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의 레닌론 <혁명이 다가온다: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길, 2006)가 출간됐다. 언젠가 이 책의 러시아어판 번역가능성을 타진해보다가 국내 한 출판사에서 책이 나올 예정이라고 들은 바 있는데, 바로 그 책인가 보다. 국역본은 독어본을 옮긴 것인데, 왜 마르크스가 아니라 레닌인가란 '상식적인' 의구심에 대한 반문으로 책을 열고 있는 지젝은 "하지만 21세기 신자유주의가 일상 생활의 곳곳을 지배하고 있는 시점에서, 레닌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통해 레닌을 복원"하고자 한다. 그것이 그가 고유하게 '레닌을 반복'하는 방식이다.

역자에 따르면, "지젝은 레닌을 통해 행동하는 지성이 아니라 실천하는 이론가를 발견한다. 오늘날 서구의 대다수의 행동하는 지성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촘스키와 같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 지젝 자신은 실천하는 이론가이고 싶어한다. 지젝에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은 최선이 아니다. 물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상대주의와의 투쟁을 하고자 한다. 이 점에서 지젝은 독일 고전철학의 계승자이다. 다른 한편으로 지젝은 노동자의 눈으로 (레닌처럼) 인텔리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가의 눈으로 (라캉처럼) 인텔리를 비판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실의 자리를 차지하는가이다."

한데, 목차에서부터 경제학 전공자인 역자가 너무도 잘 알려진 (영화 <매트릭스>의 문구이자 지젝의 저서명이기도 한) 문구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을 "현실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하네"로 옮길 걸 보면 좀 우려되는 번역이기도 하다. '현실(reality)'과 '실재(the real)'를 구별해주지 않는 라캉-지젝 번역이 온전한 번역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한데, 역자 나름의 해명을 적어놓았다고 하다). 

 

이 책의 영어본은 <임박한 혁명(Revolution at the gates)>(Verso, 2002)이며, 1917년 2월부터 10월 사이에 씌어진 레닌의 문건 선집에다가 지젝이 서문과 후기를 붙인 것이다. '레닌의 선택'이란 제목이 붙은 후기의 분량만 170쪽 가량이 되는데, 독어판과 러시아어판은 이 후기만을 따로 독립시켜서 출간한 것이다. 이 영어판 출간과 관련한 소식이 교수신문에 게재된 바 있는데, 잠시 옮겨놓는다. 

교수신문(02. 09. 14) 영국의 레닌 다시 읽기 열풍

-‘레닌에 대해 말하지 않기’에서 ‘레닌에 대해 말하기’로?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몰고 왔던 사상적 공황상태가 끝나가고 있다는 징조일까. 한국에서 거세게 불어닥쳤던 ‘청산’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끈질긴 유령들이 속속 돌아오고 있다. 맑스와 벤야민에 이어 이제 레닌까지 이 대열에 합류할 태세다. 영국의 좌파 출판사 버소가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재발간한 데 이어, 펭귄출판사도 새로운 서문을 이마에 붙인 같은 책을 다시 출간함으로써, 이 귀환의 행렬을 실체화하고 있다. 버소는 오는 9월에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 비판’을 프레드릭 제임슨의 서문을 받아 재출간할 예정인데, 이 또한 오늘날 영국의 사상적 지형에 흐르는 기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실례라고 할 수 있겠다.



-거대한 레닌의 동상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장면을 텔레비전 화면으로나마 똑똑히 지켜보았던 우리의 입장에서 새삼스럽게 레닌의 전기가 쏟아져 나오고, 그의 일대기를 조망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되는 것은 어안이 벙벙한 일임에 틀림없다. 프로이트가 말하듯이, 과거란 언제나 사후에 재구성되는 것이기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그러나 단순하게 이런 사상적 ‘복고’현상을 심리적 과잉결정의 효과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유령들을 불러내고 있는 힘은 과거의 유토피아를 통해 미래를 상상하는 그 노스탤지어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전 슬라보예 지젝의 손질을 거쳐 나온 레닌 선집 <임박한 혁명(Revolution at Gates)>은 이런 낭만주의적 노스탤지어에 대항해서 제기되는 ‘레닌 다시 읽기’의 전형처럼 보인다. 현실 사회주의의 한복판을 뚫고 나온 지젝의 입장에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막연한 노스탤지어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현실 사회주의는 리얼리즘 자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회주의 이론은 정신분석학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가 이 선집에서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영웅적 이미지로 상징화되어 왔던 ‘천재 레닌’을 ‘인간 레닌’으로 현실화하는 것이다. 최근 류블랴나 대학의 ‘철학교수’로 직위를 옮겨 앉은 지젝은 혁명이란 파국적 상황을 온 몸으로 뚫고 갔던 ‘인간’ 레닌을 특유의 분석으로 형상화한다.

-물론 지젝이 레닌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욕망을 기준으로 한 쾌락의 정치학이다. 레닌과 스탈린을 비교하면서 지젝은 자본주의 발전이 늦었던 러시아에 공산주의를 직접적으로 이식하는 행위를 경고한 레닌의 입장을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레닌은 소비에트 권력이 할 수 있는 것은 ‘국가 자본주의’ 정책을 농민 대중에 대한 문화 교육과 결합시키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지젝이 볼 때 스탈린은 이런 레닌의 중도 점진적 사회주의 이행노선을 철폐하고, 일국 사회주의를 성급하게 달성하려고 함으로써 실패를 자초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일종의 유토피아적 기획으로 읽는다. 레닌은 말년에 이르러 <국가와 혁명>에서 제기된 유토피아주의를 폐기하면서, 훨씬 더 현실적인 볼셰비키 노선을 제시하고자 했다는 것이 지젝의 말이다. 물론 이런 레닌의 노선 수정이 혁명의 물질적 기반만을 강조하는 볼셰비키적 태도의 수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젝에 따르면, 레닌은 1920년대에 볼셰비키의 주요 임무가 교육을 포함해서 진보적인 부르주아 제도를 도입하는 것에 있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그러나 이런 레닌의 바램은 오히려 레닌이 지적한 러시아의 후진성은 유럽국가와 근본적으로 다른 문명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는 흥분 속으로 레닌을 몰고 갔던 것이다.

-이런 지젝의 분석은 다분히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 전개된 레닌의 정책들을 ‘욕구 충족’의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헬레네 카레리가 쓴 <레닌>은 이런 지젝의 분석을 뒷받침해주는 구석이 있다. 카레리는 레닌의 역사적 성취가 전형적 혁명의 내러티브라고 할, 유토피아적 에너지의 황홀경 뒤에 찾아오는 낭만주의적 상실감을 극복함으로써 이룩됐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레닌은 이런 냉엄한 리얼리즘을 통해 유토피아적 순간을 연장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젝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능력으로 인해, 레닌의 글들은 라캉이 지칭한 ‘상실된 원인에 대한 나르시시즘’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이런 사실은 레닌을 오늘날 가장 ‘실재’의 열정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는 20세기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읽히도록 만든다. 



-물론 이 ‘실재’를 인식하고자 하는 야심들이 20세기의 사상사를 밀고 나갔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실재의 인식 문제와 별도로, 시종일관 지젝은 이런 실재의 범주를 리얼리티로부터 분리해왔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리얼리티는 허위이며, 그 리얼리티의 고갱이가 바로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레닌은 리얼리티의 가상을 꿰뚫고 들어가서 이 실재를 직관적으로 경험한 흥미로운 인물이기도 하다는 것이 지젝의 궁극적 평가이다. 그러나 이 실재는 경험될 뿐 재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실재는 언어 내에 존재하는 틈과 같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어적 상징 형식을 분석함으로써, 이 틈의 형상을 그려내는 것뿐이다. 20세기의 숱한 사상가들과 작가들이 추구했던 것이 바로 이 언어를 임계상황으로 밀어붙여 실재의 틈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지나간 혁명을 논하는 것이 언제나 노스탤지어를 간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재현되지 않는 실재에 대한 무의식적 상실감 때문이다. 그러나 지젝은 이런 상실감을 넘어선 자리에 있는 레닌의 글들을 강조한다. 냉철한 리얼리즘을 통해 레닌은 이 실재에 대한 상실감을 직시함으로써, 오히려 우리에게 더 생생한 ‘혁명의 임박’을 알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이택광 영국통신원)

 

 

 

 

06. 09. 07.

P.S. 아래는 책의 러시아어본(2003). 제목은 <레닌에 대한 13가지 경험>이며, 표지 이미지는 데이비드 베컴과 레닌의 얼굴을 합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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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2006-09-09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을 "현실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하네"로 옮긴 이유를 본문 주석에서 설명하고 있네요. 영화의 대사를 제외하고는 '실재'와 혼돈하고 있지는 않으니 목차와 소개글만 보고 말씀하신 것처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책 표지 날개에 소개된 지젝의 저작 목록은 전부 국내 번역본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 같은데, 기존의 번역서를 참고하지 않았다는 판단은 성급하셨습니다. 제 짧은 지식으로는 좋은 번역서로 읽힙니다. 과문하지만 흥미를 갖고 독서 중입니다.

로쟈 2006-09-09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을 수정했습니다. 워낙에 안 좋은 번역서들이 많은지라 지레 짐작한 면도 있습니다. 주문한 책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흥미로운 독서가 될 거 같군요...

토마스 2006-09-09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약간 수정해야 할 듯 싶네요. 주석은 이렇게 달려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영화 <매트릭스>의 대사를 따라 'the Real'을 실재(계)'가 아닌 '현실'로 번역했다." 원문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12장에서 현실과 실재가 좀 혼용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경우 일일이 현실과 실재라는 용어에 괄호를 치고 the Real을 표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여하튼 로쟈님의 지젝글은 언제나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두 군데 강의가 있었고, 점심 먹고 논문 한편 읽고 도서관에서 책 한권 복사하고 서점에 들러 새로 나온 계간지도 하나 챙기고(이건 필요 때문이다), 그러고 저녁을 먹으니 이 시간이다. 잠시 여유를 부려서 계간 <세계의 문학>(가을호)을 훑어보다가 이근화 시인의 시에 눈길이 머문다.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나는 이런 시들이 마음에 든다. <문학과사회>(가을호)에도 '우리들의 진화' 외 3편이 발표됐는데, 그 정도면 아주 활발한 활동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론 이 계절에 읽은 가장 눈에 띄는 시인으로 꼽고 싶다.

약력을 보면, 이근화씨는 지난 2004년 등단하고 지난봄에 첫시집 <칸트의 동물원>(민음사, 2006)을 낸 아직 초년병 시인이다. 분류하자면, '문사마(문태준)' 계보도 아니고 소위 '미래파'도 아니다. 그의 시는 무겁지 않고 난해하지 않다. 가볍고 평이하다. 그게 마음에 든다. 나는 내게 재미있는, 그래서 지지하는 시들이 좀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당연한 희망을 가져본다. 그런 의미에서 잠시 인용해보면: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한 계절에 한 번씩 두통이 오고 두 계절에 한번씩 이를 뽑는 것

텅 빈 미소와 다정한 주름이 상관하는 내 인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나를 사랑하는 개가 있고 나를 몰라보는 개가 있어

하얗게 비듬을 떨어뜨리며 먼저 죽어가는 개를 위해

뜨거운 수프를 끓이기, 안녕 겨울

푸른 별들이 꼬리를 흔들며 내게로 달려오고

그 별이 머리 위에 빛날 때 가방을 잃어버렸지

가방아 내 가방아 낡은 침대 옆에 책상 밑에

쭈글쭈글한 신생아처럼 다시 태어날 가방들

어깨가 기울어지도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아직 건너보니 못한 교각들 아직 던져보지 못한 돌멩이들

아직도 취해 보지 못한 무수히 많은 자세로 새롭게 웃고 싶어

(중략)

내가 마음에 들고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인생!

계절은 겨울부터 시작되고 내 마음에 드는 인생을

일월부터 다시 계획해야지 바구니와 빵은 아직 많이 남아 있고

접시 위의 물은 마를 줄 모르네

물고기들과 꼬리를 맞대고 노란 별들의 세계로 가서

물고기 나무를 심어야겠다

(후략)

 

이 정도면 재미있고 유머러스하지 않는가? 덩달아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라고 합창하고 싶어지지 않는가? 저 혼자 폼잡는 시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우리들의 진화'는 또 어떠한가?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감자와 고구마의 영양 성분은 놀랍다" 이건 놀라운 시 아닌가? 감자나 고구마가 등장하는 시들을 내가 좋아하기도 하지만(당신은 감자와 고구마를 싫어하는가?) 그 '놀라운 영양성분'에 대해서 토로하는 시는 아주 드물다. 하니, 이건 아주 드문 시이다.

 

감자와 고구마의 영양성분은 놀랍다

나는 섭취한 대부분의 영양을 발로 소비한다

내 두 발을 사랑해

 

열 개의 손가락을 오래 사랑했다

고부라지고 빈 구명이 숭숭 뚫려 있는

멈추지 않고 자라나는

 

내 몸의 물은 내 몸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되돌아왔다

사라지는 골목을 사랑해

오래 사랑했다

(중략)

 

천장 위에 쌓이는 먼지들의 고고한 자세로

우리는 숨을 고르고 다시 손을 모은다

내 몸을 엉망으로 기억하는 이불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갖지 않기로 한다

(후략)

 

그래, 그 골목들을 나도 사랑했었다. 그래서 '내가 걸어다닌 골목들과 골목어귀의 나무들과'로 시작하는 시도 쓴 적이 있었지. 그래, 그 이불에 대해서 나도 아무런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 게 일상이고, 일상의 발견이다. 그러니 터놓고 얘기하자. '사라지는 골목을 사랑해'! 그리고, 너만 알고 있어,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사실, 아니면 어쩌겠냐구?)..   

 

 

06. 09.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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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9-06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들도 마음에 들어요^^

2006-09-06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9-06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저도 맘에 듭니다.^^
**님/ 안 그래도 오늘 <맥베스>에 대한 강의를 했습니다. 항상 이런 강의는 하고 나야 좀더 많이 알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들으시는 분들께는 미안하죠). 애초에 너무 견적을 크게 잡아서 엄두를 못내고 있지만 조만간 어떻게든 마무리를 짓겠습니다(그래도 며칠 더 기다리심이). 그리고, 복사/제본한 책들의 보관기준이 따로 있는 건 아니구요. 읽는 중에 튿어지거나 하는 경우는 드물 던데요(요즘은 아무래도 이전보다 좋은 제본기들이 많이 나와서요). 제 경우에 문제는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찾는 데 있습니다. 오늘도 복사해둔 듯한 책을 찾아야 할 일이 생겼는데, 백사장에서 동전 찾는 것보다는 약간 쉬울라나...

bookie 2006-09-08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시들을 좋아하는 로쟈님이 마음에 듭니다. ^^

로쟈 2006-09-08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ookie님도 좋아하시는군요.^^
 

오늘 아침 경향신문에서  곧 개봉된다는 영화 <호텔 르완다>와 관련한 칼럼을 읽었다. 100만명이 넘는 인종 대학살(제노사이드)가 벌어진 12년 전 '94년의 석달'을 재연한 영화라고 하는데, 그 봄의 벚꽃과 목련들을 기억하고 있지만 지구 한쪽에서 벌어지던 그때의 참상에 대해선 아무런 기억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불편하고, 잠시 허탈하고 착잡했다. 달리 더 보탤 말도 없다(그냥 '잘만든 영화'라고 말할 수 있으면 속편하겠다). 관련기사를 옮겨놓으며 영화가 개봉되면 잠시 시간을 내봐야겠다...  

경향신문(06. 09. 05) 영화 '호텔 르완다'

-토마스 카밀린디. 그를 처음 만난 건 1년전 이맘 때다. 저널리즘 연수프로그램 참가차 머무른 미국 미시간대학에서였다. 토마스는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왔다고 했다. 첫인상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미소가 선량하고, 유창하진 않아도 품위있는 영어를 구사하는 점이 조금 눈에 띄었을 뿐이다.

-한달쯤 뒤였을까. ‘신산(辛酸)’이란 말로는 부족할 그의 삶에 대해 듣게 된 것은. 가난하지만 우애깊은 집안의 장남. 고등학교 시절 대통령 앞에서 연극 공연한 것을 계기로 국영 라디오방송 기자가 된다. TV가 드물고 문맹률이 높은 르완다에선 라디오가 가장 사랑받는 매체라고 한다. 끔찍한 내전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토마스는 안온한 삶을 살았으리라.

-그러나 1994년 4월6일 그의 생일날, “모든 것이 변했다”(토마스의 술회).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숨지면서, 잠복해 있던 후투·투치족 사이 갈등이 폭발한다. 후투족 전사들은 벌목용 칼과 구식 총을 들고 닥치는 대로 투치족 학살에 나선다.



-온건파 후투족이던 토마스는 투치족 출신 아내와 둘째딸을 데리고 벨기에 기업 소유의 ‘밀 콜린’ 호텔로 피신한다. 호텔은 평소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 하지만 그날은 위험지역을 피해 가느라 꼬박 이틀이 걸렸다. 토마스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외부 세계와의 유일한 끈인 팩스전화기를 들고 프랑스 라디오 RFI에 기사를 송고한다. 이 때문에 밀 콜린 호텔은 “바퀴벌레(후투족이 투치족을 멸시해 부르는 호칭)들의 온상”이란 비난에 휩싸인다. 후투족 자치군이 호텔로 몰려와 토마스를 내놓으라고 위협하지만, 호텔 지배인 폴 루세사바기나는 단호히 거절한다.



-루세사바기나 덕분에 목숨을 구한 이는 토마스뿐이 아니다. 당시 밀 콜린에는 많은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들이 총칼을 피해 모여들었다. 루세사바기나는 때로는 돈과 고급 샴페인으로, 때로는 탁월한 협상력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상상을 넘어서는 용기로 1,268명의 생명을 지켜낸다. 하지만 호텔 밖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러져간다. 유엔도 미국도 유럽도 수수방관하는 사이, 석달 만에 1백만명이 목숨을 잃는다. 토마스도 처가에 보낸 맏딸이 숨졌다는 비보를 듣는다. 대학살은 끝나지만 희망을 놓아버린 그는 고국을 등진다. 아내와 둘째딸을 벨기에로 보낸 토마스는 미국 정부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해 놓은 상태다.

-토마스가 겪은 ‘94년의 석달’을 담담히 재연한 영화 <호텔 르완다>가 7일 개봉한다. 당시 전세계가 외면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토마스가 꽃같은 아이들을 가슴에 묻었다. 필자도 기자로서 무력했다. 국제면에 실린 기사를 무심코 읽은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있다. 그때 내가, 우리가 외면했기에 12년이 지난 지금도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수단의 다르푸르에서 죄없는 어린이와 여자와 노인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아픈 마음으로, 사죄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러 가려 한다. ‘또다른 토마스’가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호텔 르완다’를 권한다.(김민아 정치부 차장)

한겨레(06. 09. 05) 아프리카 르완다를 위임통치했던 벨기에는 소수 부족인 투치족에게 권력을 쥐여주고 다수 부족인 후투족을 지배하게 했다. 르완다는 1962년 독립했지만, 이때부터 두 부족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크고 작은 인명 피해가 이어져 왔다. 그리고 1994년 4월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됐다. 내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100일 동안 민간인을 포함해 100만여명이 숨졌으며, 르완다는 초토화됐다.



-<호텔 르완다>(감독 테리 조지)는 이 처절했던 100일 동안 1268명의 목숨을 지켜낸 한 호텔 지배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 학살이 시작되면서 수도 키갈리의 최고급 호텔 밀 콜린스에는 올리버 대령(닉 놀테)을 비롯한 유엔군과 잭(호아킨 피닉스) 같은 외신기자, 외국인 여행객은 물론 투치족 피란민들이 모여든다. 이 호텔의 투치족 출신 지배인 폴 루세사바기나(돈 치들)도 투치족 출신 아내 타티아나(소피 오코네도)와 자식들, 이웃들을 호텔로 대피시킨다.



-영리하고 처세에 능한 폴은 불안정한 정국에서 안전망을 확보하려고 오래 전부터 온갖 서비스와 뇌물로 유력 인사들과 친분을 쌓아왔다. 내전 초반, 그는 그렇게 쌓은 인맥을 동원해 가족들을 지켜내려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가족들을 지키려다 목숨이 위태로운 이웃들을 차마 외면하지 못해 돕게 되고, 같은 이유로 호텔에 몸을 숨긴 투치족을 살리는 데 인맥과 지혜를 쏟아붓는다.

-폴은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영웅’이지만, <호텔 르완다>는 그를 ‘영웅 떠받들 듯’ 과대포장하지 않는다. 대신 흑인들의 생과 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유엔과 서구사회의 모습을 너무 흥분하지 않으면서 너무 무겁지도 않게 ‘당시 사실 그대로’ 틈틈이 묘사한다. 이를 통해 자기 가족이 최우선이고 전부였던 가족주의자 폴이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과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이다. 유엔과 서구사회는 자신들의 역량 밖이라며 내전을 중단시키지 않는다. 또 호텔에 묵었던 백인들과 그들의 개까지만 안전하게 피신시킨 뒤 투치족 흑인들을 남겨둔 채 호텔에서 유엔군을 철수시켜 버린다. 이 과정에서 폴은 등떠밀리듯 호텔에 남은 피란민들의 목숨을 책임지게 되지만, 떠밀린 등을 되돌리지 않는 건 그의 따뜻한 인정과 연민 때문이다.



-과대포장은 없지만 <호텔 르완다>는 밋밋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르완다 내전이라는 사실 자체가 있는 그대로 오감을 멎게 할 정도로 끔찍할 뿐더러, 에피소드들도 디테일하다. 또 배우들의 눈부신 연기도 영화에 윤기를 덧입히는데, 특히 돈 치들은 마치 다큐멘터리 속 실재인물 폴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폴의 심리변화와 긴장감을 뛰어나게 표현해냈다.(전정윤 기자)

 

 

 

 

06. 0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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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9-05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한겨레에서 이 영화기사 봤습니다.저두 이거 페이퍼로 올리고 싶었지만 낮에는 바쁘고...물론 밤에도 애기땜에 바쁘고...ㅜㅜ필름 2.0인가에서는 오스카 남우주연상 정도 줘야 되는거 아니냐고 주인공의 연기를 높이 평가하더군요.이게 동숭아트센터에서 개봉하는것 같은데...다른데도 하는지 모르겠어요.많이 개봉하진 않을 거 같은데.동숭 아트센터는 대학다닐때 참 자주 갔던 영화관이었지만...그나저나 아기 태어난 후 천만명이 봤다는 <괴물>도 못보고 있는데 동네 상가에 영화관에 생겨도 보긴 힘들겠죠?

로쟈 2006-09-05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물>은 봤으니까 제가 조금 형편이 나은 듯합니다(한때는 일주일에 3-4편씩 개봉관에서 보던 시절도 있었는데요)... 문화생활은 '여유'를 필요로 하는지라...
 

'프리뷰'의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쏟아져나오는 신간들에 대해 참견할 자리가 마땅치 않았는데, (구당이 명당이라고) '최근에 나온 책들'을 마저 연재하기로 한다. 한 넉달은 쉰 듯한데, 그렇다고 그간에 뭔가 재충전된 건 아니며 단지 에드워드 로렌츠의 <카오스의 본질>이 신간으로 나온 걸 보고서 문득 연재에서 다루고픈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사람의 뇌 또한 '카오스의 가장자리' 아닐까?). 그럼 시작해보기로 할까? 

 

 

 

 

제일 먼저, 에드워드 로렌츠의 <카오스의 본질>(파라북스, 2005)이 출간됐다. 이게 '드디어'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데, 카오스이론, 혹은 복잡계이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인 '에드워드 로렌츠'를 저자로 한 책이어서 무엇보다도 그냥 반갑다. 로렌츠란 성으로 더 잘 알려진 이름은 '콘라트'이지만, '나비효과'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독자라면 '에드워드'란 이름도 함께 기억해두는 것이 형평에 맞겠다.

소개에도 나와 있지만, "'브라질에 있는 나비가 한번 날갯짓을 하면 텍사스에 토네이토가 분다' 이는 최근 들어 동명의 영화 등을 통해 너무나 잘 알려진 '나비효과'의 유명한 명제이다. 하지만 이것이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에 필적한다고 평가받는 카오스 이론의 장을 연 논문 제목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이 분야의 베스트셀러인 <카오스>(누림, 2006 *새로 나왔군!)의 저자 제임스 글릭은 빼놓지 않고 있으며(역자 박배식 교수는 <카오스의 본질> 또한 우리말로 옮겼다), 최근에 재출간된 <카오스에서 인공생명으로>(범양사, 2006)에서도 저자 미첼 월드롭이 언급했던 기억이 있다. 기상학자 로렌츠와 그의 '이상한 끌개'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소개에서 언급되는 있는 영화는 애쉬턴 커쳐가 나오는 영화 <나비효과>를 말한다.

 

이번에 약간 놀란 건 로렌츠의 나이가 생각보다 많은 것. 1917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90세이다. 책에서 읽을 때의 '젊은 기상학자'가 더이상 아닌 것이다.

로렌츠의 원저는 1993년에 나왔으며, 일역본은 1997년에 나온 것으로 돼 있다. 카오스이론에서만큼은 우리가 일본보다 10년 정도는 뒤처지는 것 같은데, 이게 그저 '인상'일 뿐일까?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카오스이론이나 복잡계과학에 관한 번역서들 가운데는 일본책들이 적지 않다. 국내에서는 수학자 김용운 교수의 책 정도가 눈에 띌 따름이다. 벌써 10년쯤 전에 유행을 탄 카오스이론이지만, 스튜어트 카우프만의 <혼돈의 가장자리>(사이언스북스, 2002)나 <카오스의 본질> 같은 주요 저작들이 번역된 김에 한번쯤 '뒷북'을 쳐보는 것도 의미있어 보인다. 피서객들이 다 빠져나간 백사장을 되밟다보면 간혹 동전들 이상의 횡재를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조금 복잡해보이지만, 사실 정재승 교수의 베스트셀러 <과학콘서트>의 내용 대부분이 이 카오스이론/복잡계과학과 연관된 것들이다. 콘서트장의 연주를 즐기는 것 이상을 원한다면, 이제 '악보'를 찬찬히 들여다볼 수도 있겠다.

 

 

 

 

최근에 나온 과학서들 가운데, <뇌가 나의 마음을 만든다>(바다출판사, 2006)도 눈길을 줄 만한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세계의 뇌 과학자 중 한 명인 라마찬드란 박사가 BBC의 ‘리스 강연’에서 행한 내용을 담고 있다. 라마찬드란 박사는 환상사지나 공감각 같은 희귀한 신경이상 사례들을 통해 우리 뇌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더 나아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자유 의지란 무엇인가?’. ‘자아란 무엇인가?’ 같은 이제까지 철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여겨졌던 질문들에 대해 외 과학자로서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며,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두 문화의 연결을 시도한다." 그러니 읽어봄 직하다. 뇌과학 관련서들이 근래에 부쩍 눈에 띄는데, 사실 게놈프로젝트 이후에 꼽을 만한 메가프로젝트란 대뇌지도 만들기 아니었나? 그게 얼만큼 진행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하다.

 

 

 

 

그리고, 두번째 책은 영국 비평가 매슈 아널드/아놀드(1822-1888)의 <교양과 무질서>(한길사, 2006). 아널드 전공자인 윤지관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기억에, 아널드에 대한('Arnold'를 꼭 '아널드'라고 표기해야 할까?) 박사학위논문을 펴낸 <근대사회의 교양과 비평>(창비, 1995)이 10년도 더 전에 나왔으니까 본 저작에 대한 소개 자체는 상당히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 전에 <삶의 비평>(민지사, 1985)이란 아널드의 책이 한번 소개된 걸로 돼 있지만, 본격적인 것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번에 나온 <교양과 무질서>는 어떤 책인가? 소개를 좀 따라가본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 매슈 아널드는 당대의 사회적 갈등과 계급현실에 대한 처방으로 '교양(culture)'의 이념을 내세운 것으로 유명한 문학비평가이다. 오늘날 '교양' '교양인' '교양교육' 등의 개념을 널리 사용하게 된 배경 중 하나로 매슈 아널드를 꼽아도 무방할 정도라고 한다. <교양과 무질서>는 그런 매슈 아널드의 사상을 집약한 정치·사회평론서이다." 그러니가 '교양의 원조'라 할 수 있겠다.

"<교양과 무질서>는 1867년부터 당시의 사회·정치적인 쟁점을 두고 매슈 아널드가 1년 이상 벌인 논쟁문을 묶은 책이다. 차티스트 운동이나 각종 법률의 제정 등 정치적·경제적 개혁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 빅토리아 사회는 거대한 변화의 과정에 있었고, 그 과정에서 대중교육 문제가 커다란 사회적 과제로 등장한다. 이러한 당시 사회의 갈등과 혼란을 '무질서'로 규정하는 지은이는 그 대안으로 '교양'을 제시한다. 노동계급을 포함, 파당성에 사로잡혀 '무질서'를 일으키는 중간계급을 '속물'이라고까지 비판하는 매슈 아널드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많은 파란을 일으킨다. <교양과 무질서>에서 지은이는 이러한 반론에 하나하나 반박하며 자신의 교양 개념을 자세히 설파한다. "교양이란 우리의 고정관념과 습관에 신선하고 자유로운 생각의 줄기를 갖다대는 것"이라고 말하며 교양의 시대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아널드의 정치적 입장은 오늘날의 스펙트럼에서 볼 때 중도보수에 가깝지 않나 싶다(여러 번 언급했지만, 우파의 교양론에 대응하는 것은 좌파의 품성론이다). 단, 이 보수주의의 자격조건이 교양(culture)이며, 그게 결여된 이들을 통칭해서 '속물(philistines)'이라고 칭하는 것. 그러니까 우리 주위에서 유감스러운 것은 '교양 대가리'라곤 없는 속물적인 우파들이 보수주의를 떠들어대는 것이다. 물론 아널드의 분류에 따르자면 속물적인 좌파들 또한 비판에서 열외가 되는 것은 아니겠다. 사실 이러한 교양주의가 '창비'와 보다 급진적인 노동/민중문학론자들을 가르는 입각점이 아니었나 싶다. 한편, 아널드가 폄하해마지 않는 '무질서'에 대해서는 '다른 과학', '다른 지배자'가 필요한 듯하며, 참조할 만한 책 몇 권을 나열해보았다.   

 

 

 

 

세번째 책은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좌파적 교양'을 책임지고 있는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대표작 <미국민중사>(시울, 2006)이다. 예전에 <미국민중저항사>(일월서각, 1986)이라고 나왔던 책의 개정판인데, 20년만에 나온 것이니까 어느덧 '한 세월'을 감당한 책이기도 하다. 이로써 하워드 진에 대해서만큼은 '연장 탓'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읽을 수 있는 만큼 읽으면 되는 것이다.

잠시 소개를 옮겨오면, "<달리는 기차에 중립은 없다> <오만한 제국> <전쟁에 반대한다> 등의 책들을 통해 노엄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역사학자 하워드 진.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지향하며 민중의 시각으로 미국사 전체를 읽어낸 <미국민중사>는 그의 역사학자로서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역작으로, 1980년 첫 출간 이래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대표적인 저서이다." 미국에서도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



"'민중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이 미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미국을 구성하는 일반 사람들에게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그 미국의 민중은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처음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청도교인이나 지배층의 부유한 백인들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책은 오히려 기존 역사의 현장에서 소외된 이들에 더 주목하고 있다. 나아가 책은 소외된 이들의 시각을 적극적으로 끌어온다. 예컨대 콜럼버스의 아메리칸 대륙 발견에서 하워드 진은 인디언 부족인 아라와크족의 시각을 빌려온다. 그리고 헌법제정의 역사에는 노예의 관점을, 산업주의 발흥의 역사에는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들의 관점을, 멕시코 전쟁의 역사에는 탈영병들의 시각을, 뉴딜의 역사에는 할렘 흑인들의 관점을 도입한다." 이러한 관점들을 중재해줄 수 있는 객관적 시점이라는 게 과연 가능한가, 그런 의문을 갖게 한다. 정복자와 피정복자가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역사? 진의 표현을 빌자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뜻있는 건 이번에 데이비드 조이스의 평전 <하워드 진>(열대림, 2006)이 같이 출간된 것. "노암 촘스키와 더불어 '실천적 지식인', '미국의 양심'으로 불리는 하워드 진의 생애와 저술을 다룬 전기"로서 "책은 주로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에 중점을 두고 진의 생애를 돌아본다. 전기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지은이는 진의 삶이 보여주는 궤적 속에서 그의 주요 저서를 소개하고, 그의 혁명적 사상을 분석하며, 그의 삶과 업적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평가한다." 그러니 길잡이로서 유익하겠다. 물론 하워드 진의 자서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이후, 2002)와 나란히 읽으면 더 좋겠다. 참고로, 미국사 관련서들을 몇 권 나열해 보았다.  

 

 

 

 

네번째 책은 고모리 요이치의 소세키 평전 <나는 소세키로소이다>(이매진, 2006)이다. 제목은 소세키의 대표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따왔는데, 이 일본근대문학의 태두를 다루고 있는 저작이 이번에 처음 나온 건 아니지만, 저자가 <포스트콜로니얼>(삼인, 2002)의 저자 고모리 요이치라는 게 눈길을 끈다. 현재 도쿄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인 저자는 가끔씩 내한강연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일본의 내셔널리즘에 대해서 적극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는 고모리 교수의 문학비평가로서의 솜씨를 구경해볼 수 있는 책이겠다.

 

 

 

 

소개에 따르면,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나쓰메 소세키 평전. 금전, 호적, 우정, 사랑, 영국 유학 등 다양한 요소들을 동원해 소세키와 그의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한다. 폭넓고도 치밀한 연구를 통해, 소세키라는 필명을 얻기 전의 '나쓰메 긴노스케'의 삶을 드러내고자 했다. 어릴 때 친부모와 양부모에게 버림받은 기억, 런던 유학 시절에 고향에서 죽어가는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죄책감, 다섯 번의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 최초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부터 마지막 장편 작품인 <한눈팔기>, 필생의 역작으로 꼽히는 <문학론>과 '자기본위'라는 말로 유명한 강연 <나의 개인주의>까지, 지은이는 소설 속에 조각조각 나뉘어 숨어 있던 소세키의 삶을 하나하나 짚어낸다"

일본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출세작도 소세키론이었다는 걸 염두에 두면, 일본비평가들에게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자기입증을 위한 척도 같은 게 아닐까도 싶다(과문했던 나는 국내에서 소세키가 유행을 타기 전 아쿠다가와,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 등이 일본근대문학을 대표하는 걸로 알았다). 프랑스문학쪽으로 가면 마르셀 프루스트나 사뮤엘 베케트 같은 경우가 그런 듯싶은데, 쟁쟁한 비평가나 철학자들이 이들에 대한 연구서들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의 경우는 어떠한가? 어느 작가론을 써야 비평가로서 자기존재를 입증할 수 있나?.. 

 

 

 

 

끝으로 마지막 책은 사랑 이야기이다. '중세 최대의 연애사건'으로도 불리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책이 <내 사랑의 역사>(북폴리오, 2006)로 또 출간된 것이다. 원제는 '엘로이즈와 아벨라르'(2003) 순절한 사랑의 대명사가 된 이 커플의 이야기는 어떤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일까?

"12세기 프랑스의 수녀였던 엘로이즈는 중세 철학의 대가이자 성직자인 아벨라르와 숙명적이고도 질긴 사랑을 나눴다... 12세기 초, 파리의 열혈 논객이었던 아벨라르는 성당 참사관인 퓔베르의 집에 하숙을 청하고, 퓔베르의 조카딸이었던 엘로이즈를 가정교사로 맞게 된다.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난 이들은 곧 육체에 대한 탐닉과 사랑에 빠져 비밀결혼을 하고 아들까지 낳게 되지만, 이 사실을 안 퓔베르는 아벨라르를 거세시키는 것으로 복수를 한다. 이후 두 사람은 헤어져 수도승과 수녀로 살아가게 되지만 15년 후 다시 만나게 된다. 사랑과 종교, 철학이 어우러진 이들의 삶은 어떻게 끝맺게 될까?..."

이번에 나온 "책은 최근에 발견된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편지 뭉치와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두 사람의 삶을 마치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으로 풀어나간다"고 한다. 이미 이전에 출간된 독어권의 책 <중세 최대의 연애사건>(생각의나무, 2005)과 나란히 읽으면 이들의 사랑을 훔쳐보는 데 더 도움이 되겠다.  

한편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거나 변주한 책들도 적지 않은데, 장 자크 루소의 <신 엘로이즈>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겠다. 생각보다는 방대한 분량인데다가 그만한 문학성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소와 누벨 엘로이즈>(만남, 2002) 같은 연구서만 달랑 하나 갖고 있다는 건 좀 궁색한 일이다. 예전에 출간된 루소전집에 들어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새 번역본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사랑의 역사'가 좀더 번듯하게 채워질 수 있도록... 

06. 09. 05-06.

P.S. 참고로, 아널드의 <교양과 무질서>에 대한 서평 하나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6. 09. 09) 어지러운 사회 바로잡는 힘

-19세기 영국의 시인이요, 비평가였던 매슈 아널드(1822~88)의 <교양과 무질서>가 아널드 전문가에 의해 번역·출판됐다. 우리가 이 책의 출간을 반갑게 여기는 것은 이 문화·사회·정치 비평의 고전에서 아널드가 펼치고 있는 논설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도 여러모로 의미 있는 시사를 던져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아널드의 시대에 영국은 산업혁명의 여세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한편 정치적 개혁과 사회적 변화에서 야기되는 혼란과 무질서를 겪고 있었다. 더욱이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제시된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사상은 오래된 맹목적 신앙을 뿌리째 흔듦으로써 엄청난 정신적 의혹과 혼란을 초래했다. 그러므로 아널드가 ‘도버 해변’이라는 유명한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꿈속의 땅처럼 눈 앞에 펼쳐진 세계/다채롭고, 아름답고, 싱그러우나/실은, 그 속에 기쁨도, 사랑도, 빛도/확신도, 평화도, 고통을 위한 도움도 없네./우리의 이 어두워 가는 평원엔/갈등과 패주의 경적이 어지럽고/밤마다 무지한 군대들이 충돌하고 있을 뿐”이라고 노래했던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아널드의 혼란 인식은 이런 일반론에만 머물지 않고 그 나름의 구체성을 띠고 있다. 특히 귀족, 중간 계급 및 노동 계급 등 이른바 3대 계층에 대한 그의 인식에는 각별한 데가 있다. 그가 보기에, 귀족들의 개인적 자유 및 야외 스포츠 선호는 그 뿌리가 야만성에 있었고, 그 자신이 속한다고 여겼던 중간 계급은 온통 속물주의로 물들어 있는가 하면, 거칠고 무식한 노동계층은 우중(愚衆)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무질서는 필연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사회현상이었다.

-아널드는 중간 계층이 사회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 계층은 물질주의에 물든 채 가난한 계층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고 부도덕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당대 중간 계층의 도덕적 지주이던 청교도 정신이 편협하고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아널드는 당대를 풍미하던 자유방임주의가 정치적 편견과 무책임으로 흐를 가능성을 경계했는데, 이는 제2장 ‘내키는 대로 하기’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가 지도자적 자질의 필수 덕목으로서의 교양을 강조하게 된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실로 교양이야말로 사회의 모든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 방안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교양은 무엇보다도 ‘완성에 대한 공부’이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즐거움을 위해서 보려는 욕망’과 ‘세상을 지금보다 더 낫고 행복하게 하려는 숭고한 열망’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교양은 단순히 희랍어나 라틴어 문헌을 겉핥기할 수 있는 능력이나 순수한 과학적 지식을 의미하지 않고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과 선을 행하는 도덕적 힘을 의미했다.

-이런 의미에서 아널드가 이 책에서 ‘단맛과 빛’이라는 말로 제1장의 제목을 삼은 것은 아주 시사적이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일찍이 꿀벌의 덕성을 논하면서 꿀벌은 인간에게 꿀을 제공해서 단맛을 볼 수 있게 하는 한편 밀랍을 제공하여 촛불을 켤 수 있게 한다고 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아널드가 ‘단맛’과 ‘빛’이라는 스위프트적 은유를 빌려서 교양의 속성을 규정하는 동시에 중간 계층이 바로 이 단맛과 빛을 결여하고 있음을 개탄한 것은 아주 흥미롭다.

-아널드가 말하는 단맛과 빛은 그 성격에 있어서 인간의 헬레니즘적 성향과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의 완성 또는 구원’이라는 지상 목표를 위해서는 헬레니즘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도덕적 실천을 최고 덕목으로 삼는 헤브라이즘의 보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즉 헬레니즘의 ‘올바른 생각’과 헤브라이즘의 ‘올바른 행동’이 상호보완되어야 인간의 교양도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널드의 교양론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까지도 여전히 적정할까? 물론 아널드가 이 책을 쓰던 1860년대는 우리 시대와 현저히 다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처해 있는 정치·경제·사회적 상황은 140년 전 영국인이 처해 있던 상황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교적 짧은 기간에 걸친 우리의 민주정치 실험과 급속한 경제 개발은 과격한 사회적 변혁을 일으키면서 혹심한 가치관의 혼란과 정신적 폐해를 야기해왔고, 이는 아널드가 짚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병폐와 그리 다르지 않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아널드가 제기한 문제는 여전히 우리에게 설득력이 있으며 그가 제시한 처방책도 우리에게 유효하다. 만약에 ‘교양과 무질서’가 이런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호소력을 지니지 않는다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도 없을 것이다.(이상옥|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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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9-04 21:12   좋아요 0 | URL
연재가 끊겨서 섭섭했었는데 반갑네요^^

로쟈 2006-09-04 21:22   좋아요 0 | URL
'시간 버리기'에는 이만한 일도 없지만, 아무래도 생계를 고려해야 하는지라(^^;)...

twoshot 2006-09-04 23:40   좋아요 0 | URL
'Arnold'를 '아널드'라고 부르는 것이 좀 거북합니다. 영화배우 애슐리 쥬드를 애슐리 저드라고 불러야하고 랄프 파인즈를 레이프 파인즈로 불러야 한다는 건 별 거부감이 없습니다. 쥬드와 저드, 랄프와 레이프는 많이 다르다고 느낍니다. 사람이름인데 정확히 불러주자는 취지는 십분 공감 합니다만 아놀드라 하던걸 아널드로 불러야한다는 건 왠지 거부감이 들어요. '교양'이 부족해서 그런가요?-_-;

로쟈 2006-09-05 09:10   좋아요 0 | URL
그건 저도 불편합니다. 그리고 동의하지도 않습니다(더불어, 저는 '애슐리 쥬드'를 좋아합니다). 우리의 '아널드'가 '속물적 교양'에 대해서는 얘기 안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꾸때리다 2006-09-05 09:13   좋아요 0 | URL
오 드디어 다시 연재하시는 군요.~~~

가을산 2006-09-05 10:17   좋아요 0 | URL
다시 시작하셨군요. 아이구 반가워라.

로쟈 2006-09-05 11:59   좋아요 0 | URL
예, 힘 좀 빼고 그냥 가볍게 연재할까 합니다. 한데, 말려주시는 분들은 안 계시나요?^^

philocinema 2006-09-05 20:53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님의 신간리뷰를 보게 되니 기쁘고, 마음이 설레이는군요...

페일레스 2006-09-05 21:44   좋아요 0 | URL
말리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등떠밀어 드리고 싶기도 합니다. ^^
로쟈님의 글이 계속되길 바랍니다. 물론, 생계에 지장을 미치지 않는 한에서.

로쟈 2006-09-05 22:55   좋아요 0 | URL
risper3님/ '사랑이야기'가 들어가서인가요?^^
페일레스님/ 생계에 지장을 미치지 않기 위해서 앞으론 좀 헐렁하게 쓸 예정입니다. 그나마 벼랑끝이 아니어서 다행이네요(!)...

yoonta 2006-09-06 01:26   좋아요 0 | URL
니체도 그의 대표작들의 대부분이 연금생활을 할수있게 된 이후에 나왔다죠? 로쟈님도 생계문제때문에 고민하지 않게 되는 순간에 나오게될 글들이 어떤 것들일지 궁금해집니다..하루빨리 안정된 생계수단을 확보하시길 바래요..^^

로쟈 2006-09-06 14:18   좋아요 0 | URL
생계가 해결되면 사실 '역사 이후'이죠.^^ 오랜만에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건강하시죠?^^
 

아무리 간단하게 저녁식사만 하는 자리라고 해도 '가족행사'가 낀 주말은 그냥 없는 듯이 지나간다. 휴일에 잠시 낮잠이라도 자고 일어나면 몸은 좀 가뿐해지지만 밀린 일들이 머리를 무겁게 짓누른다(간혹 '제 정신이야?'라고 다그치기도 한다). 저녁시간에 세탁기로 돌려놓은 빨래를 베란다 빨랫줄에 널면서, 문득 중학생 때 빨리를 널러, 또 걷으러 대야를 들고 (아파트가 아니라) 당시에 살던 단층 단독주택 옥상에 오르락내리락 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낭패스럽게도 소나기가 오는 바람에 널어놓은 빨래를 다시 걷어다가 세탁해야 했던 일들도(그러니까 빗방울이 떨어지자 마자 가장 먼저 떠올려야 했던 일은 '옥상의 빨래'였다!).

돌이켜보면, 그런 게 또 '행복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아파트 베란다에 너는 빨래는 그런 '모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에 젖은 빨래를 다시 빨아 널어야 하는 불편은 덜게 됐지만, 덩달아 덜게 된 건 '일상의 모험' 한 가지이다. 그러한 손익계산을 하자치면, 삶은 공평하다. 나아지는 게 없다. 아니, 공평하게 말하자. 삶은 언제나 퇴색한다. 더이상 청춘을 찾아보기 어려운 부모님의 얼굴처럼(내가 중학생일 때 어머니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으셨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세탁기 이야기'나 옮겨적을까 하고 옛날에(10년 전에) 만든 시집들을 들춰보다가 다소 엉뚱한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이 세상의 소금을 노래함'이란 시에 눈길이 간 것. 약간 교정해서 옮겨놓는다.  

이 세상의 소금을 노래함

소금은 짜다. 소금은 단순하다.

이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소금은 말한다, 아니면

퍽퍽하리라고, 맹탕이 되리라고, 밥맛이 떨어지리라고-

아무도 소금을 무시할 수는 없다. 된장 공장 같은

삶의 현장에서 짠맛이 빠진다면,

오, 어느 된장국에 우리가 숟가락을 담글 것이냐?

하여 우리는 소금을 묵인한다. 소금의 활동을 묵인한다.

맛소금, 막소금, 더러는 막돼먹은 소금이 도처에서

활발하다. 닭도리탕에도, 미역국에도, 더러는 레미콘에도.

소금은, 맛의 주연이고 베테랑이며 조국 근대화의 주역이니.

보라, 땀에 배인 소금의 과거, 짭짤한 소금의 현재, 빛나는 소금의 미래!

세상에 뿌려진 소금만큼 소금의 끗발은 줄지 않는다.

소금은 미나리가 아니고 미나리 사촌이 아니니

오, 이 땅의 소금들이여!

하여 우리는 눈물을 훔치며 다짐했던 것이다. 인제 다신

맹탕의 삶을 살지 않으리라, 삶을 물말아 먹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맵짜지기로, 소금이 되기로, 소금기둥이 되기로!


소금은 짜다. 소금은 단순하다.

이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소금은 말한다, 장조림도 말한다.

아침밥을 먹고 오늘도 삶의 현장으로 달려간다. 숨이,

턱밑까지 찰 때쯤, 우리는

소금의 문턱에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설렁탕집에서 엊저녁에 꼬리찜을 먹은 게 '잔상'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요즘은 국산 소금이라도 믿을 수 없다고 하지. 중국산 소금을 잔뜩 사다가 염전에 뿌리고 그걸 다시 거둬들인다나. 해서, 이 세상의 소금들은 한가지로 다들 빛나지만 실제로는 여러 종류가 있는 것. 내 세대의 386 소금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겠다. '이 세상의 소금들'에 경의를 표하지만, 소금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06. 09. 03.

 

P.S. 시집엔 '이 세상의 소금을 노래함'이란 장의 머리에 키에르케고르의 독설도 함께 인용해놓았는데, 이런 내용이다: "세상에 나서서 큰소리로 질타나 하면 마치 사람의 운명이 변혁되는 줄로 믿는다는 것은 커다란 애교이다." 이 덴마크의 철학자에겐 유머가 있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내가 젊었을 무렵 요리점에 가면, 나도 세상의 청년들처럼 급사를 향하여 '여봐, 스테이크 하나, 고급 스테이크 한 접시, 등심살로 너무 기름기가 많지 않은 것을 가져와' 하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급사는 거의 내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것을 황송하게 듣는 일은 없었다. 또한 내 목소리가 주방에까지 들려서 요리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 따윈 더더군다나 없었다. 설령 모두가 그러했다 하더라도 스테이크의 품질이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문제는 '스테이크의 품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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