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끄려다가 얼떨결에 읽게 된 지난주 시사인의 기사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42). 스크랩해놓는다고 하면서 깜박 잊고 지나갔었다(얼마전 번역/오역과 관련한 글을 쓸 일이 있었는데, 미리 사건이 터졌다면 흥미로운 사례로 들 뻔했다). 생각난 김에 챙겨놓고 눈을 붙여야겠다.

시사인(08. 07. 15) 한국 번역사에 길이 남을 일

만세. 오역하면 처벌된다. 학식이 드높으시고 글공부의 깊이가 한량없으신 검사 다섯 분이, 무려 다섯 분이, 문장 하나하나의 오역을 이 잡듯이 뒤져주신다. 온갖 오역과 짜깁기 번역에 오랫동안 신음해온 우리 지식계에도 드디어 서광이 비치려나? 초고 제출 요구에다 압수 수색까지 해서 엉터리 번역자와 출판사를 아주 요절을 내주시려나?

번역 일을 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이번 <PD수첩>에 대한 검찰 수사는 정말이지 인상 깊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의 마지막 대사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를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니까”라고 번역해낸 것이 가장 유명한 명번역이었다면(참고로 일본어 번역을 그대로 따온 것이라고도 한다), <PD수첩> 오역 논란도 한국 번역사에 길이 남을 일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 설마 이걸로 처벌받는다면 말이다.

광우병에 걸린 것이 아닌지 전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아레사 빈슨의 어머니는 <PD수첩>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Actually I could not understand how my daughter could possibly have contracted…the possible…human form of mad cow disease.”

즉, “인간 광우병이라니, 그런 희귀한 병이 대체 어쩌다 우리 딸한테 생겼는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라는 뜻이다(방송 내용으로 보아 이 말 뒤에는 “농장 주변에 간 적도, 외국 여행을 간 적도 없는데”라는 구절이 덧붙었다). <PD수첩>은 “사실은 내 딸이 인간 광우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번역한 자막을 내보냈다.

그런데 검찰은 “우리 딸이 광우병에 걸렸을 리가 없다”라고 번역했어야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처벌해야겠다고 한다. 하늘에 떨어지는 해를 보며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처벌한다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다.

만일 누군가가 “폐암이라니 정말 모를 일이다. 우리 남편은 평생 담배도 피워본 적 없고 운동도 열심히 했는데”라고 하면 듣는 사람은 “남편이 폐암에 걸렸을 리가 없다”라고 해석해서 알아들어야 하는가? 게다가 “폐암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번역하면 처벌받아야 하는가?

삼성 특검도 검사 한 명에 검사보 세 명이었는데
물론 <PD수첩>이 미국산 쇠고기가 위험하다는 논조로 내용을 몰고 가긴 했다. 하지만 그게 문제라면 ‘한국 경제 대폭락 다가온다’ ‘중국 올림픽 분위기 썰렁’ ‘아침 걸러도 살 안 쪄’ ‘촛불시위 과격 양상’ ‘해삼 멸종 위기’ 등등의 기사 작성자도 죄다 조사하고 처벌할 일이다. 마음먹고 보면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굳이 한쪽 면만 부각시킨 ‘왜곡’을 저질렀으니 말이다.

<PD수첩> 수사는 명예훼손 건이라 한다. 정부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정부의 명예를 어마어마하고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떨어뜨린 ‘미국 동물성 사료금지 오역사건’부터 수사하라. 검사 다섯 명을 배치해서. 번역 초고 제출을 요구하고. 불응하면 농림수산식품부 청사를 압수 수색해서라도. 누군가가 그랬다. 삼성 특검도 검사 한 명에 검사보 세 명이었는데, 번역을 잘했니 못했니 하는 일에 검사를 다섯 명이나 투입한다고.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최내현_월간 판타스틱 발행인)

08. 0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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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7-23 08:48   좋아요 0 | URL
검사들이 고시공부하느라 영어를 못했나보지요...그래서 5명이 필요한가봐요..지금 사전 뒤적이고 있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러니까 맹박군이 '영어공용화'이야기를 꺼냈나봅니다.
역설적이게도 온 국민이 영어에 능통하다면 저 문장을 가지고 쪽팔리게 자동차면허를 제외하고 최고의 국가고시라고 하는 사시출신 검사5명이 머리대고 앉아서 사전 뒤적일 필요도 없을텐데...

하여간 저도 영어를 잘하고 싶어요.예전에 좀 탄력받았을 때 계속했으면 좋았을 것을.직무상관도가 영 떨어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안하게 되요. 요즘은 다시 관심이 갑니다. 전 우리 아이도 영어를 잘했으면 좋겠어요.(이거 또 오해받기 좋겠지만...) 외국애들이랑 자연스럽게 의사소통하고,또 영어로된 어려운 책도 따로 번역없이 술술 읽어나가고...더 넓고 많은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 영어학원 다닐때 수업시간에 무식한 영어선생이랑 무식한 영어잘하는 학생이 무식하게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제 생각은 100이나 그걸 50밖에 설명하지 못하니까 돌겠더라구요.

며칠전부터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신곡 강의>를 보고 있는데 다시금 번역의 중요성에 대해 느낍니다. 여러 판본의 번역문을 짧게 비교해주고 있어서지요.그걸 읽다보면 번역의 미묘한 차이가 주는 미적 감각의 다층적인 차이에 대해 짧은 감탄을 쏟습니다. 모든 국민이 다 영어를 잘할 수 없으니 번역가를 키운다는 일본의 방향성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대안이 아닐까 합니다.

로쟈 2008-07-23 21:55   좋아요 0 | URL
이마미치 교수의 책을 읽다 보면 일본 인문학이 만만찮게 느껴지지요. 우리도 분발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노이에자이트 2008-07-23 23:00   좋아요 0 | URL
음...요 문장을 제가 아는 울프 여사에게 물어봐야겠네요.러시아어도 하는 캐나다 여성이랍니다.

로쟈 2008-07-24 22:07   좋아요 0 | URL
한국어도 잘해야 하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5 17:22   좋아요 0 | URL
물어본 결과 검찰의 해석은 틀렸고 피디수첩 것도 맞는 것은 아니라는데 영어가 딸려서 울프여사의 말을 잘 못알아 먹었어요.영어 그만 두고 예전처럼 한자 강의를 해야 하나 봐요.이렇게 영어가 어려워서야 원...가정법이 어렵긴 어렵네요.영어 하기 싫어...

로쟈 2008-07-25 17:34   좋아요 0 | URL
이도저도 안 맞으면 재판 오래가겠군요...
 

여전히 이명박 정부의 국정수행을 지지한다는 십 몇 퍼센트의 MB마니아들을 제외한다면 대다수 국민들에게 현시국은 한심하거나 더러운 세상이다. 개인사로도 다들 바쁜 와중에 나라 걱정까지 하려니 없던 지병까지도 생기겠다(얼마전부터 나는 음식물을 삼키는 일이 조금 불편해졌다). 그렇다고 딱히 '수'가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답답하고 갑갑한 마음에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시국의 '최전선'에 있는 시사주간지 두 편집장의 권두언을 나란히 읽게 됐다. '수'가 없으면 '법'이라도 필요한지라 챙겨놓는다.   

한겨레21(06. 07. 21) 더러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

“나는 시를 짓겠어요.”

허난설헌이 말한다. 여인이라 천대받고 가난한 여인은 더 천대받는 세상.

“용모인들 남에게 떨어지리오/ 바느질 길쌈 솜씨 모두 좋은데/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난 탓에/ …온종일 창가에서 베만 짠다네/ …베틀에는 한 필 베가 짜였는데/ 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 손으로 가위 잡고 가위질하면/ 추운 밤 열 손가락 곱아오는데/ 남 위해 시집갈 옷 짜고 있건만/ 자기는 해마다 홀로 산다네.”(‘가난한 여인을 읊음’)

기방에 빠진 남편은 가족을 돌보지 않고 모진 시집살이 속에 두 아이마저 잃은 그는 스물일곱 연꽃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문집은 명나라와 일본에서까지 이름을 얻었다.

“나는 칼을 들겠소.”

홍경래가 말한다. 출신에 따라 입신 길이 열리고 닫히는 세상.

“당일 (과거시험) 방에 이름이 오른 자들을 보니 거개가 귀족의 자질(子姪)들이었다. 경래의 노한 눈에서는 불꽃이 일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감히 위를 범해 세상을 바꿀 결심을 각제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홍경래전>)

난을 일으켜 여러 고을을 함락시키고 창고를 열어 백성의 배고픔을 달래며 추호도 백성을 범하지 않았으나, 정주성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관군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2천 명을 죽였다.

“나는 책을 읽으며 농사를 짓겠네.”

성호 이익이 말한다. 이해관계에 얽매여 파당을 짓고 돈과 힘을 차지한 쪽이 상대방을 찍어내는 세상.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생기면 반드시 변혁이 따르게 마련인데, 이는 통상적인 이치이다.” “왕도정치는 전지(田地)의 분배를 근간으로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구차할 뿐이다. 분배가 균등치 못하고 권리의 강약이 같지 않은데 어찌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당쟁에 휘말려 부친이 숨지고 형마저 극형을 당한 뒤 시골로 내려가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빈궁하게 살았으나, 그의 철학은 “추구하는 바가 공자·맹자에 접근했다”는 정약용의 상찬처럼 조선 후기를 빛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또 이번호 기사들을 읽으면서 혹 더러운 세상에 탄식하고 정신의 이물감에 잠 못 이룰 독자들을 위해, 바르지 못한 시대에 처해 선현들이 짚어간 길 몇 가지를 소개했다. 저마다 풍진 세상을 만났으나 마음만은 더럽히지 않고 의기를 꺾지 않았으니, 연꽃같이 피어난 시심은 거룩하고 의분 담긴 칼끝은 서늘하며 호미로 새긴 논지는 길이 빛날밖에.

물론 그때는 지금보다 더 가혹한 세상이었고, 그들은 우리보다 더 걸출한 인물이었을 게다. 참신한 21세기의 상상력으로 각자 처지에 맞는 대처법을 궁리해보시길. 이름하여, 더러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

*최근까지 <한겨레21>에 연재된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이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한겨레출판)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 이 칼럼의 인용 부분은 모두 책에서 재인용한 것이다.(박용현 한겨레21 편집장)

시사IN(08. 06. 30) 이명박 정부에서의 절망 탈출법

참 오랜만에 ‘구악’이라는 말을 다시 여러 군데에서 듣게 된다. 구악이란 군부독재 시절부터 철저하게 권력과 사주의 편에 서서 곡필을 휘둘러온 퇴물 기자를 가리키는 말로, 일종의 언론계 전문 용어다. 촌지와 향응 문화 속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은 양지만 골라 다녔지만 민주화와 함께 서리를 맞아 역사에서 퇴장하는가 싶었다. 그러던 것이 이명박 정부 출범과 동시에 언론계 기관장 자리를 노리고 떼를 지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경탄할 만한 탐욕을 가졌다.

기자 시절 이런 구악을 상사로 모시게 되면 지옥을 맛본다. 전 직장에서도 언론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한 사람과 같이 일을 한 적이 있는데 제정신을 갖고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는 지시만 할 줄 알지 소통이란 걸 몰랐다. 언론도 기업이기 때문에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으려면 권력이나 대기업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고 지치지도 않고 주절거렸다. 기자들이 항의하면 그는 마지못해 사과하는 척했다가 급한 소나기만 피하고 나면 어느새 시치미 떼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똑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그와 일하면서 우울증에 걸리지 않으려고 나름으로 연구를 많이 했다. 도가 수행자가 한다는 유체이탈도 자주 써먹었다. 정신을 육체에서 분리해 회의실 천장을 날아다니며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회의 장면을 지켜보노라면 절로 웃음이 나와 울분이 가라앉곤 했다. 그와 지낸 몇 년 동안 유체이탈 분야에서 상당한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불행에서 벗어날까 책도 많이 뒤져봤는데 소득은 별로 없었다. 과학자들이 제시한, 절망에서 놓여나는 구체적인 방법은 창의력을 발휘하라든가,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라는 정도였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 시간이 갈수록 극도의 분노와 절망을 표출하는 이들이 자꾸 늘어만 간다. 얘기를 들어보면 구악과 생활하면서 겪게 되는 증상과 비슷하다. 이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위장 반성했다고 분노하고, 그리고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던 일을 계속하려고 시도하는 걸 보며 절망한다. 이제 100일밖에 안 지났는데 남은 4년 몇 개월을 어떻게 견뎌내느냐고 하소연한다.

이순신 장군 동상 밑에서 유체이탈을 해 ‘명박산성’ 뒤에 웅크린 대통령의 초라한 모습을 지켜본다면 위안이 되려나. 매일 밤 창의력을 발휘해 공권력을 희롱하고 경찰버스를 끌어내느라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걸 보면 시위대는 이미 절망 탈출법을 체득한 것 같기도 하다.(문정우 편집국장)

08. 07. 22.

P.S. '명박산성'이 위키백과에도 등재돼 있다(http://ko.wikipedia.org/wiki/%EB%AA%85%EB%B0%95%EC%82%B0%EC%84%B1). '이견'이 제기되어 '삭제 토론'중이라고 하는데, 그나마 누리꾼들의 이런 수고가 요즘은 '절망' 속에서도 사는 재미를 잠시나마 느끼게 해주는군. 몇 군데 둘러보다가 찾은 오늘의 굿뉴스와 배드뉴스. 나쁜 쪽은 너무  많아서 꼽을 수도 없다. 단적으로, 외국인들이 31일째 주식을 매도하고 있다는 소식(http://news.hankooki.com/lpage/economy/200807/h2008072202484984010.htm). "지금까지는 미국경제(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따른 신용경색)로 인해 외국인들이 주식을 팔고 있다고 믿어왔지만, 이젠 한국경제(경기침체+기업실적악화) 자체가 문제라는 시각이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한다. 한국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도 별로 전망이 없다는 걸 그들은 아는 모양이다. 그런 가운데 좋은 소식이란 '정치인DB'가 구축될 예정이라는 것(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7220023375&code=940401). "의정활동 내용과 이력, 발언 등을 기록한 정치인 온라인 이력 시스템을 만드는 시도다. 촛불정국에서 드러난 정치권의 무능력에 실망한 대학생들이 네티즌 손으로 직접 정치인 자료를 축적하고 평가할 필요성을 느낀 결과물로 나온 것이다." 당장 다음 선거에서부터라도 활용된다면 좋겠다. 국민들의 '닭짓'을 중단시켜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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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7-22 09:21   좋아요 0 | URL
참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_-

로쟈 2008-07-22 10:36   좋아요 0 | URL
거기에 공부할 건 왜 그리 많은지요. 요즘은 독도사에다 엠네스티에 대해서까지 학습하고 있으니...

연두부 2008-07-22 11:54   좋아요 0 | URL
헉 제 말이 바로 이거 거든요...요즘은 아침에 출근해서 인터넷 클릭하기가 두렵습니다....게다가 어쩌다 어제먹은 술이 덜깬 상태이면..분노와 참담함에 눈물바람까지...쩝

로쟈 2008-07-22 22:43   좋아요 0 | URL
자초한 부분도 없지 않으니 더 참담하지요...

수유 2008-07-23 18:24   좋아요 0 | URL
나는 책을 읽으며 농사를 짓겠네..
비록 공맹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그러고 싶네요, 정말로. 농사는 못지어도 밥은 지으면서.

로쟈 2008-07-23 21:56   좋아요 0 | URL
곧 방학이시네요.^^

수유 2008-07-24 12:13   좋아요 0 | URL
이번 방학은 꽝입니다. 이미 방학은 했지만 오늘도 학교이라나요.;;

로쟈 2008-07-24 22:08   좋아요 0 | URL
에어콘은 나오지 않나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3 22:49   좋아요 0 | URL
2005년도 독도파동 때 상당한 분량을 기록해 놓은 일기를 보니 어쩌면 올해와 똑같은지...그 당시 이미 허무맹랑한 제안으로 밝혀진 것을 올해도 똑같이 읊어주시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대체 왜 이럴까요.

로쟈 2008-07-24 22:07   좋아요 0 | URL
그래서 DB가 필요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25 17:33   좋아요 0 | URL
제가 독도의 식생에 대해 조금 알아요.거기 식수로 쓸 수 있는 샘이 두갠가 있는데 지금 독도경비대 마시기도 빠듯하대요.그런데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자면서 무슨 호텔을 짓자, 심지어 주택단지를 짓자 하는데, 누가 거기 와서 호텔 종업원을 하며 주민이 있으면 학교도 지어야 하는데...그리고 거기는 고속버스나 비행기 타고 가는 곳도 아니고 악천후와 높은 파도때문에 일 년에 갈 수 있는 날이 얼마 안 돼요.

로쟈 2008-07-26 00:44   좋아요 0 | URL
그냥 다 '쇼'라고 해야겠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6 22:57   좋아요 0 | URL
쇼가 재미가 있어야 쇼지요.이거 원 짜증나서...

로쟈 2008-07-27 16:31   좋아요 0 | URL
가증스러운 쇼들도 있으니까요...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7월 21일)'이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를 다루고 있다. 그가 태어난 날이 1911년 오늘이어서이다. 한데, 두 종의 국역본 가운데, 커뮤니케이션북스판의 이미지를 올려놓고 있어서 예전 교수신문의 고전번역비평을 떠올리게 됐다. 내 기억에는 민음사판이 더 추천할 만한 번역이라고 제시됐었기 때문이다. 다시 찾아보니 그렇다. 참고삼아 챙겨놓는다(<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2>(생각의나무, 2007)에 수록돼 있다).

한국일보(08. 07. 21) 미디어의 이해

1911년 7월 21일 캐나다의 미디어 이론가이자 문명비평가인 마샬 맥루한이 태어났다. 1980년 69세로 몰. 맥루한은 마니토바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다가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꿨고, 캠브리지대에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시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영문학 교수로 미국과 캐나다의 대학에서 20여년간 대중문화를 강의했다. 지금은 일상 용어가 된 ‘지구촌’이나 ‘정보시대’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미디어의 이해>는 맥루한의 이런 공부의 배경-테크놀로지와 문학과 문화비평-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던 책이다.

<미디어의 이해>가 출간된 것은 1964년이다. 반향은 대단했고 맥루한은 스타 대접을 받았다. 이듬해 뉴욕헤럴드트리뷴은 맥루한을 “뉴턴, 다윈,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파블로프 이후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꼽았다. 1967년 뉴스위크는 학자로는 드물게 그를 표지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맥루한의 유명한 명제는 이 책의 서론 제1장이다. 그는 이어 나르시스 신화를 빌어 미디어 시대 인간의 운명을 말한다. “나르시스는 혼수상태나 감각 마비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narcosis’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신화가 말하려는 핵심은 인간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확장한 것(나르시스에게는 거울 같은 물)에 갑자기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미디어의 이해>의 부제가 바로 ‘인간의 확장’이다. 맥루한은 음성언어부터 돈, 시계, 사진, 신문, 자동차, 광고, 게임, 텔레비전, 무기 등 26가지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물로 보고 독특한 예언적 표현과 비유, 고전 문학과 현대 대중문화를 종횡하는 현란한 인용과 분석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미디어로 본 문명사이기도 하다. 이 책이 미디어 전공학과의 필독서를 넘어 현대의 고전으로 읽혀야 하는 이유다. 영화 ‘매트릭스’의 광고카피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였던가.맥루한은 40년 전에 이미 그것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대로 된다.”(하종오기자)

교수신문(06. 11. 24) 고전번역비평(53) 마셜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 국역본은 두 종류가 있다. 박정규 역(커뮤니케이션북스. 1997)과 김성기·이한우 공역(민음사, 2002)이 그것이다. 그 외 완역이 아닌 초역이 있었으나 지금은 절판돼 찾을 수 없다. 이글을 위해 사용한 영어 원본은 『Understanding Media』(MIT Press, 1994. 초판 1964년)이다. 박정규 역과 김성기·이한우 역 사이에는 상당한 시차가 있고 그래서 우리는 후자가 전자에 비해 보다 발전된 번역본일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논리적인 추론일 뿐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먼저 이 책의 번역과 관련해 특별한 성격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그것은 ‘미디어의 이해’의 원저자의 글이 난삽하고 의미가 애매모호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글을 번역하는 경우 원천적으로 옮긴 글 또한 난삽하고 그 의미가 애매해질 수밖에 없다.

맥루한의 글은 구술적이다. 즉 명석하고 분명함과는 거리가 먼 反개념적, 反분석적, 反기계론적인 것이 그의 글이다. 맥루한이 말한 것처럼 번역을 기계론적 작업이라고 한다면 그의 이야기는 번역에 적합한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문은 그의 원문을 읽는데 도움을 주는 참고서로서의 역할이 더 어울릴 수 있다. 번역본만으로는 원본의 의미전달이 제대로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맥루한의 저서의 경우는 역자의 적절한 해석과 의역이 불가피한 부분이 꽤나 많다. ‘미디어의 이해’는 꽤 두꺼운 책이다. 이를 모두 언급하기는 힘들다. 몇 가지 주된  주제를 중심으로 비교 평가하고자 한다.



꽤나 난삽하고 애매한 책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는 맥루한의 가장 유명한 메타포 중의 하나다. 이 말은 책 ‘미디어의 이해’ 첫 장에 등장한다. 그 첫 구절을 박정규는 이렇게 옮겼다. “우리의 문화는 모든 사물을 관리하기 위해 이들을 분할하고 구분하는데 숙달되어 있으므로 이제 실제로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것을 납득하게 되면 다소 충격이 될 것이다.”(23쪽) 김성기 등의 번역은 이렇다. “모든 사물들을 통제의 수단으로 분리해서 보는데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는 서구와 같은 문화 내에서는 작용면에서나 실제적인 면에서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주장이 종종 충격으로 여겨진다.”(35쪽) 

이 문장의 원문은 “In a culture like ours, long accustomed to splitting and dividing all things as a means of control, it is sometimes a bit of a shock to be reminded that in operational and practical fact, the medium is the message.”(7쪽)이다. 이 문장(원문)의 전언(傳言)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 시대의 사물이해 방식은 이분법 혹은 분절적인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사물을 지배 통제하기 위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은 이분 혹은 분절이 아니라 통합적인 인식으로 이것은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적인 주장이다”하는 것이다.

원문의 내용을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박정규와 김성기·이한우 번역에 빠진 부분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원문의 의미를 보다 쉽게 전달하는 데는 후자가 더 나은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두 번역문 모두 원문 없이 번역문만을 읽을 때 원문의 전언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데는 상당한 의문이 제기된다.

개념 번역, 암묵적 의미 살려야
다른 예를 보자. 여기서도 유사한 문제가 발견된다. 다시 말해 번역문만을 갖고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 말이다. “That technologies are ways of translating one kind of knowledge into another mode has been expressed by Lyman Bryson in the phrase ‘technology is explicitness.’ Translation is thus a ‘spelling-out’ of forms of knowing. What we call ‘mechanization’ is a translation of nature, and of our own natures, into amplified and specialized forms.”(56쪽)

박정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옮겼다. “테크놀로지라는 것은 한 종류의 지식을 또 다른 양식으로 번역하는 방법이라고 라이먼 브라이슨(Lyman Bryson)은 말하면서 ‘테크놀로지는 명료함이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따라서 번역(translation)은 앎의 형태를 ‘분명하게 하는’것이다. 한편 우리가 ‘기계화’라는 부르는 것은 자연을, 또한 우리 자신의 속성을 증폭되고 전문 분화된 형태로 바꾸는 것이다.(93쪽)

한편 김성기·이한우 역은 이렇다. “기술이 한 종류의 지식을 다른 양식으로 번역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라이먼 브라이슨 Lyman Bryson은 ‘기술은 명료화이다’라고 표현한바 있다. 따라서 번역이란 인식의 형식들을 ‘하나하나 판독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계화’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과 우리인간들의 본성을 증폭되고 특수화된 형태들로 번역하는 것이다.”(102쪽)

이들 사이에 다른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박정규가 “앎의 형태를 분명하게 하는” 것으로 옮긴 ‘a spelling-out of forms of knowing’을 김성기 본은 ‘인식의 형식들을 하나하나 판독하는 것’으로 옮기고 있다. 다른 하나는 ‘specialized form’을 ‘전문 분화’와 ‘특수화’로 옮긴 부분이다. 이들 두 가지 번역의 경우는 박정규 역이 김성기 역보다는 쉽게 그리고 보다 원문의 뜻을 충실히 옮기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양자 모두에게서 흠이 발견된다. 위 문장의 경우 ‘…nature, and of our own natures’의 경우 이를 단순히 ‘자연을, 또한 우리 자신의 속성을’으로 옮기는 경우 원문과 대조 없이는 거의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보다는 ‘사물의 원래 자연적인 상태의 것을, 그리고 우리 자신의 본래적인 속성들’ 정도의 의역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번역은 오역이나 불충분한 번역이 될 위험이 있다.

한 가지 더 작지만 큰 문제이기도 한 것이 있다. 그것은 “technology is explicitness.” 문장의 ‘explicitness’ 이다. 이를 두 번역본은 모두 ‘명료함’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explict’는 ‘tacit’의 반대되는 그래서 ‘암묵적’과 대칭적인 ‘명시적’-보이게 밖으로 드러낸다는 의미의-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할 것이다. 맥루한이 부단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 근대적 시각 문화라고 이해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암묵적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번역에 좀 더 세심해야할 이런 종류의 단어들이 있다. 예를 들면 ‘Synesthesia or unified sense.’(315쪽)를 두 번역은 모두 ‘통일된 감각’(451쪽, 437쪽)으로 옮기고 있는데 이는 ‘통 감각 또는 통합감각’이 보다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오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의미전달이 왜곡되거나 전달이 잘 안되는 용어들은 많이 발견된다.

원서 대신하기 위한 노력
두 번역본을 비교하면서 얻게 된 결론은 원문의 번역내용에 있어서는 양자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큰 차이가 없게 된 이유는 아마도 김성기·이한우의 번역이 앞서 나온 박정규의 번역을 참조했고 그 보다는 두 번역 모두가 일본어 번역본-박정규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김성기·이한우는 참조했음을 언급하고 있다-에 의존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결과적으로 두 번역에는 모두 직·간접으로 일본어 번역이 많이 참조됐기 때문에 유사할 수밖에 없다고 추측된다.

이런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번역본 가운데 어느 것 하나를 추천한다면 그것은 김성기·이한우의 번역이다. 그 이유는 번역 책으로서의 격식을 보다 충실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지만 박정규 역에는 없는 원본의 이름이나 참조서적, 번역과정 등에 관한 내용을 김성기·이한우의 역은 밝히고 있고 또 욕심에 차진 않지만 역자 주 그리고 L. H. Lapham의 해제용 서론 등이 첨가돼 독자에게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추천을 하면서도 맥루한 사상을 이해하는데 번역본이 원서를 대신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상당한 보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번역자가 전공이 다르기 때문인지 주석이 필요한 사항의 선택이나 용어 해석 등에 있어서 단절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다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이 훗날 보완되기를 기대해 본다.(임상원/ 고려대 명예교수·언론사상) 

08. 07. 21.

P.S. 요는 두 종의 번역본 모두 원서를 대신할 수 있는 수준은 아직 못된다는 것이겠다(유감스럽지만, 현재로선 다수 고전 번역서들의 현실이 그러하다). 내가 알기에 맥루한의 책은 <미디어의 이해> 외에 <미디어는 맛사지다>(열화당, 1988;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지구촌>(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등이 더 소개돼 있다. 그리고 해설서로는 조너선 밀러의 <맥루안>(시공사, 2001), 필립 마샨드의 <마셜 맥루언>(소피아, 2006), 그리고 데이비드 스테인즈 등이 엮은 <매클루언의 이해>(커뮤니케이션북스, 2007)가 눈에 띈다. 언젠가 적은 적이 있지만 맥루한의 책을 연달아 낸 출판사에서 그 강연과 대담을 묶은 책은 '매클루언의 이해'라고 내는 건 매우 엉뚱하면서도 기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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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2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7-22 10:32   좋아요 0 | URL
사실 대단히 미디어 친화적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미디어론이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정보화사회론 같은 것도 그렇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3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 어렵네요...

로쟈 2008-07-24 22:06   좋아요 0 | URL
사실 어렵기로는 우리말이 더 어렵습니다.^^;
 

7월도 2/3가 지나갔지만 뒤늦게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꼽아본다. 개인사정으로 바쁘기도 했고, 또 굳이 독서 목록을 작성해봐야 읽을 만한 여유도 없기 때문에 미뤄졌다. 그냥 넘어가지 않은 건 해오던 관성이 있어서이고, 한편으론 생산적인 일을 할 형편이 아닐 때 '단순작업'으로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먼훗날 '기억'을 대신해줄 수도 있는 것이고).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웹진(http://www.kpec.or.kr/index.asp)을 참조하여 '2008년 7월의 읽을 만한 책'을 따라가보고 생각나는 책 몇 권을 덧붙인다.

 

 

 

 

1. 문학

작가 신경숙씨가 꼽은 이달의 책은 공선옥의 <행복한 만찬>(달, 2008)이다. '공선옥의 음식산문집'이란 부제를 살펴보지 않으면 소설집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요리책도 아니다. "행복한 만찬이라는 제목을 보고 책을 읽지 않은 이들은 요리책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 딱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은 단순한 요리책이 아니다. 그리고 이 책에 소개된 스물여섯가지의 먹거리들을 두고 요리라고 말하기는 좀 뭐하고 그야말로 생존의 냄새가 훨씬 더 가미된 음식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이 책에서 공선옥이 소개하는 음식 만드는 법을 그대로 따라하기란 매우 쉬운 것 같은데도 사실은 “정서” 라는 노하우가 거의 80% 들어가 있기 때문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다. 대신 공선옥이라는 작가가 성장한 시기의 우리나라 농촌 먹거리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는 마치 인문학 공부하듯 따라가 볼 수 있다."라는 게 추천의 변이다.

순전히 '만찬'이란 제목 때문에 떠올리게 되는 책은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원작자 이자크 디네센의 <바베트의 만찬>(문학동네, 2003)이다. 이 역시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나는 예고편밖에 보지 못해서 자세히 말하진 못하겠다. "프랑스 혁명의 물결에 떠밀려 노자매의 집에 몸을 의탁하게 된 프랑스 제일의 요리사 바베트가 차려내는 특별한 만찬이 가슴 가득 따뜻한 감정을 자아낸다"고 하므로 그런 만찬 그리울 때 잠시 침을 흘리며 한번 손에 들어봄 직하다.

그리고는 좀 포만감이 느껴질 때 대린 맥마흔의 <행복의 역사>(살림, 2008)를 읽어보는 건 어떨까? 700쪽이 넘는 분량이니 이 또한 아주 '포만한' 책이다. 다소 무모해 보이는 주제의 책이지만 저자는 멀쩡한 역사학 교수이다. "철학, 역사, 심리학, 유전학, 스마일리 페이스를 망라하며, 행복 추구가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쾌락을 야기하고, 또한 새로운 형태의 고통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준다. 예술과 건축, 시와 경전, 음악과 테크놀로지, 문학과 신화를 포함한 많은 출처에 기반을 두고, 인간의 행복에 대한 지적 역사를 제시한다."고 돼 있다.

 

 

 

  

2. 역사

역사분야의 책으로 이덕일씨가 꼽은 건 미국의 두 역사학자가 쓴 <히드라>(갈무리, 2008)이다. 이미 '헤라클레스의 칼과 히드라의 머리'(http://blog.aladin.co.kr/mramor/2072932)란 페이퍼에서 소개한 바 있다. 630쪽이 넘는 분량이라 이 역시 쉽게 엄두를 낼 만한 책은 아니지만 이열치열로 읽어볼 만하겠다. "<히드라>는 자본주의 발달사를 민족사로 바라봤던 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밑의 관점, 즉 다중의 관점으로 바라봄으로서 ‘잊혀진 역사의 일부를 복원하면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히드라>의 저자인 피터 라인보우와 마커스 레디커는 자본주의 발달사를 ‘헤라클레스적인 세계화 과정에 여러 머리를 가진 히드라가 저항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소개글에서도 시사되지만, 네그리/하트의 <다중>(세종서적, 2008)과 세트로 읽을 필요가 있다. 마커스 레디커의 또다른 책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에서>(까치글방, 2001)와 하워드 진의 <살아있는 미국역사>(추수밭, 2008)도 곁들일 수 있겠고.



 

 

  

3. 철학

김상환교수가 추천한 철학분야의 책은 뜻밖에도 불교 관련서이다. 김달진 선생의 <쉽고 뜻깊은 불교 이야기>(문학동네, 2008). 김달진 전집의 한권으로 나온 책으로 사위인 최동호 교수가 엮었다. 추천의 변은 이렇다. "여래장(如來藏), 유심조(唯心造), 제행무상(諸行無常) 같은 불교의 가르침은 심오한 철학적 진리를 담고 있다. 이런 진리에 대해 수많은 학문적 논구가 있어 왔고 앞으로도 많은 저서가 쏟아질 것이다. 최근에는 데리다, 들뢰즈, 라캉 등과 같은 첨단의 서양 철학도 결국 이런 불교의 진리로 회귀하는 듯하여 학자들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이런 학술적 논구나 이론들은 높은 수준의 교양과 전문적 지식을 쌓은 사람들의 전유물이지만, 부처는 결코 어렵게 말하지 않았다. 도둑, 창녀, 거지, 과부 등과 같이 무지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쉽게 가르쳤다. 김달진 전집의 일부로 재출간된 <쉽고 뜻 깊은 불교 이야기>를 읽으면 알 수 있다." 제목 그대로라는 것.

불교에 관한 더 쉬운 책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오강남의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현암사, 2006), 나카자와 신이치 등의 <불교가 좋다>(동아시아, 2007/2008), 그리고 우더신의 <한권으로 읽는 불교>(산책자, 2008) 등이 참고할 만하지 않을까 싶다. 데리다와 불교에 대한 학술논문들도 여럿 있지만 도둑, 창녀, 거지, 과부까지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4. 정치

손호철교수가 꼽은 정치분야의 책은 손석춘의 <주권혁명>(시대의창, 2008)이다. 물론 이 책의 최대 강점은 시의성이다. 해서, 추천자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의 헌법 1조로서 최근 광우병 관련 시위에 많은 시민들이 들고 나오는 표어이다. 국민들이 이 같은 표어를 들고 거리로 나선 것은 국민이 뽑은 대통령과 국회를 중심으로 한 대의제 민주주의, 간접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현상과 관련해 <주권혁명>은 시의적절한, 주목할 만한 저서이다."라고 적는다.  

그런 시의성을 고려해서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로 박세길의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시대의창, 2008), 그리고 당대비평기획위원회가 엮은 <광장의 문화에서 현실의 정치로>(산책자, 2008), 아고라 폐인들이 엮은 <대한민국 상식사전 아고라>(여우와두루미, 2008) 등을 꼽아볼 수 있겠다. 2008년 여름과 함께 기억될 책들이다.

 

 

 

 

5. 경제/경영

정운찬교수가 추천한 경제/경영서는 정석주의 <30년 흑자경영>(티비, 2008)이다(간행물윤리위원회 웹진에는 저자가 '장석주'로 오기돼 있다). "<30년 흑자경영>은 일차적으로 경영사례집으로서 저자가 지난 30년간의 기업경영을 돌아보는 책이지만, 저자의 경영철학과 더불어 기업과 사회 전반에 대한 따뜻한 시각이 녹아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로선 읽어볼 일이 없을 듯하다. 그나마 손길이 갈 법한 경제경영서는 <문학에서 배우는 리더의 통찰력>(이다미디어, 2008)이나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1, 2>(21세기북스, 2007/2008) 같은 종류의 책이다. 하기야 내 주제로 말할 것 같으면 경영을 만나기는커녕 '인문의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이 더 잦다. 단테 알리기에리처럼...

 

 

 

 

6. 사회 

사회분야의 책은 벨 훅스의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모티브북, 2008)다. 추천자인 김문조 교수에 따르면, "저자 벨 훅스는 미국의 저명한 페미니스트 사상가이자 미국 여성운동의 대모로서, 흑인 여성 문제에 관한 많은 저작을 남긴 영문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이다. 이러던 그가 <계급에 대해…>에서 젠더도 아니고 인종도 아닌 계급이 모든 사회문제의 핵심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나도 책이 나왔을 때 '갓 댐 아메리카!'(http://blog.aladin.co.kr/mramor/2107023)란 페이퍼에서 다룬 적이 있다(아직 손에 들어보지 못했지만).

"부제 ‘Class Matters’의 직역은 "계급이 문제다“인데 번역서 제명을 지나치게 비틀었다고 생각하며 인용된 책자의 번역에도 드문드문 생소한 대목이 발견되나, 총체적으로 유려한 번역이 진의를 잘 살려 원전의 가치를 배가시키고 있다. 대운하, 광우병 논쟁 등으로 산만해진 우리 의식을 새로이 가다듬을 수 있는 예사롭지 않은 책자로, 크고 넓게 생각하기를 원하는 독자들께 자신 있게 권한다."는 추천의 변을 읽으니 마음이 조금 동하는군. 참고로, 벨 훅스가 엮거나 지은 책으론 <행복한 페미니즘>(큰나, 2002), <사랑의 모든 것>(동녘, 2004), <평화 이야기>(황금비늘, 2007) 등이 더 소개돼 있다.

 

 

 

 

7. 과학

장경애 편집장이 추천한 과학분야의 책은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의 복수>(세종서적, 2008). <가이아>(갈라파고스, 2004; 김영사, 1995)의 후속작일 텐데, 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저자는 판단한다. "행성의사를 자처하는 저자인 제임스 러브록은 1970년대 ‘가이아: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를 내놓으면서 생물들이 지구의 대기권·해양·대륙·암석 같은 무생물적 환경에 서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지구는 자기조절 기능을 갖춘 생명체다. 하지만 이제 지구온난화로 가이아는 자기조절기능을 잃고 지구생명체를 말살시킬 수 있는 단계까지 왔다고 경고한다." 내 생각으론 가이아가 복수하기도 전에 인류가 자멸할 확률이 더 높아보이지만...

한편, 그러한 경고가 과장됐다고 주장하는 '회의적 환경주의자' 비외른 롬보르의 <쿨잇>(살림, 2008)도 이번에 출간되었기에 나란히 읽어봄 직하다. 롬보르는 문제의 진단 못지 않게 그 해결방안(=해결비용)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하는데, 그에 따르면, "일부 정치가와 환경 전문가들을 통해 형성된 지구 온난화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심하게 치우쳤다. 지구 온난화를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이산화탄소를 조절하는 데에만 집착한다.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게 부분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주 관심사는 분명히 인간과 환경의 안녕을 최대한 증진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그러려면 다른 많은 요소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제목만 보자면 그의 최신작도 기대가 된다.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이주은의 <그림에, 마음을 놓다>(앨리스, 2008)이다. "‘그림’하면 주변에는 이름난 명화들에 대한 설명이 차고 넘친다. 그러나 마음을 내려놓는 그릇으로의 그림을 이야기 하고 있는 이 책에는 “언젠가 나도 이런 순간이 있었지“를 상기시키는 그림들이 담겨있다."는 것이 추천의 변이다. 말 그대로, '마음 놓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것. 미술애호가인 김지은 아나운서의 <예술가의 방>(서해문집, 2008)도 같은 종류의 책이겠다.

하지만, 내가 이번 여름에 읽겠다고 도서관에서 원서와 함께 대출한 건 아주 무거운 책들이다. 할 포스터 등의 <1900년 이후의 미술사>(세미콜론, 2007)와 사이먼 샤마의 <파워 오브 아트>(아트북스, 2008) 같은 책. 가벼운 책은 높은 곳에, 그리고 무거운 책은 낮은 곳에 두고 읽어볼 참이다. 남들 다 피서갈 때...

 

 

 

 

9. 교양

이한우기자가 꼽은 교양분야의 책은 데이비드 덴비의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1, 2>(씨앗을뿌리는사람, 2008)이다. 사실 표지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필요 때문에 나도 지난주에 구입한 책이다. 추천의 변은 이렇다. "아! 고전을 이렇게 소개하는 것이었구나! 사실 제목만 보았을 때는 따분할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의 영화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스스로 고전에 대한 불만과 기대를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정보의 홍수를 헤매던 어느 날 문득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즉 저널리즘의 무의미함에 몸서리친다. ‘내가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쩌면 40대 후반의 남자라면 피할 수 없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과 맞닥뜨린 것인지도 모른다. 특이하게도 그는 의미회복을 위해, 30년 전 대학 1학년 때 들었던 서양고전 강좌를 다시 듣기로 결심한다. 다행히 그의 모교인 컬럼비아대학에는 그 강좌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30년 후배들과 똑같이 앉아서 학생이 되어 고전의 탐험을 시작했고 이 책은 그 탐험기다."

내 관심은 저자의 독서편력이 아니라 미국의 한 명문대학 강의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고전 읽기의 풍경이다. 어떤 커리큘럼이 제시되고 어떤 방식으로 작품을 읽으며 어떤 토론들을 벌이는가가 궁금한 것. 덴비의 책과 같이 읽어볼 만한 건 바로 그 컬럼비아대학에서 강의를 했던 에드워드 사이드의 마지막 저작이자 강연집 <저항의 인문학>(마티, 2008)이다(번역은 매끄럽지 못하다). '민주적인 인문주의'를 주창하는 사이드에 비해서 덴비는 보다 보수적인 인문주의를 지지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덴비는 <미국 정신의 종말>의 저자, 시카고 대학의 앨런 블룸과 오히려 더 친화적이겠다. 불룸과 동창인 <희망의 인문학>의 저자 얼 쇼리스는 사이드 쪽에 가깝겠고.

한편, '위대한 책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위험한 책들'과 만나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이민희의 <조선을 훔친 위험한 책들>(글항아리, 2008)은 역사분야의 책으로 분류되지만 여름나기 교양서로도 좋지 않을까 싶다.

 

 

 

 

10. 전기 

아동분야의 책은 이번에도 전기로 대체한다. 읽을 만한 평전들이 여러 권 나왔기 때문이다. 먼저, 두 아들이 쓴 아버지와 어머니의 전기. 저우하이잉의 <나의 아버지 루쉰>(강, 2008)과 데이비드 리프의 <어머니의 죽음 - 수전 손택의 마지막 순간들>(이후, 2008)이 각각 저명한 작가였던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회고하고 있는 책이다. 그리고 두 명의 영화인을 다룬 책으로 자미 버나드의 <쿠엔티 타란티노>(나무이야기, 2008)와 테리 콜먼의 <로렌스 올리비에>(을유문화사, 2008). 타란티노는 <킬빌>로 잘 알려져 있지만, 로렌스 올리비에? 젊은 세대에게는 생소할지도 모르겠지만 셰익스피어 연기의 대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이다. 아래 햄릿을 연기했던 바로 그 사람. 이젠 전설이 된...

08. 07. 19.

 

 

 

 

P.S. 고작 열흘쯤 남겨놓고 고전 읽기 목록까지 챙기는 건 무모해 보이지만 어차피 '목록'일 뿐이므로 허세도 부려본다. '이달의 고전'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서울대출판부)이다. 루틀리지에서 나온 가이드북을 참조할 수도 있겠다. 여차하면, <인간불평등 기원론>도 읽어보면 좋겠고. 이 18세기 저작은 "정치적 권력 혹은 권위의 정당성을 집요하게 문제삼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의 계약'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는 즈음인지라 골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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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8-07-20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00년 이후의 미술사>는 저도 꼼꼼히 읽어볼 계획입니다만..계획은 계획인지라^^ 사이먼 샤마의 <파워 오브 아트> 동영상은 필요하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책값들이 장난이 아니군요. 번역서와 원서를 같이 구입하면...띵!!

로쟈 2008-07-20 11:58   좋아요 0 | URL
그래서 번역서와 원서를 모두 대출했는데, 하드카바라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20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 님은 젊은 세대이면서도 로렌스 올리비에를 아시네요.

로쟈 2008-07-20 21: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도 아직 '젊은 세대'하고 싶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20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버스로 출퇴근하는데 월요일엔 병원가는 노인들이 많이 타요.그럴 땐 60대들이 80대들에게 자리 양보하고 그래요.고령화 사회를 실감하죠.50대까지는 청춘으로 보고 30대는 청소년이라고 연령조정을 해야 할 때가 올 것 같더라구요.

로쟈 2008-07-21 10:18   좋아요 0 | URL
겉늙은 '청춘'들이 늘어나겠는데요.^^

lifeisart 2008-07-21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술쪽은 art since 1900과 power of art를 여름나기로 정해볼까 생각중인데^^ 소개해 주신 책들 중, 제 수첩에 적은 책들이 빼곡합니다....마냥 흐뭇하네요!

로쟈 2008-07-21 21:59   좋아요 0 | URL
가족들에겐 따돌림 받을 수 있는 여름나기입니다.^^;
 

읽어야 할 책은 많고 써야 할 글도 많은데 아직도 컨디션은 찌푸린 날씨를 닮았다. 게다가 책들은 또 왜 이리 더디 읽히는지. 투정삼아 어젯밤에 잠시 읽다 만 한 대목을 다시 들춰본다. 리처드 파이프스의 <소유와 자유>(나남, 2008)를 원서와 함께 읽는데, 서문의 끄트머리에서 파이프스는 야콥(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세계 역사의 관찰>에서 한 대목을 인용한다. 자신이 러시아사 전공자이고 근대유럽사에 관한 교재도 집필한 적이 있지만 이 책은 훨씬 넓은 범위를 다루고 있기에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런저런 사실이나 해석에 대해 비난할 게 분명하다"고 생각해서다(물론 홉스봄처럼 '세계사'를 다루는 역사가들도 있긴 하다!). 그런 비난에 대한 자기변호로 파이프스는 역시나 '아마추어 역사가'란 혹평을 듣기도 했던 부르크하르트의 말을 인용하는 것인데, '딜레탕티슴'에 대해서 '자콥 부르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취미로 하는 그림은 예술계에서 크게 무시당하고 있다. 예술은 완벽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에 평생을 바치는 대가가 아니라면 그 무엇도 아니다. 그러나 학문의 경우 한정된 분야만을 숙달하더라도 이른바 전문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 개요를 정리하고 이를 존중할 수 있는 능력을 없애고 싶지 않다면 가능한 한 많은 분야를 어쨌든 개인적으로 조금이라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전문지식을 강화하고 다양한 역사적 관점을 익힐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전공 이외의 분야에 대해선 문외한이 될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는 대체적으로 야만인에 불과하다.(<소유와 자유>, 14쪽)

 

 

 

 

'딜레탕티슴'이란 "예술이나 학문 따위를 직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취미 삼아 하는 태도나 경향"을 가리킨다. 그런 딜레탕티슴이 예술분야에서는 보통 무시당하는 편이지만 적어도 역사학에서만큼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자신의 전문지식을 강화하고 다양한 역사적 관점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파이프스는 이 대목을 부르크하르트의 독일어 원서에서 직접 번역하여 옮겨놓고 있는데, 그의 번역은 이렇다.

[Dilettantism] owes its bad reputation to the arts, where, of course, one is either nothing or a master who devotes his entire life to them, because the arts demand perfection. In learning, by contrast, one can attain mastery only of a limited field, namely as a specialist, and this mastery one should attain. But if one does not wish to forfeit the ability to form a general overview - indeed, to have respect for such an overview - then one should be a dilettante in as many fields as possible - at any rate, privately - in order to enhance one's own knowledge and enrichment of diverse historical viewpoints. Otherwise one remains an ignoramus in all that lies beyond one's specialty, and, under the circumstances, on the whole, a barbarous fellow.

<소유와 자유>에서는 'Dilettantism'을 역자가 '취미로 하는 그림'이라고 제한적 의미만 번역하는 바람에, 그리고 내가 강조한 대목에서는 '딜레탕트'란 말을 따로 옮기지 않는 바람에 '전문가'와 '딜레탕트'간의 대조가 희석됐다. 그래서 더 낫게 번역돼 있지 않을까 싶어서 부르크하르트의 책을 찾았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지난달에 나온 <세계 역사의 관찰>(휴머니스트, 2008)과 예전에 나온 <세계사적 성찰>(신서원, 2001), 그리고 같은 책의 영역본 <역사에 관한 성찰(Reflections on history)>(1943/1979)이다. 인용문과 같은 대목을 두 국역본과 영역본은 각각 이렇게 옮겨놓았다.

딜레탕티슴이란 말은 예술 분야에서 평판이 나빠진 말이다. 예술분야에서는 대가(大家)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고, 당연히 한 분야에 목숨을 바쳐야 한다.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완전함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학문에서는 제한된 분야의 대가가 될 수도 있다. 곧 전문가가 되는 것인데, 그것도 어느 영역이든 상관이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조망의 능력과 그것을 존중하는 법을 모른다면, 수많은 다른 자리에서는 딜레탕트가 되고 만다. 자신의 인식을 늘리고 관점들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어쨌든 그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전문영역을 넘어서 있는 다른 모든 것에는 무지한 사람이 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조잡한 견습공 신세가 되고 만다."(<세계 역사의 관찰>, 51쪽)

'아마추어'란 말은 사람들이 대가(大家)나 또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되어야만 하는, 또는 자신의 생을 온통 바쳐야만 하는 예술 때문에 평판이 나빠졌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완전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학문에 있어서는 그와 반대로 한 개인은 어떤 한 제한된 영역에서만 대가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한 전문가로서 말이다. 그는 어디에서인가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일반적인 개관을 할 능력을, 혹은 이러한 개관에 대한 존경을 상실한다면, 그는 가능한 많은 다른 점에서 적어도 개인적으로 자신의 인식과 관심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아마추어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전문분야 이외에 있는 모든 것에 있어서는 하나의 무식꾼으로 남게 될 것이며 아마도 야민인과 같은 사람으로 남게 될 것이다.(<세계사적 성찰>, 35-36쪽)

The word "amateur" owes its evil reputation to the arts. An artist must be a master ot nothing, and must dedicate his life to his art, for the arts, of their very naturem demand perfection. In learnng, on the other hand, a man can only be a master in one particular field, namely, as a specialist, and in some field he should be a specialist. But if he is not to foefeit his capacity for taking a genaral view, or even his respect for general views, he should be an amateur at as many points as possible, privately at any rate, for the increase of his owm knowledge and the enrichment of his possible standpoints. Ohterwise he will reman ignorant in any field lying outside his owm specialty and perhaps, as a man, a barbarian.(53-54쪽)

부르크하르트의 요지는 딜레탕트가 별로 좋은 평을 얻지 못하는 예술분야와는 달리 학문, 특히 역사학에서는 딜레탕티슴이 불가피하며 오히려 장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학문에서는 먼저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요즘 '박사'는 말로만 '박사'다). 또 그렇다고 해서 전공이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용인되어서도 곤란하다. 적어도 일반적인 관점, 전체적인 조망능력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다양한 분야에서 딜레탕트가 되어야 한다.   

다른 대목들은 차치하고, 이 점에만 초점을 맞추어도 두 국역본의 번역은 과녁에서 동떨어져 있다. 먼저, <세계 역사의 관찰>에서 "전체적인 조망의 능력과 그것을 존중하는 법을 모른다면, 수많은 다른 자리에서는 딜레탕트가 되고 만다"는 딜레탕트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부여함으로써 부르크하르트의 취지에서 멀찍이 벗어난다(아예 정반대로 옮긴 것이 된다). 우리가 딜레탕트가 되어야 하는 것은 '전체적인 조망의 능력과 그것을 존중하는 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다.

"적어도 개인적으로 자신의 인식과 관심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아마추어가 되어야만 한다"고 해서 절반은 맞게 옮겼지만 <세계사적 성찰>의 경우도 "만일 그가 일반적인 개관을 할 능력을, 혹은 이러한 개관에 대한 존경을 상실한다면"이라고 전제하여 나머지 절반은 잘못 옮겼다(앞부분에서 예술에서의 딜레탕티슴이 갖는 평판에 관한 부분도 상당히 어색한 번역이다). 독일어 구문이 얼마나 복잡한지는 모르겠지만 전문번역자와 역사철학 전공자가 똑같이 실수를 범한 것은 의외다.

<소유와 자유>의 역자는 '경제/금융 전문기자'로 소개돼 있다. 다시 말해 역사쪽으로는 '딜레탕트'다. 그리고 그가 옮긴 것도 영역된 부르크하르트의 문장이므로 '중역'이다. 그런데, 적어도 이 인용문단의 경우에는 독어 원전을 번역한 두 '전문가'의 번역보다 원뜻에 그나마 가장 가깝다. 이건 좀 아이러니한 일 아닐까? 딜레탕트(아마추어)가 아닌 '전문가'라 하더라도 주의하지 않는다면 '조잡한 견습공'과 '야만인'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모양이다...

08. 0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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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G의 생각
    from vizualizer's me2DAY 2008-07-19 12:42 
    도스토예프스키 비판에 관하여 - 로쟈의 저공비행
  2. 딜레탕티즘
    from Surplus Text : Front Edge 2008-07-20 00:32 
    딜레탕티즘 : 예술이나 학문 따위를 직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취미 삼아 하는 태도나 경향 - 집에 있는 책들을 얼마 전에 죄다 정리했다. 정리하는 데 꽤 힘이 들었는데, 가지고 있는 책들을 주제별로 분류하기에는 책꽂이의 칸 구분이 모자란 반면 책꽂이의 칸 넓이는 항상 남아돌았기 때문이다. 이것 저것 잡스럽게 책을 읽지만, 막상 그 잡스러운 것을 탄탄하게 읽지는 않았다. 나름 대학에 들어와서 전공을 정한 지도 벌써 두 해가 다 되어 가는데, 전공에..
  3. 인문교양과 딜레탕트적 독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16 00:20 
    주간한국의 '당신은 딜레탕트입니까'란 커버기사에서 독서문학 꼭지를 옮겨놓는다. 인문교양서 독자층의 관심을 엿보게 한다('로쟈'와 '비평고원' 같은 이름도 거명되고 있다). 리처드 세넷이 말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의 양상을 딜레탕트적 독서와 연관하여 다뤄보려고 했으나 그럴 만한 여유가 없어서 일단은 기사만 스크랩해놓는다. 참고할 만한 내용은 먼댓글로 걸어둔다.     주간한국(09. 03. 11) [딜레탕트] 독서·문
  4. 역사는 국가, 종교, 문화의 상호작용이다.
    from 창조를 위한 검은 잉크의 망치 2010-11-30 21:10 
    헤겔은 역사 자체를 사유하면서 인류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보편의 법칙과 원리를 내세웠다. 즉 인간의 이성이 자기실현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며 이 법칙이 지향하는 바는 절대정신이 현실적으로 외화된 ‘자유(국가)’였다. 이러한 헤겔의 이론에 따르면 세계역사도 당연히 이성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헤겔의 논리는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며 과거를 줄 세워 현재를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를 관통하는
 
 
노이에자이트 2008-07-19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사철하는 이들도 경제학을 알아야 하고 경제학하는 이들도 문사철을 알아야 하는데 칸막이 현상이 이 두 분야는 심각하죠?

로쟈 2008-07-20 12:01   좋아요 0 | URL
경제사 같은 것도 있으니까 서로 무관할 수는 없지요. 칸막이야 전공분야 안에서도 다 쳐져 있는 걸요 뭐...

노이에자이트 2008-07-20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보시고 난 다음에 서평 좀 올려주세요.

로쟈 2008-07-21 10:22   좋아요 0 | URL
현재로선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습니다.^^;

개츠비 2008-07-21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어설픈 딜레탕티즘에게 위로를 해주는 글이군요.

로쟈 2008-07-21 10:22   좋아요 0 | URL
딜레탕티슴은 필요하기도 하고 불가피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전문가주의가 요즘 같아선 '지배 이데올로기'죠...

jotiple 2008-08-08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의아한 일이네요. 독일어 원문이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도 아니고, 부르크하르트의 논지도 오해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한데 말입니다. 인용하신 부분을 제가 가진 독어판에서 번역해보겠습니다.

"딜레탕티즘이라는 말은 예술분야로부터 악명을 얻게 되었다. 물론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완전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예술분야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거나 대가이거나 둘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뿐이고, 삶을 통째로 작품에 쏟아 부어야 한다.
이와는 달리 이제 학문분야에서 우리는 제한된 영역에서만 대가가, 다시 말해 전문가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학자는 자신의 전문분야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전반적인 조망을 할 줄 아는 능력과 이러한 조망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영역이라 하더라도 가능한 한 많은 영역에서 딜레탕트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지식을 늘려가고, 풍부한 관점을 획득하기 위해 적어도 개인적인 차원에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문분야가 아닌 모든 분야에서 무식한 자로, 때로는 아주 조야한 인간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딜레탕티즘 자체를 옹호하는 말은 아닙니다. 딜레탕티즘의 불가피함을 말하고 있을 뿐이지요. 위의 인용문에 이어지는 부르크하르트의 말은 이러합니다.

"그러나 딜레탕트는 대상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있으므로, 살아가면서 여러 분야에 실로 깊이 파고드는 일이 가능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부르크하르트는 딜레탕트를 단죄하는 것도, 딜레탕트와 전문가의 경계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지요. 인간의 지식과 사고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학자는 자신의 전문분야를 갖고 깊이 파고들되, 다른 분야에서도 전문가 수준은 못되더라도 폭넓은 지식과 식견을 쌓아가야 한다는,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평범한 진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게다가 위의 인용문에서는 이런 딜레탕트 수준의 식견으로는 책을 쓴다거나 전문가행세를 한다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일정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번역이 저렇게 되었다는 것은 참 아쉬운 일이네요.

로쟈 2008-08-08 16:41   좋아요 0 | URL
네, 덕분에 쉽게 이해됩니다. 제가 여기저기 검색하다 보니까 부르크하르트에 대해 '아마추어적'이라는 비판도 있더라구요. 전문영역을 넘어서 너무 광범위하게 다룬다는 비판 같은데, '딜레탕트'와 '전문가'의 구별기준이 무엇인지는 계속 의문으로 남습니다(최근에도 '광우병 전문가' 논란이 있었지요). 학문이란 게 점점 전문화돼 가니까요...

jotiple 2008-08-08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부르크하르트는 그런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가 정확한 사료연구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강조한 랑케의 역사학을 거부하고 직관과 영감을 강조하면서, 랑케쪽의 입장에서 보면 다분히 주관적인 역사서술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양쪽 다 문제가 있었다고 해야 하겠지요.

딜레탕트라는 주제는 18세기 이래 숱하게 거론되어 온 것으로 보이는데, 어원상 '즐거움' 때문에 어떤 활동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재미가 아니라 밥벌이를 위해서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딜레탕트의 반대말은 '직업인' 정도가 되겠지요. 예술이든 학문이든 그것을 밥벌이로 하는 사람은 딜레탕트가 아니라 직업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구별하기는 쉬운데 반대말을 '전문가'로 놓고 보면 문제가 좀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딜레탕트, 그러니까 '재미'로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얼마든지 전문적인 수준의 식견에 도달한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 때에는 딜레탕트의 뜻도 달라지는데, '전문적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 되면서 폄하하는 말로 쓰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딜레탕트들이 많은 사회는 '무식한 사람'이 많은 사회보다는 훨씬 낫다고 해야 하겠지요. 각 분야에 딜레탕트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일반적인 교양수준이 높다는 이야기일테니까요. 또 딜레탕트의 존재는 전문가의 활동의 근거와 토양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전문가와 딜레탕트를 대립시키는 이런 구도에서는 과연 양자의 차이가 뭐냐, 하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일반적으로는 양자의 구별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상에 대한 세밀하고 정확한 분석과 논지를 펼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분간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전문가행세를 하면서도 전문적 식견을 갖추지 못한 사람, 딜레탕트를 자처하면서도 전문적 식견을 갖춘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의견이 엇갈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인정해야 하겠지요.
정말 광우병과 관련하여 '전문가'니 '과학'이니 하는 말들이 심하게 오용되고 악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전문가라면 반드시 인정해야 할 논의의 전제들을 인정하지 않는 '전문가'들, '과학'의 기준이 과학자들이 아니라 특정 기관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으로 한심스럽더군요.

그나저나 우리 번역본들이 많이 나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로자님의 지적대로 아직 문제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원어를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되도록 번역본을 피하고, 번역본을 읽는 사람들은 대개 원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번역본의 문제점을 파고드는 '직업인'이란 전혀 없고, 번역의 질에 대한 일종의 '침묵의 카르텔'이 존재하고… 이런 상황이니 피해는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로자님 같은 분들이 거의 유일한 희망이네요...

반딧불이 2010-11-30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의 내용을 참고삼아 읽었습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