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전 마종기 시인의 신작시집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문학과지성사, 2006)가 출간됐었다. 시집의 펴낸 날을 보니 '2006년 8월 31일'로 돼 있다('그 여름의 끝'에 나온 시집이다!). 시집을 손에 들기 전에 먼저 두 편의 시를 한 지인의 블로그에서 읽었는데, 타이핑된 시는 아래와 같다.

아주 작은 날벌레가 어디서 날아와 읽던 책장에 앉
았다. 나는 책을 잽싸게 닫아 날벌레를 죽였다. 읽기
를 계속하려고 다시 책을 여니 벌레는 죽어서 검은
점 한 개가 되어 있었다.뜯어낼 건더기도 없었다. 날
벌레의 날개도 부서지고 눈알도 다리도 심장도 다 함
께 뭉개져서 작은 점 하나가 되어 있었다.

책장을 더 이상 넘기지 못하고 으스러진 벌레의 본
래 모습을 그려본다. 이 날벌레도 이름은 있었겠지.
하루살이보다 더 짧은 이름. 입김이 시신을 다칠까 봐
조심스레 한마디 했다. 미안하다. 나에게 이 날벌레는
너무 작고 나는 조팝나무 꽃보다 너무 작다. 작고 큰
것은 어차피 비교하기 나름이다. 미안하다. ......

세상에는 팔팔하던 몸이 죽어 겨우 검은 점 하나로
남는 생명이 많다. 나도 그럴까. 그러니 함부로 슬퍼
하지도 울지도 말 것. 눈물 한 방울에 시신이 완전히
씻길 수도 있다. 한 슬픈 감정이 남을 씻어 없애기도
한다. 저 함부로 내뱉는 슬픔의 잔인성, 저 함부로 내
뱉는 외로움의 음흉스러움, 저 함부로 내뱉는.......

 

 

 

 

내게 인상적이었던 시 '검은 점의 장례'의 전문인데, 처음에 이 시가 인상적이었던 건 물론 내용도 좋긴 하지만, 특유의 행갈이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가령, '앉았다'를 1행과 2행에 걸쳐서 '앉/ 았다'라고 행갈이를 하는 게 시인의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한(시인은 1939년생이다) '문학적 젊음'의 표식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러한 행갈이가 이 시에서 그려지고 있는 삶과 죽음의 팽팽한 긴장을 더욱 고조시켜주는 것으로 읽었다. 뜯어낼 건더기도 없이 부서지고 뭉개진 날벌레 한마리의 모습을 '읽기/ 를' '날/ 벌레' '함/ 께'라는 식의 행갈이가 도상적으로 보여준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첫인상이었다. 

그런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며칠이 지난 다음이었다. 시인의 자의적인 행가름이 아니라 그냥 타이핑의 문제가 아닐까란 생각이 든 것이다. 그 즈음에 구한 시집에서 확인해보니까 역시나 원시는 따로 행가름이 돼 있지 않은, 다만 3개 연으로만 구획된 산문시였다. 아마도 타이핑된 시 또한 양쪽 맞춤을 했더라면 애초에 내가 가졌던 오해/오독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벼운 해프닝이었던 셈인데, 한편으론 그런 '전위적인' 행가름의 가능성이 무산된 듯해 다소 아쉬웠다. 산문과 달리 시에서 의미를 발생/증폭시킬 수 있는 유력한 방식이 바로 행가름/연가름인데(가령 통사적인 한 문장이 두 연에 걸쳐 이어지는 앙장브망 같은 시행을 요즘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의 시들에서는 너무 무시되는 듯하기도 하고.

칼리그람시(그림시)였다면, "날벌레의 날개도 부서지고 눈알도 다리도 심장도 다 함께 뭉개져서 작은 점 하나가 되어 있었다"란 내용을 크기도 제각각인 산개된 글자들이 널브러져 있으면서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어 가는 과정을 표현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시각적 효과를 배제한다면 시는 시각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청각에 호소하게 된다. 낭송용 잠언들. 말 그대로, 그건 검은 점으로 수축된 '글자들의 장례'이기도 하다. 청각영상으로서의 시니피앙(기표)에 자신의 자리를 내준 말 그대로의 글자들(letters). 나는 그 글자들이 좀더 활개치는 시들이 보고 싶다...

06. 10.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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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6-11-07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던 거군요. 재미있네요.

맑음 2006-12-21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는 말 이럴 때 쓰는 거 맞죠? 로쟈님 이 글도 담아가겠습니다.^ㅅ^
 

경향신문의 고전읽기에서 일본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새물결)가 다루어지고 있길래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나는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민음사)을 도서관에서 대출하고 그 영역본을 타대학 도서관에 대출신청했다(내가 갖고 있는 국역본은 '고아원'에 가 있다). 올 문단의 큰 논쟁거리를 가져온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 그 '기원'에 관한 이야기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자연스레 생각했기 때문이다(고진 스스로가 문제삼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내용정리를 마저 끝내는 일도 아직 미뤄둔 숙제로 남아있다.

 

 

 

 

개인적으로 가라타니 고진에 관한 페이퍼들을 자주 올렸다고 생각되는데, 내가 제일 처음 읽은 책도 <탐구1>이었다. 그의 '비평'은 '고진식 비평'이라고 따로 분류해도 좋을 만큼(적어도 국내에서는 그런 종류의 비평을 접하기 어려웠던 거 아닌가? 철학과 문학을 횡단하는 쪽으로는 김우창 교수의 비평 정도가 예외적이었을 뿐) 독특하고 흥미로웠는데, 게다가 '읽히는' 비평이었다(아래의 기사를 보니 <탐구>는 '90년대 일본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고진급의 비평가가 흔한 건 아니라는 데에서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읽은 게 <은유로서의 건축>이었던 듯하며 나는 이 책을 영역본과 나란히 놓고 읽었다.

 

 

 

 

영역본을 위한 이 선집이 <탐구>에서 더 나아간 것처럼 여겨지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이후에 나는 고진의 애독자가 되었다. 당연히 이후에 출간된 고진의 모든 책을 사들였으며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정도를 빼고는 다 읽어본 듯하다. 그리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의 몇몇 저작(가령 <의미라는 질병> 같은 비평집)을 은근히 고대하고 있다. 혹 당신이 아직 이 거물급 비평가를 만나본/읽어본 적이 없다면 (뚜쟁이로서 말하건대) 한번쯤 시간을 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대충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되면 당장 비평을 써보시라. '고진을 넘어선 비평'이 탄생하는 흔하지 않을 장면을 나는 목도하고 싶다...

경향신문(06. 09. 30) ‘타자’와 ‘윤리’에 대한 치열한 성찰

한 권의 책이 생각하는 감각을 바꾼다고 할 때, 이는 날카로운 칼에 베는 일과 같다. 한 번 벤 자리는 아물어도 예전 같지 않다. 벨 때의 고통은 떠나겠으나 몸은 이미 전과 다르며, 미열이 가시지 않는 혼미함 속에서도 정신은 각성되어 있다. ‘탐구’를 읽고 나서는 전처럼 생각하기 힘들다.

저자인 가라타니 고진(1941~) 자신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탐구’를 ‘전환’이라 일컫는다. ‘탐구’의 글들은 1985년에서 88년까지 잡지 ‘군조우(群像)’에 연재됐는데, 그 2년은 첨예한 논쟁의 연속이었다. 고진이 ‘기존 철학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진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대결해야 했다. 국내에서도 유명한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1978), ‘일본근대문학의 기원’(1980) 이후 고진은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그는 이 시기 자신의 사상적 고투를 ‘패배한 전쟁’이라 일컫는다. 그의 싸움은 이러한 것이었다. “나는 일부러 나 자신을 ‘안’에 묶어 두려고 했다. …나는 바깥을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상정되지 않도록 하였는데, 바깥이란 일단 그렇게 파악되면 이미 안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내성과 소행’)

그는 형이상학과의 지난한 싸움에 나섰다. 경제학, 문학, 철학의 영역으로 전략적으로 자리를 바꿔가며 형이상학과 맞섰다. 자리를 옮겼을지언정 고진은 한 번도 쉽사리 자신을 형이상학 밖에 있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오히려 끊임없이 형이상학의 내부로, 사유되지 않은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갔고, 종국에는 형이상학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리기 위해 철저한 논리적 작업을 거쳤다. 그 결과가 ‘은유로서의 건축: 언어, 수, 화폐’(1983)이다.

그러나 그는 패배했다. 초월적인 의미를 제거하기 위해 전투에 나섰으나, 그 전투가 자신에게 남긴 것은 메마른 감각과 갑갑한 논리였다. 거기에서 빠져 있는 것은 ‘타자’라는 생명력이었고, ‘윤리’로서의 소통이었다. 이제 고진은 형이상학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을 사유하기 시작한다. “내가 ‘탐구’를 연재하면서 계속 질문했던 것은 ‘사이’ 혹은 ‘외부’에서 살기 위한 조건과 근거였다고 할 것이다.”(‘탐구’ 후기)

‘탐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타자(他者)’이다. ‘타자’라는 말은 그 함의와는 달리 결코 낯설지 않다. 빈번히 사용되는 이 개념은 낯선 존재를 범박하게 처리하는 상투어가 되고 만다. 그 까닭은 타자라는 말이 자기 확장의 의미를 띠고 사용되기 때문이다. 고진은 이러한 용법을 가장 경계한다. 그에게 타자는 주체의 ‘바깥’이지만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바깥’이다. 만약 그 ‘알 수 없는 거리’가 빠져있다면 타자는 그저 주체 ‘안’의 존재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서 상정되는 신은 자기의 확장일 따름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의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소리이다. 자신의 말을 마치 누군가의 말인 양 듣는다. 그때 타자와의 ‘거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신이 전지전능하게 나를 꿰뚫고 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바를 내가 안다는 사실과 동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원하는 바를 가장 잘 아시는 신의 상정, ‘기복 신앙’은 자기독백이다.

여기에서 빠져 있는 것은 ‘비대칭적 관계’이다. 타자는 내가 품는 의미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존재이다. 이쪽에서 자명하다고 저쪽에서도 자명하지는 않다. 이때 고진이 ‘타자’로 문제 삼으려는 것은 ‘독아론(獨我論)’이다. 독아론은 나에게 타당하면 다른 이들에게도 타당하다는 사고방식이다. 독아론에서 남은 나와 동일한 주체로서, 동일한 규칙을 소유하는 사람으로 설정된다. 하지만 이들은 내면화된 존재일 따름이다.

고진은 플라톤 이래의 서구 형이상학은 바로 이러한 독아론의 소산이었다고 지적한다. 거기에서 배제된 존재들은, 광인(푸코, ‘광기의 역사’)처럼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실제의 삶이란 무수한 존재들간의 차이, 그리고 그 차이들을 뛰어넘는 ‘가늠할 수 없는’ 도약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를 성찰하는 일은 ‘윤리’적이다. ‘윤리’란 타자와의 ‘비대칭성’을 품으면서도 관계를 실현하는 행위이다. ‘탐구’는 이렇듯 ‘타자’와 ‘윤리’에 관한 책이다.

일본의 사상지 ‘유레카’는 90년대 일본 최고의 책으로 ‘탐구’를 선정했다. 80년대 후반의 저작이 90년대 최고의 책으로 꼽힌 것은 ‘탐구’가 90년대의 맥락에서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소위 동구권의 몰락 이후 ‘역사의 종언’이 고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서구이성 혹은 자본주의의 독백일 따름이다. 문제는 그에 맞서는 해체주의가 90년대에 이르러서 파괴력을 잃고, 지적 유희의 경향을 걸었다는 점이다. 그 때 빠져있는 것 역시 ‘타자’와 ‘윤리’였다. ‘탐구’는 역사에 대한 목적론을 부정하면서도 그 반편향으로 어려운 지적 수사에 이르지도 않았다. 다만 실제의 삶에 대해 말한다. 이제 고진이 ‘탐구’에서 자주 인용하는 비트겐슈타인의 한 구절을 이해할 수 있다. “세계 안에 신비는 없다.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신비이다.”(윤여일|‘수유+너머’ 연구원)

06. 1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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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2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0-02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0-02 16:40   좋아요 0 | URL
**님/ 잘 모르겠는데요. 저는 아닙니다.^^ 저도 같은 내용의 전화를 받았었는데, 별로 애로사항이 없다고 답했지요. 워낙에 가족이 단촐해서...
**님/ '고아원'이 좀 다른 뜻인데요(^^;). 제가 책을 보관해두고 있는 곳을 '고아원'이라고 부릅니다. 시화공단에 있습니다. 그리고 맞춤법은 제 잘못이 아니라 원고 필자의 잘못입니다요(^^;)...

2006-10-02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0-02 22:04   좋아요 0 | URL
**님/ 좀 헷갈리실 수도 있겠습니다. 이전엔 '-' 표시라도 앞에 달았었는데, 요즘은 그냥 전후 문맥에 맡겨놓고 있습니다. 특별히 퍼오는 글들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요...
 

연휴를 앞두고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몇 권을 꼽아본다. 나로선 당장 연휴에 읽을 책들은 아니지만 한두 권 정도는 연휴에 구입할 계획이다. 개인적으로 일주일에 평균 5-60권의 도서정보를 처리하고 그 중 최소 10여 권을 구입하거나 복사한다. 절반 정도는 전공이나 관심사와 관련된 원서들이고 나머지 절반쯤이 우리말 책들인데, '최근에 나온 책들'은 그 가운데 특별히 눈에 띄거나 한번쯤 관련서들을 뒤적거려보고 싶은 책들에 속한다. 이번 경우엔 <로맹 가리>나 <도구적 이성비판>이 특별히 그러한 종류에 해당된다. 먼저 <로맹 가리>부터 시작해보자. 

 

 

 

 

도미니크 보나의 <로맹 가리>(문학동네, 2006)는 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유일한 작가이자, 수수께끼 같은 작가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에 관한 전기로 1987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전기부문 대상을 수상했다고 하는 만큼 신뢰할 만한 평전이다(보나의 책으론 <세 예술가의 연인>도 출간된 바 있다). 요컨대 "<자기 앞의 생>,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작가,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번갈아 소설을 발표하며 '매너리즘에 빠진 거장'과 '자유로운 영혼의 신인'이라는 두 페르소나를 연기했던 작가, 1980년 권총 자살로 생을 마치기까지 열정과 야망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소설가 로맹 가리의 66년 생애를 조명한다."

소개를 좀더 옮겨보면 "<로맹 가리>는 문학비평 기자이자 르노도 상 수상 작가인 도미니크 보나가, 저널리스트의 치밀함과 소설가의 감수성으로 쓴 평전이다. 프랑스 문학계를 뒤흔들었던 '아자르 사건'을 포함하여, 로맹 가리의 내면세계와 모든 작품과 창작의 배경,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린다. 화려한 성공을 꿈꾸는 한 가난한 소년의 열망이, 화려한 언변과 세련된 외모로 세계 외교 무대를 사로잡은 한 외교관의 카리스마가,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한 남자의 외로움이, 창조적 에너지를 마음껏 분출하고자 했던 한 작가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사실 내게 로맹 가리보다 더 친숙한 이름은 그의 가명이자 '또 다른 작가' 에밀 아자르이다. <자기 앞의 생>을 먼저 읽었기 때문이다(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의 여주인공도 내 기억에 로맹 가리의 광팬이었다). 

내가 책을 읽은 건 기억에 1990년 봄쯤이다. 나는 제대를 얼마 안 남겨두고 한 부대 관사의 당번병 방에서 뒹굴며 몇몇 소설들을 탐독했었는데, 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와 함께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이 바로 <자기 앞의 생>이었다. 주인공 모모와 로자(로쟈가 아니다) 아줌마가 엮어가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 이후에 다시 읽은 적이 없으므로 작품에 대해 정확히 평하기는 어렵지만 여하튼 에밀 아자르란 이름을 기억하게 해주었고 이후에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까지 관심이 이어지도록 했다. 비록 <유럽의 교육>(책세상, 2003)은 구입해두지 않은 것이 지금 생각으론 다소 의아하지만. 아무튼 이번에 나온 전기를 읽다 보면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란 한 작가(혹은 두 작가?)에 대해서 좀더 분명한 판단과 열정을 갖게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두번째 책은 역시나 평전으로 '과학지식인의 탄생'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폴 화이트의 <토머스 헉슬리>(사이언스북스, 2006)인데, 실상은 지난번에 다루어져야 할 책이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이월됐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헉슬리'란 성이다. 조금 견식이 있는 독자라면 이 '허슬리'가 여럿 된다는 것쯤은 상식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주로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잘 알려져 있는데, 헉슬리 가문을 일으켜세운 토머스 헉슬리(1825-1895)가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조부이다. 토마스의 또다른 손자인 생물학자 줄리안 헉슬리 경은 올더스의 형이고, 그들의 배다른 동생 앤드류 헉슬리는 노벨상 수상 과학자이다. 토머스 헉슬리는 '다윈의 불독'으로 불렸을 만큼 진화론의 강력한 옹호자로 유명한데, 이 '불독' 집안이 가히 지성의 명가인 것이다.

저자 화이트는 책에서 "19세기 과학계의 발전사와 '과학 지식인' 토머스 헉슬리의 삶을 다뤘다. 헉슬리가 신문, 잡지 등에 기고한 글과 부인 및 동료들과 나눈 서한 등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과학 및 과학자의 정체성을 확립시킨 토머스 헉슬리를 재조명한다. 좁게 정의되는 과학이 아닌, 다른 문화 영역들과 연결되는 실천방식으로서의 과학을 추구한 그의 삶을 세세하게 그려낸다... 책은 과학의 실천, 대중화, 변호 과정에서 헉슬리에 관련된 여러 자료를 통해,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한 사람의 '과학 지식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적한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 과학 및 과학자들의 사회.문화적 위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세밀하게 밝힌다."

해서 '과학 지식인의 탄생'이란 부제가 공으로 붙여진 것은 아닌 셈인데, 헉슬리 가문과 과학 지신의 자기정체성이 모두 토머스에게서 기원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니까 이 '대단한' 위인의 생애에 한번 눈길을 주어볼 만하다.  

 

 

 
 
 
 
세번째 책은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작가로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주제 사라마구(1922- )의 신작 <도플갱어>(해냄, 2006). 제목 그대로 자신과 똑같은 대상을 마주하게 되는 '도플갱어'의 모티브를 차용한 소설이라는데, <눈먼 자들의 도시>, <동굴>과 함께 주제 사라마구 '인간의 조건' 3부작으로 불린다고 한다(영역본의 제목은 ' The Double').
 


"인구 500만의 대도시에 거주하는 중학교 역사교사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 어느 날 그는 동료교사의 추천으로 비디오 한 편을 빌려보다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한다. 자신의 5년 전 모습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영화에 나오고 있었던 것. 막시모는 집요한 추적을 시작, 배우의 본명과 거주지를 알아낸다. 그리고 배우와 그 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배우를 발견하면서 그가 가졌던 자신에 대한 불안감은 이제 배우 부부에게까지 전염되고, 거울 앞에 선 것처럼 몸에 난 상처까지 똑같은 두 남자는 누가 원본이고 누가 복사본인지를 따지며 존재의 불안감을 떨치려 한다..."
 

 

 

 

 

나는 아직 사라마구의 책을 읽어본 바 없지만 노벨상 수상작인 <수도원의 비망록>(문학세계사, 1998)을 읽어본 지인의 호평은 기억하고 있다(드라마들도 번역되지 않았나?). 그럼에도 다소 낯설다는 느낌은 주지만, 이번에 출간된 '도플갱어'는 상당히 낯익은 테마의 작품이다. 도플갱어, 혹은 분신을 다룬 문학작품들이 적지는 않기 때문이다(만화와 영화에도 두루 걸쳐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에서 최수철의 <분신들>에 이르기까지.

사실 자신과 똑같은 또다른 존재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좀 섬뜩한 이야기를 함축하는 것이어서 공포영화에서도 즐겨다루어지는데, 가령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도플갱어> 같은 게 (나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대표적인 경우이다. 아무튼 이러한 배경하에 놓이는 작품이기에 사라마구의 <도플갱어> 읽기도 다소 수월할 수 있을 거라는 짐작을 해본다.

 

 

 

 

'도플갱어'란 테마가 정신분석을 자극하고 요청하는 테마인데, 네번째 책은 이와 무관하지 않은 연구서 박찬부 교수의 <라캉: 재현과 그 불만>(문학과지성사, 2006)이다. 모처럼 국내 필자의 저작이어서 반가운데(국내에서는 홍준기, 권택영 교수 등이 라캉 관련 저작을 갖고 있는 정도이다), 저자는 이미 10년전에 <현대정신분석비평>(민음사, 1996)을 상자한 바 있고(알라딘의 저자 소개에는 역서로 돼 있지만 저서이다), 프로이트 전집의 <쾌락원칙을 넘어서>(열린책들, 1997)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재현과 그 불만'이란 표제 자체는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의 영어 제목인 '문명과 그 불만'에서 따온 것인데, 라캉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저자의 길잡이가 되는 듯하다. 소개에 따르면, "이 표현은 프로이트의 '문명과 그 불만'에서 유래한 것. 프로이트가 인간 발달의 동인으로 문명화의 필연성을 강조하면서도 '죽음 본능'으로 대변되는 '그 불만'을 주요 논제로 다루었듯, 상징적 재현의 불가피성을 인간 주체의 '강요된 선택'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언제든지 불만 세력인 실재계에 의해 전복될 수 있다고 말한다. 라캉의 '상상질서'에서 시작되어 '실재계' 쪽으로 옮겨졌던 관심사를 그대로 되짚어 살핀다. 지나치게 어렵거나 해체적인 서술을 지양해, 라캉의 이론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였다."

'죽음본능' 혹은 '죽음충동'을 화두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라캉-지젝 라인의 사고방식과 겹치는 듯하지만 저자는 지젝과 같은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라캉 담론의 탈근대적 유산'이란 서론의 제목이 이미 이를 암시해준다. 지젝이 방어/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라캉의 '근대적' 유산이기에). 방점이 '정신분석'보다는 '비평'에 두어져 있던 <현대정신분석비평>에서 저자가 사숙한 스승으로 거명한 이는 미국의 저명한 정신분석비평가 노만 홀란드였다. 독자반응이론가로도 분류되는 홀란드의 대표작은 <문학적 반응의 역학(The Dynamics of Literary Response)>(1968)이다. 말하자면 '미국화된 라캉'의 한 사례를 <라캉>에서 읽어볼 수 있을지 모른다.  

 

 

 

 

끝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끌었던 독일의 사회학자 호르크하이머(1895-1973)의 대표적인 저작 중 하나인 <도구적 이성비판>(문예출판사, 2006)이 거의 40년만에 출간됐다. 아도르노와의 공저인 <계몽의 변증법>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리고 아도르노의 그늘에 가려 사실 덜 주목받는 편이긴 하지만,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멤버들을 그린 한 캐리커쳐가 말해주듯이(이 흔한 이미지가 잘 검색되지 않는군) 대학의 사회문제연구소장이었던 호르크하이머는 학파의 대부이자 좌장이었다.  

호르크하이머는 책에서 "부정의 철학을 지향하며, 자연과 인간을 도구화하고 파멸로 이끄는 도구적 이성의 전면화에 대해 고발한다. 오늘날 이성은 이성이라고 불리는 것들의 비이성적 태도를 고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성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고발은 이성의 전면적 해체가 아니라, 오직 이성의 자기 비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론적 염세주의자이면서 실천적 낙관주의자가 되자.' 개인을 무력하게 만드는 파시즘의 출현을 인식하는 비관주의와 보편적인 인간의 유대를 꿈꾸는 낙관주의를 가진 호르크하이머의 사상을 느낄 수 있다."

호르크하이머의 책이 이번에 처음 소개된 것은 아니다. 예전에 <철학의 사회적 기능>(전예원, 1983)이란 책이 출간된 바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절판된 책이지만 이 참에 새로 때깔을 입혀도 좋지 않을까 한다. 더불어, 황재우(시인 황지우) 등이 공역한 마틴 제이의 <변증법적 상상력: 프랑크프르트 학파의 역사와 이론, 1923-50 >(돌베개, 1981)도 다시 손을 봐서 재출간하는 건 어떨까?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근간으로 한 책은 지상사적 시각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탄생과 이론적 진화과정을 섬세하게 추적하고 있는 저작이다...

06. 09. 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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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9-29 23:11   좋아요 0 | URL
주제 사라마구의 책이 있었군요.좋아하죠..전.

로쟈 2006-09-29 23:55   좋아요 0 | URL
'무척' 좋아하시나 봅니다.^^

다크아이즈 2006-09-30 09:34   좋아요 0 | URL
뽑아 먹기 좋은 막대사탕(그 안에 든 쓴 약까지), 날로 먹으려니 송구스럽고 감사하네요. 한데, 로쟈님 목소리와 따온 목소리를 선명하게 구별할 수 있도록 색깔처리 해주심 안 될까요? 어떤 님의 요청에 색칠하는 것 별로 안 좋아한다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따온 글을 색깔처리하면 로쟈님 글이 되려 보호될 수 있으니 좋을 것 같은데... 날로 먹는 주제에 독자를 배려해달라고 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죠?

로쟈 2006-09-30 09:50   좋아요 0 | URL
따온 글들은 모두 인용부호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약간 불편하실 수 있지만 헷갈리실 정도는 아닐 겁니다. 칼라풀한 글자들이 제 경우엔 오히려 독해에 방해가 되는지라...

깽돌이 2006-09-30 12:35   좋아요 0 | URL
진중권씨가 비트겐슈타인의 '청갈색책' 옮겼던데 이에 대한 리뷰도 부탁^^

로쟈 2006-09-30 16:39   좋아요 0 | URL
청갈색책은 저도 책은 갖고 있는데, 책세상에서 나오는 전집들과 연관해서 나중에 다루려고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을 좀 들춰볼 여력이 현재는 없기도 해서요(^^;)...
 

교수신문에서 며칠전 기사를 읽었다. '나의 학문적 우상은 무엇이었나'란 기획기사인데, 내용이 흥미로워서 옮겨놓는다. 더불어, 잠시 '나의 학문적 우상'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최장순 기자의 기획의 변은 이렇다: "偶像. 보통, 신처럼 떠받들어지는 사람이나 대상을 우리는 우상이라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초년병 시절 우상을 만들어내고, 그 우상을 좇아 자기와 동일화하는 과정을 겪게 마련. 우리시대의 학자들은 어떤 우상화의 과정을 겪어왔을까. 그리고 학문적 우상은 어떻게 학자의 내면을 장악했다가 결국 쓸쓸히 떠나고 마는 것일까. 그 내밀한 풍경을 살펴보았다." 당신들의 우상은 안녕하신가?..

교수신문(06. 09. 23) 기획취재_나의 학문적 偶像은 무엇이었나

“나는 그 분의 지대한 영향을 입은 사람이다. 1980년대 초반엔 내 논문을 지도해주시기도 해,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박지향 서울대 교수(영국사)가 에릭 홉스봄을 떠올리며 남긴 말이다. 박 교수의 회상은 이어진다. “그 분의 영향을 받아 노동사 공부도 했다. 나도 언젠가 이런 글을 써야지 하는 걸 느끼게 한 유일한 분이었다. 나에게 우상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홉스봄에 대한 박 교수의 마음이 맹목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홉스봄에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은 세계 정치지형의 변화 속에서 홉스봄의 문제점을 조금씩 발견했기 때문이다.

박 교수가 홉스봄과 거리를 두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 2003년 발간된 ‘Interesting Times: A Twentieth-Century Life’였다. 이 책에서 홉스봄은 젊은 시절의 행동에 대한 자기변명을 일삼으며 총체적 시각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다. 박 교수는 “가령 스탈린이 행한 악행을 두둔하려는 홉스봄의 태도는 못참겠다”며 “80세 넘게 살았으면 자기 삶과 20세기를 연관지어 당시 현장에 좀 더 거리를 두고 써도 될 것을… 그런 걸 발견하지 못해 많이 실망했다”고 전했다(*박정희를 두둔하려는 태도와는 어떻게 연관되는지?). 홉스봄에 대한 진한 애정에서 나오는 진심어린 충고다. 조승래 청주대 교수는 “동구권이 몰락하는 등 세계의 정치적 판도가 변화하자 영국 좌파 연구자들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가 많이 사라져갔다”며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 역시 토마스 쿤에 대한 소회를 풀어놓았다. 쿤의 두 제자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홍 교수는 자연스럽게 토마스 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쿤의 방법론은 “텍스트 이해에는 도움이 되지만 과학의 내용을 넘어 사회 문화적인 측면을 보는 데 한계가 있”어 현재 홍 교수는 “쿤의 방법론을 버리고 있는 중”이다.

특정 지식인에 대한 학문적 우상화는 학자라면 누구나 거치는 관문이다. 이와 관련해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박사논문을 쓰는 동안에는 학문적 우상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학위를 받고 나서 지식인으로 바로 서야 할 때는 곤란하다”라고 말했다(*학위논문을 쓰면 자립/분가해야 하는 것인가). 우상을 냉철하게 비판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실행하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다. 특정 대가들을 뛰어넘는 걸출한 학자가 드문 게 사실. 누군가를 넘어서려면 ‘부단한 노력’ 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고 연구자들은 입을 모은다.

누군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은 다른 대상들을 향해 미끄러지는 작업을 동반한다. 임지현 한양대 교수(서양사)는 90년대 폴란드 문제와 시름하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스탈린을 좇다가 문제가 생기면 레닌으로 돌아가고, 그게 또 문제면 볼셰비키로, 그리고 다시 청년 맑스로 돌아가면 된다는 게 하나의 흐름”이었다고 전했다. “우상이란 결국 신화화 작업을 동반하므로, 다채로운 프리즘을 갖고 대상에 접근해야 한다”는 말도 이어졌다. 이와 관련해 장석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은 “지적 우상에 대한 모방은 필수적인 과정인데, 그것이 자기 자유를 신장하기 위한 것이 아닌 권위에 기댄 기계적 모방이 되면 교조주의나 근본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설명했다(*너무 당연한 말씀들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지적 탐구 대상을 우상화하는 일. 그 내부에 어떤 심적 기제가 작동하는 것일까. 이창재 프로이드정신분석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정신을 안정시키며 동시에 확장시켜주는 이상적 대상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소장은 “특히 연구를 하려고 하는 사람의 경우엔 연구 욕구를 유지시켜주기에 일정한 지식활동의 모델이 긍정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정 인물 및 그 연구작업과의 동일시를 통해 연구활동을 지속할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 그는 특정 인물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과도하게 진행되더라도, 처음에는 괜찮다고 한다. 하지만, “동일시가 한 사람에게만 고정되다 보면 발전이 정체”되기에 “주체적으로 새로운 대상을 선택해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더 나아가 이 소장은 학자 일반의 정신을 분석하면서 “학계에 남는 사람들의 경우 학문의 목적이 자기 고양이나, 개발, 개성 실현에 있는 게 아니라, 대상 결핍 때문에 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자기에게 평생 보호자가 될 사람이 필요하기에 ‘정신의 아버지상’이 있는 학계에 남게 된다는 설명인데 흥미로운 주장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손종업 선문대 교수(국문학)는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자신을 탕진하고 싶은데 그 대상의 거짓 내지는 오류를 발견했음에도, 그에 대한 열정을 철회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전했다.

가령, ‘황우석’을 믿었던 사람들은 ‘황우석’의 일정한 문제점이 발견되었기에, 그에 대한 열정을 접어야 하는데, 오히려 합리화하기 위해 사태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이게 학자들의 케이스인가?). 그런데 손 교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요즘 젊은 학자들이 점점 더 현실주의화해가고 있다”며 “더이상 그럴 듯한 것도 없고 모든 존재가 점점 더 왜소해지고 냉소적으로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오히려 적절한 우상을 갖는 일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닌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진정한 우상이 없는 시대”라는 것(*내가 동의하는 바이다. 학문에서 자신의 우상을 절대화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지만, 우상을 갖지 못하는 건 불행한 일이다). 그리고 몇몇 학자들은 학문적 우상에 관한 취재를 한다고 하자 “특정 학자나 학문에 대한 단순한 개인적 열정 보다 패거리 안에서 확대, 재생산, 조직화되는 열정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최장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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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페이퍼'에 이런 거창한 제목이 달릴 리는 만무하다. 조간신문에 게재될 김우창 교수의 칼럼을 미리 읽어보려고 했을 뿐이다. 요 며칠 자주 다루었던 시사적인 주제여서 따로 옮겨놓기도 하면서. 주로 하버마스의 '보편적 화용론'에 기대어 인문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재차 강조하는 칼럼으로 읽힌다. 내가 안 갖고 있는 책을 포함하여 몇 권의 책을 나열해본다. 내키면 <하이데거, 하버마스, 그리고 이동전화>(이제이북스, 2003) 정도는 바로 읽고 생각할 거리를 마련해도 좋을 듯싶다. "여보세요? 저, 인문학도인데요. 예? 안 들린다고요?"

 

 

 

 

경향신문(06. 09. 28) 공적공간의 윤리성과 인문교육

하버마스의 글에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호 이해에 이를 수 있는가, 또 그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들이 선행돼야 하는가를 논하는 것이 있다. (“보편적 실천 어용론(語用論)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대화의 기본 조건 가운데 그가 강조하는 것은 주로 네 가지, 즉 해독가능성, 진실, 진실성, 정합성이다(*'어용론'은 pragmatics의 번역이겠다. 일반적으론 '화용론'이라고 옮긴다).

첫번째 조건으로 거론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써야 한다는 조건은 자명한 것이라고 할 것이나, 이것이 문법이나, 논리나, 상황의 적절성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자명한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두번째의 조건은, 말이, 일단은 진실 또는 진리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실을 담은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세번째 조건은, 말이 진지한 또는 성실한 태도에서 나온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네번째는, 대화자들이 보편적인 타당성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써 자신들의 말의 옳고 그름을 헤아려 볼 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의미는 그의 전체적인 관심의 틀 안에서만 바르게 평가될 수 있다. 하버마스는 사회문제에 대한 이성적 해결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믿고 있는 철학자다. 다만 그에게, 이성은 사람이 사는 소란하고 번거로운 세계를 넘어 초월적 공간이나 역사의 큰 움직임 안에 존재하는 높은 원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접하고 이야기하고 논의하고 타협하고 하는 사회공간 안에서 태어나는 원리이다. 그러면서도 이 원리는 잡다한 경험적 현상의 일부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형식적 정형성을 갖는다. 그러니까 이성적 원리는 경험적 현상 속에 존재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초연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대화의 네 가지 조건은, 현실 상황에서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대화에도, 문법이나 의미를 떠나서, 그 아래에 일관된 어떤 바탕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위의 조건들에서, 두드러진 것은 대화의 진행에는 말의 내용에 관계없이 어떤 실제적인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관찰이다. 그것은 세번째의 진실성 또는 성실성이라는 조건에 가장 분명하게 나와 있다. 그것은 대화에 임함에 있어서 대화자는 화제의 대상 또는 자신이나 대화의 상대자에 대하여 일정한 도덕적·윤리적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조건에도 그에 비슷한 윤리적 태도가 들어 있다. 사람이 자기 주장을 내놓는 것은, 이 주장과 함께, 진리를 존중하며, 그 기준에 의한 여러 주장들의 평가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내놓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같은 글의 뒤편에서 다시 설명하듯이, 전제의 하나는 누구의 것이든지 논증된 주장에는 승복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말도 틀린 것으로 판명되면, 그 주장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증명되면, 그것이 실천적으로 함의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약속이다. 건설적 대화가 성립하려면, 대화자들은 그들의 상호연계성을 받아들이고 그 관계가 합리적 또는 이성적 바탕 위에 서야 한다는 것에 승복해야 한다. 즉 대화에는, 간단히 말하여, 실제적 전제로서, 공동체적 상호인정 그리고 공동체의 기반으로서의 이성적 원칙의 수락-이것이 선행돼야 한다.

대화의 선행조건에 대한 하버마스의 말은, 그 이론 전개의 까다로움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단순하고 큰 현실적 의미가 없는 말로 들린다. 문제는 대화의 전제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떻게 하여 그러한 조건을 성립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회적 균열이 심한 사회는 대체로 그러하다고 하겠지만, 우리 사회의 문제는 그러한 공론의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데에 있다. 공동체적 상호존중이나 진리에의 순응의 태도를 전제하는 공론의 공간이 사라지고 공동의 진리가 설 자리가 없는 것이 오늘의 우리 사회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 대신 공적인 광장에서 발언한다는 것은 다른 가능성은 고려할 것도 없이 자기주장을 밀어붙이는 것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태도이다. 문학논의의 지침으로서 레닌이 내세운 것에 당파성(黨派性)이라는 말이 있거니와, 요즘의 발언과 논쟁들을 보면,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 없이, 이 원칙을 지상으로 받든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판국에 하버마스가 말하는 진리성과 윤리성의 조건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순진한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사람이 가지게 되는 생각들의 물질적·사회적 기초를 중시하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나온 철학자이다. 대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현실적 요인들을 모르고 그가 대화의 조건에 대하여 논의를 펼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적 상황의 어려움에 대한 의식이 그로 하여금 바로 경험의 혼란 속에서 생겨나는 이성을 중시하게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사회가 진리 공동체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도외시하는 입장들의 역사적 파국을 직시한 까닭에 위에 말한 원칙들을 천명하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는 그러한 공동체의 원칙을 살려 나가는 것이 좋은 사회를 위한 중요한 실천적 작업의 일부로 생각된 것이다.



어떻게 하여 진리와 공동체적 상호존중에 입각한 대화적 상황이 조성될 수 있는가? 여기에 간단한 답이 있을 수가 없다. 삶의 교사는 현실이다. 우리는 이웃들이 행하는 바를 모범으로 하여 우리 스스로의 행동 방안을 만들어 간다. 이렇게 보면, 대화적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 사회는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도리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악순환의 고리 속에 있으면서도 새로운 길들이 트이는 것이 또한 인간사이다.

최근에 여러 곳에서 인문과학의 위기에 대한 논의가 일고 있는 것을 본다. 인문과학은, 인식과 윤리에 있어서의 보편적 원리를 배우고 그것을 몸의 습관으로 지니게 하는 데에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는 학문이다. 물론 모든 학문적 수련에는 이러한 원리에 대한 수련이 따른다. 그러나 그중에도 끊임없는 상상적 연습을 통하여 실천적 현실에서 비판적 그리고 자기비판적 이성을 끌어내려는 훈련이 인문과학의 방법론적 기본을 이룬다. 이 점에서 인문과학은 다음 세대의 공동체적 대화자를 기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경직된 교리 학습이 인문과학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인문과학 옹호론이 많이 나와 있는 이 시점에서 이런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보탬이 되지는 아니할는지 모른다. 필요한 것은 실제적 조처에 대한 궁리이다. 한 가지만 말한다면, 모든 인문과학의 제도적 바탕은 인문과학을 포함한 기초 과학의 교육을 대학 교육의 핵심이 되게 하는 데 있다. 오늘의 산업 사회의 필요에 맞는 기능 교육을 무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대학원이나 직장의 직업 훈련에 미루고 대학은 기초과학의 교육에 주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뒤따를 기능 교육에도 좋은 준비가 되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 맞추는 학제, 재정, 연구 조직의 적응도 물론 별도로 생각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사회 구조 자체가 진리 공동체로서의 이념을 수용할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다. 이 공동체는 경제 성장 또는 그 과실의 분배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열매가 아니다. 하버마스의 대화적 이성철학은 이 사실에 대한 역사적 반성의 일부이다.(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06. 0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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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8 1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0-01 23:21   좋아요 0 | URL
**님/ 몇년전에 방한했었지요. 저는 '얼굴'보다 '목소리'가 신기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