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의 마지막날이지만 집안일도 밀리고 강의준비도 밀려 있는지라 마음이 분주하던 차에 체젠 보도로 널리 알려진 러시아 여기자의 피살 속보를 접하게 되었다(기사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그녀는 청부살해 당했다). 이 소식을 전하고 있는 국내 일간지 두 곳의 기사와 함께 여기저기서 검색한 이미지 자료들을 옮겨놓는다. 모처럼 다루는 러시아 관련 기사를 음울한 내용으로 채우게 되어 유감스럽다. 분명한 건 이 또한 러시아의 얼굴이라는 사실이다. 대낮에도 활개치는 이런 류의 청부살인이 아직도 낯설지 않은 나라.  

 

한겨레(06. 10. 09) 누가 러시아의 양심을 쏘았나

 

“위험은 내 일의 일상적 부분이 됐다. 러시아 언론인으로서의 일, 내 임무이기 때문에 멈출 수 없다.” 체첸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며 러시아 정부를 줄기차게 비판한 중견 여기자가 청부살해가 분명해 보이는 총격으로 숨져 파장이 일고 있다. 체첸전쟁 현장을 누벼온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48)에게 총을 겨눈 세력이 누구인지를 두고 러시아와 친러시아적인 체첸 정부에 의혹의 눈길도 쏠린다.(*아래는 피살 소식과 함께 생전의 폴리트코프스카야를 보여주고 있는 러시아의 한 TV방송 모습.) 

 



7일 오후 4시30분(현지시각)께 모스크바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머리에 총을 맞아 숨진 채 발견된 <노바야가제타>의 폴리트코프스카야는 독보적인 언론인이다. 그는 1년 전 영국 <비비시>(BBC)와의 인터뷰에서 앞날을 예견한듯 일상화된 위협을 얘기했다. 그러나 폴리트코프스카야는 “의사가 환자한테 건강을 주고 가수가 노래하는 것처럼, 언론인의 임무는 본대로 현실을 쓰는 것”이라며 굴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옛 소련 관영지 <이즈베스티야>에서 언론계에 입문한 폴리트코프스카야는 1999년부터는 대표적 비판언론인 <노바야가제타>를 통해 2차 체첸전쟁 참상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다른 매체들이 눈귀를 닫을 때 폴리트코프스카야는 폐허가 된 체첸 수도 그로즈니 등지의 현장취재로 참상을 폭로했다. 러시아군과 체첸 정부군의 고문과 집단처형, 납치, 돈을 받고 주검을 가족한테 넘기는 행태 등이 밖으로 전해졌다. <더러운 전쟁> 등 두 권의 책으로도 수십만명이 희생된 전쟁 실상을 알렸다. <푸틴의 러시아: 실패한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삶>에서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비판했다(*이미지는 영역본들).

 



영국 <옵저버>는 폴리트코프스카야가 러시아군 잔학행위만 부각시켰다는 주장도 있지만, 체첸 반군의 잔혹한 전술을 비판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이런 활동으로 국내외 여러 언론상을 받은 폴리트코프스카야는 2002년 10월 체첸 반군의 모스크바 극장 인질사태(*위의 사진) 때 중재를 위해 극장에 들어가기도 했다.

숨지던 날에도 폴리트코프스카야는 체첸 정부의 고문을 폭로하는 기사를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지난 4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폴리트코프스카야는 고문 증거를 확보했다며, 람잔 카디로프 체첸 총리한테 직접 고문당했다는 사람의 증언도 있다고 말했다. 폴리트코프스카야는 폭로기사에 대한 경찰 간부의 보복 위협 때문에 2001년 오스트리아로 피신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비행기에서 마신 차 때문에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그와 동료들은 암살 시도로 추정했다. 그는 또 러시아와 체첸 정부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자신을 제거하겠다는 위협을 일삼았다고 말해 와, 이번 사건이 러시아와 체첸 정부 중 어느 쪽과 관련됐는지를 두고 추측이 무성하다. 사건 발생일이 푸틴 대통령 생일이고, 이틀 전이 카디로프 체첸 총리의 생일이라는 점에서 그의 희생이 두 지도자의 ‘생일 선물’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2000년 이후 러시아 언론인 12명이 청부살해로 의심되는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보도했다. 지난 6월 <노바야가제타>의 지분 5%를 인수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이번 사건이 “야만적 범죄”라고 비난했다(*<노바야가제타>는, 당연한 일이지만, 이번 피살사건과 관련하여 가장 많은 분량의 기사를 게재하고 있다).

 

Политковская была честным журналистом

범인이 머리에 권총을 난사한 점이나 희생자 곁에 총을 버리고 간 것은 청부살해의 전형적 흔적이다. 체첸 반러시아 세력과의 화해를 주창하다 1998년 피살된 갈리나 스트로모이바 두마(하원) 의원 피살사건과 이번 사건은 닮았다. 당국은 방범카메라에 잡힌 모자를 눌러쓴 범인의 모습을 단서로 추적에 들어갔다고 밝혔고, 유리 차이카 검찰총장은 수사를 몸소 지휘하겠고 밝혔다. 하지만 정치적 동기가 담긴 다른 청부살해처럼 이번에도 범행세력의 꼬리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범행세력을 잡는다면 러시아가 아니다).(이본영 기자)

 

 

국민일보(06 10. 09) ‘체첸 참상’ 보도 러시아 여기자 피살

 

러시아의 잔혹한 체첸 지배 등을 고발해온 유명 러시아 여기자가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 외신들은 주로 러시아 일간지 ‘노바야 가제타’에서 활동해온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48) 기자가 7일 그녀가 거주하던 모스크바 중심부 아파트 건물 엘리베이터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인테르팍스 통신은 경찰관들의 말을 인용,엘리베이터 안에서 권총 한 자루와 탄환 4발이 남겨져 있었다면서 폴리트코프스카야 기자의 온몸에서도 총상이 발견됐다고 전했다. 경찰 관계자는 “기사에 불만을 품은 전직 군인이나 우익단체 회원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폴리트코프스카야 기자는 체첸 내 인권 상황을 집중 보도해 러시아 당국에 정면으로 맞섰으며 이후 여러 차례 보도를 통해 정부와의 긴장 관계를 계속해왔다. 이 때문에 2001년 10월에는 살해 위협까지 당했으며, 오스트리아 빈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하기도 했다. 그녀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체첸사태 대응과 관련, 정부군의 민간인 인권유린 상황을 비판한 책도 펴낸 적이 있다.

2004년 러시아 북오세티아 공화국의 작은 도시 베슬란에서 벌어진 체첸인에 의한 학교 인질사건 때는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남부행 열차를 탔다 차를 마신 뒤 심각한 식중독 증상을 보여 취재를 하지 못하기도 했다. 당시 동료 언론인들은 이 사건이 폴리트코프스카야의 생명을 노린 암살사건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폴리트코프스카야는 2002년 체첸 반군이 모스크바 극장을 완전히 장악해 인질극을 벌일 당시 체첸 무장세력의 특별 요청을 받아 정부와 중재활동에 나서기도 했으며 2001년 러시아 언론상인 아르촘 보로비크상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1980년 옛 소련 치하의 모스크바 국립대학을 졸업한 뒤 공산당 기관지 이즈베스티야에 입사, 26년째 언론인으로 활동해 왔다.(신창호 기자)

 

 

06. 10. 08-09.

 

 

 

 

 

 

 

 

 

P.S. 시간이 나면 그녀가 쓴 기사와 피살과 관련된 기사들을 찾아 읽어봐야겠다(국내에는 체첸 관련 단행본이 단 한권도 출간돼 있지 않다. 한 장이 할애돼 있는 <전쟁의 풍경>(실천문학사, 2004)을 제외하면).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 그녀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러시아 인권운동가의 죽음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7-18 22:09 
    러시아의 여성 인권운동가가 또 피살됐다. 2006년 피살된 여기자 폴리트코프스카야의 친구이기도 하다고. 러시아 인권과 법치주의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사건이어서 음울하고도 씁쓸한 소식이다. 어제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9. 07. 17) 체첸 비판 러시아 인권운동가 또 피살 체첸의 인권 실태를 비판해온 러시아의 여성 인권운동가가 또다시 피살됐다. 영국 BBC방송 등은 15일 체첸 인권단체 ‘메모리얼
 
 
 

연휴 기간이어서인지 알라딘에 새로나온 책들이 업데이트되고 있지 않다. 아니, 새로나온 책들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출판사도 대개는 휴무일 테니까. 그런 틈을 타서 예술분야의 책들로만 '최근에 나온 책들'을 꼽아보기로 한다. 최근에 나왔다고는 하지만 더러는 몇 달 전에 나온 책도 포함돼 있는 리스트이다. 사진 작가 로버트 카파의 경우가 그러한데, 카파와 건축가 리베스킨드를 꼽은 데는 이런저런 자료들을 찾아보려는 개인적인 '계산'이 반영돼 있다. 너무도 친숙한 우리의 모차르트와 반 고흐에서부터 '낙천주의 예술가' 리베스킨드에 이르는 여정이 연휴를 마무리하면서(갑자기 늘어난 할일들!) 부려보는 '마지막 사치'쯤 되겠다(일상의 시간들과 대립된다는 의미에서 사실 '휴일의 시간'들은 '예술의 시간'들이지 않은가?).   

 

 

 

 

제일 먼저,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프로이트 전문 연구자 피터 게이"가 <모차르트>(푸른숲, 2006). 역사학자답게 "기존의 모차르트 전기에 나타난 신화적이고 감상적인 색채를 걷어냈다. 천재 예술가 삶의 주요 국면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조명하고 있다. 저자는 모차르트의 천재성과 그의 음악이 탄생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보여주며 모차르트에 대한 낭만적인 추론을 비판한다. 연대기 순이 아니라 '천재', '아들', '종', '자유 음악가', '거지', '거장' 등 테마별로 각 장을 구성하여 화려한 수식이나 부풀려진 신화 없이 위대한 음악가의 진면모를 확인해볼 수 있다."

그러한 소개의 글에서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책은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모차르트>(문학동네, 1999)이다. 엘리아스의 유작인 이 책은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이란 부제를 갖고 있고, "철저한 사회 문화사적 시각으로 모차르트를 해석한다. 모차르트가 활동하던 당시의 사회 상황에 초점을 맞춰 모차르트의 천재성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한 것. 사회의 여러 양태가 구조적 제도적 맥락에서 개인의 천재성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내용을 풍부한 일화와 편지들을 근거로 깊이 있게 논하고 있다."

해서, 나는 이 두 사람의 책을 나란히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저자인 피터 게이에 대해서는 그의 <부르주아전>(서해문집, 2005)을 소개하면서 다룬 바 있다. 그리고, 모차르트 관련서로 올해 나온 책으로는 파울 바르츠의 <소설 모차르트>(자음과모음, 2006)가 눈길을 끈다.  

 

 

 

 

두번째 책은 나탈리 에니크의 <반 고흐 효과>(아트북스, 2006). 저자 소개에 따르면 나탈리 에니크는 "사회과학자로서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의 책임 연구원이다. 주요 저작으로는 <예술가의 화법>, <여성의 지위 - 서구 소설에서 여성의 정체성>, <예술 사회학>,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사회학>, <반 고흐 효과>, <반 고흐의 영광>, <찬미의 인류학에 대해> 등이 있다"고 돼 있는데, <여성의 지위>는 <여성의 상태>(동문선, 1999)로 번역돼 있다. 해서 나는 문학연구자로 알고 있었는데, 전공은 '예술사회학'이라고 해야겠다. 아래 사진을 보면 전공이 무색하지 않은 미모의 학자이다.

예술사회학자답게 저저의 관심은 '반 고흐' 자신이 아니라 '반 고흐 효과'에 두어진다(원제는 '반 고흐의 영광'이다). 우리가 아는 '반 고흐'가 어떻게 탄생했는가 하는 것. 곧, 저자는 "고흐를 실마리 삼아 치밀하게 예술가 숭배의 매커니즘을 밝힌다. 예술은 현대의 종교가 되었다는 저자의 분석은 치밀하면서도 복잡한 논리의 직조를 통해 하나의 완성된 이론으로 거듭난다. 예술이라는 종교의 첫 번째 성인으로 저자는 고흐를 뽑고, 그가 성인으로 추대된 이후 고흐 이전과 이후의 예술가들은 그 틀 속에서 자리를 잡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이 '예술사회학'은 '종교사회학'이기도 하며(에니크는 종교학자 엘리아데의 구절을 에피그라프로 삼고 있다) 저자는 그 '틀'을 문제삼겠다는 이야기겠다.

뒷표지에 붙어 있는 한 추천사에 따르면, "에니히는 반 고흐를 진화하는 문화현상이자 오늘날의 미술 실천을 강제하는 신화로서 독해한다... <반 고흐 효과>는 우리가 영웅을 만드는 방법뿐 아니라 그들을 필요로 하는 이유에 대해 상상력에 넘치면서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고로 고흐를 좋아하거나 숭배하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반 고흐 효과>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또 다른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의 화염 속에 사라진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을 소재로 쓴 팩션", <반 고흐 컨스피러시>(마로니에북스, 2006)이다. "사랑, 음모, 배반이 얽힌 긴박한 추격전, 그리고 서서히 밝혀지는 미술품 약탈의 진상, 유럽의 여러 나라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하니까 '다빈치의 독자들'도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가난에 쪼들렸던 고흐는 모델을 구할 돈이 없어서 자화상을 많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와 비교하면 상상력이 무기가 되는 작가들은 형편이 좀 낫지 않나 싶다(거꾸로 자기 얘기만 쓰는 작가들은 아무래도 '빈티'가 나는 걸 감수해야겠지만).  

 

 

 

 

세번째 책은 에곤 쉴레/실레(1890-1918)의 <세상의 하이페리온>(미디어아르떼, 2006). 미술비평가 아투어 뢰슬러가 에곤 쉴레와 나눈 대담집 <에곤 쉴레를 회상하며>(미디어아르떼)와 나란히 출간됐다. 책을 낸 출판사 '미디어아르떼'의 데뷔작들이기도 한 이 책은 언젠가 한 인터뷰를 읽어보니까 '볼 만한 도판'에 대한 펴낸이의 욕심이 최초로 얻어낸 성과물이기도 하기에 그 결과가 주목된다(나는 아직 책의 실물을 보지 못했다). 쉴레와 관련하여 내가 이제까지 내가 갖고 있는 책은 프랭크 휘트포드의 <에곤 실레>(시공사, 1999) 정도였다.

<세상의 하이페리온>은 "요절한 천재 미술가 에곤 쉴레와 가족간의 편지, 그리고 감옥에서 쓴 편지들을 엮"은 책이라고 한다. "가족과 떨어져 살았기에 대화가 단절되었던 쉴레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예술관, 그리고 일상에 대한 열정을 가족들에게 표현하고 또 설득했다"고 하고, "편지자료는 쉴레가 태어나고 성장했던 툴른에서 수집한 것들"이라고. 이런 식의 편지들이다: "내 그림 중에 어떤 것들은 그런 고통과 슬픔 속에서 스스로 생겨난 것입니다. 다른 그림에는 나의 행복한 상태를 같이 그려놓았어요. 왜냐하면 예술가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식에 대한 경고를 하고, 그것들을 일깨우고, 또 풍부하게 해주는 사람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것이 언젠가는 알려지게 될까요? 나는 회의적입니다."

책은 쉴레의 그림 애호가들에겐 더할 나위없는 필독서이겠고, 더불어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도 같이 읽어볼 만하다. 거기에 추가하고 싶은 독자층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을 즐겨보는 관객들인데, 기억력이 아주 나쁘지만 않다면 <나쁜 남자>에서 여주인공 서원이 서점에서 훔치려던 (그러다 결국 자신의 신세를 망치게 되는) 화집이 에곤 쉴레의 것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감독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라고.  

 

 

 

 

네번째 책은 세계적인 보도사진 작가 로버트 카파(1913-1954)의 이야기 <로버트 카파>(강, 2006)이다.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 알렉스 커쇼가 재구성했다는데, "피가 튀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주요한 역사의 현장에서 불후의 이미지들을 건져 올려 현대사의 생생한 기록으로 남긴 로버트 카파의 열정적이고 모험적이며 자유로운 삶을 흥미롭게 펼쳐 보인다"고 한다. 원제는 <피와 샴페인>(2002).



저자 커쇼는 "부다페스트의 양복장이집 유대인 청년이 1931년 정치 난민으로 헝가리를 떠나고, 베를린을 거쳐 파리, 런던, 마드리드, 뉴욕, 모스크바, 인도차이나 등 전세계를 누비며 '카파이즘'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기까지, 그리고 전장에서 사랑하는 연인과 자신의 목숨을 잃기까지 명료하고 생생한 언어로 복잡한 현대사와 극적인 여러 순간들을 영화를 보여주듯 박진감 있게 재구성한다"고 하니까 카파의 사진들에 매혹되는 바 없지 않다면 펼쳐들어볼 만한 책이다.

아무래도 그의 사진의 주무대는 전장이었고, '카파이즘(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철한 기자정신)'이란 용어 자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직업/직분은 '전쟁사진작가'이다. "보도사진계에 신화와도 같은 존재로 남은 전쟁사진작가 로버트 카파의 제2차 세계대전 종군기"가 우리말로 번역된 것이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필맥, 2006)이다. 이 또한 <로버트 카파>와 나란히 꽂아둘 책이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세계적인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드의 건축 이야기 <낙천주의 예술가>(마음산책, 2006)이다. "911 테러로 사라진 세계무역센터 현장을 새롭게 재창조하게 될 건축가 리벤스킨트의 열정과 모험담"이라는 좀 장황한 부제 자체가 책의 내용을 잘 요약해주고 있는 듯싶다.

2년에 한번씩 전세비나 걱정하는 처지에 건축에 대한 유난한 관심을 가졌을 리 없는 나는 이전에 리베스킨드란 이름을 들어본 바 없다. 한데, 그는 대단히 유명하다고 한다. "그가 설계한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은 현재까지 독일에서 관람객이 가장 많은 박물관으로 꼽힌다"고 할 만큼. 게다가 국내에선 삼성동 현대산업개발 본사의 외관을 설계했다고 하니까 우리와 아주 무관하지도 않다.

Daniel Libeskind's original plan

소개에 따르면, "리베스킨트가 생각하는 훌륭한 건축이란 인생의 굽이굽이 등장하는 갖가지 색을 모두 담아내어 영혼에 내재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축이다. 그는 돌, 쇠, 콘크리트, 나무, 유리처럼 말 못하는 물질을 가지고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고, 역사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는 빛, 소리, 영혼, 장소 감각, 역사에 대한 경외 등에서 영감을 얻는다 말한다. 건물이 영적인 울림을 지니기 위해서는 실제 존재하는 대상과 보이지 않는 힘이 공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태도는 자신의 대표작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View from south of the Statue of Liberty

아무려나 쌍둥이 무역센터빌딩을 대신하여 들어설 그의 건축물들이 '영적인 울림'을 지닌 건물들, "실제 존재하는 대상과 보이지 않는 힘", 곧 산자와 죽은자, 그리고 살아남은자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고통을 전달해줄 수 있는 그런 상징물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구 종말의 시대에도 우리를 낙천적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06. 10. 08-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억에 지난 9월의 마지막날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 <해변의 여인>을 비디오로 빌려다 봤다. 영화가 개봉되기 전에는 지난 여름, '지나간 모든 여름'을 추억하며 개봉관에서 보고자 했었지만 '낭만'은 언제나 현실에 패배하기 마련이다. 내게 남은 낭만은 그나마 갓 들어온 신작 프로를 운좋게도 바로 빌려다 보는 일 정도이다. 그리고 며칠전에 김기덕의 <시간>에 관한 영화평 몇 개를 읽다가(<시간>은 <해변의 여인>에 이어서 빌려다 보았다) <시간>과 <해변의 여인>에 관한 김소영 교수의 영화평을 읽고 스크랩해놓았다. 그 영화평의 일부를 옮겨놓으면서 제목이 '해변의 여인'이 아닌 '해변의 페트라르카'가 된 것은 그 사이에 지젝의 '환상의 돌림병' 이야기가 끼여들어서이다. 일단은 '씨네21'의 '전영객잔'에 게재된 영화평의 후반부를 읽어본다(언제나처럼 강조는 나의 것이다).  

씨네21(06. 09. 13) 영화적 재미의 새로운 경지, <해변의 여인>

(...) '이미지와의 싸움’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중래가 주저리주저리 도형까지 그리며 설명하는 사악한 이미지와의 싸움은 사실 슬라보예 지젝의 <환상의 돌림병>이라는 책의 첫 문장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사랑하는 대상이 다른 자와 섹스를 했다고 하자, 뭐 괜찮아 하고 넘겼다가 이후 섹스 체위 등 온갖 것에 대한 환상으로 시달리는 상태에 대한 묘사가 <환상의 돌림병>의 서두다. 중래가 털어놓는 아내와 자신의 친구와의 관계 묘사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남긴 영향에 대한 설명은 바로 이 환상의 돌림병을 구성하는 이미지다.

 

 

 

중래는 제법 심각하게 이런 이미지와의 싸움을 털어놓고, 또 도형까지 그려 이미지의 구성을 그래픽하게 설명한다. 이와 엇비슷하게 그러나 문숙의 시각에서 제기되는 것은 자신이 방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중래와 선희가 어떻게 방을 나갔을까? 자신을 넘어 나갔을까? 하는 질문들이다. 이 질문에 중래는 위의 이미지와의 싸움이라는 강박으로 대응한다. 중래가 자신의 트라우마처럼 제시하는 위의 환상의 돌림병은 그러나 문숙에 의해 결국은 의미 폄하를 당한다. 이 영화의 전반적 의미 훼손의 태도다. 이처럼 의미를 구성했다가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 외에 영화가 기호를 사용하는 방식은 일단 사용했다가도 슬그머니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영화적 기호 중 일단 한번 사용되기만 하면 그것이 결정적 의미화를 가져오게 되는 예 중 하나가 그 유명한 기침이다. 특히 여주인공의 기침은 불치병은 물론 거짓말, 불륜 등의 재앙을 예고한다. 문숙은 황사가 오고 있는 봄날, 기침을 하면서 등장하는데, 영화의 서두에서 문숙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중래와 창욱도 여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문숙은 그 무관심, 그 무언급 중에서도 몇번 더 기침을 하고 , ‘이틀 뒤’ 나타났을 때 기침은 멈추어져 있다.

 

 

 

또, 중래는 ‘이틀 뒤’ 해변에서 나무가 늘어선 사구에 가 나무에 절을 하면서 콧물이 나올 만큼 엉엉 우는데, 이런 의외의 의례를 뒷받침할 만한 설명은 거기 가면 그렇게 절을 하게 된다는 것 외에는 별로 제공되지 않는다. 위의 기침이 통상적 기호라고 한다면 나무에 절하는 행위는 제의적 기호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이 둘 모두 은유나 환유로 가는 대신 표면 위에 정지한다.

이미지와의 싸움도 트라우마로 규정되는 대신 조롱거리가 된다. 이러한 태도가 <해변의 여인>을 우리로 하여금 특별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도록 한다. 한국영화가 줄 수 있는 재미의 새로운 경지며,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나 <극장전>보다 이 재미는 훨씬 더 명료해졌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신랄한 조소마저 조롱하는 되돌이과정은 영화감독의 환상의 돌림병처럼 보인다.(김소영)

이 영화평을 읽다가 나의 관심은 <해변의 여인>에서 <환상의 돌림병>으로 옮겨갔다(<해변의 여인>은 홍상수의 최근작들, 곧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극장전>을 포함한 세 작품 가운데 가장 재미있었고 흥미로웠다). '해변의 여인'에서 '해변의 페트라르카'로의 이행은 그러한 관심의 전이를 반영하고 있다. 그럼, 왜 '페트라르카'인가? 그건 <환상의 돌림병>(인간사랑, 2002)의 서론을 읽으면 알 수 있다. 김소영 교수가 "사랑하는 대상이 다른 자와 섹스를 했다고 하자, 뭐 괜찮아 하고 넘겼다가 이후 섹스 체위 등 온갖 것에 대한 환상으로 시달리는 상태에 대한 묘사가 <환상의 돌림병>의 서두다"라고 정리하고 있는 그 '서두' 말이다. 그 서두의 (의미상) 첫 문단을 국역본에서 인용하면 이렇다.

"남성 쇼비니스트가 보이는 질투의 전형적인 상황 속에 우리 자신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즉 갑자기 나는 내 파트너가 다른 남자와 섹스했음을 알게 된다. 좋아, 문제 없어. 나는 이성적이고, 관대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러나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지들이 나를 덮쳐오기 시작하는데, 그들이 벌이고 있을 구체적인 이미지들(왜 하필이면 그녀는 바로 그의 바로 그곳을 핥고 있어야 했는가? 어째서 그녀는 다리를 그렇게 쫙 벌리고 있어야 했는가?)이다. 그리고 나는 당황했고, 땀을 뻘뻘 흘리며 떨고 있다. 내 평화는 영원히 달아나 버린다."(11쪽, 강조는 원문 그대로)

사실 큐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샷>(1999)에서 톰 크루즈를 괴롭혔던 것도 언젠가 해군 장교에게 유혹당할 뻔했었다는 아내 니콜 키드먼의 고백이 낳은 '이미지들'이었다(이 경우는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은 정사이지만 그가 상상해낸 정사의 이미지들은 일시적으로 일상적인 삶을 중단시킨다. 혹은 영화밖의 이 커플을 이혼하게 만든다?). <해변의 여인>에서 '질투에 빠진 남성 쇼비니스트'로서 이혼한 영화감독 중래가 싸우는 이미지들도 자신이 마음에 두었던 여인들이 다른 남자들과 가졌던/가졌을 정사의 이미지들이다. 그 또한 '환상의 돌림병' 환자이다. 이어지는 문단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이 말의 출처가 바로 페트라르카이다.    

"이러한 환상들의 돌림병은 페트랄크(Petrarch)가 <나의 비밀>(My Secret)이란 작품에서 자신의 명료한 이성을 흐리게 만드는 이미지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오늘날의 시청각 미디어에서 그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

번역문 자체가 비문이지만(원문에 따르면, '환상들의 돌림병'과 '명료한 이성/추론을 흐리게 만드는 이미지들'은 동위어이고 동의어이다), 그보다 더 어리둥절한 것은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이자 대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를 '페트랄크'라고 표기한 것이다. 페트라르카의 영어식 이름이 'Francis Petrarch'이긴 하지만, 역자가 이런 정도의 인명을 제대로 표기해주지 못한 것은 부주의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사실 번역은 곳곳에서 삐걱거린다).  

 

 

 

 

오랜만에 다시 잡은 번역본을 읽다가 '페트랄크'에서 혀를 차게 됐지만 뜻밖의 소득도 없지는 않은바, 페트라르카의 국역본이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지난 2004년 시인의 탄생 700주년을 기념하여 최초 의 번역본 <칸초니에레>(민음사)가 출간되었던 것(작년에 거푸 또 다른 전공자가 옮긴 <칸초니에레>도 출간됐다). "페트라르카가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쓴 시를 모은 시집이다." 변명삼아 말하자면, 이런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된 건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된 책이기 때문이다. 한데, 작년에 나온 <칸초니에레>(나남)는? 책에 대해서라면 일가견이 있는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로쟈'도 '인간'임을 자인하는 수밖에.

잠시 소개를 옮겨오면, "'칸초니에레'는 원래 이탈리아어로 '시집'이라는 뜻을 가진 일반명사지만, 페트라르카의 시집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다. 총 366편의 작품이 실렸는데, 그중 317편이 소네트이고 이들 대부분이 평생 연인이었던 라우라에 대한 사랑을 읊은 것이다. 초반부의 시에서 시인은 거절당한 사랑으로 인한 비탄, 정열과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노래하였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지상의 욕망을 천상의 것으로 승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강조는 나의 것)

"페트라르카식 소네트의 완성형을 보여주며, 이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시인들의 끊임없는 모방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이 시집 자체도 필독의 대상이지만 지젝이 언급하고 있는 책은 <나의 비밀>(Secretum)이며, 'My Secret Book'이라고 영역본이 나와 있는 책이다(국내 도서관들을 검색해밨지만 단행본으로는 소장하고 있는 곳이 없었다. 얇은 책인데도). 성 아우구스티누스와의 가상의 대화를 담고 있는 책인데, 페트라르카식의 강렬한 고해성사를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환상의 돌림병'으로 고통받는 자신에 대한. 그렇다면, <해변의 여인>은 홍상수식 고해성사인가?(그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인가?)



 

 

 

사실 "오늘날의 시청각 미디어에서 그 극단을 보여주고 있"는 '환상의 돌림병'의 가장 유력한 유포자는 '이미지의 힘'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홍상수의 근작들은 그러한 영화의 메카니즘 자체에 대한 반어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조건적 기호)과 이미지(도상적 기호)에 포획된 현대인의 일상적 삶에 어떤 구원이 모색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가야 할 성찰. "나무가 늘어선 사구에 가 나무에 절을 하면서 콧물이 나올 만큼 엉엉 우는" 중래의 모습에서 조롱만을 읽는 건 그런 의미에서 공정하지 못하다. 농담을 진담처럼 건네는 게 홍상수의 주특기이기는 하지만 그 이면에서 그는 진담도 농담(조롱거리)으로 던지곤 하기 때문이다...

06. 10. 07-08.

 

 

 

 

P.S.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해변의 여인' 이미지는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1991) 맨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것이다. 그런 연상에 기대어 나는 <해변의 여인>이 장르와 무관하게 '홍상수식 바톤핑크'가 아닐까란 억측마저 해본다. "Are you in the pictur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노벨상의 계절이다. 노벨상의 꽃으로도 불리는 문학상은 관례대로라면 내주 목요일쯤 발표될 예정인 걸로 아는데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후보들이 매번 쓴잔을 마셨던 '관행'을 고려하면 이번에도 의외의 다크호스가 등장하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노벨문학상 얘기를 꺼내자고 한 건 아니다.  '북데일리'의 '세계의 책' 코너를 오랜만에 훑어보다가(한동안 활발하게 기사가 올라오던 이 코너는 현재 '개점휴업중'이다) 작년도 전미도서상 픽션부문을 수상한 <유럽센트럴>에 다시 눈길이 갔다.

연휴의 막간에 잠시 수다를 늘어놓자면, 작년 12월쯤인가 우연히 기사를 읽고서 나로선 생소한 작가 (하지만 '젊은 거장'이라는) 윌리엄 폴만(1959- )의 책들을 두어 권 아마존에서 구입한 기억이 있다. 물론 <유럽센트럴>을 포함해서. 부담스런 분량 때문에 국역본이 곧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미국내에서는 가장 권위있는 상의 하나인 전미도서상도 아직까지 한국의 독자나 시장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란 사실만을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 혹 관심있는 분들이 있을까 하여 거의 1년 전 기사를 여기에 옮겨놓는다.    

북데일리(05. 11. 21) 소설 '유럽센트럴' 전미도서상 수상

미국 현대문학의 다크호스로 알려진 윌리엄 T. 폴만(46)의 소설 <유럽센트럴>(바이킹. 2005)이 올 전미도서대상 픽션부문 대상에 선정됐다. '내셔널 북 기금'이 주관하는 전미도서대상은 미국에서 매년 픽션, 논픽션, 시, 아동문학 4부문에서 매년 뛰어난 문학작품을 저술한 작가들에게 주는 문학상으로 퓰리처상과 함께 미국의 가장 큰 문학상 가운데 하나다.

폴만은 픽션과 저널리즘의 서술 기법을 차용해 작품의 독창성과 대담한 묘사로 독자와 평론가들의 호평을 얻어 왔다. 추리소설을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쓰거나 창세기의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폴만은 "예술을 위해 영혼을 파는 파우스트적인 장르에서 영혼을 불러내는 작품을 쓸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유럽센트럴>의 37개 에피소드는 2차대전을 전후한 당시 나치와 소비에트 전체주의의 광신적인 유럽 통치체제를 그리면서 이에 대항했던 알져지지 않은 저항사를 복원시키고 있다. 폴만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소설은 인상깊은 스토리라인을 특징으로 하면서 각 에피소드는 연대순으로 나열돼 소설의 구성을 완성시키고 있다.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 정치체제부터 독일의 급부상, 동쪽으로는 러시아의 반격 그리고 동서체제로 나뉜 베를린의 냉전으로 끝을 맺는다.

20세기 소련과 독일의 호전적인 권위주의 정치문화에 눈을 돌린 폴만은 전쟁이 가져다 준 비극에 대한 인간의 행위와 저항에 초점을 맞춘다. 유명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혹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한 다양한 등장인물을 통해,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 내려야만 했던 윤리적인 판단과 목숨을 건 결단을 비교하고 대조시킨다.

특히 시인과 미술가 등 예술가들이 겪어야 했던 고뇌와 갈등도 눈길을 끈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소련 작곡가 드리트리 쇼스타코비치, 그와 그의 작품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공격했던 스탈린주의자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쇼스타코비치와 엘레나 콘스탄티노프스카야, 영화감독 로만 카르멘 사이의 삼각관계도 다루었다.

나치친위대 SS장교인 쿠르트 게르슈타인의 생은 보다 극적이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을 모집했던 임무를 맡았지만 게르슈타인은 전세계에 나치포로수용소의 위험성 경고했다. 케테 콜비츠(독일 여성판화가), 안나 아흐마또바 (러시아 여류시인), 마리나 쯔베따예바(러시아 여류시인), 반 클리번(미국 피아니스트) 등 당시 예술가에 얽힌 에피소드 담아냈다.

소설의 중심적인 배경은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을 알리는 바르바로사 작전,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의 패퇴 과정이다. 전쟁의 역사 속에서 상처와 고통을 입은 수백만명의 희생자를 추모하며 폴만은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로 전쟁의 역사 속에 묻힌 인간의 이야기를 풀어냈다.(북데일리 노수진 기자)

06. 10. 06.

 

 

 

 

P.S. 대략적인 줄거리만으로 '이거다!' 싶은 소설이었다. 문학의 죽음이나 종언론 따위가 엄살이라는 보여주려면 이 정도의 스펙타클은 써줘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소설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일컬어지는 '제1세계'에서 아직까지 이런 문학의 씌어진다는 사실이 (좁은 견문에) 다소 의외였을 정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며칠간 책들과 씨름했다. 이때 '씨름'은 물론 비유적인 의미에서 쓴 것이지만 비유만은 아닌 게 책을 읽고 이해하느라 고투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책장의 있는 책들을 모두 빼서 다시 정리하느라 진땀을 뺐다는 의미에서의 '씨름'이기 때문이다(그 결과 삭신이 쑤신다). 딸아이의 방을 만들어주려고 몇 주전부터 진행중인 프로젝트의 하이라이트로서 3단 책장 6개와 5단 책장 3개에 꽂혀 있던 책들을 모두 거실(혹은 베란다)로 빼내고 그걸 기화로 아예 서재의 책들까지도 전부 재배열했다. 전쟁터 같은 집안 풍경이 다소나마 정리된 게 어젯밤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칠하느니 마느니 갈피를 못 잡다가 결국 딸아이의 방에 칠할 '친환경' 페인트를 구했고 그 사이에 날은 저물었다. 어젯밤과 오늘 오전에 본 비디오를 반납하러 나갔다가 편의점에서 조간신문을 사들고 온 게 조금 전이다. 읽은 시간상으론 '석간'이라 해야 할 그 신문이 수요일자 한국일보이고 내가 읽은 건 고종석의 '말들의 풍경'이다. 특별히 오늘은 '文靑 사로잡은 비평의 신화' 김현을 다루고 있기에 여기에 옮겨놓도록 한다. 김현, 김윤식이란 이름은 내 청춘의 10년을 사로잡았던 '신화'이기도 했었기에(사실 고종석이 '말들의 풍경'이란 제명 자체를 빌어온 김현에 대해서는 연재의 말미에서나 다루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칼럼의 서두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이 불세출의 비평가가 세상을 뜬 지도 열여섯 해가 되었다. 그의 부고기사를 신문에서 읽고 어떤 막연한 의무감에 영안실이 안치돼 있다는 병원에 전화를 걸었던 기억마저 나는 갖고 있다(짧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만 되뇌었던가). 책장 정리를 다시 하면서 가장 가까운 서가에 그의 책 대여섯 권을 아직 꽂아둔 것도 그런 '인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인지도 모르겠다. 그 중 손이 닿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책이 <말들의 풍경>(문학과지성사, 1993 5쇄본)인데, 그가 세상을 떠난 1990년 12월에 나온 초판이 아닌 것은 내가 어떤 사정으로 이 책을 한번 더 샀기 때문이다(초판은 내가 군복무시절에 산 책이어서 지방에 놓아둔 것으로 기억된다).

사후적인 회고가 되겠지만, 언제부턴가 지난 90년대 문학을 '김현 이후의 문학'으로 나는 기억/규정한다. 마땅한 당대의 비평가를 갖지 못한 문학의 허전함을 나는 지우지도 채우지도 못하겠다. 칼럼의 중간에 나오는 고종석의 말을 미리 빌자면 "사실 김현은 문학평론을 그 자체로 읽을 만한 텍스트로 만든 거의 첫 비평가고, 어쩌면 마지막 비평가일지도 모른다." 그보다 목소리 큰 비평은 많고 그보다 예민한 비평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비평도 '문학'이라는 걸 확증시켜준 (어쩌면) 마지막 비평가였고, 그래서 그의 부재는 아쉽고 유감스럽다. 최근 '근대문학의 종언론'에 기대어 비평의 종언을 시비하는 이들도 없지 않지만 만약 비평에 종언이 있(었)다면 그건 지난 1990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4.19 세대가 소위 한국사의 '근대' 혹은 '근대 시민정신'과 '학생운동의 정신'을 웅변하는 세대였다면 김현이야말로 4.19세대의 가장 대표적인 비평가였고, 지난 1990년은 그가 세상을 떠난 해이니까.   

한국일보(06. 10. 04) [말들의 풍경]<31> 김현, 또는 마음의 풍경화

문학비평가 김현(1942~1990)이 돌아간 지 16년이 되었다. 16년이면 한 사람의 생애와 정신의 궤적을 감정의 동요 없이 되돌아보기에 꽤 넉넉한 시간적 거리다. 그에 대한 친구들의 사랑도, 적들의 미움도 그 격렬함이 많이 잦아들었을 테다. 그가 작고하고 세 해 뒤에 16권으로 완간된 ‘김현문학전집’의 종이빛깔도 제법 누렇게 되었다.

김현 이후 16년 세월은 이른바 ‘문지 동아리’ 안에서 김현 신화가 더욱 굳건해진 세월이기도 했고, 그 동아리 바깥에서 김현 신화가 사뭇 바랜 세월이기도 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치달은 이 세월의 힘 가운데, 더 큰 것은 뒤쪽이었던 듯하다. 그것은 생전의 김현이 누린 권위가 워낙 컸던 탓이기도 하다. 정점에 이른 자에겐 또 다른 상승의 가능성보다 추락의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아닌게아니라, 그 16년 세월은 김현 글의 모자람을 드문드문 드러낸 세월이었다.

그 모자람은 김현 둘레 사람들의 글과 견주어서도 더러 드러난다. 김현 이후 16년은 김현의 제자나 후배 비평가들의 나이를 김현보다 더 먹게 만들었다. 그가 아끼던 후배 김인환과 황현산은 이제 그들의 선배보다 훨씬 더 나이를 먹었고, 그가 아끼던 제자 정과리는 스승이 도달했던 마지막 나이에 이르렀다. 그 제자와 후배들의 글들 옆에 나란히 놓일 때, 김현의 글은 어쩔 수 없이 낡아 보인다. 사실 이런 ‘낡음’은 이미 김현 생전에도 기미를 드러냈다. 김현의 어떤 글은 정치함에서 김인환만 못해 보이고, 자상함에서 황현산만 못해 보이며, 화사함에서 정과리만 못해 보인다.

생전에 낸 마지막 평론집 ‘분석과 해석’의 서문에서 김현은 청년기부터 그 때까지 자신의 변하지 않은 모습 가운데 하나로 ‘거친 문장에 대한 혐오’를 거론했으나, 그 혐오를 철두철미하게 실천한 것 같지는 않다. 청년 김현의 글에서는, 청년 정과리의 글에선 찾기 어려운 유치함과 허세 같은 것도 읽힌다. 현학은 ‘배운 청년’이 흔히 앓는 병이지만, 청년 김현은 그 병을 좀 심하게 앓았던 듯하다. 물론 김현은 이내 그 병에서 회복되었다.

그러나 김현의 글은, 이 모든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이 후배와 제자들의 글보다 훨씬 더 맛있게 읽힌다. 그의 윗세대나 동세대 평론가들의 글과 견주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사실 김현은 문학평론을 그 자체로 읽을 만한 텍스트로 만든 거의 첫 비평가고, 어쩌면 마지막 비평가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김현이, 적어도 30대 이후의 김현이, 비평이란 수필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드문 비평가였다는 사실과도 관련 있을 테다.

그에게 비평은 논리와 지식의 전시장이 아니라 직관과 감수성의 연회였다. 김현은 비평을 제 앎을 드러내는 자리로 사용하지 않고, 마음(의 파닥거림)을 주고받는 자리로 사용했다. 작품론이나 작가론에서, 김현은 (초기 글들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불문학 교양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김현 특유의 직관과 감수성이, 모든 뛰어난 비평가에게 그렇듯, 오래 축적된 문학 교양과 어찌 관련이 없으랴?

김현이 자신의 직관과 감수성으로 작품에서 길어낸 의미가 늘 옳았던 것 같지는 않다. 다시 말해, 한 작품이 김현의 손길을 통해 늘 제 비밀을 고스란히 드러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 말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한 작품에는 고정된 의미(들)만 있다는 속 좁은 문학관이 그 속에 웅크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생전의 김현이 결코 동의하지 않았던 견해다. 그러니 이 말을 이렇게 바꾸자. 김현이 작품에서 길어낸 의미가 늘 표준적이었던 것 같진 않다고. 사실은 그 반대다. 김현의 말 읽기, 마음 그리기는 거의 언제나 독창적이었고, 바로 그 독창적인 의미화를 통해 한 작품을, 한 작가의 정신세계를 두텁게 만들었다. 모든 독창적 해석이 누군가에게는 오해로 받아들여진다면, 김현은 오해의 대가였다고도 할 수 있다.

김현은 한 작품을 그 안으로부터만 읽어내지 않았다. 그는 한 작품을 그 작가의 다른 작품 전부와의 맥락 속에서 읽을 줄 알았고, 무엇보다도 한 세대 내 또는 세대간 영향(의 불안)이라는 커다란 맥락 속에서 읽을 줄 알았다. 그것은 유년기 이래 평생 이어진 그의 글 허기증 덕분이었다. 김현은 동시대 비평가들보다 글을 훨씬 많이 썼지만, 진짜 잊어서는 안 될 점은 그가 동시대 비평가들보다 글을 훨씬 많이 읽었다는 사실이다.

설령 그가 이런저런 작품들에 매긴 자리(생전의 김현은 ‘자리매김’이라는 말이 싫다고 고백한 바 있다. 자리매김이란 관계맺기, 관계짓기보다 훨씬 고착적이어서, 한 번 자리가 매겨지면 변경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상자 기사의 ‘말들의 풍경’ 서문은 그의 이런 생각을 매혹적인 한국어로 펼쳐 보이고 있다)가 늘 공정하게 보이진 않았다 할지라도,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넘나들며 작품과 작가에게 그럴듯한 자리를 마련해준 것은 김현 이전에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후에 출간된 독서일기에서, 김현은 자신의 글을 괴팍하다고 평한 어느 소설가의 말을 거론한 뒤, “괴팍하다니.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며, 남들도 다 쓸 수 있는 글들을 쓰는 것을 삼갔을 따름이다”라고 적고 있다. 김현의 이 자부심은 온전히 정당하다.

김현의 글은 어느 순서로 읽어도 술술 읽힐 만큼 자기완결적이지만, 시간축을 따라 읽을 때 그 저자의 ‘인간적 매력’을 한결 또렷이 드러낸다. 그 ‘인간적 매력’이란 지적 정서적 윤리적 성숙의 여정이다. 청년 김현의 글에서 설핏설핏 보였던 문장의 어설픔, 현학 취미와 자기애는 만년 글에서 거의 말끔히 걷혀지고, 단정하되 윤기 있는 문체가, 타인에 대한 배려와 겸양이 독자를 맞는다. (물론 그는 자신의 ‘앎’에 대해서는 겸손했으나 자신의 ‘감식안’에 대해선 끝내 겸손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감식안을 감식하지 못하는 한국 문단을 슬그머니 타박하기도 했다.) 기분 좋은 일이다.

지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윤리적으로든, 나이가 늘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이와 함께 푹 익은 인격을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한 분야의 세속적 정점에 이른 이의 인격일 때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게다가, 생전의 마지막 평론집 ‘분석과 해석’과 유고 평론집 ‘말들의 풍경’에 묶인 글들은 한국어 산문이 도달한 아름다움과 섬세함의 꼭대기를 보여준다.

 

 

 



김현은 문학이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정치적 문인이었지만, 그의 문학평론은, 특히 만년에 이르러, 폭력의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의 고갱이를 건드리곤 했다.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1987)와 그 즈음의 몇몇 평문에서 그가 탐색한 폭력의 의미는, 깊숙한 수준에서, 1980년 봄과 관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김현이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과, 역시 깊숙한 수준에서, 무관치 않았던 것 같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전라도 지식인들이 흔히 그렇듯, 김현도 ‘억눌린 자’와 ‘억누르는 자’ 사이에서, 아니 보편(적 지식인 됨)과 특수(한 소속감) 사이에서 정서적으로 동요하고 있었다. 제임스 쿤의 ‘눌린 자의 하나님’을 읽고 쓴 1986년 5월27일치 일기의 한 대목은 이렇다.

“나는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나 자신에 대해 숙고했다. 때로는 혐오하면서, 때로는 연민을 갖고서,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도피의 마음으로.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하숙을 거절당한 것, 사투리 때문에 놀림받은 것, 전라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80년 이후에도 조용하다는 것…… 등의 것들이 뭉쳐져 내 가슴에 밀려들어왔다. 쿤의 책은 내 경험세계의 신학적 의미를 되묻게 만든다. 나는 억눌린 자인가? 아니다. 억눌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완전히 지배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문학장’ 속에서 권력을 효과적으로 획득하고 합리적으로 행사하는 방법을 알았다는 점에서 김현은 매우 정치적이기도 했다. 대학시절의 ‘산문시대’에서 ‘사계’와 ‘68문학’을 거쳐 ‘문학과지성’으로 이어지는 그의 동아리 운동에는 세대 전쟁과 세계관 전쟁이 버무려져 있었고, 김현은 늘 제 캠프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다. 그가 문학의 고유성과 (은밀한) 위엄을 그리도 강조한 것은 바로 그 자신이 ‘문학’이었기 때문이리라.

서가에 꽂혀 있는 김현 전집 가운데서 아무 거나 뽑아 들어 띄엄띄엄 읽노라면 문득 가슴이 울렁거린다. 거기에 내 글의 원형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서나 그 눈길을 담아내는 문체에서나 내 글은 김현의 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리고 격조와 깊이에서 도저히 김현의 글과 견줄 수 없지만, 그 근원은, 행복해라, 김현의 글이었다.(고종석 객원논설위원)

● '말들의 풍경' 서문 (앞부분)

말들은 저마다 자기의 풍경을 갖고 있다. 그 풍경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다르다. 그 다름은 이중적이다. 하나의 풍경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풍경들의 모음도 그러하다. 볼 때마다 다른 풍경들은 그것들이 움직이지 않고 붙박이로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변화로 보인다. 그러나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말들이 갖고 있는 은총이다.

말들의 풍경이 자주 변하는 것은 그 풍경 자체에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풍경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자꾸 변화하기 때문이다. 풍경은 그것 자체가 마치 기름 물감의 계속적인 덧칠처럼 사람들이 부여하는 의미로 덧칠되며, 그 풍경을 바라다보는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마치 빛의 움직임에 따라 물의 색깔이 변하듯 변한다. 풍경은 수직적인 의미의 중첩이며, 수평적인 의미의 이동이다.

그 중첩과 이동을 낳는 것은 사람의 욕망이다. 욕망은 언제나 왜곡되게 자신을 표현하며, 그 왜곡을 낳는 것은 억압된 충동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본능적인 충동이 모든 변화를 낳는다. 본질은 없고, 있는 것은 변화하는 본질이다. 아니 변화가 본질이다. 팽창하고 수축하는 우주가 바로 우주의 본질이듯이. 내 밖의 풍경은 내 충동의 굴절된 모습이며, 그런 의미에서 내 안의 풍경이다. 밖의 풍경은 안의 풍경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안과 밖은 하나이다.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만물을 낳는다는 말의 참뜻은 바로 그것이다...

06. 10. 04.

P.S. 이 칼럼/페이퍼를 '곁다리텍스트'로 분류해놓는 것은 이전에 옮겨놓은,김윤식의 서문집에 대한 고종석의 칼럼('나는 '쓰다'의 주어다')과 짝을 맞추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또 (지극히 정당하게도) 칼럼 말미에 인용돼 있는 <말들의 풍경> 서문 때문이기도 하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6-10-05 00:48   좋아요 0 | URL
어머 그 많은 책정리를...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정말 책과의 씨름이었네요. 김현의 말들의 풍경 서문도 잘 보고 갑니다. 이 페이퍼 담아갈게요. 로쟈님, 감사합니다.^^

페일레스 2006-10-05 18:59   좋아요 0 | URL
저 역시 로쟈님이 풀어내는 '책들의 풍경'을 흥미롭게 읽다 가곤 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조각글(혹은 곁다리-텍스트)이 아니라 잘 정돈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진 로쟈님의 '말들의 풍경'을 손 안에 쥐고 싶다는 소망을 조심스럽게 가져봅니다...

로쟈 2006-10-06 00:39   좋아요 0 | URL
배혜경님/ 자업자득이니까 저로선 유구무언입니다. 할말이 많은 사람들은 주변의 가족들이지요(^^;)...
페일레스님/ 곁다리텍스트의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한권의 책'이 채 되지 못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