로쟈 2007-12-02 10:16   좋아요 0 | URL
뒤늦은 답글인데, 맞습니다. 같은 곡을 각기 다르게 연주하는 하는 것이죠.
 

지난달말 세계일보에 실린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고 몇 마디 덧붙이겠다. 원로 비평가 유종호 선생과의 인터뷰인데, '인문학 위기의 시대'에 대표적인 '인문학자'인자 '교양인'으로서 그가 귀뜀해주는 '인문학적 지혜'를 잠시 따라가본다.

세계일보(06. 09. 30) 원로학자 유종호에게 듣는다

인문학이 ‘또’ 위기에 처했다. 1996년 11월 전국 21개 국공립대 인문대학장들이 제주에 모여 ‘인문학 제주선언’을 했고, 2001년에는 전국 국공립대 인문대학협의회 차원에서 인문학 연구와 교육 기반의 붕괴를 우려하는 ‘2001 인문학의 선언’을 내놓았다. 이로부터 5년 만인 지난 15일에는 다시 고려대 문과대학 교수 117명이 ‘인문학 선언’을 발표해 사회적 파문이 확산하고 있다. 급기야 인문학 선언을 발표한 고려대를 비롯해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 성균관대 등의 학장들이 모여서 인문학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던 중 이번 주를 인문주간으로 선포하고, 이화여대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행사까지 벌이는 중이다.

도대체 위기의 실체가 무엇이기에, 아무리 위기라고 외쳐도 개선될 여지는 보이지 않고 때만 되면 같은 아우성이 반복되는가. 과연 ‘인문학’의 위기인가, 아니면 한 중견학자의 독설처럼 인문학으로 밥벌이를 하는 인문학자와 인문학도의 위기인가. 위기의 정확한 실체는 무엇인가. 위기를 막을 근본적인 처방은 없는가.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인문학자로서 46년 동안 대학 강단에 섰고, 어느 쪽에도 쉬 쏠리지 않는 중립적인 지성으로 평가받는 원로학자 유종호(71)씨를 만나 그 궁금증을 풀어보았다.

―인문학이 위기라고 때만 되면 반복해서 외치는데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는 겁니까?

인문학이 위기라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위기 선언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학의 위기’라는 맥락으로 들립니다. 인문학 교수들의 위기 선언은, 근본적인 인문학의 위기 차원보다도 인문학과 지원자가 현격하게 줄어들고 교양과목이 축소되고 졸업생들의 취업이 어려운 상황을 피부로 느끼기에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인문학만의 고립된 위기 상황은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문학의 위기, 교양의 위기, 대학의 위기, 고급문화 전반의 위기 상황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러한 현상은 범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합니다. 과거 인쇄술 중심의 책 문화에서 인터넷 전자문화로 옮아가는 문명의 전환기에서 발생하는 현상이지요.”

―인문학만의 단독 위기가 아닐뿐더러 세계적인 현상이라는 말씀인데, 구체적으로 서구의 경우는 어떤 양상인가요?

“미국에서도 영문과 지원자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미국 사회에서도 전반적으로 인문학도가 과거에 누렸던 위세는 추락하고 있지요. 하지만 미국은 우리보다 훨씬 안정된 사회이기 때문에 금방 표가 나지 않는 거지요. 일본만 해도 최근 사립대학 하나가 문을 닫았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대학의 위기가 감지됩니다. 영국은 불과 40∼50년 사이에 대학생 수가 10배 이상 늘었습니다. 대학을 나온 이들이 자신이 기대하는 수준의 전문직에 종사하기가 점점 더 어렵게 되는 거지요. 영국에서도 문과대학 지원자 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상황이 더 안 좋아 심각한 겁니다.”

―최근에는 인문학 출판인들이 모여 정부의 지원을 요구하며 인문학자들의 위기선언에 보조를 맞추고 나섰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 사회는 근본적으로 책을 많이 읽는 사회가 아닙니다. 돈을 번 사람들이 학술이나 문예 진흥을 위해서 많이 지원하는 사회도 아니지요. 일본도 경제대국이고 문화에 대해서 많이 지원한다고 하지만 미국과 비교하면 한참 떨어지는 수준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수준이 높다는 종합지도 미국의 전문 서평지에 비해 수준이 한참 떨어집니다. 하지만 일본의 메이저 신문 1면에는 꼭 책 광고가 들어갑니다. 광고 단가를 떠나서 신문의 전통과 그 사회의 문화를 위한 배려지요. 인문학의 위기가 세계적인 현상이긴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문화적 인프라가 취약한 우리의 경우는 일본이나 미국보다 훨씬 그 강도가 심각한 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출판인들이 불평할 만도 하지요.”

―학자들은 물론이고 출판인들도 모두 정부의 지원을 요구하는데요.

정부의 지원은 문제 해결을 위한 저차원의 지엽말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장애인이나 고엽제 피해자들이 정부의 지원을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면 곤란하지요. 문제의 핵심은 사회 풍토를 바꾸는 일입니다. 1960년대 이후 정부가 내세운 중요한 목표가 경제 건설이었고, 초고속으로 이룬 산업화 과정에서 효율과 실용성, 국가 부강에 직결되는 것만을 숭상하다 보니 자연히 인문적 가치가 평가절하되었지요. 또 하나의 축은 이른바 민주화세력인데, 이들은 실천을 중시하면서 운동의 효율성을 추구하다 보니 인간의 본질 탐구나 인간성 중시 같은 가치가 평가절하됐어요. 김대중 정부에서 제시한 신지식인이라는 것조차 경영 마인드를 지닌 시장 지향의 지식인인데, 이 또한 인문정신과는 동떨어진 방향이었지요. 결과적으로 작금의 우리 사회에는 반인문적 풍토가 조성돼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인문학과 교양의 위기 사태에 직면한 거지요.”

―그렇다면 인문학의 실용적인 가치는 무엇입니까? 왜 지금 우리가 인문학의 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요?

“행복의 추구야말로 인간다운 삶을 살자는 우리의 최종 목적이지요. 변혁을 도모한 사람들의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궁극적으로 잘살기만 해서도 안 되고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인간에 대한 이해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타인의 입장에서 역지사지의 정신을 지닐 수 있고 관용도 베풀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덜 살벌하고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들기 위한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정신이요 가치입니다. 토마스 만은 ‘교양이란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삶을 향유할 능력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행복합니다. 자기가 불행한 사람은 남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행복한 사람이 많아져야 사회도 행복해집니다. 삶의 여러 가능성에 대한 향유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기본입니다.”

―인문학 부흥을 위한 근본적인 처방은 없을까요?

사람이 빵만 가지고 살 수 없다는 정신을 심어주는 교육이 가장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은 가장 똑똑한 아들에게는 사업을 물려주고, 그다음 똑똑한 아들은 랍비로 키우되 사위 하나는 반드시 똑똑한 지식인을 얻는다고 합니다. 비즈니스만 해서도 안 되고, 성직자만 배출해서도 행세를 할 수 없으며,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지식인까지 가문에서 나와야 사회적 인정을 받는 풍토를 반영하는 사례지요. 그들이 인종적으로 탁월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과학자, 예술가, 학자들이 노벨상을 휩쓸게 된 겁니다. 이러한 사회 풍토를 위한 인문학적 인프라를 조성하면서 정부의 지원도 요청해야지요.”

―불행한 사람은 다른 이들도 불행하게 만든다는 말씀, 인상적입니다.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일인데, 우리는 정작 효율과 실용에만 매달려 거꾸로 가는 것 같습니다.

“러시아 출신 철학자 아이자이아 벌린이 소개한 일화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영국의 명문 맥밀런가의 한 사람이 대학 1학년 때 철학을 교양과목으로 들었는데, 첫 시간에 철학교수가 ‘내 강의를 충실하게 들으면 어떤 걸 얻을 수 있는가’ 물은 뒤 ‘관리나 기업가가 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내 강의를 잘 들으면 적어도 남의 이야기를 듣고 이 사람의 말이 맞느냐 틀리느냐 정도의 분별 능력을 지니게 되며, 특히 남을 속이려 드는 것은 금방 간파하게 된다’고 말했답니다. 이 예화를 인용하면서 벌린은 ‘남의 이야기를 듣고 제대로 판단하는 능력이야말로 굉장한 능력’이라고 토를 달았습니다. 인문학의 기본을 잘 시사하는 발언이지요."
 
"인문학적 소양은 사람을 지혜롭고 총명하게 만듭니다. 이런 정신으로 인문학을 받아들이고 위기를 거론해야지, 왜 우리는 돈을 적게 지원해서 망하게 하느냐고 항의하는 태도는 자칫 직업 이기주의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생산적인 건 바로 눈에 띄지만 인문학이란 가시적인 게 아니어서 본질을 꿰뚫고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삶을 제대로 향유할 능력을 갖춘 한 사람의 행복한 교양인을 만드는 일은 오랜 투자와 사회적 노력 끝에 가능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사회적인 큰 목적을 세우고 노력해야지요.”(조용호 기자)
 
 
한국일보(06. 09. 21) 老지성들에게 듣는다, 인문학의 길을…
 
 
왜 인문학인가? 왜 인문학이 중요하며 우리의 삶에 절실한가? 또 그토록 중요한 인문정신이 죽네 사네 하는 지경에 이른 까닭은 무엇이며,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우리는 무엇을 반성하고 고쳐가야 하는가? 그리고 또 왜 우리는 너무나 막연하고 거대해서 공허하기까지 한 이 질문들을 지금 당장 스스로에게 아프게 던져야만 하는가?

이 무겁고 아득한, 그렇지만 긴박하고 절실한 질문들을 놓고 학술원 회원인 정명환(77) 전 서울대 불문과 교수, 차하순(77)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예술원 회원인 유종호(71) 전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가 20일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 당대의 노(老) 지성들은 그들이 짊어진 이 질문들보다 더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시종 깊이, 그리고 느리게 대화를 이어갔고, 좌담의 내용과 형식 자체로서 우리가 복원해야 할 인문주의의 전범(典範)을 연출했다.

차하순=인문학의 위기를 진단하기 앞서, 그 기원을 따져봐야 할 것 같아요. 말의 기원, 어원처럼 말이죠. 저는 지금 이 위기가 인문학의 본질에 닿아있다고 봅니다. 인문학이란 인간과 인간의 가치에 관한 학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조건, 삶의 조건이 급변했어요.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시대 공자 시대의 인간에서 생명공학, 정보통신 사회의 인간이 된 거죠. 그렇다면 지금 위기의 기원은 오래된 것이며, 다만 조금씩 심화해왔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의 경우 1960년대 개발시대 이후 그 병증이 급격히 악화했습니다. 외적으로는 상업화, 산업화라는 인문학적 환경의 변화이고, 내적으로는 인문학 자체가 변화된 세상에 충실히 적응하지 못한 채 전통적 방법과 사고방식을 고수한 것입니다.

정명환=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의 위기를 논하는 자리에서 아직도 엉뚱한 소리들이 들려요. 우리 인문학이 식민지화했다, 쇼비니즘으로 치우쳤다, 이념화했다, 패거리문화를 형성했다, 학문간 교류가 빈약하고 배타적이다 등등…, 구구한데, 그것은 인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학문풍토 전반의 문제라 해야 옳습니다. 우리 인문학 자체의 연구성과는, 불문학의 예만 보더라도, 괄목하게 발전해왔어요. 우리 학자들이 프랑스에서 불어로 쓴 논문이 현지의 유수 학술전문 잡지에 실리고, 우리 정부의 보조 없이 유수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왜 대학에 학생들이 안 와서 폐과 지경에 이르고, 그나마 사정이 낫다는 영문학과는 셰익스피어를 제쳐두고 시사영어로 기울어질까요.
 
저는, 차선생 말씀처럼, 6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교양을 담당하던 계층이 급속히 붕괴된 데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효율성과 합리성, 물질적 풍요와 이윤 지상의 이념 하에 전통적 사대부ㆍ선비계급의 역할을 대신할 지식ㆍ교양 엘리트층이 설 땅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리고 가장 큰 책임은 매스컴, 특히 TV가 져야 합니다. 정신적인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몰아간 이윤 추구의 주체들,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에 기생해온 대중문화, 그리고 과학기술문화 만능정신이 야합한 결과지요. 가장 대중적 레저 수단이라는 TV앞에서 인간은, 역설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 회복을 위한 레저’의 문화를 상실한 것입니다.


유종호= 이 위기가 60년대 이후 심화했다는 데 대해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다만 거기에는 인문적 가치를 도외시한 산업화세력 못지않게 거기에 맞선 ‘민주화세력’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들은 운동의 효율성을 위한 특유의 실천적 논리 하에 인문적 가치, 인간적 가치를 밀쳐냈습니다. 근본적인 반지성주의, 반지식인주의가 싹튼 것이지요. 지식인을 ‘먹물’이라고 칭했던 당시의 유행어가 반지성주의를 상징하지 않습니까. 또 민주화 정권이라는 김대중 정권이 기치로 내건 ‘신지식인상’은 어떻습니까. 그것 역시 친시장적ㆍ반인문적 효율주의였고, 경영주의였어요. 한 마디로 인문학적 상상력이 앉을 자리를 사회학적 상상력이 차지한 결과입니다. 정보화 사회라는 게 뭡니까. 그 사회의 경쟁력은 정보에서 나온다는 것 아닙니까. 정보란 새로워야 하고, 실용적이어야 하고, 쉬워야 합니다. 그 새롭고(쉽게 교체되고), 실용적이고(물질적 가치), 쉬운(편의주의, 대중주의) 정보의 전횡 앞에 체계적이고 학문적이고 깊이 있는 지식이 대접 받을 자리가 사라진 것이지요.

정명환=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당장 이 정부 문화관광부의 행태를 보세요. 그들의 문화정책 역시 경제지상주의 아닙니까. 한류니 문화콘텐츠니 하는 것들 역시 근원적 인간의 가치, 인문학적 가치보다 물질적 가치를 우위에 두는, 다시 말해 휴머니티를 배반하는 행위지요. 문화란 어떤 삶이 인간적인 삶인가, 진실한 삶의 행복은 무엇인가, 하는 괴로운 정신적 과정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차하순=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19세기 산업혁명 이래 우리 삶을 지배해 온 외형적ㆍ물질적 가치와 내면적 삶의 질 사이의 괴리를 메워가는 일입니다. 물질사회의 빠른 행보를 문(文) 사(史) 철(哲)의 느린 걸음이 따르지 못한 간극을 좁혀야 한다는 거죠. 인문학의 신축적인 사고가 요구되는 대목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인문학자들은 인공지능, 인간복제에 대해 그 위험성은 말했지만 윤리적, 도덕적 준거를 제시하지는 못했어요.
 
또 문화의 양면성, 즉 전문화ㆍ고급화에 대한 학문적 추구와 ‘쉽게, 쉽게’를 중시하는 대중적 가치에의 경도입니다. 사회 지식 엘리트들에게 대중적인 메시지를 쉽게 직접 전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18세기 유럽의 계몽사회처럼, 전문가 집단과 대중들을 매개하는 중간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회의 의식구조를 바꿔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기업인들이 음악ㆍ미술은 후원해도 인문학은 후원하지 않지요. 해외로 직원을 파견할 때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가르쳐달라고 우리에게 강연을 요청하면서, 경제연구소나 만들지 인문학연구소는 만들지 않습니다. 직원을 채용할 때 내거는 전공 제한도 어불성설입니다.

유종호=의식구조 개혁에 덧붙여 저는 대학 개혁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한 마디로 지금은 대학과 대학생이 너무 많고, 차별성이 없어요. 그래서 50~60년대 대학생이 지녔던 건강한 의미에서의 자부심, 교양적 가치 중시의 풍토가 희석됐어요. 교양을 과시할 대상마저 없어져버린 시대가 된 거죠. 그러니 교양이 대접 받을 수 없죠. 대학개혁 없이 인문학의 위기 극복은 요원합니다.

정명환=저는 정부의 역할도 주문하고 싶어요. 서울대를 비롯한 모든 대학이 취업예비학교가 돼버린 현실,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죠. 다만 그럼에도 ‘진리는 나의 빛’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나아갈 공간, 가령 프랑스의 ‘국립학문연구소’처럼 ‘국립인문학연구소’를 설립해야 합니다. 가령 ‘몽골어’ 전문가는 우리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인재지만, 그를 받아줄 대학이나 기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소 같은 기관을 국립인문학연구소로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들에게는 ‘건강한 자아 분열’을 요구하고 싶습니다. 인문학 전공자가 졸업한 뒤 기를 쓰고 증권회사에 취업해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 현실 속에서 증권맨으로서의 대중적 자아(public self)와 불문학도로서의 개인적 자아(private self)를 분열시켜 고통스럽더라도 인문적 가치를 누리자는 겁니다. 낮에는 시계공으로 일하며 밤에 철학을 했던 스피노자처럼 말이죠. 직장인으로서 돈을 버는 목적 역시 인간으로서의 참된 삶, 진정한 행복을 위한 것이고, 그것은 인문학적 교양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니까요.

=한국일보 편집국 인터뷰실에서 시작된 좌담은 인사동의 한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뒤로도 이어져, 이 시대 보수와 진보의 정체성에 대한 비판과 현 정부에 대한 질타 등으로 주제와 대상을 넘나들며 길게 이어졌다. 주흥이 도도했지만 그들의 대화는 시종 나직하게 우렁찼고, 소박하게 아름다웠다.(정리=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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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oli 2006-10-12 21:42   좋아요 0 | URL
좋은 얘기지만, 높이 오른 한국인에 대한 불신이 제 맘 가득한 걸 다시 한번 느낍니다. 저들의 말이 백번 옳긴 하지만, 역시 인문학 교수다운 지극히 좋고 아름다운 얘기만 하네요. 딱 인문학 틀 안에서만 놀려고 하는 모습. 리영희 정도는 되어야 제 눈에 찰까요.ㅎㅎ 암튼 저들이 자리를 옮긴 인사동 음식점은 한 끼에 얼마짜리일까요?

로쟈 2006-10-13 00:59   좋아요 0 | URL
물론 저 또한 '원로들'의 의견에 모두 공감하거나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생각의 실마리를 얻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참고로 인사동의 음식점들은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parioli 2006-10-13 16:30   좋아요 0 | URL
인사동과 그 근처에 아주 고급 음식점이 있던데요... 강준만이 얼마 전에 쓴 '기회주의 공화국' 을 읽고 아주 공감했죠. 한국에선 기회주의자가 되지 않고는 위로 못 올라간다... 현실이 우리를 기회주의자로 만들기는 하지만.

로쟈 2006-10-13 17:01   좋아요 0 | URL
"한국에선 기회주의자가 되지 않고는 위로 못 올라간다" 고로, 한국 사회에서 잘 나가는 인간들은 모두 기회주의자이다, 라는 건 너무 단순한 논리 아닌가요? 어느 사회이건 기회주의자로 처신하는 것이 '기회'를 잡을 가능성을 높여주긴 하겠지만, 그게 다른 설명을 모두 봉쇄시켜버릴 정도일까요? 한편으로, 기회주의에 대한 강준만식 해설에 기대면, "기회주의는 한국의 무한한 잠재력"이기도 합니다. 비록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제도ㆍ조직ㆍ개인도 사회적 존경과 신뢰는 누리기 어렵게 돼 있다"고는 하지만. 그러니까 우리가 사회적 존경/신뢰를 잃는 대가로 지불받는 것이 기회(주의)인 것이지요. 그런데, 원로 인문학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 '시회적 존경/신뢰'의 회복입니다. 인문학을 도구적으로 써먹는 게 아니라...

parioli 2006-10-14 00:12   좋아요 0 | URL
1. 너무 단순한 논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높이 올라간 사람 중에 기회주의자가 아닌 예외적인 존재가 있을 뿐 아닌가요? 예전 교육부 장관이었던가요, 자기에겐 스승이 없(었)다 던가 하는 발언을 해서 도덕의 수호자들에게서 엄청 욕을 먹었던... 전 그 장관의 말에 백분 공감합니다. 제가 느끼기엔, 우리나라 최상층부-학계든 정계든 법조계든-는 한다리만 건너면 다 알만큼 수백명 정도로 이루어져 있기에 둥글둥글 처신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봅니다. 좀만 더 심해지면 기회주의가 되는 거 아닐까요?
2. '그러니까 우리가 사회적 존경/신뢰를 잃는 대가로 지불받는 것이 기회(주의)인 것이지요'라는 문장은 잘 이해가 안 되는군요.
3. 원로 인문학자들이 강조하는 그 사회적 존경/신뢰의 회복에 대해 누가 동의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인문학자답게 왜 사회적 존경/신뢰를 잃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죠. 해도 아주 두리뭉실하게 할 뿐.
4. 강준만은 그런 기회주의가 처절히 싫기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있고 서울 소재 대학으로 올라올 기회가 있어도 거절하는 거겠죠. 강준만 정도는 되어야 기회주의 공화국을 비판할 생각이 나는 거겠죠. 소위 인문학계의 원로들은 기회주의를 비판할 생각이 나기나 할까요. (다만, 제가 좀 무식한 지라 저분들에서는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