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에서 '바디우, 발리바르, 랑시에르'란 절을 읽다가(이에 대한 정리는 시간이 나면 해둘 생각이다) 문득 호기심에 '자크 랑시에르'를 검색해보았다. 일부 번역문을 포함한 관련자료들이 몇 가지 된다. 그 중 하나를 옮겨놓는다(씨네21에 실렸다는 랑시에르의 인터뷰는 찾지 못했다. 어찌된 일인지 편집장의 말만 뜬다). 랑시에르의 철학 전반을 소개하는 것으로 2005년 봄 연세대학원신문에 실렸던 듯한데, 필자는 최원씨이다. 아래는 필자가 다시 교정을 본 것이라고 한다(작성일자는 05. 03. 28로 돼 있다). 어젠가 '자크 랑시에르 워밍업'을 했지만 워밍업의 마무리로 적합해 보이는 글이다.

'불화'의 철학자 랑시에르 

아마도 한국에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알튀세르가 한창 국내에 소개되고 있던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15년 가량의 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는 국내에 변변한 책 한 권 번역된 적 없는 낯선 철학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의 깊은 독자라면, 그가 알튀세르의 주도로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1960년대 초반에 진행되었던 <'자본'을 읽자> 세미나에 멤버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간 국내에서 진행된 알튀세르에 관한 논의에서 그의 이름이 거의 자취를 감춰버린 이유는 68년 학생운동에 대한 대응 문제를 둘러싸고 그가 알튀세르와 갈등하다 결국 독자적인 길을 선택했었기 때문이다(74년에 자신의 에세이를 모아 낸 <알튀세르의 교훈>이라는 책자에서 그는 알튀세르의 철학을 대중투쟁을 마비시키는 "질서의 철학"이라고 혹평하고,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그 자체로 엘리트주의적인 이론에 불과하다고 힐난한다―이러한 평가가 과연 얼마나 정당한지는 이 자리에서 논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가 단지 알튀세르주의에 대해서만 거리를 두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동시에 '차이의 철학'이라 불리는 일군의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사상들(료타르, 들뢰즈, 데리다 등)에 대해서도 소원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관점에서 이러한 사상들은 '변혁'보다는 '해석'의 문제에 집착함으로써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에 대해 쓴 테제 가운데 11번째 테제("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변혁하는 것이다!")를 다시 취소하는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많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이제껏 국내에 활발하게 소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랑시에르의 작업만이 소개되지 않고 있었던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즉, 그는 어떤 학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철학자라는 것이 그것이다. 사실 이러한 그의 '비소속성'은 단지 철학 내 이러저러한 학파나 입장들에 관련해서만 드러나는 그의 특징도 아니다. 예컨대 그는 지속적으로 정치와 철학에 관해서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철학자'는 아니다. 반대로 그는 정치철학 내의 어떤 경향이 되길 단호하게 거부하고, 정치철학이라는 학문분과 전체를 자신의 비판대상으로 삼는다.

공인된 학문분과 체계 내에서 좀처럼 포착되지 않는 랑시에르의 이러한 이론적 위치, 이것이야말로 공인된 정치 공간 그 자체에 대해 그가 취하고 있는 외부자적인 태도와 상당히 조응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테면 '공적 공간'(혹은 '공론장')의 경계선에 서서 그 공간 바깥에 여전히 우리가 잊고 있는 어떤 '외부'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구성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있기에, 그 안에서 주체들이 서로를 알아보게 되고, 서로 말을 교환할 수 있게 되는 '호혜성'의 감각적 공간이야말로 고유한 정치의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정치철학'적인 사고(이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철학으로부터 시작해서 근대의 다양한 사회계약론, 현대의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에 이르기까지 정치철학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전제다)에 대해 랑시에르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말할 권리'를 비롯한 다양한 권리들의 분배가 다소간 평등한 방식으로 행해지는 이러한 '공적 공간'을 성립시키기 위해 사회는 언제나 내부의 어떤 특정 부분이나 구성원들을 "몫이 없는 부분(une part des sans part)"으로 미리 배제하고 출발한다고 주장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구축이야말로 '호혜성'을 가장하는 공적 공간 내의 모든 '공정함'과 '정의'의 조건인 것이다.

정치철학에 대한 랑시에르의 이 같은 급진적인 비판은 특히 <불화>(1995)라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에서 발전된다(*짐작에 'Disagreement'가 그 영역본인 듯싶다. 언젠가 복사해놓은 책인데 바로 못 찾겠다). 그는 고대 그리스어인 폴리테이아(politeia)의 번역어가 '정치(politique)'일 뿐 아니라 '경찰(police)'이기도 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정치'라고 인식하는 '분배'("집단들의 결집이나 합의가 달성되는 절차들, 권력의 조직화, 장소와 역할의 분배, 그리고 이 분배를 법적으로 정당화하는 체계")가 사실은 정치가 아닌 경찰의 일임을 폭로한다. 단, 그는 푸코를 참조하여 경찰활동의 의미를 폭력행사에 의한 질서유지 활동에 국한시키지 않고, 구성원들 각자에게 정당한 '몫'을 찾아주기 위해 사회가 행하는 그 모든 활동으로 확장시킨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분배란 언제나 사회의 한 '부분'으로 이미 인정받은 사람들(서로 '호혜성'이 형성된 사람들)이 다소간 평등한 방식으로 공동체로부터 자신의 몫을 찾아가는 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들 간에 때때로 분배방식 등을 둘러싼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분배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가 누구인가(즉 누가 그 사회의 '부분'인가)를 둘러싼 논란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다. 만일 공동체에 어떤 기여도 한 바가 없으면서 자기 몫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들이야말로 '도둑심보'를 가진 자들로 분배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결국 경찰활동의 목표는 이러한 배제의 실현이며, 정치철학은 이를 정당화하고 이론화한다.

이제 랑시에르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정치를 이러한 경찰 논리에 대립시켜 새롭게 규정한다. 정치란 바로 공동체에 별반 기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 몫을 주장할 수 없는 자들이 뻔뻔스럽게도 '평등주의' 논리에 입각하여 자기 몫을 주장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정치는 본래 자기 근거나 기원(arkhê)이 없는, "추문"에 불과한 것이다.

<니코마쿠스 윤리학> 제 5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문제에 관해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공동체에 보다 많은 기여를 한 사람들이 더 많은 분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에 대해 동의하지만, 그 기여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하기에 서로 다투게 된다(즉 '불화'하게 된다). 귀족(aristoï)은 덕(aretê)(이는 '뛰어남(excellence)'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귀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뜻을 동시에 갖는다)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부자(oligoï)는 재산(공동체 경제에 대한 기부금)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전자는 귀족제(aristocracie)를 실시하자고 주장하고, 후자는 과두제(oligarchie)를 실시하자고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귀족은 보통 부유한 계급과 마찬가지로 부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양자 사이에는 진정한 쟁점이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아테네의 데모스(demos, 자유인 신분의 고대 도시국가 빈민들)가 주장하는 기준 때문에 발생한다. 데모스는 당시의 귀족들이나 부자들과 달리 공동체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자유'―발언의 자유―라는 '빈 껍데기 재산'만을 가져와 공동체를 '논쟁'과 '분열'로 몰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전체를 다수자인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민주제의 실시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데모스의 주장과 실천이야말로 랑시에르에게는 정치적 실천의 원형을 구성하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 있어 정치란 한 사회의 '부분'으로 인정받지 못한 '몫이 없는 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그 사회에 폭로하고 인정받아 공동체를 완전히 새로운 원리에 입각하여 재구성하도록 강제하는 '범법' 활동이며, 따라서 이는 몫이 있는 자들 사이에서나 행해질 수 있는 '대화(dialogue)'가 아니라, 자신을 대화상대로 전혀 인정치 않는 사회에 대해 자신의 존재를 '3인칭'으로 폭로하는 '독백(monologue)'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랑시에르의 정치 개념은 후기 하이데거의 진리(aletheia, 베일을 걷어냄) 개념 및 그와 긴밀하게 연결된 포이에시스(poiesis, 이는 '제작'이라는 뜻을 갖지만 하이데거에게서는 특히 사물을 이름짓고 그것을 현전 안으로 불러내는 언어의 '시적(poétique)'인 기능으로 인식된다) 개념과 유사하게 미학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것은 공적 공간 안에서 감각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이름지어 불러내고 공공연하게 전시함으로써, 기존의 감각공간을 다시 분할하는 실천이다. 이 때문에, 랑시에르에게 있어 정치란 '사건' 이외의 것이 될 수 없다. 하나의 정치적 사건을 통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을 보이고 들리게 하자마자 그것은 공인된 감각공간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만다. 마치 기이한 피카소의 그림이 이제는 커피 잔의 무늬로 사람들에 의해 편안하게 소비될 수 있듯이, 또 그렇게 소비되는 그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예술작품이 될 수 없듯이.

그렇다면 공인된 감각공간 내에 본래적으로 흡수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일까? 랑시에르에 따르면 그런 것은 없다. 오히려 정치의 이러한 사건적 성격을 잊게될 때 '전체주의'와 같은 최악의 결과가 생겨날 수 있다. 랑시에르는 데모스(demos)와 오클로스(ochlos)를 구별하고 후자를 정치의 주체로 사고하려는 일체의 시도들을 비판하는데, 전자가 비규정적인 다수자(하나의 비어있는 장소)를 의미한다면 후자는 자신의 통일(unification)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다수군중을 의미한다. 언제나 통일이란 '합의'를 전제로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정치란 언제나 '불화'에 기초해야만 한다는 랑시에르의 테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최원l Loyola University Chicago, 철학 박사과정)  

07. 02. 22.

On the Shores of Politics (Radical Thinkers) CoverHatred of Democracy Cover

P.S. 그런 관점에서 더 읽어볼 만한 책은 <정치의 해안에서(On the Shores of Politics)>나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Hatred of Democracy)> 같다(정치의 계절에 소개될 만하지 않을까?). 거듭 말하지만, 그의 미덕은 너무도 얇은 책들을 쓴다는 것(지젝도 바디우도 주저들은 두껍다). 이런 점에서도 그의 '비소속성'이 드러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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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7-02-23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튀세르-이후(Post-althusser)'의 정치철학적 경향(발리바르, 랑시에르, 바디우, 아감벤, 라클라우, 네그리 등)은 '군중'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정립하려는 시도에서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듯 합니다. 스피노자의 언급처럼 체제에 위협을 가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위협하는, 양가적인 '다수'의 위상을 어디에 둘 것인가의 문제 말이지요. 더 흥미로운 건 이런 경향을 일별하는 지젝은 '절대적'으로 그들 모두를 참조하면서 비판의 외양을 취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지젝은 칸트의 뒤를 이어 일련의 '비판서'들을 이미 써 온 건지도 모르겠네요...^^

로쟈 2007-02-24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만한 '강사'가 따로 없지요. 다 읽어서 정리해주고 비판해주고 아울러 계발적인 생각들도 툭툭 던져주고.^^
 

내일자 한겨레에 실리는 북리뷰들을 훑어보다가 뜻밖의 책이 나온 걸 알게 됐다. <인간론>으로 잘 알려진 에른스트 카시러의 <문화과학의 논리>(길, 2007)가 그것이다. 흔히 '문화철학자'로 일컬어지는 카시러의 저작에 '문화과학'이란 문구가 들어간 것도 이채롭다(찾아보니 독어본 원제는 'Zur Logik der Kulturwissenschaften'이며 영어로는 <인문학의 논리(The Logic of the Humanities)>라고 옮겨진 책이다. 그러니까 카시러의 '문화과학'은 '인문학'과 유사한 개념이며 영어권의 '문화연구'와는 계보가 다른 것이겠다. 더 찾아보니 영역본은 <문화과학의 논리>라고 새로 번역돼 나왔다) . 김상봉 교수의 서평을 옮겨놓으며 몇 자 보탠다.

한겨레(07. 02. 23) ‘문화’라는 학문으로 가는 길목에서

나를 아는 것은 세계를 아는 것보다 어렵다. 세계는 눈앞에 펼쳐져 있어 바로 볼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대상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내게 가장 익숙하지만 가장 낯설고,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멀리 있는 존재이다. 이런 사정은 개인으로서의 자기인식만이 아니라 유적 존재로서 인간 전체의 삶을 생각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인류의 삶의 객관적 현실태를 가리켜 우리는 문화라 부를 수 있다. 문화는 인간성의 객관적 표현이자 실현인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를 이해하고 인식한다는 것은 유적 존재로서 인간이 자기를 안다는 것을 뜻한다 하겠는데, 이른바 문화과학이란 문화에 대한 학술적인 인식의 체계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Cover

카시러의 책 <문화과학의 논리>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문화를 인식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 새로운 학문의 근본적인 곤경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문화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등장하기 전까지 학문과 인식의 모범은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자연과학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자연에 대한 학문적 인식은 주어진 사실을 두 가지 방법론적 원리에 근거해서 해명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왔는데, 그 하나는 주어진 사실을 그 사실이 아닌 다른 원인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런 인과관계를 보편적 법칙을 통해 해명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학문적 인식은 주어진 사실이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증명하려 한다.

따라서 자연과학이 추구하는 인식의 이상은 세상만사를 외적 필연성에 따라 인식하는 것이다. 대상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이 외적 필연성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은 타율성과 수동성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 자연인식의 방법을 통해 우리들 자신의 삶의 현실태인 문화를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문화과학의 논리>를 관통하는 근본 물음이다.

생각하면 자연과학의 방법은 죽은 사물을 인식하는 데나 합당한 것으로서 문화는 고사하고 생명현상을 이해하는 데조차 쓸모가 없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생명현상이란 외적 필연성에 의해 떠밀려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적 필연성에 의해 스스로 생겨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아무리 생명현상을 외적 필연성과 합법칙성에 따라 분석하고 해명한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생명체의 발생과정일 뿐, 그 발생과정을 이끌어가는 근원적 힘과 원리인 생명 그 자체는 아니다.

생명이 그러한데, 인간의 일은 또 어떠하겠는가? 칸트가 말했듯이 자연은 법칙에 따라 운동할 뿐이지만 인간은 법칙의 표상에 따라 행위한다. 그렇게 법칙을 인식할 수 있는 까닭에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타율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동기계가 아니다. 그리하여 모든 대상을 타자적 원인과 타율적 법칙을 통해 해명하려는 시도는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 순간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물론 인간은 타자의 작용과 객관적 법칙 밖에 거주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를 지배하는 법칙 그 자체를 대상화하고 타자로부터의 작용에 주체적으로 대응할 줄 아는 존재인 까닭에 언제나 법칙 속에서도 법칙을 넘어서고, 타자성 속에서도 자기를 발견하고 형성하는 존재이다. 문화란 그런 인간성의 객관적 현실태이니, 그것을 학문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제 단순한 외적 필연성의 논리가 아닌 다른 학문 방법과 논리가 필요한 것이다.

카시러는 이 책에서 그 새로운 학문의 논리가 무엇인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박식한 철학자는 문화과학의 어려움이 어디에 있는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또 다른 학문 방법이 필요한지, 그 가장 기본적인 문제 상황을 다양한 시대와 학문분야들을 넘나들면서 명석한 필치로 소상히 설명한다. 어떤 문제를 스스로 생각하려는 사람은 다른 것에 앞서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인간성의 객관적 현실태인 문화를 탐구하고 이를 통해 인간성의 신비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사람을 위한 이상적인 길잡이이다.(김상봉/전남대 교수·철학)

07. 02. 22.

 

 

 

 

P.S. 카시러(캇시러) 입문서로 가장 추천할 만한 것은 <인문학의 구조 내에서 상징형식 개념 외>(책세상, 2002)이다. 역자의 해설과 관련문헌 해제가 유익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고본이어서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다. 역자인 오향미 박사는 카시러 전공자인데(국내에서는 최명관, 신응철, 박완규 교수 등이 카시러 전문가로 분류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카시러는 동시대의 다른 철학자에 비하면 독일에서도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철학자의 속한다."(7쪽) 독일어 주저인 <상징형식 철학>(전3권)의 핵심을 압축/축약해서 출간한 것으로 알려진 영어판 <인간론(An Essay on Man)>(1957)의 출간 이후에는 오히려 미국에서 더 많이 연구되고 있다 한다(저자 스스로 축약해준다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론>은 국내에서도 <인간이란 무엇인가>(서광사, 1988)로 번역된 바 있지만 현재는 절판됐다(<인간과 문화>라는 발췌역본  있었다). 최초 번역본은 <인간론>(민중서관, 1960)이었다. 이어서 나온 것이 <국가의 신화>(서광사, 1988)이며 모두 최명관 교수의 번역이다(<국가의 신화>는 아직 절판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는 좀 터울을 두고 나온 책들이 <계몽주의 철학>(서광사, 1995),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서광사, 1996), <루소, 칸트, 괴테>(서광사, 1996) 등이다. 완독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가장 흥미로운 책이었다. 카시러 연구서로는 신응철 교수의 <캇시러의 문화철학>(한울, 2000), <문화철학과 문화비평>(철학과현실사, 2003), <카시러의 사회철학과 역사철학>(철학과현실사, 2004) 등을 꼽아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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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2-23 00:30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보니 벌써 또 금요일이군요. 내일 한겨레를 사야겠습니다.

로쟈 2007-02-23 00:32   좋아요 0 | URL
'오늘'입니다.^^

2007-02-23 0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도올 김용옥의 '영어로 읽는 도올의 요한복음 강의'가 이런저런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시끄러운 건 개신교계(한국기독교총연합회)인데 동아일보와 한겨레에서 두 가지 유형의 반응을 다룬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에 실린 김경재 교수와의 인터뷰기사는 읽어볼 만하다(일단 '동네 개가 짓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동아일보(07. 02. 22) 개신교계 '도올 딜레마'

도올 김용옥(사진) 세명대 석좌교수의 EBS 외국어학습 사이트 ‘영어로 읽는 도올의 요한복음’ 강의를 둘러싸고 개신교계가 고민에 빠졌다. 강력히 대응하기도 그렇고 아예 무시하기도 어려운 형국이다. 개신교계는 표면적으로 ‘무대응’ 방침을 밝히면서도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렇다고 김 교수의 강의에 대한 체계적이고 신학적인 반론이 나오지도 않는다.

김 교수는 이번 강의에서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민족신인 야훼가 유대인들이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믿는 조건으로 애급의 식민에서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주겠다고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한 계약”이라며 구약의 폐기를 주장했다. 그는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구약의 모세를 믿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성황당을 믿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는 ‘성경무오류설’에 대해서도 “한글 성경에서조차 틀린 데가 많다. 한자도 틀린 것이 적지 않고, 예수의 족보도 세어 보라. 한 대가 빠져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 이용규 목사는 20일 “김 교수의 가치 없는 주장에 일일이 답할 생각이 없다”면서도 “구약을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과 신학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도올은 실력 있는 철학자지만 철학자가 자기 영역을 벗어나 신학을 철학으로 해석하는 것은 교만”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표회장은 “예컨대 모세를 주몽과 비교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했다.

한기총 총무 최희범 목사도 “도올의 강의는 교회를 훼손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음모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비판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예장통합)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김 교수의 강의 자체를 무시하는 분위기다. 김 교수의 성경 해석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 자체가 긁어 부스럼이라는 속내로 보인다.

예장통합 사무총장 조성기 목사는 “설득력 없는 한 개인의 해프닝에 반응할 이유가 없다”고 일축했다. 그는 “김 교수의 성경 해석이 어디에 근거를 뒀는지 모르겠다”며 “김 교수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해석이 기발한 착상일지는 모르지만 누구도 공감하기 어려운 기행일 뿐”이라고 말했다. KNCC 총무 권오성 목사는 “동네 개가 짖는다고 ‘왜 그러느냐’고 물을 필요가 있는가”라며 “터무니없는 내용에 흥분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어느 동네인지는 모르겠으나 도올이 '개' 수준이라면 최고 석학의 할애비들만 모여사는 동네인 듯하다). 그는 “김 교수의 말 한마디 때문에 2000년 역사 속에서 고백해 내려온 교회의 진리가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윤완준 기자)

한겨레(07. 02. 22) 교계 정치참여는 강자에 동조하는 것 구약폐기론은 잘못”

우리나라 기독교 신학계의 대표적 지성인 김경재(67) 한신대 명예교수가 지난 21일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최근 도올 김용옥 교수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논쟁에 대해 입을 열었다. 최근의 논쟁은 김 교수가 〈교육방송〉 인터넷 요한복음 강의와 〈한겨레〉 인터뷰 등을 통해 보수 교계의 정치참여 행태를 비판하고, 성서적으로는 구약 폐기를 주장하면서 촉발됐다. 이에 한기총은 “교회 매도 음모”라며 도올의 주장을 맞받고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보수·진보 가릴 것 없이 기독교의 정치참여를 경계하되, 최근 보수 교계의 정치참여 행태를 “하나님을 빙자하며 강자에게만 동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도올이 제기한 구약 폐기론에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보수 기독교계가 시시콜콜한 것을 시비삼지 말고, 큰 틀에서 한국 기독교의 생명력을 살려 한국 기독교와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크게 기여하는 종교로 거듭나게 하려는 (도올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개방적 성찰’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지 않고 “현재의 모습을 고수하겠다면 결국 한국 기독교도 죽고, 한민족도 불행해지고, 세상에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문일답이다.

-도올은 기독교인들이 거대한 압력단체를 만들려 한다며 기독교의 정치 참여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보수 기독교는 진보 쪽이 70~80년대에 참여한 것은 로맨스고 우리가 하면 불륜이냐고 반박하기도 한다.

=70~80년대엔 약자들을 아무도 대변하지 않았다.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비상한 상황이 끝나면 종교인들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논공행상에 참여했다. 그것은 옳지 못하다. 또 우파들은 안보를 위해 한-미 동맹이나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등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며 강자에게만 동조하고 있다. 이것은 특정 이데올로기이지 성서의 정신이 아니다.

-도올이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구약의 야훼는 수없이 사람을 죽이고, 질투하고 화낸다. 예수가 신약에서 ‘아버지’라고 한 분과 구약의 야훼가 같은 분인가. 이런 질문이 신학계에서 있어 왔는가?

=당연히 있었다. 도올이 질타하는 것은 오직 유대민족만을 위해 타민족을 죽이는 부족신 개념에 대한 맹신일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자들은 ‘야훼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수없이 얘기했다. 자식 열둘 가진 부모가 있다고 치자. 정상적인 부모라면 가진 것도 없고, 장애를 가진 자식에게 가장 마음이 쓰이게 마련이다.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고 애급의 노예로 끌려가 그토록 고초를 받을 때 그들을 긍휼히 여긴 것이다. 그들만이 특별해서가 아닌 것이다.

-그래도 신의 편벽한 모습이 성서에 비침으로써 반목과 전쟁의 역사를 부채질한 것이 아닌가?

=구약도 솔로몬과 다윗 등 왕권이 성립된 뒤 편집된 것이다. 제왕 전승이 자리를 잡으면서 그런 제왕적 모습을 부각시켰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도 야훼의 전지전능성, 제왕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게 현실 아닌가?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도 야훼야말로 진짜 신이니, 환웅, 환인, 제석신,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등 다른 신을 모두 쫓아내고 이 땅을 야훼가 제패하는 것처럼 묘사한 게 사실이다. 한국 기독교가 하나님의 종교로서 선교 사명을 갖고 있다는 정치 메시아니즘도 구약을 밑바닥에 깔고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것으로, 그런 잘못된 신관(神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야훼는 어떤 신인가?

=야훼는 제왕적 신이 아니다. 야훼란 말의 뿌리를 추적해 보면 ‘긍휼히 여기는 모성적 고통, 산고의 진통에 동참하는 이’다. 한반도의 초기 백성들이 교리적 도그마가 아니라 아무런 선입관 없이 성경을 읽다 보니 어렴풋이 그런 어머니 같은 하나님이 느껴져서 마음속으로 공감해 이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은 것이다.

-제왕처럼 하늘 위에 앉아 지배하는 하나님이 아니란 말인가?

=섬김과 봉사를 통해 정의와 평등을 이루는 분이다. 일제나 미국 극우주의자들처럼 침략하고 세상을 제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견강부회하며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메시아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관이다.

-도올이 예수와 한반도 초기 올곧은 기독교인들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것이라면, 보수 기독교가 왜 이처럼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인가?

=신관이 중요하다. 신관이 바뀌지 않으면 기독교가 바뀌지 않고 세상이 바뀌지 못한다. 그래서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로 인해 기존의 신관과 교권이 흔들리는 데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교회를 파괴하려는 음모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정치적 우파들과 결속하는 것에 대한 방해라고 여긴다. 약자와 함께하고 그들을 섬김으로써 예수의 사랑을 실현하려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정치적 메시아주의’를 통해 세상적 힘을 갖기를 원한다. 그래서 젊은 지성인들이 도올의 강의를 듣고 깨어나서 ‘정치적 메시아주의’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한기총 이용규 회장과 최희범 총무는 기자들과 만나 ‘철학자가 성서를 해석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철학과 신학은 같지 않다. 그러나 지성과 이성을 배제한 신학은 없다. 초자연적 신을 얘기하는 보수적 신학도 교리들을 보면 대단히 논리와 합리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 신이나 구원도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계시적 진리다, 영이다, 신앙이다’라며 신성의 보자기로 감싸는 ‘경계 침해의 논리’는 교권 보호를 위해 상대를 침묵시키기 위한 것일 뿐이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카르 바르트는 “신학도 인간이 하는 학문적 시도”라고 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계시된 신학이란 없다는 얘기다.

-그들은 ‘신앙은 신앙의 눈으로 봐야 열리지 지식과 과학으로는 안 된다’고도 주장했다.

=‘신앙=반지성주의’로 몰고 가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인가. 그것은 몽매주의다. 상당수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도들을 그런 교권주의와 권위로 다스려 전근대적 복종의 미덕만을 강조해 오면서 무지한 맹신이 진짜 신앙인 양 호도했다.

-기독교에서 도올의 주장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질 것으로 보는가?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한다. 낡은 부대는 신축성과 유연성이 없어서 새로운 것을 담아내기 어렵다. 담으면 터져버려서 술도 상하고 부대도 상한다. 한국 기독교는 과연 어떤 부대인가.



구약폐기론 반대이유
김경재 교수는 “어떤 맥락인지 들어봐야 하겠지만 구약을 폐기하라고 했다면 이는 잘못”이라며 도올의 구약폐기론엔 반대를 분명히 했다. 그리스철학에 뿌리를 둔 헬레니즘과 히브리사상이 만나면서 신약의 정신세계가 형성됐는데, 구약을 제거해버리면 도올이 소중히 여기는 인간 평등과 존엄성 등을 담은 헤브라이즘이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예수 이후 최고의 인물로 꼽히는 사도 바울도 히브리사람이긴 하지만 헬레니즘적 배경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아 용어와 내용에 두 요소가 함께 포함돼 있다고 한다.

그는 “구약을 빼면 율법주의에선 자유로울지 몰라도 기독교답게 하는 (헤브라이즘) 정신이 약해져버린다”고 경계했다. 그는 또 “구약과 신약은 서로를 비춰주는 빛”이라고 했다. 또 “기독교가 이스라엘에서 탄생했는데, 그 뿌리를 제거해버리면 기독교가 천박해진다”고 주장했다.

김경재 교수가 본 도올
김경재 명예교수는 김재준·함석헌·서남동·문익환·안병무·강원용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가르쳤던 한신대에서 신학대학원장과 학술원장을 지냈고, 강원용 목사에 이어 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도 맡았다. 상당수 종교인들과 신학자들이 이성보다는 감정을 드러내 도올에 대해 비판하는 것과 달리 김 교수는 도올에 대해 “물건!”이라며 웃었다. 한신대 재직 시절 후배들의 총장 추대를 거절한 채 기숙사 사감을 자처해 정년을 맞은 뒤 서울 신촌 이화여대 후문 ‘김옥길 기념관’ 지하의 ‘삭개오작은교회’에서 매주 일요일 소박한 목회를 하기도 하는 그다운 ‘폭’이었다.

김 교수는 특히 도올의 용기를 높게 평가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고, 더구나 그의 집안이 속한 예수교장로회의 중도 및 중도 우파적 사상 계보로 볼 때 도올에겐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으로 보았다. 그는 또 “노자와 불교, 유교, 천도교, 원불교, 서양철학 등을 섭렵한 도올이 <요한복음 강해>에서 ‘초월적 인격신’을 믿는다고 신앙 고백을 한 것을 보고 놀랐다”며 “기독교에선 어떤 교리를 믿어야 정통이 아니라, 그런 신앙을 ‘정통’으로 본다”고 했다.

그는 “한국 개신교 120년 역사에서 도올만큼 ‘준비된 지성’도 흔치 않다”며 “서양 선교사들의 말을 그대로 답습한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유영모, 함석헌 선생의 맥이 도올에까지 가 닿았다”고 평했다. 김 교수는 “루터와 칼뱅도 성서 해석을 바로 함으로써 새로운 기독교를 열었다”며 도올이 한국 기독교의 루터와 칼뱅이 될 수 있다고 점쳤다.

그러면서 그는 “도올은 <요한복음 강해>에서 자신의 독특한 신관을 만들었다기보다는 성서와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가고, 어느 한 집단만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전 세계, 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했던 한반도 초기 기독교인들의 마음으로 돌아가자고 촉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조연현 기자)

07.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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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22 21:25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

antitheme 2007-02-22 21:31   좋아요 0 | URL
도올의 이번 문제제기가 나름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지만 몇몇 언론의 인터뷰를 봤을 때 우려가 되는 부분도 있긴 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파편적인 인터뷰 글이 아니라 그의 글과 강의를 통해 평가해 보고 싶네요.

sommer 2007-02-22 23:07   좋아요 0 | URL
도올선생의 기독교에 대한 '해석'은 상당히 '위상학'적이고 그래서 충분히 '정치적'인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침묵과 유사하게 한국의 기독교는 '신학/교리(해석)'에 모른 척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외면은 그러한 해석이 곧 '자기 부정'으로 귀결되고 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기인하고 있을 테지요. 여태 '믿는 척'해 왔는데, '네가 믿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당혹감, 그걸 묻는 자에 대한 부정...

도톰 2007-02-23 16:07   좋아요 0 | URL
영어로 강의를 하는 것은 민감한 사안에 대한 도올의 꾀로 보이기도 합니다.

로쟈 2007-02-24 00:05   좋아요 0 | URL
antitheme님. 기회는 어렵지 않게 마련하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약간의 비용이 들긴 하지만...
suture님/ 적어도 신학과 신앙은 구별했으면 싶어요. 목사님들이...
kaosmapak님/ 사정이 그렇지만도 않은 게 요한복음에 대한 도올의 언급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이 참에 겸사겸사 칼을 뽑아든 것뿐이죠...
 

자주 드나드는 사이트들을 둘러보다가 똑같은 서평이 올라와 있어서(그러니까 알라딘 은어로 '중복서평'이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번에 슬라보예 지젝에 관한 기사를 쓴 오마이 뉴스의 '기자'가 한겨레의 '필진'으로도 참여하는지 같은 서평기사를 중복으로 올려놓은 것. 숀 호머의 <라캉 읽기>(은행나무, 2006)를 다룬 이 서평기사는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93045)에 지난 18일자로, 그리고 한겨레(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91868.html)에는 20일자로 기사등록이 돼 있다(메인화면에 띄워놓았는데 '중복'이란 얘기는 없다). 훌륭한 서평이라면 굳이 '중복'을 문제삼을 필요가 없겠지만, 부정확한 내용에다 오타까지 교정하지 않은 '부실한' 서평이다(오타는 따로 표시해두었다). 개인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거라면 참견할 이유가 없지만, 두 언론매체에 자주 발걸음을 하는지라 불평을 좀 늘어놓는다. 자사 사이트에 올려지는 기사라면 '관리' 좀 하시라고.  

오마이뉴스(07. 02. 18) 현대의 위대한 정신분석가-사상가 '라캉'의 대중적 읽기

라캉이란 이름을 글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약 5년 전이었다. 그 영향력에 비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너무 늦은 것 같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에 대한 개인적인 편견 때문에 5년 전 공들여 읽은 라캉에 대한 지식을 그 맥을 잇지 못하고 끊어 두고 있었다. 그러다 역시 편견 가득한 시선으로 알게 된 철학자가 지젝이며, 지젝의 최대 관심사가 라캉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쯤 되어서야 라캉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이해의 폭을 넓혀 놓으면 책읽기나 글쓰기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필자의 공부 생각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사실, 라캉은 프로이트나 니체, 마르크스만큼이나 현대의 중요한 이론가 사상가다. 시기적으로는 다른 세 명에 비해서 이후의 인물이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인물이지만 현대의 인문학 일반, 문화이론, 영화비평 등지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물론, 그의 사상의 본령인 정신분석학 분야에서는 물론이고.

특히 최근의 문화이론과 영화이론 등지에서는 라캉이 인용되지 않는 경우를 못 찾을 정도라고 한다. 최근 국내의 C영화지에서 시행한 평론상 수상에서 "라캉을 인용하지 않고는 영화비평을 할 수 없는가?"라고 말했을 정도이며, 세계적인 S영화잡지에서는 라캉 이론을 중심으로 하는 정신분석학적 영화비평가 그룹이 있을 정도다.

라캉은 생전에 딱 한 권의 책만을 남겼고, 그의 이론의 대부분은 생애 내내 동료 연구자, 제자들과 진행한 세미나기록, 임상연구기록에 남아있다. '에크리'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아직 영문으로도 완역이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필자에게 작년에 영어 완역본이 출간됐다고 전했지만 교정되지 않았다. <라캉 읽기>의 내용에 근거해서 썼을 뿐이라고). 워낙에 방대하고 난해한 그의 이론과 글쓰기의 결과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연구자와 저자들이 라캉에 관한 개설서나 읽기 형식의 책을 대단히 많이 내놓았다. 숀 호머의 <라캉읽기>도 그중의 하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라캉읽기를 읽기 위한 라캉읽기'라는 점이다. 즉, 아직 초보자들에게 라캉의 원전을 읽는다는 것은 한국어 번역본이 드물기도 하지만 워낙에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여타의 라캉 개론이나 라캉읽기를 읽는 것이 초보자에게는 적당하고, 그전에 '에피타이저'로 읽을 만한 책이 숀 호머의 <라캉읽기>다(*'라캉읽기를 읽기 위한 라캉읽기'가 무슨 말인가?).

그러나 숀 호머의 <라캉읽기>를 얇고 작은 책이라서 얕봐서는 안 된다. 이 책에는 라캉 이론의 구조가 잘 설명되어 있고, 주요 용어를 중심으로 그의 이론의 에센스가 잘 저며져 있다. 더구나 번역자 김서영이 일반번역자가 아닌 국내에서는 제법 알려진 라캉 전공자라서 번역이 굉장히 충실하고 좋다는 점도 이 책의 미덕이다(*이전에 소개한 대로, 숀 호머의 책은 지젝도 추천하고 있는 입문서이다).

숀 호머의 <라캉기>는 꼭 라캉의 이론을 교조적으로 다룬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라캉을 가운데 둔 의미망의 그물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여러 인물들, 예를 들면, 지젝, 크리에스테바, 아리가리, 버틀러 등의 이론도 작은 분량이지만 소개되어 있다(*각각 '크리스테바'와 '이리가레' 혹은 '이리가라이'의 오타이다).

그 외 특이할 만한 점은 라캉이 직접 취급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이론의 신봉자들이 취급하는 분야인 문화이론과 영화비평도 상당한 부분 소개되어 있어서 책읽기의 즐거움 배가된다.

한 가지 흠이자 천만다행 한 점은 그의 생애 후기에 소개되는 수학이론을 사용한 여러 설명들이 이 책에는 생략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난삽한 부분이 생략된 이유는 숀 호머의 해설에 따르면 이 책이 라캉읽기의 맛보기이고, 실용목적상 문화이론이나 영화비평을 하는 사람들에게 읽힐 목적으로 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더 진보된 라캉읽기를 원한다면 책 뒤에 소개된 목록을 참조하기 바란다.

라캉이론은 사실 그 의미가 고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생애에 걸쳐 진화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그리고 워낙 난해하고 요약을 거부하는 그의 이론의 특성, 원래 정신분석학의 임상소견에서 출발했다는 특성 탓에, 재차 그의 이론을 옮겨적는 사람은 굉장히 임의적(?)으로 요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라캉의 이론은 보통 상상계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한다. 어린이가 거울을 보면서 파편화된 것으로서의 자아의 이미지를 확보한다. 그러나 그 자아라는 것은 굉장히 파편화되고 비조직화된 것이다. 우리가 통상, 자아를 통일된 실체로 알고 있는 데에 반하여 라캉의 자아란 분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자아는 유아기 내내 상상계라고 부르는 동화적인 세계 속을 산다.

그러나 언어를 습득하고,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상징계라고 불리는 단계에 진입을 한다. 거칠게 말하면, '언어=상징계'라고 까지 할 수 있는데, 구조주의 사유의 영향을 받은 라캉에게 언어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아다시피 언어는 구조화되어 있는데, 라캉에 따르면, 무의식도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한다. 이 부분은 그의 이론과 프로이트의 이론과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또 등장하는 것이 실재계와 대상a의 개념이다. 실재계란 상징계 바깥에서 심연처럼 상징계를 지탱하기도 하며, 또는 실재계의 잔여라고 부를 수도 있는 개념이다(*'실재계'가 어떻게 '실재계의 잔여'가 될 수 있나?). 이렇게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가 라캉이론의 기본개념이다.

그리고 추가되는 것이 팔루스와 성차의 개념인데, 이 두 가지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팔루스는 프로이트 이론의 '남근'과는 의미상 차이를 가진다. 아이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미워한다. 그래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고자 하지만, 아버지에 의한 거세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럴 수가 없고 아이는 성인이 되고 다른 배우자를 선택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 공포증에 대한 이론이다. 그런데 라캉에 의하면, 이 팔루스(또는 남근)은 의미가 발전한다(*팔루스와 남근은 '의미상 차이'를 갖는데, 어떻게 '팔루스(또는 남근)'이 되는가?).

아이는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고자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아버지가 존재하며, 팔루스는 의미가 확대되어 해석된다. 팔루스는 일종의 욕망의 대상이다. 팔루스는 단지, 남근으로서만 이해하면 곤란하고, 욕망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에서는 '베일'이라고 불리는 것 뒤에 팔루스가 있다고 한다. 거기에 욕망의 본질이 숨어 있다. 아이가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고자 하지만 불가능한 것처럼, 사회에서 욕망의 실현은 무한정 지연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지젝같은 사람은 마르크스주의와 연관시켜 자본주의적 모순을 설명하는 데에도 응용한다.

팔루스와 성차에 관한 이론 때문에 라캉주의자들은 페미니스트들의 공격을 당하기도 하는데, 숀 호머에 의하면 그것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라캉의 이론은 이외에도 아주 다양한 내용들이 많고, 특히 영화비평이나 문화이론으로 응용을 하면 정말 재미있는 글들이 많다. 관심 있는 분들의 독서를 권한다.(*관심있는 분들의 독서를 권장하는 취지는 환영할 만한 것이나 그러한 권장은 '기사'로서의 요건을 충족시킨 이후에나 빛을 발할 수 있는게 아닐까? 이 서평의 제목에서 강조되어야 할 대목은 '라캉'이 아니라 '대중적' 읽기였다).

07. 0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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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돌이 2007-02-21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아리까리'하네요.'라캉일기'도 있다면 재밌겠네요.저 시리즈에서 일본인이 쓴 '라캉의 정신분석' 나온 것 같던데 짬날때 서평 부탁합니다.

로쟈 2007-02-21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리가리'는 정말 고의적(?)이지 않나 싶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라캉의 정신분석>이 나온 건 봤지만 구매할 생각은 없습니다. 라캉의 용어들이 일어로는 어떻게 번역되는가를 얼마간 엿볼 수 있을 거라는 외에 특별한 관심을 끄는 책은 아니구요. 저로선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를 읽어보는 게 더 시급하며 더 유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sommer 2007-02-22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캉과 정신분석' 중에서 '오브제 a와 황금수(비)'라는 장을 잠깐 읽어 봤는데, 흥미로운 해석이더군요. 다만 책의 목차를 훑어보니, 라캉의 초기의 '로마강연'-무의식에서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즉,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이동-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지젝 같은 이가 시도하고 있는 전략들에까지 미치는 길은 험난하지 않을지 생각이 들더군요...

로쟈 2007-02-22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uture님의 서평을 기다리는 게 낫겠네요.^^
 

지난주엔가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수다에 대한 독후감으로 '정성일 아줌마와 자크 랑시에르'란 페이퍼를 쓰겠다고 예고한 적이 있다. 그가 지난 계절에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는 랑시에르의 책 <영화 우화들>을 마침 내가 지난주에 구했기 때문에 그와 관련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려고 했었다. 아마도 이 달 안으로는 쓰기 어려울 텐데, 막간을 이용해서 자크 랑시에르를 소개하는 기사를 옮겨놓는다(아래 이미지는 <영화 우화들>의 영역본).

알튀세르 사단의 3인방 중 한 사람이었던 랑시에르에 대한 관심은 전적으로 슬라보예 지젝을 경유한 것이다(바디우와 아감벤 등도 내게는 모두 지젝이 소개해준 철학자들이다). 그래서 랑시에르에 관한 글들은 앞으로 '로쟈의 지젝'에 적을 두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론 주로 랑시에르의 정치철학과 미학 관련서들이 눈길을 끌었고, 나는 그의 저작들을 얼추 6-7권 정도 구해놓은 듯하다(랑시에르의 최대 미덕은 주저들의 분량이 상대적으로 짧다는 것이다). 조만간 번역서들이 나온다고 하니까 어쩌면 몰아서 읽어볼 수도 있겠다. 아래 '담비'의 기사가 그 워밍업이 되겠다.

담비(07. 02. 14) 자크 랑시에르 한국 상륙 예정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의 주저인 '미학의 정치' 등이 도서출판 울력을 비롯한 몇몇 출판사에서 한창 번역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는 지난 1980년대에, 알튀세르의 맑스 독해팀 일원이었다가 알튀세르와 틀어져서 다른 길을 걸어간 이로만 알려진, 아니 그 이후 15~16년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져왔던 철학자다.

랑시에르의 한국 상륙은 "왜 그런 중요한 사람이 번역되지 않는지 정말 이상하다"라는 어느 소장 철학자의 말마따나 뒤늦은 감은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프랑스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뒤를 이어 지성계를 주름잡은 비판철학자 4인방 가운데 에티엔 발리바르는 윤소영 한신대 교수가 지난 80~90년대에 이미 소개해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프레드릭 제임슨, 테리 이글턴 같은 네오 맑시스트와 '따로 또 같이' 진격하면서 맑스주의가 90년대 후반까지 그 담론적 생명을 이어가는 데 골몰했고, 그의 동료인 랑시에르에겐 너무 무관심했다. 아니, 발리바르가 랑시에르를 아예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한국 학자들의 무관심이 더 컸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2명인 알랭 바디우와  E. 라클라우가 최근 들어서야 한국에 소개되고 있어 이들과 함께 랑시에르의 책들도 본격 조명될 조짐이다. 알랭 바디우의 책들은 현재 새물결 출판사에서 한창 번역중인 것으로 알려졌고, 라클라우는 슬라보예 지젝의 책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서문을 통해 대중들과 얼굴을 '쎄게' 익혔으니, 아마 곧 주저가 소개돼 대학원생들이 손때를 어지간히 묻힐 것으로 예상된다(*라클라우/무페의 주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는 (다른 이름으로이긴 하나) 이미 번역돼 있고 지젝, 버틀러와의 공저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은 도서출판b의 근간 예정으로 돼 있다).

랑시에르의 책이 서점에 깔리기 전에 왜 지금 이 시점에 그의 주저들이 번역되기 시작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그는 매우 극단적인 주체성의 이론가로 명성이 자자하다. 랑시에르는 현대사회가 선전하는 '자유', '평등' 같은 가치들은 우리 사회의 일부 구성원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고 '괘씸죄'를 건다. '배제된 목소리'에 대한 문제제기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이기도 하며, 랑시에르의 표현대로라면 사회라는 건축물 속에 그 자신의 '공간'이 없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쉬운 예를 들면 한국의 외국인노동자들이 거기 해당하며, 일본의 불가촉천민으로 여겨지는 '부라쿠민(部落民)'이 여기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는 정치세력화의 가능성이 애초에 차단된 사람들이 있는데, 민주주의 체제이든 뭐든 간에 이들을 계산에 넣지 않고 호혜와 평등을 주창해왔다는 것이 랑시에르가 벌인 폭로전의 전말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랑시에르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해설을 몇차례나 썼다. 특히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 b, 2005)에서는 아주 길게 랑시에르의 비판이론의 핵심을 설명하고 있어 맛보기로서는 안성맞춤이다. 왜 지젝 얘기를 꺼내는가 하면 이런 랑시에르의 핵심주장은 얼핏 접하기에는 너무 '이상적'이고 '극단적'인 주장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고대 그리스의 예를 들며, 귀족정과 과두정이 상류층 체제라고 비판하며 스스로의 몫을 요구한 데모스 집단을 강조할 때는 "뭐지?, 원시민주주의로 돌아가자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젝은 랑시에르가 결코 앞뒤 재지 않는 원칙론자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운다.

랑시에르의 주장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맞서 풀뿌리 연대를 강조하는 요즘의 진보주의자들과 기본 멘탈리티는 동일하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렌즈를 국가 내부의 국부적인 현실에 맞출 때가 많기 때문에 훨씬 검증해보기 쉬운 쪽에 속한다.

최근 한국에는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에 화재가 발생해 3층에 머물던 외국인들이 대량 참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관리가 허술했다, 직원들 근무가 엉망이었다는 후속보도가 나오고, 이들 이주노동자들에게 보호한답시고 수갑을 채우고, 문을 밖에서 잠궈놓았던 정황이 알려지면서 성토여론이 일고 있다.

랑시에르는 바로 이런 존재들, 수갑에 묶여서도 아무 말 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외면함으로써 체제를 합리화해온 것이 오늘날의 정치철학이라는 것을 탁월하게 이론화했다. 또한 이들 정치철학들은 랑시에르 같은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데, 지젝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원정치(arche-politics), 초정치(para-politics), 마르크스주의적 메타정치, 극정치(ultra-politics)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중 극정치의 예만 들어본다면, 이들은 정치의 직접적 군국화를 통해 정치를 부정한다. 이들이 부정하는 정치는 물론 '사회에 자신의 몫이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 사이의 긴장과 투쟁으로서 발생하는 '사건으로서의 정치'를 말한다. 투쟁을 더 큰 투쟁으로 말소시키는 전략인데, 오늘날 급진적 우파가 계급 투쟁보다는 계급(또는 성) 전쟁에 대해 말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적 메타정치는 어떤 은폐를 가하는가. 지젝은 이 대목에서 프레드릭 제임슨을 빌려온다. 제임슨은 맑스주의가 때로 인간 행위를 실용성의 극대화로서 보편적으로 모형화하는 신자유주의의 가장 극단적 판본과 일치한다고 지적했는데, 양자 모두가 고유한 정치적 사고의 필요성을 없애버리는 것은 똑같다는 지적이다. 그에 비해 랑시에르는 '언어의 모호성' 같은 문학이론을 철학적 사유 속에 도입하면서까지 정치라는 것의 미묘한 운동성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쉬운말로 정리하자면, 소수자들의 정치적 발언은 이러한 네가지 형태의 '부정'에 의해 정치적 시민권을 갖지 못한채 주변으로 끊임없이 밀려나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들이 밀려만 나겠는가. 과거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아니면 그보다 더 이전의 프랑스혁명에서 끊임없이 확인되듯, 막히면 터지게 마련이다. 물론 랑시에르에 따른다면 터진다는 것은 물리적 폭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언로가 다양해졌고 사회의 기득권 섹트들이 수없이 쪼개져있는 현 상황에서는 다른 식의 정치적 투쟁이 가능하다는 점을 랑시에르의 이론은 환기시켜주는 듯하다. 경제적 성장을 이룬 중산층의 나태한 무의식을 겨냥한 랑시에르의 이론이 한국땅에서 얼마나 생산적으로 음미되고 변형될 수 있을지 기대된다.(리뷰팀)

07. 02. 21.

P.S. 참고로, '담비'(http://www.dambee.net/)는 '담론비평'의 약자인데 최근에 문을 연 온라인 학술저널이다. 교수신문의 강성민 기자의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분가하거나 독립한 것이 아닌가 싶다(요즘 교수신문은 이름만 걸고 있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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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bi 2007-02-21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구입한 스리지Cerisy에서 열린 랑시에르 토론을 엮어 낸 책의 저자들을 보면 바디우의 독자들과 상당수 겹침을 봅니다. 사실 랑시에르는 영어권에 바디우보다 30년도 더 일찍 알려졌고, 이미 70년대 후반부터 그의 마오주의시절(저널<논리적 반란>)의 글들이 번역되었는데.. 아마도 60-70년대 영,미 알튀세주의자들의(초기 Radical Philosophy그룹) 영향일거라 생각됩니다... 어디에선가 그가 학위논문(<프롤레타리아의 밤>)에 도움을 얻기 위해 푸코를 찾아갔는데, 푸코가 랑시에르에게 한수 접어줬다는....^^

로쟈 2007-02-21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독자와도 얼마간 겹칠지 모르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읽어본 건 아니지만 <미학의 정치> 같은 책들이 관심사와 맞아서 기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