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테일 경제학에 대한 유익한 반론을 게시하고 있는 블로그에 들렀다가 뜻밖에도 나와 무관하지 않은 글을 읽게 되었다(http://blog.jinbo.net/marishin/?pid=187). 내용에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옮겨놓고 몇 자 덧붙인다. 제목이 '알라딘 서재의 힘(?)'(06. 01. 28), 제목 때문에 자동적으로 클릭하게 된 글이었다(알라디너라면 당연한 일 아닌가?).  

어떤 종류건 일종의 '또래집단'이 생기면 그 가운데서 영향력이나 힘을 발휘하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힘이 외부에도 영향을 끼치게 될 때는 그 힘에 대한 평가가 필요해진다.

나만의 느낌인지 모르겠으나,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있는 '나의 서재'가 책을 사는 이들에게 꽤 영향력이 있는 곳이 아닌가 싶다. 신문이나 잡지의 서평이 워낙 '주례사' 수준인 데다가 요즘은 신문 서평을 올려놓는 게 금지되어서, 독자 서평이 더 중요해졌다. 게다가 상당한 전문 지식을 지닌 '독자'들도 많아졌고, 이들에 대한 신뢰도 높다.

이렇게 쓰면서 의도적으로 피한 단어가 '권력'이다. 권력이라고 하면 마치 대단한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그들이 무슨 권력이겠는가? 이 글은 그 '힘'을 질시해서 쓰는 게 아니다.

여기까지는 일반론이겠다.요컨대, 알라딘의 서재(또래집단!)가 '권력'은 아니더라도 "책을 사는 이들에게 꽤 영향력이 있는 곳"이라는 것. 내 경우 어쩌다 보니 나름대로 '부지런한' 알라디너가 된지라 한달에 적립되는 땡스투 마일리지가 12-13,000원쯤 된다(들쭉날쭉 하지만 15,000을 넘어본 적은 아직 없다). 마일리지가 책값의 1%이니까 내가 '영향력'을 발휘해서 '매출'에 기여하는 바가 100-150만원 정도이겠다(그걸 '기여'라고 한다면).

한데, 아다시피 이 땡스투라는 건 알라딘의 구매자에게도 1%가 적립되기 때문에 여기서의 '기여분'은 얼마간 과장된 것이다(물론 여기서는 책을 사려는 사람의 지갑을 닫게 만드는 네거티브 기여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 사례가 없지는 않지만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는가). 그런 걸 고려하면 대략 한달에 100만원, 70-80권 정도의 도서구매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자화자찬할 수도 있겠다. 따라서, "사실 그들이 무슨 권력이겠는가?"라는 지적은 온당하다. 그저 '약간의 영향력' 정도인 것(한때 나 혼자 구매하는 책들만 한달에 그 정도는 됐었다. 집에서 매우 혼났지만).    

아무튼 내가 자주 가는 어떤 '서재' 주인은 번역서의 오역 문제를 꾸준히 제기한다. 그래서 많은 참고가 된다. 그런데 오역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좀 문제가 있다. 원서를 제외하고 다른나라 번역본과 비교해서 오역이라고 단정하거나 의혹을 제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본래 프랑스어나 독일어로 쓰인 책의 한글 번역본을 영역본, 러시아어본 등과 비교하는 식이다. 이런 비교가 한두번에 그치는 게 아니라면 문제다. 만에 하나 이런 비교 글을 보고 사람들이 번역서를 의심해 책을 사지 않게 될 경우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워낙 엉망으로 번역된 책이 많아서, 나부터도 이런 평이 나오면 일단 꺼려진다.

명시적으로 '어떤 서재의 주인'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알라디너의 상식으론 '로쟈의 서재'를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본래 프랑스어나 독일어로 쓰인 책의 한글 번역본을 영역본, 러시아어본 등과 비교하는" 짓을 누가 또 하는지는 모르겠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해서 필자는 약간의 불만을 갖는 듯한데(이러한 지적은 예전에도 있었고 그에 대해서 답한 적도 있다), 오역의 문제를 학술적으로 제기하는 것도 아니고 한 독자의 입장에서 늘어놓는 코멘트에 '원본'과의 대조를 요구하는 건 나로선 일단 무리라고 본다(다른 언어의 번역본을 읽고 오역을 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필자의 입장이라면 얘기가 길어지지만). 나의 지적이 부당하다면 어째서 그러한가를 입증하면 그만 아닐까(실제로 들뢰즈나, 벤야민, 라이히 등의 번역에 대한 지적 건들에서 나는 생산적인 토론들을 주고받은 바 있다).    

필자의 염려는 "만에 하나 이런 비교 글을 보고 사람들이 번역서를 의심해 책을 사지 않게 될 경우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는 지적이다(이른바 역기능일 텐데, 필자는 순기능과의 대차도 고려한 것일까?). 물론 그럴 수 있다. 누구나 오독/오역에는 개방돼 있으며 나라고 독불장군은 아니다. 다만, 나는 나대로의 의견을 제시할 뿐이고 그에 대한 취사선택은 또 읽는 이들의 몫이다. 이제 당연히 와야 할 내용은 그런 '선의의 피해'에 대한 사례이겠다.  

자신이 일정한 영향을 끼치게 되면 책에 대한 평가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 “번역자에 따르면 철학에 대한 사회학의 복수”라는 촌평이 달린 책을 읽어보니 전혀 말이 안되는 평가였을 때 드는 기분은, '주례사'보다는 덜해도 여전히 씁쓸하다.

내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을까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번역자에 따르면 철학에 대한 사회학의 복수” 운운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언젠가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부르디외의 하이데거론 <나는 철학자다>를 소개하는 대목이다. 나는 이렇게 적었다.

책은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하이데거 읽기인바, 그는 기존의 독해를 모두 거부하면서 자신만의 (적합한)이중적 독해를 제안하고 실행한다. 즉 그는 하이데거에 대한 "(지지자들의) 철학적 독해 대 (비판자들의) 정치적 독해라는 대립구도를 포기하고, 이중적 독해, 곧 정치적이면서 철학적인 독해를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서 하이데거 철학의 고유성이 나치즘과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를 밝혀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의 의의? 역자에 따르면, "하이데거에 대한 부르디외의 비판적 분석은 당대 철학에 의해 억압받아온 사회학의 복수이자, 인문학에 있어서 늘 사회학과 경쟁관계에 있는 철학에 대한 사회학의 우위를 간접적으로 선언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최근에 나온 책들' 등 신간을 소개하는 페이퍼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는 <나는 철학자다>를 읽기 전에 어떤 책이 나왔고 어떤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식의 예비적인 정보를 늘어놓았다(이건 나 자신을 위한 정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이데거에 대한 부르디외의 비판적 분석은 당대 철학에 의해 억압받아온 사회학의 복수이자, 인문학에 있어서 늘 사회학과 경쟁관계에 있는 철학에 대한 사회학의 우위를 간접적으로 선언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도 있다."라는 역자의 말을 옮겨놓은 것이다. "책을 읽어보니 전혀 말이 안되는 평가였을 때 드는 기분"이란 건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왜 이런 멘트는 댓글로 달아주시지 않았을까?)

나는 평가를 제시한 게 아니라(읽기도 전에 무얼 평가하겠는가) 소개의 말을 덧붙였을 뿐이다(역자의 말이야 책을 사면 다 읽어보는 내용 아닌가). 혹 "번역자에 따르면 철학에 대한 사회학의 복수"란 구절이 문제된다면 일차적으론 역자와 독자의 의견이 다른 것이고(내가 주례를 잘못 섰다?). 

'주례사'보다는 덜해도 여전히 씁쓸하다.고 마무리되는 것으로 보아 나는 이 책을 '광고'했고, 필자는 이 책이 그러한 광고에 미치지 못해 실망스러웠다, 정도로 정리될 수 있을 텐데, 번역비판과 관련한 '선의의 피해'와는 좀 무관한 것 아닌가(참고로, 나의 '평가'를 말하자면, 이후에 나는 1/3쯤 책을 읽었던 듯한데 부르디외의 책은 제목도 번역도 그다지 만족스럽게 생각되지 않았다). "전혀 말이 안되는 평가였을 때 드는 기분"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것이다.

이 서재를 통한 '약간의 영향력' 때문에 내가 책임질 몫이 있다면 책임지도록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비판은 구체적이면 좋겠다. 번역서에 대한 불만을 지적할 경우 몇 페이지의 어느 문단이라고 나는 명시해왔다. 그에 대한 반론 또한 명확한 것이면 좋겠다. 그럴 때에야 우리는 '기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  

06. 12. 07.

P.S. 본문에서 땡스 투 마일리지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이 마일리지가 조만간 적립금으로 일원화된다고 한다. 카테고리 자체가 '흡수'되는 셈이다. '땡스 투'에 대해서 미리 작별인사를 해둔다. 땡스, 땡스 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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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12-07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글이 다 있군요. 원 글이 너무 짧아 담아내고 있는 내용이 미흡해서 그다지 뭘 말하려고 하는지, 왜 그런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 듯 해요. 일단 제목은 ㅎㅎ 참 안보고 지나갈 수가 없네요.

로쟈 2006-12-07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도 '인용'이라서 어쩔 수가 없네요(물론 초점은 '힘'이 아니라 '?'에 있는 것이지만요)...

기인 2006-12-07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땡스투 저도 가끔 기여(?)하고 있습니당 ;)

물만두 2006-12-07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가 그런 의미로 생각할 수 있군요^^;;

다크아이즈 2006-12-0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 제겐 '로쟈님의 힘' 이야말로 순기능인데, 저런 생각 하는 사람도 있군요. 로쟈님 이참에 삘 받아서 불어나 독어 원서로도 오역 지적하겠다고 날밤 새는 것 아녜요?^^*

로쟈 2006-12-0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전에 불어, 독어를 익혀야 할 테니까 가능하지 않은 얘기입니다.^^ 단, 우리가 번역, 번역의 번역 속에서 숨쉬고 있는 만큼 어떤 식으로든 거기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데, '원본'을 문제삼는 건 한가하거나 고답적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인용문 필자의 경우에도 여러 책을 번역했는데, 번역 원서 자체가 한 가지 언어로 돼 있는 게 아니고 많은 다른 언어텍스트의 번역/인용들을 포함하고 있거든요(말하자면 중역이 됩니다). 그런 경우에도 모든 1차 텍스트에서 직접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지 의문입니다...

LAYLA 2006-12-07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점잖은 글이네요. 로쟈님의 글이요^^

2006-12-07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2-07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뭐 액면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암튼 자주 들르신다니 감사합니다. 따로 대접해드리진 못하지만...

마태우스 2006-12-07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얘기가 언급되는 건 대부분 기분 씁쓸하죠. 게다가 그 얘기에 동의못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나저나 로쟈님 땡스투, 대단하십니다. 거의 신의 경지... 그정도의 매출이라면 알라딘서 님한테 잘해야 할 것 같은데요...

로쟈 2006-12-07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의 신들은 참고서의 신들이죠.^^ 저는 아직 말석입니다...

마법천자문 2006-12-07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rishin' 님이 아마 한겨레 신기섭 논설위원일 겁니다.

로쟈 2006-12-07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블로그에 그렇게 소개돼 있더군요.

yoonta 2006-12-07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삐딱하기두 하군요..marishin이란 분...강유원홈피에서 자주 뵙는 분같던데..로쟈님이 이곳에서 일종의 영향력?을 행사하는것에 질투라도 느끼셨나? -_- 로쟈님처럼 정성들여 알라딘 서재를 풍요롭게 해주시는 분들에게 칭찬은 못해줄 망정 저렇게 빈정대고 있으니..그리구 이 서재에 자주들려서 로쟈님 글들을 비교적 꼼꼼히 읽는 한 사람으로서 로쟈님이 비록 원본이 독어본이나 불어본인 책들을 영어본이나 러시아본으로 문제제기 했다손 치더라도 그 지적에 어떤 심각한 결함이나 문제점이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marishin이란 분의 글에 일부분이나마 공감할수있으려면 본인 스스로가 로쟈님의 글중 영어본이나 러시아본을 통해 번역상의 문제를 제기한 글들중 어떤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로쟈 2006-12-07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그 '힘'을 질시해서 쓰는 게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믿어야지요. 한데, 제가 갖는 불만은 그 '글'이 고작 '두 문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씁쓸함'이라...

퍼그 2006-12-08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씁쓸해' 하진 마세요.^^ 저는 로쟈님이 오역을 지적하실 때 '외국어' 능력보다는 '국어' 실력을 발휘하신다는 생각을 종종 했는데요...

로쟈 2006-12-08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제 외국어 실력보다는 국어 실력이 훨씬 뛰어나죠.^^

수퍼겜보이 2006-12-08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을 질투하시나봐요. ㅋ 그분이 인기없는 서재라도 하나 갖고 계신게 아닐까요? 혹시 이 댓글도 보고 알라딘의 '천민'계급에 대해 한 마디 하실라나? (권력없고 내공없는 ㅠ.ㅜ 불가촉천민)

페일레스 2006-12-08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럴 때 알라딘 서재에 트랙백이 없는 게 좀 불편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편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저 역시 강유원님 홈페이지에서 marishin이라는 아이디를 자주 보았지만, 링크를 타고 건너가서 인용문을 읽어보니 그 분은 '1차 텍스트 중심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번역한다는 분이 왜 로쟈님이 책을 소개한 글은 꼼꼼하게 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요.
그보다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저 인용문에 달린 댓글들입니다. '까이는 대상'이 '번역이 뭔지' 모른다고 단정하는 저 댓글들이란...

2006-12-08 0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2-09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슈퍼겜보이님/ 알라딘 서재라는 '장만'한 게 아니라 임대받은 것인지라, '임대주민'쯤 되는 거겠죠. 요샌 기자들도 '서민'을 자처하는 형편이니 '서민'이란 말도 함부로 못하겠습니다...
페일레스님/ 원전주의에 대해선 이전에 언급한 바 있는데, 1차 텍스트를 다룬다는 게 독서에 유리하다는 것이지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는 않지요. 독서는 언제나 '번역'의 과정이며, "헤겔을 독일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유명한 주장이 갖는 함의도 음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댓글들이야 어디서나...

virtuepeak 2006-12-08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의 단초를 제공한 게 아닌지 죄송스럽습니다. 로쟈님의 서재와 armarius.net을 꾸준히 찾는 저로서는 예전에도 armarius.net에서 로쟈님을 두고 어떠한 이야기가 오갔던 사실을 상기할 때, 많은 분들께서 감정의 앙금(?)을 품으시는 게 아닐까 걱정됩니다. (제 닉네임은 영구혁명을 직접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 뜻으로 읽어 주셔도 본래 의도와 커다란 차이는 없겠습니다.^^)

로쟈 2006-12-08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마다의 감정이야 터치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겠죠. 하지만 의견 일반으로서의 말(로고스)은 논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공적인 영역에서 제가 관심을 갖는 대목도 그 논리일 뿐입니다...

가을산 2006-12-08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서재의 힘은 제가 보기에
번역가들을 긴장케 하는 힘, 독서가들을 자극하는 힘,
그리고 저같은 사람 머리에 쥐나게 하는 힘인 것 같습니다.
이런 좋은 힘은 커도 좋아요.

virtuepeak 2006-12-08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로쟈님께서 '번역자와 편집자'라는 제목의 페이퍼에서 교수신문에 실린 이제이북스 전응주 사장의 글을 인용하신 적이 있었고, 그 때 앤서니 케니의 '서양철학사' 번역에 문제가 있어 구입하지 않았다고 코멘트를 덧붙이셨습니다. 역자 중 한 사람인 김영건 선생이 그 기사와 로쟈님의 페이퍼를 모두 읽은 모양이고, 그 사건에 대한 소회를 쓰셨지요. 그 글은 완소봉춘님이 댓글로 달아주셔서 로쟈님도 읽으셨습니다. 그리고 로쟈님께서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책이 제 값을 하는 지 궁금할 뿐이라는 견해를 남기셨지요.

marishin님께서는 그 사건에 관해서 전응주 사장이 거짓말을 했다고 보는 것 같고, 로쟈님께서 전사장의 견해를 수용하면서 그 책을 평가한 것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여기신 것 같습니다. 김영건씨의 글을 읽지 않고 로쟈님의 페이퍼만 읽은 사람이라면 그 문제에 관한 관점이 한 쪽으로 고정될 가능성이 높았겠지요. 물론 이 사례는 '알라딘 서재의 힘(?)'이 쓰여진 뒤 한참 뒤에 생긴 일이지만, marishin님의 문제 의식이 이러한 지점에 있는 게 아닐까 하여 조심스럽게 언급해 봅니다. marishin님께서 '부실 번역 논란의 진상'이라는 제목으로 코멘트하신 포스트가 있습니다.
http://blog.jinbo.net/marishin/?cid=13&pid=223

로쟈 2006-12-08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마지막 힘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있을 거 같군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평이 그런 쪽이라서.^^;

영혁님/ 저도 그 내용은 읽어봤습니다. 제가 출판동네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책이 나오기까지의 내막을 샅샅이 파악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건 넌센스이죠. 전응주 사장의 글은 공개된 언론에 발표된 것이었고, 저는 번역자와 편집자와의 바람직한 협력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취지에서 옮겨왔던 것이예요(근데, 제가 옮겨온 글은 연초의 것이니까 그와는 무관해 보입니다). 거기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면 왜 직접 해명하지 않고, 뒤에서 딴소리를 하는 건지요. 그리고 이제 보니 "왜 이렇게 거짓말이 하나의 진실로서 난무하고 그것을 마치 사실처럼 믿고 거기에다 의미까지 부여하는 멍청한 놈이 나타나는지 모르겠다"나, "소위 인터넷 <먹물>들의 거짓말과 허풍이 참으로 비지성적이다. 이 꾸민 이야기에 감격하는 그대여, 인터넷 공간에서 사기 치지 말고 공부하라"는 직설적인 멘트의 대상이 딴 사람이 아닌 듯하군요. 보기와는 다르게 먹고살기들 힘든 모양입니다...

biosculp 2006-12-09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 서핑하다보면 이런저런 글 읽다가 전후가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 전응주 사장의 글이 링크된것을 보다 갑자기 헷갈렸습니다. 아고라라고 하는 곳에서 예전에 철학사번역과 관계되어 불편한 애기를 한것을 읽은적이 있어서 서로 안좋은 줄은 알았는데 그게 로쟈님의 서재와 연결되어 있는것을 보고 약간 황당하기까지.
아마 교수신문에인가 난 전응주사장의 글을 링크하려면 아예 교수신문에서 찾아 링크하는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래야 꾸민이야기에 감격하는 그대여 같은 답이 안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요.
펌들때문에 오해만 쌓이는것 같고.

로쟈 2006-12-09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곳에 적기도 했지만, 제 관심은 '인간관계'가 아니라 그냥 '책'입니다. 또 어떤 책에 대한 험담을 막바로 옮겨온 적은 없는데, 이번 경우는 자사에서 출판한 책에 대한 '펴낸이'의 말이었기에 에누리없이 옮겨왔던 것이죠(저는 교수신문에서 그대로 퍼온 글에 약간의 코멘트와 책이미지를 덧붙였을 뿐입니다). 만약에 그의 발언이 무고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교수신문측에 기사 삭제를 요청할 수도 있었던 것이고. 더불어, 제 글에 바로 댓글을 달아서 시정을 요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뒤에서 '멍청한 놈'이니 '사기꾼'이니 하며 욕하는 게 그 동네의 관행인 것인지 의아할 따름입니다...

마태우스 2006-12-09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쓰시기 전에 여러 문헌을 통해 사실관계를 알아보시는 로쟈님의 태도에 더더욱 경외감을 갖게 되네요...댓글 달린 것들을 읽어보다 느낀 겁니다.

로쟈 2006-12-09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요, 이번 경우는 제가 (서로 주장이 다른) 사실관계를 확인해보지도 않고 칼럼기사 하나를 옮겨왔다는 것이 빌미입니다. 가령 어떤 칼럼/기사를 옮겨올 때 그거 사실인지 아닌지 다 확인해봐야 한다는 것이죠. 가령, 트랜스지방이 몸에 안 좋다는 기사를 옮겨오려면, 실제로 좋은지 안좋은지 (직접) 확인해봐야 한다는...

마태우스 2006-12-09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그렇군요. 그래도 전 존경할래요. 아무도 절 말릴 수 없습니다!
 

아침신문에서 고른 '오늘의 책'은 '일본사상사'들이다. <현대일본사상론>과 <근대 일본사상사>가 동시에 출간됐는데, 일본문학이나 사상을 챙겨둘 만한 여유는 없지만 마루야마 마사오에서 멈춰있는 '교양'을 업그레이드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게 된다. 최근에 한 학술발표회에 참석했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일본에는 일본인이 (즉 일본인의 시각에서)직접 쓴 <한국문학사>가 단 한권도 없었다(몇몇 한국인/재일동포가 쓴 오래 된 문학사들만이 남아있다). 우리의 경우는 사정이 어떠한지(우리 나름의 시각으로 쓴 일본문학사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지만 여하튼 '가까운 이웃'이란 말이 무색한 게 현실이다. 미래적인/전향적인 한일관계에 대해 말들은 많지만 일단은 서로의 전통과 생각에 대해 좀 알아야 되지 않을까 싶다(<한국문학사>의 표지에 욘사마를 쓰는 건 어떨까? <한국문학사>를 읽고 있는 욘사마!). 자꾸만 거꾸로 가는 듯싶은 사상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경향신문(06. 12. 07) ‘근대 일본사상사’ 등 번역출간…日 다시 전체주의로 갈까

일본에 또다시 내셔널리즘이나 전체주의가 부상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는 방법은 그들의 사상의 궤적을 보는 것이다. 그런 연유인지 일본 근·현대 사상사 서적이 최근 잇달아 번역돼 나왔다. ‘근대일본사상사’(소명출판)와 ‘현대일본사상론’(논형)이다.

두 책은 집필 방식이나 사상계를 보는 관점이 다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군국주의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일본 근·현대 사상계의 어제와 오늘을 더 총체적으로 드러내보인다. ‘근대일본사상사’는 지식인들의 사상에, ‘현대일본사상론’은 민중의 사상에 초점을 맞춘다. ‘근대일본사상사’가 막번체제 말기~전후(1950년대 후반)를, ‘현대일본사상론’은 전후~현재를 다루고 있어 시기적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근·현대 사상흐름 비판적 추적교과서 검정제도 위헌소송을 주도한 것으로 유명한 이에나가 사부로 전 도쿄교육대교수가 엮은 ‘근대일본사상사’는 일종의 개론서다. 마루야마 마사오, 다케우치 요시미 등 전후 일본 사상학계를 대표하는 당시로선 소장학자들이 집필에 참여했다. 1959~61년 지쿠마서방(筑摩書房)이 낸 ‘근대일본사상사 강좌’ 시리즈의 제1권 ‘역사적 개관’을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옮겼다.

이 기획은 패전에도 불구, 한국전쟁의 어부지리 등에 힘입어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사회가 “더 이상의 전후(戰後)는 없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전전(戰前)의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보인 것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됐다. 군국주의 패전의 역사를 ‘일부에 의한 실수’로 치부해 버리려는 태도 뒤에는 어떤 정신구조가 있는 것일까.

해답은 일본이 서양문명과 본격적으로 만난 메이지시대 ‘문명개화기’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문명개화론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나라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해 ‘문명개화’라는 수단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해소했다. 국내 민주주의를 강조한 자유민권론자들도 어느덧 하나 둘 정한론에 동조했고 청일전쟁이라는 경험 속에 일본 지식계 내 국내민주주의 주장은 국권의 우월함에 완전히 밀렸다.

저자들이 일본 사상사에서 주목하는 중요한 가치는 가족과 국가이다. 가족과 국가의 위계로 촘촘히 짜여진 도덕 교육은 천황제를 만들어낸 것이기도 했고, 천황제의 결과 더욱 강화된 것이기도 했다. 1910년대 이후 일본 지식계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했던 사회주의자들이 이른바 ‘쇼와 10년대(1930~40년대)’라고 부르는 시기에 대규모 전향해버린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뛰어난 공산주의자로서 단 하나뿐인 어머니에게 심려를 끼칠까봐 걱정했다”는 것이나 “내 안에 자리잡은 국제애의 본능은 내 안의 자기보존 본능과 도저히 맞설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지기 쉽고 빈약하다”는 당시 지식인들의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에 비해 ‘일본현대사상론’은 야스마루 요시오라는 필자가 자신의 사상사 연구를 정리한 것으로 제자인 박진우 숙명여대 교수가 번역한 것이다. 야스마루는 마루야마로 대표되는 근대주의자들과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동시에 비판했다. 그에게 민중은 마루야마 등이 말하는 계몽의 대상이나 몽매한 주체도 아니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강조하는 투쟁하는 인민도 아닌 생활세계에서 지혜를 발휘하는 생활자일 뿐이다.

국가중심주의가 만든 천황제그는 일본사회의 보수화가 현저해지는 70년대 중반 이후에 특히 주목한다. 쇼와 천황이 입원한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동조를 강요한 자숙과 조의의 표현으로 상징되는 권위적 질서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그리고 여기에 대응하는 민중들의 사상은 어떠했는지가 주요 관심사다.

저자는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던 에너지인 민중의 힘은 그들의 가장 일상적 생활규범이었던 근면·검약·정직·효행 등과 같은 ‘통속도덕’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통속도덕의 실천이라는 광범한 민중의 자기단련·자기해방의 노력 과정에서 분출된 비대한 사회적 에너지가 사회질서를 밑에서부터 재건한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속도덕의 진지한 실천에 의해 평온한 생활을 희구하는 민중의 평범한 이상이 현실세계의 난관에 부딪혀 난파하게 됐을 때 민중은 스스로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종교라는 매개를 찾게 됐다. 상징천황제가 파고들 수 있었던 사정이다.

근·현대 일본 지식계와 민중의 정신구조 형성 과정을 비판적으로 추적하는 이 책들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일본 내 다수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학계 내 목소리 역시 약하지 않다. 어쩌면 일본사회의 앞날을 그리 절망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손제민 기자)

06. 12. 07.



 

 

 

P.S. 과문하지만 일본사상사에 관한 책 몇 권을 꼽아본다. 가노 마사나오의 <근대 일본사상 길잡이>(소화, 2004)는 일단 '길잡이'란 말이 눈에 들어온다. 저자는 생소하지만 역자가 일본사상사 전문가라는 점이 믿음을 준다(같은 저자의 <일본의 근대사상>(한울, 2003)과는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분량이 입문서로서는 적격이다). 그리고 물론 일본사상사의 '천황' 마루야마 마사오의 책들이 기본서들이겠다. 여러 권이 번역돼 있지만 가장 얄팍한 <일본의 사상>(한길사, 1998)을 '입문서'로 골라둔다. 그리고 예전에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다룬 바 있는, 히로마쓰 와타루의 <근대초극론>(민음사, 2003). '일본 근대 사상사에 대한 시각'이 부제이고, "이 책은 1942년 잡지 문학계'에서 개최된 '근대의 초극 좌담회'에 대한 해설임과 동시에 넓게는 1920년대부터 1945년 패전할 당시까지의 일본 지성사를 진단하고 있는 책이다." 당대의 키워드이기도 했던 '근대의 초극'론으로 일본의 현대사상을 재구성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해설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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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12-07 09:18   좋아요 0 | URL
마루야마 마사오는 '전후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소리까지 듣지만 요즘 들어 그의 사상에 대해 반기를 드는(!) 목소리가 학계에서 자주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의 저작들이 '기본서'이자 '개론서'라는 데는 이의가 없을 듯 합니다. 물론 균형잡힌 시각을 위해서는 다른 관점의 책들도 훑어봐야겠지만요.

로쟈 2006-12-07 09:43   좋아요 0 | URL
한국의 마루야마나 가라타니가 누구인지 간혹 궁금해집니다...

비로그인 2006-12-07 11:30   좋아요 0 | URL
로쟈님, 한국은 아직 마루야마나 가라타니 정도의 인물이 나올 시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엔 후쿠자와 유키치 급의 인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루야마 마사오 사상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각주(?)에 불과합니다.ㅋ

로쟈 2006-12-07 13:08   좋아요 0 | URL
지폐에 들어가 있는 걸로 하면 저희는 퇴계와 율곡이 있는데 말이죠...
 

비교적 잡다한 관심을 갖고 있는 편이지만 내가 (경제학서도 아닌) 경영서를 읽는 일은 거의 드물다. 피터 드러커의 책을 두어 권 읽어본 게 손가락에 꼽히는 정도이다. IMF 위기때 느낀 바가 있어서 (경영서가 아닌) 경제학서 몇 권을 구입했었지만 읽은 건 절반도 안되었다. 그러니 나의 경제적 형편이 언제나 바닥 장세에 머물고 있는 건 특별히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한데, 세상 혼자 사는 게 아니고 딸린 식구들이 있는 탓에 가계 '경영'에도 가끔은 눈길을 줄 수밖에 없다. <블루 오션 전략>(교보문고, 2005)을 읽어볼까란 생각을 한동안은 품고 다닌 것도 그 때문이다(책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구입은 무산됐지만). 

 

 

 

 

그런데, 어느덧 '80/20법칙'과 '블루오션전략'을 뛰어넘는 책이 나왔다고 한다. 이름도 요상하게 '긴꼬리 경제학'이다. '올해 최고의 경영서'라는 문구는 PR성으로 흘려보내려고 했지만, 지난주에 읽은 정재승 교수의 칼럼이 생각났다(사실 이 페이퍼는 그의 '나만의 ‘올해의 과학책’'들을 옮겨놓고 과학책들 얘기를 조금 늘어놓으려던 것이었다). 그는 무어라 적었는가? "지난 해 ‘괴짜경제학’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들이라면, 올해는 크리스 앤더슨의 ‘롱테일 경제학’(랜덤하우스)으로 이 겨울을 마무리하면 좋을 것이다. 2004년 <와이어드>에 실린 한 칼럼으로부터 출발한 이 책은 올해 전세계를 강타한 책인데, 좀더 일찍 나왔다면 ‘올해의 책’으로도 주저없이 추천했을 책이다. 이 책을 읽지 않으면 당신은 아직 20세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강조는 나의 것)    

마지막 멘트는 거의 협박성인데, 또 이런 발언을 접하게 되면 슬쩍 꼬리를 내리는 타입인지라 나는 조만간 <롱테일 경제학>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을 갖는다. 북데일리에 실린 리뷰기사를 미리 읽어보는 이유이다. 게다가 "블로거가 세상을 지배하다"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는 책이라니까 왠지 친근감도 느껴진다. 이런 블로그(서재)와 잘 맞는 책이란 뜻이 아닐까 싶어서...

북데일리(06. 12.06) '블로거가 세상 지배' 롱테일 이론 급부상

올해 최고의 경영서’라는 소문에 휩싸였던 크리스 앤더슨의 <롱테일 경제학>(랜덤하우스. 2006)이 드디어 출간됐다. 내용은 기대이상이다. 책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롱테일(Long Tail)’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롱테일’이란 간단히 말해 그동안 시장에서 무시되었던 틈새시장이 중요해지는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을 뜻한다. 저자 크리스 앤더슨은 디지털 시대에는 시장을 왜곡시켰던 장애물들이 제거되고 무한한 선택이 가능해짐에 따라 수요곡선의 꼬리부분이 머리 부분보다 길어진다는 사실에 착안해 ‘롱테일 이론’을 창안했다.

틈새상품 각각의 매출액은 적지만 그것들의 총합은 히트상품과 맞먹거나 오히려 능가하게 됨으로 틈새시장의 파급력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이론의 요지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소수의 히트상품(20%)이 매출액의 80%를 만들어 낸다는 ‘80/20법칙’으로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경제현상 ‘롱테일’의 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틈새상품은 항상 존재해왔지만 그것을 구매하기까지 소요되는 비용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고객들이 주도하는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인터넷이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침에 따라 히트상품 중심의 경제구도는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바야흐로 틈새상품들이 상업적인 세계와 비상업적인 세계가 교차하는 신규산업 분야에서 새롭게 창조되고 있다. 블로거들, 동영상 제작자들, 무명밴드들의 출연이 그것을 증명한다.

롱테일 효과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는 신문 즉 미디어와 일종의 ‘전쟁’을 선포한 블로거들의 영역확대라 할 수 있다. 2006년 현재 신문사의 매출은(미국기준) 1980년대 전성기 때와 비교했을 때 3분의1 이상이 떨어졌다. 노트북을 이용해 인터넷에 접속하는 사람들이 언론 권력을 쥐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은 ‘블로거’.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블로그를 만들면서 전문적인 저널리즘과 아마추어의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블로거들은 자신들의 관심사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만큼이나 정통해 있고 관련 기사를 매우 바르게 작성할 수 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저널리트들보다 정보를 더 잘 입수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법률학자 리처드 포스너는 ‘뉴욕타임스’ 북리뷰에 쓴 글에서 “블로거는 사실상 비용을 전혀 들이지 않고도 신문이나 TV 뉴스채널이 목표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세분화된 타깃 독자들을 목표로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블로그들은 네트워크TV와 같은 오래된 미디어 선구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곳에서 주류 미디어의 고객들을 한사람씩 틈새 미디어 쪽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블로거가 세상을 지배한다.

책은 저널리스트와 블로거의 영역변화를 보여주며 날카로운 예측을 내놓는다. “신문사는 낡은 타자기와도 같은 저널리스 1명을 고용하기보다는 특별한 지식을 가진 블로그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고용할 것이다”

이는 과장된 선전포고가 아니다. 책의 실례에 ‘오마이뉴스’의 성공사례가 포함 되어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초등학생부터 교수에 이르기까지 4만 명 이상의 아마추어 시민기자들이 하루에 송고하는 기사는 약 150개에서 200개. 이는 오마이뉴스 콘텐츠의 3분의2상을 차지하는 분량이다.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메인 화면 머리기사로 채택되면 그 기사를 쓴 시민기자는 2만원을 지급받는다.

보상이 이렇게 별 것 아닌데도 시민기자들이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용된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의 해답에서 롱테일 이론의 파급효과를 찾아 낼 수 있다. “시민기자들은 돈을 벌려는 게 아니라 세계를 바꾸기 위해 기사를 쓰고 있다”

영화제작자, 출판관계자, 블로거들에 이르기까지 상업적으로 성공하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는 꼬리부분의 생산자들은 역설적으로 성공의 기회를 잡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이제 창조적 생산에 필요한 도구들을 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생산 기술은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보급되었다. 책은 “롱테일은 창조적 생산의 도가니이자 아이디어들이 상업적인 장소”라는 정의와 함께 저널리스트와 블로거들의 영역 변화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미국 CBS 방송국의 유명 앵커인 댄 래더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결집된 블로거들의 지식을 당해낼 수는 없다”

개인 블로그에 올려진 내용들은 정확한 근거를 확보하지는 못하지만 블로그 세계에는 전통적인 미디어보다 더 뛰어난 오류 수정장치(수 많은 블로거들의 수정)가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책은 이런 사실이 저널리스트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엄청난 양의 정보를 모아 거르는 블로그의 놀라운 속도에 전통적인 미디어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수백만 개의 블로그들과 전문성을 지닌 수천만 명의 블로거들은 물론, 블로그에 댓글을 다는 독자들과 그 댓글의 정보들은 전기가 움직이듯 빠른 속도로 블로그 세계에 활기를 주고 있다.

시카고대학 연구원을 역임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블로그 세계의 경제시장은 정보가 분산되어 있고 주조정자가 없으며 블로그세계에 참가하는 각각의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지식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특징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정보를 효율적으로 담아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블로그 세계는 1천2백만 개나 되는 별개의 기업들이 아니라 1천2백만 명의 기자들이 움직이는, 그러면서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 하나의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작가와 편집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마치 미국의 AP통신이나 로이터가 상당수의 전문가들을 포함한 수백만 명의 기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다. 그들은 광고도 게재하지 않는 무료신문, 즉 자신들의 블로그를 위해 봉급도 받지 않고 일하고 있다”

블로그의 위력으로 탄생한 <롱테일 경제학>

블로그의 위력은 <롱테일 경제학>의 탄생경위에서도 확인된다. 저자 크리스 앤더슨은 ‘더롱테일닷컴(http://www.thelongtail.com)’이라는 블로그를 통해 ‘롱테일’ 개념을 공개했고 다양한 방문자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80/20법칙이 바뀌고 있다”는 주장이 담긴 글을 올리면 수십 명의 명석한 독자들이 덧글을 달아주거나 이메일을 보내주었고 자신들의 블로그를 통해 롱테일 법칙을 발전시킬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비공식적인 브레인스토밍에는 하루 5천명 이상의 방문자들이 참여하며 의견을 제시했다. 독자들과 함께 ‘롱테일’ 이론을 발전시켜 나간 셈이다. 저자 스스로도 “블로그를 통해 많은 독자들의 도움을 받아 내용을 확장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롱테일 경제학>은 ‘롱테일’의 본질과 실례 그리고 그 가능성을 심도 깊게 다룬 경제서다. 롱테일 현상이 기업경영에 미치는 영향, 인터넷시대가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변화 등은 일상에서 접하던 낯익은 것이지만 그것에서 ‘축출’한 개념들은 현시대를 읽는 핵심의 키워드다. “이 책은 세계화 시대를 대비하는 미디어 및 엔터테인먼트업계는 물론, 한국의 IT업계 전체가 읽어야 할 필독서다. 나아가 정치인, 경제인, 문화인 등 비즈니스와 경영전략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든 일독을 권한다.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책을 해독한다면 그 결실은 무궁무진하다” 중앙일보 멀티미디어랩 김택환 소장의 격찬에 이견 없이 동의한다.(김민영 기자)

06. 12. 07.

P.S. '꼬리'에 관한 우리의 전통적인 시각은 (부정적인 관점에서) '꼬리가 길면 잡힌다'란 말에 집약돼 있다. 한데 그 '긴 꼬리'가 21세기의 키워드가 될 수 있다니 세상은 참 길게 살고 볼일이다...

P.S.2. '밑에서 본 세상'이란 신기섭님의 진보넷 블로그에서 '롱테일 이론'에 대한 반론을 옮겨온다(永革님이 알려주셨다). 롱테일 이론은 바보 이론이라는 주장이다(롱테일 이론의 꼬리가 너무 길었던 것일까?). '계산'에 둔감한 나로선 어느 것이 잇속에 맞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정반대의 시각도 참조해둠이 옳겠다. 참고로, 필자는 <탈근대 군주론>(갈무리, 2005) 등을 우리말로 옮긴 바 있으며 그의 블로그에는 번역관련의 유용한 글들이 많이 게시돼 있다.   

 

 

 

 

바보가 주장하는 롱테일 이론(06. 07. 30)

이 글의 목적은 인터넷 현상에 대한 논평이 아니다. 뭔가 새로운 이론을 접할 때, 비판적 글읽기가 얼마나 절실한가를 말하려는 것이다. 제대로 읽어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고, 또 제대로 글을 쓸 수 있다.

롱테일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인터넷에선 인기 없는 물건들(긴 꼬리)의 판매량을 모두 합치면 최고 인기 제품(머리)의 판매량에 버금가는 상당한 규모를 형성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많이 팔리는 20%가 전체 매출의 80%를 차지한다는 식의 이론을 뒤집는 논리다. 롱테일 이론은 인터넷 시대에는 별 볼일 없는 다수가 힘을 발휘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너무 멋지지 않은가? “최첨단을 달리는 블로거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 앞장서서 이 이론을 주창하는 사람은 아메리카의 기술 관련 잡지 <와이어드>의 편집장 크리스 앤더슨이다. 그는 온라인 서점 '아마존', 온라인 음악 판매상 '아이튠스 뮤직스토어' 등의 사례를 자기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다. <롱테일>이라는 책도 냈다.

내가 보기에 이 현상은 새로울 게 없다. 규모가 큰 일반 상점에서도 나타나는 상식적인 현상이다. 많은 사람이 찾는 상점에서는 대중적 인기가 높은 물건만 팔리는 게 아니라 인기 없는 물건들도 꾸준히 팔린다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 다만 이 현상이 일반 상점에서 뚜렷하지 않은 건, 일반 상점은 비용 때문에 일정한 매출이 안되는 물건을 일정 시점이 지난 뒤 치워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라인 상점은 물건 전시 비용이 거의 0에 가깝기 때문에 잘 안팔리는 물건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롱테일 운운이 온라인에서만 가능한 건 다름 아니라 바로 ‘물건 전시 비용’ 덕분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현상을 쓸데 없이 과장할 일이 아니다.

아무튼 책이 나온 이후 롱테일 이론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온라인에서도 이 현상이 별로 두드러지지 않다는 실증적인 반박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의 리 곰스가 쓴 글이 대표적이다. 온라인에서도 히트 상품의 매출이 여전히 압도적이라는 것이다. 이 쯤 되면 롱테일 이론은 아예 용도 폐기되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곰스의 글에 대한 앤더슨의 반박을 읽어보니, 앤더슨은 '허풍쟁이 이론 장사꾼'이 아니라 바보다. 반박의 핵심은 판매 점유율 계산법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상위 10%의 매출이 얼마고 하위 80%의 매출이 얼마라는 식으로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물건이 1000가지인 상점의 상위 10% 곧 100가지가 전체 매출의 50%를 차지한다고 할 때, 물건 가짓수를 9000가지 늘려 전체를 10000가지로 만들면 100가지 곧 상위 1%가 전체 매출의 50%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되면 판매가 소수에 더 집중되는 것같은 착시현상이 나타나니, 계산을 %가 아니라 절대 수치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위 100가지의 매출 비중을 비교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계산하면 자신이 주장하는 롱테일 현상이 온라인에서 분명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앤더슨의 계산법은 확연한 롱테일 패러독스를 보면 자세히 나온다. 이 부분은 곰스에 대한 반박글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물론 둘 다 영어로 쓰인 글이다.)

그런데 이건 완전 바보나 할 수 있는 소리다. 물건 1000가지를 갖춘 상점에서 상위 100가지의 매출 비중이 50%였다고 치자. 그런데 이 상점이 새로 물건을 9000가지 들여 놓았다고 치자. 이렇게 늘렸는데도 상위 100가지의 매출 비중이 50%를 유지하려면 어때야할까? 다른 조건의 변화가 없다면 새로 들여놓은 9000가지 물건이 단 하나도 팔리지 않아야 한다. 이건 가능하지 않다. 하다못해 몇개라도 팔리고, 상위 100가지의 매출 비중은 줄게 된다. 하나도 팔리지 않을 것같으면 뭐하러 힘들여 9000가지를 새로 들여놓겠나? 하다못해 단 하나라도 판매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앤더슨은 '롱테일 현상'이 나타났다고 환호할 것이다. 이는 “나는 바보다”라고 외치는 격이다.

물론 앤더슨이 이런 말도 안되는 계산법을 제시하는 게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예컨대 아마존 서점에는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상당수는 더 이상 상품이 아니다.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에 목록에서 지워버리지 않은 것이지, 실제로는 전혀 판매되지 않고 재고도 없는 책들이다. 그러니 이런 것까지 모두 포함시켜서 %로 계산하면 상위 판매 품목의 비중이 과장되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사실 롱테일 이론은 이런 상품이 아닌 것들의 존재까지 '긴 꼬리'의 비중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이용해 먹는다. 그러면서도 판매 비중을 계산할 때는 이것들의 역효과를 차단하는 엉뚱한 계산법을 쓰자고 주장한다. 유리할 때 이용하고 불리할 때 빼는 이율배반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일반 상점에서도 어느 정도 나타난다. 교보서점이라고 이런 책이 없겠나? 다만 비중이 아마존에 비해서 낮고, 주기적으로 실시하는 총정리 때 서가에서 사라진다. 그러니 비교를 하려면 '아직 상품의 가치가 있는' 책들만 골라내서 비중을 계산해야지, 앤더슨처럼 '상위 100가지' 식으로 계산해선 안된다. 문제는 '아직 상품의 가치가 있는' 것들을 골라내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머리와 꼬리의 엄밀한 분석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불가능한 걸 하려고 바보 같은 계산법을 고안하는 이유야 뻔하다. 허황된 이론으로 장사하자니 '장난질'을 하는 것이다.

사실 문제는 앤더슨이 아니다. 누군가 '섹시한' 주장을 펴면 무조건 흉내내는 게 첨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진짜 문제다. 아메리카에서 이런 짓이 벌어지건 말건 신경 쓸 생각없다. 다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라도 좀 제대로 따져보고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수용을 하든 말든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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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6-12-07 01:12   좋아요 0 | URL
* 아 마지막에 나온 고양이가 넘 귀여워요. ㅋ 퍼 갈께요.

lastmarx 2006-12-07 01:57   좋아요 0 | URL
{오마이뉴스 이연호 대표}라 언제 대표가 바뀌었나 보죠.^^

로쟈 2006-12-07 08:29   좋아요 0 | URL
기자들도 실수를 하죠.^^ 수정해놓았습니다...

비로그인 2006-12-07 10:14   좋아요 0 | URL
"그들은 광고도 게재하지 않는 무료신문, 즉 자신들의 블로그를 위해
봉급도 받지 않고 일하고 있다"
공감합니다. 로쟈님


virtuepeak 2006-12-07 10:56   좋아요 0 | URL
제 경우에는, 롱테일 이론에 대한 반박이 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오마이뉴스도 성장은 이미 멈췄다고 하구요. 관련된 글입니다.
http://blog.jinbo.net/marishin/?pid=211

로쟈 2006-12-07 11:16   좋아요 0 | URL
Hansa님/ 봉급도 받지 않고 일하는 블로거들이 세상을 지배할 리는 만무하지만 그런 이들을 부려먹을 수 있다면 '지배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혁님/ (아마도 영구혁명에서 따오신 듯)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알려주신 글을 덧붙여놨습니다. 경제/경영은 결과로 말하는 분야니까 구구한 설들은 곧 평정이 되겠지요...
 

마지막달인 12월에 접어들면 저마다 느끼는 감회가 다르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신춘문예'의 계절로 다가서는 듯하다. 아마도 이번 주말 정도가 대부분의 신문에서 원고마감일 듯한데 그런 탓인지 한 오늘 아침신문에서도 이와 관련한 칼럼을 두 개나 읽을 수 있었다. 신춘문예라, 아주 오래전에 나도 한번 응모한 기억이 있지만 이제는 거의 '전설'로만 남아있다. 다시금 열정을 되살리기에는 '학기말'이라는 게 너무 할일이 많다(리포트와 시험 채점에 성적처리, 그리고 원고와 논문 들 마무리까지). 대신에, 지난주말에 읽은 기사들 중에 우리와는 또다른, 미국의 '글쓰기붐'을 다룬 것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이 시각 '막바지' 피치를 올리고 있을 시인/작가지망생 분들의 행운을 빌면서...   

경향신문(06. 12. 02) 도전하세요 ‘30일간의 소설쓰기’

모두들 ‘소설의 위기’라고 하지만 돌파구는 엉뚱한 곳에서 나올 수도 있다. 11월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추수감사절 연휴와 1년중 가장 극성스러운 쇼핑 기간이자 소설 마라톤이 열리는 시즌이기도 하다. 일반인들이 참여해 30일 동안 5만단어 분량(175쪽)의 소설을 쓰는 ‘나노라이모(NaNoWriMo)’ 모임이 미국 언론의 관심을 끌고 있다.

‘나노라이모(이하 나노·www.nanowrimo.org)’는 ‘전국 소설쓰는 달(National Novel Writing Month)’의 준말(http://www.nanowrimo.org/). 1999년 21명이 발족한 온·오프라인 모임이지만 지난해 5만9천명, 올해는 9만3천명으로 참여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미 워싱턴포스트는 “지금 같은 속도로 가입자가 늘어난다면 2027년쯤에는 전 미국인이 소설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경이감을 표했다. 흥미로운 문화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일반인들이 생업에 종사하면서 하루 평균 1,667개의 단어로 글을 쓰기란 얼핏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그럼에도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소설쓰기의 혹독한 고행에 뛰어들게 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편하게 쓰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소설쓰기에 덧씌워져 있는 일부 선택된 먹물들의 치열한 지적작업이라는 고정관념을 벗겼다.



7년 전 7월 샌프란시스코에 모인 발기인 21명은 ‘플롯이 없어도 문제될 건 없다(No Plot?, No Problem!)’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같은 제목의 간단한 소설교본을 출판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곧바로 집필에 돌입하는 무모한 방식이었다. 모임 장소에는 햄버거를 비롯한 정크푸드와 커피가 널린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고통스러울 줄 알았던 소설쓰기가 TV를 보는 것처럼 재미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야기가 누에에서 실을 뽑아내듯이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다음해 웹사이트와 함께 야후에 동아리모임을 발족시키면서 회원은 급속도로 늘어났다. 행사 시기도 우중충한 날씨로 외출을 자제하게 되는 11월로 옮겼다. 처음엔 정해진 분량이 없었지만 “우선 쓰고, 생각은 나중에 한다”는 모토에서 5만단어를 목표치로 정했다. 나노의 프로그램 담당인 크리스 배티는 이를 ‘소설의 혁명’이라고 지적했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분량이 지배하는 것으로 환치시킨 셈이다.

나노 측은 이 때부터 매년 10월 말 출정파티를 가진 뒤 11월 한달 동안 각자 집필에 돌입해 12월1일 5만단어를 채운 참가자를 우승자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두번째 해 참가자 140명 중에서 21명이 결승테이프를 끊었다. 배티는 “편집장 경험에서 볼 때 (분량에 대한) 타협할 수 없는 규칙과 무자비한 데드라인이라는 두가지 요소가 집중력을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참가자가 늘어나면서 지역별로 도우미를 두게 됐고 주말에는 함께 모여 각자 노트북을 폄으로써 고통과 즐거움을 나눈다.

워싱턴 근교에서 사는 댄 폴크스(28·국방부 공무원)는 출근 길 녹음기에 이야기를 구술하고 퇴근 뒤 정리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 집 컴퓨터에는 음성을 글자로 전환해주는 소프트웨어를 깔아놓았다. 그가 매일 아침 고속도로 위에서 구술하는 이야기의 분량은 2,000단어 정도. 그는 “개인 시간을 희생해야 하지만 일상 속에서 전혀 새로운 전망을 얻게 됐다”고 말했다.

나노 측이 아마추어 소설가들에게 건네는 최상의 충고는 “빨리, 멋대로 쓰라”는 것이다. 11월이면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의 많은 시간을 소설 집필에 할애하는 변호사 피터스는 “좋은 문장도 있고, 저속한 문장도 있지만 일단 쓰고 나서 돌아보면 달라진다”고 전했다. 두아이를 키우는 안젤라 필드(32)는 “일주일에 두번 출근하는 싱글맘이 소설을 쓸 수 있다면 누구라도 쓸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물론 탄탄한 구조의 정통 문학작품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추리소설이나 공상소설은 물론 등장인물의 이름만 바꿔놓은 자서전적 소설도 있다.

그렇다면 막무가내로 늘어놓은 5만단어 소설을 누가 읽을까. 많은 경우엔 읽을 사람이 없다. 하지만 일부는 출판하기도 한다. 엄격한 규율과 인내 속에 30일이 지나면 참가자들 중에서는 윤문작업에 매달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과정에서 옥고가 탄생하기도 한다. 기성 출판사에 작품을 보냈다가 퇴짜를 맞기도 하지만 주문형 출판 시스템을 택하기도 한다. 서커스 극단 광대 경험을 4부작으로 엮은 매어리 와이즈(54)는 노스 캐롤라이나의 주문형 출판사(www.lulu.com)를 통해 2년 간 300부를 팔았다. 비록 베스트셀러 작가는 아니지만 적어도 ISBN(책 뒤의 바코드)을 소유한 소설가가 된 셈이다.



미 전국적으로 나노 회원들이 모여 작업을 하는 오프라인 카페는 20개가 가동중이다. 커피를 홀짝이면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각자 하루치 분량을 채우는 회원들의 노트북 배낭마다 ‘No Plot?, No Problem!’ 스티커가 붙어있다고 한다. 나노는 매년 12월 첫주에 지역 별로 쫑파티를 한다. ‘30일 속도전’에 지친 심신을 한잔 술로 푸는 자리다. 이들에게 쥐어지는 최고의 상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는 만족감이라고 아이오와 라디오는 전했다.

나노 홈페이지에 따르면 29일 오전까지 2,400명이 결승점을 통과했고 1만5천명이 골라인에 접근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 나노 회원들이 11월 한달 동안 ‘생산한’ 단어는 8억2천2백75만9천6백26개라는 현황 수치도 올려져 있다. 모두가 걸작을 쓸 수는 없다. 하지만 소설 집필이라는 부르주아들의 고상한 작업이 상업출판시대를 맞으면서 ‘타락한 사회에 타락한 방법’으로 적응했듯이 인터넷과 대량소비시대에 나노와 같은 모임이 대안이 될 수도 있는 것 같다.(워싱턴|김진호특파원)

경향신문(06. 12. 02)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조언

어느 나라에서건 처음부터 전업소설가로 시작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생업을 갖고 있으면서 과외의 시간을 쪼개 소설가의 꿈을 키우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나노 회원들에게 주는 충고는 우선 ‘자기 규율’에 투철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나잇 가드너’를 비롯한 14편의 범죄소설로 대박을 터뜨린 조지 펠레캐노스는 31세가 될 때까지 단 한줄도 써본 적이 없었다. 처음 8편의 소설을 쓸 때까지는 전업 샐러리맨이었다. 그는 “그 때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작업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지금도 하루에 5쪽을 쓰는 것을 규칙으로 정해놓고 있다.

추리소설 베스트셀러 작가인 로라 리프먼은 첫 7개의 소설을 쓸 때까지 볼티모어 선지의 기자생활을 했다. 그는 소설집필을 헬스클럽에 다닌 것에 비유하면서 “충분히 자고 잘 먹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완벽주의는 적”이라면서 “일단 가급적 빨리 쓰는 작업을 마친 뒤 뒤돌아보면서 수정하는 것이 낫다”고 충고했다. 하루 1,000단어가 그의 규칙이다.

마리타 골든은 5편의 소설만을 쓴 비교적 과작의 작가였다. 그는 하루에 1~2시간, 일주일에 몇차례 집필한다는 느슨한 규칙을 갖고 있다. 교사이자 아기 엄마이기도 한 작가 태미 그린우드는 그날 그날 상황에 따라 집필시간을 정하는 게릴라형이다.

메릴랜드주 베데스다 작가센터의 교사 태미 그린우드는 “스스로 타협 불가능한 집필 일정을 세우는 게 첫걸음”이라면서 “달력에 매일 소화할 집필 분량을 적어놓고 실행하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역시 “중요한 것은 속도”라고 강조했다.

나노 사이트 편집장 크리스 배티는 ‘2만단어의 한계’를 가급적 빨리 벗어날 것을 권하고 있다. 한글과 영어의 차이가 있지만 70쪽 정도 되는 분량이다. 어느 경우에도 글쓰기는 해볼 만한 도전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권고다. 성공하면 전업 작가로 ‘인생 후반전’을 뛸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지만 실패하더라도 손해볼 것은 없기 때문이다.

 

 

 



나노와 비슷한 발상에서 매년 6월 영화대본을 집필하는 ‘광란의 대본(www.scriptfrenzy.org)’ 모임도 있다. 30일 간 대본 1편을 완성하는 모임이다. 이들을 겨냥한 듯 반즈 앤 노블즈나 보더스 등 워싱턴 시내 주요 서점 한 쪽에는 ‘웨스트 윙’을 비롯한 드라마 또는 영화 대본 원본을 비치해 놓고 있다.(워싱턴|김진호특파원)

06. 12. 06.

 

 

 

 

P.S. 문예창작을 따로 배우지 않은 경우에 소설을 쓰기 위해서 참조할 수 있는 '작법' 책들은 비교적 한정돼 있다. 물론 이번주가 마감일 신춘문예는 이미 물건너갔고, 내년을 준비하는 이들이라면 '소설작법' '소설창작' 혹은 '소설쓰기'란 타이틀을 단 책들을 기웃거려볼 수 있겠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나도 시중에 나와 있던 '시작법' 책들을 두루 섭렵한 적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시를 쓰는 데 큰 도움을 받지는 못했지만 시를 이해하는 데에는 유익한 착안점들을 많이 챙겨볼 수 있었다. 그러니 "실패하더라도 손해볼 것은 없"는 장사이다. 해서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한다(물론 나는 책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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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전철에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신작 <디파티드>에 대한 영화평론가 오동진의 리뷰를 읽었다. 알다시피 홍콩영화 <무간도>를 리메이크한 작품인데, 원작보다 못하다는 평들에 대한 반론을 겸하고 있었다('비열함'을 내세운 영화에서 '비장함'을 찾지 말라는 것). 나로선 두 영화 모두 아직 보지 못했지만 내주쯤에는 시간을 낼 수도 있을 듯하다. 더불어 생각난 것이 얼마전 2006 한국영화를 결산한 기사였다. 역시나 '조폭영화'가 올해도 대세였다는 것인데, 겸하여 읽어보면서 한해를 결산하기로 한다. 조폭영화의 원조인 홍콩/헐리우드 영화 두 편의 코드를 빌려서 말하자면, '무간도' 혹은 '디파티드'의 세상이 한국사회의 체감 현주소일까? 비장하거나 혹은 비열하거나...

 

 

 

 

경향신문(06. 12. 01) 2006 한국영화 ‘조폭’ 올해도 스크린 ‘접수’

2006년 한국영화는 무엇을 이야기했을까. 11월30일 ‘그해 여름’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아주 특별한 손님’이 개봉함으로써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편수가 101편에 이르렀다. 경향신문 영화팀이 이들 101편의 키워드를 분석, 집계한 결과 올해 한국영화는 ‘조폭’이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 키워드로 나타났다. ‘코믹’ ‘경찰’ ‘가족’ ‘살인’ 코드가 순서대로 그 뒤를 이어 ‘조폭·코미디’로 대표되는 충무로의 편식성이 통계로 확인됐다.(표 참조) 키워드 분석 결과가 우리 사회의 비루함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사회 모순 비추는 조폭 코드=올해 한국영화 중 ‘조폭’이 등장한 작품은 ‘야수’ ‘짝패’ ‘투사부일체’ 등 23편. 조직폭력배는 등장하지 않지만 ‘학원폭력’ ‘싸움’ 등의 키워드를 내재한 ‘방과후 옥상’ ‘플라이 대디’ 등을 포함시키면 28편으로 늘어난다. 전체의 30%에 가까운 영화들에서 폭력배와 싸움이 등장한 것이다. 본격 누아르영화인 ‘사생결단’ 같은 작품뿐 아니라 실향민의 아픔을 소재로 한국사회의 폐쇄성을 묘사한 ‘비단구두’에도 조폭이 나왔다.

2위를 차지한 키워드는 19편에 걸쳐 나타난 ‘코믹’. 역시 ‘조폭코미디’ ‘학원코미디’로 구분되는 영화들이 다수였다(‘학교’ 키워드 14편으로 7위). 18편에 등장한 ‘경찰’과 15개 영화에 나온 ‘살인’ 키워드 역시 ‘조폭’과 맞물려 우위를 점했다. 이들 중에는 ‘비열한 거리’ ‘폭력써클’ 등 장르를 스스로 비틀면서 폭력을 반성하고 사회 불안을 성찰하려는 노력을 통해 한국누아르의 장르적 성장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도 여러편 포진해있다.

반면 2001년 ‘친구’와 ‘두사부일체’의 흥행 이후 그 소재만을 빌려 재생산하려는 상업적 시도도 계속됐다. ‘투사부일체’와 ‘가문의 부활’ 등 조폭코미디는 평단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전작의 흥행세를 이었다. 세상을 들여다보는 수단으로 기능하든, 관객을 유인하기 위한 상업전략이든 한국영화들이 여전히 ‘조폭’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 없고 빈부차 심한 사회 모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사채업자’와 ‘부동산개발’이 상징하는 것=이같은 현상은 올해 한국영화들의 내부로 들어가보면 더욱 선명하게 확인된다. 101편 중 ‘사채업자’가 주요인물로 등장한 영화가 10편(‘잔혹한 출근’ ‘예의없는 것들’ 등)이고 ‘부동산 개발’의 어두운 이면을 다룬 영화가 6편(‘짝패’ ‘비열한 거리’ ‘해바라기’ 등)에 달한 것이 그 방증이다. 과거 영화속 조폭들이 영역 다툼, 업소관리 과정에서 암투를 벌이며 일반 시민들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지하세계를 묘사하는 데 동원됐다면 최근 들어서는 채무에 시달리고 집값에 눈물 짓는 서민들의 삶을 헤집는 인물들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철거촌 주민들과 용역깡패의 충돌이 영화에 종종 등장했지만 최근 영화 속 부동산 문제는 막대한 개발이익을 둘러싼 잔혹한 이권다툼에 초점이 있다. 불황일수록 대출업이 호황을 누리고 평생 일해 벌어봐야 부동산투자 한번 제대로 하는 것에 못미친다는 현실의 상실감, 그리고 현 정부의 최대 골칫거리인 문제들이 시나리오에 반영되고 영화에 대한 관객의 공감대로 이어질 것으로 충무로는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2006년을 반영하는 키워드들=이전에 보기 드물었던 ‘인터넷(커뮤니티)’(5편) ‘뮤지컬’(4편) ‘동성애’(4편) 코드가 늘어난 것도 흥미로운 현상으로 나타났다. 인터넷 자살 커뮤니티가 극의 발단이 되는 ‘무도리’,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연쇄살인이 벌어지는 ‘아랑’, 인터넷 야설·야동을 사극에 편입시킨 ‘음란서생’ 등이 화제를 모았다.

동성애가 부담스럽지 않은 소재로 받아들여지면서 이를 직접적으로 다룬 ‘후회하지 않아’가 현재 흥행에 성공하고 있고 ‘천하장사 마돈나’ 등 퀴어 코드 영화도 호평받았다. 뮤지컬을 중심으로 한 쇼비즈니스가 한국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이를 소재 삼은 영화가 태동하기 시작한 것도 새로운 흐름이다.

박정희 정권기 중 1960년대 말~70년대 초에 집중한 시대배경의 영화가 ‘아이스케키’ ‘잘살아보세’ ‘길’ ‘그해 여름’ 등 4편으로, 80년대 등 다른 과거를 배경삼은 영화보다 많았던 점은 해석의 여지가 많지만 현재 정치적 상황과 무관치 않아보인다. 이밖에 ‘달콤, 살벌한 연인’ ‘내 청춘에게 고함’ 등 5편에 걸쳐 등장한 키워드 ‘어설픈 지식인’과 ‘괴물’ ‘모두들, 괜찮아요?’ 등에서 나타난 ‘백수’ 키워드도 같은 맥락에서 현재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문화일보(06. 12. 05) 오동진의 동시상영관 - 디파티드

마틴 스코세이지가 생애 처음으로 리메이크한 영화 ‘디파티드’를 두고 평단 일부에서는 원작이 되는 홍콩의 ‘무간도’ 시리즈와 비교하며 ‘주인공인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연기가 양차오웨이의 눈빛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등의 얘기가 나오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좀 잘못된 비교라는 생각이 든다. 두 영화를 굳이 주연배우의 연기를 기준으로 삼아 비교하는 것도 수준이 좀 뭣하다는 느낌 때문이기도 하지만 두 작품은 아예 비교대상이 되는 영화가 아니라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리메이크이기는 하지만 ‘디파티드’는 ‘무간도’ 시리즈와 다른 선상에 서있는 작품이다.

‘무간도’ 시리즈는 홍콩 누아르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작품인 만큼 한마디로 비정함과 비장함으로 가득차 있는 영화다. 갱단인 삼합회와 홍콩 경찰조직에서 각각 10년 넘게 언더커버로 살아가고 있는 두 남자 진영인(양차오웨이)과 유건명(유더화)을 중심으로 역시 이들의 존재를 각각 유일하게 알고 있는 갱단 두목 한침(쩡즈웨이)과 경찰국장 황 국장(황추성)의 기묘한 심리전의 파노라마가 영화의 주된 줄거리다. 진영인, 유건명 두 남자 모두 오랜 세월을 나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감으로써 극도의 혼란에 빠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갖가지 비극과 통한의 사정을 감정적으로 교류하며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하는 동일시의 관계로 빠져든다. 삼합회 두목과 경착국장은 이들의 정신적 아버지로서 모두의 비극을 조종하고 동참한다. 네 사람은 마치 각각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피할 수 없는 두 가문의 대결을 펼치는 것처럼 보인다.

‘비정도시’의 이미지를 스타일리시하게 펼쳐 놓았던 ‘무간도’ 시리즈에 비해 마틴 스코세이지의 ‘디파티드’는 비정함이나 비장함 같은 분위기는 거의 삭제해 버렸다. 대신 스코세이지는 자신이 지금껏 만들어 왔던 갱스터 영화들 -‘비열한 거리’나 ‘좋은 친구들’‘카지노’-의 특유함 그대로, 인물 모두에게 ‘비열함’을 가득 부여한다. ‘디파티드’의 모든 캐릭터들은 서로를 속고 속이며, 각자의 생존만을 유일한 목표로 살아가는, 비열한 거리의 비열한 인물들로 그려질 뿐이다. 삼합회에서 언더커버 생활을 하는 디캐프리오 역시 공황에 가까울 만큼 정신적 공포에 시달리는 캐릭터가 강조되는 쪽으로 묘사되고 있다. 경찰조직에 들어 간 갱단원 맷 데이먼의 비열함은 ‘무간도’의 유더화와 가장 확실한 차별성을 보인다.

디캐프리오를 사지로 내몬 경찰국장 마틴 쉰이나 맷 데이먼을 조종하는 조직의 두목 잭 니컬슨에게서 홍콩영화에서의 파더 피규어(아버지상)를 발견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절대 무리다. 한 사람은 상사로서의 카리스마를 잃고 우유부단하게 굴고, 또 한 사람은 자신이 수십년간 자식처럼 키운 인물을 스스럼없이 FBI에 넘기려고 할 정도다. ‘디파티드’에선 아버지와 아들 간, 혹은 적이지만 가장 가까운 남자 두 사람 간의 기묘한 우정 따위란, 그래서 더욱 비장하고 비정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비열하고 남루한, 3류인생의 끝자락들만이 펼쳐질 뿐이다.



비장한 매력이 철철 넘치던 ‘무간도’에 비해 새로 만들어진 ‘디파티드’는 그 매력이 다소 반감됐을지언정 보다 현실의 삶에 가까워진 느낌을 준다. 실제로 우리들 삶의 방식은 비장함보다는 비겁함 쪽에 더 가까운 법이다. 마틴 스코세이지 역시 그 점을 가장 많이 의식한 것처럼 보인다.

‘디파티드’를 보고 있으면 그래서, 우리들 삶의 치졸함이 느껴진다. 새삼 이 세상이 비열한 거리로 가득 차 있음이 느껴진다. 그 더럽고 스산한 풍경이 오히려 옆에 앉은 사람에게 몸을 더 가깝게 붙이도록 만든다. 진정한 리메이크는 이런 것이다. ‘디파티드’를 ‘무간도’와 같으면서도 다른 영화라고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06. 1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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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12-06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동진 기자가 잘못 안 듯해요. <케이프 피어>는 62년 로버츠 미첨과 그레고리 팩이 나왔던 동명 흑백 영화의 리메이크판이라고 하네요.

로쟈 2006-12-06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억이 나네요. '생애 처음으로 리메이크한 홍콩영화'라고 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