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의  평론집이 나란히 출간되었다. 강유정의 <오이디푸스의 숲>(문학과지성사, 2007)과 유희석의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창비, 2007)이 그 나란한 책의 이름들이다. 연배상으로는 10년 터울을 갖고 있지만 이번에 나온 책이 첫 평론집이라는 점도 공통적이다. 강유정씨는 데뷔 2년만에, 그리고 유희석씨는 데뷔 10년만에 그간에 발표한(혹은 미발표한) 글들을 모아펴냈다. 비평적 지향과 입지는 다르더라도 한 언론의 표현을 빌면, '젊은 피'로서의 역할을 기대해보게 만든다(유희석씨는 40대의 나이이지만 창비쪽 스타일을 고려하면 '젊은 피'란 표현이 무색하진 않다).

먼저, <오이디푸스의 숲>은 "2005년 데뷔 후 문학과 영화, 문화 전반에서 활발히 활동해온 평론가 강유정의 첫 비평집이다. 지난 2년간의 활동 중 한국 문학의 흐름과 작가론을 중심으로 한 20여 편의 글을 묶었다." 아는 사람은 아는 사실이지만 그녀는 재작년 신춘문예 3관왕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단했고(관련기사는 http://www.korea.ac.kr/webzine/KF4S02T02F00-view.jsp?idx=209783&page=3&search1=&search2=) 이후에 주목받는 만큼이나 활발한 행보를 보여왔다.  

개인적으로 2005년 2월 1년간의 모스크바 체류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한 모임자리에서 처음으로 '강유정'이란 이름이 호명되는 걸 들었었다. 마치 '살아있는 전설'처럼. 외지에 있었던지라 내가 체감할 수 없었던 '경악'을 그이들은 연초에 경험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각인된 '강유정'이란 이름은 개인적으로 '장윤정' '채연' 등 연예인들의 이름과 나란하다. 모두가 '당신이 없는 사이에' 스타가 된 이름들이다(나는 공항에서 딸아이가 '어머나'를 흥얼거리는 걸 들었고, 집에 와서 TV를 틀어보니 '채연'이란 이름의 생소한 가수가 춤추고 있었다). 차이라면, 두 연예인과는 달리 비평가는 잠시의 휴지기도 없이 무소의 뿔처럼 진군하고 있다는 것. 그의 비평 속에서 '문학의 위기'는 그저 풍문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네 부로 나누어진 이 비평집에서 저자는 "2000년대 문학, 그 새로움을 향한 깊은 애정과 기대 뿐 아니라 사뭇 예리한 시선으로 동시대 문학의 현실을 꼬집는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준다."고 소개된다. 2000년대 한국문학의 근황이 궁금한 독자라면 엉뚱한 곳에서 헤맬 것이 아니라 명석하고 유창한 화법의 가이드와 함께 '오이디푸스의 숲'으로 떠나보시길(참고로, 영화평론가 강유정의 글들은 주로 필름2.0에서 만나볼 수 있다. 가장 최근 리뷰로는 <타인의 삶>에 대한 것이 있다. http://www.film2.co.kr/feature/feature_final.asp?mkey=4385 참조. 한편 생각해보면 비평가란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들이 아닐까?). 

영문학 전공의 평론가 유희석이란 이름을 내게 각인시켜 준 건 데뷔평론(창비신인평론상 수상작)인 '보들레르와 근대'이다. 외국문학에 대한 비평으로도 평론가로 데뷔할 수 있다는 사실이 파격으로 여겨졌고 신선했다. 그와 무관하지 않겠지만 이번 평론집에 실린 글들도 절반은 서구문학과 문학론에 관한 것이다. 특히나 프랑코 모레티(프랑꼬 모레띠)에 관한 글도 두 편 포함돼 있어서(영미문학연구회에서 펴내는 학술지 <안과 밖>에서 이미 읽은 것이기는 히자만) 구내서점에서 바로 책을 들고 계산대로 향하게 만들었다. 나 또한 외국문학 전공자로서 어떤 자기몫을 찾을 수 있을지 유익한 시사가 되어준다.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안팎'이란 부제에서 '팎(밖)'은 비유가 아니라 진짜 '바깥(의 문학)'이다. 나는 한편으로 그것이 '문학의 바깥'을 향하는 것이기도 해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 '바깥'은 공시적이면서 또한 통시적이다. 문학을 넘어선 문학, 문학의 종언 이후의 문학, 사회적 주목을 받거나 말거나 이 시대 비평의 몫은 점점 많아지고 무거위지는 듯하다... 

07. 04.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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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2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눈팅 2007-04-13 00:24   좋아요 0 | URL
문학평론집을 좀 읽어왔는데 요즘은 관심이 줄었습니다. 90년대 이후 문학이 변화한 모습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뻔하고 진부하게 느껴집니다. 평론집도 작가론 목차만 봐도 식상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중국소설을 읽지 않는 것은 90년대 이전의 한국소설처럼 촌스럽기때문입니다. 일본소설은 드라마나 영화처럼 쿨합니다만 저에게는 오락거리 이상은 아닌것 같습니다. 미국의 60년대 비트문화를 경험해보지 못해서 한국에는 잭 케루악, 윌리엄 버로스같은 작가가 없습니다. 이들 작가들의 작품이 거의 번역되지 않은 점도 하나의 징후이겠지요.

로쟈 2007-04-13 00:39   좋아요 0 | URL
**님/ 저도 몇 번 합석한 적은 있습니다...
모비딕님/ 저도 예전만큼 읽지는 않습니다. 1년에 몇 권 정도 손에 꼽을 정도인데, 마침 눈길이 가는 평론집들이 나온지라 따로 거명한 것이구요. 한국문학에 없는 게 어디 케루악과 버로스 뿐이겠습니까? 다만 '한국어'로 씌어진 '한국적 현실'에 관한 소설들이라는 게 미우나고우나 내칠 수 없는 이유겠지요...

수유 2007-04-13 09:09   좋아요 0 | URL
<타인의 삶>은 오래 상영해서 다행이네요..이제사 보러갑니다. 주변의 강추들이 많네요 :)
저 또한 평론집을 샀던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읽어보고싶습니다.
 

오랜만에 영화리뷰 기사를 옮겨온다. 최근 개봉한 송강호 주연의 영화 <우아한 세계>에 대한 영화평론가 오동진씨의 리뷰이다. 이미 기대 이상의 '물건'이라는 평판이 자자한 이 영화는 <연애의 목적>(2005)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한재림 감독의 두번째 영화이다. 데뷔작으로 사고 친 감독들의 경우 흔히 '두번째 영화 징크스'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은데, 한감독의 경우엔 예외인 듯하고 여러 인터뷰 기사들을 보건대 앞으로 더 기대할 만하지 않을까 싶다. '필름2.0'에서 한 평자는 "한재림에게서 홍상수를 봤다"고 했는데, 왠지 '장르 영화의 홍상수'가 될 거라는 기대도 갖게 한다. 예감은 그렇다. 요즘 영화 <300>이 중년 남성 관객들로 만원사례라고도 한다. 나는 그 '근육질적인 세계'나 소위 '우아한 세계'의 이면을 이 영화가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환상의 횡단' 같은 것 말이다(문득, 동시대 문학이 이런 몫을 해주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여러 리뷰들을 읽어봤지만 아래의 기사를 옮겨오는 건 '짧아서'이다.

문화일보(07. 04. 10) 조폭이나 화이트칼라들이나 약육강식에 휘둘리는 家長들

명백하게, 미국의 인기 TV시리즈 ‘소프라노스’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한재림 감독의 ‘우아한 세계’는 영화를 보다 보면 그런 사실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거나 아예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느낌을 준다(*'소프나노스'를 나는 본 적이 없다. 하니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들어갈 때는 ‘소프라노스’였으나 나올 때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됐다. 모방과 창조는 종이 한 장 차이란 얘기는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우아한 세계’는 그 사이의 얇은 막을 건너옴으로써 자칫 그렇고 그런 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작품을 근래에 나온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독보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가 되게 했다.



‘소프라노스’처럼 ‘우아한 세계’ 역시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꿈꾸는 한 조직폭력배 중간 보스의 좌충우돌 삶을 그린다. 중산층 가장과 조폭이라는 직업이 상충되듯이 영화의 이야기는 안과 밖이 사뭇 다르다. 바깥의 이야기는 이렇다. 들개파의 부두목급 중간 보스 강인구(송강호)는 얼마 전 수백억원의 이권이 걸린 건축 사업권을 가로채는 데 성공한다. 이 일로 그는 보스 노 회장(최일화)에게 다시 한번 두터운 신임을 얻지만 조직 내 또 다른 중간 보스이자 노 회장의 친동생인 노 상무(윤제문)로부터 심각한 견제를 받게 된다. 그런 와중에 인구는 오랜 고향친구이자 상대편 조직인 자갈치파의 부두목 현수(오달수)로부터 사업권을 돌려달라는 압력을 받는다.

이 같은 바깥이야기와는 달리 인구의 집안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축으로 달린다. 집밖에서의 생활에는 살벌한 회칼과 각목, 쇠파이프가 난무하지만 일단 집안으로 들어오면 여타의 중년 가장과 다를 것이 없다. 아니 오히려 인구는 자신의 직업적 콤플렉스 때문에 보통의 가장들보다 더 주눅든 생활을 한다. 아이는 조폭인 아버지가 확 죽어버렸으면 하는 데다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아 온 아내 미령(박지영)은 그에게 줄곧 이혼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몸에 손도 대지 말라고 하고 그러면 그는 투덜투덜 옷장에서 여분의 이불을 꺼내들고 마루로 나가기 일쑤다. 바깥에서도 칼 맞을 일 투성이지만 안에서 아내와 딸아이에게 맞는 마음의 칼이 그를 더 아프게 한다.



조폭영화(갱스터 영화)와 스크루볼 코미디형의 가족드라마를 뒤섞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는 사실 우리 사회의 중층적 모순을, 한 남자의 우울하고 우스꽝스러운 삶을 통해 보여주려는 일종의 리얼리티 드라마다. 영화는 특히 우리의 사회체제 자체가 가족의 해체를 유도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드러내려 애쓴다. 주인공 인구가 불안정한 자신의 직업을 생각해 스스로 기러기 아빠의 삶을 선택하는 건 그 때문이다. 인구가 몸담고 있는 조폭의 세계는 우리 사회 자체를 은유하며 영화에서 ‘조폭세계=사회’는 그를 자꾸 궁지에 몰아넣는다.

또 다른 중간보스 노 상무가, 새로 따 낸 이권의 일부를 떡고물로 내놓으라는 요구를 하자 인구는 이렇게 얘기한다. “거 알잖아. 회장님 드리고, 캐나다에 학비보내고, (조직) 애들한테 좀 주고, 그러면 나도 남는 게 거의 없다는 거. 알면서 왜 그래?” 조폭의 삶이든, 시장통 날품팔이의 삶이든, 아니면 고급스러운 척 유세를 떠는 화이트칼라들의 삶이든, 알고 보면 그 원칙에는 큰 차이가 없다. 위의 놈한테 떼이고, 아랫놈들한테 떼이고, 자식과 마누라한테 떼이고 나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거의 남는 것이 없는 법이다. 극단의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한국 자본주의에서 가장의 삶은 피곤하다.



영화는 주인공 인구가 조직에서도 살아남고 동시에 집에서도 인정받는 가장이 되는 식의 상투적인 전개와 결론을 거부한다. 송강호의 독특한 난센스 유머감각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느낌을 주는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영화는 더 진실되게 느껴진다. ‘우아한 세계’는 그저그런 상업영화가 아니다. 도덕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올바른 리얼리즘영화라는 평가가 훨씬 더 어울리는 작품이다.(영화평론가 오동진)

07. 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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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4-10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기대 이상이라고 하니, 더 기대 ^^

로쟈 2007-04-10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체의 와중에도 좋은 영화들이 계속 나오고 있어서 대견하기도 합니다...

hikrad 2007-04-10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밤에 산책을 하는데 제 앞에서 건장한 남자가 갓난 아이를 안고 부인과 다정하게 걷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핸드폰 소리을 듣게 되었는 데 이 남자가 조폭아니면 양아치 였는지 온갖 쌍욕으로 상대방을 협박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이에게 까꿍까꿍하더라구요.

순간 느꼈던 공포스러움이란....


로쟈 2007-04-10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한 세계'의 속을 들여다보신 셈이네요.^^;

마늘빵 2007-04-11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한 세계 봤는데, 오 송강호가 영화를 제대로 빛나게 했더군요.

나비80 2007-04-11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곧 보려합니다. ^^

2007-04-11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2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사람들은 그 자신의 성격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들이 행복 혹은 불행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행동을 통해서이다." 저라면 그냥 그렇게 옮길 거 같습니다...

2007-04-12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2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공부는 평생이죠.^^;
 

 

 알렉산드르 돌린(1949- )

История нов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В 4 томах. Том 1. Романтики и символисты

420쪽

Впервые в западном японоведении вниманию читателей предлагается полная "История нов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охватывающая более чем столетний период с конца XIX по конец XX века. Увлекательные биографические описания сочетаются с поэтологическим анализом разнообразных жанров и форм японского стиха, с летальной классификацией важнейших школ и направлений - от шедевров танка, хайку и киндайси Серебряного века до смелых экспериментов современного неоавангарда гэндайси.
Итоговая работа известного литературоведа, культуролога, писателя, переводчика классической и современн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Александра Долина представляет собой уникальное крупномасштабное, глубоко фундированное историко-литературное исследование.

В первом томе на обширном материале статей, манифестов, эссе и многочисленных поэтических сборников раскрываются особенности уникальной литературной традиции синтайси и киндайси, синтезировавшей лучшие достижения эстетики Востока и Запада в шедеврах стиха "новой формы". Поэзия романтизма и символизма периода Мэйдзи- Тайсе (конец XIX - первая четверть XX веков), положившая начало блестящей эпохе японского Серебряного века, предопределила пути развития нового стиха и дала миру таких талантливейших поэтов, как Симадзаки Тосон, Китахара Хакусю, Мики Рофу, Хоригути Даигаку.

Издание рассчитано на ученых-филологов и историков, студентов и аспирантов, а также па широкие круги читателей, интересующихся японской поэзией.

История нов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В 4 томах. Том 2. Революция поэтики

324쪽

Во втором томе рассматриваются важнейшие этапы эволюции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первых десятилетий XX века: развитие школы натурализма, народно-демократической школы, зарождение пролетарской поэзии и поэзии революционного анархизма, становление авангардистских течений и школ. Большое внимание уделяется анализу теоретических работ лидеров нов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определивших сущность "духовной революции" и восточно-западный синтез культур. Тщательно выписаны литературные портреты крупнейших поэтов-гуманистов и модернистов XX века Миядзава Кэндзи, Такамура Котаро, Хагивара Сакутаро, Муроо Сайсэй, Нисиваки Дзюндзабуро.

 

История нов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В 4 томах. Том 3. Грани модернизма

292쪽

В третьем томе рассматривается процесс развития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от космополитических эстетских течений предвоенного периода до гуманистического ренессанса послевоенных лет и далее, вплоть до конца XX в. Наряду с творчеством таких прославленных мастеров, как Канэко Мицухару, Кусано Симпэй, Миеси Тацудзи, Таникава Сюнтаро, автор анализирует широкий спектр школ и направлений современного японского стиха - от сурового реализма "поэзии Хиросимы" до эпатажных экспериментов постмодернистов.

 

История нов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В 4 томах. Том 4. Танка и хайку

428쪽

В четвертом томе на материале, литературного наследия многих десятков мастеров танка и хайку воссоздаются основные этапы развития японского стиха традиционалистского направления с конца XIX века до наших дней. Описанию современных школ и течений в обеих частях исследования предшествуют очерки истории поэзии классических жанров в Средние века, вводящие читателя в мир традиционной эстетики и поэтики. Литературные портреты Есано Акико и Сайто Мокити, Вакаяма Бокусуй и Маэда Югурэ, Кимата Осаму и Тавара Мати, Масаока Сики и Такахама Кеси, Одзаки Хосай и Танэда Сантока, Мидзухара Сюоси и Исида Хаке создают колоритную картину мира танка и хайку Нового времени, до недавних пор почти не знакомого западному читателю, но привлекающего миллионы японских любителей поэзи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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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4-10 10:01   좋아요 0 | URL
Описанию современных школ и течений в обеих частях исследования предшествуют очерки истории поэзии классических жанров в Средние века, вводящие читателя в мир традиционной эстетики и поэтики

이 부분이 참 감동적이네요. ㅋ

로쟈 2007-04-10 23:51   좋아요 0 | URL
러시아어를 아시는군요!^^ 오존에서 온 신간안내 메일에 들어 있어서 알게 된 책인데, 일단 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경삼아 올려놓은 것이고 정리는 시간이 날 때 할 예정입니다...
 

레디앙에 실린 박노자와의 인터뷰를 옮겨놓는다. 한미FTA에 관한 것인데, 그밖에 다양한 관심사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나로선 북한 체제와 민노당에 대한 그의 견해에 공감한다). 이미 우리시대의 논객이자 국외자적 지식인으로 자리잡았지만, 박노자는 가라타니 고진이 인용하고 있는 바로 그 ‘non-Jewish Jew’(비유대적 유대인)의 전형이 아닐까 싶다. 혹은 ‘non-Korean Korean’(한국인이 아닌 한국인). 그런 입지점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요긴하며 필수적이다. 그의 모든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한미FTA 관련인지라 '사회적 독서'로 분류해놓는다. 

레디앙(07. 04. 09) 한미FTA 정치사회적 겨울 온다

"미국과 한국의 시장을 통합시킬 수 있다면 더 이상 신자유주의 노선에 반대하는 정책을 수립할만한 여지가 남지 않을 것이라는 발상이 아닌가 싶다. 어떤 세부적인 혜택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이 나라에서 부자들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어떤 정책도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환영하는 것 같다"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 박노자 교수는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지배층이 한미FTA를 추진하는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그는 한미FTA 협정이 체결되면 우리 사회는 미국식 모델 외에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될 것이라면서 "사회와 국가의 장기 보수화, 일종의 정치사회적 겨울을 가져오는 계기가 될 것" 이라고 전망했다. 박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은 진보를 들먹이고 진보적 슬로건을 하나의 어법으로 이용하면서 일부 민중을 포섭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국가를 미국형 사회모델, 한 편에는 소수의 부유층과 고소득층과 중산층 상층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70-80%나 되는 빈곤층과 준빈곤층, 몰락 중인 하급중산층이 있는, 민중에게 대단히 고통스러운 사회모델로 몰아가고 있다"고 노 대통령을 비판했다.

박 교수는 한미FTA의 효과로 소비자 잉여가 증대될 것이라는 논리에 대해 "소비자가 바로 노동자다. 소비하려면 우선 벌어들여야 하는데, 직장의 안정성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며 "오세훈 서울시장이 벌이고 있는 공무원 '퇴출 쇼'가 그런 것인데, 일종의 시범케이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모델이 공고화된다면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은 공포의 나날이 될 것"이라며 "당장 다음 달을 예측할 수 없는 공포의 연속일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노 대통령에 대해 대단히 신랄했다. 그는 "(노 대통령같은) 그런 자들이 장기적으로 한국 민중에 가장 위험하다. 카멜레온처럼 기만책을 대단히 잘 구사한다. 일부 민중층을 포섭하는 언어적 수법에 능하다. 또 자수성가한 민중 출신이다. 그런 사람이 민중운동을 파괴하는 데는 가장 쓸모가 있다"고 맹비난했다.

박 교수는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진보는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고, 좌파는 결과의 평등을 추구한다"고 분별하면서 자신과 노 대통령을 진보로 규정한 데 대해 "조기숙 교수가 재직하고 있는 이화여대에서 시간강사를 하고 있는 수 많은 사람 중에 교수가 될 기회를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수 많은 시간강사들, 수 년 동안 시간강사 일을 해온 사람들, 상당수는 정규직 교수에 비해 능력 좋고 업적 좋은 사람들, 조기숙 선생이 만들고 싶은 사회에서는 이들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질 것인가, 그것부터 물어보고 싶다"고 꼬집었다(*이러한 '맡바닥' 사정은 조교수보나 박교수가 훨씬 잘 아는 듯 보인다). 

박 교수는 이번 대선과 관련해 "지금 같아선 극우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것이 뻔해 보인다"면서 "(민주노동당이) 그것을 막을 수는 없어도 제대로 저항해서 수 백만 표를 얻을 수 있다면 앞으로 극우 세력과 제대로 투쟁하면서 한국의 보수화를 제지할 수 있을 것"이지만 "요즘 민주노동당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담하다"고 했다.

박 교수는 민주노동당의 문제로 크게 두 가지를 꼽았다. 먼저 당이 젊은층을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민주노동당은) 80년대 운동권의 보수적이고 서열위계적인 문화가 강하다. 양성평등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경우도 많지 않나 싶다"면서 "20대 여학생이 친근하게 대하기 굉장히 힘든 구조"라고 지적했다. 또 비정규직 노동자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당 지도부나 국회의원 후보 선출시 비정규직에 쿼터를 부여하는 것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심상정 의원이 제안한 비정규직 대상의 당원 가입 특례안에 대해서도 "일리 있는 제안"이라고 호응했다.

박 교수는 민주노동당의 대선 레이스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면서 "대중적인 호소력이 가장 강한 사람이 선출돼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 교수와의 인터뷰는 한미FTA 문제가 주제였지만, 한미FTA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다른 이슈들로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특히 북한 문제에 대한 박 교수의 분석은 독특하고 흥미로웠다.

박 교수는 북미관계와 관련, "북한 지배층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과 러시아, 남한까지 견제할 수 있는 카드는 미국"이라며 "북한은 미국이 허락만 한다면 가장 친미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미국이 허락한다면 북한의 자체 식민화가 진행되지 않을까 싶다"면서 "미국 자본과 남한 자본, 일본 자본에게 자기 나라의 저임금 노동력을 어떻게 팔아먹을 것인가 하는 것이 북한 지배층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같은 분석에서 보듯 북한의 현 지배층에 대해 박 교수는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러니 북한의 지배층을 추종하는 운동권 내의 일부 경향에 대해 박 교수가 어떤 입장을 갖고 있을지는 능히 짐작되는 바다. 그는 '탈북자' 문제와 관련, "남한 운동 진영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는 탈북자를 체제 부적응자나 심하면 배신자로 규정해서 왕따시키는 게 아닌가 싶다"면서 "주사파를 이해하기 힘든 게 이런 점이다. 본인들을 민족주의자라고 하는데, 같은 민족인 북한 사람들을 이렇게 대하면서 무슨 놈의 민족주의인가. 이건 조선민족이 아니라 북조선이라는 국가를 위주로 놓고 생각하는 아주 악질적인 국가주의"라고 맹비난했다.

박 교수와의 인터뷰는 7일 낮 12시부터 성균관대학교 야외 휴게실에서 약 90분에 걸쳐 진행됐다. 인터뷰를 마치고 혜화역으로 가는 길에 보니 대학로에선 한미FTA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준비되고 있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 한미FTA 협상이 타결됐다. 어떻게 평가하나.

= 자세한 평가는 세부 내용을 봐야 가능할 것 같다. 정부는 개성공단 문제와 관련해 대단한 성과를 거둔 것처럼 말하지만, 이는 앞으로 대중국 정책 방향에 따라 결정될 문제다. 

- 한미FTA 특위 열린우리당측 간사인 송영길 의원은 한반도역외가공지역위원회 설치 건을 놓고 "동북아에서 경쟁력 있는 통일경제의 꿈"을 말했다.

= 송영길 의원이 말하는 경쟁력이라는 건 60~70년대 한국식 성장모델의 재판이다. 한국 노동자 대신 북한 노동자를 저임금 착취 모델로 몰아내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섬유제품 등을 미국에 팔아 60~70년대 한국자본주의의 기적을 재현해 보겠다는 얘기가 아닌가 싶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북한 정권이 한국 자본의 대리인 역할을 해야 한다. 지금 북한 지배집단의 동향을 보면 여기까지는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이렇게 되면 북한 노동자들은 한국 자본과 북한 지배집단이라는 대리인에 의해 이중착취 상태에 놓일 것이다. 북한 민중이 절대적 기아사태를 면하면 다행이지만 이중착취 구조에서 생활수준도 크게 개선되지 못할 것이고, 결국 지금과 같은 무권리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송영길 의원의 기대대로 된다고 해도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송 의원의 기대대로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미국이 이란 침략 계획을 실행하지 않고 보류한다면 다시 한 번 동아시아로 눈을 돌려 잠재적 경쟁 상대인 중국을 약화시키는 집중적인 포위 프로젝트에 착수할 확률이 높고, 그 한 부분이 북한 때리기다. 북한은 미국의 대중국 전략의 종속변수다. 중국의 대국화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것에 따라 미국의 북한 때리기는 언제라도 재개될 수 있다.

- 미국에겐 대중국 정책이 상수라는 얘긴데.

= 그렇다. 미국의 입장에서 북한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유전처럼 약탈할만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미국에게 북한은 중국이나 러시아를 공격할 수 있는 최적의 교두보다. 이는 열강정치에서 확인된 지 오래다. 러일전쟁을 앞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1901년부터 협상을 했는데, 당시 러시아측 요구가 뭐였느냐면 39선 이북 지역의 중립화였다. 한반도 북부지역을 일본 영향권과 대륙 영향권 사이의 완충지대로 파악한 것이다. 지금 중국이 북한을 보는 것도 당시 러시아의 시각과 같다. 당시 일본, 그리고 현 미국 세력의 영향권과 대륙 세력의 영향권의 충돌의 문제이지 북한 자체를 특별히 미워할 것도 없고 북한을 공격해서 얻을 것도 없다.

- 송영길 의원은 운동권 출신이고 햇볕정책의 신봉자다.

= 햇볕정책이라는 것이 북한의 지배집단을 잘 포섭하자는 얘기 아닌가. 싸우자는 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을지 몰라도 한국 지배계급의 자기 위주 발상이다.

- 구여권에 있는 운동권 출신 인사들 가운데는 한미FTA와 남북관계 개선을 같은 궤에 놓고 보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 지금 정부와 구여권이 팔아 먹을 수 있는 건 북한 문제밖에 없다. 복지정책은 내세울 게 없고, 부동산 값도 잡히지 않고 있다. 민생파괴와 농업파괴는 한미FTA로 이미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도시의 30~40대 화이트칼라, 농민, 노동자들에게 팔아 먹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유일한 게 북한 문제다. 이들은 진보적 지지층에 먹힐 수 있는 북한문제와 전혀 먹히지 않을 것 같은 한미FTA를 묶어서 강매하려는 것이다. 북한과 잘 되기를 원하면 한미FTA를 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속아넘어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 그런 단기적 속셈 말고 통일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구상의 일단을 비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 만의 하나 미국이 앞으로 10~15년간 중국을 대상으로 침략과 포위 전략을 쓰지 않을 경우 북한은 동북아에서 일본 이상의 친미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 북한은 이 지역에서 가장 취약한 국가다. 제일 약자다. 북한은 중국에게서 투자도 받고 원조도 받고 있는데, 이런 과정에서 종속적인 관계가 되어 가고 있고, 이는 북한 지배층으로선 바람직하지 않다. 북한 지배층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과 러시아, 남한까지 견제할 수 있는 카드는 미국이다. 북한은 미국이 허락만 한다면 가장 친미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 미국이 허락한다면 북한의 자체 식민화가 진행되지 않을까 싶다. 미국 자본과 남한 자본, 장기적으로는 일본 자본에게 자기 나라의 저임금 노동력을 어떻게 팔아먹을 것인가 하는 것이 북한 지배층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될 것이다.



- 한반도 남쪽 진보진영은 어떤 각도에서 통일문제에 접근해야 하나.

= 한반도 진보진영에겐 나쁜 전통이 하나 있다. 외부에서 이상향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다. 처음에는 소련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한국 공산주의 운동은 러시아 혁명의 파급 효과로 구성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러시아는 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적 성격을 상실하기 시작했고, 30년대 이후로는 국가자본주의 국가가 됐다. 그런데 한국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스탈린주의 및 러시아 혁명의 왜곡과 반동화를 비판한 사람이 없다.

중국만 해도 진독수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 한국에 트로츠기(*트로츠키) 전통이 생건 건 90년대 초반이다. 소련이 한국 공산주의자들에게 숭배 대상이었는데, 이게 나중에 엄청난 재앙을 낳았다. 그리고 수십년 후인 80년대 남한에서 그 비극이 재연됐다. 스탈린주의를 사회주의로 착각했고, 소련이나 동독을 희망으로 여겼다. 이것이 운동권 문화를 왜곡시켰고 운동권 붕괴의 원인이 됐다.

동구권이 붕괴된 후 이런 환상은 가라앉았다. 그러나 남아 있는 북한을 대상으로 해서는 지난 20년대부터 있어왔던 이상향 찾기의 욕망이 계속 투사되고 있다. 이른바 주사파들 사이에 이런 경향이 강하게 존재한다. 운동권은 이를 완벽하게 버리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고 대중화될 수 없다. 남한 대중은 북한의 실체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운동권에서는 계속 비현실적인 환상들을 붙들고 있다. 이것이 운동권 전체가 대중화될 수 없는 이유다.

- 소위 좌파 진영도 이렇다 할만한 대북 접근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겠나.

= 최적의 방향은 북한 민중이 혁명적인 노선으로 가는 것이다. 북한 지배계급에 대한 민중적 혁명이 한반도 정치를 급진화하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상황에서 북한 민중의 계급적 각성을 기대하기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최선의 방향을 얘기하기 어렵다. 그래도 내가 보기엔 북한 민중의 계급적 각성에 기대를 거는 것이 민중 진영의 유일한 길이 아닌가 싶다. 이런 기대가 일정한 현실성이 있는 이유는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민중의 계급적 각성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 전국 조직이 없어 그렇지 적어도 지역적으로는 노동자의 저항이 강해지고 있다. 민중 저항에 참여하는 사람만 해도 지난해 300만명이 넘었고, 저항의 방법도 급진화되고 있다.

중국 민중들이 중산계급과 지배계급의 개발연대에 대한 정치적 반대노선으로 가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런 저항의 분위기가 맨 바닥에서 형성되고 있다. 북한은 중국이나 베트남 노선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북한 민중이 그간 얼마나 속았으며 지배계급의 전략에 어떻게 놀아났는가 각성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런 각성에는 위험성도 따르는데, 남한 사회에 대한 미화로 빠져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남한은 천국이라는 인식이다. 탈북자들이 대개 극우적인 성향을 띠는 것도 이런 이유다. 북한 지배계급에 대한 반항심이 남한 지배체제에 대한 동경으로 잘못 흘러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남한 민중세력이, 남한 지배체제와 북한 지배체제를 동시에 반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혹은 그런 운동의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북한 민중의 계급적 각성에 도움되지 않을까 싶은데, 실제로는 남한 운동 진영이 탈북자를 철저히 외면한다. 탈북자를 매개로 북한 민중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줄 수 있을 텐데도 그렇다.

남한 운동 진영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는 탈북자를 체제 부적응자나 심하면 배신자로 규정해서 왕따시키는 게 아닌가 싶다. 이건 대단한 손실이다. 인간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건 물론이고. 주사파들 이해하기 힘든 게 이런 점이다. 본인들을 민족주의자라고 하는데, 같은 민족인 북한 사람들을 이렇게 대하면서 무슨 놈의 민족주의인가. 이건 조선민족이 아니라 북조선이라는 국가를 위주로 놓고 생각하는 아주 악질적인 국가주의다.

- 어느 강연에선가 한미FTA를 '제2의 을사늑약', 이런 식으로 비유했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청와대가 반대진영을 쇄국론자로 몰아붙이는 논거 중 하나가 '어떻게 한미FTA를 을사늑약과 비교하느냐' 하는 것이다.

= 나는 물론 한미FTA가 을사늑약과 같다고 보지 않는다. 하나의 비유였을 뿐이다. 그 비유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에 반대했다. 주요 각료는 찬성했지만 황제가 반대했다. 지배층 중에서도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데 대한 반대가 있었던 셈이다. 자기 사유물처럼 국가가 남의 손으로 넘어가니까 고종으로선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미FTA는 좀 다르다. 한국의 지배계급 전체가 한미FTA를 찬성할 뿐더러 끌고 가고 있다. 대기업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기업에 종속된 중소기업도 환영하고, 고소득 전문직종에 있는 사람들도 환영한다. 이들 엘리트들이 한미FTA를 환영하는 이유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를 공고화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과 한국의 시장을 통합시킬 수 있다면 더 이상 신자유주의 노선에 반대하는 정책을 수립할만한 여지가 남지 않을 것이라는 발상이 아닌가 싶다. 어떤 세부적인 혜택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나라에서 부자들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어떤 정책도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환영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한미FTA 협정을 체결하면 부유세 같은 정책을 시행하는 게 어려워질 것이다. 미국에 없는 정책을 한국에서 실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민의료보험도 자기 부담 위주로 가는 완성되지 못한 제도로 남거나 미국처럼 민간보험 위주로 퇴보할 수 있다.

미국이 하나의 모델이 되면 교육의 공공성도 흔들리기 쉽다. 아직까지 3불정책이 유지되고 있고, 평준화 정책을 탈피하고 싶어도 국민 불만을 생각해서 원칙을 지키고 있는데, 한미FTA가 체결되면 모든 학교가 귀족학교와 빈민학교로 나뉘는 시스템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국 지배층의 새로운 유토피아다.

- 한미FTA를 찬성하는 이유 중 하나가 신자유주의적 사회정책의 역진불능성에 대한 기대에 있다는 지적은 흥미롭다.

= 한국이 참고할 수 있는 모델은 굳이 사회주의가 아니라도 많다. 일본 모델도 있고 서유럽 모델도 있다. 서유럽 모델 중에선 독일,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모델 등이 있는데, 국가를 통한 재분배가 위주가 된다. 한국 사람들 사이에선 북구식 복지국가에 대한 호감도가 높다. 여론조사 해보면 상당히 높게 나온다. 그런데 한미FTA로 인해 이런 모델에 대한 모색이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 사회와 국가의 장기 보수화, 일종의 정치사회적 겨울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 정부는 한미FTA 찬반 논쟁을 '개방이냐, 쇄국이냐'는 구도로 몰아가고 있다.

= '개방이냐, 쇄국이냐'는 구도는 허구적이다. 조선 말기의 경우 강화조약 이전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1%가 안됐다. 지금 한국의 무역의존도는 한미FTA를 하지 않더라도 80%에 달한다. 한미FTA는 쇄국의 반대어로서의 개방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시장과 미국 시장을 높은 수준으로 통합하는 문제이고, 장기적으로는 한국의 국가사회 발전모델을 미국식 모델에 종속시키는 문제다.

노무현 대통령은 진보를 들먹이고 진보적 슬로건을 하나의 어법으로 이용하면서 일부 민중을 포섭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국가를 미국형 사회모델, 한 편에는 소수의 부유층과 고소득층과 중산층 상층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70~80%나 되는 빈곤층과 준빈곤층, 몰락 중인 하급중산층이 있는, 민중에게 대단히 고통스러운 사회모델로 몰아가고 있다.

- 한미FTA로 피해를 입게 될 70~80%의 민중층 가운데 상당수가 이 협정을 찬성하고 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 문화적 헤게모니의 문제다. 한국은 국가와 보수적 재벌과 미디어가 영합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나라다. 보수신문의 한미FTA 보도를 보면 가히 대국민 선전선동, 대국민 홍보 수준이다. 게다가 한국에는 개발주의 신화가 강하다. 70년대 개발주의가 특정 시기에 일정 부분 성공한 면이 있고, 박정희 시대의 이런 성공 신화를 미디어들이 재생산하고 있다. 한미FTA에 대한 찬성 여론은 '박정희 신화처럼 해보자'는 분위기에 도움을 얻은 것 같다. 그런데 박정희 시대의 개발은 외자와 차관, 무역 위주의 개발이었고 지금과 같은 시장통합적 개발은 아니었다. 박정희 개발주의가 일정 부분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은 시장통합을 하지 않고 미국 재벌로부터 한국시장을 보호한 데 있다. 이게 성공비결이라면 비결인데, 한미FTA는 이 부분을 무시하고 시장통합으로 가는 것이다.

- 불리한 여론지형을 극복하고 반대론이 힘을 얻을 수 있을까.

= 아직 협상은 체결된 것이 아니다. 미국쪽 사정 때문에라도 협정 체결은 지지부진해질 수 있다. 한국의 경우 협정으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입을 계층과 지역이 존재한다. 반대 여론을 커지게 하자면 '당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얘기해야 한다. 농민들이야 너무 분명하니까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될 정도지만. 도시근로자들도 일부의 고소득 전문가층을 빼고는 장기적으로 혜택보다 피해가 많을 것으로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미국식 모델이 강하게 도입되면 우선 직장의 안정성부터 흔들릴 것이다. 한미FTA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소비자잉여를 자주 얘기하는데, 소비자가 누군가. 바로 노동자다. 소비하려면 우선 벌어들여야 하는데, 직장의 안정성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그 효시로 보이는 것이 진행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벌이고 있는 공무원 '퇴출 쇼'가 그런 것인데, 일종의 시범케이스로 봐야 할 것이다. 장차 공공부문 시장 운영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인데, 이 모델이 공고화된다면 한국에서 직장생활은 공포의 나날이 될 것이다. 당장 다음 달을 예측할 수 없는 공포의 연속일 것이다. 서울시의 공무원 '퇴출 쇼'를 보면서 궁금한 건 왜 사람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나 하는 것이다. 인권침해 요소가 대단히 큰 일 아닌가. 근무태만 같은 분명치도 않은 근거로 한 개인의 직장 안정성을 파괴하는 것이 법적으로 유효한가도 따져봐야 한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수 많은 다른 직장에서도 태만과 무능을 이유로 노동자들이 퇴출될 것이다.

무능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사람이 언제나 보스일 것이고 보스가 노동자의 생사여탈권을 쥐게 될 것은 불보듯 뻔하다. 유럽의 경우 노동자 해고사항은 노조와 경영자측의 협의사항이다. 노조의 동의 없이 노동자를 해고시키는 것은 유럽에선 보기 드문 일이다. 반면 한국은 공무원노조를 국가가 인정도 않고 있다. 해고할 때 노조 동의는 커녕 아무 고려 없이 경영자의 판단으로 노동자를 무능력자로 규정해 왕따시켜 밀어내는 것은, 일본 영화 '배틀로얄'에 그려진 대로 약육강식이란 사회진화론적 이론을 현실화시키는 잔인한 쇼다. 



- 피해당사들이 협정 체결 후 어떤 피해를 입을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실감을 하게 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런 각도에서 지금까지의 한미FTA 반대 투쟁을 평가한다면.

= 민족경제론적 발상으로 협정을 반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일종의 애국주의적 기조로 반대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국제적 분업구조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분업구조가 복지망이 존재하지 않는 한국에 적용될 때 민중의 생활을 파탄시킬 것이라는 게 문제다. 우리가 미국 농민이나 중국 농민을 혐오할 이유는 없다. 예컨데 중국 농민이 생산하는 농산물이 한국에서 소비되는 것이 그 자체로 해악은 아니다. 다만 현재의 구조에서 한미FTA가 체결될 경우 한국 농민층의 붕괴가 불가피하다는 것이고, 기댈수 있는 복지망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사태를 맞을 경우 농민들의 삶은 파탄으로 내몰릴 것이라는 점이다.

- 찬성측과 반대측이 공히 자신들의 논거로 드는 것이 있다. '국익'이다.

= 국익이라는 건 실체 없는 얘기다. 나라를 무엇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다. 만약 협정이 체결되면 일부 대기업은 득을 볼 것 같고, 거기에 하청화되어 있는 일부 중소기업들도 득을 볼 것이고, 귀족학교와 귀족병원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일부 고소득층도 득을 볼 것이다. 우리가 나라의 실체를 이 기업들과 이 고소득층으로 본다면 한미FTA는 국익에 부합하는 것일테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부자들만 사는 게 아니지 않나.

- 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국익을 말한다.

= 한국에는 아직 국가의 신화가 강하다. 민중의 이득을 말하면 되고, 그게 훨씬 더 실체에 가까울텐데, 우리는 민중이라는 얘기를 고상하게 하려면 국가 얘기를 꺼내야 한다. 국가 없이는 고상하고 고매한 당위론적 담론이 서질 않는다.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가 아직 국가주의에 지배당하고 있다. 

- 국제적 분업구조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정부는 반대론자들에게 반대만 하지 말고 대안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 내가 생각하는 궁극적인 대안은 한 국가 내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최선의 궁극적인 대안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겠다. 당장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안은 국제적인 신자유주의적 분업구조에 깊이 들어가기 전에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튼튼한 재분배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다. 이 재분배 장치라는 건 농민들의 소득보전 같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부유세, 교육무상화, 의료무상화의 3대 조건이 충족된다면 한국은 그나마 민중들이 살만한 사회가 될텐데, 지금 전혀 그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

- 방금 말한 3대 조건이 충족되면 FTA도 가능하다는 의미인가.

= 이런 것들이 개선된 이후에도 굳이 FTA를 모색해야 한다면, 지역적으로 가까운 나라와 서로 민감한 부분을 100% 감안한 후에 체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일본의 경우 잘 하면 노동시장까지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언어 배우기도 쉽고, 지리적으로 가깝고, 시스템이나 문화가 비슷하고. 한국 노동자들에게 선진국인 일본 노동시장 유입을 보장하는 그런 FTA라면 민중들에게 덜 해롭지 않을까 싶다.

- 진보진영 일각에선 대안적 FTA를 모색하는 움직임도 있다.

= 자본보다 민중의 이해관계를 생각하는 FTA일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의 노동시장 진입 가능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우라나라에도 불법 체류자가 많지만, 일본에서 불법으로 노동하는 한국 노동자들도 많다. 고생도 많이 하고 잡혀서 송환도 당한다. 한국 노동자들이 합법적으로 일본에 가서 노동하도록 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데, 어떤 협정을 맺더라도 우선적인 고려는 이런 것이 돼야 되지 않나 생각한다. 

- 협정을 밀어붙이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몇 가지 물으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자칭 '유연한 진보'라고 한다.

= 그 사람 얘기 별로 하고 싶지 않다(웃음). 그런 자들이 장기적으로 한국 민중에 가장 위험하다. 카멜레온처럼 기만책을 대단히 잘 구사한다. 일부 민중층을 포섭하는 언어적 수법에 능하다. 또 자수성가한 민중 출신이다. 그런 사람이 민중운동을 파괴하는 데는 가장 쓸모가 있다. 한국 사람들이 노무현 열풍 같은 것을 다시 재현하지 않으려면 지배계급이 어떻게 민중을 기만할 수 있는지 철저히 학습해야 한다. 2002년을 생각하면 허무하다. 당시 주관적으로는 스스로를 진보라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이라는 속 빈 이미지에 얼마나 놀아났는가. 이런 것이 재현되면 안 된다.

- 역시 유쾌한 질문도 아니고 유쾌한 답변도 나올 것 같지 않은데, 현 정부에서 청와대 홍보수석을 했던 조기숙이라는 정치학자가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진보는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고, 좌파는 결과의 평등을 추구한다. 그런 분류법에 따를 때 자신과 노 대통령은 진보다.

= 조기숙 교수가 재직하고 있는 이화여대에서 시간강사하고 있는 수 많은 사람 중에 교수가 될 기회를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조기숙 교수와 같은 정규직 교수가 5만명 있고 시간강사가 6만명 있다. 지금의 구조에서 6만명 중 정규 교수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한국 대학의 재정상황이나 운영 방향으로 볼 때 많은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수 많은 시간강사들, 수 년 동안 시간강사 일을 해온 사람들, 상당 수는 정규 교수에 비해 능력이 좋고 업적이 좋은 사람들, 조기숙 선생이 만들고 싶은 사회에서는 이들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질 것인가, 그것부터 물어보고 싶다. 한국 교수들 참 이상하다. 시간강사 한 달 벌이는 100만원 될까 말까 하고 조기숙 선생같은 정규직의 급여는 잘은 몰라도 300~400만원은 될 것 같은데(*확실히 잘 모르는 것 같다), 전혀 그런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이 없다. 희귀한 사람들이다. 시간강사들이 주당 시수도 훨씬 높고, 시간강사들이 많은 수업을 해가면서 적은 돈을 받으니까 정규 교수들이 높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건데, 말하자면 자신들이 하급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는 건데, 이런 데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안 한다. 희귀한 사람들이다(*박노자의 '진지함'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 노무현 정부를 파시즘에 가까운 정부로 규정하는 사람도 있다.

= (노 대통령은) 그냥 '쇼맨'이다. 쇼맨인데, 이 쇼맨의 특기가 뭐냐하면 민중진영의 일부를 포섭해서 무력화하는 것이다. 한미FTA 계기가 돼서 더 이상 이런 쇼맨들이 특기를 발휘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파시즘은.... 원래 한국 우파의 기본 심성이 파시즘 아닌가. 노무현 대통령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그의 동반자, 정적들도 다르지 않다.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더하면 더하겠지. 파시즘은 한국 우파의 기본 정서다. 국내에서 실행되고 있는 상당수의 법안들은 유럽의 기준으로 보면 극우적이다. 이주노동자에 관한 법안 같은 것이 그렇다. 유럽 극우들이 꿈꾸고 있는 것이다. 

- 이번 대선을 어떻게 전망하나.

= 지금 같아선 극우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게 뻔해 보인다. (민주노동당이) 이를 막을 수는 없어도 제대로 저항해서 수 백만 표를 얻을 수 있다면 앞으로 극우 세력과 제대로 투쟁하면서 한국의 보수화를 제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민주노동당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담하다.

- 민주노동당의 가장 큰 문제가 뭔가.

= 당은 정파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닌데, 당 사업의 중심에 정파갈등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것들이 서있는 것 같이 보인다. 결국 이 갈등에 에너지가 소모되면서 당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 당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20~30대층, 학생이라는 미래의 노동자를 흡수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젊은 노동자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당의 문화 자체가 20-30대 위주가 아니지 않나. 80년대 운동권의 보수적이고 서열위계적인 문화가 강하다. 양성평등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경우도 많지 않나 싶다. 예컨데, 20대 여학생이 민주노동당을 친근하게 대하기 굉장히 힘든 구조다.

- 학생들은 민주노동당을 어떻게 보나.

= 40대 운동권 아저씨들이 거드름 피우는 곳으로 보는 것 같다(웃음). 80년대 운동권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얻어 작은 수령님 노릇하는 아저씨들의 놀이터, 이렇게 보는 시각이 있는 것 같다. 이래서는 성공 못한다. 당은 더 민주적이어야 하고, 미시적 문화도 젊은층과 여성 위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노르웨이 사회당이나 좌파를 보면 20대 국회의원도 있다. 민주노동당은 지도층이 40대 후반 아닌가.

- 다른 문제는.

= 당은 비정규직을 포획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당의 중심에 비정규직이 없다.

- 어떤 대안이 가능할까. 얼마 전 심상정 의원은 비정규직 지분을 높이기 위한 당원 가입 특례를 제안한 적이 있는데.

= 일리 있는 제안이라고 본다. 또 당 지도부를 뽑을 때 비정규직에 일정한 쿼터를 할당하는 것도 방법이다. 국회의원 후보를 뽑을 때도 여성 쿼터처럼 비정규직 쿼터를 주는 방안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비정규직이 당 사업의 중심으로 들어오기 힘들 것 같다. 비정규직의 투쟁이 있는 곳마다 민주노동당이 달려가 연대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기본일테고. 

- 당에 조언하고 싶은 게 있다면.

= 좀 이상하게 생각되는 게 있다. 그 이론을 받아들이진 않더라도 '다함께'라는 그룹의 활동 자체는 생산적인 것 같은데, 당내에서 그 분들에 대한 반감이 강한 이유가 뭔지 이해하기 힘들다. 개인적으로 '다함께'의 활동 가운데 마음에 드는 부분은 탈북자에 대한 태도다. 민중진영이 가장 신경 써야 할 대상인데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그들은 하고 있다. 북한 정권에 대한 태도나 미국의 이라크 침략 반대 등은 다함께 이데올로기에 찬성하지 않아도 충분히 동의가 될만한 활동인데, 왜 당에서는 '다함께'를 왕따시키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의 이론에 찬성을 하지 않는 것은 않는 것이고. 나만 해도 트로트키주의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아무튼 나름의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동지들인데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얼마 전 <레디앙>에서 정성진 교수의 책을 놓고 오간 논쟁도 그렇다. 물론 정 교수의 논리에 몇 가지 점에서 오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적대적으로 몰아세울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특히 기사의 댓글들에서 확인되는 '다함께'에 대한 적대감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 '다함께'는 섹트적이지만 내부 문화가 비교적 민주주의적이고 학생을 확보하는 능력도 좋다. 당이 '다함께'의 활동방식에서 배울 것도 많다고 본다.

- 당내 대선 경쟁은 관심 갖고 보나.

= 유심히 보고 있다. 대중적인 호소력이 제일 강한 사람이 선출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당은 대중성이 생명 아닌가. 나중에 그 사람의 정치노선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우선은 대중적인 호소력이 가장 강한 사람이 선출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07. 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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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0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0 20:16   좋아요 0 | URL
**님/ 파시즘과 스탈린이즘도 거부하기에 그에겐 '민중적 혁명'이 최선의 방책인 것이죠(그 혁명은 자발적인 봉기의 형식을 갖는 것인지 궁금하지만). 이 주장의 역설은 바로 그러한 혁명의 호기란 유럽과 같은 유연한 체제가 아니라 남북한 같은 파시즘/스탈린이즘 체제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 아닐까요? 하니, 우리에게 더 많은 억압을 달라!..

2007-04-10 2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0 21:57   좋아요 0 | URL
**님/ 그냥 단순한 논리입니다. 혁명은 관용적인 사회가 아닌 보다 억압적인 사회, 계급적인 각성과 사생결단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더 쉽게 일어나는 것이라는...

2007-04-10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4-10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동네에 있는 시립도서관에 갔다가 열람실에만 죽치고 있기에는 허전한 듯하여 대출카드를 다시 만들고 몇 권의 책을 대출했다(3권을 2주간 대여해준다). 그 중 하나가 전집판 니체의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책세상, 2005)이다. 번역본을 구입하지 않은 건 이미 청하출판사에서 나온 국역본과 영역본을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예전에 읽었던 책이라도 '새 번역'으로 또 어떨까 싶어서 대출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새 번역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는 역자가 반론을 제기한 바도 있었다. <비극의 탄생>을 다시 읽어보기 전에 그러한 논란부터 먼저 챙겨둔다. 교수신문에 게재된 박찬국 교수의 번역비평은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 재수록돼 있다.

교수신문(06. 01. 02) 고전번역비평-최고번역본을 찾아서(23)니체의 ‘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은 니체의 나이 불과 28세에 쓰인 처녀작으로 청년 니체의 열정과 고뇌를 강렬히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니체는 이에 대해 스스로 ‘청년의 용기와 우수(憂愁)가 가득한 책’이라고 평했다. 이 책에서 니체는 청년다운 대담함과 재기발랄함으로 그리스 비극의 기원과 본질에 대해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는 한편,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염세주의로부터의 탈출구를 그리스의 비극정신에서 찾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비극의 탄생’은 당시 그리스 비극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고전문헌학적 연구를 넘어서 삶과 세계의 본질과 고통 그리고 그것의 극복방안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탐구이기도 하다.

이 책에 대해 니체는 나중에 일정 거리를 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그리스 비극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니체 자신의 사상 전개 뿐 아니라 철학과 미학을 비롯한 인문학과 예술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니체의 저작들 중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못지않게 고전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입증하듯 국내에서 ‘비극의 탄생’ 번역본만 8종이나 나왔다. 이위범 역(양문사 刊, 1960), 김영철 역(휘문 刊, 1969), 이일철 역(정음사 刊, 1976 외), 김병옥 역(대양서적 刊, 1978 외), 박준택 역(박영사 刊, 1976), 곽복록 역(동서문화사 刊, 1978 외), 김대경 역(청하 刊, 1982), 성동호 역(홍신문화사 刊, 1989), 이진우 역(책세상 刊, 2005)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번역본 전부를 살펴볼 순 없다. 번역자들 중 철학전공자로서 니체사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박준택과 이진우를 제외하면 나머지 역자들은 주로 독문학(곽복록, 김대경)이나 심지어 영문학(이일철)을 전공했기에 일단 번역자로서 요구되는 전문성이 결여됐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이들 번역의 많은 곳에서 어렵잖게 오역과 부자연스러움을 발견하게 된다. 이 중 김대경 역은 1982년 이래 1997년까지만 해도 16쇄가 나왔을 정도로 가장 많이 읽히는 번역본이라 생각되기에 여기에선 박준택 역, 이진우 역, 김대경 역만을 살펴보겠다.

고전번역의 완전성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보다 원전에의 충실성과 가독성이라고 여겨진다. 이 두 기준에 입각해 우선 박준택 역과 이진우 역을 비교하겠지만, 지면관계상 본문의 첫째 문장 번역만 검토할 것이다. 본문의 첫 문장은 보통 번역자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이기에 이 문장에 비춰 우리는 번역의 전체적인 수준과 성격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원전에서 본문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Wir werden viel f?r die ?sthetische Wissenschaft gewonnen haben, wenn wir nicht nur zur logischen Einsicht, sondern zur unmittelbaren Sicherheit der Anschauung gekommen sind, daß die Fortentwicklung der Kunst an die Duplizit?t des Appolinischen und des Dionysischen gebunden ist: in ?hnlicher Weise, wie die Generation von der Zweiheit der Geschlechter, bei fortw?hrender Kampfe und nur periodisch eintretender Vers?hnung, abh?ngt.”

이 문장을 이진우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세대(世代)가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단지 주기적으로 화합하는 남성과 여성의 이중성에 의존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예술의 발전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논리적 통찰뿐만 아니라 직관의 직접적 확실성에 이른 상태라면, 우리는 미학을 위한 큰 소득을 얻게 될 것이다.”(이진우, 29쪽)

이 번역은 아무리 읽어도 그 의미가 분명히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면 이제 동일한 문장에 대한 박준택 역을 살펴보자. “만일 우리가 다음에 말하는 것을 머리만으로써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구체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된다면 미학(美學)에 크게 기여하는 바가 많으리라고 믿는다. 즉, 예술의 발전이라는 것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에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생식(生殖)이라는 것이 부단한 싸움 속에서도 단지 주기적으로 화해하는 남녀 양성(男女兩性)에 의존되어 있는 것과 흡사하다.”(박준택, 9쪽)

박준택 역은 일본 암파문고판의 번역을 그대로 옮긴 것이지만, 이진우 역에 비해 정확할 뿐 아니라 읽기에도 훨씬 자연스럽다. 이진우 역은 ‘세대가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다음에 쉼표를 찍음으로써 ‘지속적으로 투쟁하는’ 주체가 남성과 여성이 아닌 세대인 것으로 잘못 읽도록 오도하고 있다. 아울러 전체적인 문맥상 ‘세대’라는 번역어보다는 박준택이 택한 ‘생식’이라는 번역어가 더 적합하다고 여겨진다. 이진우 역에서 ‘논리적 통찰뿐만 아니라 직관의 확실성에 이른 상태라면’ 부분에서도 주어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 이 경우도 사람들은 ‘세대’가 주어인 것처럼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논리적 통찰뿐만 아니라 직관의 직접적 확실성에 이른 상태라면’은 지나친 직역으로 매우 부자연스런 번역이다.

니체 텍스트 본문의 첫 문장에 대한 박준택 역은 큰 문제는 없지만 원문을 굳이 의역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에서 의역을 했다. 가령 ‘머리만으로써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구체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된다면’은 원문에 보다 충실하게 ‘논리적으로 통찰할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확실하게 직관한다면’으로 해도 충분히 자연스럽다. ‘머리만으로써’라는 표현도 보통 쓰이지 않는 어색한 표현이다. 이 문장에 대한 번역 외에도 박준택 역에서는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러운 표현들이 눈에 띄는데, 이는 주로 암파문고판에 대한 중역에 가깝다는 데서 비롯된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박준택은 일일이 지적할 순 없지만 여러 곳에서 심각한 오역을 하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200쪽에서 박준택은 “…비극은 비극적 신화를 통해서 비극적 주인공이라는 인물의 모습을 빌어서, 디오니소스적 세계에의 탐욕적인 충동으로부터 우리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옮겼는데, 여기서 ‘디오니소스적 세계에의 탐욕적인 충동’ 부분은 오역이며 ‘개체적인 삶에 대한 탐욕스런 충동’으로 번역해야 한다. 심지어 박준택은 암파문고판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정작 암파문고판에서는 오역을 하지 않은 곳들에서도 오역을 범하고 있다.

첫째 문장의 김대경의 다음과 같은 번역은 가장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읽힌다. “예술의 발전은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관련이 있다. 이는 마치 생식이라는 것이 부단한 싸움 속에서도 단지 주기적으로 화합하는 남녀 양성에 의존되어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이 점을 단지 논리적 통찰로서 뿐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확실한 직관에 의해 알게 된다면, 이는 미학을 위하여 큰 소득이 될 것이다.”(37쪽)

전체적으로 볼 때도 세 번역본 중 그나마 김대경 역이 원전에 대한 충실성과 가독성면에서 가장 낫다고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경 역은 여러 곳에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오역을 범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그 예를 둘만 들겠다. 김대경 역 48쪽, 49쪽 등에서 보이는 ‘근원적인 한사람’이란 표현의 원문은 ‘der Ureine’로서 원래는 디오니소스적인 세계의지를 가리킨다. 따라서 김대경은 ‘근원적인 한사람’이 아니라 ‘근원적 일자’라고 번역했어야만 한다. 또한 120쪽의 ‘그 자체로서 부패하고 타락한 기독교적인 인간들의 사고방식’이라는 번역은 굳이 원문과 대조하지 않아도 오역이라는 게 분명하다. 이 부분은 ‘인간을 그 자체로 부패하고 타락한 것으로 보는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이 외에도 김대경 역에선 ‘탐욕적 충동’(130쪽)이나 ‘설득적으로 밀어닥치는’(130쪽) 등과 같이 일본역본을 글자 그대로 중역한 투의 문장들이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그리고 138쪽이 대표적인 경우지만 원문의 몇 줄을 번역하지 않고 있는 곳들이 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비극의 탄생’에 대해서는 그동안 8종의 역본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번역수준은 상당히 실망스럽다.(박찬국/ 서울대·현상학)

교수신문(06. 02. 01) 이진우 교수 번역, "의미파악 어려워"

‘출판저널’에 이번 2월부터 새롭게 연재되는 강대진 건국대 강사(고전그리스문학)의 번역비판 코너 ‘번역의 허와 실’에서 이진우 계명대 교수의 번역을 ‘문제번역’으로 삼고 나서 전공자들의 오역문제 심각성을 다시 한번 일깨우고 있다. ‘잔혹한 책읽기’(작은이야기 刊, 2004) 등을 통해 국내 고전번역에서 오역의 심각성을 제기해온 강 씨는 연재의 첫 회로 이진우 교수의 ‘니체저집 3: 유고(1870~1873년), 디오니소스적 세계관, 비극적 사유의 탄생 외’(책세상 刊, 2001)을 검토했다.

강 씨가 이 교수 번역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삼는 것은 ‘독일어 직역’이다. 즉, “번역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 가령, ‘소크라테스와 비극’이라는 니체 강연원고에 나오는 문장을 이진우 역은 “사람들은 아리스토파네스가 표현한 것처럼, 위대한 마지막 사자(死者)에 대한 동경을 느꼈습니다.”(33쪽)라고 옮겼다. 그런데 이 문장은 전체적으로 보자면, 희랍비극이 에우리피데스와 소크라테스 때문에 소멸했다고 주장하는 내용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서 “시인이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비평가인 에우리피데스가 소크라테스의 논리 중심주의를 따라 비극을 재조직한 결과, 원래의 비극은 죽어버리고 신희극만이 남겨졌다”라는 논지라고 강 씨는 덧붙인다. 따라서 “위대한 마지막 사자”는 “위대한 사람들 가운데 최근에 죽은 이”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는 게 강 씨의 지적이다.

“에우리피데스가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들>에서 물 치료법으로 비극예술을 쇠진하게 만들고 또 비극예술의 중압감을 약화시켰다는 공로를 자신에게 돌렸는데”(35쪽)라는 번역도 이해하기 어렵다. 강 씨는 이에 대해 “물 치료법으로 쇠진하게”는 “설사제를 먹여 체중을 줄인 것”이라는 뜻이라고 풀어놓는다. 이 외에도 “우리는 왜 그가 생시에 알량하게도 비극적 승리의 영광만을 얻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38쪽)도 고전문학 전공자가 보기에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해가 가지 않는 구절들이 많다는 것. 

사실 번역자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외국에 실력에 준하는 모국어 실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은 흔히 번역평가의 기준으로 ‘자연스러운 한국어 구사’를 문제 삼는다. 물론 직역의 원칙을 따를 경우 ‘번역어의 자연스러움’을 희생해야 할 경우들이 생기지만, 그런 경우라도 모국어로서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라면 번역의 의의는 퇴색할 수박에 없다.

이 교수의 번역이 이러한 문제점을 갖게 된 것은 사실 국내 번역자들의 공부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강 씨는 “왜 천병희 교수의 좋은 번역들이 나와 있는데 참고하지 않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데, 고전전공자의 번역을 현대독일철학 전공자가 참고하지 않는 것은 학자로서 그리 성실한 태도라 볼 수 없으며, 국내 학자의 번역성과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진우 역 중 “에우리피데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의 입을 빌려 아이스킬로스를 비난합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강 씨는 “개구리의 입을 빌려”라는 부분은 틀린 것으로 천 교수 역을 참조했더라면 오류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나타낸다.

그 외에도 이 교수의 번역에는 중요한 구절이 누락되거나 중요 단어들이 잘못 표기되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가령 복수의 여신인 에리뉘에스를 “에리스”(75쪽), “에레니메스”(110쪽)로, 아이스퀼로스도 “아르킬루스”(29쪽)로 잘못 옮겼다는 지적이다. “에폭푸테스”(137쪽)의 경우도 ‘추종자들’로 고치는 것이 낫다는 게 강 씨의 제안이다. 

사실 이진우 교수는 그동안 끊임없이 번역서를 내놓아 부지런함을 보여왔다. 하지만 최근 교수신문 ‘고전번역비평-최고 번역본을 찾아서 23: 니체의 ‘비극의 탄생’’편(제384호, 2005년 12월 26일자)에서 박찬국 서울대 교수(철학)에 의해 번역상의 오역과 부자연스러움 등이 제기되면서 문제가 된 바 있다. 그의 ‘니체전집 2: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책세상 刊, 2005)는 총 18종이나 되는 ‘비극의 탄생’ 번역 중 가장 최근 것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전공자로부터 후한 점수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20여년도 더 앞서 번역된 김대경의 ‘비극의 탄생’(청하 刊, 1982) 이 “원문에 가장 충실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읽힌다”라는 평가를 두고 학계에서는 “뜻밖이다”라는 반응들을 보였던 것. 박찬국 교수 역시 이진우 역에 대해 “아무리 읽어도 그 의미가 분명히 파악되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는데, 그만큼 한국어 구사에 문제는 이진우 번역의 가장 큰 약점으로 꼽히고 있다.

이진우 교수는 올해에도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뿐만 아니라 하버마스의 저서 한권도 번역해 내놓을 예정이다. 하지만 몇몇 학자들은 “이 교수의 번역에서 이러저러한 문제가 지적되고 있는 만큼 다른 전공자들의 번역과 더불어 이 교수의 번역도 전면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라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같은 게 아닐까?).(이은혜 기자)

교수신문(06. 02. 07) 어느 번역비평 기사에 대한 반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이처럼 간단명료하고 잔혹한 평가는 없을 것이다. 글이든 대화이든 무엇을 말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면,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파악의 어려움은 그 주제가 너무 어렵기 때문일 수도 있고, 글을 읽고 듣는 사람이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비평은 그것이 아무리 생산적이고 호의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글을 쓰는 사람에겐 정말 감내하기 힘든 혹평임에 틀림없다.

이 말은 종종 비평자의 권력의지를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는 진리를 논하는 학계에서도 이 말을 얼마나 자주 듣고 말하는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충돌하는 곳에서 어김없이 들리고, 자신의 영역을 조금이라도 벗어난 이론과 담론을 들을 때면 서슴없이 사용하는 말, 그것이 바로 이 간단한 한마디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이 말에는 종종, 설령 제압의 심리학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해의 거부’가 묻어 나온다.

최근 내 자신이 이런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그 시발점은 <니체전집 2: 비극의 탄생>에 대한 박찬국 서울대 교수의 비평이었다. 그는 첫 문장의 번역이 번역문 전체의 수준과 성격을 가늠케 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비극의 탄생>의 첫 문장을 박준택 역 그리고 김대경 역과 비교하면서 이렇게 간단히 평가한다. “이 번역은 아무리 읽어도 그 의미가 분명히 파악되지 않는다.” 첫 문장에 대한 나의 번역문이 다른 두 번역보다 명료하게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부인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번역과정에서 다른 번역본을 참조하였던 내가 왜 이렇게 번역하였을까. 번역할 때마다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 이 부분에서 많은 고민을 하였던 것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 의역을 해야 할까. 아니면 원전에 충실하게 직역을 해야 할까. 이 문장은 8행이나 되는 긴 가설법 문장이다. “예술의 발전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논리적 통찰에... 이른 상태라면, 우리는 미학을 위한 큰 소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자는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관련이 있다.”는 직설법의 번역문장을 선호한다. 나는 니체처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경우에는 원문에 충실한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원전에 충실하고 동시에 자연스럽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비판은 이중적이다. 생산적이고 동시에 파괴적이다. 첫 문장에 대한 박찬국 교수의 비평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도 부당하게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부분을 전체로 일반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가 정말 나의 번역 전체가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해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번역문을 원전에 대한 충실설과 가독성의 두 가지 척도로 평가한다. 원전에 충실하다보면 가독성이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김대경 역이 몇몇 오역에도 불구하고 “원전에 대한 충실성과 가독성 면에서 가장 낫다”고 판단함으로써 나의 번역이 마치 원전에도 충실하지 않은 것처럼 교묘하게 말하고 있다. 오역과 원전에 충실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지적해야 마땅할 것이다.

전체의 맥락으로부터 분리된 부분을 마치 전체인 것처럼 만든다면, 그것은 왜곡의 폭력이다. 교수신문은 박찬국 서울대 교수의 비평문에 “이진우 譯 의미파악 어려워”라는 표제어를 붙였다. 이렇게 뒤틀린 왜곡은 출판저널 2월호에 게재된 번역비평에 관한 기사에서 다시 한번 이루어졌다. 강대진의 “니체전집 완간의 기쁨과 몇 가지 아쉬움”이라는 글은 번역비평이 어떠해야하는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글쓰기이다. 그는 그리스 비극에 관한 니체의 글을 올바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고전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한다. 맞는 말이다. 그는 몇몇 군데 잘못 표기된 인명을 예리하게 집어낼 뿐만 아니라 그가 “더 좋은 번역, 더 나은 책 꾸밈새를 위해” 제안하고 있는 지적들은 실제로 주석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는 니체가 다루고 인용하는 그리스 고전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그의 글과 사상이 더욱 잘 이해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번역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당시에 고전 문헌학자들을 경악시켰던 그의 글들을 문헌학의 기준에 맞춰 번역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예를 들어 그는 “durch Wasserkur abgemergelt”를 “물 치료법으로 쇠진하게 만들고” 대신에 “설사제를 먹여 체중을 줄이고”로 풀이한다.

이와 관련된 아리스토파네스 <개구리>의 구절은 이렇다. “‘흰 무우’로 그것의 체중부터 줄이고 나서, 책에서 짜낸 잡담의 액즙을 주었지요.” 이 희극의 전체맥락을 알지 못한다면, 이 문장 자체의 뜻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흰 무우”가 당시 설사제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뜻이 명확한 “Wasserkur”를 “흰 무우” 또는 “설사제”로 번역해야 할까. 당시의 문헌학자들이 평한 것처럼 몽상적이고, 과장되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가 심한 그의 문체를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옳지 않을까? 아무튼, 번역을 “조금이라도 더 낫게 손질할” 수 있도록 지적해준 데 대해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교수신문은 이 비평에 대한 기사에서 비평자의 선의를 악의로 왜곡시킨다. 교수신문은 여기서 비평의 전체적 맥락을 무시한 채 나의 번역을 “문제번역”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매우 선정적인 표제어을 사용한다. “이진우 교수 번역,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처럼 분명한 말로 교수신문이 두 번씩이나 한 인격을 짓밟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비평에는 호의적 비평도 있고 악의적 비평도 있다. 이들의 비평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직역의 문제점을 조금 더 치열하게 고민하라는 주문일 것이다.

번역을 하면 할수록 번역이 어려워진다. 원문이 어려워도 번역은 쉬워야 되는가. 원문이 만연체라도 번역은 간결체여야 하는가. 난해한 하이데거를 이해하기 쉬운 야스퍼스로 만들고, 하버마스를 호르크하이머로 만들어야 하는가. 니체가 말한 것처럼 번역에는 뜻도 중요하지만 리듬, 호흡, 문체도 중요한 것인가. 간단히 말해, 번역은 반역인가? 교수신문의 기사가 아무리 부당하고 잔혹할지라도 이런 문제점을 일깨워준 데 대해 감사할 뿐이다.(이진우/ 계명대 철학과)

07. 04. 09.

Рождение трагедии/Die Geburt der Tragodie

P.S. 러시아에서는 최근 들어서 13권짜리 니체 전집이 새로 출간되는 등 '니체붐'이 일고 있다(실제 상황은 모르겠지만 옆에서 보기에 그렇다).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본 니체는 과거에 나온 2권짜리 전집과 함께 <비극의 탄생>(2001) 대역본 등인데, 이 대역본은 (당연한 말이지만) 독어-러시아어 텍스트가 나란히 배열돼 있다. 상세한 주석을 포함하고 있어서 분량이 736쪽이나 된다. 한국어로도 이만한 수준의 책을 읽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그 전에 전공자들도 찬탄할 만한 멋진 번역서가 먼저 출간되면 더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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