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주쯤 지내던 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사를 했다. 그래봐야 5미터쯤 떨어진 옆방일 뿐이지만 창문이 있는 보다 널찍한 방이다. 그래도 비유하면 13평 아파트에서 20평 아파트로 옮겨온 듯한 기분이 든다. 무엇보다도 창문으로 빛이 드는 덕분에 '어둠의 시절'에서 벗어난 듯하다(조명을 켜지 않아도 노트북의 스크린을 볼 수 있다). 주차장쪽이어서 조용하기도 하고. 몇 가지 짐을 정리하고 나니까 얼핏 떠오르는 시가 보들레르의 'Anywhere Out of the World'이다. <파리의 우울>에 실려 있는데, 기억에는 제목 자체가 영어였던 것 같기도 하다. 보들레르의 책들을 지금 안 갖고 있어서 여기저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 세상밖이라면 어느 곳이라도'로 옮겨진 듯하다. 대략 이 산문시의 첫 대목은 이런 식이다.

인생은 환자들이 제가끔 침대를 바꿔눕고 싶어하는 욕망에 들린 하나의 병원이다. 어떤 환자는 난로 앞에 누워 괴로워하고 싶어하는가 하면, 어떤 환자는 창문 옆자리라면 회복이 되리라고 믿고 있다. 내게는 내가 현재 자리하고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라면 항상 만사가 좋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자리를 바꾸는 문제가 바로 내가 나의 영혼과 끊임없이 논쟁하는 문제 중의 하나이다.  

나 또한 끊임없이 논쟁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 자리를 옮길 때면 이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찾아보니 '노마디즘에 대하여'(http://blog.aladin.co.kr/mramor/877801)란 글에서 한번 인용한 적이 있다(번역은 좀 다르군). 보들레르의 '자리를 바꾸는 문제'와 키에르케고르의 '스테이크의 품질' 문제에 대해서 예전에 코멘트를 달아놓은 바도 있는데 당장은 옮겨놓을 수 없어서 아쉽다. 대신에 보들레르 시의 영역만을 옮겨놓는다.   

 

This life is a hospital where every patient is possessed with the desire to change beds; one man would like to suffer in front of the stove, and another believes that he would recover his health beside the window.
It always seems to me that I should feel well in the place where I am not, and this question of removal is one which I discuss incessantly with my soul.

'Tell me, my soul, poor chilled soul, what do you think of going to live in Lisbon? It must be warm there, and there you would invigorate yourself like a lizard. This city is on the sea-shore; they say that it is built of marble and that the people there have such a hatred of vegetation that they uproot all the trees. There you have a landscape that corresponds to your taste! a landscape made of light and mineral, and liquid to reflect them!'
My soul does not reply.
'Since you are so fond of stillness, coupled with the show of movement, would you like to settle in Holland, that beatifying country? Perhaps you would find some diversion in that land whose image you have so often admired in the art galleries. What do you think of Rotterdam, you who love forests of masts, and ships moored at the foot of houses?'
My soul remains silent.
'Perhaps Batavia attracts you more? There we should find, amongst other things, the spirit of Europe married to tropical beauty.'
Not a word. Could my soul be dead?
'Is it then that you have reached such a degree of lethargy that you acquiesce in your sickness? If so, let us flee to lands that are analogues of death. I see how it is, poor soul! We shall pack our trunks for Tornio. Let us go farther still to the extreme end of the Baltic; or farther still from life, if that is possible; let us settle at the Pole. There the sun only grazes the earth obliquely, and the slow alternation of light and darkness suppresses variety and
increases monotony, that half-nothingness. There we shall be able to take long baths of darkness, while for our amusement the aurora borealis shall send us its rose-coloured rays that are like the reflection of Hell's own fireworks!'
At last my soul explodes, and wisely cries out to me: 'No matter where! No matter where! As long as it's out of the world!'

08. 0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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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7-28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아...인용한 시가 멋지군요. 뭔 글들을 저렇게 잘 쓰시는지...그러니까 이름을 남겼겎지만

로쟈 2008-07-28 18:50   좋아요 0 | URL
네, 좀 이상한 멘트가 됩니다. 보들레르더러 '시를 잘 쓴다'고 평하면.^^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이론가 주디스 버틀러와 가야트리 스피박의 대담집이 출간됐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산책자, 2008). 중량급 학자들의 대담이어서 눈길을 끈다. 주제도 페미니즘이나 탈식민주의가 아니라 '민족-국가(네이션-스테이트)'다. 내주에 개최되는 세계철학대회에 버틀러가 못 오게 된 걸로 아는데, 이 대담집이라도 출간되어 다행스럽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8. 07. 26) 국가, 극복할 것인가 지켜낼 것인가

주디스 버틀러(사진 위)와 가야트리 스피박(아래)은 페미니즘 이론 영역에서 가장 왕성한 지적 생산력을 보여주는 여성 학자들이다. 버틀러가 동성애자로서 퀴어이론의 창시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면, 스피박은 인도 출신으로서 탈식민주의 이론의 대모로 통한다. 두 사람의 학문활동을 관찰하면, 페미니즘 이론의 최전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론적 지반에 다소 차이가 있는 이 두 사람은 페미니즘 담론 내부의 경합적 관계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는 이 출중한 학자들의 대담을 엮은 책이다. 열다섯 살 아래인 후배 버틀러가 먼저 발제 성격의 문제제기를 한 뒤 두 사람이 토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의 대담은 2006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어바인 캠퍼스의 비교문학과에서 ‘전지구적 국가, 전지구적 상태’를 주제로 삼아 연 학회에서 이루어졌다. 제목에서 가늠할 수 있듯이, 이 대담의 내용은 페미니즘 이론 자체를 다룬 것이 아니라, ‘지구화 시대의 국가’라는 인류적 차원의 문제를 페미니스트적 감성으로 포착하고 있다. 특히 이 대담에서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흔히 국민국가 또는 민족국가로 번역되는 네이션 스테이트(nation-state) 문제다. 여기서 네이션(국민·민족)이 문제인 것은 어떤 기준에 따라 특정 집단을 네이션으로 포섭하고 그 기준 밖의 사람들을 배제하는 메커니즘이 이 네이션 체제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대담의 주제가 된 것은 그 시점에서 벌어진 사태와 관련이 있다. 2006년 4월 미국 전역에서 ‘미등록 이민자’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른바 ‘불법 체류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돕거나 고용하는 사람들까지 처벌하는 법안이 발의된 것이다. 이 법안을 규탄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졌고, 캘리포니아에서는 수십만명의 라틴계 이민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존재 자체가 불법인 이민자들이 ‘자유롭게’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는 사실, 더 중요하게는 이들이 미국 국가를 스페인어로 번역해 불렀다는 사실에 버틀러는 주목한다. 그는 이런 상황을 ‘수행적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한다. 자신들에게 추방·배제·박탈을 안겨준 나라의 국가를 자신들의 언어로 노래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통상적인 좌파적 관념이라면, 이런 상황을 국가라는 포획장치에 자발적으로 말려들어간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버틀러는 그런 통념과는 다른 적극적 이해를 모색한다. 네이션 스테이트의 틀에 균열을 냄으로써 그 틀을 극복할 전망을 언뜻 보여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수행적 모순이야말로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창조의 공간을 열어젖힙니다.” 버틀러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빌려, 자유는 자유의 요구, 자유의 수행 자체에서 이미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래를 부름으로써 거리가 자유로운 집회 현장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행동은 자유의 표현이자 권리를 향한 호소입니다.” 자신들을 추방하는 나라의 국가를 자신들의 말로 부름으로써 그 국가의 의미를 바꿔버리는 이 모순적 사태야말로 어떤 전망을 보여준다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이다. “그 노래는 언어적 다수집단에 대한 비판이고, 언어적 다수집단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비판이며, 민족을 단일한 개념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다문화주의의 한 방식입니다.”

이때 버틀러가 국가 그 자체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대담 내내 버틀러는 국가를 곧 ‘네이션 스테이트’로 인식한다. 국가란 근본적으로 국민/비국민을 나누는 배제와 분리를 존재 방식으로 삼고 있다는 발상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그 국가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가 버틀러의 고민이자 질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피박은 조금 다른 목소리를 낸다. 스피박이 보기에 국가 그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고삐 풀린 발호로부터 구성원을 보호하는 장치로 국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계시민주의는 어찌 보면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어울리는 이념일 수 있다. “국가는 우리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기에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최소한의 추상적 구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재분배의 도구가 돼야 합니다.” 자본주의적 착취·수탈·불평등을 막아내고 교정하는 기능을 국가가 수행할 수 있으며, 그런 기능을 수행하도록 국가를 재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버틀러가 국가의 박탈·추방 성격에 초점을 맞춘다면, 스피박은 국가의 저항 거점 성격을 강조하는 셈이다. 대담 말미에 버틀러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동력으로서 자기창조”에 관해, 다시 말해 혁명에 관해 이야기한다. “만약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고통받았기 때문이고, 비판의 언어를 만들어내고 서로 뭉쳤기 때문이며, 역사와 분석에 기반해 연대를 구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피박도 이 설명에 동의할 것이다.(고명섭기자)

08. 07. 26.

P.S. '민족국가', 혹은 '국민국가'란 주제와 관련하여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은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와 니시카와 나가오의 <국경을 넘는 방법>(일조각, 2006)이다. 두 사람 모두 '네이션' 문제에 골몰해온 일본의 비평가이고 학자이다. 안 그래도 <세계공화국으로>는 다시 손에 들었는데, 니시카와의 책도 조만간 대출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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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7-26 23:14   좋아요 0 | URL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무시하면 바보취급하지말라! 우리도 천황폐하의 신민이다. 이렇게 무시해도 되느냐!하고 한마디 하면 상대가 조용해졌다는데,스페인어로 미국국가를 부르는 것도 그와 비슷한 것 같네요.억압하는 사람들의 논리로 오히려 공격하는 지혜...다소 서글프기는 하지요.

로쟈 2008-07-27 16:30   좋아요 0 | URL
다소 서글프면서도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당장은 '놈놈놈'도 볼 형편이 안되지만 여건만 된다면 챙겨보고 싶은 영화 두 편은 두 대중가수에 관한 것이다. 존 레넌과 밥 딜런. 더 잊어먹기 전에 일단 기사라도 챙겨놓는다. 시사인에서 읽은 리뷰기사들이다(한겨레의 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00962.html 참조).    

시사인(08. 07. 22) 누구나 아는, 아무도 몰랐던 존 레넌

누군가를 아주 잘 안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그 ‘누군가’는 절친한 지인일 수도, 유명한 공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막상 ‘그는 어떤 사람인가’, 대답이라도 내놓을라치면 그만 말문이 막히고 더러는 숨까지 턱, 막혀버리기 일쑤다. 잘.안.다. 고작 세 음절로 확언하기에는 인간이라는 회로가 그리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흔해빠진 질문 앞에서 머뭇거리며 일평생 제 존재의 이유 하나 제대로 간파해내기도 버거운 인간이다. 그러니 하물며 남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으려면 몇 곱절은 더 치밀하고 광범위한 근거 자료가 필요할 터이다. 가령 존 레넌 같은 인간에 대해 아는 척할 때는 말이다.



<존 레논 컨피덴셜>은 우리가 아주 잘 안다고 착각해온 어느 팝 스타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그런데 영화가 담아낸 존 레넌은 누구나 잘 아는 존 레넌이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존 레넌이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언젠가 어렴풋이 듣긴 했는데 그 누구도 제대로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그의 인생 후반전을 다룬다. 특히 비틀스 이후 존 레넌, 오노 요코를 만난 이후 존 레넌의 삶에 집중한다. 당대 최고 팝스타 존 레넌이 왜 별안간 혁명을 노래하게 되었는지, 달콤한 사랑 노래를 부르다 말고 왜 갑자기 민중에게 권력을 돌려주라며 시비걸게 되었는지 밝혀내는 것이다.

제작진은 “존 레넌 일생의 진심이 담긴 사회활동이 사람들에게 잊혀가는 게 안타까워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되었노라고 말한다.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던 이가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평화를 알리려 했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들려주려고 감독 두 명이 달라붙어 찾아낸 당시 자료 중에는, 들끓는 베트남 전쟁 반대여론에 맞서 누구처럼 공안정국을 조성하려 애쓴 닉슨 대통령의 ‘특별 담화’도 있다.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연예인은 감당하기 힘든 희생을 치르게 될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는 그의 모습은 뇌 용량 2MB짜리 대통령을 우리만 가진 게 아니었구나, 안도(?)하게 만드는 뜻밖의 효과도 있다. 그때 존 레넌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회 불안을 선동하는 ‘배후 세력’으로, 워싱턴에 모인 순수한 촛불 시민(세상에! 그들도 촛불을 들었더라)을 반미·반정부 투쟁으로 이끈 ‘전문 시위꾼’으로 남아 끝까지 저항하는 모습이 이 97분짜리 다큐멘터리에 소상히 담겨 있다.



존 레넌과 닉슨 정부의 ‘역사적 대결’
<존 레논 컨피덴셜>의 원제는 <The U.S vs. John Lennon>, 즉 ‘미국 대 존 레넌’이다. 미국에 맞서, 부당한 권력에 맞서, 노래와 행동으로 저항한 아티스트와 그를 두려워하고 미행하며 도청하는 걸로 성이 안 차 결국 제거할 계획까지 세운 닉슨 정부. 이 역사적인 대결의 거대한 실체를 가볍게 종주해내는 이 늠름한 다큐멘터리는, 존 레넌이 대체 어떤 인간인지 자신 있게 말하기 위해 남보다 몇 곱절은 더 치밀하고 광범위한 근거 자료를 확보했다. 존 레넌의 연인 오노 요코의 회상에서 미국의 대표 진보 지식인 노엄 촘스키의 증언, 존 레넌을 미행한 당시 FBI 요원의 자백까지. 물경 수십명에 달하는 관련자 육성 인터뷰와 흥미진진한 미공개 동영상 자료가 뒷받침된 덕에, 단순한 인물 다큐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그가 살다 간 한 시대를 통째로 증언하는 생생한 목격담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세상에는 세 가지 영화가 있다. ‘감탄’하는 영화, ‘감동’받는 영화, 그리고 ‘감사’하게 만드는 영화. <존 레논 컨피덴셜>은 존 레넌의 멋진 인생에 ‘감탄’하고 그의 용감한 노래에 ‘감동’받다가 결국 이 소중한 다큐멘터리를 완성한 감독에게 ‘감사’까지 하게 만드는 영화다. 충격과 감격을 동시에 선사하는 근사한 다큐멘터리다. 물론, 존 레넌이 워낙 근사한 삶을 살다 간 덕분이다.(김세윤_영화 에세이스트)

시사인(08. 06. 03) 밥 딜런 그 인간, 참 복잡한 인물이네

he는 her가 되고 her는 here가 되었다가 다시 there로 변한다. <아임 낫 데어>의 제목 ‘I’m not there’가 스크린에 등장하는 방식이다. 알파벳을 하나씩 늘려가면서 there라는 단어에 도달하는 첫 시작은 앞으로 영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미리 짐작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그’의 인생을 그려내기 위해 ‘그녀’의 연기에 기대는 영화이면서, 지금 ‘이곳’에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화인 동시에 그때 ‘그곳’의 혼돈을 증언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알파벳을 하나씩 늘려가면서 there에 도달하는 시작처럼, 캐릭터를 하나씩 늘려가면서 결국 밥 딜런이라는 인간의 핵심에 이르는 마지막. 엔드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에도 텅 빈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쉽게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든다.

미국 포크 가수 밥 딜런의 인생을 재구성한 영화 <아임 낫 데어>는 배우 6명이 캐릭터 7개를 연기한다. 각각 다른 인물로 설정된 그들이 사실 모두 같은 인물 밥 딜런의 어느 한 시기를 대변하는데,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배우 케이트 블란쳇은 1965년 뉴 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어쿠스틱 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라 논란을 일으킨 밥 딜런을 ‘주드’라는 이름으로 연기하는 식이다. 크리스천 베일은 그때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오르기 전, 시대의 대변자로 사랑받던 전성기의 밥 딜런을 ‘잭’이라는 인물로 연기하다가 훗날 종교에 귀의해 가스펠 음악을 부르던 밥 딜런을 ‘존’이라는 이름으로 재현한다. 여기에 벤 위쇼·리처드 기어·히스 레저 같은 유명 배우가 합세해 저마다 자기 몫으로 주어진 밥 딜런의 인생, 밥 딜런의 사상, 밥 딜런의 방황과 밥 딜런의 욕망을 감당한다.



<벨벳 골드마인>(1997년)이라는 음악 영화로 여러 사람을 흥분시킨 감독 토드 헤인스는 왜 이리도 복잡한 방식으로 밥 딜런을 그려냈을까. 매우 싱거운 대답이 되겠지만, 밥 딜런이 그만큼 복잡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밥 딜런이 직접 쓴 자서전을 포함해 4년 동안 그에 관한 거의 모든 책을 읽었다고 말한다. 지루한 독서 끝에 얻은 결론. “‘실제 딜런’ 혹은 ‘진짜 딜런’을 찾으려던 전기 작가들이 모두 실패했으며 픽션의 형식을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진실을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라는 거다.



‘시대의 이면’까지 들추어낸 역작

결국 직접 밥 딜런 한번도 만나보지 않고 만든 밥 딜런 영화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밥 딜런 영화로 칭송받는 역설. <아임 낫 데어>는 ‘사실’에 충실한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에 도달하는 건 아니라는, 이 바닥의 얄궂은 아이러니를 새삼 일깨운다. 때로 진실은 이렇게 완벽한 허구에서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좋은 전기 영화는 인간의 이면을 드러낸다. 하지만 ‘더 좋은’ 전기 영화는 그 인간이 살다간 시대의 이면까지 함께 들추어낸다. 11년 전 글램 록에 열광하던 1970년대를 느끼게(‘생각하게’가 아니라!) 만든 <벨벳 골드마인>이 그랬듯 토드 헤인스 감독은 이번에도 ‘더 좋은’ 전기 영화를 만들었다. <아임 낫 데어>를 보고 있으면 말로만 듣던 1960년대의 혼돈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글로만 읽던 ‘반문화’의 위력을 느끼게 된다. 늘 새로운 아티스트를 갈망하면서 정작 그 아티스트가 새로워지는 것에는 야박한 대중과, 가차없이 세상을 공격하면서 정작 세상이 자신을 공격하는 건 참지 못하는 아티스트 사이. 그때도 지금처럼 쉽게 좁혀지지 않는 틈이 존재함을 깨닫게 만든다.(김세윤_영화 에세이스트)

08. 0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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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7-25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임 낫 데어>는 기대가 너무 컸었는지, 보는 내내 어떤 '과도함'이 느껴져서 고개를 몇 번 갸우뚱거렸습니다. Todd Haynes의 전작들을 떠올려보면 이는 사실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요.^^ 사실에 충실하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분명 아니겠지만, 여러 면모들의 나열과 알레고리화 작업 그 자체가 어떤 '진실'을 전해주는 것이 아님 역시 분명한 것 같습니다. 존 레논에 대한 영화가 기대되네요.

로쟈 2008-07-26 00:35   좋아요 0 | URL
이런 쪽 영화들은 꼭 챙겨보시겠군요.^^

클리오 2008-07-25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레논의 영화는 아주 많이 보고 싶은데, 다큐멘터리라 어떻게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지 모르겠네요.. 더운 여름 잘 지내시죠? ^^

로쟈 2008-07-26 00:36   좋아요 0 | URL
오늘도 비가 와서 더운 건 모르겠습니다. 별로 잘 지내지는 못하구요.^^;

2008-07-26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26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헝가리 태생의 이스라엘 작가 에프라임 키숀의 최신작이자 그의 유작인 <행운아 54>(마음산책, 2008)이 번역돼 나왔다. "인생이란 로또에서 대박난 한 남자의 흥미진진한 모험담!"이라 하고, 소설가 김종광은 "주의사항! 이 소설을 공공장소에서 읽지 말라. 배꼽 빠진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고 경고까지 해놓았다. '세계적인 풍자작가' 키숀이 그래도 못 미덥다면 <개를 위한 스테이크>의 몇 쪽을 미리 들춰봐도 좋겠다(그의 작품은 37개 국어로 번역되어 4천 3백만 권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더러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의 하나는 이런 유머소설들도 가끔씩 읽어주는 것이다. 2005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작가를 뒤늦게 추모도 할 겸 키숀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행운아 54
에프라임 키숀 지음, 이용숙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7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양탄자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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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7월 25일에 저장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현대예술에 대한 거침없는 풍자
에프라임 키숀 지음, 반성완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4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2008년 07월 25일에 저장
품절

개를 위한 스테이크
에프라임 키숀 지음, 프리드리히 콜사트 그림, 최경은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2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2008년 07월 25일에 저장
품절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내
에프라임 키숀 지음, 이미옥 옮김, 송은경 그림 / 좋은생각 / 2004년 7월
8,500원 → 7,650원(10%할인) / 마일리지 420원(5% 적립)
2008년 07월 25일에 저장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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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7-25 20:48   좋아요 0 | URL
예전에 디자인하우스에서 출간되었던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를 읽었던 게 벌써 10년도 더 전인데, 실로 오랜만에 키숀의 이름을 보게 되어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매우 우울한 기분에 안 그래도 배꼽 빠질 일이 없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좋은 신간 소식 잘 갈무리해갑니다.

로쟈 2008-07-26 00:39   좋아요 0 | URL
네, 사람을 미소짓게 만드는 것도 소중한 미덕이지요...

Arch 2008-07-25 22:12   좋아요 0 | URL
오후, 저도 개를 위한 스테이크와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를 읽었어요. 아내, 남편 부분은 곧 착수하려합니다. 로쟈님께서 에프라임 키숀을 언급해서 좀 놀랬는걸요. 꼭 그런건 아닌데 심각한 책만 보실 것 같고, 말 걸게 되면 왠지 묻힐 것 같고. 그래서 저도 읽어봤어요. 이렇게나마 인사 드려봐요.^^ 빗소리 들으며 독서하기 참, 좋은 날일듯.

로쟈 2008-07-26 00:40   좋아요 0 | URL
키숀에 대해서는 예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저도 나름 웃기려고 하는데, 심각한 모습만 보여드렸나 봅니다.^^; 자주 놀러오시길...

루쉰P 2008-07-26 01:51   좋아요 0 | URL
왠지 재미있다고 하니 읽어 보고 싶네요^^ 근데 유머안에 어떤 깨달음이 있을까요? 그냥 웃기만 하는 책보다는 웃으면서도 생각할 수 있는 책이면 읽어 보고 싶거든요. 뭔가 강박관념이 섞여있는 책 읽기죠...저도 이런 제가 웃겨요^^

로쟈 2008-07-26 21:59   좋아요 0 | URL
'불순한' 유머를 좋아하시는군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론>이 재출간됐다. 주해를 크게 보강했다고 하니까 개정판이라고 해도 좋겠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정수는 논리학이고, <변증론>은 그 핵심적 저작이라고 하니 당장은 아니더라도 도전해봄 직하다. 저자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8. 07. 24) 민주주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워라

현대 철학까지는 아니어도 고대 그리스 철학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이름은 초등학생도 되뇔 수 있다. 그들이 남긴 경구는 시사 퀴즈에도 등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정말 서양 고전 철학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요?” 학문적 인생 전체를 그리스 철학 고전의 번역·주해에 바쳐온 김재홍 관동대 연구교수다. 그는 최근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론>(길)을 번역·주해했다. 1998년에 번역본(까치)을 냈는데, 이번에 주해를 크게 보강하여 새로 발간했다.

지금까지 그가 펴낸 책을 일별하면 이번 작업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김 교수는 <그리스 사유의 기원>(살림), <에픽테토스 ‘담화록’>(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등을 썼다. 역서로는 <정신의 발견>(브루노 스넬·까치), <엥케이리디온>(에픽테토스·까치), <니코마코스 윤리학>(아리스토텔레스·공역·이제이북스), <소피스테스적 논박>(아리스토텔레스·한길사) 등이 있다. <변증론>의 재번역은 그리스 철학의 핵심인 논리학 연구의 큰 매듭을 짓는 일이다.

그가 펴낸 책 가운데 이른바 ‘대중서’는 하나도 없다. “고전을 번역하고 주석 다는 데 매달려 살았던” 시간의 열매다. 그가 추구하는 바는 널리 읽히는 게 아니라, 정확히 읽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어디에 나오는 걸까요. 누가 어떻게 지어냈는지 모르는 말이 아무 근거도 없이 버젓이 교과서에까지 실리는 걸 보세요. 이건 엄격성과 엄밀성을 추구하는 학자적 정신의 부족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엄밀함과 엄격함의 잣대를 굳이 서양 고전에 들이밀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신 서양 이론이라는 게 서양 학자들이 고전을 재해석한 결과거든요. 그런데 한국 학자들은 새로운 서양이론이 나오면 무조건 쫓아가잖아요. 고전에 대한 엄격한 이해를 바탕에 두고 이를 새롭게 해석하여 새로운 사상을 만들 수 있다면, 그런 일이 줄어들겠지요. 서양 고전에 대한 이해는 우리만의 사상을 만들어나가는 길입니다.”

여러 철학자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를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건조하고 간결하지요. 재미는 덜하지만 학문적 엄격함에 비중을 두는 태도에 마음이 끌렸어요.” 그가 길어낸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수는 논리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본격적인 학문을 하기 위한 하나의 토대로서 논리학의 기초를 마련했어요. 논리학은 인문학적 사유 능력을 기르는 학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고라’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재현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어떤 주제를 놓고 정보를 모아 서로 토론하고 집단이성을 통해 오류를 걸러내어 올바른 방향을 찾는 일련의 과정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이 추구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이 과정을 견뎌내는 사람, 즉 논리적으로 훈련이 잘된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고요.”

그는 인문학 고전을 번역·주해하는 일의 고단함에 대해서도 말했다. “학술진흥재단이 그나마 인문학자들을 후원해왔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 지원 규모를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요. 즉시 결실이 나와야 실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인문학의 유용성은 장기적으로 나타나지요. 그래서 국가적 투자가 필요한 겁니다.”

스스로를 ‘아리스토텔리안’이라고 말하는 김 교수는 앞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 전서·후서>도 번역할 예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큰 얼개를 국내에 소개하는 작업의 마무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는 말을 통해 이뤄지는 정치 과정입니다. 어떤 주장을 어떤 형식에 담아야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지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배웠으면 합니다.” 논리가 아닌 힘이 지배하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변증론>의 가치는 더욱 새롭다.(안수찬 기자)

08. 07. 24.

P.S.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이해하는 데 참조가 될 만한 기사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에 연재됐던 '헤르메스의 빛으로'의 한 꼭지이다.

경향신문(07. 11. 17) [헤르메스의 빛으로](43)추론(쉴로기스모스,syllogismos)의 발명

인간은 특별한 동물이다, 로고스가 있으므로
“앞을 내다 볼 줄도 알고, 똑똑하며, 다채롭고, 날카로운 동물. 기억할 줄도 알고, 이성(ratio)과 계획으로 가득 차 있는 동물. 우리는 이를 인간이라 부른다. 가장 높은 신은 바로 이 동물을 돋보이는 조건 속에서 태어나게 했다. 수많은 종류의 생명체와 자연물 가운데서 이성과 생각을 나눠가진 단 하나의 존재. 다른 모든 것들에는 그런 것이 없다. 인간 안에, 아니 모든 하늘과 땅 속에 이성보다도 더 신비로운 것이 있겠는가? 이성이 활짝 피어나 완성될 때, 그것을 지혜(sapientia)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이성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 이성이야말로 인간에게도, 그리고 신에게도 있는 것이기에, 이성은 인간을 신과 함께 묶어준다.”

이성적인 신이 이성적인 존재로 인간을 태어나게 했으며, 이성을 통해 인간은 신에게로 곧추 솟아올라간다는 이 말, 키케로의 말이다. 그 이성으로부터 법(ius)과 법률(leges)이 인간에게 생겨났다고 한다(‘법률에 관하여’ 1권 22-23). 키케로(기원전 106~43년)는 고대 그리스의 정신적인 자산, 특히 철학과 수사학을 열심히 익혀 로마에 소개한 인물이다. 그는 그리스말로 되어 있는 수많은 고전들과 그 속에 알알이 박혀 빛나는 고급 개념들을 라틴어로 옮겨놓음으로써 빈곤한 라틴어를 풍부하게 살찌운 로마의 최고 지성인으로 꼽힌다.

위의 글에서 그는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고 인간에게만 있으며, 인간에게 있으되 신으로부터 받은 신비로운 것, 그래서 인간과 신을 하나의 동아리로 묶어줄 수 있는 것을 이성이라 선포한다. 키케로의 생각은 로마에선 일찍이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특히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키케로가 말한 라티오(ratio)란 그리스말로는 로고스(logos)이기 때문이다(키케로는 로고스를 ‘생각하는 이성’을 뜻하는 ‘ratio’와 ‘생각이 이성에 맞게 표현된 말’을 뜻하는 ‘oratio’로 구분했다).

스토아학파의 사상 속에선 맑디맑은 불로 형상화된 신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로고스, 곧 이성이었다. 이성은 두 가지 일을 한다. 안에서 생각하기와 바깥으로 말하기. 신이 품은 생각은 세계로 펼쳐져 드러나며, 그래서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로고스적 존재이며, 로고스가 그어놓은 길을 따라 조화롭게 움직인다. 결국 세계란 신의 생각이 바깥으로 넘쳐 드러난 언어인 셈이다. 그 가운데 인간은 신을 쏙 빼닮았기에, 인간에겐 이성이 넘쳐난다. 넘쳐나 흘러나오는 것이 말이겠다. 말은 혼잣말(monologos)로 텅 비어 울리지 않고, 다른 사람과의 나눔말(dialogos)로 공명(共鳴)할 때, 그 뜻을 이루어낸다. “말(oratio)의 힘, 그것은 인간 사회를 묶어주고 조절하는 가장 큰 힘이다.”(‘법률에 관하여’ 1권 27). 사람들이 서로 나누는 말은 한갓 말에 그치지 않고, 행위로 이어져 뭔가를 있게끔 이루어내는 힘을 뿜어내며, 감추어진 세계의 비밀을 드러낸다.

대화가 필요하다, 진리를 찾기 위해
그리스말로 진리를 아레테이아(aletheia)라 한다. 이 낱말에는 감추어져 있던 것(lethe)이 벗겨져(a-) 환하게 드러난다는 뜻이 깃들어 있다. 이 말과 관련해 철학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준다. 인간의 영혼이란 모든 것이 환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는 진리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잊게 하는 망각의 레테(Lethe)강을 건너오며 육체를 옷 입음으로써 진리를 잊고 있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진리에 대한 간절한 사랑(philosophia)으로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영혼을 깨끗하게 해방시키려고 한다면, 잊혀진 옛 기억을 되살려(anmnesis) 진리를 밝혀낼 수 있다(플라톤 ‘파이돈’ 72e). 그런데 망각의 늪에서 벗어나 진리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되살려낼 수 있을까? 그것은 올바른 말(logos)을 주고받는 가운데(dia-) 잘못된 생각을 버려나가는 참된 대화(dialogos)를 통해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들에겐 오로지 진리를 찾아 드러내 밝혀나가는 대화의 기술(dialektike)이 필요하다. 그것을 열심히 실행하며 철학을 하였던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였다.

뭔가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찾아가 대화를 통해 논파(elenchos)하던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기존의 주장과 논의를 해체하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방법을 이어받은 플라톤은 이 논파의 기술을 좀 더 발전시켜 진리의 세계를 찾아가며 새롭게 구축하는 생산력을 가진 대화의 방법, 곧 디아렉티케로 체계화시켜 나갔다. 그는 참되고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와 잠시도 쉬지 않고 숨가쁘게 변화하는 현상의 세계를 나누었다. 그리고 현상세계에 대한 감각을 통해 얻은 어렴풋한 한갓 의견(doxa)에서 벗어나 로고스를 통해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참된 지식(episteme)을 얻기 위한 철학적 방법을 다듬어내었다. 그것이 바로 말(logos)을 서로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진리를 드러내는 대화의 기술, 곧 변증술(辨證術, dialektike)이었다.

그런데 플라톤의 학원에서 20년간 철학을 공부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이 갈고 닦은 길에 이어져 나가는 새로운 길(methodos)을 마련한다. “이 작품의 목적은 어떤 문제가 우리들에게 던져지든지 그것에 관하여 상식(endoxa)으로부터 추론할(syllogizesthai) 수 있으며, 또 우리 자신이 하나의 주장(logos)을 밀고나려고 할 때, 어떤 모순도 일으키지 않고 말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변증론’ 100a18-21). 이때 상식으로부터 출발하는 추론이 바로 대화의 기술과 관련된 추론(dialektikos syllogismos)이다.

추론하라, 세계를 건져 올리기 위해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낱말이 있다. 바로 쉴로기스모스(syllogismos)다. 추론(推論)이라 번역되는 이 낱말은 원래 로고스(logos)들을 함께(syn-) 엮어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매우 자부심을 갖고 아끼는 발명품이다. 말과 말을 엮어 말끔한 말의 묶음(syllogismos)을 만들어내는 독특한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추론(syllogismos)도 하나의 말(logos)인데, 그 속에서는 어떤 주장들이 이미 전제로 놓여 있고, 그 주어진 주장들과는 다른 어떤 주장이 바로 그 주어진 주장들에 의해 반드시 결론으로 따라 나온다.”(‘분석론 전서’ 24b19-21). 주어진 전제로부터 반드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새로운 결론을 끌어내는 방법, 그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들어낸 추론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국민의 참된 신임을 얻는 사람(B)이 한 국가의 지도자(A)가 되어야 한다’라는 주장과 ‘법을 존중하고 준수하는 사람(C)만이 국민의 참된 신임을 얻을 수 있다(B)’라는 주장이 주어졌을 때, 이로부터 반드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법을 존중하고 준수하는 사람(C)만이 한 국가의 지도자(A)가 되어야 한다.’ 이 결론은 앞에 전제로 주어진 두 개의 주장이 참이라고 합의되는 순간, 언제나 참일 수밖에 없다. 이 추론은 ‘B이면 A이다. C이면 B이다. 따라서 C이면 A이다’라는 틀을 가지고 있는데, 이 틀은 논리적으로 언제나 타당하다. 말과 말을 엮어 반드시 타당한 추론의 망을 촘촘히 짜낸다면, 그것으로 세계를 차곡차곡 기술해나간다면, 세계의 모습을 오롯이 건져 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품고 있던 철학적 야망이었다.

위에서 보았듯, 가장 기본적인 추론은 대체로 2개 전제와 결론으로 이루어진다. 전제와 결론은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지는데, 문장은 주어와 술어로 나뉜다. 주어와 술어를 이루는 낱말들은 그 낱말들이 가리키는 대상이나 의미하는 특징에 따라 실체(ousia)로 구분되거나, 몇 개의 술어의 모둠, 이른바 범주(範疇, kategoria) 안으로 나뉘어 모여든다. 거꾸로 말하자면 하나의 주어에 모둠 속의 낱말이 술어로 나와 붙어 문장을 만들고, 문장들이 전제와 결론의 형태로 묶여서 추론을 만든다. 이 순서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추론의 방법을 짜임새 있게 정리하였다.

그는 우선 낱말들의 모둠을 가다듬는다(‘범주론’). 그리고 낱말들이 엮여 이루어지는 문장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명제론’), 두 개의 문장을 각각 대전제와 소전제로 두고, 두 개의 전제를 이어주는 매개항을 통해 두 전제를 묶어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추론, 이른바 삼단논법의 타당한 틀을 16개로 압축해서 보여준다(‘분석론 전서’). 그리고 타당한 추론의 틀을 세 가지 분야에 적용한다. 가장 먼저, 참된 것으로 인정되는 전제를 내세워 그로부터 필연적인 결론을 끌어내어 진리를 드러내(apo-) 보이는(deixis) 학문적인 논증(apodeixsis)에 새로운 추론의 틀이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분석론 후서’). 그 다음에는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지며 상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진리에 이르는 대화의 기술(dialektike)에도 이 추론의 방법을 적용한다(‘변증론’). 거기에 덧붙여 사람들을 교묘하게 속이는 거짓 추론을 낱낱이 분석하여 그 본색을 드러낸다(‘소피스트적 논박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여섯 권의 책들은 세계를 파악하는 철학적 수단이요 도구라는 뜻에서 ‘오르가논(Organon)’이라는 이름으로 나중에 다른 사람(아마도 안드로니코스)에 의해 시리즈로 묶인다. 이는 아프로디시아스 출신의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로기케(logike)라고 불리게 되는데 논리학(logic), 곧 말(logos)의 타당성이 성립하는 원리를 다루는 기술(-ike)이라는 뜻이겠다. 서구 합리주의 전통의 핵심을 이루는 논리학은 이렇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추운 날씨 속에서 대학입학 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수많은 학생들이 이제 다시 열심히 논술을 준비해야 하는 오늘 우리들의 풍경 속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손길이 닿아있는 셈이다.(김헌|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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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7-25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고전을 묵묵히 공부하고 번역하는 사람들이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죠.당장은 눈에 뜨이지 않지만 이런 사람들 덕분에 학문이 발전한다고 봅니다.

로쟈 2008-07-26 00:42   좋아요 0 | URL
요즘은 그래도 관심과 처우가 예전보다는 나아진 편이죠. 대신에 다른 인문학 '놀박'들은 학문에 기여한다는 소리도 못 듣고...^^;

노이에자이트 2008-07-26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몇년전에 강정인<소크라테스,악법도 법인가?>(문학과 지성사)를 읽고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란 말을 안했다는 사실을 안 뒤에 아연실색.교실에서 가르치는 거짓말이 얼마나 해독이 큰가를 깨닫게 되었죠.그런데 요즘은 교과서에서 그런 거 뺐나봐요.다행이죠.

로쟈 2008-07-27 16:31   좋아요 0 | URL
박홍규 교수의 책에서도 나왔던 듯해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7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강정인 씨 책이 나온지 한참 뒤에 한 10년 후 쯤?소크라테스 재판에 대한 책들이 연이어 나오더군요.90년대 중반 경 이시돌 스톤의 <소크라테스의 비밀>이 나왔는데 그땐 별로 반응이 없었어요.박홍규 씨는 우상파괴 식 글쓰기의 상징이죠.카뮈 평전에서도 이화영 씨를 사정 없이 비난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진 마이클 왈쩌의 카뮈 옹호도 시원하게 두들기더군요.하하하...통쾌하긴 한데 너무 공격적이라 좀 염려는 되더라구요.저야 학계에 없으니까 상관없지만 같은 동업자를 너무 공격한다는 염려...저렇게까지 해도 되나...하는...

로쟈 2008-07-27 22:42   좋아요 0 | URL
'김화영' 교수를 공격했나 보군요. '동업자'는 아니죠. 불문과 교수하고 법대(교양학부로 옮기셨나) 교수니까요. 승진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7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법과 교과과정도 엄청나게 두들기더라구요.사실 우리나라 법대 교과과정을 속칭 수험법학이라고 하잖아요.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박교수 입장에선 한심하기도 할 거에요.
그건 그렇고 인문학 놀박이 뭔가요?

로쟈 2008-07-27 23:22   좋아요 0 | URL
'노는 박사'를 놀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27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서글픈 단어군요.우리나라도 중고교 때 참고서나 교과서 외의 책을 많이 읽혀서 대학에 와서는 교양과정에 세계의 명저 읽고 독후감내는 그런 과정을 필수로 해야 하는데... 사실은 부모나 교사들도 학창시절에 교과서와 참고서만 읽었으니...저도 마찬가지구요.정말 억울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