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배송받은 책 중의 하나는 들뢰즈의 <푸코>(동문선, 2003)이다. 다른 판본인 <들뢰즈의 푸코>(새길, 1995)를 갖고 있고 또 동문선의 책이 출간 당시 워낙에 '고가'여서 따로 구입하지 않았었는데, 영역본을 주대본으로 한 <들뢰즈의 푸코>가 부정확한 대목이 여럿 된다고 하여 불어본을 옮긴 <푸코>까지 주문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진 이유는 얼마전에 <바보배>(안티쿠스, 2006)도 출간된 김에 모셔두기만 했던 <광기의 역사>(나남출판, 2003)를 읽어볼까 해서 러시아어판과 같이 꺼내두었다가 이왕이면 <지식의 고고학>을 한번 더 읽고 시작하는 게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푸코>의 첫장은 <지식의 고고학>을 다루고 있다.

 

 

 

 

기억에 나는 그 책을 10년쯤 전에 영역본과 같이 읽었더랬다. 마치 10년전 일기를 꺼내읽듯이(그맘때 나는 갓 서른이 된다는 묘한 설레임을 갖고 있었을까?) 다시 책을 손에 든다. 그리고 <지식의 고고학>에 대한 리뷰들을 잠시 찾아보니 역자인 이정우 원장의 글이 눈에 띈다. 책에 대해서는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고전"이라는 강조밖에 하고 있지 않지만, 워밍업으로 읽어봐도 좋겠다.

경향신문(04. 10. 15) 담론의 논리적 기초 서술

1987년 6월 항쟁을 전후해서 한국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후기 산업자본주의 시대, 정보화 시대, 포스트모던 시대, 탈근대의 시대 등 무엇으로 부르든 이 시대는 군정(軍政)시대와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다양한 특성들을 보여준다.

시대의 이런 변환과 더불어 철학에서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그것은 곧 19세기적인 사유 양태들(현상학, 해석학, 변증법 등)에서 새로운 사유양식들로의 이행이다. 이 새로운 사유양식들은 매우 이질적이어서 일반화하기 힘들지만, 이 사유들이 군정시대와는 크게 다른 90년대를 사유하기 위해서 논의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흐름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것은 미셸 푸코이다.

유신 이후 한국 사상을 이끌어간 것은 마르크시즘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디즘, 데리다의 탈구축주의 등이 주도해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푸코는 알튀세와 더불어 정확히 그 사이에 위치한다.

한국에서 푸코의 사유는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중반에 집중적으로 연구되었는데, 이 시대는 타자들(=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던 시대이며, 담론계가 전반적으로 재편성되던 시대이며, 마르크시즘 이후의 새로운 실천 방식들이 모색되던 시대이다. 이것은 곧 두 적대세력의 시대, 과학성의 시대, 혁명의 시대로부터의 단절 또는 변환을 함축한다.

한국에서 푸코의 사유는 무엇보다 권력의 이론으로서 받아들여졌다. 즉 푸코의 사유는 ‘지식-권력’의 틀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때로 이 생각은 사회학적 환원주의와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곧 푸코에게서 ‘지식(savoir)’의 개념이 정확히 무엇인지가 잘 이해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이것은 곧 한국에서 푸코는 보다 현실적인 정치문제와 관련해서만 다루어지고 그 과학사적 맥락이나 철학적 토대는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음을 함축한다. 이것은 또한 푸코 사유에의 보다 지속적인 관심과 선용(善用)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지식의 고고학’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중요한 위상을 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저작은 푸코 사유의 허리에 위치한다. 이전의 고고학적 저작들(‘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 ‘말과 사물’)과 이후의 계보학적 저작들(‘감시와 처벌’ ‘지식에의 의지’) 및 윤리학적 저작들(‘쾌락/기쁨의 선용’ ‘자기 돌보기’) 사이에 위치하면서 푸코 사유의 전반적인 문제의식, 논리적 기초, 원리적인 개념들, 중요한 방법들 등을 전반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저작이다.

이 저작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담론’이다. 90년대에 새롭게 도래한 단어들 중 아마도 가장 넓게 퍼진 단어들 중 하나가 담론일 것이다. 이 개념은 곧 과학적 명제의 차원이 아니라 보다 넓은 언어적 차원을 가리킨다. 즉 담론 개념은 90년대에 있었던 문화적 변화들을 단적으로 응축하고 있는 개념인 것이다. ‘지식의 고고학’이 새롭게 도래한 우리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고전인 것은 이 때문이다.(이정우|철학아카데미 원장)

06. 12. 14.

P.S. <지식의 고고학>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은 그의 콜레주 드 프랑스의 취임강연인 <담론의 질서>(서강대출판부, 1998)이다. 이 또한 새길사(1993)에서 먼저 출간되었던 책이고 나는 그 판본으로 읽었었다(영역본에는 두 텍스트가 합본돼 있다). 김화영 교수의 번역으로 계간 <세계의 문학>에 게재된 적도 있다. 게리 거팅의 <미셸 푸코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백의, 1999)도 <지식의 고고학>에 대한 유용한 안내를 포함하고 있다.

Археология знания

러시아에서 내가 구한 책들 가운데 아끼는 책의 하나는 바로 러시아어판 <지식의 고고학>(2004)이다. 마침 내가 체류 중에 책이 나왔고, 장정도 예쁘게 돼 있다. 416쪽 분량이니까 두께도 만만치 않지만(국역본보다 왜 더 두꺼운지는 아직 모르겠다. 비록 들뢰즈의 <지식의 고고학>론이 부록으로 포함돼 있긴 하지만), 가격은 저렴했다. 여하튼 읽을 책들은 차고 넘치지만 2007년 1월에 읽을 책으로 <지식의 고고학>을 미리 예약해 두기로 한다. 10년쯤 시간을 되돌려 (비록 '고고학적 시간'은 아니더라도) '회고적 시간'을 잠시 살아보는 것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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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14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난해하던데요 ;;;

로쟈 2006-12-15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역자였나) '회색'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풍부한 사례들을 다룬 푸코의 다른 저작들에 비하면 난해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 게 오히려 매력이기도 하구요...
 

한 영화의 자막을 번역하느라고 하루종일 집안에 붙박혀 있었다. 간간히 딴짓을 하기도 했지만 하루종일 한 가지 일에 매달려본 것도 오랜만인 듯하다. 그게 다 학기가 거의 종료된 시점이어서 가능한 일이리라. 어쨌거나 교정을 보기 전에 잠시 머리도 식힐 겸 단순작업을 하나 해둔다. 마땅한 일이 뭐가 있을까 둘러보다가 집어든 책이 두달 전에 출간된 장경렬 교수의 <코울리지: 상상력과 언어>(태학사, 2006)인데, 책은 장경렬(영문학), 김상환(철학) 두 교수가 기획위원을 맡은 '알레테이아 총서'의 첫권이었다.

'단순작업'이라고 한 건 책머리에 실려 있는 그 총서의 발간사를 옮겨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요즘도 새로운 기획의 총서들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발간사'를 표나게 내세우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데다가 관심 또한 나의 전공/적성과 맞아떨어지기도 해서 수고를 무릅쓸 만하다. 더불어, 총서의 제2권으로 근간목록에 올라 있는 김상환 교수의 <들뢰즈: 차이와 반복>의 출간을 고대하는 마음도 그 수고에 보태도록 한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인문학의 관점에서 볼 때 20세기의 가장 의미있는 사건 가운데 하나는 문학과 철학의 화해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후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던 문학과 철학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상대의 존재가 필수적임을 인정하고 서로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인문학적 사유방식들이 새롭게 조명되거나 싹트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에도 여전하다. 변화가 있다면 다양한 사유방식들에 대한 접근과 논의가 어느 때부터인가 개별 문화권을 뛰어넘어 세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실로 21세기는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새로운 노마디즘의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정황은 수많은 인문학도들에게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심각한 고뇌에 빠져들게 한다. 노마드의 삶은 본질적으로 방황의 삶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너무도 다양한 사유방식들 가운데 어느 쪽을 향해 갈 것인가 설사 선택이 문제되지 않더라도 문제의 사유방식을 어느 방향에서 접근해야 할 것인가, 또한 다시금 어느 사유방식을 향해 걸음을 옮겨야 할 것인가 등등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태학사의 '알레테이아 총서'는 이런 고민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 준비된 것은 아니다. 다만 노마드의 삶 앞에 펼쳐진 황야 저편의 밤하늘에 길잡이별을 띄우는 것이 어떤 형태로든 가능하리라는 믿음에서 준비된 것일 뿐이다. '알레테이아 총서'가 기본적으로 하나 또는 둘의 사유 개념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함은 이 때문이다. 요컨대, 인문학의 핵심 개념에 대한 이해가 일종의 길잡이별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알레테이아 총서'는 출발한다.(*아래 사진은 하이데거 부처와 라캉)

-하이데거는 '진리'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의 '알레테이아'를 어원에 충실하게 번역함으로써, '인식과 사실의 일치'라는 전통적 진리 개념을 뛰어넘어 '존재자의 탈은폐 또는 드러냄'으로서의 '진리'야말로 인문학의 다양한 사유 방식에 접근하는 데 기본원리가 된다고 믿기에 우리는 알레테이아를 총서의 명칭으로 택한다. '존재자를 드러내는 탈은폐'를 가능케하는 길잡이별을 저 노마드의 밤하늘에 띄우기 위해, 또는 그러한 별을 찾기 위해, '알레테이아 총서'는 존재할 것이다.

 

 

 

 

'알레테이아'로서의 진리에 대한 하이데거의 주석은 <이정표2>(한길사, 2005) 중 '진리의 본질에 대하여'란 글에 나온다. 자유를 '존재자를 존재하게 함'으로 재정의하면서 하이데거는 다시 이 '존재자를 존재하게 함'이란 말을 "각가의 존재자가 이미 그 안에 들어서 있고 또한 각각의 존재자가 이를 테면 수반하고 있는 저 열려 있음에 대해 관여함을 의미한다"고 적는다. 거기에 이어지는 대목이 '알레테이아'에 관한 구절이다.

"이 열려 있는 장을 서구의 시원적 사유는 타 알레테아, 즉 '비은폐적인 것'으로개념 파악한 바 있었다.우리가 알레테이아진리 대신 오히려 비은폐성으로 번역한다면, 이러한 번역은 그 낱말에 더 충실할 뿐더러, 진술의 올바름이란 의미의 진리의 통례적 개념을 달리 사유해보고 존재자의 탈은폐성과 탈은폐라는 저 아직 개념 파악되지 않은 것을 소급해 사유해보라는 지침을 포함한다."(107쪽)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자유 -->존재자를 존재하게 함 --> 존재자를 열려있는 장으로 데려감 --> 탈은폐(밝게 드러냄)가 된다. 곧 '밝게 드러냄'은 자유의 행사이자 진리의 당당한 자기주장이다(누드 비치가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그러한 '열림터'를 마려하는 게 '알레테이아 총서'의 역할이기도 하겠다. 책이 나오는 추세가 좀 굼뜨고 총서의 목록이 다 카바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여하튼 몇 걸음을 가더라도 족적은 남지 않겠는가...

06.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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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3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2-13 11:46   좋아요 0 | URL
**님/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읽어보니까 그것 말고도 오타 투성이네요. 제 타이핑 실력이 예전 같지 않은 모양입니다.^^;
 

대학가는 지난주에 종강을 하고 이번주가 대개 시험주간이다. 월요일 강의를 나가던 학교에 마지막으로 나가 시험감독을 하고 돌아오다가 교보에 들러 (두리번거리다가) 두 권의 책을 샀다. 양서부에서 먼저 산 책은 데이비드(데이빗) 호이의 <비판적 저항(Critical Resistance)>(The MIT Press, 2005). 저자는 현재 캘리포니아대학의 철학과 학과장을 맡고 있는 모양인데, 이번에 다시 찾아봤지만 지명도에 비해서 저서가 몇 권 되지 않는 '고마운' 학자이다. 이번에 산 것까지 포함하면 그의 주요 저작은 모두 갖고 있는 것이 된다(그래봐야 네 권이지만).

책의 부제는 '포스트구조주의에서 포스트-비판'까지로 돼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들뢰즈의 니체주의에서 지젝까지를 '비판적 저항'이란 키워드를 통해 관통하고자 한다. 일단은 책이 다루는 범위가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도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했다(물론 복사할 경우보다는 2배 정도 비싸지만). 게다가 저자인 호이와는 '안면'도 있고. 그래봐야 책을 통한 안면이지만.  

데이비드 호이는 <해석학과 문학비평>(문학과지성사, 1988)으로 국내에 소개된 학자인데, 원제가 <해석학적 순환(The Critical circle)>(1978/1982)인 이 책은 "독일의 비판 철학자 하버마스와 미국의 비평가 허쉬의 해석 이론들을 가다머의 이론과의 차이로 분석한 후, 롤랑 바르트, 폴 리쾨르,자크 데리다 및 미국의 신비평과 프랑스의 구조주의, 독일의 수용미학을 해석철학과 대조한다."

그러니까 이 책 한권을 제대로 혹은 음미하며 읽으려고 해도 신비평과 구조주의와 수용미학과 해석학을 모두 건드리게 된다. 내가 그러한 비평이론과 철학적 조류들에 견문을 갖게 된 것은 다 이런 '문학이론서'를 읽으면서, 혹은 읽기 위해서였다(가장 대표적으론 테리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을 들 수 있는데, 나는 학부시절부터 문학이론세미나 '교사'를 하면서 이글턴의 책을 포함해 국내에 출간돼 있는 모든 문학이론입문서들을 최소한 두 번, 많게는 네댓 번씩 읽었다). 호이의 책은 '해석학'을 카바하는 기본 연장이었다. 그의 나머지 책 두 권?

하나는 저작이 아니라 그가 편집한 책 <푸코: 비판적 독해>(1986)인데, 분량은 두껍지 않지만 쟁쟁한 논자들의 푸코론을 편집한 책이고 호이는 그 서문과 함께 '푸코와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다룬 논문을 썼다. 푸코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에 대학가 서점들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책이다. 나도 그때 구입했었고.

   

그리고 다른 한권은 하버마스 전문가인 토마스 맥카시와 공저한 <비판이론>(1994). 이미지의 사이즈가 들쭉날쭉이군. 여하튼 리처드 로티의 서평을 잠시 인용하면 이렇다: “The two authors disagree strongly about important philosophical issues, but each takes the other's position and arguments seriously. The book as a whole helps greatly in clarifying what is at stake in discussions of universalism versus historicism. The level of debate is as high as might have been expected from two of America's best expositors and interpreters of recent European philosophy. . . . The so-called Habermas-Foucault debate has been at the centerof philosophical discussion in Europe for a decade, and this book is an admirable overview, and continuation, of that exchange. It is a hopeful sign of long-overdue internationalization that a debate between an important French and an important German philosopher should be continued in English with no diminution in either sophistication or acuity.”(Richard Rorty - Ethics)

호이와 맥카시 두 사람이 각각 푸코와 하버마스 라인을 대표했다(도서관에서 복사한 책인데, 이건 또 어디에 처박혀 있나). 생각난 김에 적어놓자면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새물결, 1999)이 푸코와 하버마스 논쟁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여하튼 이렇게 네 권이 호이의 주저이다. 단독저서로 치면 <해석학적 순환> 이후에 <비판적 저항>으로 건너뛰는 것이니 이 얼마나 고마운 경우인가. 이 책에 대한 맥카시의 추천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포스트-니체주의 프랑스 철학에서 저항의 이론들에 대한 호이의 통찰력있고 다면적인 설명은 독보적이다." 북치고 장구치고...

 

호이의 책을 사들고 인문 신간 코너를 둘러보다가 발견한 책은 <스피박의 대담>(갈무리, 2006). 제목 그대로 가야트리 스피박의 대담집이다. 책의 원제는 '포스트-식민주의 비평가(The Post-colonial Critic)>(1990)이고 엊그제도 다른 책들을 찾다가 책장에서 본 바로 그 책의 번역본이었다(나는 몇년 전에 책을 복사했었다). 난해하다는 평판이 자자한 스피박 입문서로서는 제격인 책. 

 

그렇다면, 여기서 퀴즈. 왜 이 페이퍼의 제목은 '데이비드 호이와 가야트리 스피박'인가? 호이의 책엔 스피박이 전혀 언급되지 않으며, 스피박 또한 호이를 다룰 일이 없는데 말이다. 둘 사이의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이 연결고리는 저자들과는 무관하다. 바로 역자가 그 고리이기 때문이다. <스피박의 대담>은 호이의 <해석학과 문학비평>을 우리말로 옮긴 이경순 교수의 번역이다. 해서, 링크 이론을 적용하자면 호이와 스피박은 2촌관계쯤 되겠다.   

 

 

 

 

어쩌다 보니 스피박의 책들은 나올 때마다 언급하게 되는데,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을 제외하곤 나와 있는 책들은 모두 원서와 함께 책장에 꽂아두고 있다. 그런 '인연'에는 물론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의 영역자에 대한 신뢰가 한몫한다(이 무명의 영문학도가 붙인 장문의 서문은 학계의 '전설'이 되었다). <스피박의 대담>은 이전에 나온 스피박 입문서 <스피박 넘기>의 저자 스티브 모튼이 "스피박을 처음 읽는 이에게 가장 좋은 책"이라고 추천한 책이다. 사실 그런 입문서적 '기질'은 대부분의 대담들이 공유하고 있는 자질이기도 하다. 하니 스피박에 처음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이 책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찾아보니, 스피박의 최신간은 <어느 학문의 죽음(Dearh of a disciple)>(2003)인데, 주디스 버틀러가 쓴 아래의 서평을 보니 그 '어느 학문'이란 '비교문학'을 뜻한다. 르네 웰렉 강의를 책으로 펴낸 얇은 책이다.

"Gayatri Chakravorty Spivak's Death of a Discipline does not tell us that Comparative Literature is at an end. On the contrary, it charts a demanding and urgent future for the field, laying out the importance of the encounter with area studies and offering a radically ethical framework for the approach to subaltern writing. Spivak deftly opposes the 'migrant intellectual'approach to the study of alterity. In its place, she insists upon a practice of cultural translation that resists the appropriation by dominant power and engages in the specificity of writing within subaltern sites in the idiomatic and vexed relation to the effacements of cultural erasure and cultural appropriation. She asks those who dwell within the dominant episteme to imagine how we are imagined by those for whom literacy remains the primary demand. And she maps a new way of reading not only the future of literary studies but its past as well. This text is disorienting and reconstellating, dynamic, lucid, and brilliant in its scope and vision. Rarely has 'death'offered such inspiration." -- Judith Butler, UC Berkeley

 

 

 

 

방티겜과 바이스슈타인의 비교문학 개론서들이 소개된 지 20여 년쯤 된 것 같은데, 그 마지막 자리에 놓일 만한 책이겠다. 한 학문의 죽음(위기)과 새로운 출발점. 끝으로 자신의 이론적 출발점에 대한 스피박의 자전적 고백을 (재)인용해놓는다.

"제가 하는 일이란 저의 학문상의 상태를 분명히 하는 데 있습니다. 저의 입장은 일반적으로 말해 반동적인 것입니다.저는 맑스주의자들에게는 너무나 기호적으로 비치고,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너무나 남성적으로 비치고, 토착 이론가들에게는 지나치게서구이론에 물들어 있는 것으로 비칩니다. 저는 이것이 불편하면서도 기쁩니다."(16쪽)

06.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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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티우스 2007-04-23 23:14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푸코-하버마스 논쟁을 다루고 있는 정일준씨 편역의 책 제명은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정 : 푸코-하버마스 논쟁 재론>입니다... <- 전망>이 아니고요... 오타이네요... ^^

그리고 책은 3부로 나뉘어져서

1부는 푸코의 논문 혹은 대담 네 편으로 <니체, 프로이트, 맑스>(1964/1967), <비판이론과 지성사>(1983), <정치와 윤리>(1983) 그리고 <도덕의 회귀>(1984),

2부는 역시 푸코의 칸트 혹은 계몽주의 논문 3부작
<비판이란 무엇인가?>(1978)
<혁명이란 무엇인가?>(1983/1984)
<계몽이란 무엇인가?>(1984) 및
드레퓌스/래비노우의 <성숙이란 무엇인가?>(1986),

마지막 3부가 바로 푸코-하버마스 논쟁으로서
하버마스의 <현대의 심장을 겨냥하여>(1986),
낸시 프레이져의 <푸코는 소장 보수주의자인가?>(1986),
디디에 에리봉의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1994),
드미니크 쟈니코의 <합리성, 힘, 권력>(1992),
프랑수아 에발드의 <외부가 없는 권력>(영역1992)로 구성되어 있는데...

논문의 선정은 매우 좋다. 특히 <비판이란 무엇인가?>는 푸코의 선집인 Dits et Ecrits에 수록되지 않은 희귀 논문으로서 영역으로부터의 중역이나마 내용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참고로 <혁명이란 무엇인가?>와 <계몽이란 무엇인가?>는 불어본 이름이 Qu'est-ce que les Lumières로서 같은데(내용은 다르다), 논문의 내용에 따라 전자를 <혁명이란 무엇인가?>로 번역했다.

다만 지적한 것처럼 영역으로부터의 중역인 것이 흠이나, 책이 발행된 것이 1999년임을 고려하면 당시의 사정으로서는 최신 논쟁의 소개 및 정리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번역 자체는 그리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나쁜 번역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주 뛰어난 번역이라 하기도 역시 어려운데 ... 최악은 아니지만 최상도 아닌 중간에서 위 아래로 논문에 따라 많이 편차가 지는 번역이다...

다만 결정적으로 아쉬운 것은 이 논쟁의 핵심 개념인 modernité, actualité, contemporaineité 등이 구분없이 맥락에 따라 근대성, 현대성 등으로 일관성 없이 번역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칸트 계몽주의를 다루는 3부작 논문에서 그러한데, 이는 논문의 핵심 논점을 - 우리말로는 -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오류이다.

이 세 단어를 예를 들면, 근대성(혹은 모더니티), 시사 문제(혹은 당대의 현실문제 전체를 이르는 광의의 시사성, 당대성), 현대성(혹은 동시대성) 등으로 - 여하튼 한 저작, 논문 내에서 - 일관적으로 번역하지 않는다면, '근대성'의 개념을 옹호하는 사상가로서의 푸코를 결코 이해할 수가 없다(따라서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푸코에게 포스트-모더니티는 일종의 '사이비 문제'로 간주된다).

이상의 지적된 점들만을 제외한다면 논문의 선정 및 시의성은 매우 적절한, 유익한 추천할 만한 책이다.

로쟈 2006-12-12 12:58   좋아요 0 | URL
오타는 수정했습니다. 거기에 발빠른 서평까지 보태주셨네요.^^ <비판이란 무엇인가>는 불어에서 직역된 글이 이상길 교수의 번역으로 <세계의 문학>에 게재된 적이 있습니다...

테렌티우스 2006-12-12 22:01   좋아요 0 | URL
서평까지는 전혀 아니고요, 다만 글을 읽으시는 분들을 위한 정보 차원에서 간략하게 적어본 것입니다. 읽으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저나 로쟈님에게도 기분 좋은 일이지요...^^
 

플라톤의 고전 <향연>(문학동네, 2006)이 새롭게 번역돼 나왔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만화가 조안 스파르의 그림과 낙서가 보태져 있다는 것. 그러니까 좀 특이한 '일러스트레이트' 버전의 <향연>이고 그런 만큼 가장 접근하기 쉬운 '플라톤'이 될 듯하다. 게다가 재기발랄한 우리말로 옮겨져 있다고도 하니까 '고전 멀미증'을 가진 독자들에게 희소식이 될 듯하다. 물론 고전으로의 여행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에 한에서. 참고로, 자세한 리뷰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문화일보(06. 12. 08) 그림-낙서와 만난 향연, 플라톤이 술∼술 읽히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향연’은 그의 대화편 중 가장 아름다운 문체와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향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숙독한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고전이란 것이 항용 그렇듯이 ‘누구나 다 좋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면 ‘향연’ 역시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 책은 전혀 다르다. 우리가 고전에 대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선입견들, 즉 딱딱하고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한순간에 날려버린다. 그럼, 기존의 ‘향연’과는 텍스트 자체가 다른가. 그렇지도 않다. 플라톤의 ‘향연’을 우리말로 옮긴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어떻게 손에 잡는 즉시 놓기 힘들 정도로 읽는 이를 빨아들이는 것일까.

그 답은, 조안 스파르가 거의 매 장마다 그려넣은 ‘그림과 낙서’ 때문이다. 유럽 만화계에서 뛰어난 아티스트로 주목 받는 조안 스파르는 프랑스의 니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에콜데보자르(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한 인물. 그의 기발한 독법(讀法)이 담긴 그림과 낙서가 2500여년 전의 ‘향연’을 고색창연한 고전에서 생기발랄한 ‘오늘의 책’으로 되살려놓았다.


‘향연’은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당시 그리스 사회의 유명인사들이 술잔을 기울이면서 각자 돌아가며 ‘사랑의 신 에로스’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전설 같은 이야기, 즉 원래 인간은 네 개의 손과 네 개의 발, 하나의 머리에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우스의 번갯불에 몸이 두 동강 나서 지금과 같은 신체를 갖게 됐다는 이야기도 ‘향연’에 나오는 것이다.

‘향연’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아리스토파네스는 “따라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게 됐는데 그 욕망이 바로 인간의 사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인가. 하지만 ‘향연’에선 너무나 진지하게 이에 대한 논증을 거듭 늘어놓는다. 그 중 하나는 ‘원래 남성과 남성이 한 몸이었다가 반으로 나뉜 남성은 남성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대목이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성인 남성과 소년의 관계가 단순한 사제지간 이상이었으며, 성적인 면모도 내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심지어 ‘향연’의 핵심인 소크라테스의 연설에서는 이같은 관계를 통해서만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아마도 ‘향연’처럼 동성애에 대해 편견 없이 다루는 고전도 없을 것이다.

‘향연’은 이어 기술의 원리로서의 사랑, 진리에 이르는 길로서의 사랑, 쾌락으로서의 사랑, 사랑 받는 이의 사랑, 사랑을 주는 이의 사랑에 대해 각 등장인물들이 장황하리만큼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예외없이 조안 스파르의 기발한 그림과 낙서가 따라붙는다. 조안 스파르는 플라톤 철학에 대한 어떠한 이론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시각으로서만 텍스트를 이해한다. 그는 등장인물들을 벌거벗은 채 엉켜 있는 동성애자로 그리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다. 또 소크라테스를 능수능란한 언변으로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의뭉스러운 늙은이’로 묘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같은 해석에 단순히 비아냥만 깔려 있는 게 아니다. 그의 기발하면서도 솔직한 발상은, ‘향연’의 등장인물들을 마치 우리가 바로 어젯밤 술자리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인물들인 것처럼 생생하게 되살려 놓고 있다. 또 하나, 이 책의 흡인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역자의 탁월한 번역이다. ‘향연’의 원 텍스트뿐 아니라 조안 스파르의 그림에 붙은 ‘낙서’까지 얼마나 재기발랄하게 우리말로 옮겨 놓았는지 절로 감탄하게 된다. 한마디로, 이 책에서 독자들은 딱딱하고 지루한 철학이 아닌, 부담없이 즐기고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철학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김영번 기자)

06. 12. 10.

 

 

 

 

P.S. 그간에 가장 많이 읽히던 <향연>은 박희영 역의 <향연>(문학과지성사, 2003)이다. 문고본에다가 최신 번역이어서 손에 들기 가장 좋다. 한데, 부분적으로는 번역이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도 감안해야겠다(일반 독자에게는 크게 대수롭지 않겠지만). 더불어 만화책 <플라톤>(김영사, 2001)이나 <30분에 읽는 플라톤>(랜덤하우스코리아, 2004) 등도 부담없는 입문서. 부담을 원한다면, 남경희 교수의 <플라톤>(아카넷, 2006)을 손에 들어도 좋겠다.

새 <향연>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플라톤, 조안 스파르를 만나다'가 될 텐데, 만화를 잘 안 읽는 탓에 생소한 이름이지만 스파르의 책들은 국내에 다수 소개돼 있다.

 

 

 

 

그 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금붕어, 죽음을 택하다>(현실문화연구, 2002). 왠지 '철학적'이지 않은가? 품절된 걸로 나오는데, 다시 판을 찍으면 좋겠다. 22쪽 1000원짜리 책으로 '철학'을 떠올려볼 수 있는 물건은 흔하지 않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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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2-10 15:51   좋아요 0 | URL
이번에 <랍비의 고양이> 시리즈를 냈어요.
아랍과 유대, 종교와 현실, 철학과 공존이라는 주제입니다.
무거운 주제인데 술렁술렁 처리한 유머가 돋보이는 만홥니다.
플라톤도 왠지 그럴것 같은 분위기에요
<금붕어, 죽음을 택하다>는 제목이 정말 비장합니다.
아, 요거 어디가서 구할까나..궁리궁리

로쟈 2006-12-10 16:08   좋아요 0 | URL
예, 책이 많더군요. 아동용이면 아이한테도 사주겠는데...

자꾸때리다 2006-12-10 18:25   좋아요 0 | URL
박희영 교수의 향연 번역은 모 전공자의 말에 의하면 상당히 오역이 많다고 해서 안 읽고 있었는데 차라리 이걸 읽어볼까나여?

로쟈 2006-12-10 18:45   좋아요 0 | URL
'상당히'까지는 아닌 거 같고 아무튼 전공자들에겐 좀 불만스럽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번역은 불역본으로부터의 중역일 텐데, 박희영본보다 정확하다면 아니러니컬할 일이고, 다만 가독성은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란 짐작입니다...

클리오 2006-12-10 20:42   좋아요 0 | URL
향연,을 꼭 한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을까요??^^

로쟈 2006-12-10 20:50   좋아요 0 | URL
밑져야 본전 아닐까요? 그림만 봐도 되니까...

비로그인 2006-12-10 21:51   좋아요 0 | URL
이 책 보고 놀랐어요. 그림도 웃기지만, 그림에 담긴 대화들이 너무 깜찍해요..;;

로쟈 2006-12-10 22:10   좋아요 0 | URL
머, 말 그대로 먹고 즐기는 '잔치'니까요.

Poissondavril 2006-12-11 13:32   좋아요 0 | URL
평소 로쟈 님 리뷰와 페이퍼를 열독하는 알라디너이자... 이 책의 번역자입니다. 조안 스파르가 서문에서 밝히듯 "철학을 평생 직업을 삼고자 하는 이에게 권할 생각은 추호도 없음"이고요. 그래도 한 번 보실 만은 할 겁니다. 참고로, 조안 스파르와 낙서와 그림을 제외한 본문 번역대본은 Les Belles Lettres 사의 (프랑스에서는 가장 교과서적으로 통하는) 것을 사용했는데 그 텍스트 자체가 그리스어 원본판과 약간 (편집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향연>을 연구 텍스트로 쓰시는 분에게는 추천할 수 없지만 불어판 텍스트 자체는 굉장히 명료하고 잘 읽혀서 배움이 일천한 저로서는 참으로 다행(?)이었어요. 그리고 번역 과정에서 최명관본과 박희영본 두 가지 모두 참고했는데 약간 애매한 부분들이 있기도 했고(그런 부분은 전부 다 불역본에 기준을 두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번역 대본에 충실해야 할 책임이 있으니까요) 쉽게 해도 될 말을 어렵게 한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한 가지 고백하자면, 이 책을 번역하면서 제일 힘든 점은 조안 스파르의 손글씨를 알아보는 것이었어요! (번역을 하는 건지 금석학을 하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로쟈 2006-12-11 21:54   좋아요 0 | URL
이크, 역자께서 직접 찾아주시니 영광입니다(어디 험담한 건 없다 두리번^^:). 저도 오늘 교보에 갔다가 책을 훑어봤는데 손글씨 때문에 '고생'하셨다니까 고개를 끄덕이게 되네요. 제가 이미지들을 찾다 보니까 조안 스파르가 아예 이런 시리즈를 쓰려는 건지 두어 권만 맡아서 쓴 건지 궁금하더군요. <캉디드>도 썼길래요. 혹 아시나요?^^

Poissondavril 2006-12-12 10:36   좋아요 0 | URL
<향연>은 '조안 스파르의 철학 서가'라는 시리즈의 맨 첫 번째 책입니다. 몇 권이나 더 내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향연>과 <캉디드>밖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로쟈 2006-12-12 13:05   좋아요 0 | URL
역시나 그렇군요. 아직 젊은 만화가이던데, 야심만만입니다.^^
 

오전에 생각난 김에 숀 호머의 <라캉> 원서를 잠시 찾아보다가 손에 집어든 책은 폴 패튼의 <들뢰즈와 정치(Deleuze and the political)>(2000)이다. 작년인가 ''들뢰즈와 정치'를 읽기 위한 메모'까지 페이퍼로 써둔 적이 있었는데, 아직까지 읽은 거라고는 그때 읽은 서론이 전부이다. 그 서론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한데, 나의 관심사인 '들뢰즈와 경험론'이란 주제를 이전에 두어 차례 다루면서 이 서론의 마지막 대목은 빠뜨렸던 듯하다(확인해보니까 적어놓지 않았다). 그걸 보충해서 채워넣는다. 그러니까 이 글은 '들뢰즈와 경험론'에 대한 간단한 보유이기도 하다.

 

 

 

 

따라 읽어야 하는 대목은 번역본 <들뢰즈와 정치>(태학사, 2005)의 서론 36-7쪽이다. 들뢰즈의 다양성(multiplicity; 요즘은 '다양체'라고 더 많이 번역되는 듯하다) 철학이 정치철학과 어떻게 접속되는지를 이야기하는 대목이다('들뢰즈와 경험론'이나 '들뢰즈와 경험론의 비밀' 같은 페이퍼를 참조).

"들뢰즈가 자신의 다양성의 철학에 논증을 제공하려고 시도하는 방식들 중 하나는 동사 '이다(to be)'보다 접속사 '그리고(and)'에 대한 우선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그는 부분적으로는 철학적 전통을 전복시키려고 하고, 관계성의 연결적 역능을 그것의 속성화(attribution)에로의 종속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한다."

여기서 '역능'은 물론 'power'의 번역어이며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유래인) 스피노자 전공자들이 새롭게 제안하는 건 '역량'이다. 다시 말하면, 들뢰즈는 '계사' 대신에 '접속사'의 우선성을 주장하면서 암묵적으로 '계사존재론'의 형식을 취해온 서구 형이상학에 딴지를 걸고 다른 한편으로 ('접속사'라는 언어적 표현형식에 의해 표시되는) 관계성의 역량을 속성/속사에 대한 종속에서 해방시키고자 한다(속성/속사는 'X is Y'라고 할 때 X를 기술하는 Y를 가리킨다. 이때 X와 Y를 연결시켜주는 것, 그럼으로써 X를 특정한 속성 Y에 귀속시켜주는 것이 계사 is이다. 들뢰즈는 이 사태에 대한 기술을 'X and Y'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내가 예전에 강조하면서 인용한 바 있는 <디알로그>의 문장이다. "'이다(IS)'를 사유하거나 '이다에 대해(for IS)' 사유하는 것 대신에 '그리고'와 함께(with 'AND') 사유하라. 경험론은 결코 또 다른 신비를 갖고 있지 않다."(*'신비'는 'secret'의 번역이다.)

이에 대한 패튼의 주석: "모든 관계들에 내재하는 비규정적인 접속사로서, '그리고'는 상호 관계하게 된 어떤 두 사물들 사이(in-between)에 있는 것을 상징하게 된다. 새로운 '생성들', 사건들 또는 존재들이 항상 이런 '사이(in-between)'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치철학의 공리가 된다. 그들의 견해에서 '그리고'는 항상 두 요소들 간의 경계선이고, 그 자체로서 사물들이 발생하고 변화들이 발생하게 되는 잠재적인 탈주노선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이 책이 '들뢰즈와 정치'라고 불리는 것은 전적으로 온당한 것이다."

'비규정적인 접속사(indeterminate conjunction)'란 '부정 접속사'란 뜻도 되겠는데, 이것은 부정 대명사와 마친가지로 무엇을 특징하거나 한정하지 않는다(들리즈가 좋아하는 것은 품사들은 이러한 부정대명사나 비인칭대명사이다). A and B라고 할 때 'and' 가 A나 B에 대해서 보태거나 한정해주는 게 없다는 얘기이다. 'and'는 그것들 '사이'를 대신할 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새로운 사건들이란 항상 그 '사이'에서 출현한다는 것. 마치 사이먼 앤 가펑클의 화음처럼.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AND이다(http://www.youtube.com/watch?v=XGbnOmOzW-o).

반복하자면, 이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치철학의 공리이다. 거기엔 아무런 비밀도 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책이 '들뢰즈와 정치'라고 불리는 것은 전적으로 온당한 것이다"라고 할 때 '들뢰즈와 정치(Deleuze and the political)'에서 and가 강조되지 않은 것은 온당하지 않다. 패튼의 책은 '들뢰즈와 정치', 혹은 '들뢰즈 그리고 정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06.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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